철학 논쟁 - 주제 : 자유의지, 처벌, 응분의 대가
대니얼 데닛.그레그 카루소 지음, 윤종은 옮김 / 책세상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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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 처벌, 응분의 대가를 논의의 중심으로 하는 두 철학 거장의 논쟁이다. 한 사람은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없다고 보는 자유의지 회의론자그레그 카루소(이하 카루소라 함)’이며, 인지 심리학자로 국내에 잘 알려진 대니얼 데닛(이하 데닛이라 함)’은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자유의지 양립가능론자이다. 사실 이렇게 단순 명쾌하게 논쟁자들의 신념을 범주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 논쟁의 첫 번째 주제인 자유의지조차도 하나의 의미로 정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 특히 관념적 언어의 경우 어쩌면 십인십색의 이해를 가지고 있다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는 이 두 논쟁자의 경우에는 언어의 해석과 정의의 문제에서부터 논증 내용의 작은 모순이나 흠결(欠缺)조차도 그저 넘길 수 없는 첨예한 논의의 대상이 되곤 한다. 3부로 구성되어 각 주제별 논의를 심화하고 있는데, 그 격렬함으로 인해 각자의 논증 중에 비웃음과 경멸, 모욕이 점잖음 속에 예리한 칼날처럼 상대의 심중을 헤집는다. 상대의 주장에 대한 빈정거림과 자기주장을 강변하는, 이를테면 내 견해는 뼛속까지 결과주의적이라는 식으로 혐오의 반론을 전개하기까지 한다.

 

사실 실질적 논쟁에서 두 토론자가 어떤 합치된 견해로 수렴하는 일은 결코 발생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책을 읽기 전부터 예견되었던 것이다. 자유의지의 존재를 굳건히 믿는 자가 자유의지가 없다고 설득되거나 그 반대의 상황이 발생하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일 게다. 책의 전체적 논지를 단순화하여 정리한다면 인간 개인의 도덕적 책임의 소유 여부에 따라 제도적 규범, 즉 법에 의한 단죄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격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판단도 분명 양분될 것이며, 이로부터 그 감상의 글도 전혀 다른 결과를 보일 터이다.

 

데닛의 주장은 과거의 사실과 자연법칙이 하나의 미래를 가져온다결정론자연, 사회, 환경에서 주어지는 자극에 합리적으로 반응하는 능력으로서 자유의지가 양립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카루소는 사람은 자유의지를 지니지 않거나 적어도 그 존재를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없으며, 행위자가 통제할 수 없는 인과적 결정인 결정론은 절대 양립 불가능하다는 강한 양립 불가능론을 주장한다. 이 논쟁의 초석적인 두 입장에서부터 자유의지에 대한 정의는 서로 다르다. 데닛은 대개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자극에 대한 합리적 반응의 주체로서 사람을 보는 것이며, 카루소는 기본적인 응분에 따른 칭찬과 비난, 보상과 처벌을 받기위해 갖춰야하는 행동 통제력을 자유의지로 보고 있다. 사실 개인의 도덕적 책임과 관련하여서는 카루소의 정의가 내겐 더 합리적으로 다가온다.

 

카루소의 정의를 지지하는 까닭은 이후 도덕책임의 발생과 관련한 결과주의와 계획주의 논의는 물론 사법제도와 형벌에 대한 정당성 문제를 거론하기 위해서는 응분행동 통제력

중대한 철학적, 윤리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데닛은 이 정의에 이의를 제기하는데, 응분과 통제력 개념을 거부하는 것이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목적으로 타당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겐 데닛이 도덕적 책임 부과에 대한 가장 악질적 이념인 응보주의라는 낙인을 사전에 회피하려는 것으로 의심을 갖게 했다. 응보주의란 오직 범죄자가 저지른 행동에만 관심을 지니는 응분의 책임이라는 처벌 정당화 이론이다. 이것은 미래의 좋은 결과를 극대화하거나 사회 안전 강화, 도덕적 교화를 통한 선()의 확대는 무시하고 응분에 따른 처벌만을 주장한다. 이러한 의심은 카루소도 데닛으로부터 거듭 발견하게 되는데, 완화하여 준()응보주의자가 아니냐고 확인하지만 데닛은 이에대해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표시한다.

 

데닛은 모든 인간은 자신의 판단과 분별력이 침해되거나 조작되지 않도록 주의할 책임을 져야하며, 이것은 성장 과정에서 충분히 자질을 배양하여 마땅한 도덕적 책임을 지는 인간이 되어야 하며, 또한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신의 한 행위에 대해서는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하며, 사회적 합의라는 계약주의에 의해 성립된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응보주의에 근접한 논리로 보이지만 데닛은 이를 부정한다. 이것은 결과주의라는 회고적 비난과 처벌의 개념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지 응보주의에 의한 주장이 아니며, 더구나 긍정적 부가 효과 없이 처벌하는 응보주의와 달리 자신은 범죄자의 긍정적 개정을 상정하고 있으므로 같지 않다는 것이다.

 

운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킨다.” -39

 

카루소는 데닛의 이러한 주장, 즉 주체적인 사람은 자신이 한 일에 마땅히 책임을 져야한다는 논리를 거부한다. 모든 인간은 구성적 운현재적 운에 지배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구성적 운이란 어떤 가정에 태어날지, 어떤 장점과 재능, 성향, 신체적 특성을 타고날지 알 수 없는 운을 의미하며, 현재적 운이란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간주되는 행동이나 결정을 할 때 행위자의 기분, 우연히 든 생각, 주변 환경의 상황적 특성 등에 영향을 받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행위를 선택 결정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개체마다의 불평등성에 기초하여 인간 개체에게 도덕적 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부당하며, 따라서 이는 도덕적 책임이 들어설 자리를 허물어뜨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카루소 주장의 배경에는 운에 의해 조성된 인간 개체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기초하여 응분이라는 도덕적 책임을 씌워 징벌을 정당화하는 것과, 인간을 가혹하게 모욕하는 방식으로 다루고 그 불평등을 항구화하는 일을 합리화시키는 것 아니냐는 반박의 논리가 있다. 이에 더해 카루소는 당신이 성공을 거두었다면 당신은 혼자 힘으로 그 자리까지 오른 게 아닙니다.”고 하는데, 데닛은 이 발언이 위협적이라고 비난한다(60). 여기서 두 논쟁자의 신념의 커다란 차이를 목격하게 된다. 공정성을 주제로 담론계를 달궜던 능력주의에 대한 불평등성의 문제에서 데닛은 능력주의가 대체 무슨 문제란 말인가를 대변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논쟁점을 모두 거론하는 것은 감상문의 목적도 아니기에 가장 치열한 논쟁 부분인 처벌과 도덕, 응분의 대가와 관련한 논의에 대한 소감으로 맺어야 할 것 같다. 아마 이것을 이렇게 정리해도 될 것 같다. 동일한 인간의 동일 범죄에 대한 처분, 격리와 감금의 좁혀지지 않는 차이의 논쟁이라고. 카루소는 기본적 응분이라는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 자유의지회의론에 기초한 공중보건격리모형을 제시하며, 자유의지 없이도 사회의 도덕적 질서 유지와 안전, 나아가 선의 지향이 가능함을 역설한다. 이 모형의 주요 내용은 기본적 응분에 따른 도덕적 책임부과는 있을 수 없으며, 전염병 보균자가 병에 걸린 것이 걸린 자의 책임으로 물을 수 없듯 범죄자 또한 기본적 응분에 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토대위에 피해 예방 차원으로 범죄자를 무력화하는 일과 격리는 정당한 것이며, 이를 시행할 때 사회 안전을 지키기 위한 침해원칙을 준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갱생과 사회복귀에 초점을 맞춘 격리 등과 같은 무력화 방법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응분이라는 관념이 형사사법제도의 과도한 징벌성을 정당화하여 불평등에 기초하여 인간을 고통에 빠뜨리는 오늘의 처벌 체계에 대한 전면적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데닛은 이러한 카루소의 근본적 열망은 적극 지지하지만, 인도적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처벌이 필요하다고 현실의 실제성을 들어 반대한다.

 

특히 범죄 행위가 없음에도 사회일원에게 일종의 도덕적 엄벌의 경고를 위해 강력한 징벌을 가해도 된다는 결과주의적 이론을 데닛은 강력하게 주장하며,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이용한들 무엇이 문제냐고 항변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효용을 위해 인간을 수단으로 이용하여 범죄를 억제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주장이며, 여기에는 도덕이란 사회적 활동의 산물이며, 인류의 오랜 문명적 진화에 의한 위대한 발명의 설득의 장이라는 제도적 수호를 위한 당위성이라는 배경이 있다.

 

데닛은 사회의 안정적 질서의 존속을 위해 점진적인 형사 사법제도, 즉 처벌의 형식에 대한 개선을 주장한다. 또한 처벌이 없는 공중보건격리모형에 의한 격리와 무력화 제도에 반대하며 공상적인 유토피아에 불과한 헛소리라고 경멸한다. 반면 카루소의 주장에는 인간 존재에 내재된 불평등성을 불식시키기 위한 집요한 노력이 있다. 그는 개인적 요인보다는 사회 구조적 요인을 중시하며, 인간에 대한 도덕적 신뢰가 바탕을 이루고 있는데, 데닛은 이를 거부하는 것이다.

 

사실 인류의 모든 도덕적 규범이나 정치 제도는 끊임없이 변화되어 온 것이다. 19세기에 여성 참정권을 주장하고 노예 해방을 주장하는 사람은 급진적 이상주의자로 내몰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도덕적 질서일 뿐이다. 무엇이든 기존 질서에 변화를 요구하면 그 낯섦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항과 부정, 혐오의 시선을 보내곤 한다. 18세기까지 도심의 한복판에서 죄수의 목을 공개적으로 자르는 것이 하등 도덕적 문제가 아니었지만 오늘날 국가가 이러한 행위를 한다면 그 야만적 퇴행행위에 대한 비난을 버텨내기 어려울 것이다.

 

도덕적 이상주의라거나 현실적 실현 가능성이 없다거나, 사람들이 강제 없이도 국가의 지시만으로 자율적으로 격리를 지킬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오류일 수도 있다. 한국 사회의 경우 대다수의 시민은 스스로 자가 격리에 임했으며, 불응자의 경우 적절한 전향적 무력화의 행사를 한 사례가 있듯이 극한적 개인주의화된 서구사회의 모델에 경도되어 수구적인 가치에 구태여 집착할 이유는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물론 두 논쟁자 어느 한 쪽의 견해가 모두 옳지 않거나 옳은 것은 아니다. 반드시 자유의지의 존재 유무를 판단치 않아도 도덕적 책임과 그에 대한 처리는 결정론이나 비결정론적 회의주의든 모순 없이 수행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데닛의 제도 수호론적 주장의 일부를 참조하여 카루소의 이상적 신념을 위한 개혁이 우리 인류의 바람직한 도덕 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논쟁이 격화될수록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 '그게아니라(rathering)'의 기만이라는 둥 논증을 벗어나는 비난과 상대 의견을 격하시키려는 수사법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러한 생동감있는 논쟁의 현실성이 독자를 그 격전장으로 몰입케 하여 어느 한 쪽의 입장에 서게 하지만, 논쟁자들의 사유와 논거로부터 발견하게 되는 도덕적, 정치적, 윤리적 지식들은 실로 많은 삶의 유익을 제공한다. 단지 철학적 논쟁을 담아낸 책으로 대하기보다는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어떻게 모든 구성원이 함께 행복을 증진시키고 차별없는 평평한 세계를 만들어 낼지를 생각하는 모처럼의 흐뭇한 자기 충전의 기회가 되어 주는 간결 명쾌하면서도 전문성을 지닌 윤리학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가히 진짜배기 논쟁의 정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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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파괴할 힘
이경희 지음 / 다산책방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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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23...소셜 네트워크의 이용에 능숙한, 즉 자신들의 행위를 이벤트화하여 무릇 무심한 대중의 시선을 모으는 데 익숙한 발랄함과 패기를 차용하여 던적스런 세상의 변화를 시도하는, 일견 1968년의 혁명을 잇는 언뜻 무모해 보이지만 인류의 새로운 삶의 설계를 위해 결코 회피할 수 없는 걸음의 의미를 펼쳐내고 있다.

 

그렇다, 이 소설은 보통의 인간들이 지니지 못한 능력을 지닌 이들을 중심으로 소외된 인간들이 펼쳐내는 혁명의 이야기다. 그것은 제목처럼 모두를 파괴하는 힘의 실현으로서 세상을 파괴할 힘이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진 세계, 그러기 위해서 부와 권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너희들도 전부 잃어봐야 이해할 것인지를 묻는, 혁명의 시간이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그 목소리는 열 번을 실패해도 열한 번의 실패를 기다리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저 한 걸음의 행보일지언정 그 속에서 작은 변화가 하나씩 이루어짐을 발견하는 희망의 전언이다.

 

계속 발버둥 쳐. 너희의 세상을 만날 때까지 몇 번이고 부딪치고 또 부딪쳐 (....) 언젠가 세상은 달라질 거야. 달라질 수 있어.” - 288쪽에서

 

아주 묵직한 진리의 메시지가 울려 퍼진다. 전개되는 혁명의 주체들이 겪게 되는 온갖 기만들과 모순, 이기심을 부양하는 무지(無知), 무사유(無思惟)에 터 잡은 맹목적 믿음, 탐욕과 악의가 가득한 세계가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세상은 원래 불합리하고 고통스러우며, 아무리 노력해도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그럼에도 조금 다르게 세상을 보게되면 세상의 접힌 뒷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밀어넣는 이 세상을 멈춰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상상하고 그 실천적 사유를 함께 해보는 여정이 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접하는 혁명의 현실은 우리네가 얼마나 견고한 인류의 악과 대적해야 하는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것은 아마 다음의 문장과 같을 것이다. 이 오랜 인간의 악의가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것을 내어 줄 것이라 여기지 말라는 주문이기도 할 것이다.

 

인간성의 가장 깊은 밑바닥 아래에 얼마나 참혹한 폭력들이 파묻혀 있는지를, 수만 년의 역사를 거치며 악의를 가다듬어온 인류는 (...) 도덕 밑에 은밀히 파묻어 후세에 대물림하기를 반복해왔다.” -243쪽에서

 

소설 속 주인공들은 데비안트(Deviant)라는 범주화 된, 사전에는 ‘~에서 벗어난의 의미를 가진 재능의 소유자들이다. 이들은 사람간의 심리적 연결능력인 텔레파스, 공간을 뛰어넘고 군사적, 산업적 물질과 함께 이동할 수 있는 점퍼, 일종의 염력으로 물체에 의도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키넨시스, 그리고 투시능력으로서 세상을 모든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는 보이안트라는 네 가지 능력을 각기 발휘하는 보통의 인간들과는 다른 능력이 발현된다.

 

이들의 변이된 능력은 핵물질에 피폭된 인간들 중에서 발현되는, 즉 인간사회의 무지와 악의에 의해 피해를 입은 소외된 존재들이다. 사회는 자신들과 다른 이들 데비안트를 격리, 차별하면서도 자신들의 안보상 무기로 활용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한다. 정상적 교육은 물론 대학에 진학할 수 도 없으며, 직업을 가질 수도, 인간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데 온갖 제약을 받는다. 시간적 배경은 2036년을 전후한 근()미래다.

 

각 국가들은 데비안트인 소년 소녀들을 격리된 섬에 가두어 육성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육이라기보다는 강요된 규율의 주입과 먹지 못할 음식으로 연명시키는 극악의 장소이다. 그리곤 이들에게 데비안트의 발현 능력에 따른 등급을 부여하고 고착화시킨 후 서열화하여 시기와 질투로 구성원 내 격렬한 경쟁을 가속화시켜 끔찍한 지옥의 환경을 조성한다. 텔레파스 능력을 지닌 10대 소녀 신화경은 데비안트들의 차별이라는 결코 변하지 않으려는 절벽같은 세상에 변화의 희망을 당기기 위해 분신자살하는 어머니의 희생 뉴스를 보게 되고, 기성 질서에 저항을 실천하는 동갑내기 데비안트 조유영과 우정을 쌓게 된다.


 



파리, 홍콩 등지가 기성 질서에 저항하여 새로운 세계, 변화를 향한 소외된 이들의 투쟁지로 등장하는 것은 아마 작품에 현실감을 부여하려는 작가의 의도였을 것이다. 68혁명과 홍콩 시민의 민주화 운동, 그리고 1871년 파리 민중들과 노동자가 부패한 권력에 대항하여 자율적 시민정부를 수립하였던 파리코뮌의 정신은 이 소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다. 그래서 신화경, 조유영을 비롯한 키넨시스인 레이리, 보이안트인 하태빈, 그리고 국제원자력기구인 IAEA에 데비안트를 추가하여 국제적 규제질서의 범위에 포함시킨 IAEDA의 스파이인 (소셜 네트워크 닉네임 PD)’, 5명은  3 파리 코뮌이 활동하는 파리를 향한 장정에 오른다.

 

소설의 중심인물인 신화경은 허브로 불리는 델레파스 능력의 소유자이자, 무수한 사람들의 심리적 연결로 무의식적 통제와 교감을 할 수 있는 슈퍼 데비안트 급 텔레파스로서, 그녀의 의도 여하와 무관하게 사람들은 그녀의 심상에 매료됨으로써 데비안트의 자연적 리더로 추대된다. 4부 구성에서 2혁민이들, 3예카테린부르크는 이들 5인이 서울 발 파리 행 열차를 타고 가면서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혁명의 불씨를 지피고, 마침내 변하지 않는 세상을 멈춰 세워 새로운 세계로의 혁명을 시작하는 예카테린부르크 역을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와 혁명아들의 절박한 투쟁의 장면들을 담고 있다. 데비안트와 그 밖의 소외된 이들로 운집한 10만 명이 넘는 인간들, 이들의 활동은 생생한 화면에 담겨 소셜 페이지를 실시간으로 장식하고 세계 인구의 절반은 이를 게걸스럽게 탐닉한다.

 

혁명을 위해 모여든 데비안트를 비롯한 엄청난 인간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사상 유례없는 스펙터클로서 안방에서 해시태그나 다는 인간들에게 기막힌 엔터테인먼트로 소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질서를 지배하는 기득 권력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혁명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동력이다. 사실 우리네 삶의 거의 모든 현상이 이러한 모순 속에서 진행되고 있을 터이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인식되지 않는 그 터무니없는 것이 양립하고 있다.

 

혁민이들(혁명하는 민들레들)이 예카테린부르크 역에서 혁명운동을 시작하는 시기가 2036년인 것은 68혁명이 일어난 지 68년이 되는 해라는 것은 상징적이다. 68혁명의 주체랄 수 있는 기 드보르의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일명 제4 인터내셔널)이 스펙타클이라는 온통 쇼로 둔갑한 거짓된 오늘의 세계인 온실 속에 갇혀 지내며 자신이 갇힌 줄 모르는 현대사회의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상처를 내 돌아보게 하려 했던 것을 승계하는 혁명임을 말하려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들 수 십 만 명에 달하는 혁명군중, 특히 미사일 발사 체계조차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데비안트들과 이들을 연결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텔레파스 능력자인 화경의 행동에 위협을 느낀 각국을 대표한 IAEDA는 협상을 요구하고 대표자를 파견한다. 협상을 위한 혁명군중 집단들의 안건을 모으기 위한 과정은 아마 인간의 너절한 이기심의 전시장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묘사되고 있는데, 수긍의 머리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모두가 다른 방식으로 혁명을 바로보고 있었다. (...) 사람들은 각자 다른 세상을 산다. (...) 요구는 끝이 없었고 자신의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 자존심뿐인 헛똑똑이들은 사소한 문구 하나하나를 물고 늘어지면서  끝도 없이 논의의 초점을 흔들어댔다.”

- 250, 327쪽 등에서 부분인용

 

100명이 100가지 주장을 하며, 협상 안건에서 거절되었을 때 혁명의 대표자를 향한 그 거침없는 야유와 비아냥, 조롱, 멸시, 혐오와 증오는 오늘의 인간 세계가 왜 이처럼 어리석고 못났는지의 반면교사일 것이다. 서로 발목을 잡고 있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세계, 결국 정의가 힘이 아니라 힘이 정의가 될 수밖에 없는 세계를 인간들 스스로가 만들어내고 있음의 비판일 것이다.

 

92일간의 혁명 군중의 동력은 협상이 지연되는 만큼 분열과 반목, 그리고 이탈이 시작되기 시작한다. 지도자 없는 혁명을 실천하는 화경은 현실과 이상, 실현과 배제의 길목을 굳건히 지키고 세상의 변화를 위한 시도에서 뒷걸음치지 않는다. 우린 너도 나도 세상이 잘못 됐다는 주장에는 흔쾌히 공감한다. 그러나 해결하여야 할 문제와 마주하면 그야말로 십인십색이다. 어떤 정책안이 수립되어 제시되면 결과를 놓고 모두들 자신의 한 마디를 얹으며 쉽사리 품평하고 조롱하기 일쑤다. 아마 소셜 미디어의 타임라인을 보면 파리 떼처럼 모여들어 헤아릴 새도 없이 빠르게 복제되는 냉혹한 손가락들이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잡아당기는(369)” 꼴을 보지 않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혁명을 좌절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살포되는 가짜정보가 진실을 덮는 장면은 오히려 현실보다 순수하기까지 하다. 지금의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정부가 들어서기 전인 지난 5년간 조중동 등 황색 매체들의 행태는 이것을 훨씬 넘어서는 파렴치하고 저열한 것들이었다. 소설은 이렇게 쓰고 있다. 조금씩 우습고 혐오스러운 존재로 격하시킨다. 분란을 조장하고 명분을 쌓으려는 목적, 그리고 무지한 우민들에게 전투 의지를 불사르기 위해서, 마치 정의로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라며, 적은 악당이라고 (448)” 자신들의 기득권 집단을 지키기 위해 못할 것이 없는 것이다.

 

소설의 1부와 4부는 혁명 군중을 공격하는 지배권력의 무참한 살생의 현장을 피해 그 많은 데비안트들 중 고작 5명의 생존자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조한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벗어나 달에 불시착해서 벌어지는 생사의 기만적인 에피소들이 전개된다. 화경을 살해하려는 IAEDA의 스파이, 새로운 변화의 혁명을 시작, 지속시키기 위해 화경을 보호하려는 존재들이 벌이는 최후의 싸움, 그리고 핵폭탄이 날아가고 허물어져 가는 세계를 바라보며 증오를 담아 중얼거리는 혁명이 다시금 시작된다.

 

, 이제 눈을 떠. 혁명의 시간이 다가왔어!” 이 마지막 문장은 누구를 향해 발화되고 있는 것이겠는가! 이 소설은 본문이 끝나고 에필로그와 책의 가장 끝에 있는 쿠키까지 모두 꼼꼼히 읽어야 작품의 전모가 규명되는 작품이다. 이 세상을, 우리 인간을, 군중을 이해하고, 혁명의 실천을 강렬한 생동감과 함께 지적으로 지펴낸 바로 오늘의 초상일 것이다. 만일 모두가 평등하게 핵폭탄을 지니고 있다면 힘이 정의인 세계가 정의가 힘인 세계로 바뀌지 않겠냐는 작가의 말은 결코 예사스럽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능력주의를 공정이라 주장하는 자들은 이 작품을 읽지 말라. 만일 읽게 되면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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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취향 채석장 시리즈
아를레트 파르주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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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쓰기는 인류의 발명 이래 고귀한 문명의 장치로서 인간 역사의 부조리를 끊어내기 위한 공분의 기록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처럼 끊임없이 삶의 현장으로 소환하여 현실 개선과 미래기획의 통찰로서 그 기능을 다하려는 노력이 지속되었음에도 집요하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의미로 왜곡, 장악하려는 세력의 시도 또한 그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를테면 아우슈비츠의 끔찍한 가스실은 실재하는 입증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럼에도 특정 자료의 왜곡 배치를 통하여 가스실이라는 것은 존재한 적이 없다는 식의 역사를 쓰는 자도 있다.  고통과 죽음의 실재성을 제거하여 자신들의 도덕적 결함 없음을 퍼뜨리려는 악의적 역사가가 버젓이 활개치는 것 역시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에 프랑스는 1990년  "반인도적 존재의 규모와 회의를 표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122, 주석22)"하는 게이소(Loi Gayssot을 통과시켜 문화공동체의 기억을 왜곡시키는 역사 쓰기를 엄단하기 시작했다.

 

한국사회의 역사 쓰기 또한 이와 결코 다르지 않다. 자료의 출처와 해석, 그리고 그 배치를 자의적으로 배열하여 공동체의 기억을 방해, 훼손시키려는 자들이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실을 일그러뜨리고 더럽히면서 관련 사실을 기만적으로 이용하려는 역사 쓰기가 아니기 위해서는 역사는 어떻게 기술 될 수 있어야 하는가? 아카이브 취향이라는 이 작지만 밀도 높은 에세이는 바로 이러한 선택과 배제의 자의성에 의한 함정과 유혹의 벗어나기로부터 해석틀의 조건에 이르는 진정한 역사 쓰기를 성찰하고 있다.

 

"역사를 써야 하는 이유는 죽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은 과거를 이야기할 어법을 찾아내 '살아있는 존재들 사이의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152

 

세월의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는, 누군가가 읽을 것을 전제로 하여 써지지 않은 채 저장되어있는 18세기 형사사건의 고발장, 재판 기록, 심문 기록, 수사기록, 판결문 등 자료 한 장 한 장을 읽고 필사하며 질문하고, 해석틀을 만들어 좀처럼 역사 언어의 조명을 받을 일 없었던 존재들의 언어에 숨결을 불어넣는 역사 작업자의 충실한 역사 서술의 이야기이다.

 

또한 지배 담론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암살당했던 실재'를 규명하는 작업이며, 특히 공권력에 의해 강제된 진술에 의해 강요되어 끌려나온, 역사의 고려 대상이 된 적 없던 사람들의 파편화된 답변들이라는 실재로부터 의미와 특정 형상을 해독해내는 역사 기술자의 세부적 작업 방식에 대한 일종의 메타 역사서이기도 하다.

 

형사사건 아카이브는 그 자체로는 실재하지만 가공되지 않은 흔적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의 무수한 흔적에서 한 번도 역사의 대상이었던 적이 없던 존재들의 삶과 운명을 좌우하던 세계의 특정한 형상을 해독해내는 작업에는 실로 엄청난 곡해와 왜곡의 함정과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  이에 더해 연구 영역이나 방향의 선택과 배제가 야기하는 애초에 결여된 역사 쓰기를 할 수 도 있다.  예로서 일상생활과 감정 구조에 주목하여 여성의 역사를 쓰기로 한 역사가가 마르크스의 관점을 배제하기로 하였다고 할 때 여성사에서 계급적 차이에 관한 논의가 빠진 총체적 사회의 역사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특정한 타자들을 배제하는 날조된 역사가 되고 만다는 점이다.




 

"역사를 쓰는 일은 불화의 확인 조서를 작성하는 일이다." - 61

 

지배 계급의 당위성을 주장하려는 의도를 지닌 역사 쓰기의 경우 대중의 반감이나 저항과 같은 권력 관계의 충돌을 외면한다.  역사의 흐름을 왜곡 수정하여 항시 지배 엘리트 계급의 절대 사회가 당연했던 것으로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역사는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충돌은 역사가 생기는 장소이며, 이 충돌을 성찰의 동력으로 삼는 역사가 될 때   "인간의 비사회적 관계", 즉 인간의 그늘진 측면, 불화와 비극적 충동의 실재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카이브라는 날 것의 자료를 읽고 필사하는 인내의 작업 속에서  "기존 형태의 자료를 재활용, 재조립하여 실재를 다른 방식으로 서사화할 가능성을 타진하는 작업(81)"'껍질 벗기기(depouiller)'라 부른다.  그리곤 비슷한 내용으로 모으거나 특별한 것을 분리하기도 한다. 또는 자료축적을 통해 어떤 형태 속에서 디테일을 연구할 수 있으며, 실재를 향한 특정 시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도박범의 죄를 연구하다가 경찰과 유흥계, 귀족층과 금융업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게 될 수도 있으며, 가난과 고통의 문제로 확대되기도 한다. 역사적 사료의 선택과 연구 영역의 설정은 동질적 자료들의 수집으로 시작되어 연결 목표로 이어지기도 하며, 때론 이질적인 것에서 촉지각을 깨우는 선물같은 사료를 접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카이브와의 거리를 상실하는, 흘러넘치는 삶을 이야기하는 문장들에 몰입하다보면 아카이브에게 질문하는 법을 잃어버리는 함정에 빠지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여기서 우려해야 할 것은 역사가 자신이 세워놓은 가설을 뒷받침해줄 것들에만 주목하는  '동일화(Identofication)'에 빠져 가설을 반박하는 자료나 아예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여 상상력과 사고력이 마비되어 터무니없는 역사가 출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역사가는 자칫 아카이브를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 삼을 우려가 상존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아카이브가 연구 테마에 넘치도록 정보를 내줄 때가 있어 그대로 역사책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아카이브의 사본에 불과한 무미건조한 역사가 되고 만다고 지적한다. 비평이라는 체에 걸러지지 않은 실증주의적 주석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냐고 재검토, 비평의 거리가 요구됨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 과정이 오늘 첨예한 역사적 갈등을 야기하는 지점이 아닐까를 생각게 된다. 인용은 결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찾은 인용문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인용문을 찾는 것은 거의 항상 가능하다(94)"는 것이다.

 

"역사는 아카이브 베끼기가 아니다. 역사를 염두에 두면서 아카이브를 철거하는 것,

아카이브 앞에서 불안을 감추지 않는 것이다." -95

 

아카이브에서 선택한 것에 머물고 싶은 충동, 골라낸 것들을 하나로 엮고 싶은 마음, 픽션을 쓰고 싶은 마음에 포획되기 일쑤란다. 안다고 해서 피해지지는 것도 아니기에 아카이브에 집어 넣은 상황들, 상황을 둘러싼 일상의 어둠을 정밀하게 세공하는 작업을 위해서 역사가의 자기 경계는 세계에 대한 책임자로서의 역사가로서 절대 필요의 태도일 것이다.

 

"역사는 대립과 충돌의 결과를 공평하게 정리한 이야기가 아니다. 상호 이질적인 

논리들의 충돌 속에서 드러나는 실재의 불균질함을 감당하는 일이 역사다." -106

 

형사 사건 아카이브는 다른 어떤 아카이브보다 복잡한 담론을 휘두르는 공권력에 저항하는 보통 사람들의 운명을 두드러지게 드러내준다. 애써 짓누르려는 힘, 이를 떨치고 일어나려는 힘의 갈등과 대립의 이야기, 그리고 이들 진술 문장의 이면에서 말하고 있는 개인적, 사회적 전략들이 숨 쉬고 있다. 역사가의 해석틀이란 바로 이러한 것들을 현재의 가치 기준에 따라 재해석하는 관점이다. 역사가는 바로 이러한 자료들을 어떻게 읽었는지, 어떻게 선택하고 분류했는지 그 해석틀을 설명하여야 한다. 이를 투명하게 설명하지 않거나 못하는 역사 쓰기는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실이 좌초해 있는 아카이브의 베일을 찢고 앎의 불투명을 해쳐내어 가려져 있던 것을 드러내는 역사 쓰기의 과정을 세밀화로 그려낸 이 책은 지혜와 논리 사이, 감정과 혼란 사이에 난 좁은 길을 역사가가 어떻게 모색해야 하는 가에 대한 고귀한 사유이다. 실재하는 아카이브를 현재의 실재로 재배치하여 삶의 새로운 관계를 이해하고 포착하며 규명하는 역사 쓰기 작업에 대한 재치와 진지함이 어우러진 농축된 메타 역사 에세이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을 한 단계 성숙시켜 주는 책이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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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 2022-07-23 19: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표지만 봤을때는 밀도있는 책일거라 생각못했는데 필리아님 덕분에 기대되는 책이 생겼네요 ^^ 잘 읽었습니다

필리아 2022-07-23 19:39   좋아요 2 | URL
책은 저자의 도서관 자료 열람과 관련한 지극히 사적인 인상들과 역사 쓰기에 대한 신념을 교차하면서 짐짓 진지함의 무게를 덜어내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에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예상치 못했던 작지만 쏠쏠한 배움이 있는 책이었답니다. 등대지기님, 댓글 감사드립니다. 유쾌한 주말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7-23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을 듯요.♡

필리아 2022-07-24 08:57   좋아요 0 | URL
역사가는 자신의 해석틀을 밝혀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남네요, 고맙습니다~
 
저만치 혼자서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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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절망을 말하기는 쉽고 희망을 설정하는 일은 늘 어렵다.”

- 작가의 말에서, 253

 


이 소설집 전편에 흐르는 시선은 삶의 신산함과 생명에 대한 서글픈 연민과 애도로 다가온다, 그것은 국가권력에 의한 무력한 소시민의 생의 박탈(명태와 고래)로도 출현하고, 소위 타자와 함께라는 공동체의 연대를 부르짖는 사회이지만 물질이 매개되지 않는 관계는 결코 타자를 품지 못하는 존재들의 세상임(대장내시경 검사)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어쩌지 못하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숙연함, 삶의 해체와 소멸의 필연성에 대한 겸허한 기도이기도 하다.

 


이젠 점점 사라지는 인간 노동의 일자리는 고작 공무원이라는 한정된 정기적 채용의 입구 밖에 없을 정도로 청년들의 삶의 미래를 옥죈다. 권력을 움켜쥐자 자신의 인맥들을 국가 공무원에 버젓이 밀어넣고는 고작 9급인데 뭐가 문제냐며 오히려 국민을 향해 악다구니를 부리는 무지와 무감각의 파렴치한 망언이 나오기까지 한다. 단편 영자구준생(9급 준비생의 약어)’으로 불리는 노량진 고시텔에서 오매불망 9급이든 10급이든 붙으려 모여든 자기착취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비애어린 삶을 묘사하고 있다.

 


지방대학을 싸잡아 비하하는, 혹은 자조하는 지잡대(地雜大)’생의 고달픈 일상을 쫓아가는 것은 이 사회가 어떤 구조로 유지되는가의 한 단면일 것이다. 식당 아르바이트로 고시텔의 관리비를 조달하며 싸구려 컵 밥에 주린 배를 채워가는 9급 재수, 삼수생들의 삶을 이 정권, 이 사회체제,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이 알고 있기나 한지 모를 일이다.

 


소설집을 시작하는 단편 명태와 고래에서부터 , 저녁 내기 장기, 영자, 48 GOP는 등장인물들에서 어떤 연결고리같은 것이 느껴진다. 남과 북의 전쟁이라는 국가 폭력 사태의 오롯한 피해자인 소시민이 겪는 권력의 희생양 찾기의 제물이 되어 가족과 재산의 파괴와 분열은 물론 14년의 옥사를 겪어내야 했던, 한 인간의 삶을 앗아간 공권력의 무참함이 시리도록 그려진다. 수감되기 전의 어둠과 바람에 몰려 조업 중 군사분계선 북쪽으로 불가항력으로 흘러들어간 것이 그의 죄다. 빨갱이 낙인찍기의 무지한 사회에서 아내와 딸은 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어쩌면 단편 의 주인공 여성이 그의 딸인 것만 같다.

 


물론 의 주인공은 남해안 작은 항구 도시 출신이니 동해안 포구와는 인연이 없다. 다만, 여자는 자신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고향 선후배 사이의 남편과 사이에 10살 남자아이를 두었을 때 이혼했다. 어느 날 경찰서로부터 아이의 범죄 판결에 따른 참고인 호출을 받는다. 성폭행, 특수강간 죄목으로 군사재판에 넘겨진 자신의 아이.

 


참고인 진술 과정 중 피해자의 아버지와 우연히 자리를 같이하게 되고. 남자의 투박한 손을 본다. 남자는 자살한 딸아이가 죽기 전 구조대원의 손을 잡았음을, 그 간절한 생의 의지를 증거하며 결코 자살한 것이 아님을 항변한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범죄 입증의 효력과는 무관한 이 진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잔혹하고 난폭한 스무 살 여자아이의 강간을 떠올리며 여자는 10년 후 출소할 아이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소심한 이사를 한다.

 


타인의 생에 대한 무관심과 잔인성, 그리고 욕망 충족을 위한 폭력의 사용은 마치 9급 공무원 입시를 위해 분투하는 누군가의 자리를 강탈하고는 뭐가 문제냐고 주절거리는 정치배의 추악한 욕망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는가?


 



작품 저녁 내기 장기에는 초로(初老)의 두 인물 이춘갑과 오개남이 등장한다. 국가 폭력의 전형적 피해자인 명태와 고래의 주인공은 이춘개. 사실 소설 속 인물 명으로 두 작품의 상관성을 말한다는 것은 터무니없기까지 하지만 사회체제라는 거대한 제도와 권력의 희생자들이라는 점에서 이춘갑은 이춘개를 승계, 세대를 대물림하는 인물상이라 해도 그리 그릇된 판단은 아닐 것이다.

 


이춘갑은 국가 경제 부도여파로 사업을 접어야 했던 인물이다. 부도로 인해 채무부담에서 헤어나 정상적 경제 거래를 할 수 있는 인간이 되기까지 오랜 고통을 겪는다. 2000년 전후를 통과했던 이 땅의 사람들이 정경유착을 통한 당대의 기득권자들이 유린한 사회의 고통을 보통의 서민들이 모두 뒤집어써야 했던 시절이다. 한편 오개남이란 인물은 단 한명을 뽑는 구청 청소과 임시직 채용에 무지막지하게 몰려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너무 가팔라 차량이 올라가지 못하는 산동네 쓰레기 수거를 제동장치도 없는 수레를 끌고 담당한다.

 


기온이 내려가는 겨울이면 쓰레기의 무게를 버티며 빙판의 경사진 언덕을 내려오는 일은 사고를 각오한 혈투에 가깝다. 여당 대표여, 들으시오! 고작 청소 임시직에도 삶의 모두를 걸어야 하는 인간들이 이 땅에는 수두룩하답니다. 오개남은 아이를 안고 내려가는 여인을 피하려다 사고를 당하고, 구청은 나이가 들어 정신이 산만해져 발생한 부주의라며 해고하고 만다. 이 사회 많은 사람들의 삶이 본질이 은폐된 권력의 착취와 불가분임을 외면할 수 없다. 오개남과 함께했던 누군가에게 버려졌던 개의 목에서 차마터지지 못하고 우 우~’하는 소리는 어쩌면 이들의 눈물을 머금은 탄식의 한 숨 같기만 하다.

 


이 소설집의 작품들에는 몇 가지 중첩되는 배경으로 바다와 포구가 등장하고. 깨진 얼음 위에 실려 먼 바다로 정처없이 끌려가며 구조를 요청하는 우우거리는 개, 쓰레기 수레 옆을 동행하며 우우하는 개 등이 등장한다. 그런가하면 소설의 배경들이 바다 연안의 작은 포구이다. 영자의 고향 마을도, 48 GOP임하사의 고향도, 명태와 고래의 향일포도 의 화자(話者)도 표제작인 저만치 혼자서도 바다와 멀지 않은 풍수상 버려진 장소이다.

 


개는 아마 소설 속 주인공들인 권력과 제도의 피해자이며 희생자들, 권력에 의해 발가벗겨진 이들의 또 다른 자아일 것이다. 또한 농업에도 어업에도 생활을 의탁할 수 없는 척박과 빈곤이 상시적인 곳을 에둘러 반농반어의 지역이라 표현하는 작은 포구 마을들도 우리네 체제와 제도 위선의 구역질나는 반감의 언어일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인간 간의 차이를 표시하는 기호들에 대해 둔감하고 그것이 은폐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곤 한다.

 


작가는 사랑이라는 말은 이제 낯설고 거북해서 발음이 되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금 이 땅의 사람들이 대체 무엇을 알지 못하는지, 어떻게 사유하여야 하는지를, 그래서 변화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타자 감응의 시간이 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소설 48 GOP를 읽다보면 전쟁 중 부대원 전체가 궤멸된 전투에서 전사한 임하사의 할아버지 임종석 이등중사의 마지막 편지를 되뇌는 할머니의 신음에 가까운 탄식이 들려온다.


 

....우리는 날마다 죽어나간다. 오늘밤에도 죽는다. 상치쌈이 먹고 싶다.


상치쌈이 먹고 싶다네. 아이고.“

 


오늘도 여전히 최전방 전선에 서서 북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자식들, 형제들이 있다. 그리고 70년 전에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탐욕스런 권력욕이 야기한 동족 전쟁에 내몰려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우리들의 부모, 조부모가 있다. 그들의 생을 과연 누가 처분할 권리를 지녔다는 것일까? 할머니가 70년 전 남편이 먹고 싶다던 보잘 것 없는 상치쌈을 잊지 못하고 거듭 반복하여 되뇌는 이 문장은 내 전신을 고통으로 훑는다.

 


소설집의 마지막에 표제작 저만치 혼자서의 제목은 고등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는 김소월 시인(詩人)산유화한 구절에 있는 표현이다. 입시를 위해 기계적으로 기술된 정형화된 해설 탓에 많은 이들이 피상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시()이기도 하다. 저만치는 인간과 자연의 거리이며, ‘혼자서는 고독하고 순수한 존재라는 암기된 해석이 따라 붙는다. 문학은 이렇게 기계적인 이해를 넘어서는 음미와 사유를 요구한다. 이 소설은 아마 이 작품집 전편에 흐르는 생의 쓸쓸하고 고독한 해체와 자연 순환에 대한 경건한 기도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죽음을 맞는 수녀들의 사목을 맡아 이를 지켜보며 신의 섭리 혹은 자연에 순응 할 수 없는 그 고통의 죄업을 끊임없이 기도하는 젊은 신부의 모습은 어쩌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 아니 인간 모두를 위한 대속의 행보만 같아 아린 슬픔이 몰려온다.

 


나는 분명하고 간결한 문장들로 구성되어 독특한 문체의 감각을 느끼게 하는 김훈 작가만이 발산하는 기사 보도형식의 분위기를 늘 즐거워한다. 그 명쾌한 문장들이 모여 은근하고 사색적이며 다채로운 의식들이 발하는 풍성한 작품으로 어느새 변화하여 묵직한 감응으로 마음 깊은 곳에 내려 앉아 찌든 정신을 새롭게 갱신하게 해준다. 작가는 한 이웃으로 이글을 썼다.” 고 밝히고 있다. 이 작품집은 우리 이웃, 바로 너와 나, ‘우리들의 이야기다. 우리를 연민할 이들이 누구이겠는가? 바로 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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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지혜 모리스 마테를링크 선집 1
모리스 마테를링크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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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면서 어느 순간 이 세계가 거대하게 짓누르는 힘을 어렴풋하게 느끼기 시작하며, 그 힘은 마치 어떤 불가항력의 숙명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속박!,  이 갇힌 듯 답답함과 곤혹스런 압박감에 시달릴 때, 시인의 시선은 인간보다 더한 장애를 지닌,   "자신을 흙에 묶어 놓은 자연의 법칙이라는 막대한 난관을 헤쳐나가야 할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꽃, , 나무 등 식물의 위대하고 집요한 저항의 경이로움으로 향합니다.

 

"식물은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 20

 

과학자의 정밀한 관찰이 시인의 정신에 깃들어 삶에 대한 통찰로 이어질 때 그것은 아름다운 생의 지혜가 되어 가슴 뭉클한 공감의 언어로 인간이라는 고독한 존재를 위로합니다. 시인 '모리스 마테를링크'는 식물이 얼마나 풍부한 상상력과 재능으로  '절대적 부동성의 끔찍한 법칙'에서 벗어나는지, 또한 미 결정의 상태로부터 미래를 위해 최선책을 찾아내려 하는지 찬란한 침묵의 드라마를 펼쳐 보여줍니다.

 

지구라는 행성에 가장 늦게 합류한 인간은 자신이 우주 대자연의 통제자인 듯 행동합니다. 그럼에도 이 존재가 실제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초라하고 협소한 것인지 모릅니다. 식물은 시간으로 가늠할 수 없는 훨씬 오랜 영겁의 시간동안 자기만의 독특한 체험을 바탕으로 운명을 개척해 온 존재입니다. 식물은 부동(不動)이라는 엄혹한 법칙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고 비좁은 세계를 벗어나 숙명적으로 닫힌 공간을 극복할 줄 압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은 이처럼 운명적으로 부여된 시간을 벗어나고 감당키 어려워 보이는 속박의 법칙에서 해방된 우주로 진입하는 놀라운 지혜를 지닌 식물을 지켜보게 해주고, 그로부터 우리들에게 아주 다른 운명을 맞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저절로 스며들도록 해줍니다.  수직으로 깍아지른 듯한 해안가 암벽의 작은 틈새에 내려앉은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중력에 저항하기 위해 나무 줄기에서 손처럼 뻗어 나온 뿌리가 바위를 붙잡고 있는 비틀린 몸체로 천공을 향해 풍성한 가지를 형성하고 있는 월계수 한 그루의 형상은 독특한 비행으로 날아가 바위 틈에 안착한 한 알 씨앗의 감동적인 사연을 상상할 수 있게 됩니다.

 



한 자리에 붙박히도록 한 대자연의 법칙에 저항해 회복불능의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창안된 다채로운 씨앗의 비행술, 그 비행을 위해 분출하는 정교한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부단하고도 가공할 노력을 기울였을 겁니다. '가시 도꼬마리'의 갈고리를 갖춘 씨앗 캡슐, '뚜껑 벚꽃'의 씨앗 냄비, '제라늄'의 다섯 캡슐 등 공간 극복을 향한 헤아릴 수 없는 씨앗들의 기발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자신의 삶을 연결해주던 끈마저 단호히 잘라내고 수면을 유영하는 '나사말' 수꽃의 행복에 이르기 위한 미래 상상력의 기막힌 노력의 모습은 초자연적 신비로움의 경지를 느끼게까지 합니다. 자가수분이 종()퇴화로 이어진다는 자연 만물의 이치를 일찌감치 깨우친 식물들의 타가 수분, 까마득한 세월동안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생존의 항구성 확보 전략임을 터득한 것이죠. 게다가 수분을 위해 제 때에 여닫는 '송이풀'의 정교한 꽃가루 주머니, 꿀벌의 정확한 동작과 다른 꽃으로의 이동시간까지 고려된 '깨꽃'의 타가수분 방식은 마치  "이성과 의지를 겸비한 듯" 보이기까지 합니다.

 

'에스파냐 금작화'가 꽃가루를 뿜어내는 그 발작적인 탄력의 힘은 어쩌면 탄도학자들을 매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가장 완벽하고 조화로운 지혜의 증거(76)"를 지닌 식물로서 '난초'를 꼽고 있습니다. 과연 더없이 복잡하고 독창적인 꽃의 양태, 이를테면 난초의 해부학적 시스템이라 할까요?   "꽃의 영혼이 보여주는 지극히 영웅적인 분투에 대한 놀라운 기록이라 할 정도로 기능과 모양이 가히 천재적으로 갖추어져 작동하지요.

 

계산, 조작, 치장, 발명, 추론 등이라 인간의 언어로 명명할만한 것들을, 이들 식물들은 이처럼 자신들의 타고난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지혜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세밀함과 분석적 시각을 투영해 인간의 욕망과 지혜의 비유를 동원하여 삶의 근원적 이해로 뻗고 있는 이 시적 상상력 넘치는 문장을 읽게 된 것은 제겐 행운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식물들의  "장엄한 저항의 몸짓과 짐짓 평화로워 보이는 용기, 그리고 예기치 못한 도약과 중력(105)"에 대해 끊임없는 반항의 기제를 다져 온 그 역동적 에너지를 보게 되면서 작은 억압의 힘에도 고통스러워하는 취약한 존재자임을 반성케 됩니다. 보잘것없는 잡초에서 화려하기 그지없는 금작화에 이르기까지 이들 가혹한 운명의 주인공들이 발산하는 색과 향기와 모양이 지닌 힘겨운 투쟁 속에서 오늘 우리네 치열한 생존 경쟁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이 지혜로운 문장들에 겸허와 용기를, 그 분투의 정신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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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8-10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7월 동안 쓰신 글 중 어떤 것으로도 당선될만 하신데, 이 리뷰로 받으셨군요

필리아 2022-08-10 17:50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축하댓글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