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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파괴할 힘
이경희 지음 / 다산책방 / 2022년 7월
평점 :
19세, 23세...소셜 네트워크의 이용에 능숙한, 즉 자신들의 행위를 이벤트화하여 무릇 무심한 대중의 시선을 모으는 데 익숙한 발랄함과 패기를 차용하여 던적스런 세상의 변화를 시도하는, 일견 1968년의 혁명을 잇는 언뜻 무모해 보이지만 인류의 새로운 삶의 설계를 위해 결코 회피할 수 없는 걸음의 의미를 펼쳐내고 있다.
그렇다, 이 소설은 보통의 인간들이 지니지 못한 능력을 지닌 이들을 중심으로 소외된 인간들이 펼쳐내는 혁명의 이야기다. 그것은 제목처럼 ‘모두를 파괴하는 힘’의 실현으로서 세상을 파괴할 힘이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진 세계, 그러기 위해서 부와 권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너희들도 전부 잃어봐야 이해할 것인지를 묻는, 혁명의 시간이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그 목소리는 열 번을 실패해도 열한 번의 실패를 기다리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저 한 걸음의 행보일지언정 그 속에서 작은 변화가 하나씩 이루어짐을 발견하는 희망의 전언이다.
“계속 발버둥 쳐. 너희의 세상을 만날 때까지 몇 번이고 부딪치고 또 부딪쳐 (....) 언젠가 세상은 달라질 거야. 달라질 수 있어.” - 288쪽에서
아주 묵직한 진리의 메시지가 울려 퍼진다. 전개되는 혁명의 주체들이 겪게 되는 온갖 기만들과 모순, 이기심을 부양하는 무지(無知), 무사유(無思惟)에 터 잡은 맹목적 믿음, 탐욕과 악의가 가득한 세계가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세상은 원래 불합리하고 고통스러우며, 아무리 노력해도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그럼에도 조금 다르게 세상을 보게되면 세상의 접힌 뒷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밀어넣는 이 세상을 멈춰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상상하고 그 실천적 사유를 함께 해보는 여정이 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접하는 혁명의 현실은 우리네가 얼마나 견고한 인류의 악과 대적해야 하는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것은 아마 다음의 문장과 같을 것이다. 이 오랜 인간의 악의가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것을 내어 줄 것이라 여기지 말라는 주문이기도 할 것이다.
“인간성의 가장 깊은 밑바닥 아래에 얼마나 참혹한 폭력들이 파묻혀 있는지를, 수만 년의 역사를 거치며 악의를 가다듬어온 인류는 (...) 도덕 밑에 은밀히 파묻어 후세에 대물림하기를 반복해왔다.” -243쪽에서
소설 속 주인공들은 데비안트(Deviant)라는 범주화 된, 사전에는 ‘~에서 벗어난’의 의미를 가진 재능의 소유자들이다. 이들은 사람간의 심리적 연결능력인 텔레파스, 공간을 뛰어넘고 군사적, 산업적 물질과 함께 이동할 수 있는 점퍼, 일종의 염력으로 물체에 의도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키넨시스, 그리고 투시능력으로서 세상을 모든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는 보이안트라는 네 가지 능력을 각기 발휘하는 보통의 인간들과는 다른 능력이 발현된다.
이들의 변이된 능력은 핵물질에 피폭된 인간들 중에서 발현되는, 즉 인간사회의 무지와 악의에 의해 피해를 입은 소외된 존재들이다. 사회는 자신들과 다른 이들 데비안트를 격리, 차별하면서도 자신들의 안보상 무기로 활용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한다. 정상적 교육은 물론 대학에 진학할 수 도 없으며, 직업을 가질 수도, 인간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데 온갖 제약을 받는다. 시간적 배경은 2036년을 전후한 근(近)미래다.
각 국가들은 데비안트인 소년 소녀들을 격리된 섬에 가두어 육성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육이라기보다는 강요된 규율의 주입과 먹지 못할 음식으로 연명시키는 극악의 장소이다. 그리곤 이들에게 데비안트의 발현 능력에 따른 등급을 부여하고 고착화시킨 후 서열화하여 시기와 질투로 구성원 내 격렬한 경쟁을 가속화시켜 끔찍한 지옥의 환경을 조성한다. 텔레파스 능력을 지닌 10대 소녀 신화경은 데비안트들의 차별이라는 결코 변하지 않으려는 절벽같은 세상에 변화의 희망을 당기기 위해 분신자살하는 어머니의 희생 뉴스를 보게 되고, 기성 질서에 저항을 실천하는 동갑내기 데비안트 조유영과 우정을 쌓게 된다.
파리, 홍콩 등지가 기성 질서에 저항하여 새로운 세계, 변화를 향한 소외된 이들의 투쟁지로 등장하는 것은 아마 작품에 현실감을 부여하려는 작가의 의도였을 것이다. 68혁명과 홍콩 시민의 민주화 운동, 그리고 1871년 파리 민중들과 노동자가 부패한 권력에 대항하여 자율적 시민정부를 수립하였던 파리코뮌의 정신은 이 소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다. 그래서 신화경, 조유영을 비롯한 키넨시스인 레이리, 보이안트인 하태빈, 그리고 국제원자력기구인 IAEA에 데비안트를 추가하여 국제적 규제질서의 범위에 포함시킨 IAEDA의 스파이인 ‘나(소셜 네트워크 닉네임 PD)’, 5명은 ‘제 3 파리 코뮌’이 활동하는 파리를 향한 장정에 오른다.
소설의 중심인물인 신화경은 ‘허브’로 불리는 델레파스 능력의 소유자이자, 무수한 사람들의 심리적 연결로 무의식적 통제와 교감을 할 수 있는 ‘슈퍼 데비안트 급 텔레파스’로서, 그녀의 의도 여하와 무관하게 사람들은 그녀의 심상에 매료됨으로써 데비안트의 자연적 리더로 추대된다. 총 4부 구성에서 2부 「혁민이들」, 3부 「예카테린부르크」는 이들 5인이 서울 발 파리 행 열차를 타고 가면서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혁명의 불씨를 지피고, 마침내 변하지 않는 세상을 멈춰 세워 새로운 세계로의 혁명을 시작하는 예카테린부르크 역을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와 혁명아들의 절박한 투쟁의 장면들을 담고 있다. 데비안트와 그 밖의 소외된 이들로 운집한 10만 명이 넘는 인간들, 이들의 활동은 생생한 화면에 담겨 소셜 페이지를 실시간으로 장식하고 세계 인구의 절반은 이를 게걸스럽게 탐닉한다.
혁명을 위해 모여든 데비안트를 비롯한 엄청난 인간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사상 유례없는 스펙터클로서 안방에서 해시태그나 다는 인간들에게 기막힌 엔터테인먼트로 소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질서를 지배하는 기득 권력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혁명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동력이다. 사실 우리네 삶의 거의 모든 현상이 이러한 모순 속에서 진행되고 있을 터이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인식되지 않는 그 터무니없는 것이 양립하고 있다.
혁민이들(혁명하는 민들레들)이 예카테린부르크 역에서 혁명운동을 시작하는 시기가 2036년인 것은 68혁명이 일어난 지 68년이 되는 해라는 것은 상징적이다. 68혁명의 주체랄 수 있는 ‘기 드보르’의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일명 제4 인터내셔널)이 스펙타클이라는 온통 쇼로 둔갑한 거짓된 오늘의 세계인 온실 속에 갇혀 지내며 자신이 갇힌 줄 모르는 현대사회의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상처를 내 돌아보게 하려 했던 것을 승계하는 혁명임을 말하려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들 수 십 만 명에 달하는 혁명군중, 특히 미사일 발사 체계조차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데비안트들과 이들을 연결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텔레파스 능력자인 화경의 행동에 위협을 느낀 각국을 대표한 IAEDA는 협상을 요구하고 대표자를 파견한다. 협상을 위한 혁명군중 집단들의 안건을 모으기 위한 과정은 아마 인간의 너절한 이기심의 전시장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묘사되고 있는데, 수긍의 머리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모두가 다른 방식으로 혁명을 바로보고 있었다. (...) 사람들은 각자 다른 세상을 산다. (...) 요구는 끝이 없었고 자신의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 자존심뿐인 헛똑똑이들은 사소한 문구 하나하나를 물고 늘어지면서 끝도 없이 논의의 초점을 흔들어댔다.”
- 250, 327쪽 등에서 부분인용
100명이 100가지 주장을 하며, 협상 안건에서 거절되었을 때 혁명의 대표자를 향한 그 거침없는 야유와 비아냥, 조롱, 멸시, 혐오와 증오는 오늘의 인간 세계가 왜 이처럼 어리석고 못났는지의 반면교사일 것이다. 서로 발목을 잡고 있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세계, 결국 정의가 힘이 아니라 힘이 정의가 될 수밖에 없는 세계를 인간들 스스로가 만들어내고 있음의 비판일 것이다.
92일간의 혁명 군중의 동력은 협상이 지연되는 만큼 분열과 반목, 그리고 이탈이 시작되기 시작한다. 지도자 없는 혁명을 실천하는 화경은 현실과 이상, 실현과 배제의 길목을 굳건히 지키고 세상의 변화를 위한 시도에서 뒷걸음치지 않는다. 우린 너도 나도 세상이 잘못 됐다는 주장에는 흔쾌히 공감한다. 그러나 해결하여야 할 문제와 마주하면 그야말로 십인십색이다. 어떤 정책안이 수립되어 제시되면 결과를 놓고 모두들 자신의 한 마디를 얹으며 쉽사리 품평하고 조롱하기 일쑤다. 아마 소셜 미디어의 타임라인을 보면 파리 떼처럼 모여들어 “헤아릴 새도 없이 빠르게 복제되는 냉혹한 손가락들이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잡아당기는(369쪽)” 꼴을 보지 않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혁명을 좌절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살포되는 가짜정보가 진실을 덮는 장면은 오히려 현실보다 순수하기까지 하다. 지금의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정부가 들어서기 전인 지난 5년간 조중동 등 황색 매체들의 행태는 이것을 훨씬 넘어서는 파렴치하고 저열한 것들이었다. 소설은 이렇게 쓰고 있다. “조금씩 우습고 혐오스러운 존재로 격하시킨다. 분란을 조장하고 명분을 쌓으려는 목적, 그리고 무지한 우민들에게 전투 의지를 불사르기 위해서, 마치 정의로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라며, 적은 악당이라고 (448쪽)” 자신들의 기득권 집단을 지키기 위해 못할 것이 없는 것이다.
소설의 1부와 4부는 혁명 군중을 공격하는 지배권력의 무참한 살생의 현장을 피해 그 많은 데비안트들 중 고작 5명의 생존자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조한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벗어나 달에 불시착해서 벌어지는 생사의 기만적인 에피소들이 전개된다. 화경을 살해하려는 IAEDA의 스파이, 새로운 변화의 혁명을 시작, 지속시키기 위해 화경을 보호하려는 존재들이 벌이는 최후의 싸움, 그리고 핵폭탄이 날아가고 허물어져 가는 세계를 바라보며 증오를 담아 중얼거리는 혁명이 다시금 시작된다.
“자, 이제 눈을 떠. 혁명의 시간이 다가왔어!” 이 마지막 문장은 누구를 향해 발화되고 있는 것이겠는가! 이 소설은 본문이 끝나고 에필로그와 책의 가장 끝에 있는 쿠키까지 모두 꼼꼼히 읽어야 작품의 전모가 규명되는 작품이다. 이 세상을, 우리 인간을, 군중을 이해하고, 혁명의 실천을 강렬한 생동감과 함께 지적으로 지펴낸 바로 오늘의 초상일 것이다. 만일 모두가 평등하게 핵폭탄을 지니고 있다면 힘이 정의인 세계가 정의가 힘인 세계로 바뀌지 않겠냐는 작가의 말은 결코 예사스럽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능력주의를 공정이라 주장하는 자들은 이 작품을 읽지 말라. 만일 읽게 되면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