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이름들 - 제3회 박상륭상 수상작
안윤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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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탸의 몸,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카탸의 육체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해묵은 슬픔은 거기에서부터 온다, 희망이 기댈 곳 없는 아름다움....” -46

 

발표되고 조금은 늦게 책으로 출간된 안윤 작가의 이 소설에 앞서 세 편의 단편을 모아 펴낸 방어가 제철을 읽고, 나는 애틋한 그리움의 언어, 왠지 정화된 느낌을 준다고 썼었다. 그리고 가을 잎이 쓸쓸히 나뒹구는 어느 고적한 길을 홀로 거닐 다 저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 상념이라고 감상을 맺었었다. 이 소설을 2021년 제3회 박상륭상 수상작으로 선정한 심사평에 담긴 웅대한 고독 속에서 우주와 내통하는 듯한 내밀한 결기”, 그것에서 연원하는 내성 깊은 묵묵한 성찰 그것과 유사한 경외감이었을 것이다.


 



소설은 자기 삶의 익숙한 거추장스러운 일부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키르기스스탄의 비슈케크로 유학했던 의 짧은 기억으로 시작한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의 문학을 사랑하는 할머니 라리사 니칼라예브나의 집에 하숙하며 그의 도움과 배려의 추억들이 흐르고, 2년간의 유학 생활을 접고 귀국한 지 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라리사의 영면 소식과 함께 그에 앞서 세상을 떠난 딸의 공책 세 권과 공책에 써진 이야기에 무언가를 해 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가 배달된다. 소설은 그 공책에 써진 글의 형식을 가진다.

 

윤은 낯선 이의 공책에 매달려 한국어로 옮기려 한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 반드시 이야기되어야만 하고, 끝내 그것을 둘러싼 비밀을 깨뜨려야만 이야기가 계속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계속된다면 언젠가, 어딘가에, 누군가에 가 닿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고. 그리고 윤은 모든 결핍은 아름다울 자격이 있다.”고 쓴다. 소설은 바로 이 결핍의 아름다움, 살아있는 시간을 성실하게 지워나간 한 인간, ‘나지마 하미롭나 유수포바의 내밀한 심연의 기록이지만, 나는 이 나지마의 자기 응시의 쓰기를 윤의 한국어로의 처절한 옮김, 감응의 기록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읽는다.

 

이야기는 자동차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채 오직 눈만 깜빡거릴 수 있는 카탸라는 여성의 입주 간병인으로서 그녀와 그녀의 남편인 쿠르만의 관계를 한 축으로 하면서 나지마자신의 그리움과 고통, 사랑, 그리고 추억, 살아있음을 증명해 줄 절실한 무엇, 온전한 나에 가 닿기 위한 치열한 자기 물음들과 내적 응시로 이루어져 있다.

 

스스로 말 할 수 없으며, 움직일 수 없는 카탸의 몸에 대해 모두에 인용한  희망이 기댈 곳 없는 아름다움은 카탸라는 한 인간에 대한 순수한 감응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나지마 자신에게 하는 언어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살아있음을 온 몸으로 증명하고 있는 육체, 그래서 삶의 신비는 우리가 결코 엄밀하고 어긋남 없는 수준의 객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라 그녀는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지마는   얼굴도 이름도 없는 그리움, 그 고통의 근원을 찾는다. 이름도 없이 알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버려진 빈칸, 이것은 아이의 유산이 남긴 상실의 고통과 같이하는   끝내 손잡을 수 없을 나의 바깥이며, 내 살아 있음의 유일하고 불온한 증인으로서 도망칠 수 없는 자신의 일부로서의 그리움이다. 존재의 의미와 맥락을 파악치 못하게 하는 채워 넣고 싶은 빈칸, 양성 종양 같은 생명의 지장을 초래하지도 못하는 딱히 쓸모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없는 몸의 일부이다.

 

우리는 참 교묘한 존재이다. 우리는 우리의 주변을 에워싸고 끊임없이 맴도는 결코 의식하지 않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임을 문득 깨닫곤 한다.  카탸와 그녀의 살아있음에 헌신적인 보살핌을 쏟는 남편 쿠르만을 지키는 나지마는 어쩌면 삶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를 나누는, 아니 그들은 하나의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카탸의 죽음을 보내는 쿠르만의 장례식 준비에 대해 나지마가 쓴 문장에서 조금 오래 시선을 멈추었었다.

 

한 사람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마련된 이 모든 아름다운 것은 생의 편에서,

숨소리라는 배음 위에서 5월의 햇빛을 받으며 한층 더 빛났다.” -158

 

200쪽 남짓을 가득 채운 삶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살아있음의 자각에 이르는 이 증언들은 나지마가 만드는   슬퍼질 정도로 완벽한 사과파이의 냄새처럼, 공기라는 행간과 기억이라는 운율이 만나는 살아감, 그것에서 한 편의 시를 맡듯, 시적 향기가 그득하다. 내 어수룩한 언어로 섬세하고 밀도 높은 이 생의 기록들을 더 이상 쓴다는 것은 아마 어쭙잖은 일이 되기 십상일 것만 같다. 나지마는 체념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희망,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건 체념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 일상에 푸른 잎을 내보이는 희망이라고 쓴다.

 

현재야말로 지난날의 암시라는 것을, 바로 지금의 내가 삶의 증거임을 깨닫는 나지마의 내적 외침은 그야말로 인간 생에 대한 지극한 헌사일 것이다.   나는 나를 다시 체험하고 싶다. 나를 줍고 싶다.”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삶의 흐름을 앗아가 버리는, 수시로 내습하는 시간의 단절을 느끼는 고독의 세계로 내던져질 때 아마 떠올려질 신비의 문장이 될 것만 같다.  작가 안윤은 은둔해있는 존재의 비밀을 드러내어 그 자체의 빛을 가리킨다. 슬프지만, 원망스럽지만, 사과파이 냄새처럼 현재하는 생의 의미에 대해서


여기에 사족을 덧붙인다면 철학자 '페터 비에리'의 삶의 격 첫 문장을 인용하련다.  이 소설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중요한 여러 경험의 결함과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이해 가능한 빛을 비추려는 시도, 즉 인간 삶에 관한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물음에 대한 한 인간의 치열한 답변의 시도라 해도 결코 과장된 수사가 아닐 것이다. 오랜 만에 접하는 한국 문학의 수작(秀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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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의 장미 - 위기의 시대에 기쁨으로 저항하는 법
리베카 솔닛 지음, 최애리 옮김 / 반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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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루의 나무와 꽃을 심으며 시시콜콜한 정원 생활을 말하면 그 수동적 삶의 무위(無爲)에 대해 여기저기서 비판의 소리들이 들려온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말했다던가? 서정시를 쓰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고.  그런데 이 문장이 결코 완전한 삶의 세태를 포착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러한 관조의 삶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관심, 도피, 회피로 단순히 해독하는 것에는 생산성, 혹은 불의에 대한 강박이 느껴지기도 한다. 조금 더 나간다면 물량화, 상품화의 가능성으로부터 일체의 벗어남으로 보는 관점에는 지극히 단순화되고 기성의 권위에 대한 굴종이라는 의심을 보낼 수 있다고 반론을 펼 수도 있다.

 

리베카 솔닛은 이러한 반론에 공감하는 듯,  ‘조지 오웰의 에세이 나 좋을 대로의 한 소박한 일상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1936년 봄, 한 작가가 장미를 심었다.”라고.  7장에 걸쳐 이로부터 시작된 오웰의 삶의 면모들과 관련한 시대적 현상들, 그리고 불가분의 양상들을 통해 장미(Roses)’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인간 세계의 무한한 양태들을 지펴내고 있다. 그것은 삶의 주된 임무와는 무관해 보이는 아름다움으로 향하고, 때론 나치즘과 파시즘으로 이어지기도 하며, 미학적 심미안으로, 생태학적 관심사로, 거짓말과 전체주의, 제국주의의 자기 기만성과 권력화 된 언어의 부패성과 폭력성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글쓰기의 소명이란 무엇일까에 이르는 무한한 사유의 장을 열어놓는다.

 

그런가하면 동물농장, 카탈루냐 찬가, 1984,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인생, 위건 부두로 가는 길, 나는 왜 쓰는가등 오웰의 소설과 에세이, 일기, 기고문 등을 종횡누비며, 획일적으로 알려지거나 이해된 해독들과 다른 낯선 오웰을 들려주기도 한다.    정치적 기괴함에 대한 냉철하고 비판적 시각에 철저했던 일관성의 작가는 꽃과 나무, 아름다움과 즐거움이라는 무위의 자연, 인간 자유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추구한 사람으로 변모한다. 아니 양자의 균형을 이루려 실천했던 인물임을 살려낸다. 암울해 보이기만 하는 1984의 흑백 전경이 햇살 가득한 총천연색 컬러로 보이기 시작할 만큼.

 

영국 시골 마을, 오웰의 하류 지향의 삶을 대변하는 1936년 장미를 심었던 월링턴의 집을 향해 거니는 리베카의 걸음처럼 이 책은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대한 애정의 산물이다.   글 쓰는 본업 외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정원 가꾸기, 특히 텃밭 가꾸기이다.”라는 오웰의 공개적 표현처럼 그에게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은 충직한 자유의 기쁨이었으며, 이러한 믿음과 태도는 초기작에서부터 마지막 작품인 1984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스며들어 표현되고 있다고.

 

가장 많이 읽혔을 동물농장의 배경인 월링던(willingdon) 매너 농장의 큰 헛간은 실제 오웰의 월링턴(Willington) 시골집 모퉁이를 돌아서면 당당하게 서 있다고 리베카는 보고하고 있다. 가공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에는 영국의 전원 풍경을 상기시키는 장면들이 있으며, 식물을 채집하고 새를 구경하며 작품을 키우던 즐거움들이 담겨있다. 숨 쉬러 나가다에는 주변의 자연 환경에 매혹된 인상들을 환기하는 장면들이 길게 서술되고 있기도 하다. 오웰에게 농장과 목초지와 물방앗간 등 시골의 전원은 인간의 자유라는 풍요로운 삶과 다른 것이 아니었음이다. 정치와 이념의 행위들로 인해 빚어지는 거짓과 왜곡, 암투와 기만의 흉측함 등, 인간을 옥죄고 강요하는 불의한 권력 행위를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리베카는 이해한다.

 

오웰의 장미는 이 책에서 일곱 번의 변신을 도모한다.   “1924년은 한 여자가 장미를 사진 찍었다고 시작하며, 볼셰비키에 헌신했던 사진작가  '티나 모도티(Tina Modotti)'의 일생을 쫓으며, 장미는  인간을 지탱하는 종종 훨씬 더 섬세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무엇으로서, 또한  즐거움 속에 속하는 그런 것들을 추구할 내적 삶의 의미로 당대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운동에서 출현한 상징어 빵과 장미(Pan & Roses)'속에서 풀어 놓는다.

 

또한   “1946, 한 독재자가 레몬을 심었다. 아니 심으라고 명령했다.”로 시작되는 장()에서는 전체주의 독재자 스탈린의  '압하야기 별장'에 심은 아열대 종인 레몬나무를 정원사들로 하여금 살아남도록 매일 채근했던 일화를 소개하며, 추위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레몬 나무로 인한 처벌을 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여야 했던 정원사들로부터 거짓말 위에 세워지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일깨우기도 한다.

 

이것은 오웰의 에세이 문학의 예방으로 시작하여 1984로 이어지며  거짓말이란 전체주의의 명료한 필수적 요소임을 입증하는 데 이른다.   사실상 탐욕스런 지배계급은 자기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실수란 없다고 생각되어져야 한다고 여기며,....사건들을 새로 짜 맞추는 일에 전념한다. 이에 따라 과거를 계속 변조하며, 결국에 가서는 객관적 진실의 존재 자체를 믿지 말 것을 요구하기 이른다.”는 것이다.

 

이 지배 권력이 하는 거짓말은 여느 범인(凡人)의 거짓말과는 차원이 다른 공포의 문제라는 것이다. 아마 다음의 인용 문장은 왜 통치자가 하는 거짓말이 반드시 지탄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하나의 이해로 충분할 것 같아 길게 인용해 본다.

 

거짓말로 이루어진 체제가 그 치하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생각 및 언어에서 진실과 정확성을 찾기를 포기하게 함으로써,...지적 굴복, 순응성, 냉소주의, 무엇도 믿지 않으려는 태도, 모두 다 썩었다는 단언의 형태를 취하게 만든다. ...진실과 허위의 구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301쪽에서

 

리베카는 자신의 글쓰기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오웰의 글 모두에 공감하고 무조건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모든 서평과 문학 에세이에서 여성 작가들이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면서, 인종차별에서 보였던 명확한 인식과 달리 여성에 대해서는 침묵하며, 당대 여성들의 운명성을 묵과했음에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오웰의 작가로서의 삶은 위선과 회피에 대한 통상적 혐오였다고 정치적 삶에서의 거짓과 제도적 기만을 쓸 수밖에 없었음을 지적하며, 그의 스페인 전쟁 참전기록이랄 수 있는 카탈루냐 찬가를 통해 설혹 자기편이라 할지라도 그것의 부패를 알아보는 시각의 소유자였음을 확신하기도 한다.

 


이 책의 한 절에 불과하긴 하지만 그 함의는 질적으로 엄청난 무게를 지니고 동시대에 출간된 한나 아렌트전체주의 기원조지 오웰1984가 지닌 동일한 관점, 즉 진실과 허위 사이의 구분을 무너뜨림으로써 인간의 사유와 경험 능력을 동시에 상실시켰음을 날카롭게 드러내어 알려주기도 한다. 이 두 권의 책은 발표된 지 70여 년이 지난 오늘 더욱 현실적인 목소리가 되어 우리들의 앎의 지각을 깨운다.

 

여기에는 바로 지금 아주 깊게 다가오는 지적이 있는데, 단어의 죽음과 관련된 것으로 1984에 등장하는 진리부의 뉴스피크’, 즉 언어의 단축이 일으키는 궁극의 목적에 관한 것이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의 동료는 자네는 뉴스피크를 만든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는 데 있다는 걸 모르나?”라고 반문하는 장면이다. 모든 단어는 일련의 직간접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며, 생태계의 한 종이다. 한 단어의 죽음은 그만큼 언어와 사고의 가능성을 깎아내는 것이며, 종국에는 사고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어 체계가 저절로 무너져 내린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의 '공정(Justice)'이란 언어가 남용되어 피로감과 함께 그 의미를 상실케 하는 것은 부정한 권력의 이와 유관한 전형적 전술이다. 이제 공정을 말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마치 소용없는 불필요한 단어처럼 되어버리고 있는 지경이다. 공정이 없으니 불공정이 정상이 되고, 사회는 불평등과 차별의 불의를 알지 못하게 된다. 범죄와 타락이 버젓이 횡행하는 사회, 그것이 전체주의 사회이고 독재 사회이다. 지금 사회는 보이지 않는 내부의 부패가 그 어느 때보다 심화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아름다움과 삶의 자유에 대한 우아한 수상록이라 해야 한다. 오웰의 만년 삶의 거처였던 스코틀랜드 외딴 섬 주라의 작은 농장 주택 반힐로 돌아가며, 인적 없는 비 내리는 날, 젊은 아내 아일린의 무덤 앞에 쭈그리고서 땅을 파고 폴리앤서 장미를 심는 마음 아픈 장면으로 돌아가야 될 것 같다.  가장 가까운 곳의 전화도 12KM가 떨어진 곳, 그러나 그곳은 꽃과 나무와 농장과 자연이 있는 곳이다. 리베카는 그곳이 세상에 엄격한 시선을 보내기 위해 준비해야 곳으로서 오웰에겐 생의 균형을 맞추는 장소였다고 읽어낸다.

 

아마 1984에 이러한 문장이 있었는지 낯설기까지 하지만  무익한 행동이라 해서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고, 달리 줄 것이 없을 때라도 사랑만은 줄 수 있는 것이었다.” , 윈스턴 스미스가 사랑을 나누던 골든 컨트리에서의 개똥지빠귀가 딱히 목적없이 노래하는 것을 들으면서 두려움과 상념에서 벗어나 순수한 존재의 상태로 변화하는 대목에서 오웰이 인식하는 자연의 삶이 그의 건조해 보이는 작품에서조차 어떻게 숨 쉬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한다.

 

오웰의 장미는 이제 대변신을 한다.  효용성의 바깥에 있는 무용성이란 일종의 저항이며, 더 미묘한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발견이다.   ‘이건 그들이 미처 바꿔놓지 못한 역사의 한 조각이야.’,  그 어떤 권력도, 그 어떤 체제도, 간섭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꽃과 나무를 가꾸는 것은 오웰의 인간으로서의 기쁨이자 즐거움, 불가침의 자유였으리라는 것이다.

 

리베카는 오웰이라는 한 인간의 저작과 사사로운 일상의 기록과 현장을 추적하면서 결론을 맺는다.   인간됨의 본질은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고, 때로 신의를 위해 기꺼이 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정다운 육체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금욕주의를 밀고 나가지 않는 것이고, 결국에 생에 패배하여 부서질 각오를 하는 것이라고.  


결코 삶을 이상화된 것으로 바라보지도 않았으며, 자연과 인간의 그 불완전한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능력을 가졌던 한 위대한 작가의 삶의 행적으로부터 정말 소중하고 귀한 삶의 선택이 무엇인지를 이 맑은 시선을 지닌 저자는 진정 향기로운 인생에 대해서 각다귀처럼 변질된 오늘의 우리들에게 우아하게 제시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안팎으로 차가워진 세상에서 삶의 온기를 되찾으며, 그 길을, 삶의 도리를 발견하는 더없이 따뜻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기록한다. 아름답다는 말은 이러한 글에 사용하는 표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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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 그 어느 때보다 바로 지금의  한국사회는 '조지 오웰' 읽기를 필요로 하는 것만 같다.  반대자는 절멸의 대상으로 보는 것, 비판의 언어는 공허한 단어가 되어 소멸시키려 하는 것, 검찰이라는 공권력을 거느린 전체주의 사회의 길목에 접어든 인상이다.  뒤늦은 감은 있지만 조지 오웰 전집이 H출판사에서 미흡하지만 출간 예정인 것 같다.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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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 시골 의사 책세상 세계문학 6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종대 옮김 / 책세상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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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는 자신의 글을 그의 삶의 현실에 투영하지 말 것을, 즉 일치하지 않음을 주장했지만, 그가 살던 현실의 시공간에 밀착하지 않고서는 그가 쓴 소설들을 읽어 낼 방법이 없다. 단편 변신은 자본주의로 인한 인간의 전락(轉落)이라거나 의식과 존재 분열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의 묘사라는 독해들이 있다. 나는 이 같은 피상적 시선으로 그레고르 잠자라는 존재의 이야기를 그 분명함을 지우는 보편성의 읽기로는 지속적으로 따라갈 수가 없음을 안다.

 

이 작품은 구체성을 띤 20세기 프라하에 사는 유대인, 독일 주류 사회의 일원으로 묻혀 살기위해 그들을 모방해야만 살아 갈 수 있었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 하에서 읽기시작 했을 때 비로소 온통 안개 속 같았던 문장의 의미가 표면에 떠오르는 것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함으로써만 서구 백인의 시선으로 흐려놓은 추상적 독법을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커다란 갑충으로 변한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발견한 자신의 몸은 보편적 인간의 현대성 속에서의 추락한 존재도 아니며, 정신분열적 고통의 상징도 아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 초에 유대인을 향한 주류의 담론으로 형성된 퇴화론에 주목해야 한다. 유럽인 자신들과 구별하기 힘든 이방인인 유대인이 자신들의 일상에 깊이 침투하자 이에 대한 팽배한 불안은 차별의 이미지를 만들어 그들에게 씌우기 시작했다. 병들거나 변형되거나 성별의 경계가 불분명한 퇴화된 인종이라는 타자성이 그 전형적 클리셰다. 이 타자화 도식은 유대인의 윤리적 도덕적 형상으로 이어져 그들의 동화(同化)를 차단하고 경계했던 것이 당대의 현실이다.

 

당대를 장악하고 있던 이러한 비틀린 인종, 몸 담론을 카프카는 실제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일상에서 겪는 차별의 언어였다. 특히 그는 자신의 신경증, 소화불량 등 육체적 허약함을 의식하고 체조연습, 수영, 노젓기 등을 통해 주류가 가하는 편견을 극복하려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111112일 일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내 몸의 상태가 나의 발전에 주된 방해물이 될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중략) 나는 계속되는 실패에 익숙해져야만 할 것이다.” 이렇게 전제하면 그레고리의 갑충 변신은 퇴화의 담론을 거부없이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소설의 어느 곳에서도 변한 몸에 대한 원인이나 목적, 의미에 대한 묘사나 설득력 있는 서술이 없는 이유가 해명된다.

 

대신 소설은 이러한 생물학적 물질적 변화의 설명이 아니라 이것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관찰과 사유를 풀어 놓은 것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보게 되면, 갑충으로 변화된 몸, 퇴화된 몸은 주류 사회에 동화하려 했으나 실패한 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실패한 몸이 됨으로써 비로소 가짜를 벗어던지고 본연의 삶, 순수한 자신의 몸이라는 정체성을 회복하는 몸이 된다. 설혹 그것이 죽음까지 무릅써야하는 온 몸으로 느끼며 밀고 나가야 하는 절박함, 그 자체일지언정 말이다. 이것이 카프카의 소설을 생명의 예술이라 부르게 되는 바로 그 이유일 것이며, 상실한 정체성 회복과 삶의 주체적 자기를 발견하는 긍정의 서사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갑충의 몸은 벌거벗은 몸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회적 문화적 껍질을 벗어던진 몸으로서 사회적 위상을 상실하고 인간사회에서 이탈한 존재가 되는 것은 일종의 카프카적 사유 실험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설은 이것의 진행 여정이다. 갑충이 되어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출장을 위해 기차 시간에 맞추어 나가지도 못한다. 아니나 다를까 누이동생부터 어머니, 아버지가 차례로 출근하지 않는 아들 방을 두드리며 그레고르를 채근하고, 이어서 직장 지배인이 방문하여, 그레고르를 비난하는 말을 쏟아놓는다. 이제보니 이상하게 변덕을 부리고 그걸 이상한 방식으로 시위 하는군요.(21)”라며 유대인을 향한 주류시선의 전형적 클리셰를 풀어놓는다. 이어 거래처 수금 문제와 연관하여 그의 지각에 의혹을 표명했던 사장의 말이나, 당신의 일자리는 고정직이 아니에요!”라는 지위의 불안정성까지 발설한다.

 


5년간 지각 한 번 없이 성실한 능력있는 직원의 단 한 차례의 지각에 득달같이 달려와 퍼붓는 이들로부터 자아상과 타자상의 커다란 불일치, 보이지 않았던 막대한 간극이 드러난다. 주류사회에 편입되어 동화된 존재, 유럽인이라는 자아상은 터무니없는 것이며, 그 환상은 붕괴한다. 그의 직업에 대한 우리말 번역어에 대한 지적이 있다. 대개 외근사원 또는 외판원으로 번역된 원어는 여행자(der Reisende)'의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이것은 살고있는 사회에 소속되지 못하는 방랑하는 유대인에 대한 또 하나의 상징어로 써졌다는 것이다. 변신 전의 그레고르 잠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 그것이다.

 

1장은 이같이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 그 자체가 지닌 사회적 시선과 자기 이해와의 불일치를 관찰토록 하였다면, 2장에서는 폐쇄된 자기 공간에서 지내는 갑충으로서 그레고르의 내면 독백에 의존한 심리세계가 주로 그려진다. 그의 목소리는 찍찍거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서서히 의사소통 세계에서 언어에 의한 소통 가능성을 상실해가고, 누이동생이 갖다 주는 쓰레기 같은 음식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부각하며 벌거벗은 존재로서 감당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배열한다. 유대인은 주류사회에 등장해서는 안 되는 몸이라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도 불구하고 그 동화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직장은 물론 가족 모두에게서 배제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현실 그것이다.

 

또한 갑충 그레고르의 독백 즉 사유가 진행되는 폐쇄된 공간은 누이동생의 의도에 따라 텅 빈 동굴 같은 공간이 됨으로써 그의 점차 약화되는 시력처럼 그를 둘러싼 환경 모두가 퇴화하기 시작한다. 반면에 동물로서의 그레고르는 천장에 매달려 있기를 좋아하게 되며 신체적 안정감과 함께, 숨을 훨씬 편하게 쉴 수 있는 자기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의 느낌에 젖어든다. 점차 직업과 가족 양쪽 모두에게 착취당하던 삶으로부터 벗어난 해방감, 평온함을 만끽하기 시작한다. 벽과 천장을 이리저리 기어다니면서 끈적끈적한 흔적을 남기며 그는 자신의 온 몸으로 글을 쓴다. 온 몸으로 느끼면서 행하는 글쓰기, 일종의 행위 예술이다, 이 역시 카프카다운 은유이다. 껍질, 사회적 외피를 벗어던짐으로써 되찾은 퇴화라고 경멸되는 고유의 정체성, 이때 주류의 소통매체와 그들의 시선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에 몰두할 수 있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3장에 이르러 기생적 역할이 전환되어 직업이라는 돈 벌이에 나서야 한 가족들의 생계수단으로 받아들인 하숙생들의 앞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여동생의 연주 음악에 홀린 듯, 이미 예술적 존재로 변화한 그레고르는 금지된 문턱을 넘어 거실로 기어 나온다. 이 장면은 아마도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대목이라 할 수 있는데, 이미 사회와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가 된 그가 위험에 노출된 최악의 순간이면서 예술적 감각으로 충만된 최고조로 고양된 감각에 취한, 해방과 구원의 분위기가 교차하는 의미심장한 광경이기 때문이다. 이미 그의 무의식적인 위험에 대한 무관심, 즉 해탈의 순간은 그를 발견한 하숙생들과 아버지에 의해 비극적 폭력으로 전환된다.

 

아들을 방으로 몰아 대기 위해 쉿 쉿 거리는 동물을 향한 소리, 그리고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을 상징하듯 그를 향해 던졌던 사과가 살 속에 박혀 썩어가는 몸, 더 이상 아무것도 먹지 않고 납작하게 말라가는 몸은 죽음의 수용, 자기 죄업에 대한 인정의 행위였을 것이다. 주류 사회의 편입을 위한 무기력한 몸부림은 자신의 예술적 삶의 불가능이었으며, 이 불가능을 선택함으로써 일상적 직업을 지닌 가족 부양자로서의 삶을 놓은 것에 대한 죄의식은 결코 그에게 함께 할 수 없는 것이었음이다. 이렇게 정리 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변신은 그레고르의 탈출구였지만, 이것은 주변세계로부터의 고립이었으며, 자기만의 길은 삶을 죽음으로 이끌 수밖에 없었다는 카프카의 불가피한 신념이었다고.

 

그래서 그의 죽음에는 슬픔도, 비탄도 가족조차의 애도도 없다. 그레고르는 그의 내적 일치 속에서 평온하게 죽은 것이므로. 그가 죽자 가족들이 산책에 나서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부모 세대가 찾지 못한 탈출구를 찾으려는 시도라 할 수 있으며, 작가 자신의 전업 작가로서 허용되지 않는 삶의 현실에 대한 자기 삶의 완성에 대한 갈망의 욕구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자기실존, 인간의 자유를 향한 이 처절한 몸의 사유는 그래서 더욱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물론 이 같이 시대에 대한 담론에 밀착한 독해로서만 읽힐 때 간과되는 것들이 있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성()의 실패에 대한 장면들이다. 이 작품에서도 자신이 만들어 벽에 부착한 액자에 끼워넣은 모피를 입은 여인의 사진에 배를 바짝 붙여 그것을 치워버리지 못하게 하는 행위나, 속옷차림으로 쓰러지면서 아버지에 안기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아버지에 의해 억압된 실현되지 못한 성의 문제는 또 다른 당대의 문화적 세대적 갈등의 담론에 다가가게 한다. 이처럼 이 소설은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접근의 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이의 감상에서 발견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세상 번역본에는 단편 시골의사가 함께 수록되어있는데, 이 작품은 바로 성의 실패와 관련한 전형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억압으로 통제된 가면의 삶과 순수하게 날뛰는 욕망, 그 본연의 삶을 방황하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고통의 형상이 말()과 어여쁜 하녀 로자, 망상처럼 나타난 남자,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와 벌어진 분홍빛 상처가 교차하며 응축된 밀도로 그려지고 있다. 짧지만 강렬한 작품이다. 실패함으로써 성공한다는 카프카의 작품을 읽는 것은 주기적으로 찾게 되는 어떤 유혹이다. 블가능 속을 헤매고 싶은 은폐되고 억압된 내 무의식의 분출 욕망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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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1890 쏜살 문고
오스카 와일드 지음, 임슬애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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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은 최후의 연기까지 끝마쳤어. (...)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을 떠다니며 그것에 사랑스러움을 불어넣은 유령, (...) 그녀가 현실의 삶을 건드린 바로 그 순간 삶은 훼손되었고, 그녀 자신도 훼손되었지. 그래서 죽은 거야.” -121

 

 

소설 속 이 문장은 삶이 곧 예술인 삶, ‘예술은 인생 최고의 위안이라 말한 테오필 고티에의 유미주의(唯美主義)의 현현, 바로 그것일 것이다. 세기말적 퇴폐주의 대표작에서 예외 없이 거론되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이를 확인하여 주듯 무거운 향내가 뚝뚝 묻어나는 병적 고백과 황홀경에 관한 신비주의적 감각(162)”을 삶의 의미로 하였던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판본에 대해 먼저 얘기하는 것을 잊었다. 기존의 판본들은 수많은 도덕적 시비 속에서 대대적인 두 번의 수정과 삭제 끝에 출간된 1891년 이후의 원고들이다. 이 책의 제목에 ‘1890’이란 년도의 표기가 달라붙은 까닭은 공식 출간되기 전에 잡지 월간 리핀콧에 게재되었던 1890년 최초의 원고를 판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기존의 결정판이라 불리는 소설에서 볼 수 없는 단어들과 문장들이 실려 있다.

 

도리언 그레이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책으로 “‘카튈 사라쟁의 소설 라울의 비밀(Le Secret de Raoul)1891년 이후 출간된 책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렇게 삭제된 단어만 500여개가 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본래의 의미는 사라져 두루뭉술하게 수정된 문장도 즐비하다. 화가 홀워드 바질이 친구 헨리 워튼 경(해리로 불림)’에 전시회에 도리언의 초상을 전시하지 않겠다며 그 이유를 말하는 구절인 긋는 선마다 사랑이 깃들었고, 붓이 닿을 때마다 열정이 묻어났어.”와 같은 문장 역시 기존의 판본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듯이 이렇게 사라지거나 수정된 문장들로 인해 소설 본래의 색채를 상당히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1890년 최초의 판본은 독자들에게 탐미주의 그 원형을 더욱 매혹적으로 탐닉할 수 있게 해준다.

 

거칠게 표현한다면 바질의 친구인 헨리 워튼 경은 젊음의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도리언을 예술지상주의자로 인도하는 교사(敎唆)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젊음과 쾌락, 도덕적 이상의 쓸모없음을 역설하며, 제어되지 않는 열정과 갈망의 발산으로 청년의 영혼을 인공적 아름다움의 세계, 병적인 감수성으로 이끈다. 그가 도리언에게 준 라울의 비밀이라는 책은 몽상과 병적인 꿈의 세계로 불멸의 아름다움, 삶을 대체한 예술적 삶이라는 광적 허기에 도취하게 한다.

 

이 예술로서의 삶에 대한 관점은 도리언이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던 셰익스피어 연극배우인 시빌 베인의 죽음을 해석하는 문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사건에는 훌륭한 비극에 걸맞을 법한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있어요. 나는 이 비극에 일조했으면서 아무런 상처도 입지 못했(117)”다고 해리에게 말하는 장면이다. 한편 이는 모두(冒頭)의 인용 구절처럼 역설적으로 현실적 삶이 예술적 삶을 깨울 때의 비극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삶이 예술의 열정처럼 열정과 위안, 희열, 아름답기만 한 것일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유미주의적 구현이 헨리 경의 과학적 실험이라는 것이다. 도리언은 그의 연구 대상이고, 그것은 그에게 풍성하고 유익한 연구 결과(77)”를 선사할 것이라는 의도에 있음이다.

 



헨리 경이 도리언에게 보낸 감각의 삶을 신비주의적 묘사로 채운 책, 라울의 비밀에 도리언이 중독되어 삶의 지향 점으로 삼는 것, 몽상과 병적 꿈, 자신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스스로 정신적 타락에 흥미를 느끼며, 삶 자체가 모든 예술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예술, 다른 예술 또한 삶을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158)”는 믿음을 무의식 속에 이입시키는 것이다. 이와 병행하여 바질의 도리언에 대한 사랑, 예술적 영감이 모두 투여된 초상화가 도리언의 죄악과 수치심을 대신하여 반영하는 거울상이 되고, 그의 페르소나 변화의 영원한 증거물이 되어 변치 않는 젊음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며, 병적 아름다움의 열정을 거침없이 발산하는 도덕적 담보가 되어주는 것은 위태로운 비극의 도래를 내정한다.

 

이 예술지상주의적 삶에 대한 신념이 헨리 경의 방관적 지성과 도리언의 실천적 행위를 오가며 그 실체를 보여주는 장면들은 지겨울 만큼 지면을 많이 차지한다. 이것은 삶의 형식으로서 예술의 필요성을 역설하는가하면, 삶의 재창조를 위한 동력으로서 쾌락주의의 구원을 웅변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사회는 성대한 의식에 어울리는 위엄과 비현실성을 갖추어야하고, 낭만극의 위선에 낭만극의 매력인 위트와 아름다움을 결합해야 한다. 위선이 그렇게 나쁜가?(174)” 라며 삶의 방편으로서 위선과 삶의 불필요로써 도덕성을 무시하기까지 한다. 판단이야 독자의 몫이겠지만, 이 허기로 가득한 열정의 광기가 과연 삶의 동력, 의미가 될 수 있을지?

 

내정된 비극은 기어이 도달하는데, 그림이 자신을 망가트렸다고 바질에게 자신을 포획한 병적 죄악의 원인을 초상화, 그리고 화가에 돌리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가슴에 칼이 박힌 야회복 차림으로 주름투성이의 메마른 얼굴을 한 시신(231)”의 귀결보다는 실험을 끝내듯 헨리 경이 발설하는 문장은 그야말로 얄궂기 그지없다. 삶의 우연성에 대한 서정적 일상성에 대한 평범성은 왠지 시대적 지성의 교활성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소설이 그만을 살려 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일까? 살아남는 자들의 세계에 대해서?

 

이 작품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작가의 삶을 멈추게 한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회의 도덕적 관용이 수용하지 못하던 소설은 한 인간의 삶, 소명인 글쓰기를 훼손하고 만다. 감옥과 노역, 그리고 비참한 죽음만을 가져온 현실적 비극을 초래한, 마치 예술에 현실이 틈입할 때의 그 노골적인 폭력성과 비논리성을 입증하려는 듯 말이다. 진정한 삶이란 정말 무엇인지? 때론 허무하고 공허하며 기만적이기만 한 세계에서 도덕적인 편견을 전시하려고 이 세상에 온 게 아니(81)”라는 헨리 경의 주장처럼 필멸이라는 부조리한 삶을 극복하겠다는 하나의 믿음으로서 예술을 살다 간 위대한 작가의 용기 있는 실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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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튈 사라쟁(Catulle Sarrazin)의 소설 라울의 비밀(Le Secret de Raoul)- 나는 실제하는 작가와 작품인가하고 열심히 찾아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작가와 소설은 오스카 와일드가 가공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다만, ‘조리스 카를 위스망(Joris-Karl Huysmans)’거꾸로의 유사성으로 이를 은폐하여 다르게 표기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비평계의 중론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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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문화 - 내부자가 된 외부자 교유서가 어제의책
피터 게이 지음, 조한욱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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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뺨을 하고 활기차게 걷는 미소년의 무한한 미적 활력과 번영처럼 보이던 한 시대의 문학, 철학, 정치, 미술, 건축 등을 아우르며, 그 표면적 화려함 이면의 비이성적 퇴행을 읽는 거대한 문화사적 비평이다. 이 위대한 문화 해독을 읽으며 어떻게 대중과 지성의 무리가 자신들 삶의 무대를 폭력과 살해가 일반화되는 전체주의 사회로 돌진케 하는지 그 상호성과 혼돈을 목격하게 된다.

 

책의 진술들은 그 풍성함과 우아함, 그리고 냉철함과 명료함의 지성으로 가득하다. 토마스 만, 그로피우스, 브레히트 등 강렬한 창의성을 번뜩이던 수많은 천재 예술인들이 명멸하던 시대,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918년 제국주의를 마감하는 혁명으로 시작된 새로운 정체를 꿈꾼 바이마르 공화국의 가장 처절한 정치적 혼란, 민주주의 실험장에서 빚어졌다는 점이다. 폭넓게 대중의 마음에 침윤된 반이성과 맹목적 숭배의 종교적이라 할 독일인들의 광신적 몰입은 오늘의 우리에게 예리한 칼날처럼 다가온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1918119, 빌헬름 2세의 독일 제국의 1차 대전 패배에 따른 피로감과 적대감 속에서 새로운 독일을 향한 출발의 희망으로 시작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1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분출했던 무수한 이상(理想)들의 외침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희망, 독일 최초의 의회민주주의를 성취하려했던 바이마르공화국의 민주주의 실험의 장은 1933130, 정말 하찮은 키치에 불과했던 아돌프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면서 죽음이 창궐하는 암흑, 지옥의 개막으로 수명을 다한다.

 

문화는 사회와 연속적이고 긴밀하게 상호작용을 하고 있으며,

정치 현실의 표현이자 비판이었다.” -232

 

이 책은 제목처럼 특정한 시대의 문화를 성찰하는 문화사(文化史)이다. 그러나 주체들이 발설하는 표현 행위인 문화는 소시민 대중의 관심의 대상이며, 그것의 발흥과 열광은 곧 정치이다. 문화가 담고 있는 정신에서 정치를 배제하는 것은 실로 어불성설일 것이다. 한 무식한 정치배가 문학이 정치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는 말처럼 반지성적 언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화와 정치의 상호작용의 방향성은 항상 일관된 것이 아니다. 문화가 선도하고 정치가 그에 반응하는가 하면 문화가 고작 정치의 시녀가 되어 정치를 반영하는 거울에 머물기도 한다. 어쩌면 이러한 선도와 거울의 양면성의 역학 관계를 관찰하는 시선의 중요성은 하나의 의도이기도 할 것이다.

 

민주주의 실험, 그 진통

 

우선 바이마르 혁명 정부의 출범기인 191811월부터 4 년간의 처절한 혼돈의 시대를 다루는 제 1탄생의 진통15년이라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시대적 배경이다. 1918년의 혁명은 그런저런 혁명(so-called revolution)’, 또는 늙은 허깨비들이 다수를 이루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그 나물의 그 밥이었으며, 하나의 소극(笑劇), 허구(虛構)로 보이도록 만드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는 세력의 집요한 반동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과는 아주 동떨어진 왜곡인데,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주축이 된 공화국 정부에 적대감을 지닌 기득권 집단의 줄기찬 반동적 선전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까닭에 근거한다.

 

군주제 지지자. 광신적 군국주의자, 반유대주의자, 외국인 혐오주의 등 수구적 사고가 폭넓게 사회를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반감으로 무장된 이들의 정신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구나 급진적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하는 스파르타쿠스단의 극좌세력과 제국주의, 군국주의자를 세력으로 하는 극우 집단의 극심한 갈등이 놓여있었다. 이 혐오와 갈등은 극우 집단의 광범위한 암살로 인해 기득권 세력인 보수우익의 승리로 끝난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들의 암살로 피살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혼란기의 한 산물이다.

 

1차 대전, 전쟁의 야욕과 패전, 그리고 베르사이유 조약이라는 자기 영토의 상실과 막대한 배상금의 부담 등 국가적 손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제국주의자들, 군국주의자들은 그 어떠한 죄의식이나 수치심이라는 각성은커녕 오히려 그 책임을 바이마르 정부에 넘기며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공화국의 주축 세력인 사회민주주의당이 최대다수당이긴 했으나 총 의석의 3분의 1도 갖지 못하고 군국주의자로 구성된 카톨릭중앙당, 부르주아 세력인 민주당, 제국주의자들인 국가인민당등과 연합정권을 구성하여야 했으니 실질적 지배권을 갖지 못한 것이 하나의 큰 이유였기 때문이다.

 

이 때의 지성의 분위기는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전하고 있다. 대학교수, 기업인, 정치 엘리트들은 제국의 가치를 민주주의와 교환하기를 꺼렸다.” 이것은 바이마르의 운명은 사실 볼 것도 없다는 말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공화국의 출현은 역사적 필연이라 생각했음에도 공화국을 사랑하지도 않았으며, 그 미래또한 믿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지식인들의 이러한 인식은 모든 문화 엘리트들 작품의 근간을 이룬다. 문학, 사상, 건축, 연극, 영화에 이르는 당대 문화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것들이 표현하려했던 것의 본질적 형태가 드러날 것이다. 이 저작의 단연 돋보이는, 저자의 의도이자 지향점일 것이다.


 



감상적 영웅주의, 그리고 반()이성의 확산

 

그것은 반이성이요, 반지성의 광범위한 점령, 아마 이러한 자기기만을 시대의 물결 속에서 빠져나와 바라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설혹 존재할지라도 금세 그 조류 속에 묻혀 버리고, 관심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기에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목소리가 되지 못함을 발견하게 된다. 오만과 기만, 탐욕스러움과 무지가 거들먹거리며 횡행하는, 호도된 진실만이 세상의 주류가 되어 대중을 세뇌하기 때문이다. 이제 잡설은 여기서 그치기로하고 그 무진장한 문화예술의 실험장이요, 각축장이 되었던 바이마르의 일견 화려한 문화의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그것은 먼저 책의 두 번째 장()이성의 공동체, 즉 지식인 집단들의 지향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순서가 될 것 같다. 대표적인 연구소를 중심으로 그들의 정신, 이성(理性)이 왜 그 세계의 실질적 동력이 될 수 없었는가의 문제이다. 우선 바이마르의 가장 특징적 정신으로 논의되는 바르부르크 연구소의 이성의 능력에 대한 철저한 믿음의 실천이다. 에른스트 카시러, 에르빈 파노프스키, 파울 레만과 같은 석학들로 구성된 이 연구소의 업적들이 사회의 내부에 침투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정권의 내부에 영향을 미치는 데 한계를 지닌 기관이었음이다.

 

프로이트의 베를린 정신분석연구소 또한 당시 의학계와 정신병리학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배제된 외부자로 적대시 되었으며,. 대중의 시선은 이러한 적대감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이에 못지않았다. 그 전도유망함에도 불구하고 외부자로 배척되었다는 것이다. 호르크 하이머, 에리히 프롬, 테오도르 아도르노 등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 또한 강력한 지성 집단이었음에도 결코 내부자와 연결되지 못하는 외부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강력한 지식인 집단인 바이마르 정신의 정수들이 공무의 핵심에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독하듯이 이들 지성은 실제로 내부자가 되지 못하면서 단지 그들과 관계를 쌓으면서 때때로 영향을 미치는 데 불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중에 폭넓게 뿌리내린 반()유대주의적이며 반이성적 정서와 반민주주의, 반사회주의 성향 때문이랄 수 있다.

 

당시의 대중적 지성들, 즉 내부자인 대학과 정부관료, 주류 언론의 분위기를 묘사한 글을 보면, 전문가의 차가운 정확성보다는 우아하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선택하겠다.”라거나, 과학적 연구의 차가운 실증주의에 경멸을 표하였고, 분석이 아니라 생동하는 직관을 통한 위인과 역사적 순간에 대한 몰두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설이 된 황제, 플루타르크에 등장하는 영웅들에 대한 신비의 갈망에 젖어있었음이다.

 

이 책의 최고 진술이랄 수 있는 3비밀스런 독일, 4전체성의 갈망라이너 마리아 릴케토마스 만’, ‘호프만슈탈’, ‘하이데거에 이르는 문학과 철학, 나아가 건축과 예술 전반이 시대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거울에 불과했음을 설득력 있게 전개한다. 즉 시류에 영합하는 문화예술이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릴케는 시대가 요구하는 우상의 필요성에 의해 조작된 인물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어른이 없는 세대의 우상에 불과했으며, 그는 지나친 수사, 과장된 주장, 감수성, 유사철학과 비슷한 신비주의, 직관적 방법으로 점철된 순전히 주류 우파의 비평 덕을 입은 기이한 열정에 환호하는, 즉 대중의 실체를 증명하는 자기도취의 찬미였을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릴케를 비롯한 당대의 시는 독일을 파멸시킨 도구 중 하나였다(144)”고 저자는 결론짓는다.

 

독일 사회는 이미 극도의 피로감에 젖어들고 정치적 냉소주의에 빠져든다. 우파를 이루는 군국주의, 제국주의, 부르주아 등 주류집단의 비이성주의가 몰고 온 바이마르 흔들기의 혼란은 소시민 대중에게 정치 거부, 옛 정신 습관으로의 회귀를 부르짖게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1918토마스 만은 이를 확인하듯 나는 비정치적 인간이며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비정치 인간의 고찰이라는 600페이지짜리 책을 발표한다. 더구나 이러한 시류에 부응하기위해 프리드리히 대제의 영광을 칭송하는 회귀적 논문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독일과 독일문화의 이 퇴행적 행위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문명적 지성을 대표하는 정치가인 그의 형 하인리히 만의 문학의 반정치적 행위의 비판에 반발하며 이같이 반론을 쓰기도 했다. 정치는 인간을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완고하고 비인간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나는 정치에 대한 믿음을 혐오한다.”. 그가 민주주의와 공화국의 지지자로 전향한 것은 때늦은 1920년대 후반의 일이다. 당시 독일 사회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깊이 반이성주의에 빠져있었는지에 대한 실증적 사례로 토마스 만이라는 지성인만큼 명료한 증거는 없을 것이다

 

사회 구성원이 공공의 이익을 지향해야 한다는  일반의지는 오늘에는 시민들이 지닌 당연한 이해일 것이다, 허나 1920년대의 독일인에게는 이러한 시민적 소양으로서의 일반의지는 대개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모든 개개인은 저마다 완강하리만큼 편파적이었으며, 지방색과 편협성, 자기들이 속한 무리의 신념에만 몰두하는 그 반지성에 대한 각성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나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로 알려진 퇴니스와 같은 반이성과 전체주의를 선창하던 부류들의 고의적이며 치명적인 사고를 여기서 나열하는 것은 배제하겠다. 다만 아래와 같은 하이데거의 흉측스러움을 묘사한 문장으로 갈음한다.

 

피로써 사고하고,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숭배하며, 살인을 찬양하고 실행하였을 뿐 아니라 죽음 자체인 삶을 취한 듯 포용함으로써 이성을 영원히 근절시키기를 희망(174)” 하는 나치 찬양의 글은 역겨움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이에 뒤지지 않는 당대에 명성을 떨친 슈팽글러의 글은 더욱 가관이다. 권력은 전체에 속한다. 개인은 전체에 봉사한다. 전체가 주인이다.”, 이것이 1920년대 독일사회의 시민대중과 지성이 열광하던 문장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다가오게 하고 있는지 알았을까? 아마 결코 알지 못했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맹목적으로 열광하는 무지, 바로 반지성이다.

 

과거의 향수, 영웅숭배, 변명적 왜곡과 완전한 허위의 무비판적 수용, 악명 높은 자해 신화가 대중 전반의 의식을 차지한 독일 사회, 각성이 있었을까? 그러나 모두에 언급했듯 누군가의 표현을 해독하고 그것의 의지를 알아내는 일은 대중지성과는 먼 것이다. 소시민들은 이성, 즉 직관을 넘어서 앎을 추구토록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뿐더러 하지도 못한다.

 

시대의 징후적 해석, 1924마의 산

 



바이마르에 대해 중요한 징후적 의미를 갖는 사실주의 소설 마의 산은 이 책의 각 장에서 반복적으로 소환되며 바이마르의 대중 지성을 읽는 이정표로 제시되고 있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주창했던 정치가 하인리히 만을 형으로 둔 토마스 만의 목소리는 대중의 시선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이기도 한 까닭이다. 오늘날 그의 작품을 해독하는 이들 사이에 서로 다른 논평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단순한 인물 한스 카스토르프를 통해 낭만주의와 귀족주의의 향수와 죽음에 대한 사랑과 같은 야만성을 읽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것은 토마스 만 자신의 설명이다.

 

이 소설의 불쾌한 퇴행성에도 불구하고, 성장소설이라는 표면 뒤에 쓰여진 상징적 의미들은 시대정신의 세심한 묘사를 읽어내고 현재의 각성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각성의 시대로 불리는 1924년의 문을 연 작품인 까닭이다. 잠행성 질병을 숨기기도 하고 일부러 드러내기도 하는힘차게 걸어 다니는 붉은 뺨의 환자들이나, 평화를 역겨워하고 죽음의 무도회가 준비되었으며, 표면적으로는 번영하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부패한 요양소처럼 당대의 현실을 상징하는 배경 속에서 자유주의자와 반이성주의자, 문명적 지식인을 대변하는 인물들이 열연케 하고 있음을 우리는 선연하게 읽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결론을 굳이 기술하지는 않겠지만 소설은 감정적 군국주의자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에 전념하는 길에 도착하는 인물을 통해 이성적 공화주의자가 아닌 모호한, 즉 각성은 각성이지만 미완의 무엇이라는 여지를 남겨둔다.

 

그러나 이러한 각성의 시대에서 왜 급격하게 다시금 반이성적 혼돈의 시대로 이전된 것일까? 이들 지성은 무엇에 저항하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왜 공화국에 반감을 떨쳐내지 못했던 것일까? 공화국은 민주주의와 과학, 합리적 이성이라는 현대성을 지향하고 있었다. 계급과 권위의 타파, 비이성과 신비주의로부터 벗어난 이성에 대한 반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시대가 내건 이러한 표상들을 피상적이고 편의적으로만 수용한 개인들의 욕망의 목소리는 곧 혼돈과 퇴행을 의미했으며, 이렇게 분열된 시민 집단은 공동체로의 통합에 대한 절박한 필요성으로 표출되어 전체성의 갈망이 되었다, 물론 이렇게 결속과 통합의 갈망이라는 퇴행이 절대 다수이기는 했지만 이성을, 과학의 사용을, 허무주의가 아니라 건설을 통해 현대성을 수용하려는 인물들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우하우스를 창립한 그로피우스는 이 소수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겐 반쪽짜리 추구로 보인다.  경제적 필요와 미학적 필요 모두를 충족시킴으로써 전체성을 충족해야 하며...”처럼 이들을 강박적으로 묶어놓는 것, 즉 전체성이라는 악령의 그림자를 떨쳐내지는 못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편화의 비극은 기계나 작업의 세분화에 의해 초래된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물질주의적 심리상태와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비현실적이고 결함 많은 관계에 의해 초래된 것(201)”이라는 선언처럼 당대의 현실을 제대로 판단하고 있기도 했다.

 

표현주의 그리고 전체주의로

 

책은 표현주의에 대해서도 비상하리만큼 분량을 할애하는 데, 노동자들의 동정을 담은 그림을 그린 케테 콜비츠’, ‘오토 딕스’, ‘리프 크네히트등의 일련의 표현주의 화가들만을 겨냥하여 문화적 볼셰비키운운하는 것은 조잡한 적대감일 뿐 실상은 에밀 놀테등 사악한 반유대주의처럼 국수주의적 전체주의도 표현주의의 대표였기에 표현주의를 어느 일방의 이데올로기로 이해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것임을 지적한다. 표현주의는 모든 종류의 정치와 양립하는 현실의 돌파구, 신비로움에 대한 애착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의 주제어를 지목하라 한다면 그 답으로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반역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것은 바이마르 시대를 관통하는 표현주의 예술 작품들의 공통 주제였다는 것이다. 191811월 혁명은 부권에 대한 반역이며, 폭군같은 아버지와 자유를 갈망하는 아들의 대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문학과 연극 작품을 통해 이 반역은 순전히 주관적이고 반이성적인 의미만 있었을 뿐이며, 한마디로 이성적 질서의 살해였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새로운 각성의 움직임이 있었음에도 왜 독일사회는 급격하게 반혁명, 반공화국, 반민주주의로 선회하였는가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베르사이유의 불평등 조약의 책임을 비록 바이마르 정부에 떠넘기는 후안무치를 보였지만 보수 우익집단을 그 죄업의 족쇄로부터 풀려나게 한 1925년의 로카르노 조약 체결이다. 독일이 당당한 독립적 위치로 프랑스 및 인접국들과 대등한 협상의 지위를 지니게 한 사건이다.

 

다시 질병의 징조를 숨긴 붉은 뺨이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거대 산업 카르텔을 소유한 반동적인 우익 거물이 언론 산업 제국까지 거머쥐며 반혁명의 기치를 대중에 전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중 일간지와 영화사, 출판의 판로 독점 등 모든 선전 창구를 독식하고 증오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영웅 찬미와 정치적 혼란의 의도적 조성은 민주적 역량을 갖지 못한 맹목적 소시민 대중의 정신 상태는 공화국에 대한 환멸이 더해지고 회의와 좌절, 냉소주의에 도달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극한적 정치적 분열과 극악하고 상스러운 논쟁만이 난무하는 혼돈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제 평화를 택해야 한다는 말은 진부하고 금지된 말이 되었으며, 죽음에 도취된 청년들은 모두가 우익이 되어 나치에 잠식된다. 이들은 부친을 살해한 아들을 자처했지만 실은 누가 아버지이고 아들인지의 문제에 이르면 극히 전도된 언어임을 1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아들이며 노쇠한 전체주의적 망령, 그 퇴행 속으로 눈을 감고 돌진한 청년들이야말로 살해되어야 할 아버지였다는 것을,

 

영도자를 향한 맹목적 추종, 영웅숭배에 집착하였던 이들은 현실의 곤란성, 그 위험, 그 가혹한 법칙을 결코 파악하지 못했으며,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또한 알 능력도 지니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한 시대가 무능력과 무지로 야기되는 공포와 의혹, 비이성이 뒤섞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그 총체적 불협화음의 현장을 거닐다보면 어느새 21세기 한국사회, 바로 지금에 도착해 있는, 그 동일 유사성에 전율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맺으며: “공포와 테러와 무책임과 기회상실과 수치스러운 배반의 이야기

 

1920년대의 바이마르를 무수한 문화적 창조가 실험되던 황금의 시대라 부르기도 하지만 이 책은 그 문화가 정치와 어떻게 교섭하면서 충돌하는지, 그 문화가 담지하고 있었던 시대적 의미는 무엇이었는지를 포착해내는 거장의 냉철한 통찰력이 빛을 발하는 명 저술이다. 또 한편으로는 100여 년 전, 1930년 전후의 시기에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종말을 앞당긴 고질적인 대중의 어리석음이라는 질병, 소시민들의 만연한 무지가 폭넓게 그 사회를 휩쓸었을 때, 한 나라의 역사적 멸망, 세계적 최악의 사건이 어떤 토양에서 출현하는 것인지를 목격케 하는 인류사적 비평이기도 하다.

 

히틀러라는 보잘것없던 존재가 허위와 음모를 통해 수상에 취임하게 되고, 이후 희대의 폭력과 살해의 괴물이 되는 현장, 그 실체를 논평한 글이다. 나는 이 글에서 기시감(旣視感)에 전율하게 되었는데, 인간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그 동일한 대중적 실패의 확인이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독일 사회의 언어를 21세기 한국사회의 언어로 대체하면 그 섬뜩한 미래가 그려진다.

 

극우의 상징, 나치의 목소리가 지금 여기서 들린다는 아이러니라니...., 입을 닫은 지성으로 불리던 자들의 기회주의만이 꿈틀대고, 겁먹은 우익 정치꾼들은 아부에 여념 없는, 게다가 맹목적으로 환호하는 몽매한 소시민들까지...역사는 끊임없이 여기저기서 그 행위를 무한 반복하며 인간을 실험한다. 21세기 한국의 대중과 지성은 독일의 1933년과 과연 다른 생각과 행동을 낳을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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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cho 2023-12-18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꼭 뵙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