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1890 쏜살 문고
오스카 와일드 지음, 임슬애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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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은 최후의 연기까지 끝마쳤어. (...)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을 떠다니며 그것에 사랑스러움을 불어넣은 유령, (...) 그녀가 현실의 삶을 건드린 바로 그 순간 삶은 훼손되었고, 그녀 자신도 훼손되었지. 그래서 죽은 거야.” -121

 

 

소설 속 이 문장은 삶이 곧 예술인 삶, ‘예술은 인생 최고의 위안이라 말한 테오필 고티에의 유미주의(唯美主義)의 현현, 바로 그것일 것이다. 세기말적 퇴폐주의 대표작에서 예외 없이 거론되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이를 확인하여 주듯 무거운 향내가 뚝뚝 묻어나는 병적 고백과 황홀경에 관한 신비주의적 감각(162)”을 삶의 의미로 하였던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판본에 대해 먼저 얘기하는 것을 잊었다. 기존의 판본들은 수많은 도덕적 시비 속에서 대대적인 두 번의 수정과 삭제 끝에 출간된 1891년 이후의 원고들이다. 이 책의 제목에 ‘1890’이란 년도의 표기가 달라붙은 까닭은 공식 출간되기 전에 잡지 월간 리핀콧에 게재되었던 1890년 최초의 원고를 판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기존의 결정판이라 불리는 소설에서 볼 수 없는 단어들과 문장들이 실려 있다.

 

도리언 그레이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책으로 “‘카튈 사라쟁의 소설 라울의 비밀(Le Secret de Raoul)1891년 이후 출간된 책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렇게 삭제된 단어만 500여개가 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본래의 의미는 사라져 두루뭉술하게 수정된 문장도 즐비하다. 화가 홀워드 바질이 친구 헨리 워튼 경(해리로 불림)’에 전시회에 도리언의 초상을 전시하지 않겠다며 그 이유를 말하는 구절인 긋는 선마다 사랑이 깃들었고, 붓이 닿을 때마다 열정이 묻어났어.”와 같은 문장 역시 기존의 판본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듯이 이렇게 사라지거나 수정된 문장들로 인해 소설 본래의 색채를 상당히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1890년 최초의 판본은 독자들에게 탐미주의 그 원형을 더욱 매혹적으로 탐닉할 수 있게 해준다.

 

거칠게 표현한다면 바질의 친구인 헨리 워튼 경은 젊음의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도리언을 예술지상주의자로 인도하는 교사(敎唆)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젊음과 쾌락, 도덕적 이상의 쓸모없음을 역설하며, 제어되지 않는 열정과 갈망의 발산으로 청년의 영혼을 인공적 아름다움의 세계, 병적인 감수성으로 이끈다. 그가 도리언에게 준 라울의 비밀이라는 책은 몽상과 병적인 꿈의 세계로 불멸의 아름다움, 삶을 대체한 예술적 삶이라는 광적 허기에 도취하게 한다.

 

이 예술로서의 삶에 대한 관점은 도리언이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던 셰익스피어 연극배우인 시빌 베인의 죽음을 해석하는 문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사건에는 훌륭한 비극에 걸맞을 법한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있어요. 나는 이 비극에 일조했으면서 아무런 상처도 입지 못했(117)”다고 해리에게 말하는 장면이다. 한편 이는 모두(冒頭)의 인용 구절처럼 역설적으로 현실적 삶이 예술적 삶을 깨울 때의 비극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삶이 예술의 열정처럼 열정과 위안, 희열, 아름답기만 한 것일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유미주의적 구현이 헨리 경의 과학적 실험이라는 것이다. 도리언은 그의 연구 대상이고, 그것은 그에게 풍성하고 유익한 연구 결과(77)”를 선사할 것이라는 의도에 있음이다.

 



헨리 경이 도리언에게 보낸 감각의 삶을 신비주의적 묘사로 채운 책, 라울의 비밀에 도리언이 중독되어 삶의 지향 점으로 삼는 것, 몽상과 병적 꿈, 자신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스스로 정신적 타락에 흥미를 느끼며, 삶 자체가 모든 예술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예술, 다른 예술 또한 삶을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158)”는 믿음을 무의식 속에 이입시키는 것이다. 이와 병행하여 바질의 도리언에 대한 사랑, 예술적 영감이 모두 투여된 초상화가 도리언의 죄악과 수치심을 대신하여 반영하는 거울상이 되고, 그의 페르소나 변화의 영원한 증거물이 되어 변치 않는 젊음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며, 병적 아름다움의 열정을 거침없이 발산하는 도덕적 담보가 되어주는 것은 위태로운 비극의 도래를 내정한다.

 

이 예술지상주의적 삶에 대한 신념이 헨리 경의 방관적 지성과 도리언의 실천적 행위를 오가며 그 실체를 보여주는 장면들은 지겨울 만큼 지면을 많이 차지한다. 이것은 삶의 형식으로서 예술의 필요성을 역설하는가하면, 삶의 재창조를 위한 동력으로서 쾌락주의의 구원을 웅변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사회는 성대한 의식에 어울리는 위엄과 비현실성을 갖추어야하고, 낭만극의 위선에 낭만극의 매력인 위트와 아름다움을 결합해야 한다. 위선이 그렇게 나쁜가?(174)” 라며 삶의 방편으로서 위선과 삶의 불필요로써 도덕성을 무시하기까지 한다. 판단이야 독자의 몫이겠지만, 이 허기로 가득한 열정의 광기가 과연 삶의 동력, 의미가 될 수 있을지?

 

내정된 비극은 기어이 도달하는데, 그림이 자신을 망가트렸다고 바질에게 자신을 포획한 병적 죄악의 원인을 초상화, 그리고 화가에 돌리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가슴에 칼이 박힌 야회복 차림으로 주름투성이의 메마른 얼굴을 한 시신(231)”의 귀결보다는 실험을 끝내듯 헨리 경이 발설하는 문장은 그야말로 얄궂기 그지없다. 삶의 우연성에 대한 서정적 일상성에 대한 평범성은 왠지 시대적 지성의 교활성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소설이 그만을 살려 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일까? 살아남는 자들의 세계에 대해서?

 

이 작품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작가의 삶을 멈추게 한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회의 도덕적 관용이 수용하지 못하던 소설은 한 인간의 삶, 소명인 글쓰기를 훼손하고 만다. 감옥과 노역, 그리고 비참한 죽음만을 가져온 현실적 비극을 초래한, 마치 예술에 현실이 틈입할 때의 그 노골적인 폭력성과 비논리성을 입증하려는 듯 말이다. 진정한 삶이란 정말 무엇인지? 때론 허무하고 공허하며 기만적이기만 한 세계에서 도덕적인 편견을 전시하려고 이 세상에 온 게 아니(81)”라는 헨리 경의 주장처럼 필멸이라는 부조리한 삶을 극복하겠다는 하나의 믿음으로서 예술을 살다 간 위대한 작가의 용기 있는 실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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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튈 사라쟁(Catulle Sarrazin)의 소설 라울의 비밀(Le Secret de Raoul)- 나는 실제하는 작가와 작품인가하고 열심히 찾아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작가와 소설은 오스카 와일드가 가공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다만, ‘조리스 카를 위스망(Joris-Karl Huysmans)’거꾸로의 유사성으로 이를 은폐하여 다르게 표기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비평계의 중론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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