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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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해금이 등‘아홉 송이 수선화’가 밟았던 인생길은 그 가장 예뻤을 시절을 앗아가 버린 우울하고 고통스런 시간으로 우리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메케한 냄새와 희뿌옇게 도시를 점령한 최루가스와 차 밑창을 하늘로 한 채 뒤집혀 불타고 있는 경찰차량, 연일 새까맣게 몰려드는 시위학생과 군중, 그리고 착검한 소총을 둘러멘 공수부대 계엄군, 짭새한테 용돈 받고 동료를 밀고하는 파렴치한 녀석들, 계엄군 검열에 삭제되어 시커멓게 이 빠진 신문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새롭다.

소설처럼 우리들은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밤하늘 아래 원을 두르고 어깨동무하여 민주를 외쳐댔었다. 당시 대학신문사에 있었던 나로서는 거의 시위현장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밤이면 낯 시간의 시위를 마치고 인근의 대학으로 몰려드는 지방대 학생들까지 합세한 한 밤의 열기를 취재하느라 날 새기를 밥 먹듯 하기도 했다. 경애, 수경, 승규, 이들의 터무니없는 주검이 일상처럼 우리들의 환경이 되어버린 그런 야만의 시대였으니, 그 가장 예뻤던 스무 살은 온통 상실에 휩싸여 있었을 뿐이었다.

작가는 그러나 온 몸으로 살아내었던 스무 살의 해금이와 정신, 승희, 만영이...가 가장 예뻤다고 기억한다. “다른 사람의 슬픔 때문에 우는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좀더 아름다워질 거야”하는‘시인(김진혁)’의 위로처럼 그네들의 울음이 “야만의 시간을 인간의 시간으로 바꾸”고, 한국 민주주의의 진일보를 만들어냈으니 그보다 예쁜 모습이 어디에 있을까.

30년 전 그때 민중들의 삶은 정말 고단했다. 늦은 저녁 동네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길가에 연탄불을 내놓고 국수 삶을 물을 끓이는 이웃들이 허다했다. 오랜 군부독재의 그늘아래 신음하던 서민들의 삶은 뒤틀릴 데로 틀려있어 노란 불빛이 비추는 단란한 가족, 그것이 희망이던 음울한 시절이었다. 스무 살 해금이들은 그래서 공장으로 막노동으로, 이념의 장으로 변질된 대학에서 ‘뚜뚜전’의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고, ‘혁명적 노동의 길’이라는 낯선 길로 내몰렸었다. 지금은 디지털단지라고 멀쩡하게 이름까지 바뀐 당시의 구로공단은 작품에서처럼 소외된 공장노동자들의 벌집이 다닥다닥 붙어 그야말로 “본능만이 살아서 꿈틀대는 동네”, “야만의 시간이 지배하는 동네”였다.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기막힌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의 정부발표는 비밀주의와 폭력성, 국민 기만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독재정권의 파렴치한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악아, 우지마라. 사는 것은 죄가 아닌게로 우지를 마라”하고 해금이를 토닥여주는 승희 엄마의 품속, 아주 오래 묵은 엄마의 냄새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잊어버렸던 그 처절했던 기억들을 풀어낸다.

이 작품은 이렇듯 오늘의 우리들이 이루어낸 소중한 가치들을 당시대를 절절히 앓아왔던 해금이 들의 모습을 통해 잔잔하지만 격렬하게 토해내고 있다.

그러나 작품 어디에도 극한적이거나 과장된 표현은 없다. 냉혹하고 야멸치게 쏴 부쳐야 할 때 작가 특유의 유머와 위트 넘치는 문장이 더욱 속 깊은 의미로 다가서게 한다.

상경한 아이들을 데려다 매매하는 인간쓰레기의 “자아 여러분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이렇게 길 잃은 어린 양들을 제게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하는 기도는 굳게 다물어졌던 입을 파~아~하고 터지게 한다. 또한, 노동자와 운동하는 이들과의 괴리, 즉, 당시 노동운동의 모습을‘일터’와 ‘현장’, ‘일꾼’과 ‘존재이전’이란 허풍스런 비난에 슬쩍 담아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작품은 그냥 노동이 아니라 노동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1980년 해금이 들의 그 서럽기 그지없는 눈물들을 아른거리게 하고,  건강함과 정당함이 배어있는 아름다운 그네들의 얼굴, “짜디짠 소금물이 어쩔 땐 영혼 속까지 배어들어오는 느낌”으로 시대를 살아온 그네들을 잊을 수 없게 한다. 진정 가장 예뻤던 스무 살의 그 터무니없던 시절을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선으로 그러나 통렬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왜 아무렇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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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의 원근법>을 리뷰해주세요
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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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술기행문을 순수한 미술에세이로 읽기위해서는 몇 가지 부담스러운 표기를 감수해야 한다. 일본식 어휘의 고집(예: 원주민-선주민), ‘한국’의 표기를 거부하고 ‘조선’을 주장하는 작자의 정체성에 대한 거부감을 잠시 물리치는 일이다. (이에 대한 비판은 別論으로 하자)

몇 개의 장은 독일 등지의 미술관 방문을 통하여 확인하고 감상된 표현주의 미술 작품을 중심으로 한 작자의 단상이고, 일부는 대담형식을 차용한 미술평론이며, 또 일부의 장은 주관적 미술에세이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미 이들 에세이는 오래전 일본의 잡지들에 발표되었던 내용들을 재구성한 것이어서 부분적으로 시간의 왜곡현상이 빚어지기도 하지만 작자의 초지일관하는 주제만큼은 분명하다.

독일 표현주의 작가 ‘에밀 놀데’의 고향 ‘제뷜’의 작은 미술관을 향한 작자의 기행에서 작자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이내 알아차릴 수 있다. “미의식이란 ‘예쁜 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아니다.”라고 정의하고 미의식은 역사적, 사회적 산물일 뿐이라는 주장과 상통한다.

그래서 독일 표현주의 운동의 핵을 형성한 놀데를 중심으로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로빈스 코린트’ ‘조지 그로스’의 작품을 통하여 주제를 표현하는 미술, 즉, “동시대인의 찌푸린 얼굴에 거울을 들이대는” 진실주의 회화에 집중한다.  내적 충동표현의 광기에 열광하는 것이다.

이어 이의 연장선에서 전쟁의 기억을 그려낸 신즉물주의(新卽物主義) 화가 ‘오토 딕스’에 대한 찬양적 수사가 한 개의 장을 이룬다. 전쟁의 참혹한 폐해에 대한 경고로 해석되는 그의 전쟁화(전쟁제단화)를 비롯한 나치의 퇴폐화(畵) 박해 등 일련의 추함의 미적 추구를 설파한다. 이는 한국미술에 전쟁화가 거의 없고 예쁜 미술에 집착한다는 일종의 한국미술에 대한 비판과 결합한다. 즉 한국의 근대화란 일본의 식민지로서 강요당한 2급 시민의 입장에서 경험했기에 완전한 근대화 주체일 수 없었기에 그렇다는 것이고 또한 국민들의 미의식을 통제하고 지배하려했던 한국의 군사정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에 공여한다. 결국 미술은 20세기 초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들이 보여주었던 체제저항과 소외된 삶들에 대한 적나라한 표출을 담아내야 한다는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전쟁, 자본주의 모순, 인간의 탐욕, 시대상에 대한 증언으로서의 예술이 진정한 예술이라는 주장이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인한 유대인에 대한 핍박과 폭력의 증언자로서 ‘펠릭스 누스바움’이나 불신에 대한 광적 숭고로서의 ‘카라바조’의 해석은 작자의 특이한 집착과 열광을 보게 한다.

한편 ‘반 고흐’의 원근법의 권력에서의 탈피와 예술과 재화의 모순적 병행에 대한 당위화는 저작자 자신과의 동일시는 물론 미의식에 대한 작자의 전반적인 신념을 위한 기반이 된다.

역시 증언예술의 일환으로 사진작가 ‘다니엘 에르난데스 살라사르’의 유대인 학살사진자료를 비롯하여 피카소의 한국전쟁에서의 양민 학살을 주제로 한 ‘한국에서의 대학살(The Massarcre in Korea)'까지 인용하면서 1948년 제주 4.3사건을 들추어내기도 한다.  그리고 “현대 예술의 세계에서는 부재의 표상이 학살이나 전쟁을 예술적으로 표상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커다란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면서 “적절히 묻히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추도를 의미한다.”고 전쟁과 인간의 잔혹성을 빗대어 과거의 한국을 비하하기도 한다.

결국 이 미술기행문은 대한민국 여권을 가진 재일한국인이 한 발은 한국에 담그고, 일본에 거주하며, 한국은 부정하고 조선을 주장하며, 남북분단이 미국과 반민주세력에 동조하여 김일성의 민족세력을 중심으로 한 통일을 방해한 결과라고 믿는 사람의 낡은 이데올로기 예술을 동원한 분노 표현의 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시대에 대한 비판과 참여를 담는 미술이라는 이 저작물이 관통하는 주제를 예술사조에 대한 해설이나 비평으로만 읽기에는 순수치 못함으로 아쉬움을 떨치기 어렵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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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를 리뷰해주세요.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
권진.이화정 지음 / 씨네21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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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외국인들에게 서울이, 그리고 한국의 면면이 어떻게 보여 지고, 이해되고 있는지에 대한 인터뷰 모음집이다. 사실 이러한 단상들에 대한 내용은 100만 명을 넘는 외국인이 거주하는 우리사회에서 더 이상 신선한 소재거리도 내용도 전해주지 못한다.

특정분야에 초점을 맞춘 전문적 진단도 아니고, 그렇다고 TV 연예프로그램의 말초적이고 통속적인 에피소드의 나열도 아닌 어중간한 내용으로 이들의 관심사에 그렇게 집중할 화제가 없다.

영어선생, 디자이너, 화가, 영화학자, 댄서라는 직업과 각기 다른 국적을 가진 이들이 서울에서 어떤 일상과 접하고 그 가운데 느낀 우리사회에 대한 소견들을 마냥 호기심으로만 바라보던 시대가 아닌 오늘에는 그들이 어느 장소를 좋아하고, 한국인들이 어떻게 비춰지는지와 같은 일반적 관심사를 나열하는 이야기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파란눈의 영어선생님,‘로버트 프리먼’처럼 한 인간으로서 아시아의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삶의 가치관을 일궈나가고, 인생의 깊이를 깨달아가는 모습, 아이들의 순수와 성장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선생님인 자신을 돌아보는 이야기는 진정하게 다가온다. 한국인과 섞여 지내고 그들의 음식과 문화에 익숙해지지만 어쩌지 못하는 고독과 자신만의 시간을 즐기는 이방인의 진솔한 면모가 보기에 좋다.

모국에서보다 삶의 자유로움을 더욱 만끽한다는 이들과 경쟁의 일상에 빼꼭히 점령당해 옴짝달싹 못하는 우리네의 비견되는 삶에서 낯섦에의 도전과 고독함의 사유를 통해 삶의 진정성을 보는 것은 작은 발견이 될 수도 있다. 다소 추상적이고 모호한 표현인‘한국적’인 것에 대한 이방인들의 지적이 있지만 서구인들의 동양에 대한 판타지와 전근대적인 예스러움과 동의어만 같아 선뜻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무차별적인 도시 개발 능사를 벌이는 우리의 안목 부족은 안타깝고, 또한 경계되어야 하는 일면이고, 이에 더해 종로가로변의 혐오스런 도시라인의 훼손이나, 국립중앙박물관의 이도 저도 아닌 흉물스런 모습은 부끄럽기도 한 것은 사실이다.

서울 사람으로 동화된 이가 있는가하면 한국이라는 아시아의 한 지역에서의 신나는 경험을 안고 자신의 나라에 돌아갈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들의 시선에서 묻어나는 소견들을 맹목적으로 수용할 이유도 없겠지만 한결같이 조언하는 한국인들의 서구의 무차별적 흉내와 자신의 것을 잃어버려 궁극에는 한국을 표현할 어떠한 것도 남지 않을까한다는 우려는 오로지 물질에 현혹되어 소중한 삶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우리들에게 따끔한 충고로 새겨도 무방하리라.

그렇게 새로운 식견이나 시선을 담아내지 못하고 진부한 동어반복의 질문과 대답으로 구성된 이 소 책자의 정체성에 대해 회의를 접기 힘들지만, 지극히 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평범한 이들 이방인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미흡하나마 들어보는 짧은 기회로서 의미를 두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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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자 - 2009 제1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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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고 무상하다. 『대동여지도』라는 모티브를 통해 파렴치하고 부패한 시대와 소외된 민중의 삶을 이야기한다. 작품 내내 스산한 바람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는 것만 같은 회색의 고독을 떨쳐내기 어렵다. 홍경래의 난, 천주교의 박해, 민중의 삶은 외면된 채 권력과 탐욕에 찬 시기만 그득한 시대상은 우리사회의 변치 않는 모습 같기만 하여 무력감이 습격해 온다.

 

19세기를 휩쓸던 탐관오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와 민란(民亂), 그 민란의 주체인 피폐한 민중을 방패막이로 이용하는 관리들의 파렴치, 민중의 삶이란 단지 양반 기득계층을 위한 존재이상이 아닌 사회, 고산자(古山子)의 생애는 그러한 사회에서 시작된다. 조정(朝廷)이란 지배자들의 전유물인 지도, 실제를 안내하지 못하는 엉터리 지도, 민중의 삶과는 괴리된 지도, 그래서 아비는 차디찬 주검으로 발견되고, 어린 소년 김정호(金正浩)는 정처 없는 발걸음을 내디뎌야만 한다.

다리를 저는 딸아이에 대한 비릿한 연민이 가슴을 저미고, 피 붙이의 주검을 뒤로하고 생존의 길을 걸어야 했던 지워버릴 수 없는 고통이 너무도 아프게 그네들을 짓누른다. 그래서 한평생 산하를 흐르며 뚫었던 그의 발걸음은 진정 민중을 위한 염원이 되고 인생길이 된다. 한낱 민초로서 나라의 지도를 그리고 새겨나가는 일은 편협하고 사악한 사대부들의 사욕으로 숫한 고초와 마주하게 하고, 주변국은 물론 자기나라로부터도 위협과 장애만이 가해지는 환경은 참담함 그 자체이다.

 

혜련스님과의 인연은 그 애틋한 연민만큼이나 덧없다. 삶과 죽음의 선상, 환영 그리고 죽은 이의 젖가슴을 내쳐 빨던 생존의 본능과 그 비통한 연(緣)처럼 고산자의 삶을 지탱한 지도가 왠지 無常키만 하다. 『대동여지도』의 사적(史的)의의, 특히 정치사적 측면에서 위당 신헌, 혜강 최한기, 난고 김병연이 등장하는 토론은 오늘날 국경이란 의미에서, 그리고 당시대 지배계층의 사대주의와 무능함, 안일함과 겹쳐 당위와 아쉬움을 함께 보여준다.

 

민중의 삶을 지원하기 위한 실사구시(實事求是)로서의 지도와 위정자들의 무능력으로 인한 국경설정의 불분명에서 대동여지도의 경계를 이해한다. 간도, 대마도, 그리고 독도의 표기문제에 대한 많은 상념들을 떠올리게 한다.

도탄에 빠진 민초들의 비참한 삶은 외면된 채 그리고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탐욕과 권세에 몰두하는 지배계층의 치졸함과 무지, 사악함과 편협한 시선이 안타깝게 흐른다. 그래서 더욱이 사람의 자취가 없는 깊은 산하, 그가 내딛는 발걸음이 오롯이 새겨진 『대동여지도』에 대한 경외는 장엄하고 애틋하며 서럽다.

보부상들의 발품이 묻어있는 민초들의 지도와 같은 지원은 온 백성이 지도로써 자신들의 살림살이를 풍요롭게 가꿀 수 있어야 한다는 고산자의 신념에 더 할 수없는 응원이었으리라. “고요하고 자애로운 옛 산을 닮고 그에 기대어 살고 싶어 했던”선생의 외로운 발걸음이 가까이서 들려오는 듯하다.

한 인간으로서의 고독한 염원과 덧없는 삶의 행로가 시대를 뛰어넘는 현재성(顯在性)을 지니고 수려한 허구의 소설이 되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자못 통렬하다. 그이의 생과 사가 어찌 불투명할 밖에 없었을까를 되뇌는 어리석음이 서럽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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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 - 魔人, 판타스틱 클래식 01
김내성 지음 / 페이퍼하우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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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우리사회상을 배제하고서 이 작품을 감상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일제 식민지하에 시름이 깊던 시회였고, 문맹율은 50%에 이르렀으며, 순수문학이외의 장르는 예술적 지위를 얻기가 어려운 문단의 편협성과 아직은 과학적 지성이라는 근대 이성주의와 합리주의가 확산되지 못해 추리소설이 뿌리를 내리기에는 미흡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서야 비로소 서스펜스나 추리의 묘미를 손상시키면서까지 추리소설의 작품에 왜 신파조의 문체와 구구절절한 배경과 사건의 설명을 하여야 했는지 작가적 고뇌를 살필 수 있게 된다.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장편추리소설이라 하는 이 작품의 문학사적 위치를 떠나서도 작품의 전개속도와 스릴, 복선, 반전의 묘미는 물론이거니와 상징으로서의 은유적 몇몇 소재와 장치들은 오늘의 작품들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 또한 오늘의 시선에서 다소 진부할 수도 있을지 모르나 김중배와 심순애, 그리고 이수일식 남녀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당 시대의 시민적 문화코드를 읽을 수도 있으며, 바로 이러한 시대적 낭만성이 작품의 재미를 배가시키기도 한다.

세계적 무희인 절세가인(絶世佳人), 주은몽이란 여성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연속되는 살인사건과 주변의 모든 인물이 작품의 종반에 치달을 때까지 어느 누구도 범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구조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작품을 내쳐 읽게 만든다. 범인인가 하면 그가 살해당하고,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해월’로 지칭되는 살인귀의 신출귀몰은 독자들의 추리력을 이내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가장무도회라는 당시로서는 시대를 앞선 이벤트로 첫 장부터 추리적 장치에 독자를 긴장하게 한다. 젊은 미모의 무희와 50대 거부‘백영호’와의 혼인을 배경으로 옛 애인인 화가 김수일과 주은몽과의 관계가 드러나고, 이내 김수일의 묘연한 행방과 최고의 탐정 유불란의 등장, 급작스런 거부 백영호의 살해와 거듭되는 백씨 일가의 죽음은 살인마의 종적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주변 인물들과 얽히면서 이야기의 재미에 푹 빠져들게 한다.

일종의 복수극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지만, 거부의 죽음으로 인한 막대한 재산에 대한 탐욕 또한 살인의 동기로 작동하는 것은 오히려 진부함의 역설적 충격으로 의외의 재미를 선사한다. 경찰, 탐정, 변호사가 사건 수사의 전면에 나서는 모습은 사실 이국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삼각관계와 감성에 휘둘리는 탐정, 세세한 심리와 인물묘사가 더해져 추리적 상상력을 손상시킨다거나, 주은몽의 살인미수로 시작된 사건이 주변인물 들의 피살로만 진행되는 구조는 사실 어지간한 추리소설의 독자에게는 흥미를 상실시킬 수도 있다. 그럼에도 소설의 배경인 1930년대 명수대와 광화문, 태평로, 홍제동 등 서울(경성)을 소설 속에서 느끼는 흥미로움을 찾을 수도 있고, “과학을 믿는가” 하는 탐정 유불란과 임경부와의 대화에서 탐정추리소설의 당시 독서시장 저변에 대한 고뇌도 읽을 수 있다.

우리의 장르문학의 진정한 출발이 되고, 소외된 문학으로서의 추리소설분야를 외롭게 열어나간 선구자로서의 작가 김내성 선생의 작품을 70년이 지나 복원판으로 이렇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시각으로, 아니 일제식민지하의 문학에 대한 작품의 비판으로서 많은 잣대를 들이댈 수 도 있다. 그러나 우리 문학시장의 고루함과 편협함, 독자층의 취약성, 추리문학의 바탕인 과학의 불모지에서 선생이 얼마나 분투하셨는지, 또한 고뇌하고 있었는지를 작품 곳곳에서 읽을 수 있다.‘탐정폐업’을 선언하는 작품의 마지막장은 선생이 당시의 문학풍토에서 추리문학을 이어나가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말하는 것 같아 뭉클한 감정이 일기도 한다.

“이번 사건은 나에게 가장 귀중한 교훈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에게 탐정의 소질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슬퍼하지 않습니다.~탐정의 혈관에는 강철(鋼鐵)이 돌아야 합니다.”  - P475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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