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해내는 슈퍼맨 실천법 30
김지완 지음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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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대하는 목표를 달성하기위한 실천 매뉴얼이다. 눈으로 읽는 책이 아니라 써진 절차에 따라 실천을 거듭하여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도록 안내하는 행동가이드 북이라 할 수 있겠다.  

책장 첫 머리에 오바마, 김연아와 당신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고 묻는다. (이러한 사람들과 같은 명예와 권력과 부라는 가치를 지향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을 필요 없다.) 어라! 자존심 긁어대는 이 질문에 발끈하고 다음 문장을 보면 “바로 인생 목표와 기대치의 차이”가 그들과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구분케 한다고 단언한다. 순간 진정되고 호기심이 책장을 넘기게 한다. 
 

그리곤 현재의 삶에 만족치 못하는 자신을 드러나게(인식하게) 하고, 삶의 변화는 자신의 ‘결핍’을 알아차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안내한다. “결핍을 알아야 성공을 꿈 꿀 수 있다.”고. 

이 매혹적 저술은 일별로, 그리고 매주별 단계적 실천내용이 그 의미와 함께 실천양식에 따라 진행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있다. 나의 결핍요인을 찾아내고 기대하는 목표를 달성 할 수 있다고 자기암시(Affirmation)를 외치며, ‘꿈 테이블’을 작성하고, 꿈의 구체적 실현을 위한 이미지를 연상하며, 마지막으로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기대되는 삶의 영상을 시놉시스로 작성하여 선명한 한편의 영화(Dream Movie)로 만들어 반복하여 돌리는데 이르면 한 주일이 마무리된다. 이루고자 하는 자신의 이미지 사진들을 찾아 꿈의 테이블에 매치시키곤 드림무비를 하루에도 수차례 반복하여 상상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슬그머니 이루고 싶은 욕망이 불끈댈지도 모른다. 어쨌든 기분 좋은 낙관이 가슴에 들어차는 것만큼은 느낄 수 있다.

 

멋진 기대치와 목표를 향한 의욕에 충만하게 된 1주일을 마치고, 2주차에 들어서면 보다 구체적인 실천 사항들이 안내한다.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실천’이라는 에너지”임을 각성한 채 활기찬 하루의 시작을 위한 일어나기, 웃음의 연습, 드림무비 상영하기, 오늘을 미리 체험기 위해 리스트를 작성하고 삶의 무대에서 나의 브랜드가치를 높이기 위한 이미지 만들기에 들어가게 한다. 
 

허, 세면대 위의 거울에 비친 얼굴을 새삼스레 들여다보고 씽긋 미소를 지어본다. 어째 실룩한 미소가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허긴 우리 뇌가 억지웃음과 실제의 웃음을 구별하지 못한다니 상관은 없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실천지침처럼 아파트라는 공동주택에서 아침에 “내생에 최고의 날이다!”라고 소리 지르기는 쉽지 않다. 그저 나지막하게 웅얼거려본다. 아마 오늘도 매사 일이 잘 풀릴 거라고.

 

바쁜 일상에서 굳이 성공한자들이 모이는 자리를 찾아 헤매는 것은 낭비 같아 ‘에스콰이어지’를 보고 마음에 드는 옷맵시를 유심히 보곤 따라해 본다. 저절로 어깨가 펴지고 에너지가 넘치는 보폭과 걸음을 느끼게 된다.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대부분이 공감하는 바이고, 바로 이를 위한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이 나의 드림무비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서고 있다는 자신감을 북돋는데 일조하고 있음에 동의케 된다. 매일 매일 꾸준히 삶의 기대치를 향한 이 30일간의 실천은 적어도 자신을 깨어있게 하고, 자신감으로 충만한 호감 가는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 같다. 차근차근 이 책의 실천 페이지를 성실히 따르는 이는 분명 자신의 높은 기대(Aim High)를 달성하리라.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정말 훌륭한 인생목표 실천 매뉴얼이라 할 수 있겠다. 아이들, 가족, 직장동료, 친구들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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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화력 괴테전집 7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김래현 옮김 / 민음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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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화력’이라는 이 야릇한 화학약품 냄새 물씬 나는 제목은 운명, 그리고 자연의 필연, 시대의 경향, 계기와 관계의 형성을 아우르는 당시 자연과학에 경도된 ‘괴테’의 실험의지가 반영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사실 오늘에 이러한 비유는 진부하고 조잡한 상상에 불과하다. 다만 18세기 작가의 시대에 화학적 원소간의 결합, 즉‘선택적 친화력’과 같은 특질은 인간관계를 조명하는데 신선한 관점을 제공하였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괴테의 이성간의 인간관계에 대한 실험적 탐구는 자못 엄숙하고 진지하며,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서로 사랑했지만 결혼에 이르지 못했던 연인이 각자의 동반자와 사별과 이별을 거친 후 다시 재회하여 행복에 겨운 삶을 시작한다. 남작‘에두아르트’와 ‘샤로테’는 그네들의 성(Castle)을 중심으로 산책로를 정비하고 정원을 가꾸는 등 새로운 삶의 즐거움으로 충만해있다. 그러나, 에두아르트는 훌륭한 능력을 묵히고 있는 친구를 돕기 위해 자신들의 성으로 불러들이고 싶어 한다. 마침내 부부의 삶을 방해받고 싶어 하지 않던 샤로테의 반대를 회유하고 친구 ‘대위’와 함께하는 세 사람의 생활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삶의 주체인 냥“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며, 자신의 활동과 만족을 선택하고 있다고 믿”지만, 우리들의 삶은 이미 우리가 그것에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이미 짜여진 계획들에 의해 진행되는 생활을 벗어나지 못한다.

마침 기숙학교를 떠나 어디로든지 받아들여져야 하는 샤로테의 수양딸인 ‘오틸리에’를 자신들의 성에 맞이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쯤에 이르면 오늘의 독자인 우리는 스토리 전개를 예상하고도 남을 정도가 되지만,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 ‘샤로테’와 ‘대위’라는 교차결합이 이루어질 것인가? 이들을 결합시키는, 즉 ‘선택적 친화력’이 되는 요인들은 무엇일까? 하는 관점으로 나아가면 소설 내내  흥미로운 탐사가 되며, 이와 관련하여 쏟아내는 금언(金言; Aphorism)들을 새기는 재미는 만만찮다.

열정과 절제의 균형을 찾아내는 샤로테와 대위와는 달리, 동정과 배려, 연민에 취약한 에두아르트와 순수한 열정에 휩싸이는 오틸리에의 사랑은 이미 절제되지 않는 격정으로 치닫는다.

에두아르트의 거침없는 열정은 샤로테의 이성적 회유와 절제의 요구에 이르지만, 오틸리에의 보호를 위해 에두아르트는 스스로 성을 떠난다.

그럼에도 이들의 사랑이 아름답고, 숭고하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도덕적으로, 법률에서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맞이하기 거부했던 샤로테의 우려에 대한 에두아르트의 인간관계의 실험을 자만하는 자기의식의 불가변한 확실성에 대한 단언의 오만함을 알기에 그렇다.

“여보, 의식이라는 것은 결코 믿을 만한 무기가 아니에요.”

한편 작품 속 ‘오틸리에의 일기’는 수많은  경구들을 포함하는 삶의 사색에대한 보고(寶庫)이다. “인간은 오로지 보는 것을 중지하지 않기 위해 꿈을 꾸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적인 빛이 일단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면 우리는 더 이상 어떤 빛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에두아르트를 향한 오틸리에의 지고지순한 사랑, 온통 세상을 밝히는 그 사랑의 열정이 느껴진다.
샤로테의 출산과 운명의 첫 희생자로서의 아기의 죽음은 작품을 극단으로 치닫게 한다. 성을 떠나 전쟁에 참여하고, 외로운 극기의 생활을 보냈지만 오틸리에를 향한 사랑이 소원해지기는커녕 더욱 공고해진 에두아르트의 사랑은 샤로테를 배반할 수 없는 오틸리에에게는 선택할 수 없는 고통이 되어버린다.

현실적으로 만족 될 수 없는 인간의 욕구들, 모든 이끌림의 상호관계, 삶의 불가항력들이 얽혀 만들어내는 “결혼이란 문명의 시작이자 정점”이라는 빛나는 성찰이 되지만, 죽음의 비극까지 몰고 오는 이 ‘이성의 시대’에 만들어진 선택적 친화력은 결코 문명의 손을 들어주지만은 않는다. 역시 대문호의 시대를 넘어서는 사유가 삶의 근원적 통찰을 향해 도도히 흐른다. ‘사랑’을 초월하는 삶의 본질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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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는 혼자다 1
파울로 코엘료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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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대한 부, 명예, 영광,... 이것들의 의미는 진정 무엇일까? 천박한 미디어에 비치는 연예인의 치장을 따라하는 초라한 중생들, 조금 더 조금 더 하는 재화에 대한 멈출 줄 모르는 물욕, 이기심에 의식이 차단된 권력의 지향, 그리고, 또 그리고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근접하려는 명예의 과시가 가져다주는 것은 궁극의 무엇일까?

    과시와 허영이 찬란하게 피어나는‘칸 영화제’는 그래서 너무도 적절한 무대가 된다. 러시아 정보통신그룹 총수인‘이고르’의 “어쩌면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건 이 시대의 미친 양상을 세상에 폭로하기 위한 게 아닐까. 그 궁극의 체현인 칸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말이지.”하는 독백은 이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연금술사』, 『오자히르』, 『포르토벨로의 마녀』등 지금까지‘코엘료’의 작품과는 사뭇 다른 구조와 속도감을 가지고 있다. 이틀 남짓의 시간이 촘촘히 나뉘어져 사건이 진행되는 급박한 전개로 스릴러의 형식미를 한껏 돋우고 있다. 불나방처럼 화려함을 좇아 프랑스 남부도시 칸으로 몰려드는 사람들, 욕망의 영원한 노예로 길들여져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그 허황의 꿈을 실현하려는 인간 군상들의 정수, 칸은 바로 그 자체이다.

    문득 대중문화, 특히 영상, 패션, 방송, 인터넷 등 보여지는(視覺) 산업의 권력화가 대중의 영혼을 치명적인 질병으로 내모는 것이 더 이상 새로운 발견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는 생각이 몰려온다. 슈퍼클래스가 시중에 나오지도 않는 패션상품들을 선보이면, 너도나도 어울리지 않는 싸구려 의상에 고가의 브랜드 가방을 끼고 다니는 그 추레한 모습으로 허영을 과시한다. 마치 자신이 피라미드의 상층부에 근접하였다는 듯이. 이들 우매한 중생들을 바라보는 슈퍼클래스는 쾌재를 부르고, 더 많은 부와 권력과 명예를 쌓아간다. 불쌍한 인간들...

    이러한 인간 사회의 자기사유 상실의 한 단면으로“허영이 사람을 어디까지 몰고 갈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 속의 수피‘나스루딘’과 술탄의 터번에 관한 에피소드는 적나라하게 인간을 해부한다.

    백주대낮에 영화제의 중심거리에서 버젓이 벌어지는 살인, 이 살인은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사랑을 위해 세상을 사라지게 하는 것, 한 명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은 그 사람의 세상이 소멸하는 것.

    온갖 시련을 통해 거대기업을 일궈내 억만장자가 된 ‘이고르’의 그칠줄 모르는 욕망의 광기를 참아내지 못하고 떠난 아내 ‘에바’를 향한 사랑의 복원, 용서의 전언이다.

    제2, 제3의 메시지를 위해 무작위적 연쇄살인이 이어지고, 틈틈이 탐정소설의 서사를 이용하여 살인자를 이미 알고 있는 독자를 관찰자로 슬며시 밀어낸다. 그리곤 수사관까지 지향하는 가치가 오직 자신의 명예, 영광에 맞추어져 있음을 인식하게 한다. 영화배급업자에게 줄을 대려는 영화감독, 영화에의 캐스팅을 위해, 단 한 번의 기회를 잡기위해 우연이라는 불확실성을 기대하고 잠자리도 서슴지 않는 배우 지망생들, 모델들,... 제능력 이상의 영광을 얻으려 안달하는 무수한 인간들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작가는 이들에게 결코 성취를 제공하지 않는다. 자신의 판단으로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는, 매체에 현혹되고 속아 선택하고 있을 뿐, 또한 욕망의 노예가 되면서까지 자신을 팔아버리는 오늘의 인간들에게 고뇌의 바다를 벗어나는 축복을 안겨 줄 뿐이다.

    적과 흑의 대비가 강렬하게 표지를 장식하는 이 두 권으로 구성된 소설을 손에 들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버렸는지 모르게 된다. 아마도 “하지만 승자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제목과 상치되는 마지막 문장이 그토록 아쉬울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랑이란 삶의 본질을 상실한 현대인들, 욕망에 눈이 멀어 영원한 노예로 남게 될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타인에 대한 관심도 열정도 사라지고 이기적 성취에만 몰두하는 손상된 영혼들, 미쳐버린 인간사회에 대한 혹독한 자기반성의 촉구이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지적 폭력에 대해서 무신경한 무지한 대중들, 이 뒤틀린 사회구조와 부조리를 거들떠보지 않는 인류는 영원히 노예의 삶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하비드, 에바, 가브리엘라, 저비츠 와일드, 모린,...욕망이란 이름하에 명멸한 사람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삶, 주인으로서의 삶, 진정한 승자의 삶은‘사랑’으로 회귀한다. 오로지 승자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간들의 그 부질없는 행동의 실체를 시각문화의 대중 지배라는 관점을 통해 감각적이고 적나라하게 들춰낸 수작이다.

    「영이 최후의 심판대에 올랐을 때 신(神)은 다만 이렇게 물을 것이다. “살아 있을 때 너는 사랑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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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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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읽었던 책을 석양이 뉘엿뉘엿 저무는 시기에 이르러 다시금 읽는다면 그 독서는 어떠한 것이 될까? 책장마다의 단어와 문장이 이미 쉬이 넘어 갈 수 없는 수많은 추억을, 연상되는 언어와 이미지들로 들어차 미소를 머금게도, 슬며시 눈물이 흘러내리게 하기도 할 터이다.

작가의 말처럼 이젠 처음 펼쳐든 책에서도 순수한 독서는 더 이상 가능치 않고, “문학적 암시가 빼곡해지면서”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어려움과 복잡한 책으로 다가서는 것은 삶의 세월이 훌쩍 넘어선 제법이나 나이가 들어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망구엘’이 50대 중반에 들어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고 어떤 면에서는 지배하기도 했던 추억이 담긴 열두 개 작품을 매월 한 편씩 1년에 걸쳐 읽어나가면서 매순간 떠오르는 일화, 인상, 사색을 스케치하듯 적어나간 일기이다. 주제가 되는 열두 작품의 대부분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고전이거나 명작으로 번역되어 소개된 작품이나 ‘디노 부차티’의 『타르타르 스텝』, ‘호아킴 마리아 마차도 데 아시스’의 『브라스 쿠바스의 유고 회고록』은 국내에는 낯선 작품들이다. 또한 ‘마거릿 애트우드’의 『떠오름』은 국내에 『떠오르는 집』으로 번역되어 출간 된 적이 있으나 지금은 절판되어 더 이상은 찾기 힘든 책이 되어버려 작자와 공명하기 어려운 아쉬움도 있다.

또한 인용되거나 비유, 연상을 통해 등장하는 낯선 200여 문학작품들도 ‘망구엘’의 사색의 길을 좇는 일을 여간 벅차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감상적인 환상에 영속적인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일기를 쓰듯이, 현재를 기반으로 하는 이 매력적이고 세련된 통찰과 사색의 여담은 삶의 성숙한 관조(觀照)와 달관(達觀)의 평온함을 선사한다.

사실 작자가 선정한 열두 작품의 대개는 디스토피아적 이거나 인생역정에 대한 회고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작품들이어서 삐딱하게 경사진 시선을 바탕으로 하는 비평적 인상과 염세적인 가치관이 엿보이기도 한다.

소년 킴과 라마승의 여정을 담고 있는‘키플링’의 소설 『킴』에서, 당시 인도를 지배하던 제국주의 영국의 무지한 이성을 야만에 견주기도 하며, ‘샤토브리앙’의 『무덤저편의 회고록』을 통해 오늘의 우리사회인 “짧은 속보, 반복, 즉시성, 시공간의 어떤 거리도 허용하지 않는 끝없는 순간 같은 것”을  지옥에 대한 또 하나의 정의에 빗대어 현재의 인류사회가 지옥의 다름 아님으로 고뇌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페르디난도 카몽’의 기독교의 ‘타인’에 대한 관계의 목적론적 접근의 성찰이나, 현대 정치사회의 방관자적 구경꾼인 시민들에 대한 비난에 이르기까지 여유로운 독서가 만들어내는 명상과 통찰의 멋스러움을 자아낸다.

“내 시체의 차가운 살을 갉아 먹은 첫 번째 벌레에 헌정(獻呈)”한다는『브라스 쿠바스의 유고 회고록』처럼 독특한 ‘여담의 책’이나 “정의를 성취하는 것은 단순히 불가능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의로운 사람이 계속해서 정의를 추구해 나가도록 우리가 그걸 불가능하게 만들어 놨는지도 모른다.”는 정의의 단상은 우리사회의 현실과 어우러져 새로운 연상을 낳기도 한다.

‘망구엘’의 자유분방한 독서일기가 새로운 독서를 추구하게 한다. 더구나 그의 사유의 날개를 자꾸 놓치는 탓에‘괴테’의 『친화력』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면, 이 책은 소기의 목적을 이룬 것이리라.

“원하는 대로 읽어라! (LYS CE QU E VOUD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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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리뷰해주세요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기자와 나눈 3일간 심층 대화
오연호 지음 / 오마이뉴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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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600년의 역사, ‘패배하는 정의’의 역사를 청산하고, “이상이 현실에 굴복하고, 현실이 이상을 구박하는 시대”를 극복하며, 인간의 자존심이 활짝 피는 사회, 원칙이 승리하는 역사를 실현하려했던 바보 대통령의 시민을 향한 각성의 외침이다.

더 이상 (정치)권력이 권력의 주체인 국민을 지배하고, 특권을 누리려 하며, 반칙을 일삼을 때 분노하지 않고, 부당한 권리와 이익의 주장을 방관하여서는 안 된다. 권력을 사유화하고, 선출된 권력으로 시민과 소통하지 않으려 하는, 기회주의적이고 권위적인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시민들은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다.

작금의 미디어법의 강행처리, 4대강 유역개발과 같은 개인을 살찌우는 기술에 집중하며,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불공정한 게임을 주도하는 특권구조를 해체하는데 시민의 조직된 힘, 시민들의 행동이 그 어느 때 보다 요구되는 것은 그래서 당위화(當爲化)된다.

힘센 자에게 줄서는 권위주의와 기회주의가 결합된 특권의 유착구조는 불공정과 불균형, 신뢰가 무너진 사회를 고착화시키고 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만능의 경제정책과 세계화는 거대한 시장권력을 만들어내고, 국민의 권력인 정치권력을 위협하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자아내기에 이르렀다.

“지배자 또는 지배집단이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회의 윤리의식, 가치 형성에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치게 되어있어요. 그 윤리와 가치의 핵심이 신뢰입니다. - 中略 -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약속이 무력화되기 때문에 기능적인 기대도 다 배반될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바보 노무현의 신뢰에 대한 지적은 국민을 분열과 갈등에 내몰고 사회적 합의를 불가능케 하는 현 정권의 평가에 적절한 도덕적 가치 기준이 된다.

부조리한 권력을 분산하고, 권위주의를 해체하여, 낮은 사람으로 정치권력의 대표자가 되어 겸손한 권력으로 강한 나라를 만든 전형을 창출하려했던 인간 노무현의 정치적 의지와 정의의 사상이 이렇듯 진정함으로 시민정신을 일깨운다.

어느덧 시민의 편에 서있던 언론은 또 하나의 권력, 언론 권력으로서 시장권력의 편, 아니 스스로도 시장권력이 되어 국민의 권력을 겁박하기에 이르고, 정보의 장을 움켜쥐고 이데올로기를 조작하여 민주주의를 퇴화시키는 불공정과 권위주의의 한 축이 되어있다.

오늘날 권력은“공권력과 정보(이데올로기), 그리고 돈, 이 세 가지가 결합”해서 만들어진다. 이 중에서도 “유권자의 최종 선택을 결정짓는 정보(이데올로기)마당이‘결전의 장’이다.”그래서 미디어 공간, 언론은 중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권력을 독점하려는 시장, 언론 권력 등 특권세력, 특권구조의 해체는 이 땅의 민주주의 발전과, 계층간, 지역간 불균형의 해소를 위한 역사적 과제가 된다.  

 

“역사는 지배와 예속에서 발생하는 제반 갈등이다.”   

 

민주주의가 한 단계 더 발전하느냐 아니냐는 이제 시민들의 도덕적 성숙과 능동적 참여에 달려 있다. “신뢰와 원칙을 위해서 자기이익을 포기한 사람”이 들려주는 시민정신과 시민사회는‘관용의 정신과 타협을 아는 사람들의 연대’를 요구한다. 바로 지금의 획일주의 정치문화, 진보와 보수의 극한 갈등, 상대를 용납하지 않는 대결주의, 지역간 대립구조는 시민의 인간적 자존심이 지켜지고, 정의와 공정이 승리하는 사회의 실현을 위해 청산되어야만 하는 우리의 과제이다.

 

또한 노무현은 급진적인 진보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일부 고달프고 불평스러운 사람들을 선동해서 끌고 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일부 이른바 강단사회주의라 이야기하는 급진 지식인들은 뭉쳐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공허하게 교조적인 이론에 매몰되어서 흘러간 노래만 계속 부르지를 마라.”고 말이다. 그리고 “투쟁 없는 역사도 없지만 그러나 관용과 배려가 없는 역사도 성공하지 못한다.”고 투쟁과 절제가 함께 하여야 함을 조언한다.

이제 선출된 정치권력으로서 권력의 행사는 용인하되, 권력에 의한 지배, 권력의 사유화를 방관하는 시민이어서는 자유와 권리의 상실을 막을 수 없다. 권력과 지배를 분리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그렇기에 권력은 위임하되 지배는 거부하는 노력”, 바로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의 행동과 개입, 참여는 우리 시민들의 소명이 된다.

시장 권력, 언론 권력에 대해서는 상대편에 서있는 소비자로서, 소비자(시민)권력을 조직화하고 정치권력으로 묶어내어 시민 정치권력으로 시장, 언론권력을 통제하는 시민이 중심이 되는 사회, 진정한 의미의 시민사회의 주인의식으로 깨어나야 할 것이다. 공정성과 자유와 희망이 넘치는 정의가 승리하는 참된 민주주의 사회는 소비자 선택, 시민 선택에 달려 있음을 일깨우는 ‘부족한 우리들의 동지’의 마지막 목소리가 잠자고 있던 우리들의 의식을 선명하게 일으켜 세운다.

역사 이어달리기, 민주정부 10년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급작스럽게 시름에 잠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하여 더욱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이 여기 있다.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는 행동하는 양심, 각성하는 시민, 바로 독자와 바보 노무현간의 뒤 늦지만 고귀한 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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