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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화력 ㅣ 괴테전집 7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김래현 옮김 / 민음사 / 2001년 2월
평점 :
품절
‘친화력’이라는 이 야릇한 화학약품 냄새 물씬 나는 제목은 운명, 그리고 자연의 필연, 시대의 경향, 계기와 관계의 형성을 아우르는 당시 자연과학에 경도된 ‘괴테’의 실험의지가 반영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사실 오늘에 이러한 비유는 진부하고 조잡한 상상에 불과하다. 다만 18세기 작가의 시대에 화학적 원소간의 결합, 즉‘선택적 친화력’과 같은 특질은 인간관계를 조명하는데 신선한 관점을 제공하였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괴테의 이성간의 인간관계에 대한 실험적 탐구는 자못 엄숙하고 진지하며,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서로 사랑했지만 결혼에 이르지 못했던 연인이 각자의 동반자와 사별과 이별을 거친 후 다시 재회하여 행복에 겨운 삶을 시작한다. 남작‘에두아르트’와 ‘샤로테’는 그네들의 성(Castle)을 중심으로 산책로를 정비하고 정원을 가꾸는 등 새로운 삶의 즐거움으로 충만해있다. 그러나, 에두아르트는 훌륭한 능력을 묵히고 있는 친구를 돕기 위해 자신들의 성으로 불러들이고 싶어 한다. 마침내 부부의 삶을 방해받고 싶어 하지 않던 샤로테의 반대를 회유하고 친구 ‘대위’와 함께하는 세 사람의 생활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삶의 주체인 냥“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며, 자신의 활동과 만족을 선택하고 있다고 믿”지만, 우리들의 삶은 이미 우리가 그것에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이미 짜여진 계획들에 의해 진행되는 생활을 벗어나지 못한다.
마침 기숙학교를 떠나 어디로든지 받아들여져야 하는 샤로테의 수양딸인 ‘오틸리에’를 자신들의 성에 맞이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쯤에 이르면 오늘의 독자인 우리는 스토리 전개를 예상하고도 남을 정도가 되지만,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 ‘샤로테’와 ‘대위’라는 교차결합이 이루어질 것인가? 이들을 결합시키는, 즉 ‘선택적 친화력’이 되는 요인들은 무엇일까? 하는 관점으로 나아가면 소설 내내 흥미로운 탐사가 되며, 이와 관련하여 쏟아내는 금언(金言; Aphorism)들을 새기는 재미는 만만찮다.
열정과 절제의 균형을 찾아내는 샤로테와 대위와는 달리, 동정과 배려, 연민에 취약한 에두아르트와 순수한 열정에 휩싸이는 오틸리에의 사랑은 이미 절제되지 않는 격정으로 치닫는다.
에두아르트의 거침없는 열정은 샤로테의 이성적 회유와 절제의 요구에 이르지만, 오틸리에의 보호를 위해 에두아르트는 스스로 성을 떠난다.
그럼에도 이들의 사랑이 아름답고, 숭고하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도덕적으로, 법률에서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맞이하기 거부했던 샤로테의 우려에 대한 에두아르트의 인간관계의 실험을 자만하는 자기의식의 불가변한 확실성에 대한 단언의 오만함을 알기에 그렇다.
“여보, 의식이라는 것은 결코 믿을 만한 무기가 아니에요.”
한편 작품 속 ‘오틸리에의 일기’는 수많은 경구들을 포함하는 삶의 사색에대한 보고(寶庫)이다. “인간은 오로지 보는 것을 중지하지 않기 위해 꿈을 꾸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적인 빛이 일단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면 우리는 더 이상 어떤 빛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에두아르트를 향한 오틸리에의 지고지순한 사랑, 온통 세상을 밝히는 그 사랑의 열정이 느껴진다.
샤로테의 출산과 운명의 첫 희생자로서의 아기의 죽음은 작품을 극단으로 치닫게 한다. 성을 떠나 전쟁에 참여하고, 외로운 극기의 생활을 보냈지만 오틸리에를 향한 사랑이 소원해지기는커녕 더욱 공고해진 에두아르트의 사랑은 샤로테를 배반할 수 없는 오틸리에에게는 선택할 수 없는 고통이 되어버린다.
현실적으로 만족 될 수 없는 인간의 욕구들, 모든 이끌림의 상호관계, 삶의 불가항력들이 얽혀 만들어내는 “결혼이란 문명의 시작이자 정점”이라는 빛나는 성찰이 되지만, 죽음의 비극까지 몰고 오는 이 ‘이성의 시대’에 만들어진 선택적 친화력은 결코 문명의 손을 들어주지만은 않는다. 역시 대문호의 시대를 넘어서는 사유가 삶의 근원적 통찰을 향해 도도히 흐른다. ‘사랑’을 초월하는 삶의 본질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