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저항 할 수 없는 약자를 무참히 유린하고 학대해온 자를 처벌 하지 않는 사회시스템의 그 추악한 생명력에 무감각해지고 또한 그 시스템에 어떠한 형식으로든 참여하지 않으면 배척되는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기만 한 것인가? 작품은 시스템의 그 견고한 벽을 향한 작은 희망과 정의의 불꽃을 발견하려 한다.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그 네트웍의 구성들에게 호소하는 것은 온통 욕망의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그들에게는 어쩜 공허한 울림일 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장애자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특수교육시설, 보호시설에서 이들 시설의 운영주체인 이사장, 원장, 교장 등이 자신을 방어 할 수 없는 장애자들을 성적추행과 노동의 도구로 짓밟는 사건이 툭하면 매스컴을 장식하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 그때마다 어리석은 대중을 만족시킬 선정적이고 표피적인 언론의 일회성 정보를 보고 혀를 한번 차대는 것과 같이 짧은 연민과 공감을 보낸 것으로 자신의 정의로움에 만족하는 것이 고작이다.
왜 우린 그 부당하고 부조리하며 파렴치한 사건의 진실에 주목하지 않고, 피해자인 그 취약한 사람들을 위해 잘못된 시스템의 시정을 지속적으로 감시하지 않는 것일까.

작품은 청각장애아이자 지체장애자들의 학교이자 기숙원인‘자애원’의 교장, 행정실장, 교사가 이들 연약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상습적으로 자행하는 강간, 폭력, 협박, 고문 의 참을 수 없는 추행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취급되는가하는 우리사회, 아니 인간사회의 비굴하고 야만적이며, 교활한 구조를 통해 적나라하게 해체하고 있다.
가장으로 가족의 부양이란 피할 수 없는 책임으로 자애원의 기간제 교사로 부임하게 되는‘강인호’라는 인물이 겪게 되는 갈등은 바로 우리들이 생활인으로서의 부담과 사회정의를 위한 행동에서의 가치선택이란 어려운 딜레마를 성찰하게 한다.

교사들의 고용과 해고라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이사장이자 교장, 그리고 행정실장이라는 두 형제의 불의를 외면하는 교사들의 행동에서, 지역의 유지로서 행세하는 이들 형제를 비호하는 경찰과 사법조직에서, 그리고 관할 교육청과 시청 등 감시기관, 교회조직에 이르기 까지 욕망으로 연결된 네트웍은 사회적 불의와 인간의 사악함이 얼마나 공고한 난공불락의 성벽인가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아이의 성적피해를 고소하지만 늑장을 부리는 경찰, 결국은 지역인권센터, 성폭력상담센터라는 시민조직이 나서야 하는 불온한 사회, 신뢰와 정의가 존재치 않는 사회. 약자가 피해를, 불의의 시정을 요구할 공적 기관은 이 땅에서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이 작품의 본질적 무대가 되는 재판과정에서 우리는 바로 이러한 기득권 계층의 공고한 연결망만 확인하게 된다. 가진 것 없는 자들의 돈과 물질에 대한 취약함, 이를 이용하는 파렴치한 기득권자는 용서 받을 수 없는 범죄행위조차 맥없이 허물어뜨린다. 전관예우를 받는 변호사를 선임하고, 기득권자편에서서 위증을 하는 의사, 지역사회의 눈치를 보는 판사, 교회의 이익을 위해 사회정의를 호도하는 기업화된 종교집단까지.
이제 법정은 사회적 강자에게 합법적 면죄부를 발부하는 형식적 기관으로서만 작동한다. 소수의 사악한 이들 기득권 계층의 악행은 그렇다면 어떻게 처단할 수 있을까? 이 부당한 사회시스템을 어떻게 정의로운 시스템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까?

이 견고한 네트웍은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 달콤한 욕망의 쾌락에 사로잡힌 이들 인간군상에 일회적 맞섬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님을 이미 일상에서 수없이 마주하고 있지 않은가. ‘소위 실체적 진실’이자 너무도 당연하고 상식적인 사회정의라는 것이 무참히 짓밟히고 외면당하는 것이 현실이다. ‘나’, 바로 우리 개인들이 먼저 변해야 한다. 불의에 저항하고, 악행의 시정을 부단히 요구하며, 정의를 위한 이웃과 약자들, 타인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과 신뢰의 시선을 거두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내내 화가 나고, 파렴치함에 치가 떨려오고, 불의에 영합하는 이 사회에 욕지거리가 터져 나오게 하지만, 어디선가 작은 희망의 불씨들이 항상 피어오르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고귀한 가치를 실현하려는 사람들이 존재함을 일깨운다.

이 땅의 연두, 유리, 민수들이 더 이상 다치지 않기를, 그리고 서유진 같은 정의를 지켜내려 하는 사람들, 이들을 바라보고 응원할 수 있게 된 강인호 같은 이들의 존재가 있음이 위로가 된다. 타인에 대한 우리들의 작은 연민이 신뢰하는 사회, 정의로운 사회의 밑거름이 될 터이다. 대중에게 또 하나의 사회적 통찰과 도덕적 양심의 각성을 선사하는 빼어난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구 위의 작업실>을 리뷰해주세요
지구 위의 작업실
김갑수 지음, 김상민 그림, 김선규 사진 / 푸른숲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용 하나 없는 책도 팔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미디어의 힘이 강함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어느 건물 지하에 자기만의 공간을 마련하곤 제 나름의 허섭한 이유를 갖다 댄 잡기인데, 어쨌건 작자의 세상 네트웍이 인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그 흔한 노동을 피하고 유유(悠悠)할 수 있으니 그 또한 능력이다.

 

그의 자기만의 지하 공간 이름이 뭐라 지어졌건, 커피마니아로서, 음반을 수집하고 클래식에 심취하건 극히 개인 취향의 독백이다. 이 독백이 활자화 되어 재화로 변화되는 자본주의 흐름에 기생하는 것 또한 세상 살아가는 기술이다.

결국 출판이란 무수한 어떤 이유들이 있겠으나 타인과 공감(비판적 공감을 포함)을 갖겠다는 의지인데, 내 얘기만 하면 되지 너 네들이 무슨 상관이야 하는 데에는 그의 말처럼 말 섞기도 싫다.

 

내용 여기저기에 자신의 솔직한 표현이라고 열거한 것이 진정한 자기대면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내용하나 없는 인간”, “떠돌이, 날라리, 사이비, 그리고 얼치기”의 잡설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작자의 말마따나 “키치는 가짜다.” 가짜가 보편적 진리의 측면에서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정성이 보이지 않을 때 가짜는 더 추해보이고 천하며 경박한 것이다. 키치를 비난 할 처지에 있긴 한 건가?

그가 조우석의 『굿바이 클래식』에 보내는 거친 부정의 의사와 같이, 이 시시콜콜한 잡 글 역시 어떤 의견도 굳이 회피하게 만든다.

 

인간 누구나 “타자의 신체가 주는 위협”이 짜증나고, 자기만의 공간, 자기연민을 핥아댄다. 그것을 이야기한다고 글이 되고 사유가 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 제멋에 살면 된다. 그런데 이 걸 팔아먹는 양심은 좀 아닌 것 아닌가? 아무튼 ‘버네이스’의 ‘Propaganda’이래 선전의 위선이 지배하는 세상 덕을 톡톡히 보는 자들을 탓해 무어하겠는가마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은 따로 팝니다
롤리 윈스턴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불임(不姙), 불륜(不倫) 그리고 결혼생활이란 이 작품의 선명한 소재에서, 이 각기의 의미들이 지닌 본질, 즉 인간의 본원적 욕망이라는 내재적 가치와 윤리도덕이라는 외재적 가치의 원초적 충돌을 보게 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진부한 정의이지만 결혼이란 두 남녀가 배우자로서 서로에게 충실하고 부부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는 사회적 약속이다. 이 사회적 약속은 나름 공고한 것처럼 보이지만 진화 심리학같은 거대 담론을 끌어대지 않더라도 인간의 본성을 압도할 만큼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바로 ‘불륜’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것처럼.
 

그리고 ‘불임’이라는 결혼생활에서 발생하는 자연적 이치에 거스르는 단어 역시 결혼의 의미를 배반한다.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여인의 갈망에 어떤 가치척도를 갖다 대어 집착이라거나 지나치다는 평가를 한다는 것은 본원적 섭리에 반하는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인간이 자신들의 본성을 억제하고 질서라는 사회적 기준을 벗어난 어떤 행위를 정의하는 언어는 불완전하고 모호하며, 절대적 진리이지 못한 결핍이 존재하는 듯하다.

부부의 사랑의 행위가 오직 인위적인 생명의 잉태라는 목적에 맞추어질 경우 그 행위 자체는 수단으로서 의미가 전환되어 본질적 가치의 훼손을 가져오기도 한다.
작품은 이처럼 결혼생활의 근원적 가치가 훼손당하기 시작한 부부의 일상적 내면을 투명한 창을 통해 보다 원초적인 인간의 심층을 들여다보게 한다.
불임치료를 위한 부부의 노력은 실패의 연속이고, 아내 ‘엘리너‘는 자신만의 공간인 세탁실로 칩거하고, 사랑의 의미를 상실해 버린 도구화된 잠자리는 그네들에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급기야 남편 ’테드‘는 헬스센터의 트레이너인 매력적 여성 ’지나‘와 육체적 관계를 맺기에 이르고, 이들의 불륜현장을 목격한 엘리너에게는 치명적인 상처가 된다.

이야기는 이처럼 테드와 엘리너 부부의 갈등과 지나를 축으로 하는 이들과의 관계를 여과 없는 진솔한 일상과 내면의 조명을 통해 삶의 진정한 행복과 즐거움, 그리고 이를 막아서는 우리네들의 혼란스럽고 불완전한 의식을 성찰한다.
10년, 20년,... 부부로서 세월을 함께하면서 누군들 갈등과 위기가 없을까.  결혼 초기의 떨림과 열정, 그리고 상대에 대한 성적기대가 어느 순간부터는 사라지고, 그 정염(情炎)이 단지 함께하고 있음으로 인한 평온함과 안락함, 위안으로 변이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면,  그 강렬한 욕망의 기억으로 불만과 고통이란 불행의 영역을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뻔한 이야기와 이해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재미있게 읽히는 것은 뜻하지 않은 관점의 시사라 하겠다. “유부남 하고 자는 건 부도덕한 행위가 아닌가?” 하는 엘리너의 지나를 향한 조롱 섞인 방백(傍白)은 부부의 불륜대상인 지나라는 여성에 대한 내면적 갈등에 대한 탐색을 가능케 한다는 점이다.
이는 테드와 지나의 갈망이라는 거대한 축을 구성하여 ‘부도덕한 행위’로서 불륜의 관계에서의 시선이 아니라 이성(理性)의 도덕적 판단, 논리적 거부와 인간의 어찌 할 수 없는 본능적 끌림이라는 욕망에 대한 대결의 성찰로 이끌고 있다는 점이다. 
 

우린 우리의 삶을, 욕망을 통제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우리들은 결혼제도 속에서 도덕적 일탈을 억압하고 사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반갑지만 흥분을 안겨주지는 않는 그 무엇”인 배우자에게서 위안과 위로가 되는 것, 혼자서 중년의 위기를 맞고 싶지 않아 서로 함께 해주길 바라는 그 어떤 것이 보상이 되어주고 또 그렇게 삶을 충실하고 건강하게 유지한다.
그럼에도 “내가 대단한 존재처럼 느껴지게”하는 사람, 나를 특별하게 생각게 하는 사람에 대한 희구, 진정 인생에 충실함은 그 사람과 함께 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 만 같을 때, 과연 삶의 행복을 위해 어떠한 선택이 가능한 것일까? 
 

한편, “오전 10시 반 거실 바닥을 뒹굴며 수목기사와 섹스”를 나누는 유부녀, 엘리너의 행동은 남편 테드의 지나에 대한 미련에 질시를 보내는 그녀의 행위와 모순됨에도 정당한 행위로 인식되는 것은 굳이 동서의 문화적 인식의 차이를 떠나서 인간의 원초적 욕망에 대한 부인 할 수 없는 본질적 구성요소, 즉 삶의 본원을 이루는 불가침의 사적 자유라는 관념으로서 이해된다.
그렇다면 내 정신이 위로받는 곳, 내 육체가 위안 받는 곳, 우린 그곳을 찾는 것 아닐까? 그것에 과연 도덕적 잣대를 내미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세월이 지나 사랑이 바뀌어 다정한 친구, 친정엄마에 느끼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곳에 사랑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 늦게 깨닫는 사람들.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하게 될 때, 우린 정말 아주 불행 해 질 수밖에 없을 터이다.  정말 쉽지 않은 논제이다. 갈망케 하는 사랑, 성적기대가 고조되는 사랑, 다정한 벗과 같은 위안과 평온을 주는 사랑, 이들 사랑의 귀천이 있을 수 있을까? 단순한 이야기 속에 수월치 않은 삶의 의문이 놓여 있다.
섬세한 심리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다. 특히 여성적 시각에서 다루어진 결혼 한 여성들의 행복에 대한 고뇌와 갈등과 성취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독자의 공감을 높여준다. 스토리의 통속성이 주제와 어우러져 재미있는 소설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녀들에 대한 오래된 농담 혹은 거짓말 - 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2
김현아 지음, 박영숙 사진 / 호미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이 땅의 그녀들이 세상의 시선들과 장애에 마주하며 지쳐온 자취를 따라 부여에서, 고창, 남원, 밀양, 통영, 원주에 이르는 문화여행 이랄까? 우리 범인(凡人)들이 주목하기에는 낯 선 곳에 내밀하게 깃든 이유 있는 사색의 여정이라 할까? 역사는 항시 강자와 지배자, 승자의 시각과 논리를 따르지 않던가. 그래서 그 배제된 이면의 역사와 사고(思考)에 있는 약자와 피지배자, 패자의 울분과 아물지 않은 상처, 그리고 그네들의 삶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내기란 작자의 말처럼 “풀밭에서 녹색 실을 찾는” 일 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 여정은 여성, 지금에도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누구의 딸과 같이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리매김했던 그네들의 발자취를, 숨겨지고 왜곡된 주머니에서 하나씩 그 진정성을 꺼 집어내 조명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작업에서 작자는 강자가 만들어 낸 조악한 역사와 거짓을 조롱하고, 조소를 보내며, 의심하고, 연민하기도 하며, 그녀들의 숨결이 배어있는 유산과 고장들의 전경과 함께 가벼운 인문학적 담론을 펼친다.

이러한 관점에서 백제의 패망하면 늘 패키지처럼 묶여 다니는 의자왕, 삼천궁녀, 그리고 계백이 작자의 시선을 피해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낙화암(洛花巖)은 언제부터 꽃들이 떨어진 벼랑으로 불렸을까? 그리고 그 꽃들이라 칭하는 무려 삼천 명의 궁녀가 된 것은 어느 시기부터였을까? 정말 의자왕이 죽자 함께 떨어진 것일까? 이 저작의 표제처럼 새빨간 거짓임은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런 말도 되지 않는 거짓말을 왜 만들어 냈을까? 여자의 몸에 나라의 패망원인을 갖다 붙이는 것은 그야말로 앞뒤가 맞는 멋진 그림이 아니던가. 왕의 방탕에 일조한 궁녀는 탕녀이지 않은가. 그런 그녀들이 강물로 뛰어 들었으니 절개와 순국의 모습을 덧 씌워 형상화하니 그 아니 자연스러운가 말이다. 이와 더불어 선화공주, 계백의 아내, 소서노 조차 역사는 결코 진실을 말해주지 않으니, ‘새로운 눈’, 자연스럽고 익숙한 것들을 의심하는 눈을 가질 것을 피력한다.

우리나라 3대 명루인 밀양 영남루와 아랑전설에 이르면 작자의 재기 넘치는 관점이 이채롭게 펼쳐진다. 우리나라 귀신의 전형인 긴 머리와 하얀 소복 패션이‘아랑’에게 비롯되었단다. 그러니 ‘언니귀신’의 원조격이지 않은가. 그런데 뜻밖의 질문을 던진다. 원혼이 되어 나타나 거듭 새로 부임하는 사또들을 황천길로 보내는 아랑은 왜 직접 복수를 하지 않고 신관 사또에게 간접적인 복수를 부탁하는 것일까?

하~아, 순결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강간당한‘더러운’몸으로 당시 정상성의 심벌이었던 ‘남성’양반에게 나타나는 것은 “귀신의 이름으로 성폭행 당해 죽은 여성들의 존재를 공적 담론의 장으로 부상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라 하면 ‘아랑전설’에서 이쯤의 절묘한 해석은 할 수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듯하다.

더더욱 재미있는 것은 지역사회의 고루하고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에 대한 지적이다. 근자에는 아랑각 앞에 ‘정순문(貞純門)’하고 현판을 걸어두었단다. 사실 남성들의 우매함은 알아줘야한다. 죽은 이의 넋을 달래면 되는 것이지, 왠 느닷없는 정절이데올로기로 의미를 확장하는 것인지, 이 사회의 문화적 자질, 그 수준에 대한 조소와 질책이 통쾌하다.

이러한 남성중심의 실소를 금치 못 할 예는, 죽은 지 일백사십 년이 되어서야 민족정신의 수호자로서 죽음이 공식 인정된‘논개’의 일화에서도 발견된다. 터무니없게도 친고가 전혀 없던 논개에게 400년이 다되어서 ‘주논개’라 하며 관련도 없는 성을 갖다 붙이고 끊임없이 남성과 연관하여 설명하려는 오늘의 인식까지 더해지면 보이지 않는 왜곡된 습속의 권력이 얼마나 억지스럽고, 편향된 것인지 각성케 된다.

이처럼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더구나 사회의 한 정점에 설 정도로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은 세상의 시선과 맞서 싸우고 버티어내는 엄청난 인내와 고통, 용기를 필요로 할 것이다. 남성만의 영역이었던 판소리 연창에 최초의 여성 연창자로서, 이후 판소리에 여성 입문의 길을 열어준 고창의 ‘진채선’, “분노하지만 항거하지 못하고 또한 그런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 시달리는 암울한 식민지 시대의 대중”과 교감하고 소통한 남원 문치마을 ‘이화중선’, 운봉마을의 ‘박초월’은 정말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갔던 여성이었으리라.

이 여정에서 특히 매력적인 도시로 나의 시선을 집중시킨 곳은‘목포’였다. “우리의 근대 유산이 유달리 많이 남아있는 곳”, “시간 여행의 정거장 역할”을 하는 곳, 천만 다행스럽게도 “개발의 회오리에서 ‘소외’된 덕분”에 20세기 초엽의 모습을 간직한 우리민족 수탈의 산증거인 동양척식회사, 구 일본영사관, 이훈동 정원 등을 지금에도 찾아 볼 수 있다니 말이다.

때려 부수고, 갈아엎고, 그리곤 눈앞의 경제이익에 어두워 상자곽 건물을 개발이란 명목으로 획일적으로 나열하는 우리 현실은 아마 아프고,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기억과 마주하지 않고 회피하려는 습관인 모양이다.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치유하지 않으면 비정상적 사고의 다중인격을 양산할 뿐이다. 더 이상은 신뢰할 수 없는 사회로. 혹, 사라질지도 모를 근대의 유산들을 보러 목포에 조만간 다녀와야 할 모양이다.

끝으로 우리 문학에 대하소설이란 커다란 족적을 남긴 두 여성 작가, ‘최명희’와 ‘박경리’의 근원에 대한 성찰, 무한한 생명의 비밀에 대한 깨달음에 정진하였던 그네들의 삶의 자취인 남원과 전주, 통영과 하동, 그리고 원주의 자연적 아름다움과 지역사회의 애정, 일화 등이 시절의 통한을 담고 애정과 존경심 그득한 필치로 그려지고 있다.
이 사회가 불편해하고 은폐하고 싶어 하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세련된 식견과 온기 가득한 연민으로 멋 떨어지게 기술된 매력적인 인문학적 담론이자 여성여행기다. 시종 유쾌함과 진지함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지혜로운 이 저작에 작은 갈채를 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를 리뷰해주세요.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작자는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서 ‘자유의지’와 ‘대안적 삶의 상식’이라는 관점을 읽어내고 있는 듯하다. 이 땅에서 오랫동안 금서(禁書)로 분류되어 읽히지 못하다가 출간되니, 대중의 호기심은 그칠 줄 모르고, 수없이 다양한 해독(解讀)을 출산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청년실업자가 양산되고, 88만원 세대라는 자학적이고 절망적인 호칭이 한 세대를 부르는 명칭에 갈음되며, 현대사회가 조성해 내는 극한 경쟁과 타인에 대한 연민을 거두어버린 황폐해진 인간의 삶으로 인해 체제와 제도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는 것은 어쩜 지극히 당연한 성찰 이랄 수 있으며, 이러한 시선이 당해 소설의 읽기를 지배하는 배경이 될 수밖에 없었음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문학이란 것이 의례 그렇듯이 부분이 작품전체를 대변하지도 않으며,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의 총합이 전체라고만 할 수도 없다. 또한 읽는 이들의 판이한 지식구조와 감성은 무수히 다양한 읽기를 존재케 하며, 구태여 작가의 의도, 작품의 일관된 주제의식이라는 잣대를 갖다 대는 것은 넌센스가 될 수 있다. 

꺽정이 등 칠 두령의 싸움과 친교라는, 만남의 일화들을 통해 “아예 생각 자체를 내려놓고 몸으로 소통하는 기술을 읽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도출은 볼셰비키를 연상시키며, 육체노동의 가치가 존중돼야 하나, 정신노동자가 경시되어도 무관하다는 듯 하는 주장은 시대착오적인 낡은 교조적 발상처럼 보인다. 게다가 정규직이라는 조직에 매여 있는 노동자들의 삶을 온전히 자유라는 이데올로기만으로 매도하는 극한적 상대주의는 또 다른 파벌과 분리를 야기 시키고, 불필요한 대결주의를 조성하는 신중치 못함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작자는 ‘청석골’이라는 도적 집단체를 하나의 이상적 경제, 사회공동체로서의 컴뮌(Commune)으로 보고 있는듯하다. 더구나 여기서 “조선조 부락공동체의 경제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고 있으나, 선뜻 공감하기가 수월치 않다.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서‘하버마스’式 ‘부르주아 공론장’으로서의 ‘마을 공동체’, ‘생태 공동체’등 대안 모색이 시민사회에서 거론되고 있으나, 소설 속 청석골을 이러한 대안적 삶의 모델로 보기에는 많은 결여가 존재하고 있음에서이다. 특히나 우정과 의지라는 추상적 개념에 의지하여 수평적 윤리를 논의하는 것은 너무도 낭만적인 접근이 아닐 수 없다.
작자가 주장하듯이 “이 윤리를 능동적으로 표현 할 수 있다면 어디서건 새로운 관계와 활동을 조직할 수 있다.”는 생각은 세포 조직을 떠 올리게 하고, 대항조직을 구성하는 방법으로 효과적일는지 모르겠다.

다만, 소설 속 칠 두령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의 공부가, 학벌이라는 입신양명의 목적 지향적 공부가 아닌 배워서 남 줄 수 있는 , 타인을 위해, 그리고 자신이 기꺼워하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학습이어야 한다는 시선은, 삶의 새로운 형식의 창안을 위한 신선한 통찰이랄 수 있다. 또한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위한 마이너로서의 새로운 관점, 즉 주류라는 낡은 습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가치를 추구하라는 자존감의 설득은 편협한 물질적 성공주의의 사고를 전환하고 안목을 확장시켜주는 귀한 조언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한편, 이야기의 힘, 우정과 의리, 길에서 터득하는 ‘대자유의 경지’등 시민으로서의 깨어남에 대한 계도적 감상에 더해, “통념을 뒤엎는 반전이 수반”되어 “익숙한 질서를 자유자재로 교란하는 반어와 역설!”, “그 속에서 웃음의 퍼레이드가 펼쳐진다.”는 작품의 소개 글이나, 소설 속 역사적 일화의 한 토막을 빌어 세상을 조롱하는 작가(홍명희)의 시선, 매혹적인 소설의 한 장면을 통한 이해 돕기는 『임꺽정』읽기의 멋진 길라잡이 역할을 하기도 한다. 10冊의 방대한 소설의 개괄을 흥미롭게 읽어 볼 수 기회를 제공하고 있음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진정 소설 임꺽정을 자신의 주체적 시선으로 감상하려는 독자는 전권(全卷)을 직접 완독하길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