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에 대한 오래된 농담 혹은 거짓말 - 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2
김현아 지음, 박영숙 사진 / 호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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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그녀들이 세상의 시선들과 장애에 마주하며 지쳐온 자취를 따라 부여에서, 고창, 남원, 밀양, 통영, 원주에 이르는 문화여행 이랄까? 우리 범인(凡人)들이 주목하기에는 낯 선 곳에 내밀하게 깃든 이유 있는 사색의 여정이라 할까? 역사는 항시 강자와 지배자, 승자의 시각과 논리를 따르지 않던가. 그래서 그 배제된 이면의 역사와 사고(思考)에 있는 약자와 피지배자, 패자의 울분과 아물지 않은 상처, 그리고 그네들의 삶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내기란 작자의 말처럼 “풀밭에서 녹색 실을 찾는” 일 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 여정은 여성, 지금에도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누구의 딸과 같이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리매김했던 그네들의 발자취를, 숨겨지고 왜곡된 주머니에서 하나씩 그 진정성을 꺼 집어내 조명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작업에서 작자는 강자가 만들어 낸 조악한 역사와 거짓을 조롱하고, 조소를 보내며, 의심하고, 연민하기도 하며, 그녀들의 숨결이 배어있는 유산과 고장들의 전경과 함께 가벼운 인문학적 담론을 펼친다.

이러한 관점에서 백제의 패망하면 늘 패키지처럼 묶여 다니는 의자왕, 삼천궁녀, 그리고 계백이 작자의 시선을 피해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낙화암(洛花巖)은 언제부터 꽃들이 떨어진 벼랑으로 불렸을까? 그리고 그 꽃들이라 칭하는 무려 삼천 명의 궁녀가 된 것은 어느 시기부터였을까? 정말 의자왕이 죽자 함께 떨어진 것일까? 이 저작의 표제처럼 새빨간 거짓임은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런 말도 되지 않는 거짓말을 왜 만들어 냈을까? 여자의 몸에 나라의 패망원인을 갖다 붙이는 것은 그야말로 앞뒤가 맞는 멋진 그림이 아니던가. 왕의 방탕에 일조한 궁녀는 탕녀이지 않은가. 그런 그녀들이 강물로 뛰어 들었으니 절개와 순국의 모습을 덧 씌워 형상화하니 그 아니 자연스러운가 말이다. 이와 더불어 선화공주, 계백의 아내, 소서노 조차 역사는 결코 진실을 말해주지 않으니, ‘새로운 눈’, 자연스럽고 익숙한 것들을 의심하는 눈을 가질 것을 피력한다.

우리나라 3대 명루인 밀양 영남루와 아랑전설에 이르면 작자의 재기 넘치는 관점이 이채롭게 펼쳐진다. 우리나라 귀신의 전형인 긴 머리와 하얀 소복 패션이‘아랑’에게 비롯되었단다. 그러니 ‘언니귀신’의 원조격이지 않은가. 그런데 뜻밖의 질문을 던진다. 원혼이 되어 나타나 거듭 새로 부임하는 사또들을 황천길로 보내는 아랑은 왜 직접 복수를 하지 않고 신관 사또에게 간접적인 복수를 부탁하는 것일까?

하~아, 순결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강간당한‘더러운’몸으로 당시 정상성의 심벌이었던 ‘남성’양반에게 나타나는 것은 “귀신의 이름으로 성폭행 당해 죽은 여성들의 존재를 공적 담론의 장으로 부상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라 하면 ‘아랑전설’에서 이쯤의 절묘한 해석은 할 수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듯하다.

더더욱 재미있는 것은 지역사회의 고루하고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에 대한 지적이다. 근자에는 아랑각 앞에 ‘정순문(貞純門)’하고 현판을 걸어두었단다. 사실 남성들의 우매함은 알아줘야한다. 죽은 이의 넋을 달래면 되는 것이지, 왠 느닷없는 정절이데올로기로 의미를 확장하는 것인지, 이 사회의 문화적 자질, 그 수준에 대한 조소와 질책이 통쾌하다.

이러한 남성중심의 실소를 금치 못 할 예는, 죽은 지 일백사십 년이 되어서야 민족정신의 수호자로서 죽음이 공식 인정된‘논개’의 일화에서도 발견된다. 터무니없게도 친고가 전혀 없던 논개에게 400년이 다되어서 ‘주논개’라 하며 관련도 없는 성을 갖다 붙이고 끊임없이 남성과 연관하여 설명하려는 오늘의 인식까지 더해지면 보이지 않는 왜곡된 습속의 권력이 얼마나 억지스럽고, 편향된 것인지 각성케 된다.

이처럼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더구나 사회의 한 정점에 설 정도로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은 세상의 시선과 맞서 싸우고 버티어내는 엄청난 인내와 고통, 용기를 필요로 할 것이다. 남성만의 영역이었던 판소리 연창에 최초의 여성 연창자로서, 이후 판소리에 여성 입문의 길을 열어준 고창의 ‘진채선’, “분노하지만 항거하지 못하고 또한 그런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 시달리는 암울한 식민지 시대의 대중”과 교감하고 소통한 남원 문치마을 ‘이화중선’, 운봉마을의 ‘박초월’은 정말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갔던 여성이었으리라.

이 여정에서 특히 매력적인 도시로 나의 시선을 집중시킨 곳은‘목포’였다. “우리의 근대 유산이 유달리 많이 남아있는 곳”, “시간 여행의 정거장 역할”을 하는 곳, 천만 다행스럽게도 “개발의 회오리에서 ‘소외’된 덕분”에 20세기 초엽의 모습을 간직한 우리민족 수탈의 산증거인 동양척식회사, 구 일본영사관, 이훈동 정원 등을 지금에도 찾아 볼 수 있다니 말이다.

때려 부수고, 갈아엎고, 그리곤 눈앞의 경제이익에 어두워 상자곽 건물을 개발이란 명목으로 획일적으로 나열하는 우리 현실은 아마 아프고,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기억과 마주하지 않고 회피하려는 습관인 모양이다.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치유하지 않으면 비정상적 사고의 다중인격을 양산할 뿐이다. 더 이상은 신뢰할 수 없는 사회로. 혹, 사라질지도 모를 근대의 유산들을 보러 목포에 조만간 다녀와야 할 모양이다.

끝으로 우리 문학에 대하소설이란 커다란 족적을 남긴 두 여성 작가, ‘최명희’와 ‘박경리’의 근원에 대한 성찰, 무한한 생명의 비밀에 대한 깨달음에 정진하였던 그네들의 삶의 자취인 남원과 전주, 통영과 하동, 그리고 원주의 자연적 아름다움과 지역사회의 애정, 일화 등이 시절의 통한을 담고 애정과 존경심 그득한 필치로 그려지고 있다.
이 사회가 불편해하고 은폐하고 싶어 하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세련된 식견과 온기 가득한 연민으로 멋 떨어지게 기술된 매력적인 인문학적 담론이자 여성여행기다. 시종 유쾌함과 진지함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지혜로운 이 저작에 작은 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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