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 제안들 2
조르주 바타유 지음, 성귀수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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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관능, 위반의 관능, 죽지 않으면서 죽음의 세계로 살짝 건너오는 에로티시즘의 빛나는 통찰자, 조르주 바타유의 저작에 목말라하는 독자들을 오랜만에 해갈시켜주는 기대작! http://blog.aladin.co.kr/729034103/377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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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 소설
교고쿠 나쓰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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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 혹은 ‘싫다.’ 로 시작되는 일곱 편의 연작 소설이다. 정말이지 이 부정적인 어휘는 듣는 것은 물론 써진 문자를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마음이 거북하고 편치 않다. 불현 듯 언짢은 감정이 몰려온다. 그런데 이 기이한 제목의 소설을 손에 들게 된 이유 또한 설명하기에는 복잡한 그 무엇이 있었는데, 마땅치 않아 기분을 저하시키는 이 싫음의 실체에 대한 막연한 저항감이었다고 할까? 그리고 제깟 것이 사람의 감정을 얼마나 불쾌하게 몰아댈 수 있는지 보자 하는 오만한 심사(心思)였으리라. 그러나 이내 이 어깃장의 심리는 꺾이고 마는데, 그야말로 온통 싫은 감정에 포획되고 마는 것이다. 정말 싫다! 정말 싫은 소설이다! 그렇지 않아도 일상의 삶이 그리 유쾌하지 않은 사람들이 구태여 이 소설을 읽는 것은 말리고 싶다. 그 만큼 ‘싫은 소설’인 것이다.

 

대체 이 기분을 무어라 해야 할까? “심해를 헤매는 덧없는 기분”이라 하여야 하나, 마음에 무언가 무겁게 걸려 내려가지 않은 듯하면서도 왠지 홀려서 자꾸만 끌려들어가는, 그렇다고 재미가 넘치는 것도 아닌데 사로잡혀 읽게 되는, 그러다가 설렁설렁 페이지를 넘기고 이것도 내키지 않아 책을 덮어버렸다가 다시금 읽었던 페이지를 찾아 언짢음의 현상들에 머리를 처박는 일을 반복케 한다. 아마 이 기묘한 감정이 어쩌면 내가 인식하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할 뿐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불가항력의, 이해할 수 없어 어쩌지 못한 무수한 일상의 편린들, 그 싫은 것들의 지워진 기억들에 대한 공감이었을까?

 

소설은 이렇듯 싫은 현상 혹은 일들이 지독하게 반복되어 발생할 때 이와 마주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이야기다.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의식으로는 이해를 구할 수 없는, 그러나 내게는 발생하고 있는 괴이한 상황, 그래서 어쩌지 못하고 견뎌내다가는 그 싫은 일에 참혹하게 희생당하고 마는 그런 이야기이다. 유산으로 아이를 잃은 부부에게 현시되는 아이, 그것은 공포도 위협도 아니지만 견딜 수 없는 싫은 것이고[싫은 아이], 치매 노인의 수발을 들던 여자에게 불현 듯 다가오는 고통의 환상은 평범했던 삶의 정상성을 점진적으로 파괴하며 사람의 정신을 분열시키고 끝내 재앙적 최후에 이르게[싫은 노인]하고 마는 것처럼 그 정체를 규명할 수 없는 무엇에 대한 이야기 들이다.

 

또한 사업에 실패하고 노숙자가 되어 절망하는 남자가 열어야 하는 행복의 문 뒤에 있는 반복되는 살인의 운명처럼 [싫은 문] 벗어날 수 없으며 아무런 몸짓도 할 수 없는 상황의 무기력성이나, 귀엽고 예쁜 연인의 사랑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던 남자의 무의식 속에서 자라난 거북하고 언짢은 감정의 증폭은 [싫은 여자친구] 그 알 수 없음으로 인해 혹독한 파멸로 치달을 뿐이다. 그러나 이 해석 불가능의 지대, 의식의 표면, 이성이 헤아리지 못하는 현상의 불쾌함 이면, 그 싫음이라는 구체화 할 수 없는 감정의 이면에는 무언가 사위스러움이 진실을 막아서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소설은 마지막 [싫은 소설]에 이르기까지 이 진실을 규명하려는 의지도 가능성의 일말도 보여주지 않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싫은 감정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사람들은 이 터무니없어 보이는 화(禍)이자 변(變)에 속수무책으로 수장되고 만다. 부부가 함께 행복으로 일궜던 집이 아내의 죽음 이후 부패와 상처의 공간이 되어 마침내 남자를 소멸시키고 [싫은 집] , 어떠한 규명도 하지 않은 것처럼. 그러나 연작의 전편에 등장하여 싫음의 무형성에 희생당하는 이들의 유일한 상담자였던‘후카타니’가 무능력과 무지한, 더구나 소시오패스(sociopath)의 전형인 그의 상사 ‘가메이’와의 장거리 출장의 동행에서 마침내 터뜨리는 견딜 수 없는 싦음, 그 잔혹의 실체에게 억눌린 심연의 목소리를 난폭하게 발산한다. 이제 어떤 전조도 없이 평온했던 일상을 헤집어 놓던 그 알 수 없던 싫음의 정체를 깨달았다는 듯이. 그럼에도 여전히 여운이 꺼림칙하다.

 

“무엇보다 싫은 일이 앞으로.

싫다.”

 

“비현실적이고, 부조리하며, 비상식적이고 분별없는 일들”의 음울하기 짝이 없는 파노라마에 이렇게 넋을 잃고 불가해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피할 수 없이 우리의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상실과 실연, 이별, 노화와 좌절과 실패의 심연이 얼마나 어둡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그래서 그것의 회피에 우리들의 보잘 것 없는 연민이라도 연대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말하려는 것일까? 이런 삶의 불가피한 체험이 싫다.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일까? 그래서 이 책 ‘싫은 소설’을 읽는다. 모순인가?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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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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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술렁거림, 소요가 없는 세상에 대한 향수가 몹시도 그리워진다. 광란(狂亂)적 욕망이 널뛰는 이 세계의 현상이라 말하고 싶어 하는 나는, 이미 소설 속 고요한 삶을 살아가는 은교와 무재에게 민망함을 느끼게 된다. 안광을 번뜩이며 치열하게 세상을 말하지 않지만 이 보다 더욱 밀도 높은 뚜렷한 세상 읽기와 정신의 깨어남을 인식케 하는 힘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와 그의 조용하고 나지막한 사랑의 이야기에 흐르는 도시와 사람들의 파노라마에 젖어들며, 절로 그 광란의 본질, 삶을 왜소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소요의 본성들을 각성케 된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발견이다. 아 이렇게 소설이 써 질 수 있구나! 안개가 내려앉은 숲 속의 적요와 하얀 순수함의 언어만으로도 인간과 도시의 비루한 욕망의 실체를 담아내고 있는 아름다움의 문장을. 작가 ‘황정은’을 내 뇌리에 새기게 된다. 조용히 두런거리는 목소리, 때가 끼어들지 않은 정신, 그 백색의 문장에 명민함과 예리함을 의연히 발산하는 정서를.

목청을 돋우어 폭력과 공포와 광기의 권력이 행사하는 부당, 불의, 부정을 말 할 줄 밖에 몰랐던 내게 『百의 그림자』는 완전히 새로운 언어와 문장의 세계를 알려 주었다.

 

가, 나, 다, 라, 마, 이렇게 5개의 건물이 순차적으로 건설되어 40년에 이른 쇠락한 전자상가 - 잘 못 표현했다. 쇠락했다니, 이 획일적으로 타자를 일반화시키는 언어적 폭력을 나는 무심코 저지르곤 한다. - 의 음향기기 수리점 여직원 은교, 트랜스 공방의 설비공 무재, 그리고 이곳이 삶 자체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가난하지만 선량한 사람들. 그러나 세상은 항상 욕망으로 꿈틀대고, 이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대상을 규정하고 범주화하며, 그래서 분리하고 식별한다. 이곳을 사람들은 슬럼(slum)이라고 부른다. 가난한 지역, 폐기처분해야할 대상이 있는 장소, 존재하지만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형상이기에 아예 제거해 버리기 위한 용어이다. ‘나’동의 은교와 무재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세상의 비정함, 그 구조적 폭력성에 의해 자취를 감춘‘가’동의 잔재, 그리고 그 위를 말끔히 치워내고 들어선 조성된 공원을 바라본다.

 

가슴 한 편이 싸하게 시려온다. 그리고 이들에게 감히 무어라 말 할 방편이 없음을 느낀다. 이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 폭력을 이들은 말하고 있지도 않거니와 말 할 의지조차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저 광란적 욕망, 은밀한 권력적 폭력성, 소요의 본성에 대한 지각이 없다. 그래서 외려 그들은 이러한 속물적 욕망으로부터 자유스럽다. 무지하기 때문에 이들이 소요로부터 놓여있다는 아이러니가 발산하는 아름다움에 오히려 시기의 마음조차 든다. 지독하게 때탄 나 같은 헛 똑똑이들의 그 잘난 비판과 윤리의식의 허위를 알아차리게 되었기 때문일까?

 

아, 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를 잊을 뻔 했다. 소설의 표제인 ‘그림자’이다.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이 자신들의 그림자가 일어나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고통의 현상으로 각인되고 있다. 단지 사회적 판단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인해 사회로부터 배제되어 삶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바로 판단 없음, 순박함과 선량함이 희생당하는 비정상적인 세계, 신체를 벗어나려는 그림자의 무언의 분리움직임에 아찔한 위협을 느끼는 것은 무언가 현실의 비감에 대한 직관이지 않을까? 저 고상한 윤리를 넘어서는 바로 그것의 표상인 듯만 싶다.

 

“시끄럽고 분주하고 의미도 없이 빠른데다 여러모로 사나운”세계의 잔인성을 선량함이 철거되지 않은 사람들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어 정말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는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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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동시대에 같이 호흡하게 된 두 젊은이를 사랑한다. 한 사람은 철학자 이진경이고 또 한 사람은 소설가 김사과이다. 그런데 마침 이 두 사람을 연결케 된 김사과의 소설『테러의 시』를 읽게 되었으니 정말 운수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읽고 나자 난 대뜸 이진경의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속 한 문장을 따다 <존재론 적 명명식>이라고 감상글의 제목을 붙였다. ‘테러의 시’는 한 가지 색에 사로잡힌 채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색은 노랗다. 오직 섹스와 폭력과 교회와 시장자본주의가 쾌락을 향해 질주하는 곳, 그래서 이 도시의 색깔에 휘말리지 못하거나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이 되는 곳이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 소설은 그들을 빈 괄호‘( )’로 표기한다.

 

구역질나지만 매혹적인 이도시의 아이러니에 은폐된 진실을 쫓는, 실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존재를 지워버린, 거북해서 외면하려는 것들의 거침없는 드러내기 작업이다. 항상 원초적이며 본질적인 질문을 하는 작가. 우리들은 현실이 아니라고 손사래 치지만 바로 우리들의 추한 모습을 거침없이 이것이라고 가리키는 작가의 일관된 의식에서 나는 우리들의 무능력한 이성과 망상의 지대를 매양 확인하게 된다. 가엾은 영혼들에 보내는 그녀의 진혼곡에 매료되는 이유일 것이다. 이름을 갖지 못한 우리 이웃들의 긴 목록인 이 작품을 많은 한국인들이 함께 읽어줄 것을 기대하며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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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암사자 발란데르 시리즈
헤닝 만켈 지음, 권혁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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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닝 만켈’을 접하게 된 것은 은둔의 삶을 살던 은퇴의사의 늙음과 죽음의 습득을 통과하며 세상과 조우하는 이야기인 『이탈리아 구두』라는 순수문학이었다. 아마 삶의 깊은 골짜기를 관통하는 그 관조의 문장들이 예사롭지 않은 인상을 내게 남겼던 것 같다. 그래서 경이와 두려움이 교차하는 어떤 원초적인 끌림의 제목인 『하얀 암사자』를 손에 들게 된 것은 장르문학이란 범주를 넘어서는 작가의 심원한 인간 통찰력에 기인한 것이라 하여야겠다.

 

이 작품은 분명 범죄 사건의 발생과 이를 수사하는 추리문학이다. 그러나 화려한 영미식 액션이나 과잉의 서스펜스와 스릴에 의존하는 헐리우드식 감각적 자극과는 사뭇 다르다. 또한 사회에 만연한 불의나 부정의 현상들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회파 추리소설로 불리는 것들의 외적 비판과 다르다. 오히려 더 광포한 폭력과 굉음이 있지만 절제미가 있으며, 비판이 있으나 내적 성찰과 가시적 현상들을 초월하는 윤리의식의 확대와 본질의 추구가 있다. 작품에 손상되는 표현이 아니라면 ‘격조가 높다’라고 말하고 싶다.

 

이러한 인식은 작품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스웨덴의 한 지방 경찰서 수사관의 의식으로부터 발견하게 되는 인간의 존엄성을 근간으로 하는 높은 윤리관이라 할 수 있다. 혹자는 평범한 시민의 실종신고를 중대한 사건의 전조로 받아들이고 수사력을 집중하는 이들의 자세를 비롯한 수사관인 주인공 ‘발란더’의 행위를 촌스러움이라고 비하하는 촌평을 하기도 하지만, 이들의 자세에서 우리사회 공권력의 그것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더구나 범죄 용의자들과의 대치에 있어서조차 인명 사상에 대한 경찰의 최후 방어력으로서의 총기 사용 의식이 높은 도덕적 차원에 놓여있음을 보게 된다.

 

특히 위험한 살인 용의자를 추적함으로써 자신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수사관 아빠의 불안한 행보에조차 사회정의라는 도덕적 수준의 실현에 대한 보편적 공감대를 확인하게 된다. 사적 연대라는 개인적 이익과 사회 연대라는 공적 이익의 충돌에서 복지국가 스웨덴이 지니는 윤리적 강점인 것 같아 내심 부러움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 윤리의 차원은 소설의 주요 제재인 인류의 뿌리 깊은 갈등의 근원인 인종(人種)문제에서 출발하기에 단순한 형사사건의 스케일이 국제정치적, 인류문화적 영역으로 확장되기까지 한다. 이처럼 소설은 두 지류의 사건이 수 천 킬로미터의 공간적 거리를 지닌 두 개의 지역에서 진행된다. 작가의 의도야 어떻든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스웨덴,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를 고수하려는 백색우월주의와 인종에 대한 어떠한 분리도 필요치 않는 사회, 폭력과 맹목적 분노가 들끓는 사회와 인권을 최우선시 하는 사회의 병행구조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당연히 그러해야 함에 대한 윤리수준의 견인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미흡한 설명에 의존하여 부동산 매물을 조사하기 위해 진입한 스웨덴 지방의 한적한 저택에서 여자는 낯선 남자의 총탄에 영문도 알지 못하고 살해당한다. 귀가하지 않는 아내의 실종 신고가 접수되고 경찰은 군대의 협조지원을 포함하는 수색을 위해 수사력을 집중한다. 사체조차 발견치 못한 채 수사가 원점을 맴돌던 중 장물아비의 신고에 의해 피살체와 호수에 잠긴 차량을 확인하지만 어떠한 합리적 가설도, 단서도 사건의 본질과 연결시키지 못한다. 이처럼 단순한 실종 신고가 살인사건으로 본격화되고, 단순 살인사건이 의혹이 불어남에 따라 국제 범죄로 점진적으로 확장되며 자연스레 긴장감을 강화하는 구조가 돋보인다.

 

국제범죄의 한 편에 남아프리카가 있다. 유색인종 분리정책을 고수하며 남아프리카를 독점적으로 지배해오던 보어(네덜란드 이주민)인의 보수 비밀 세력은 넬슨 만델라의 석방을 비롯한 백인우월주의 정책의 폐기와 함께 줄루족을 근간으로 하는 다수의 흑인에 의한 기득권의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백인의 지배를 계속하려는 보어인들의 광신세력은 은밀히 최고 권력자를 암살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역사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조차 없다. 우리 인류의 근대사 어디를 보든 소수의 반민중이 항상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얼마나 악착스레 다수의 민중에게 폭력을, 더구나 내밀하게 은폐된 악랄함을 구사하는지 보아왔듯이 남아프리카의 그것은 집요하게 작동한다. 이 움직임이 스웨덴의 작은 지방에서 발생한 우연의 살인사건에 연결되면서 그야말로 소설은 추리문학 다운 면모를 십분 발휘한다.

 

특히 작품성을 더욱 빛나게 하는 요소는 소품 같은 등장인물들이다. 구소련의 해체로 일자리를 잃은 전직 KGB장교‘아나톨리’가 남아프리카의 비밀세력에서 직업을 찾게 되는 것이나, 인접국들의 이탈 주민의 이민으로 점차 복지국가의 전형인 스웨덴이 국제적 범죄의 경유지임을 확신시키는‘타냐’부부의 암약(暗躍)상이다. 개인의 이익 앞에서 어떠한 도덕적 수식도 가치를 잃어버리는 세계임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또한 흑백 갈등의 첨병으로서 보어인 비밀집단의 실세인 남아프리카 정보부 간부 ‘얀’으로부터 인간 존재의 모순과 다층성을 발견토록 하는 것과 이의 대척점에 선 음모세력의 발본을 위한 신예검사 ‘게오르그’의 백인으로서 자신이 새롭게 인식해야 하는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의 변이다.

타자의 심연마저 꿰뚫을 것 같은 도도한 암사자의 시선, 경이로움의 탄성과 두려움의 탄식이 교차하는 모호한 경외의 상징, 신령스럽기까지 한 하얀 암사자가 네덜란드 백인이 아닌 아프리카인임을 선언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온전한 자기의 확인이 되는 것이다.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붕괴로 인한 허무와, 한편은 이데올로기의 분열로 인한 광란적 혼돈의 부추김, 이익 앞에서 진실과 도덕이 어떻게 해석되고 해체되는지를 극명하게 지펴낸 이 긴박감 넘치는 이야기는 이처럼 다양한 시사적 어필과 높은 윤리의식으로 지적 해갈을 도와준다. 다시금 장르문학의 품격을 높여놓은 수작이라 격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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