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주변의 술렁거림, 소요가 없는 세상에 대한 향수가 몹시도 그리워진다. 광란(狂亂)적 욕망이 널뛰는 이 세계의 현상이라 말하고 싶어 하는 나는, 이미 소설 속 고요한 삶을 살아가는 은교와 무재에게 민망함을 느끼게 된다. 안광을 번뜩이며 치열하게 세상을 말하지 않지만 이 보다 더욱 밀도 높은 뚜렷한 세상 읽기와 정신의 깨어남을 인식케 하는 힘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와 그의 조용하고 나지막한 사랑의 이야기에 흐르는 도시와 사람들의 파노라마에 젖어들며, 절로 그 광란의 본질, 삶을 왜소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소요의 본성들을 각성케 된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발견이다. 아 이렇게 소설이 써 질 수 있구나! 안개가 내려앉은 숲 속의 적요와 하얀 순수함의 언어만으로도 인간과 도시의 비루한 욕망의 실체를 담아내고 있는 아름다움의 문장을. 작가 ‘황정은’을 내 뇌리에 새기게 된다. 조용히 두런거리는 목소리, 때가 끼어들지 않은 정신, 그 백색의 문장에 명민함과 예리함을 의연히 발산하는 정서를.

목청을 돋우어 폭력과 공포와 광기의 권력이 행사하는 부당, 불의, 부정을 말 할 줄 밖에 몰랐던 내게 『百의 그림자』는 완전히 새로운 언어와 문장의 세계를 알려 주었다.

 

가, 나, 다, 라, 마, 이렇게 5개의 건물이 순차적으로 건설되어 40년에 이른 쇠락한 전자상가 - 잘 못 표현했다. 쇠락했다니, 이 획일적으로 타자를 일반화시키는 언어적 폭력을 나는 무심코 저지르곤 한다. - 의 음향기기 수리점 여직원 은교, 트랜스 공방의 설비공 무재, 그리고 이곳이 삶 자체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가난하지만 선량한 사람들. 그러나 세상은 항상 욕망으로 꿈틀대고, 이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대상을 규정하고 범주화하며, 그래서 분리하고 식별한다. 이곳을 사람들은 슬럼(slum)이라고 부른다. 가난한 지역, 폐기처분해야할 대상이 있는 장소, 존재하지만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형상이기에 아예 제거해 버리기 위한 용어이다. ‘나’동의 은교와 무재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세상의 비정함, 그 구조적 폭력성에 의해 자취를 감춘‘가’동의 잔재, 그리고 그 위를 말끔히 치워내고 들어선 조성된 공원을 바라본다.

 

가슴 한 편이 싸하게 시려온다. 그리고 이들에게 감히 무어라 말 할 방편이 없음을 느낀다. 이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 폭력을 이들은 말하고 있지도 않거니와 말 할 의지조차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저 광란적 욕망, 은밀한 권력적 폭력성, 소요의 본성에 대한 지각이 없다. 그래서 외려 그들은 이러한 속물적 욕망으로부터 자유스럽다. 무지하기 때문에 이들이 소요로부터 놓여있다는 아이러니가 발산하는 아름다움에 오히려 시기의 마음조차 든다. 지독하게 때탄 나 같은 헛 똑똑이들의 그 잘난 비판과 윤리의식의 허위를 알아차리게 되었기 때문일까?

 

아, 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를 잊을 뻔 했다. 소설의 표제인 ‘그림자’이다.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이 자신들의 그림자가 일어나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고통의 현상으로 각인되고 있다. 단지 사회적 판단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인해 사회로부터 배제되어 삶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바로 판단 없음, 순박함과 선량함이 희생당하는 비정상적인 세계, 신체를 벗어나려는 그림자의 무언의 분리움직임에 아찔한 위협을 느끼는 것은 무언가 현실의 비감에 대한 직관이지 않을까? 저 고상한 윤리를 넘어서는 바로 그것의 표상인 듯만 싶다.

 

“시끄럽고 분주하고 의미도 없이 빠른데다 여러모로 사나운”세계의 잔인성을 선량함이 철거되지 않은 사람들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어 정말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는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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