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암사자 발란데르 시리즈
헤닝 만켈 지음, 권혁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헤닝 만켈’을 접하게 된 것은 은둔의 삶을 살던 은퇴의사의 늙음과 죽음의 습득을 통과하며 세상과 조우하는 이야기인 『이탈리아 구두』라는 순수문학이었다. 아마 삶의 깊은 골짜기를 관통하는 그 관조의 문장들이 예사롭지 않은 인상을 내게 남겼던 것 같다. 그래서 경이와 두려움이 교차하는 어떤 원초적인 끌림의 제목인 『하얀 암사자』를 손에 들게 된 것은 장르문학이란 범주를 넘어서는 작가의 심원한 인간 통찰력에 기인한 것이라 하여야겠다.

 

이 작품은 분명 범죄 사건의 발생과 이를 수사하는 추리문학이다. 그러나 화려한 영미식 액션이나 과잉의 서스펜스와 스릴에 의존하는 헐리우드식 감각적 자극과는 사뭇 다르다. 또한 사회에 만연한 불의나 부정의 현상들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회파 추리소설로 불리는 것들의 외적 비판과 다르다. 오히려 더 광포한 폭력과 굉음이 있지만 절제미가 있으며, 비판이 있으나 내적 성찰과 가시적 현상들을 초월하는 윤리의식의 확대와 본질의 추구가 있다. 작품에 손상되는 표현이 아니라면 ‘격조가 높다’라고 말하고 싶다.

 

이러한 인식은 작품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스웨덴의 한 지방 경찰서 수사관의 의식으로부터 발견하게 되는 인간의 존엄성을 근간으로 하는 높은 윤리관이라 할 수 있다. 혹자는 평범한 시민의 실종신고를 중대한 사건의 전조로 받아들이고 수사력을 집중하는 이들의 자세를 비롯한 수사관인 주인공 ‘발란더’의 행위를 촌스러움이라고 비하하는 촌평을 하기도 하지만, 이들의 자세에서 우리사회 공권력의 그것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더구나 범죄 용의자들과의 대치에 있어서조차 인명 사상에 대한 경찰의 최후 방어력으로서의 총기 사용 의식이 높은 도덕적 차원에 놓여있음을 보게 된다.

 

특히 위험한 살인 용의자를 추적함으로써 자신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수사관 아빠의 불안한 행보에조차 사회정의라는 도덕적 수준의 실현에 대한 보편적 공감대를 확인하게 된다. 사적 연대라는 개인적 이익과 사회 연대라는 공적 이익의 충돌에서 복지국가 스웨덴이 지니는 윤리적 강점인 것 같아 내심 부러움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 윤리의 차원은 소설의 주요 제재인 인류의 뿌리 깊은 갈등의 근원인 인종(人種)문제에서 출발하기에 단순한 형사사건의 스케일이 국제정치적, 인류문화적 영역으로 확장되기까지 한다. 이처럼 소설은 두 지류의 사건이 수 천 킬로미터의 공간적 거리를 지닌 두 개의 지역에서 진행된다. 작가의 의도야 어떻든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스웨덴,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를 고수하려는 백색우월주의와 인종에 대한 어떠한 분리도 필요치 않는 사회, 폭력과 맹목적 분노가 들끓는 사회와 인권을 최우선시 하는 사회의 병행구조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당연히 그러해야 함에 대한 윤리수준의 견인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미흡한 설명에 의존하여 부동산 매물을 조사하기 위해 진입한 스웨덴 지방의 한적한 저택에서 여자는 낯선 남자의 총탄에 영문도 알지 못하고 살해당한다. 귀가하지 않는 아내의 실종 신고가 접수되고 경찰은 군대의 협조지원을 포함하는 수색을 위해 수사력을 집중한다. 사체조차 발견치 못한 채 수사가 원점을 맴돌던 중 장물아비의 신고에 의해 피살체와 호수에 잠긴 차량을 확인하지만 어떠한 합리적 가설도, 단서도 사건의 본질과 연결시키지 못한다. 이처럼 단순한 실종 신고가 살인사건으로 본격화되고, 단순 살인사건이 의혹이 불어남에 따라 국제 범죄로 점진적으로 확장되며 자연스레 긴장감을 강화하는 구조가 돋보인다.

 

국제범죄의 한 편에 남아프리카가 있다. 유색인종 분리정책을 고수하며 남아프리카를 독점적으로 지배해오던 보어(네덜란드 이주민)인의 보수 비밀 세력은 넬슨 만델라의 석방을 비롯한 백인우월주의 정책의 폐기와 함께 줄루족을 근간으로 하는 다수의 흑인에 의한 기득권의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백인의 지배를 계속하려는 보어인들의 광신세력은 은밀히 최고 권력자를 암살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역사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조차 없다. 우리 인류의 근대사 어디를 보든 소수의 반민중이 항상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얼마나 악착스레 다수의 민중에게 폭력을, 더구나 내밀하게 은폐된 악랄함을 구사하는지 보아왔듯이 남아프리카의 그것은 집요하게 작동한다. 이 움직임이 스웨덴의 작은 지방에서 발생한 우연의 살인사건에 연결되면서 그야말로 소설은 추리문학 다운 면모를 십분 발휘한다.

 

특히 작품성을 더욱 빛나게 하는 요소는 소품 같은 등장인물들이다. 구소련의 해체로 일자리를 잃은 전직 KGB장교‘아나톨리’가 남아프리카의 비밀세력에서 직업을 찾게 되는 것이나, 인접국들의 이탈 주민의 이민으로 점차 복지국가의 전형인 스웨덴이 국제적 범죄의 경유지임을 확신시키는‘타냐’부부의 암약(暗躍)상이다. 개인의 이익 앞에서 어떠한 도덕적 수식도 가치를 잃어버리는 세계임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또한 흑백 갈등의 첨병으로서 보어인 비밀집단의 실세인 남아프리카 정보부 간부 ‘얀’으로부터 인간 존재의 모순과 다층성을 발견토록 하는 것과 이의 대척점에 선 음모세력의 발본을 위한 신예검사 ‘게오르그’의 백인으로서 자신이 새롭게 인식해야 하는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의 변이다.

타자의 심연마저 꿰뚫을 것 같은 도도한 암사자의 시선, 경이로움의 탄성과 두려움의 탄식이 교차하는 모호한 경외의 상징, 신령스럽기까지 한 하얀 암사자가 네덜란드 백인이 아닌 아프리카인임을 선언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온전한 자기의 확인이 되는 것이다.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붕괴로 인한 허무와, 한편은 이데올로기의 분열로 인한 광란적 혼돈의 부추김, 이익 앞에서 진실과 도덕이 어떻게 해석되고 해체되는지를 극명하게 지펴낸 이 긴박감 넘치는 이야기는 이처럼 다양한 시사적 어필과 높은 윤리의식으로 지적 해갈을 도와준다. 다시금 장르문학의 품격을 높여놓은 수작이라 격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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