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에 관하여
요한 G. 치머만 지음, 이민정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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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든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진정으로 위대해질 수 없다.

더불어 우리는 고독을 통해서만 자신을 파악해 낼 수 있다.” - <서문>중에서


나는 고독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오래 전 서울대 문리대가 있었던 동숭동 가로수 길의 작은 카페 오감도의 실내에서 타오르던 난로와 적막한 고요를 더욱 깊어지게 하던 책 장 넘기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리던 분위기에 대한 기억으로 향한다. 지금은 그 풍부한 적요함의 풍광이 모두 사라져버려 더는 찾지 않는 곳이 되었지만, 내 기억 속에는 그때만큼 마음을 가득 채운 충만감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소음과 관계로부터 차단된 느낌, 오직 세계에 홀로 내 존재로 가득해진 마음, 그 평온과 온전함의 순간을 다시 찾기 위해 내 상상은 달려가곤 한다.

 

그렇게 달려가곤 했던 회수만큼 나는 고독의 상념이 고착화되어 있다. 때문에 그 고독의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18세기 사상가의 고독에 관한 이 에세이를 읽게 된 것은 쇼펜하우어가 고독을 찬미할 때 잠깐 언급한 인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줄곧 고독(solitude)’에 대한 그리움의 의지였을 것이다. 나는 고독을 사회관계를 위한 열정의 회복이나 활기의 충전과 같은 사람들의 세계 진입의 휴식으로 말할 생각도 없으며, 심원하고 고매한 사색의 방법론과 같은 삶의 유별난 지혜라고 말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어쩌면 오래도록 봉인되어 적절한 순간에 힘을 발휘하기를 기다려 온 젊음의 감정, 혹은 사랑의 불씨를 되살려내 달콤한 회상에 젖어들고 싶어 하는 욕구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의 저자 요한 게오르그 치머만은 고독을 말하기보다는 고독의 영향, 고독의 이점과 같은 실리의 측면에서 기술하고 있다. 물론 고독은 인생의 온갖 우여곡절을 정신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부수적 과실로 효과와 효용성을 말할 수 있다. 아마 삶을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이 그 삶의 유익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행위라면 고개를 돌릴까 저어되는 마음에서 혼자 하는 시간에 대한 화려한 수사들을 늘어놓은 것일 게다. 고독과 침묵 속에서 명상에 잠기다보면 일상의 상태와는 다른 더 고양된 상상력의 촉진과 고상한 구상의 산물이 출현하기도 하고, 순수하고 정제된 기쁨을 맛봄과 동시에 지적 즐거움에 몰입함으로써 존재에 들러붙었던 세상의 오물들을 생각에서 떨어낼 수도 있다. 더구나 자기 내면의 힘을 마음껏 즐기는 가운데 고양된 정신은 자연스레 고결한 주제의 사색으로 더없이 행복한 느낌을 가져다주며 삶의 시간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깨우치게 한다.

 


혹자들은 말하곤 한다. 바삐 살아가는 지엄한 경쟁사회에서 한가하게 고독 타령을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감상(感傷)에 불과하다고, 서둘러 정신 차리고 대열에서 이탈하지 말고, 더욱 현실에 매진하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현실의 삶이라 부르는 바쁜 경쟁의 한복판에서 지속하려면, 그 소진과 소멸의 억제를 위한 휴지기가 있어야하고, 나아가 삶의 투쟁을 계속할 수 있는 열정의 충전이 필요하다. 잠시의 오롯한 사색의 시간, 고독한 시간을 상실한 오늘의 우리네 얼굴들은 텅 빈, 내면의 공허로 그득한 그 결핍을 반증하듯, 온통 마음공부니, 자기사랑이니 하는 책들과 강연이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지 않은가. 치머만의 지적처럼 고독은 인생이란 험난한 바다를 헤져나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타고 나갈 수 있는 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고독은 이처럼 삶의 동력이기도 하지만, 보다 궁극적인 것은 마음의 평온이고, 이것이야말로 산다는 것의 지고(至高)한 행복일 것이다. 어느 한 때, 바위 들 사이에서 작은 물줄기의 부드러운 속삭임에 귀 기울이고 평원을 거닐며 신선한 미풍을 들이마시던 기억 속으로 돌아가는 것, 그 순간 속에서 잇따르는 사유의 세계를 헤아리는 시간만큼은 완전한 자유와 고고한 우수(憂愁)의 경외와 황홀의 기쁨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옆에 누군가 있어도 좋다. 서로의 침묵 속에서 고독의 기쁨을 이해하고 다정한 눈빛의 교환만으로 사랑과 축복의 시간이 되어 줄 터이다.

 

치머만의 고독에 대한 찬미의 많은 에피소드와 단상들을 읽다보면 절로 고독의 시간, 그 내밀하고 기품있는 시간에 시샘이 일어날 것이다. 세상과 관계의 번잡스러움에서 잠시 거리를 두고 싶을 때 치머만의 책 어느 곳을 펴들고 읽다보면 어느 덧 행복의 고요한 열기가 맴돌던 장소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깨끗하고 고결한 마음의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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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을유사상고전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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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정신적 우월함은 자신을 남과 고립시킨다.” - 15-3-34, 177쪽에서

 

문학 작품을 읽다보면 대단원에 이르러 혼자의 삶을 고뇌하며 세상과 고투하던 인물이 타자와 관계의 필요성을 깨닫고, 세상을 자신이 겨뤄야하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공존해야 하는 것으로 흔히 결말을 맺는다. 홀로 하는 삶이란 세상에 대한 어떤 적의나 결여, 또는 불완전성을 의미하는 것일 테고, 삶의 고통이란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온전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타자의 세계와 화해함으로써, 그것의 계기가 무엇이 되었건 함께하는 것이 한 인간 삶에 평화와 온전함의 긍정적 가능성의 진입이라는 듯 말이다.

 

나는 이러한 결말들에 매우 회의적이다. 물론 소설 속 인물들이 신체나 정신면에서 성장 중인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이고, 그네들의 환경이 소외되거나 여러 결핍으로 인한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 결여의 충족을 위한 행위를 위해 예상할 수 없는 각양의 장애와 맞서야 하는 것이고, 이로 인해 그 싸움에서 야기되는 고통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현실을 도외시한 속편한 얘기라고 비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삶을 산다는 것은 자신의 이해에서 출발 하는 것일 게다. 고통이란 인간 내부의 정서이지, 외부의 대상으로부터가 아니다. 어떤 대상으로 인해 촉발된 사건이 곧 고통은 아닌 것이고, 그 사건을 인간 개인이 어떻게 수용하는가, 반응하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소품과 부록의 글 모음인 이 책,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을 읽게 된 것은 이러한 물음 - 행복과 불행을 인식하는 관점 - 에 대한 하나의 응답을 발견하려는 것이었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가 소품과 부록이라고 펴낸 책에서 선택 발췌한 문집이다. 그의 대표 저술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인간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등 앞선 저작들의 대중적 실패에 따른 보다 평범하고 일상적 관심사를 통한 대중독자의 접근을 도모한 저술로 써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기회를 통해 쇼펜하우어는 앞 선 책들을 경험적 언어를 통해 보충하려는 보론(補論)의 성격 또한 부여하고자 했던 의도이기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내 읽기의 관심사는 앞서 언급했듯 인간 본질에 토대를 둔 삶의 지혜, 다시 말해 사람들이 행복한 삶이라고 지칭하는 것의 일관된 지향성이 기성 세계에 대한 순응을 기초로 한 망상처럼 여겨졌기 때문이고, 쇼펜하우어는 분명 그에 대해 대답하고 있으리라고, 그것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까닭이다.

 

책의 구성은 행복론인생론, 색체론으로 엮어 소품과 부록의 글들을 구분 수록하고 있는데, 1부를 구성하고 있는 행복론은 아마 타자의 관계, 세상과 함께하는 것만이 인간의 완전함의 지표인 듯 말하는 문학의 흔한 결말들인 이 세계의 오류, 인식의 그릇됨에 대한 맞춤의 비판으로 이해하여도 될 것이다. 염세주의자로 알려진 쇼펜하우어가 행복을 말한다니, 놀랄 일이지만 저자는 누구보다 행복을 객관적으로 고찰한다는 것은 내재하는 오류로 인해 논의 가치가 없음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Ⅱ, 49, ‘구원의 길에서 행복론의 오류를 질타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가 왜 행복을 논의하는 글을 썼을까하는 대목의 대답이 머리말 글에서 짧게 표명되고 있는데, 주관적으로 냉정하고 철저히 숙고하면, 행복한 생활은 아무튼 비()생존보다 훨씬 나은 생활이라 정의할 수 있다.”, 철학은 분명 행복론의 인생의 부합성에 부정적임에도 대중은 이것의 긍정을 전제로 살아가기에 비록 미사여구에 불과한 이 관점에 순응하여 조건부의 가치를 지닌 한에서 논의한다고 쓰고 있다.

 

이 표현에서 볼 수 있듯, 대개의 사람들이 행복을 삶의 긍정적 전제로 살아가기에 이 관점에 순응하여 논의 하는 것이다. 부정적이지만 순응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이미 인간이 쫓는 것은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으며, 이후 논의의 글들은 그 오류나 그릇된 이해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며, 설혹 그렇더라도 행복이라고 인식될 만한 거처, 유일한 근원을 강변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 운명의 차이를 만들어낸 세 가지를 규정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그것은 첫째, 건강, 지성, 재능, 개성, 인격, 정신력, 아내와 남편과 자식 등 인간 자신을 이루는 것이고, 둘째는 재화나 물질과 같은 인간이 소유하는 것이며, 셋째는 타인의 눈에 비친, 남이 평가하는 명예, 지위, 명성과 같은 자신의 표상이다. 이들 세 가지 규정에 기초해 인간은 자기 운명의 행과 불행을 느낀다. 여기서 그 논의의 세부 내용들은 생략키로 한다. 다만, 내게 회의적 시선을 던져준 타자와의 관계라는 사회와의 뒤섞임, 함께하는 삶만이 인간의 온전성과 평화라는 삶의 지복으로의 가능성의 길인가에 대한 응답의 내용들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1. 인간 운명의 세 가지 규정


자신을 이루는 것은 소유나 타인의 시선과 같은 외부적인 것이 아닌 라는 존재 자체의 본질이며 결정적인 것이다. 나의 지성, 개성, 인격의 움직임은 직접적인 자신의 관계이지만, 외부의 것들은 유발하는 한에서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일례로 건강이 나빠지면 세상만사가 무용해지며, 정신 또한 우울함으로 훼손된다. 생명의 본질은 운동에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나, 진부한 말이지만 가장 진실한 말인 건강한 신체에 깃드는 건강한 정신이야말로 행복의 가장 중대한 토대이다. 사실 우리들의 행복과 불행은 둘째와 셋째 운명의 규정인 외부 대상의 객관적, 실제적 모습이 아니라 그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이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다.

 

즉 행과 불행은 우리를 이루는 유기체가 받아들인 인상에 의한 감수성, 반응이다. 이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방해하여 행복을 감소시키는 것이 고통과 무료함이다, 궁핍과 결핍은 고통을 낳고, 안전과 과잉은 무료함을 낳는다. 오늘날 궁핍의 고통은 극히 적은 비율이 되었음에 비해 과잉의 무료함은 비례하여 늘어났다. 즉 무료함은 감수성의 쇠퇴, 정신의 둔감함, 예민함의 부족으로 드러난다. 이 정신적 둔감함이 수많은 현대인의 얼굴을 내면의 공허함으로 물들이고 있다. 때문에 이 정신적 둔감함으로 인한 내적 공허를 달래려고 외적 자극을 갈망하며, 소유와 타인의 평가로부터 행복을 찾으려 한다. 만일 원래 지닌 것, 자신의 건강한 신체를 바탕으로 지성과 인격의 충실함이 쌓여있다면 그 열정으로 지루함이나 무료함을 느낄 새가 없을 것이다. 이 본래 지닌 것이 끊임없이 유지 발전되어 왔다면 그 충실성에 의해 외부의 것이나 타인의 시선은 덜 필요해질 것이다. 그래서 탁월한 인간은 조용하고 검소한 생활, 외부 관계에 의해 발생하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생활, 고독을 향유하려 할 것이다.

 

때문에 고독할 힘을 가진 사람들은 고통과 무료함의 습격으로부터 벗어나 행복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여유를 확보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원래 지닌 상태로 향하려는 이유인 그 본질은 이것에 있는 것이다. 그들이 찾는 것이 자연이요, 은둔의 지대에서 고독의 시간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 자질인 고귀한 지성을 축적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내 권태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의식과 개성을 만끽하게 해줄 지성의 활력이 없기 때문이다. 무료하고 멍한 상태에 포획되어 다시금 외부의 자극을 찾아 나선다.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존재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향유의 원천을 성장시키는 데 소홀하였기에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외적 원천, 재화와 물질을 모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이에 매달려 자신을 이루는 것들인 건강과 알량한 지성이 소진되어 고갈되고, 불확실하고 믿을 수 없으며 무상하고 우연에 맡겨진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붙들려 짧은 인생의 시간을 덧없이 흘려버린다. 그러느라 세상과 싸우며 숱한 고통을 겪고는 인생은 살아갈 이유가 없는 허망함이며 공허라 염세에 빠지거나. 세상을 향해 난폭한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색다른 외부의 자극으로 보상받기 위해 사교와 사치, 오락과 여흥을 병적으로 추구한다. 그러나 이 또한 이내 지리멸렬함이 몰려오고, 그 시들해짐에서 벗어나려 더 이상의 소유와 과시의 즐거움을 쫓는다. 이 반복되는 여정은 환멸이고, 권태고, 공허다. 그나마 이러한 현실에 대한 작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하는 길이 바로 타자와 함께하는 관계의 증진이다.

 

자신의 정신적 둔감함, 지성의 결핍을 타인이라는 존재를 통해 불완전한 온전성을 구하는 길로 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타인이 혹여 높은 지성의 존재라면 다행이겠지만, 그 역시 외부 자극에서 행복을 구하기는 마찬가지인 사람이라면 이는 아마 백번이면 백번의 실패, 관계가 발생시키는 크고 작은 고통만을 수반한다. 결국 자기의 온전함이 가져오는 평온과 지성의 활력이 쌓여있지 않는 존재는 고통을 피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도 내 최초의 물음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응답은 획득되었다. 결국 자신을 이루는 것이라는 본질적 함양에서 삶의 의미와 행복이 확보되는 것이지, 이것 외의 그 어떤 외부 자극도 행복을 담보해주지 못한다. 요즈음 숱한 소설들, 에세이들에서 발견되는 타자와의 관계를 향한 길이 마치 인간 삶의 궁극적 지복인양 서술하는 것에는 결코 변변치 않은 미망(迷妄)뿐임을.

 

이처럼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이루는 것, 즉 행복의 으뜸은 건강, 자신에 속한 것으로서 정신의 작용, 함양된 지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주의 할 점이 있는데, 열정 - 정신적이든 신체적이든 - 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면 곧 지루해지기에 이에 몰두하게 되면 그 열정을 실행할 때 마주하는 장애들을 돌파하느라 고통에 맞닥뜨리게 된다. 결국 의지에 봉사하는 데 필요한 정도 이상의 지성이 필요한 것이다. 의지를 압도할 지성!, 그래 지성이다. 저열한 지성이 아닌 세상에 대한 앎의 직간접, 경험들에 대한 누적된 학습으로 축적된 고귀한 지성 말이다. 사람들이 쫓는 지속적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믿는 소유와 명예, 지위는 행복보다는 오히려 고통을 몰고 오기 일쑤다. 이것이 대체 무슨 망발이냐고 무수한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할 터이다. 명예가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도 있고, 돈이면 그 무엇도 살 수 있는 세계라고 항변할 것 같다.

 

2. 인간이 소유하는 것, 타인의 시선과 평가라는 삶의 함정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이의에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타인의 좋은 평가를 받아 나름대로 허영심이 충족되면 기뻐하는 것”, 그리고 홀대받고 무시당하면 어김없이 모욕감을 느끼고 매우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놀라운 일이라고, 타인의 평가라는 것, 즉 명예와 지위나 명성이라는 것의 실체를 들여다보자. 과연 타인이 나라는 존재에 대해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내 지성이나 재능, 건강과 인격의 요소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마 극히 피상적이고 빈약한 자원에 의존한 이해에 불과할 것이 뻔한 것이고, 나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일 게 분명하다. 남의 판단과 시선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어리석고 멍청한 것이라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 가지는 나에 대한 협소와 왜곡과 천박함은 절대 나를 넘어서지 못한다. 다시 말해 타인의 견해는 별것 아니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눈에 비친 자기 모습에서 실제의 자신을 찾는 것은 자기 존재의 토대를 타인이라는 간접적 의식에 두고 있다는 정말 황당함 그 자체가 아닐까.

 

진실이 이러함에도 사람들은 이 같은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인간 행복에 중요한 요소로 마음의 안정과 독립에 유익하게 작용하는 것이라 믿는다. 쇼펜하우어는 오히려 방해되고 불리한 작용을 한다고 단언한다. 결단코 인간 행복의 요소가 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목숨보다 명예가 중요하다는 사람들의 믿음을 앞서 언급 했으니 그 실체를 매듭지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 허무맹랑한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혐오스러움으로 입꼬리가 절로 씰룩거린다. 이 말은 출세하기 위해 타인의 견해가 필요하다는 지극히 하찮고 평범한 세태를 근거로 삼는 과장된 표현 이상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 망상은 사람들을 다스리거나 조종해야 하는 인간들이 만든 구실일 뿐, 이를 신화처럼 믿는 자들이 무수히 출현하는 현실이 서글프기조차 하다. 타인의 머릿속에 있는 결코 본질 일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라는 명예가 자기 존재를 이루는 생명보다 중요하다는 기이한 주장은 정말 기괴하기까지 하다. 명예와 허영, 허세는 모두 수단 때문에 목적을 망각하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무의미함이요, 실속없는 공허다. 대체 왜 타인의 시선이 자신의 행복에 소용이 있으리라 여기는 것인지 이해 불가능하기만 하다.

 

아주 빈번하게 정신적으로 가장 떨어지는 사람이 실은 가장 행복하다는 주장을 듣곤 한다. 그런데 그 누구도 이러한 사람의 행복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러한 사람들이 행복할지지도 모른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옹호와 반박이 엇갈린다. 행복의 첫째 조건은 분별력에 있다고 저열한 지성의 행복을 부정하는가 하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 가장 유쾌한 삶이다.”라고 바보의 삶을 긍정하기도 한다. 또 이런 말도 있다. 바보의 삶은 죽음보다 고약하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정신적 욕구가 저열하거나 부재한 인간, 즉 자신을 이루는 것이 열악한 존재가 돈과 물질인 외적 자극에 매달릴 때 필리스터(속물)라 부른다. 즉 정신적 욕구가 없는 인간으로, 현실이 아닌 현실에 매우 진지하게 관여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인식과 통찰을 위한 충동이 없고, 미적 향유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으므로 생활의 활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무한한 내적 결핍과 많은 돈이 만들어낸 여유의 무료함으로 이를 보상받기 위해 사치와 허영이라는 명예와 뿌리가 같은 욕망을 추구한다. 즉 속물은 감각적이고 육체적 향락뿐이기에 반복되는 그 동물적 아둔함과 무미건조함이라는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어디에 있겠는가. 금방 고갈되는 감각적 향락과 몰려오는 지루함, 그래서 그들에게는 오로지 지위와 부, 권력과 영향력만 보일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정신적 욕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이것을 행복이라 부를 수 있을까? 물론 일하지 않고 평생을 살아갈 재화와 물질을 지녔다면 결핍과 고난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삶의 구성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특전을 활용하려면 정신적 욕구, 높은 지성의 축적을 향한 욕망이 성취된 자기 존재만으로의 온전성, 고독할 힘을 갖춰야 하는데, 대부분 이를 갖추기는커녕, 텅 빈 지성으로 외부 자극의 탐닉에 자유를 낭비한다. 아마 평범한 사람들은 수많은 부자들의 불행을 알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그들 또한 평범한 대중들의 고통만큼이나 불행할 것이다.

 

이제 명예라는 것, 이것은 객관적으로 우리의 가치에 대한 타인의 견해를 말한다. 대체 명예에 주어지는 가치의 근원과 기원은 무엇일까? 아마도 다른 사람과 어울릴 때만 인간은 존재 의의가 있고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의식에 터 잡은 것이고, 인간 사회의 유용한 일원이자 효용이 있는 인간으로서 협력할 능력이 있어 공동체의 이점을 공유할 자격이 있는 인간이라는 일종의 표시일 것이다. 한 마디로 타인의 호평을 받으려는 마음이다. 물론 이렇게 타인으로부터 인정되는 명예는 분명 삶의 용기를 북돋워주는 데 일말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견해가 아니라 타인의 견해라는 것, 내 존재를 이루는 것이 아닌 것, 내 지성의 고귀함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라 점이다. 특히 명예란 명성과 달리 장본인이 예외적 인물임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누구에게나 전제되는 성질이라는 것이고, 때문에 곧잘 지극히 평범한 인물도 자기의 명예가 더럽혀졌다느니 하며 윽박지르기 일쑤이다. 하물며 명예는 중상에 의해서 얼마나 손쉽게 손상되는가. 단지 공동체의 효용성에 기인하는 이 외적 시선과 평가란 행복의 항구적 요소로 정말 보잘 것 없는 일시적인 것 이상이 아니다.

 

3. 시국에 대한 짧은 斷想


이렇게 말하다보니 명예나 체면을 손상시켰다고 자타의 견해 차이가 충돌 할 때 발생하는 최고의 법정으로서 난폭성으로 비화하는 인간들의 얘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더구나 민주사회라는 한국 사회에 군사폭력이 동원되는 비상계엄의 발동을 보았기에 정신적 능력의 결여, 자신의 빈약함과 결점을 제거하기 위해 폭력이 시작되는 지점을 생각게 된다. 명예는 타인이 내게 있다고 생각될 것을 자신이 확신하는 정말 유치한 이름이다. 그렇기에 이것이 손상되었을 때 적의와 난폭성을 보이는 것은 그 본래의 성격으로 인한 천박함의 자연적 귀결일 것이다. 이때 표현되는 난폭함은 바로 자신의 정신적 능력이나 도덕적 정의의 싸움이 승산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즉각 신체적 힘, 폭력으로 정당하고 도덕적 분별의 폐기를 선언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국가 폭력의 한 형태인 비상계엄이다. 이것은 온갖 정신을 일거에 무색하게 할 수 있고, 진리, 지식, 분별력, 그 어떤 고매한 지성도 아무 소용이 없어지고, 오직 난폭한 폭력성이라는 몰상식한 완력권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 야만적이고 기묘하며 가소로운 것이 바로 명예라는 것의 규범이다. 폭력의 협박으로 외적 존경의 표명을 강요하려는, 반민주적 반동적 야만으로의 퇴행은 명예의 가장 부패한 형태이다. 문명 상태에 홉스식 자연 상태의 금수성(禽獸性)을 도입하는 것, 그래서 그 금수성의 원칙을 통해 자기 명예에 도전한 사람들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아마 자기 존재를 이루는 것들 이외의 인간 운명의 여타 규정들은 이처럼 무수한 부정성의 양태들로 설명 가능 할 것이다. 이와 동일한 귀결에 이르게 하는 모욕이라는 감정의 본질을 살펴보면, 내란을 추동한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볼 수 있다. 모욕이란 자신의 가치와 품위를 너무 높게 생각해 상상한 자만심이라고 정의된다. 실제로는 그 어떤 품위도 가치도 없거나 아주 적은 인간들이 늘 입에 달고 사는 나쁜 정서다. 결국 이것도 타인의 시선에 좌우되는 인간의 빈약한 정신 상태의 반증적 지표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나의 개념어의 의미를 추적하다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어 한없이 얘기를 지속하게 될 것 같다.

 

4. 맺는 말


쇼펜하우어는 인간 삶에서 고독할 힘의 능력을 가장 지고한 가치로 삼고 있는 철학자다. 고독은 공간적 은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쇼펜하우어가 스치듯 인용하는 고독의 철학자 요한 게오르그 침머만의 문장을 인용하듯, 나태로 시간을 허비하는 고립이 아니라, 신나게 떠들어대는 군중 속에서도 자기 힘만으로 독립하여 살아갈 수 있는 인간 정신의 고귀한 고독함이다. 물론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터득하는 것 또한 인간 삶의 품위 있고 고귀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자기 존재의 오롯한 평온과 온전함을 수시로 위협할 것이고, 그것과 불필요한 소모전을 펼쳐야 할 것이다. 극한적 개인주의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고독할 힘이란 자신의 노력과 행위를 신뢰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일 뿐, 저 먼 은둔지에 처박혀 고립 속에 홀로 음풍농월을 읊자는 것이 아니다. 고독은 삶의 동력을 만들어내고, 다시금 세계 속 일원으로 고귀한 창조자로 기여할 힘이 되는 것이다. 참되고 지극한 행복은 바로 이 고독할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이 고독할 힘을 키우지 못했다. 그저 소유와 외부의 시선에 자신을 붙들어 매기 위한 고통의 시간에 휩쓸려 자기 존재를 지탱할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쇼펜하우어의 이 방대하고 깊은 사유들의 모음집인 소품과 목록의 글들을 읽다보면, 사물의 본질, 인간의 참된 본질이란 무엇인지, 생존의 공허함에 관한 몇몇 기록들에서부터 종교와 교육, 여성과 신화의 고찰, 문체론과 독서, 논리학과 변증술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채롭고 고고한 사유들을 접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를 비관주의자로 여겼던 많은 독자들은 행복론이라는 자못 현실의 긍정적 접근을 논의하는 또 다른 철학자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오늘의 우리들 개인적 삶은 물론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의 현상들을 해석, 통찰하는 단초들을 읽어 낼 수도 있을 것이. 미약한 지성은 한순간도 의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의지가 인식을 훨씬 압도하기 때문이다. 지성의 인식이 의지를 넘어설 수 있도록 우리들은 고독을 가질 여유를 확보해야만 한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우리들은 구태여 소유와 남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초연하게 벗어나 자유와 온전함을 만끽하게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자기 머리 위, 봉에 묶여 눈앞에서 계속 달랑거리는 건초다발에 시선이 고착되어 그것을 먹으려는 욕심에 현실적 감각을 상실하고 허황된 불가능을 쫓는 당나귀의 삶에서 탈주하는 적극적 삶의 동력 또한 얻을 수 있으리라. 지성의 함양은 그렇기에 삶의 지혜와 행복을 위해 절대 필요한 것이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통찰하려면 지성(분별력)이 필요하지만. 일어난 일을 통찰하는 데는 감각만 있으면 된다. (평범한 두뇌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위험을 숙고하고 평가할 때 언제나 이미 일어났다고 하는 일에만 염려한다. 영리한 두뇌는 혹시 일어날 수도 있을 일까지 숙고한다)”

- 15-4-50, 189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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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3
안보윤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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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소리에서 감지되는 미세한 악의, 교활하게 아주 조금씩만 거칠어지는 행동,

그때마다 더듬이들은 온몸을 떨며 고통스러워했다.” -167

 

기묘하게 시의에 맞춘 작품이 되었다, 악의 흉물스러움을 마주하는 바로 지금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그 악의 편재성을 성찰하는 또 한 차례의 기회가 되었다. 누군가의 이름인 표제 속 전수미는 아마도 세상 모든 곳의 ()’이라는 인간 모두에 두루 내재하는 것으로서의 하나의 표상일 것이다. 소설 속 화자는 바로 전수미의 동생 전수영이다. 수영의 성장 과정에 늘 전수미는 부모의 사랑에 접근하는 기회를 동생에게서 빼앗고, 온갖 교활한 사건사고를 통해 시선을 자신에게 붙들어 매어두는 존재다. 그로인해 수영은 모든 것을 양보하고, 관심으로부터 소외된 삶이 불가피하게 강제된 것이어야만 했다.

 

보란 듯 부모의 침실에 남자를 끌어들인 후 엄마에게 영상을 보내고 그 혐오스러운 적나라함을 목격하게 하는 전수미의 행위는 관심을 넘어 당혹과 걱정, 온 가족을 고통으로 몰아넣음으로써 획득되는 즐거움이다. 수영은 이러한 집안 상황에서 부모에게 그 어떤 연민이나 사랑도 기대할 수 없음을 안다. 이러한 전수미의 행위로 인해 닮은 모습의 수영은 앙심을 품은 또 다른 추악한 남자들로부터 기습적인 뭇매와 수모를 감당하는 일상이 계속된다. 그 누구라도 이 악으로 똘똘 뭉친 존재를 단지 피붙이라고 관용하기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영은 그 참담한 희생, 아니 일방적 피해로 점철된 현실에 이를 간다.

 

수영은 전수미라는 악의 물리적 접근이 가능한 집을 떠나기 위해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1년 내 몸이 파손되는 악명 높은 배송분류 아르바이트를 버텨낸다. 오직 악의 영역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작은 전세방이라도 구할 목돈의 마련을 위해서. 그 작은 돈으로 주변 환경이 열악해 값싼 방을 구하게 된다, 하지만 수영에게는 집을 피해 오직 자신만의 삶을 꾸릴 수 있기에 마음의 평온을 얻기에 충분하다. 그리곤 계속해서 주변에 지속해서 혐오시설들이 잔존하기를, 집세가 오르지 않기를, 그래서 계속해서 살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가족 내 악의 존재에 대한 증오의 서사는 수영이 새로이 개원한 노견(老犬)들의 돌봄을 전문으로 하는 동물병원에 취업함으로써 늙음과 그 노화에 따라붙는 곤혹스러운 질병들과 죽음이 그 당사자들의 가족들, 돌봄을 맡게 되는 존재들, 바로 우리들에 어떤 영향을 초래하는지 그 실상을 투영한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는 늙은 개들, 더는 이들을 바쁜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이 돌볼 수 없게 된 개들이 맡겨지는 죽음 이전에 경유하는 장소다. 수영은 원장의 말마따나 절실해서 뽑힌 직원이다. 그녀와 이유는 다르지만 또 다른 절실함으로 인해 취업한 소란과 함께 개들을 나누어 돌보는 노동을 한다. (노동자의 절실함을 이용하려는 탐욕스러움, 그 이기심이란!)

 

말 못하는 생명의 고통을 어루만지며, 그들을 씻기고 산책시키고, 이상 징후를 수시로 점검하는 가운데 늙음의 슬픔과 연민을, 그들 주인이었던 인간들의 사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맡긴 시간이 길어질수록 병원비의 부담이 가중됨을 암시하는 견주들의 감정적 징후의 변화와 함께 병원비에 대한 이의가 제기될 때면 개들은 적절한 시간에 맞추어 죽음이 행해진다. 이제 늙고 병든 인간은 으레 요양원으로 보내지거나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삶의 마지막 종착지처럼 여겨지곤 한다. 우리들의 부모이자 형제자매인 노인들이 겪게 되는 돌봄의 현주소와 교차되며 오늘 우리들의 심연에 자리한 불편과 부담이라는 언어에 가려진 작은 악의 모습을 보게 된다.

 


수영은 원장이 내건 동물 돌봄의 언어 뒤에 재화를 향한 꾀바른 욕망만이 있음을 안다. 오직 견주의 지불 능력의 판단에 따라 맡겨진 노견의 죽음의 시간이 정해진다는 것을, 요양원이라는 인간 돌봄 시설의 돌아가는 현 실태와 그리 다른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맡겨진 노쇠한 인간을 찾는 가족의 발길이 뜸해지고 어느 시점부터는 비용의 납부가 지연되거나 지불 능력이 사라졌음을 알아차리게 될 때, 그 인간의 운명 또한 얼마 남지 않았음의 표지로 작동한다는 것을. 이 세계의 작동이 예외 없이 돈의 지불 능력, 이 한 가지에 달려있다는 것을, 제아무리 생명의 고귀함, 신성함을, 그리고 도덕적 책무를 고상하게 떠벌리고 있지만, 우리들의 사회는 이러한 현실의 부담을 결코 나눠 가질 의도란 것이 전혀 없음을 확인하게 될 뿐이다.

 

수영은 노견 한 마리의 배 아래 쪽 망울이 느껴지고, 그것이 어떤 질병의 징후임을 어렴풋 감지하지만 원장에게 전하여 치료하는 것을 미루다 그것이 치료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러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한다. 수영이 그 개에 대한 연민이 없어서거나 돌봄의 게으름 때문이 아닌 표현할 수 없는 늙음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함께 그의 죽음을 방치코자하는 묘한 양가감정의 혼란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견주가 겪는 경제적 고통과 각박한 삶 속 심리적 상처를 헤아린 표현키 어려운 감정이 야기한 행위로 보인다. 이유야 어떻든 수영의 방치로 인해 개는 죽어 화장된다. 어느 날 망울을 반복적으로 어루만지는 수영의 동작이 녹화된 CCTV를 내미는 원장으로부터 묘한 협박을 받고, 이에 상응하여 병원의 실상에 대해 수영이 입을 다물 것을 넌지시 압박받는다.

 

이제 아주 중요한 이 작품의 정교한 구성을 말 할 때가 된 것 같다. 수영은 언니 전수미의 지속되는 악행의 피해자임에도 수동적 태도를 견지하며, 단 한 차례도 진실을 부모나 여타 인물에게 전하지 않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추리물처럼, 어떤 반전, 그 이면에 묻힌 진실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남기며 이 소설은 이야기의 힘을 잃지 않은 채 이어지게 하고 있다. 이 점만으로도 작품은 강력하고 정교한 구성력이 돋보인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수미가 수영의 어떤 약점을 틀어쥐고, 그 반대급부로 악행을 통해 버젓이 부모의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었음을 알게 된다. 전수미는 자신이 일하는 요양원에서 한 노인의 죽음을 방치함으로써 살릴 기회가 있었음을 고의로 회피했다는 증거에 의해 살인죄로 수감되어 있고, 그녀의 변론을 위해 변호사는 수영에게 가족으로서 우호적 증언을 요구하지만 수영은 그에 응하지 않는다.

 

수영은 어린 시절 유일하게 가족들이 함께 캠핑을 나섰던 어느 날을 기억한다. 전수미가 텐트에 불을 질렀던 그날에 벌어졌던 하나의 트라우마인 사건을, 하얀 껍질의 자작나무가 곧게 솟은 숲 속에서의 비밀을, 수영은 더는 세계의 뒷면에 나를 가둬두지 않을 것임을, 자신을 땅 속 어둠에 가라앉힌 그 비밀의 옭아맴으로부터 벗어날 것임을 다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난 전수미가 아니니까.”, 수영은 자신의 어둠, 작은 악의 모습을 보았다. 지금 그 출처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인간들의 의식적 인격이 확실히 도덕적인 태도를 지니기 위해서는 내면의 악을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기 안의 악에 대한 인식의 경고 문장이 이에 맞춤인 것 같다.

 

이 작품이 그 구성의 세밀함에 더해 또 하나의 미덕이라면 수영의 삶, 그녀가 사는 법을 체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는 법이란 결코 단순하고 진부한 언어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악을 조금씩 길들여 조절하는 작업이 바로 사는 법의 체득이다. 이것은 결단코 외로운 작업이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수영은 바로 견주들, 같이 일하는 동료인 소란, 그리고 노견들에 대한 사랑, 그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관계성을 회복하고 악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힘을 얻었던 것일 게다. 병원은 문을 닫게 되고, 오갈 때 없어진 소란에게 자신도 모르게 함께 지낼까하고 말한다. 그녀는 이것을 내가 진짜 하고 싶어 하는 말, 내 양심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비밀의 음습한 지대를 떠나 관계가 있는 연대의 세계로 나섬으로써 그녀는 세상의 일부가 되고 자기안의 악과 싸울 수 있게 되는 것일 게다.

 

오늘 우리들은 자기 안의 악은 한 번도 주시하지 않은 채 타인만을 판단하려하고, ‘나만큼은 선인이고 정상이다.’라고 주장하는 몽매함의 그 무섭고 집요한 한 인간을 보고 있다. 그 인간은 자기 안의 악은 외면하고 악을 자기 바깥의 세계로 몰아대는 비상식적 착각을 인지하지 못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어둠의 그림자에 압도된 인간, 악은 우리의 바깥에 있지 않다. 바로 자기 내면의 악에 압도된 인간, 무사고(無思考)적 인물이며, 에고이스트처럼 우리는 언제든 그와 같은 흉물이 될 수 있다. 안보윤 작가의 이 소설은 바로 이러한 우리들 내면의 악,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를 인식토록, 그로써 세상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전수영의 사는 법이라는 그 체득의 과정을, 그녀들에게 보내는 헌사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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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페스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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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정말 아름답구나찬란한 신세계여이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니!”

-5막 1, 181~184행 에서


셰익스피어는 그의 극작가로서 일생의 활동에서 정말 이 희곡 미랜더(Miranda)의 대사처럼 이상적 국가, ‘, 찬란한 신세계로 부를 요소들을 발견했을까?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주인공 푸로스퍼로(Prospero)를 통해 이제 저의 공국도 회복하고 사기꾼도 용서하였으니 당신의 주문으로 이 섬에서 살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 여러분도 범죄를 용서받으시려거든 관대하게 저를 놓아주십시오.”라며 이 작품을 끝으로 에이본(Avon) 강가 스트래트퍼드에서 은퇴의 삶을 시작했다.

 

셰익스피어는 마침내 신세계, 아름다운 인간들이 존재하는 세계의 요소들을 찾아냈을까? 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그의 독창적인 비평서 William Shakespeare에서 오랜 극작가로서의 숱한 추구에도 불구하고 풍요와 조화, 평화로 채워진 세계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자연의 극악한 신비화, 이유 없는 마술적 장치에 의존하여 멋진 신세계를 붙들어 놓으려 했지만 그 어떤 장치도 발견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가 극예술로부터의 퇴장이었다고 쓰고 있다. 이 비판은 절반의 진실만 담고 있는 듯하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많은 전문가들이 템페스트배신과 용서와 화해를 주제로 한 것이라는 데 이의가 없다고 한다. 작품의 표면적, 혹은 서사적 줄거리는 물론 이들의 해석에 동의케 하지만, 작가가 흩뿌려 놓은 대사 속 문장들은 이보다는 한 예술가의 고뇌를 엿보게 한다. 그는 연극배우이자 극작가였다. 육체와 언어를 활용하는 존재였다는 의미이다. 육체와 언어의 조화를 향한 갈망만큼이나 그 한계에 대한 뼈저린 인식이 컸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작품이 폭풍을 맞이하여 고투하는 수부장과 대 귀족과의 언쟁으로 시작하는 것을 작가의 강한 의지의 산물로 보아도 될 것이다.

 

거센 폭풍에 의해 난파에 몰린 배를 구하기 위해 사투하는 수부장을 비롯한 선원들의 처절한 분투에 귀족 곤잘로는 수다스런 말로 간섭해댄다. 이때 수부장이 내뱉는 말은 육체와 말의 쟁투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파도들이 왕의 이름 따위에 관심이나 있는 줄 아시오? (...) 이 폭풍과 물결에 대해서 잠잠해지도록 명하여 평온하게 만든다면 저희는 더 이상 밧줄을 다루지 않겠습니다.” 말의 공허, 자연에 대한 그 무기력함과 대조되어 육체의 실존적 쟁투는 마치 정신에 대한 육체의 승리처럼 보인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폭풍이 자연이라는 물질성에 의해서가 아닌 12년 전 배신에 의해 바다로 내몰렸던 푸로스퍼로의 마술, 즉 말의 형상화라는 점으로 이는 다시 역전된다. 이러한 투쟁은 작품 내내 지속되는데, 푸로스퍼로와 미랜더 부녀가 바다에 실려와 살게 된 섬의 주인이었던 마녀 시코랙스의 사생아인 괴물의 형상을 한 캘리밴과 공기의 정령 에어리얼의 대조적 수행 관계를 통해서 육체와 정신의 갈등은 푸로스퍼로를 통해 상징적으로 한 인간의 내면적 긴장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문장들은 푸로스퍼로의 노예가 되어 그의 명령을 수행해야만 되는 캘리밴이 나누는 대화는 이를 반영하는 한 예로 보아도 될 것이다.

 

푸로스퍼로: 내가 네 자신의 말뜻도 모르고 그저 짐승같이 떠벌리기만 할 때, 난 말을 가르쳐서 의사가 통하도록 해주었다.

캘리밴: 당신은 나에게 말을 가르쳐 주었소. 그 덕으로 내가 얻은 이득은 저주하는 법을 아는 것이 전부요. - 12중에서

 

이것은 서사의 진행 과정 중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중요한 대사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푸로스퍼로의 육체성의 상징으로 캘리번을 읽게 되면 푸로스퍼로가 자신의 신체를 정신이라는 언어, 즉 문명화하기 위해 노력을 그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여전히 결실을 맺고 있지는 못하지만, 극의 결말에 이르러 캘리밴의 정신적 승화가 이루어져 푸로스퍼로가 어떤 융화, 조화의 평정에 이르렀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러한 육체와 정신에 대한 이해는 푸로스퍼로의 딸 미랜더의 대사에서도 반영되어 드러난다. 난파선으로부터 살아나 섬에 오른 나폴리 왕국 알론조 왕의 아들 퍼디난드에 대한 그녀의 묘사이다. 만약 나쁜 정신이 저렇게 훌륭한 집을 쓰고 있다고 한다면 선한 것들도 거기에 살려고 그것과 경쟁할 거예요.”

 

이 대사는 멋진 용모를 한 인간은 결코 선함이 거기 깃들어있을 거라는 주장이다. 육체와 정신의 조화로운 융합에 대한 기대심리인데, 바로 이에 근거한 대사가 이 희곡의 명대사인 인간은 정말 아름답구나! , 찬란한 신세계여(51)”이다. 한편 푸로스퍼로의 정신, 그의 언어를 물성으로 대리 수행하는 에어리얼과의 관계가 이와 대비되어 극의 중요 축을 이룬다. 에어리얼은 공기의 정령으로 푸로스퍼로의 말을 행위로 수행하는 존재이다. 그는 푸로스퍼로의 약속에 대한 신뢰로 적극적으로 돕는다. 에어리얼은 보이지 않는 정신의 상징이며 물성을 통제하는 힘이다.

 


밀라노 대공이었던 자신을 배신하고 나폴리 왕과 결탁하여 죽음의 바다로 내쫓은 분노로 야기된 폭풍의 마법을 행함에 있어서도, 또한 섬에 생존하게 된 나폴리 왕과 배신자이자 왕위 찬탈자인 자신의 동생 앤토니오 일행에 대한 동정심을 권유하는 것도 에어리얼의 목소리다. 마술이 매우 강력하게 그들에게 미쳐서 그들을 보시면 마음이 누그러질 것입니다.” 이에 대해 푸로스퍼로 또한 그들과 같은 인종인 내가, 그들에 못지않게 날카롭게 정서에 반응하고 고통도 느끼는 내가, 너보다 더 동정적이지 않겠느냐? 비록 그자들이 나에게 저지른 큰 죄는 나의 골수에 사무치나, 나는 고매한 이성으로써 분노를 참고 있는 것이다. 더 귀한 행동은 복수에 있기보다는 용서의 미덕에 있는 것이다.”라고 이미 절대적 용서의 가능성을 예고케 한다.

 

그럼 무엇이 이러한 악행과 씻기지 않은 분노를 용서와 화해에 이르게 한 것일까? 이 작품을 또 하나의 사랑의 서사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그 원인일 것으로 보인다. 이에더해 푸로스퍼로가 캘리밴이라는 자기 육체의 야만성과 에어리얼이라는 정신의 문명성이 오랜 갈등 끝에 내적으로 화해하였음에 기초하는 것일 게다. 적의 자식인 퍼디난드와 딸 미랜더의 사랑과 결혼을 축복하기까지 푸로스퍼로가 퍼디난드에게 육체노동이라는 시험을 부과함으로써 그 수행과정과 그 가운데 움트는 순수한 사랑의 과정을 발견케 하는 것은 곧 두 극단의 감정을 봉합하는 유일한 해결책으로 사랑의 결합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작품은 표면적 이야기처럼 그리 단순하고 명료한 해석을 이끌지는 못하는 것 같다. 특히 말의 물성과 정신성이라는 측면에서 에어리얼이 갈구하는 푸로스퍼로부터의 속박, 다시 말해 그의 말의 물적 수행자에 붙들려 있는 한 자신의 자유에 대한 억압을 답답하게 여기고 있는 까닭이다. 마침내 푸로스퍼로의 조건 없는 용서와 화해에 이르는 순간이 되어서야 그는 무()로 환원되어 공기로 흩어지는 자유를 얻는다. 어쩌면 셰익스피어 자신이 언어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삶을 새롭게 살고자하는 심정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 속에서도 계속 방황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퍼디난드는 미랜더를 처음 대면하자 사랑에 빠져들고 감옥처럼 작은 섬을 충분한 공간이라 느끼고, 미랜더 또한 아버지 아닌 최초의 인간이자 남성인 퍼디난드를 보고는 더 훌륭한 남자를 찾을 욕망이 사라져 버리듯 지극히 제한된 곳에서 자유를 발견토록 한 것인데, 에어리얼이 욕망하는 자유와 두 연인의 자유 사이에서 고뇌하는 작가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그는 스트래트퍼드로 은퇴하는 길을 선택했으니 아마 에어리얼의 제약 없는, 그 어떤 속박도 없는 자유를 욕망했던 것일 게다.

 

그것은 언어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극예술로부터의 자유, 언어의 물성으로부터의 자유이지 않았을까? 극의 주요한 제재인 푸로스퍼로의 마술은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을 물리적으로 변형할 수 있는 창조적 말의 산물을 상징하는 것이고, 푸로스퍼로가 마술 가운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마술책을 일찍이 어떤 측면도 닿지 못한 바다의 깊숙한 곳에 던져버리는행위는 극작가로서의 자리를 내려놓고 오직 순수한 삶의 존재로 남기로 하겠다는 결심으로 해석하여도 무방할 것 같다. 작가는 야심차게 자신의 최종 작품을 아름다운 인간들이 사는 신세계를 빚어내려 했지만 결국 그 해결책을 찾지 못했던 것이기에 이 작품은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추정을 하게 한다.

 

당대 극작의 중요 규칙인 삼단일(three unities), 즉 하루의 시간, 한 장소, 하나의 줄거리에 관한 것이라는 세 가지 일치를 준수한 걸작으로 이해되었듯, 형식적 측면에서 작가의 가장 숙성된 작품으로 이해되어도 될 것 같다. 그러나 비록 작품을 용서와 화해, 그리고 관용과 사랑의 희망으로 맺고 있어 생의 찬가라고도 하지만 역시 그 생의 가치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제시는 미완에 그치고 만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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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랜드
에드윈 A. 애벗 지음, 서민아 옮김 / 필로소픽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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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2차원 세계만을 알고 살아온 어느 미천한 플랫랜드 출신자가 3차원 세계의 신비를 접했을 때처럼, (...) 그들 입체 인류의 탁월한 인간 종들이 상상력을 꽃피우고 겸손이라는 귀한 재능을 더 깊이깊이 키워나가길 바라며.” 

- 독자를 위한 헌사, 5

 

예기치 않은 독서로 이어지고 있다. ‘플랫랜드(평면세계)’에서의 3차원 세계 인식의 어려움으로부터 우리 인간의 4차원 세계 인식의 곤란성을 엿보는 하나의 비유도구로써 인용하였던 책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자기 차원의 편견에 얼마나 쉽사리 영향을 받고 잘못을 저지르는가에 대한 자기 성찰의 한 웅변으로 들렸던 까닭이다. 19세기 영국의 성직자이자 작가이며 언어학자이기도 했던 에드윈 A. 애벗의 이 발칙한 소설은 기하학적 기본 원리와 선험적 사유의 필요 역설 속에서 인간 사회의 정치적 이론과 제도의 풍자를 버무린 꽤 흥미로운 저작이다.

 

작중 화자는 플랫랜드, 2차원의 평면 세계에 사는 존재(사각형)이다. 그는 그들의 시간으로 새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에 3차원 세계의 존재가 2차원 세계의 가장 수학적 사고가 출중한 존재에게 그들 세계 밖의 가능성, 다시 말해 제한된 인식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의 존재 가능성이라는 사고의 깨우침을 가르쳐 줌으로써 야기된 새로운 시선에서 자신의 세계를 서술하는 이야기다. 그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아니 상상할 수 없었던 시선을 얻는다. 그때 그가 내뱉는 말이 , 멋진 신세계여!”. (올더스 헉슬리의 20세기 대표적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는 셰익스피어의 16세기 희곡 템페스트에서 시작하여 19세기의 이 작품 플랫랜드를 경유한 문화역사의 한 산물임을 보게 한다. 멋진 신세계라는 이 경탄의 외침은 셰익스피어를 떠난 이후 그 의미가 전도되어 왠지 불온한 탄성으로만 느껴진다.)

 

2차원 세계인 플랫랜드와 대비하여 3차원 세계를 스페이스랜드로, 그리고 1차원 선의 세계를 라인랜드, 차원이 없는 심연인 점의 세계인 포인트랜드의 영역을 대비하여 기하학적 사유에 내재된 본질, 그 한계를 상상토록 한다. 재미있는 표현들이 소설의 각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이를테면 점의 세계는 점 그 자신이 자신의 세계이고 자신의 우주이며, 다른 존재에 대해선 개념조차 없기에 복수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세계라고 정의한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지만 하나이며 전부인 세계, 자기만족의 비천함과 무지의 세계라는 것이다. 2차원의 존재가 보기에 그 얼마나 무기력하고 맹목적인 만족으로 보이겠는가!

 

144, 삼차원에서 평면 세계를 내려다 볼 때, 이차원 존재는 이렇게 내부를 결코 볼 수 없다

 

스페이스랜드, 3차원의 세계를 경험한 평면세계의 존재는 한 번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up)'라는 입체공간에서 평면 세계를 아래로 내려다봄으로써 자신이 살던 세계의 내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경험으로 체득된 지식은 플랫랜드 지식의 옹졸함과 편협함, 자의성이 너무도 명확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렇게 고차원을 인식한 존재가 자신의 세계인 평면세계를 설명한다. 이 설명들이 지극히 재미있어 혹시 지루한 읽기가 되지 않을까 우려했던 선입견은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다. 플랫랜드의 존재들은 각()과 변으로 형태를 지닌 존재들로 동일한 길이의 변을 많이 가진 다각형의 존재들이 귀족인 상류계급을 형성하는 신분사회다. 그 최상에는 무수히 많은 변을 가져 동그라미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성직자인 최상위 계급으로 플랫랜드의 모든 정치, 사회, 법제도와 문화를 통제 관리한다.

 

여기서 무수한 의문이 발생한다. 그들 평면의 존재가 다른 존재를 어떻게 구별, 인식할까하는 것인데, 그 서술의 발칙함은 바로 우리 인간세계에 가닿는다. 하부계급은 촉각, 즉 서로를 느껴서 상대가 어떤 계급, 어떤 성()임을 인식하고, 상류 계급은 오랜 훈련과 학습을 통해 시각인식을 통해 구별한다는 것이다. 하층 계급 특히 이등변삼각형과 같이 각이 예리한 존재를 느끼려다가는 그 각에 찔려 회복할 수 없는 상처로 사망할 수 있기에, 그처럼 미천한 소통방식을 취하지 않는 것이고, 더구나 오랜 학습을 통한 시각인식방법은 하층계급은 그만큼의 돈과 시간을 지불할 능력이 없기에 상류계급의 독점적인 차별의 인식방법이라는 것이다. 아마 저자는 이미 19세기 영국사회 전반을 깊숙이 잠식한 자본주의 관념의 핵심인 시간과 돈이 사회체제를 견인하고 있음을 통찰한 것으로 보인다.

 

계급이 이렇게 특정 도형으로 고착되어 있는 세계라면 반란, 혁명으로 체제의 혼란과 붕괴 우려의 불안이 항상 잠재하고 있었을 것인데, 간혹 돌연변이로 인해 이등변 삼각형이나 불규칙 도형 중에서 정삼각형이나 변의 길이가 동일성을 지닌 존재가 출생하여 상위 계급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 희귀한 현상들, 상위 계급 진출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의 출생을 귀족 계급은 환영하는데, 이러한 변이로 인한 하층 계급의 상위 계급으로의 이동 발생이 아래로부터 일어날 혁명을 막아줄 유용한 방호막이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며, 특히 이러한 계급 상승의 기대가 하층민의 희망을 부채질함으로써 체제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의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기대 심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이고, 이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계층상승의 흔치 않은 일화는 화제가 되어 가능성의 신화로 선전되곤 한다. 1880년경에 발표된 작품이니 작가는 마르크스를 비롯한 당대의 다양한 자본주의 비판 사유들을 알았을 것이다. 반면 오늘 우리들의 시선에서 보면 어리둥절할 얘기들도 있는데, 남성들은 모두 다각형의 존재를 향한 기대를 꿈꾸지만, 여성은 오직 바늘 모양이라는 하나의 형태로 고착되어 있어 각이 곧 지능과 지식을 의미하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계급으로 지칭되고 있다는 점이다.

 


허나 이것은 역설적 의미를 지녀 남성 중심 사회에 일종의 잠재적 위협 요인이 되어 인구 억제를 통한 혁명의 싹을 자르는 신의 섭리로 해석됨은 물론 성의 힘에 대한 균형의 요소로 작동되기도 하는데, 바늘 모양의 그 날카로운 예각이 주변 존재들을 살상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여성의 행동에는 여러 규제와 관습이 행해지고 있고, 평면 세계이다 보니 누군가가 다가올 때 모두 하나의 선이나 점으로 인식되기에 자칫 바늘에 찔려 사망하게 되기에 지속적으로 흥얼거려야 한다거나 좌우로 흔들거리며 다녀서 자신이 여성임을 상대에게 인식토록 하는 것이다. 웃기는 얘기지만 이것을 여성들이 왜 지킬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것은 상류 계급에 합류하기 위한 여성들의 바람이라는 동기 때문인데, 자기 자손의 계급을 보장하기 위한 성 본능에 터전을 잡고 있는 듯하다. (왜곡된 사회진화론의 반영으로 보인다.)

 

여성의 형태로 인한 의미는 더욱 흥미롭게 전개되는데, 인식에 대한 어려움으로 인해 기발한 발상이 착안된다. 각 변에 서로 다른 색으로 장식하는 존재가 출현한 것이다. 계급의 중간계층인 한 오각형이 예측 능력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각 변을 각양의 색으로 장식한 것이다. 이로써 그가 앞으로 향하고 있는지, 뒤를 보고 있는지, 그가 어떤 계급인지를 바로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촉각이라는 상대에 대한 느낌을 통한 위험한 구별 방식이나, 오랜 훈련을 요하는 시각인식 방법이 쇠퇴하게 된 것이다. 항상 체제의 저변을 구성하던 관습은 이처럼 지식 계급의 편의적 논리에 의해 하나의 문화체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때 이들이 들고 나오는 논리는 이렇다. 자연이 변들을 구분한 것은 하나의 선으로 색깔을 다르게 칠하라는 뜻이다.“, 마치 자연의 섭리, 곧 신의 섭리를 들먹이며 불가침의 신성성을 씌우는 것이다.

 

여성의 바늘 모양도 자연의 신성한 섭리이긴 마찬가지다. 그 인구 자동조절 기능처럼 신은 보상과 희생의 균형을 적절하게 부여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상위 계급인 동그라미들이나 바늘 모양의 여성은 하나의 변으로 이루어져 각기 다른 색을 칠할 구분이 없다. 이때 또 자의적인 의미의 부여로 자신들의 신성한 권위를 유지하는데, 원주를 지닌 신성한 축복을 받은 존재이기에 자신들은 변의 구분이라는 색의 구분이 불필요한 순수함의 존재로 선언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직자인 최상위 계급 동그라미와 여성의 구별이 모호해진다. 작가의 의도적인 장치로 여겨진다. 그럼으로써 성직자와 여성은 순수성의 신성성을 함께 한다.

 

이렇게 색깔이 귀족 독점의 시각 인식 기술을 무용하게 하자 그네들의 지적 기술은 비례하여 빠르게 쇠퇴하는데, 이때 모든 개인과 계층은 동등하게 인식되고 동등한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존재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에따라 모든 존재 도형은 보편 색체라는 앞과 뒤 절반씩 다른 색칠을 통해 구별하게 된다. 시각인식의 쇠퇴는 사회 위협요인이 된 것이다. 인식론의 변화가 가져온 사회 체제 및 관습과 문화의 요동을 생각게 하는 얘기들이다. 한 사회의 도덕이나 정치적 규범이란 것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상대적인지를.

 

아주 멋진 자유의지 존재여부의 비유도 등장하는데, 동질의 각과 변을 지닌 다각형이 우세한 계층을 형성하는 사회는 바로 그 형태의 완벽한 규칙성을 체제의 신성한 근간으로 여기고 있기에 오직 형태의 규칙성만이 도덕적 완전성을 담보한다. 따라서 어떤 잘못이나 결함은 신체 형태의 불완전성, 즉 자기 형태의 불균형성에 기인하는 것이 되어 사법부는 즉각 그 존재를 척결한다. 도둑질이나 그 어떤 범죄도 형태의 불균형성이 초래한 것이라는 변명이 가능하게 되는데, 사회적으로 처벌이 가능하지만 가정 내에서 이러한 사태는 곤혹스러운 상황을 마주하게 됨을 토로하기도 한다. 형태는 곧 의지가 관여할 수 없는 본성의 문제라는 것인데, 이는 오늘날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경우 인간 존재의 범죄 처벌 불가능성 주장과 닮아있다.

 

129, 입체인 구를 평면 존재가 인식할 때

 

사실 이 작품은 이러한 사회정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사유의 실험이라는 기하학적 통찰과 맞물려 서술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고 탁월하다. 2차원의 존재에게는 위와 아래라는 관념이 들어서지 못한다. 만일 그에게 삼차원 입체 존재가 출현하다면 오직 그는 삼차원의 존재가 평면에 닿은 부분만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점이거나 어떤 선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구()가 플랫랜드에 출현했을 때 평면존재는 처음 점이었다가 점점 둘레가 커지는 선만을 인식할 것이다. 그것은 놀라운 인식일 것이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 입체존재가 지면을 위로 떠오르거나 평면 아래로 내려가면 사라져버린다. 생각할 수 없는 차원의 존재는 어느새 출현했다가 사라진 것이 된다. 만일 이를 목격한 존재가 이를 묘사한다면 평면세계의 존재들은 망상이라거나 환영을 보았거나 기만이라고 몰아댈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미확인비행물체(UFO)라 부르는 물체가 이러한 삼차원을 넘어선 고차원의 존재 출현이 아닌가라는 상상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시간으로 인해 휜 공간의 상상처럼.

 

이 책은 하나의 사고 실험이기도 할 것이다. 상상 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기 위해서, 그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 생각할 수 없음을 승인하고 그 한계의 인지에 대한 겸허함으로부터 세계의 이해와 타자의 포용이 가능함을 역설하는 것일 게다. 포인트랜드의 점은 자신의 세계를 벗어난 그 어떤 세계도 상상하지 못한다. 라인랜드의 선분에 있는 존재는 바로 이웃 존재 너머의 그 어떤 세계와의 직접적 조우가 불가능하며 선분 밖의 평면공간을 허공으로 인식한다. 플랫랜드의 존재는 타자의 인식이나 주변 형상을 결코 조망하지 못한다. 입체 공간인 삼차원에 사는 우리들은 사차원의 세계를 인식하는데 곤란과 함께 인식의 혼란을 겪는다. 좀처럼 떠올리지 못한다. 결국 자신들의 차원에 갇혀 그 세계에서 자신들에게 인식되는 형상을 가지고 자연법칙이니 신이니 자신들의 체제유지를 위한 합리화란 얼마나 보잘것 없는 것인지를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차원의 존재는 자기 세계의 집이나 타 존재의 내부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삼차원의 존재는 그들 이차원 존재인 다각형 존재들의 내부를 훤히 볼 수 있다. 플랫랜드의 존재들은 또한 타 형태 너머의 존재들을 인식할 수 없으며, 그네들 생활거처의 지형을 볼 수 없다. 다만 유추하거나 추측할 뿐이다. 그 조차도 뛰어난 사유능력의 존재에 한해서 말이다. 만약에 이들이 삼차원 세계, 다시 말해 위로 치솟아 평면을 내려다볼 수 있다면 다각형 존재들의 내부가 훤히 보이고, 자신의 세계 지형이 한 눈에 보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차원 존재의 삼차원 인식의 이전으로 삼차원의 존재가 사차원, 그리고 오차원과 같은 더 고차적 차원의 세계에 바로 대입하는 것은 잘못된 유추가 될 것이지만, 초월적 상상의 어떤 단서가 되어줄 수 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볼 수 없거나 보이지 않는 것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로부터 지적 겸허와 무지의 성찰을 상실했다. 오늘의 존재이론들, 혹은 존재자에 관한 사유들은 바로 이러한 무지의 철학에 대한 반성이다. 무시하고 알고 싶지 않은 것은 경계 밖으로, 그 무()의 공간으로 내침으로써 발생한 오늘 한국 사회의 이 불온한 퇴행의 시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어디에 부재가 존재한다는 확증이 있다는 말인가. 이 책의 독서를 추동한 것은 바로 이러한 오늘날 우리들이 잃어버린 감각,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회복을 요청한 인간 너머의 존재를 상상하고, 인간의 관여와 해석에 의존하는 오만에 대한 회의의 자극 덕택일 것이다. 150년 남짓 전에 한 사상가의 저작이 이렇게 오늘 한 인간에게 낯선 각성을 선사해주고 있다. 옛 지성들에 겸손한 감사의 마음이 요즈음 더욱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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