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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랜드
에드윈 A. 애벗 지음, 서민아 옮김 / 필로소픽 / 2017년 4월
평점 :
“이제껏 2차원 세계만을 알고 살아온 어느 미천한 플랫랜드 출신자가 3차원 세계의 신비를 접했을 때처럼, (...) 그들 입체 인류의 탁월한 인간 종들이 상상력을 꽃피우고 겸손이라는 귀한 재능을 더 깊이깊이 키워나가길 바라며.”
- 독자를 위한 헌사, 5쪽
예기치 않은 독서로 이어지고 있다. ‘플랫랜드(평면세계)’에서의 3차원 세계 인식의 어려움으로부터 우리 인간의 4차원 세계 인식의 곤란성을 엿보는 하나의 비유도구로써 인용하였던 책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자기 차원의 편견’에 얼마나 쉽사리 영향을 받고 잘못을 저지르는가에 대한 자기 성찰의 한 웅변으로 들렸던 까닭이다. 19세기 영국의 성직자이자 작가이며 언어학자이기도 했던 ‘에드윈 A. 애벗’의 이 발칙한 소설은 기하학적 기본 원리와 선험적 사유의 필요 역설 속에서 인간 사회의 정치적 이론과 제도의 풍자를 버무린 꽤 흥미로운 저작이다.
작중 화자는 플랫랜드, 즉 2차원의 평면 세계에 사는 존재(사각형)이다. 그는 그들의 시간으로 새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에 3차원 세계의 존재가 2차원 세계의 가장 수학적 사고가 출중한 존재에게 그들 세계 밖의 가능성, 다시 말해 제한된 인식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의 존재 가능성이라는 사고의 깨우침을 가르쳐 줌으로써 야기된 새로운 시선에서 자신의 세계를 서술하는 이야기다. 그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아니 상상할 수 없었던 시선을 얻는다. 그때 그가 내뱉는 말이 “오, 멋진 신세계여!”다. (올더스 헉슬리의 20세기 대표적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는 셰익스피어의 16세기 희곡 『템페스트』에서 시작하여 19세기의 이 작품 『플랫랜드』를 경유한 문화역사의 한 산물임을 보게 한다. 멋진 신세계라는 이 경탄의 외침은 셰익스피어를 떠난 이후 그 의미가 전도되어 왠지 불온한 탄성으로만 느껴진다.)
2차원 세계인 플랫랜드와 대비하여 3차원 세계를 스페이스랜드로, 그리고 1차원 선의 세계를 라인랜드, 차원이 없는 심연인 점의 세계인 포인트랜드의 영역을 대비하여 기하학적 사유에 내재된 본질, 그 한계를 상상토록 한다. 재미있는 표현들이 소설의 각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이를테면 점의 세계는 “점 그 자신이 자신의 세계이고 자신의 우주”이며, “다른 존재에 대해선 개념조차 없”기에 복수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세계라고 정의한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지만 하나이며 전부인 세계, 자기만족의 비천함과 무지”의 세계라는 것이다. 2차원의 존재가 보기에 그 얼마나 무기력하고 맹목적인 만족으로 보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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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쪽, 삼차원에서 평면 세계를 내려다 볼 때, 이차원 존재는 이렇게 내부를 결코 볼 수 없다】
스페이스랜드, 3차원의 세계를 경험한 평면세계의 존재는 한 번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위(up)'라는 입체공간에서 평면 세계를 아래로 내려다봄으로써 자신이 살던 세계의 내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경험으로 체득된 지식은 플랫랜드 지식의 옹졸함과 편협함, 자의성이 너무도 명확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렇게 고차원을 인식한 존재가 자신의 세계인 평면세계를 설명한다. 이 설명들이 지극히 재미있어 혹시 지루한 읽기가 되지 않을까 우려했던 선입견은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다. 플랫랜드의 존재들은 각(角)과 변으로 형태를 지닌 존재들로 동일한 길이의 변을 많이 가진 다각형의 존재들이 귀족인 상류계급을 형성하는 신분사회다. 그 최상에는 무수히 많은 변을 가져 동그라미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성직자인 최상위 계급으로 플랫랜드의 모든 정치, 사회, 법제도와 문화를 통제 관리한다.
여기서 무수한 의문이 발생한다. 그들 평면의 존재가 다른 존재를 어떻게 구별, 인식할까하는 것인데, 그 서술의 발칙함은 바로 우리 인간세계에 가닿는다. 하부계급은 촉각, 즉 서로를 느껴서 상대가 어떤 계급, 어떤 성(性)임을 인식하고, 상류 계급은 오랜 훈련과 학습을 통해 시각인식을 통해 구별한다는 것이다. 하층 계급 특히 이등변삼각형과 같이 각이 예리한 존재를 느끼려다가는 그 각에 찔려 회복할 수 없는 상처로 사망할 수 있기에, 그처럼 미천한 소통방식을 취하지 않는 것이고, 더구나 오랜 학습을 통한 시각인식방법은 하층계급은 그만큼의 돈과 시간을 지불할 능력이 없기에 상류계급의 독점적인 차별의 인식방법이라는 것이다. 아마 저자는 이미 19세기 영국사회 전반을 깊숙이 잠식한 자본주의 관념의 핵심인 ‘시간과 돈’이 사회체제를 견인하고 있음을 통찰한 것으로 보인다.
계급이 이렇게 특정 도형으로 고착되어 있는 세계라면 반란, 혁명으로 체제의 혼란과 붕괴 우려의 불안이 항상 잠재하고 있었을 것인데, 간혹 돌연변이로 인해 이등변 삼각형이나 불규칙 도형 중에서 정삼각형이나 변의 길이가 동일성을 지닌 존재가 출생하여 상위 계급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 희귀한 현상들, 상위 계급 진출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의 출생을 귀족 계급은 환영하는데, 이러한 변이로 인한 하층 계급의 상위 계급으로의 이동 발생이 아래로부터 일어날 혁명을 막아줄 유용한 방호막이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며, 특히 이러한 계급 상승의 기대가 하층민의 희망을 부채질함으로써 체제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의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기대 심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이고, 이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계층상승의 흔치 않은 일화는 화제가 되어 가능성의 신화로 선전되곤 한다. 1880년경에 발표된 작품이니 작가는 마르크스를 비롯한 당대의 다양한 자본주의 비판 사유들을 알았을 것이다. 반면 오늘 우리들의 시선에서 보면 어리둥절할 얘기들도 있는데, 남성들은 모두 다각형의 존재를 향한 기대를 꿈꾸지만, 여성은 오직 바늘 모양이라는 하나의 형태로 고착되어 있어 각이 곧 지능과 지식을 의미하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계급으로 지칭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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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이것은 역설적 의미를 지녀 남성 중심 사회에 일종의 잠재적 위협 요인이 되어 인구 억제를 통한 혁명의 싹을 자르는 신의 섭리로 해석됨은 물론 성의 힘에 대한 균형의 요소로 작동되기도 하는데, 바늘 모양의 그 날카로운 예각이 주변 존재들을 살상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여성의 행동에는 여러 규제와 관습이 행해지고 있고, 평면 세계이다 보니 누군가가 다가올 때 모두 하나의 선이나 점으로 인식되기에 자칫 바늘에 찔려 사망하게 되기에 지속적으로 흥얼거려야 한다거나 좌우로 흔들거리며 다녀서 자신이 여성임을 상대에게 인식토록 하는 것이다. 웃기는 얘기지만 이것을 여성들이 왜 지킬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것은 상류 계급에 합류하기 위한 여성들의 바람이라는 동기 때문인데, 자기 자손의 계급을 보장하기 위한 성 본능에 터전을 잡고 있는 듯하다. (왜곡된 사회진화론의 반영으로 보인다.)
여성의 형태로 인한 의미는 더욱 흥미롭게 전개되는데, 인식에 대한 어려움으로 인해 기발한 발상이 착안된다. 각 변에 서로 다른 색으로 장식하는 존재가 출현한 것이다. 계급의 중간계층인 한 오각형이 예측 능력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각 변을 각양의 색으로 장식한 것이다. 이로써 그가 앞으로 향하고 있는지, 뒤를 보고 있는지, 그가 어떤 계급인지를 바로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촉각이라는 상대에 대한 느낌을 통한 위험한 구별 방식이나, 오랜 훈련을 요하는 시각인식 방법이 쇠퇴하게 된 것이다. 항상 체제의 저변을 구성하던 관습은 이처럼 지식 계급의 편의적 논리에 의해 하나의 문화체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때 이들이 들고 나오는 논리는 이렇다. “자연이 변들을 구분한 것은 하나의 선으로 색깔을 다르게 칠하라는 뜻이다.“, 마치 자연의 섭리, 곧 신의 섭리를 들먹이며 불가침의 신성성을 씌우는 것이다.
여성의 바늘 모양도 자연의 신성한 섭리이긴 마찬가지다. 그 인구 자동조절 기능처럼 신은 보상과 희생의 균형을 적절하게 부여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상위 계급인 동그라미들이나 바늘 모양의 여성은 하나의 변으로 이루어져 각기 다른 색을 칠할 구분이 없다. 이때 또 자의적인 의미의 부여로 자신들의 신성한 권위를 유지하는데, ”원주를 지닌 신성한 축복을 받은 존재이기에 자신들은 변의 구분이라는 색의 구분“이 불필요한 ”순수함“의 존재로 선언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직자인 최상위 계급 동그라미와 여성의 구별이 모호해진다. 작가의 의도적인 장치로 여겨진다. 그럼으로써 성직자와 여성은 순수성의 신성성을 함께 한다.
이렇게 색깔이 귀족 독점의 시각 인식 기술을 무용하게 하자 그네들의 지적 기술은 비례하여 빠르게 쇠퇴하는데, 이때 “모든 개인과 계층은 동등하게 인식되고 동등한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존재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에따라 모든 존재 도형은 보편 색체라는 앞과 뒤 절반씩 다른 색칠을 통해 구별하게 된다. 시각인식의 쇠퇴는 사회 위협요인이 된 것이다. 인식론의 변화가 가져온 사회 체제 및 관습과 문화의 요동을 생각게 하는 얘기들이다. 한 사회의 도덕이나 정치적 규범이란 것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상대적인지를.
아주 멋진 자유의지 존재여부의 비유도 등장하는데, 동질의 각과 변을 지닌 다각형이 우세한 계층을 형성하는 사회는 바로 그 형태의 완벽한 규칙성을 체제의 신성한 근간으로 여기고 있기에 오직 형태의 규칙성만이 도덕적 완전성을 담보한다. 따라서 어떤 잘못이나 결함은 신체 형태의 불완전성, 즉 자기 형태의 불균형성에 기인하는 것이 되어 사법부는 즉각 그 존재를 척결한다. 도둑질이나 그 어떤 범죄도 형태의 불균형성이 초래한 것이라는 변명이 가능하게 되는데, 사회적으로 처벌이 가능하지만 가정 내에서 이러한 사태는 곤혹스러운 상황을 마주하게 됨을 토로하기도 한다. 형태는 곧 의지가 관여할 수 없는 본성의 문제라는 것인데, 이는 오늘날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경우 인간 존재의 범죄 처벌 불가능성 주장과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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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쪽, 입체인 구를 평면 존재가 인식할 때】
사실 이 작품은 이러한 사회정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사유의 실험이라는 기하학적 통찰과 맞물려 서술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고 탁월하다. 2차원의 존재에게는 위와 아래라는 관념이 들어서지 못한다. 만일 그에게 삼차원 입체 존재가 출현하다면 오직 그는 삼차원의 존재가 평면에 닿은 부분만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점이거나 어떤 선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구(球)가 플랫랜드에 출현했을 때 평면존재는 처음 점이었다가 점점 둘레가 커지는 선만을 인식할 것이다. 그것은 놀라운 인식일 것이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 입체존재가 지면을 위로 떠오르거나 평면 아래로 내려가면 사라져버린다. 생각할 수 없는 차원의 존재는 어느새 출현했다가 사라진 것이 된다. 만일 이를 목격한 존재가 이를 묘사한다면 평면세계의 존재들은 망상이라거나 환영을 보았거나 기만이라고 몰아댈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미확인비행물체(UFO)라 부르는 물체가 이러한 삼차원을 넘어선 고차원의 존재 출현이 아닌가라는 상상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시간으로 인해 휜 공간의 상상처럼.
이 책은 하나의 사고 실험이기도 할 것이다. 상상 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기 위해서, 그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 생각할 수 없음을 승인하고 그 한계의 인지에 대한 겸허함으로부터 세계의 이해와 타자의 포용이 가능함을 역설하는 것일 게다. 포인트랜드의 점은 자신의 세계를 벗어난 그 어떤 세계도 상상하지 못한다. 라인랜드의 선분에 있는 존재는 바로 이웃 존재 너머의 그 어떤 세계와의 직접적 조우가 불가능하며 선분 밖의 평면공간을 허공으로 인식한다. 플랫랜드의 존재는 타자의 인식이나 주변 형상을 결코 조망하지 못한다. 입체 공간인 삼차원에 사는 우리들은 사차원의 세계를 인식하는데 곤란과 함께 인식의 혼란을 겪는다. 좀처럼 떠올리지 못한다. 결국 자신들의 차원에 갇혀 그 세계에서 자신들에게 인식되는 형상을 가지고 자연법칙이니 신이니 자신들의 체제유지를 위한 합리화란 얼마나 보잘것 없는 것인지를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차원의 존재는 자기 세계의 집이나 타 존재의 내부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삼차원의 존재는 그들 이차원 존재인 다각형 존재들의 내부를 훤히 볼 수 있다. 플랫랜드의 존재들은 또한 타 형태 너머의 존재들을 인식할 수 없으며, 그네들 생활거처의 지형을 볼 수 없다. 다만 유추하거나 추측할 뿐이다. 그 조차도 뛰어난 사유능력의 존재에 한해서 말이다. 만약에 이들이 삼차원 세계, 다시 말해 위로 치솟아 평면을 내려다볼 수 있다면 다각형 존재들의 내부가 훤히 보이고, 자신의 세계 지형이 한 눈에 보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차원 존재의 삼차원 인식의 이전으로 삼차원의 존재가 사차원, 그리고 오차원과 같은 더 고차적 차원의 세계에 바로 대입하는 것은 잘못된 유추가 될 것이지만, 초월적 상상의 어떤 단서가 되어줄 수 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볼 수 없거나 보이지 않는 것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로부터 지적 겸허와 무지의 성찰을 상실했다. 오늘의 존재이론들, 혹은 존재자에 관한 사유들은 바로 이러한 무지의 철학에 대한 반성이다. 무시하고 알고 싶지 않은 것은 경계 밖으로, 그 무(無)의 공간으로 내침으로써 발생한 오늘 한국 사회의 이 불온한 퇴행의 시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어디에 부재가 존재한다는 확증이 있다는 말인가. 이 책의 독서를 추동한 것은 바로 이러한 오늘날 우리들이 잃어버린 감각,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회복을 요청한 인간 너머의 존재를 상상하고, 인간의 관여와 해석에 의존하는 오만에 대한 회의의 자극 덕택일 것이다. 150년 남짓 전에 한 사상가의 저작이 이렇게 오늘 한 인간에게 낯선 각성을 선사해주고 있다. 옛 지성들에 겸손한 감사의 마음이 요즈음 더욱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