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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ㅣ 을유사상고전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월
평점 :
“모든 정신적 우월함은 자신을 남과 고립시킨다.” - 1부 5-3-34, 177쪽에서
문학 작품을 읽다보면 대단원에 이르러 혼자의 삶을 고뇌하며 세상과 고투하던 인물이 타자와 관계의 필요성을 깨닫고, 세상을 자신이 겨뤄야하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공존해야 하는 것으로 흔히 결말을 맺는다. 홀로 하는 삶이란 세상에 대한 어떤 적의나 결여, 또는 불완전성을 의미하는 것일 테고, 삶의 고통이란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온전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타자의 세계와 화해함으로써, 그것의 계기가 무엇이 되었건 함께하는 것이 한 인간 삶에 평화와 온전함의 긍정적 가능성의 진입이라는 듯 말이다.
나는 이러한 결말들에 매우 회의적이다. 물론 소설 속 인물들이 신체나 정신면에서 성장 중인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이고, 그네들의 환경이 소외되거나 여러 결핍으로 인한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 결여의 충족을 위한 행위를 위해 예상할 수 없는 각양의 장애와 맞서야 하는 것이고, 이로 인해 그 싸움에서 야기되는 고통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현실을 도외시한 속편한 얘기라고 비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삶을 산다는 것은 자신의 이해에서 출발 하는 것일 게다. 고통이란 인간 내부의 정서이지, 외부의 대상으로부터가 아니다. 어떤 대상으로 인해 촉발된 사건이 곧 고통은 아닌 것이고, 그 사건을 인간 개인이 어떻게 수용하는가, 반응하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소품과 부록』의 글 모음인 이 책,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을 읽게 된 것은 이러한 물음 - 행복과 불행을 인식하는 관점 - 에 대한 하나의 응답을 발견하려는 것이었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가 『소품과 부록』이라고 펴낸 책에서 선택 발췌한 문집이다. 그의 대표 저술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인간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 등 앞선 저작들의 대중적 실패에 따른 보다 평범하고 일상적 관심사를 통한 대중독자의 접근을 도모한 저술로 써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기회를 통해 쇼펜하우어는 앞 선 책들을 경험적 언어를 통해 보충하려는 보론(補論)의 성격 또한 부여하고자 했던 의도이기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내 읽기의 관심사는 앞서 언급했듯 인간 본질에 토대를 둔 삶의 지혜, 다시 말해 사람들이 행복한 삶이라고 지칭하는 것의 일관된 지향성이 기성 세계에 대한 순응을 기초로 한 망상처럼 여겨졌기 때문이고, 쇼펜하우어는 분명 그에 대해 대답하고 있으리라고, 그것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까닭이다.
책의 구성은 《행복론》과 《인생론》, 〈색체론〉으로 엮어 『소품과 부록』의 글들을 구분 수록하고 있는데, 그 1부를 구성하고 있는 《행복론》은 아마 타자의 관계, 세상과 함께하는 것만이 인간의 완전함의 지표인 듯 말하는 문학의 흔한 결말들인 이 세계의 오류, 인식의 그릇됨에 대한 맞춤의 비판으로 이해하여도 될 것이다. 염세주의자로 알려진 쇼펜하우어가 행복을 말한다니, 놀랄 일이지만 저자는 누구보다 행복을 객관적으로 고찰한다는 것은 내재하는 오류로 인해 논의 가치가 없음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Ⅱ권, 49장, ‘구원의 길’에서 행복론의 오류를 질타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가 왜 행복을 논의하는 글을 썼을까하는 대목의 대답이 머리말 글에서 짧게 표명되고 있는데, “주관적으로 냉정하고 철저히 숙고하면, 행복한 생활은 아무튼 비(非)생존보다 훨씬 나은 생활이라 정의할 수 있다.”며, 철학은 분명 행복론의 인생의 부합성에 부정적임에도 대중은 이것의 긍정을 전제로 살아가기에 “비록 미사여구에 불과한 이 관점에 순응하여 조건부의 가치를 지닌 한에서 논의”한다고 쓰고 있다.
이 표현에서 볼 수 있듯, 대개의 사람들이 행복을 삶의 긍정적 전제로 살아가기에 이 관점에 ‘순응’하여 논의 하는 것이다. 부정적이지만 순응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이미 인간이 쫓는 것은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으며, 이후 논의의 글들은 그 오류나 그릇된 이해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며, 설혹 그렇더라도 행복이라고 인식될 만한 거처, 유일한 근원을 강변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 운명의 차이를 만들어낸 세 가지를 규정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그것은 첫째, 건강, 지성, 재능, 개성, 인격, 정신력, 아내와 남편과 자식 등 ‘인간 자신을 이루는 것’이고, 둘째는 재화나 물질과 같은 ‘인간이 소유하는 것’이며, 셋째는 타인의 눈에 비친, 즉 ‘남이 평가하는 명예, 지위, 명성과 같은 자신의 표상’이다. 이들 세 가지 규정에 기초해 인간은 자기 운명의 행과 불행을 느낀다. 여기서 그 논의의 세부 내용들은 생략키로 한다. 다만, 내게 회의적 시선을 던져준 타자와의 관계라는 사회와의 뒤섞임, 함께하는 삶만이 인간의 온전성과 평화라는 삶의 지복으로의 가능성의 길인가에 대한 응답의 내용들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1. 인간 운명의 세 가지 규정
자신을 이루는 것은 소유나 타인의 시선과 같은 외부적인 것이 아닌 ‘나’라는 존재 자체의 본질이며 결정적인 것이다. 나의 지성, 개성, 인격의 움직임은 직접적인 자신의 관계이지만, 외부의 것들은 유발하는 한에서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일례로 건강이 나빠지면 세상만사가 무용해지며, 정신 또한 우울함으로 훼손된다. “생명의 본질은 운동에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나, 진부한 말이지만 가장 진실한 말인 “건강한 신체에 깃드는 건강한 정신” 이야말로 행복의 가장 중대한 토대이다. 사실 우리들의 행복과 불행은 둘째와 셋째 운명의 규정인 외부 대상의 객관적, 실제적 모습이 아니라 그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이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다.
즉 행과 불행은 우리를 이루는 유기체가 받아들인 인상에 의한 감수성, 반응이다. 이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방해하여 행복을 감소시키는 것이 고통과 무료함이다, 궁핍과 결핍은 고통을 낳고, 안전과 과잉은 무료함을 낳는다. 오늘날 궁핍의 고통은 극히 적은 비율이 되었음에 비해 과잉의 무료함은 비례하여 늘어났다. 즉 무료함은 감수성의 쇠퇴, 정신의 둔감함, 예민함의 부족으로 드러난다. 이 정신적 둔감함이 수많은 현대인의 얼굴을 내면의 공허함으로 물들이고 있다. 때문에 이 정신적 둔감함으로 인한 내적 공허를 달래려고 외적 자극을 갈망하며, 소유와 타인의 평가로부터 행복을 찾으려 한다. 만일 원래 지닌 것, 자신의 건강한 신체를 바탕으로 지성과 인격의 충실함이 쌓여있다면 그 열정으로 지루함이나 무료함을 느낄 새가 없을 것이다. 이 본래 지닌 것이 끊임없이 유지 발전되어 왔다면 그 충실성에 의해 외부의 것이나 타인의 시선은 덜 필요해질 것이다. 그래서 탁월한 인간은 조용하고 검소한 생활, 외부 관계에 의해 발생하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생활, 고독을 향유하려 할 것이다.
때문에 고독할 힘을 가진 사람들은 고통과 무료함의 습격으로부터 벗어나 행복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여유를 확보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원래 지닌 상태로 향하려는 이유인 그 본질은 이것에 있는 것이다. 그들이 찾는 것이 자연이요, 은둔의 지대에서 고독의 시간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 자질인 고귀한 지성을 축적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내 권태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의식과 개성을 만끽하게 해줄 지성의 활력이 없기 때문이다. 무료하고 멍한 상태에 포획되어 다시금 외부의 자극을 찾아 나선다.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존재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향유의 원천을 성장시키는 데 소홀하였기에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외적 원천, 재화와 물질을 모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이에 매달려 자신을 이루는 것들인 건강과 알량한 지성이 소진되어 고갈되고, 불확실하고 믿을 수 없으며 무상하고 우연에 맡겨진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붙들려 짧은 인생의 시간을 덧없이 흘려버린다. 그러느라 세상과 싸우며 숱한 고통을 겪고는 인생은 살아갈 이유가 없는 허망함이며 공허라 염세에 빠지거나. 세상을 향해 난폭한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색다른 외부의 자극으로 보상받기 위해 사교와 사치, 오락과 여흥을 병적으로 추구한다. 그러나 이 또한 이내 지리멸렬함이 몰려오고, 그 시들해짐에서 벗어나려 더 이상의 소유와 과시의 즐거움을 쫓는다. 이 반복되는 여정은 환멸이고, 권태고, 공허다. 그나마 이러한 현실에 대한 작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하는 길이 바로 타자와 함께하는 관계의 증진이다.
자신의 정신적 둔감함, 지성의 결핍을 타인이라는 존재를 통해 불완전한 온전성을 구하는 길로 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타인이 혹여 높은 지성의 존재라면 다행이겠지만, 그 역시 외부 자극에서 행복을 구하기는 마찬가지인 사람이라면 이는 아마 백번이면 백번의 실패, 관계가 발생시키는 크고 작은 고통만을 수반한다. 결국 자기의 온전함이 가져오는 평온과 지성의 활력이 쌓여있지 않는 존재는 고통을 피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도 내 최초의 물음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응답은 획득되었다. 결국 자신을 이루는 것이라는 본질적 함양에서 삶의 의미와 행복이 확보되는 것이지, 이것 외의 그 어떤 외부 자극도 행복을 담보해주지 못한다. 요즈음 숱한 소설들, 에세이들에서 발견되는 타자와의 관계를 향한 길이 마치 인간 삶의 궁극적 지복인양 서술하는 것에는 결코 변변치 않은 미망(迷妄)뿐임을.
이처럼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이루는 것, 즉 행복의 으뜸은 건강, 자신에 속한 것으로서 정신의 작용, 함양된 지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주의 할 점이 있는데, 열정 - 정신적이든 신체적이든 - 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면 곧 지루해지기에 이에 몰두하게 되면 그 열정을 실행할 때 마주하는 장애들을 돌파하느라 고통에 맞닥뜨리게 된다. 결국 “의지에 봉사하는 데 필요한 정도 이상의 지성이 필요한 것”이다. 의지를 압도할 지성!, 그래 지성이다. 저열한 지성이 아닌 세상에 대한 앎의 직간접, 경험들에 대한 누적된 학습으로 축적된 고귀한 지성 말이다. 사람들이 쫓는 지속적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믿는 소유와 명예, 지위는 행복보다는 오히려 고통을 몰고 오기 일쑤다. 이것이 대체 무슨 망발이냐고 무수한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할 터이다. “명예가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도 있고, 돈이면 그 무엇도 살 수 있는 세계라고 항변할 것 같다.
2. 인간이 소유하는 것, 타인의 시선과 평가라는 삶의 함정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이의에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타인의 좋은 평가를 받아 나름대로 허영심이 충족되면 기뻐하는 것”, 그리고 “홀대받고 무시당하면 어김없이 모욕감을 느끼고 매우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놀라운 일이라고, 타인의 평가라는 것, 즉 명예와 지위나 명성이라는 것의 실체를 들여다보자. 과연 타인이 나라는 존재에 대해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내 지성이나 재능, 건강과 인격의 요소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마 극히 피상적이고 빈약한 자원에 의존한 이해에 불과할 것이 뻔한 것이고, 나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일 게 분명하다. 남의 판단과 시선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어리석고 멍청한 것이라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 가지는 나에 대한 협소와 왜곡과 천박함은 절대 나를 넘어서지 못한다. 다시 말해 타인의 견해는 별것 아니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눈에 비친 자기 모습에서 실제의 자신을 찾는 것은 자기 존재의 토대를 타인이라는 간접적 의식에 두고 있다는 정말 황당함 그 자체가 아닐까.
진실이 이러함에도 사람들은 이 같은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인간 행복에 중요한 요소로 마음의 안정과 독립에 유익하게 작용하는 것이라 믿는다. 쇼펜하우어는 오히려 방해되고 불리한 작용을 한다고 단언한다. 결단코 인간 행복의 요소가 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목숨보다 명예가 중요하다는 사람들의 믿음을 앞서 언급 했으니 그 실체를 매듭지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 허무맹랑한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혐오스러움으로 입꼬리가 절로 씰룩거린다. 이 말은 출세하기 위해 타인의 견해가 필요하다는 지극히 하찮고 평범한 세태를 근거로 삼는 과장된 표현 이상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 망상은 사람들을 다스리거나 조종해야 하는 인간들이 만든 구실일 뿐, 이를 신화처럼 믿는 자들이 무수히 출현하는 현실이 서글프기조차 하다. 타인의 머릿속에 있는 결코 본질 일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라는 명예가 자기 존재를 이루는 생명보다 중요하다는 기이한 주장은 정말 기괴하기까지 하다. 명예와 허영, 허세는 모두 수단 때문에 목적을 망각하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무의미함이요, 실속없는 공허다. 대체 왜 타인의 시선이 자신의 행복에 소용이 있으리라 여기는 것인지 이해 불가능하기만 하다.
아주 빈번하게 정신적으로 가장 떨어지는 사람이 실은 가장 행복하다는 주장을 듣곤 한다. 그런데 그 누구도 이러한 사람의 행복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러한 사람들이 행복할지지도 모른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옹호와 반박이 엇갈린다. “행복의 첫째 조건은 분별력에 있다”고 저열한 지성의 행복을 부정하는가 하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 가장 유쾌한 삶이다.”라고 바보의 삶을 긍정하기도 한다. 또 이런 말도 있다. “바보의 삶은 죽음보다 고약하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정신적 욕구가 저열하거나 부재한 인간, 즉 자신을 이루는 것이 열악한 존재가 돈과 물질인 외적 자극에 매달릴 때 필리스터(속물)라 부른다. 즉 정신적 욕구가 없는 인간으로, 현실이 아닌 현실에 매우 진지하게 관여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인식과 통찰을 위한 충동이 없고, 미적 향유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으므로 생활의 활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무한한 내적 결핍과 많은 돈이 만들어낸 여유의 무료함으로 이를 보상받기 위해 사치와 허영이라는 명예와 뿌리가 같은 욕망을 추구한다. 즉 속물은 감각적이고 육체적 향락뿐이기에 반복되는 그 동물적 아둔함과 무미건조함이라는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어디에 있겠는가. 금방 고갈되는 감각적 향락과 몰려오는 지루함, 그래서 그들에게는 오로지 지위와 부, 권력과 영향력만 보일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정신적 욕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이것을 행복이라 부를 수 있을까? 물론 일하지 않고 평생을 살아갈 재화와 물질을 지녔다면 결핍과 고난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삶의 구성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특전을 활용하려면 정신적 욕구, 높은 지성의 축적을 향한 욕망이 성취된 자기 존재만으로의 온전성, 고독할 힘을 갖춰야 하는데, 대부분 이를 갖추기는커녕, 텅 빈 지성으로 외부 자극의 탐닉에 자유를 낭비한다. 아마 평범한 사람들은 수많은 부자들의 불행을 알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그들 또한 평범한 대중들의 고통만큼이나 불행할 것이다.
이제 명예라는 것, 이것은 객관적으로 우리의 가치에 대한 타인의 견해를 말한다. 대체 명예에 주어지는 가치의 근원과 기원은 무엇일까? 아마도 다른 사람과 어울릴 때만 인간은 존재 의의가 있고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의식에 터 잡은 것이고, 인간 사회의 유용한 일원이자 효용이 있는 인간으로서 협력할 능력이 있어 공동체의 이점을 공유할 자격이 있는 인간이라는 일종의 표시일 것이다. 한 마디로 타인의 호평을 받으려는 마음이다. 물론 이렇게 타인으로부터 인정되는 명예는 분명 삶의 용기를 북돋워주는 데 일말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견해가 아니라 타인의 견해라는 것, 내 존재를 이루는 것이 아닌 것, 내 지성의 고귀함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라 점이다. 특히 명예란 명성과 달리 장본인이 예외적 인물임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누구에게나 전제되는 성질이라는 것이고, 때문에 곧잘 지극히 평범한 인물도 자기의 명예가 더럽혀졌다느니 하며 윽박지르기 일쑤이다. 하물며 명예는 중상에 의해서 얼마나 손쉽게 손상되는가. 단지 공동체의 효용성에 기인하는 이 외적 시선과 평가란 행복의 항구적 요소로 정말 보잘 것 없는 일시적인 것 이상이 아니다.
3. 시국에 대한 짧은 斷想
이렇게 말하다보니 명예나 체면을 손상시켰다고 자타의 견해 차이가 충돌 할 때 발생하는 최고의 법정으로서 난폭성으로 비화하는 인간들의 얘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더구나 민주사회라는 한국 사회에 군사폭력이 동원되는 비상계엄의 발동을 보았기에 정신적 능력의 결여, 자신의 빈약함과 결점을 제거하기 위해 폭력이 시작되는 지점을 생각게 된다. 명예는 타인이 내게 있다고 생각될 것을 자신이 확신하는 정말 유치한 이름이다. 그렇기에 이것이 손상되었을 때 적의와 난폭성을 보이는 것은 그 본래의 성격으로 인한 천박함의 자연적 귀결일 것이다. 이때 표현되는 난폭함은 바로 자신의 정신적 능력이나 도덕적 정의의 싸움이 승산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즉각 신체적 힘, 폭력으로 정당하고 도덕적 분별의 폐기를 선언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국가 폭력의 한 형태인 비상계엄이다. 이것은 온갖 정신을 일거에 무색하게 할 수 있고, 진리, 지식, 분별력, 그 어떤 고매한 지성도 아무 소용이 없어지고, 오직 난폭한 폭력성이라는 몰상식한 완력권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 야만적이고 기묘하며 가소로운 것이 바로 명예라는 것의 규범이다. 폭력의 협박으로 외적 존경의 표명을 강요하려는, 반민주적 반동적 야만으로의 퇴행은 명예의 가장 부패한 형태이다. 문명 상태에 홉스식 자연 상태의 금수성(禽獸性)을 도입하는 것, 그래서 그 금수성의 원칙을 통해 자기 명예에 도전한 사람들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아마 자기 존재를 이루는 것들 이외의 인간 운명의 여타 규정들은 이처럼 무수한 부정성의 양태들로 설명 가능 할 것이다. 이와 동일한 귀결에 이르게 하는 모욕이라는 감정의 본질을 살펴보면, 내란을 추동한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볼 수 있다. 모욕이란 “자신의 가치와 품위를 너무 높게 생각해 상상한 자만심”이라고 정의된다. 실제로는 그 어떤 품위도 가치도 없거나 아주 적은 인간들이 늘 입에 달고 사는 나쁜 정서다. 결국 이것도 타인의 시선에 좌우되는 인간의 빈약한 정신 상태의 반증적 지표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나의 개념어의 의미를 추적하다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어 한없이 얘기를 지속하게 될 것 같다.
4. 맺는 말
쇼펜하우어는 인간 삶에서 고독할 힘의 능력을 가장 지고한 가치로 삼고 있는 철학자다. 고독은 공간적 은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쇼펜하우어가 스치듯 인용하는 고독의 철학자 요한 게오르그 침머만의 문장을 인용하듯, 나태로 시간을 허비하는 고립이 아니라, 신나게 떠들어대는 군중 속에서도 자기 힘만으로 독립하여 살아갈 수 있는 인간 정신의 고귀한 고독함이다. 물론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터득하는 것 또한 인간 삶의 품위 있고 고귀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자기 존재의 오롯한 평온과 온전함을 수시로 위협할 것이고, 그것과 불필요한 소모전을 펼쳐야 할 것이다. 극한적 개인주의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고독할 힘이란 자신의 노력과 행위를 신뢰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일 뿐, 저 먼 은둔지에 처박혀 고립 속에 홀로 음풍농월을 읊자는 것이 아니다. 고독은 삶의 동력을 만들어내고, 다시금 세계 속 일원으로 고귀한 창조자로 기여할 힘이 되는 것이다. 참되고 지극한 행복은 바로 이 고독할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이 고독할 힘을 키우지 못했다. 그저 소유와 외부의 시선에 자신을 붙들어 매기 위한 고통의 시간에 휩쓸려 자기 존재를 지탱할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쇼펜하우어의 이 방대하고 깊은 사유들의 모음집인 『소품과 목록』의 글들을 읽다보면, 사물의 본질, 인간의 참된 본질이란 무엇인지, 생존의 공허함에 관한 몇몇 기록들에서부터 종교와 교육, 여성과 신화의 고찰, 문체론과 독서, 논리학과 변증술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채롭고 고고한 사유들을 접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를 비관주의자로 여겼던 많은 독자들은 행복론이라는 자못 현실의 긍정적 접근을 논의하는 또 다른 철학자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오늘의 우리들 개인적 삶은 물론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의 현상들을 해석, 통찰하는 단초들을 읽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미약한 지성은 한순간도 의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의지가 인식을 훨씬 압도하기 때문이다. 지성의 인식이 의지를 넘어설 수 있도록 우리들은 고독을 가질 여유를 확보해야만 한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우리들은 구태여 소유와 남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초연하게 벗어나 자유와 온전함을 만끽하게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자기 머리 위, 봉에 묶여 눈앞에서 계속 달랑거리는 건초다발에 시선이 고착되어 그것을 먹으려는 욕심에 현실적 감각을 상실하고 허황된 불가능을 쫓는 당나귀의 삶에서 탈주하는 적극적 삶의 동력 또한 얻을 수 있으리라. 지성의 함양은 그렇기에 삶의 지혜와 행복을 위해 절대 필요한 것이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통찰하려면 지성(분별력)이 필요하지만. 일어난 일을 통찰하는 데는 감각만 있으면 된다. (평범한 두뇌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위험을 숙고하고 평가할 때 언제나 이미 일어났다고 하는 일에만 염려한다. 영리한 두뇌는 혹시 일어날 수도 있을 일까지 숙고한다)”
- 1부 5-4-50, 189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