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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페스트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인간은 정말 아름답구나! 오, 찬란한 신세계여, 이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니!”
-5막 1장, 181~184행 에서
셰익스피어는 그의 극작가로서 일생의 활동에서 정말 이 희곡 미랜더(Miranda)의 대사처럼 이상적 국가, ‘오, 찬란한 신세계’로 부를 요소들을 발견했을까?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주인공 푸로스퍼로(Prospero)를 통해 “이제 저의 공국도 회복하고 사기꾼도 용서하였으니 당신의 주문으로 이 섬에서 살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 여러분도 범죄를 용서받으시려거든 관대하게 저를 놓아주십시오.”라며 이 작품을 끝으로 에이본(Avon) 강가 스트래트퍼드에서 은퇴의 삶을 시작했다.
셰익스피어는 마침내 신세계, 아름다운 인간들이 존재하는 세계의 요소들을 찾아냈을까? 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그의 독창적인 비평서 『William Shakespeare』에서 오랜 극작가로서의 숱한 추구에도 불구하고 풍요와 조화, 평화로 채워진 세계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자연의 극악한 신비화, 이유 없는 마술적 장치에 의존“하여 ”멋진 신세계를 붙들어 놓으려 했지만 그 어떤 장치도 발견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가 극예술로부터의 퇴장이었다고 쓰고 있다. 이 비판은 절반의 진실만 담고 있는 듯하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많은 전문가들이 『템페스트』를 ‘배신과 용서와 화해를 주제’로 한 것이라는 데 이의가 없다고 한다. 작품의 표면적, 혹은 서사적 줄거리는 물론 이들의 해석에 동의케 하지만, 작가가 흩뿌려 놓은 대사 속 문장들은 이보다는 한 예술가의 고뇌를 엿보게 한다. 그는 연극배우이자 극작가였다. 육체와 언어를 활용하는 존재였다는 의미이다. 육체와 언어의 조화를 향한 갈망만큼이나 그 한계에 대한 뼈저린 인식이 컸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작품이 폭풍을 맞이하여 고투하는 수부장과 대 귀족과의 언쟁으로 시작하는 것을 작가의 강한 의지의 산물로 보아도 될 것이다.
거센 폭풍에 의해 난파에 몰린 배를 구하기 위해 사투하는 수부장을 비롯한 선원들의 처절한 분투에 귀족 곤잘로는 수다스런 말로 간섭해댄다. 이때 수부장이 내뱉는 말은 육체와 말의 쟁투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파도들이 왕의 이름 따위에 관심이나 있는 줄 아시오? (...) 이 폭풍과 물결에 대해서 잠잠해지도록 명하여 평온하게 만든다면 저희는 더 이상 밧줄을 다루지 않겠습니다.” 말의 공허, 자연에 대한 그 무기력함과 대조되어 육체의 실존적 쟁투는 마치 정신에 대한 육체의 승리처럼 보인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폭풍이 자연이라는 물질성에 의해서가 아닌 12년 전 배신에 의해 바다로 내몰렸던 푸로스퍼로의 마술, 즉 말의 형상화라는 점으로 이는 다시 역전된다. 이러한 투쟁은 작품 내내 지속되는데, 푸로스퍼로와 미랜더 부녀가 바다에 실려와 살게 된 섬의 주인이었던 마녀 시코랙스의 사생아인 괴물의 형상을 한 캘리밴과 공기의 정령 에어리얼의 대조적 수행 관계를 통해서 육체와 정신의 갈등은 푸로스퍼로를 통해 상징적으로 한 인간의 내면적 긴장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문장들은 푸로스퍼로의 노예가 되어 그의 명령을 수행해야만 되는 캘리밴이 나누는 대화는 이를 반영하는 한 예로 보아도 될 것이다.
푸로스퍼로: 내가 네 자신의 말뜻도 모르고 그저 짐승같이 떠벌리기만 할 때, 난 말을 가르쳐서 의사가 통하도록 해주었다.
캘리밴: 당신은 나에게 말을 가르쳐 주었소. 그 덕으로 내가 얻은 이득은 저주하는 법을 아는 것이 전부요. - 「1막 2장」 중에서
이것은 서사의 진행 과정 중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중요한 대사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푸로스퍼로의 육체성의 상징으로 캘리번을 읽게 되면 푸로스퍼로가 자신의 신체를 정신이라는 언어, 즉 문명화하기 위해 노력을 그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여전히 결실을 맺고 있지는 못하지만, 극의 결말에 이르러 캘리밴의 정신적 승화가 이루어져 푸로스퍼로가 어떤 융화, 조화의 평정에 이르렀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러한 육체와 정신에 대한 이해는 푸로스퍼로의 딸 미랜더의 대사에서도 반영되어 드러난다. 난파선으로부터 살아나 섬에 오른 나폴리 왕국 알론조 왕의 아들 퍼디난드에 대한 그녀의 묘사이다. “만약 나쁜 정신이 저렇게 훌륭한 집을 쓰고 있다고 한다면 선한 것들도 거기에 살려고 그것과 경쟁할 거예요.”
이 대사는 멋진 용모를 한 인간은 결코 선함이 거기 깃들어있을 거라는 주장이다. 육체와 정신의 조화로운 융합에 대한 기대심리인데, 바로 이에 근거한 대사가 이 희곡의 명대사인 “인간은 정말 아름답구나! 오, 찬란한 신세계여(5막 1장)”이다. 한편 푸로스퍼로의 정신, 그의 언어를 물성으로 대리 수행하는 에어리얼과의 관계가 이와 대비되어 극의 중요 축을 이룬다. 에어리얼은 공기의 정령으로 푸로스퍼로의 말을 행위로 수행하는 존재이다. 그는 푸로스퍼로의 약속에 대한 신뢰로 적극적으로 돕는다. 에어리얼은 보이지 않는 정신의 상징이며 물성을 통제하는 힘이다.
밀라노 대공이었던 자신을 배신하고 나폴리 왕과 결탁하여 죽음의 바다로 내쫓은 분노로 야기된 폭풍의 마법을 행함에 있어서도, 또한 섬에 생존하게 된 나폴리 왕과 배신자이자 왕위 찬탈자인 자신의 동생 앤토니오 일행에 대한 동정심을 권유하는 것도 에어리얼의 목소리다. “마술이 매우 강력하게 그들에게 미쳐서 그들을 보시면 마음이 누그러질 것입니다.” 이에 대해 푸로스퍼로 또한 “그들과 같은 인종인 내가, 그들에 못지않게 날카롭게 정서에 반응하고 고통도 느끼는 내가, 너보다 더 동정적이지 않겠느냐? 비록 그자들이 나에게 저지른 큰 죄는 나의 골수에 사무치나, 나는 고매한 이성으로써 분노를 참고 있는 것이다. 더 귀한 행동은 복수에 있기보다는 용서의 미덕에 있는 것이다.”라고 이미 절대적 용서의 가능성을 예고케 한다.
그럼 무엇이 이러한 악행과 씻기지 않은 분노를 용서와 화해에 이르게 한 것일까? 이 작품을 또 하나의 사랑의 서사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그 원인일 것으로 보인다. 이에더해 푸로스퍼로가 캘리밴이라는 자기 육체의 야만성과 에어리얼이라는 정신의 문명성이 오랜 갈등 끝에 내적으로 화해하였음에 기초하는 것일 게다. 적의 자식인 퍼디난드와 딸 미랜더의 사랑과 결혼을 축복하기까지 푸로스퍼로가 퍼디난드에게 육체노동이라는 시험을 부과함으로써 그 수행과정과 그 가운데 움트는 순수한 사랑의 과정을 발견케 하는 것은 곧 두 극단의 감정을 봉합하는 유일한 해결책으로 사랑의 결합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작품은 표면적 이야기처럼 그리 단순하고 명료한 해석을 이끌지는 못하는 것 같다. 특히 말의 물성과 정신성이라는 측면에서 에어리얼이 갈구하는 푸로스퍼로부터의 속박, 다시 말해 그의 말의 물적 수행자에 붙들려 있는 한 자신의 자유에 대한 억압을 답답하게 여기고 있는 까닭이다. 마침내 푸로스퍼로의 조건 없는 용서와 화해에 이르는 순간이 되어서야 그는 무(無)로 환원되어 공기로 흩어지는 자유를 얻는다. 어쩌면 셰익스피어 자신이 언어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삶을 새롭게 살고자하는 심정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 속에서도 계속 방황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퍼디난드는 미랜더를 처음 대면하자 사랑에 빠져들고 감옥처럼 작은 섬을 ‘충분한 공간’이라 느끼고, 미랜더 또한 아버지 아닌 최초의 인간이자 남성인 퍼디난드를 보고는 ‘더 훌륭한 남자를 찾을 욕망’이 사라져 버리듯 지극히 제한된 곳에서 자유를 발견토록 한 것인데, 에어리얼이 욕망하는 자유와 두 연인의 자유 사이에서 고뇌하는 작가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그는 스트래트퍼드로 은퇴하는 길을 선택했으니 아마 에어리얼의 제약 없는, 그 어떤 속박도 없는 자유를 욕망했던 것일 게다.
그것은 언어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극예술로부터의 자유, 언어의 물성으로부터의 자유이지 않았을까? 극의 주요한 제재인 푸로스퍼로의 마술은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을 물리적으로 변형할 수 있는 창조적 말의 산물을 상징하는 것이고, 푸로스퍼로가 마술 가운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마술책을 “일찍이 어떤 측면도 닿지 못한 바다의 깊숙한 곳에 던져버리는” 행위는 극작가로서의 자리를 내려놓고 오직 순수한 삶의 존재로 남기로 하겠다는 결심으로 해석하여도 무방할 것 같다. 작가는 야심차게 자신의 최종 작품을 아름다운 인간들이 사는 신세계를 빚어내려 했지만 결국 그 해결책을 찾지 못했던 것이기에 이 작품은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추정을 하게 한다.
당대 극작의 중요 규칙인 삼단일(three unities), 즉 하루의 시간, 한 장소, 하나의 줄거리에 관한 것이라는 세 가지 일치를 준수한 걸작으로 이해되었듯, 형식적 측면에서 작가의 가장 숙성된 작품으로 이해되어도 될 것 같다. 그러나 비록 작품을 용서와 화해, 그리고 관용과 사랑의 희망으로 맺고 있어 생의 찬가라고도 하지만 역시 그 생의 가치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제시는 미완에 그치고 만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