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독에 관하여
요한 G. 치머만 지음, 이민정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4년 9월
평점 :
“누구든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진정으로 위대해질 수 없다.
더불어 우리는 고독을 통해서만 자신을 파악해 낼 수 있다.” - <서문>중에서
나는 고독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오래 전 서울대 문리대가 있었던 동숭동 가로수 길의 작은 카페 오감도의 실내에서 타오르던 난로와 적막한 고요를 더욱 깊어지게 하던 책 장 넘기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리던 분위기에 대한 기억으로 향한다. 지금은 그 풍부한 적요함의 풍광이 모두 사라져버려 더는 찾지 않는 곳이 되었지만, 내 기억 속에는 그때만큼 마음을 가득 채운 충만감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소음과 관계로부터 차단된 느낌, 오직 세계에 홀로 내 존재로 가득해진 마음, 그 평온과 온전함의 순간을 다시 찾기 위해 내 상상은 달려가곤 한다.
그렇게 달려가곤 했던 회수만큼 나는 고독의 상념이 고착화되어 있다. 때문에 그 고독의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18세기 사상가의 고독에 관한 이 에세이를 읽게 된 것은 쇼펜하우어가 고독을 찬미할 때 잠깐 언급한 인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줄곧 ‘고독(solitude)’에 대한 그리움의 의지였을 것이다. 나는 고독을 사회관계를 위한 열정의 회복이나 활기의 충전과 같은 사람들의 세계 진입의 휴식으로 말할 생각도 없으며, 심원하고 고매한 사색의 방법론과 같은 삶의 유별난 지혜라고 말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어쩌면 오래도록 봉인되어 적절한 순간에 힘을 발휘하기를 기다려 온 젊음의 감정, 혹은 사랑의 불씨를 되살려내 달콤한 회상에 젖어들고 싶어 하는 욕구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의 저자 요한 게오르그 치머만은 고독을 말하기보다는 고독의 영향, 고독의 이점과 같은 실리의 측면에서 기술하고 있다. 물론 고독은 인생의 온갖 우여곡절을 정신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부수적 과실로 효과와 효용성을 말할 수 있다. 아마 삶을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이 그 삶의 유익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행위라면 고개를 돌릴까 저어되는 마음에서 혼자 하는 시간에 대한 화려한 수사들을 늘어놓은 것일 게다. 고독과 침묵 속에서 명상에 잠기다보면 일상의 상태와는 다른 더 고양된 상상력의 촉진과 고상한 구상의 산물이 출현하기도 하고, 순수하고 정제된 기쁨을 맛봄과 동시에 지적 즐거움에 몰입함으로써 존재에 들러붙었던 세상의 오물들을 생각에서 떨어낼 수도 있다. 더구나 자기 내면의 힘을 마음껏 즐기는 가운데 고양된 정신은 자연스레 고결한 주제의 사색으로 더없이 행복한 느낌을 가져다주며 삶의 시간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깨우치게 한다.
혹자들은 말하곤 한다. 바삐 살아가는 지엄한 경쟁사회에서 한가하게 고독 타령을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감상(感傷)에 불과하다고, 서둘러 정신 차리고 대열에서 이탈하지 말고, 더욱 현실에 매진하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현실의 삶이라 부르는 바쁜 경쟁의 한복판에서 지속하려면, 그 소진과 소멸의 억제를 위한 휴지기가 있어야하고, 나아가 삶의 투쟁을 계속할 수 있는 열정의 충전이 필요하다. 잠시의 오롯한 사색의 시간, 고독한 시간을 상실한 오늘의 우리네 얼굴들은 텅 빈, 내면의 공허로 그득한 그 결핍을 반증하듯, 온통 마음공부니, 자기사랑이니 하는 책들과 강연이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지 않은가. 치머만의 지적처럼 “고독은 인생이란 험난한 바다를 헤져나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타고 나갈 수 있는 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고독은 이처럼 삶의 동력이기도 하지만, 보다 궁극적인 것은 마음의 평온이고, 이것이야말로 산다는 것의 지고(至高)한 행복일 것이다. 어느 한 때, 바위 들 사이에서 작은 물줄기의 부드러운 속삭임에 귀 기울이고 평원을 거닐며 신선한 미풍을 들이마시던 기억 속으로 돌아가는 것, 그 순간 속에서 잇따르는 사유의 세계를 헤아리는 시간만큼은 완전한 자유와 고고한 우수(憂愁)의 경외와 황홀의 기쁨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옆에 누군가 있어도 좋다. 서로의 침묵 속에서 고독의 기쁨을 이해하고 다정한 눈빛의 교환만으로 사랑과 축복의 시간이 되어 줄 터이다.
치머만의 고독에 대한 찬미의 많은 에피소드와 단상들을 읽다보면 절로 고독의 시간, 그 내밀하고 기품있는 시간에 시샘이 일어날 것이다. 세상과 관계의 번잡스러움에서 잠시 거리를 두고 싶을 때 치머만의 책 어느 곳을 펴들고 읽다보면 어느 덧 행복의 고요한 열기가 맴돌던 장소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깨끗하고 고결한 마음의 시간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