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3
안보윤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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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소리에서 감지되는 미세한 악의, 교활하게 아주 조금씩만 거칠어지는 행동,

그때마다 더듬이들은 온몸을 떨며 고통스러워했다.” -167

 

기묘하게 시의에 맞춘 작품이 되었다, 악의 흉물스러움을 마주하는 바로 지금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그 악의 편재성을 성찰하는 또 한 차례의 기회가 되었다. 누군가의 이름인 표제 속 전수미는 아마도 세상 모든 곳의 ()’이라는 인간 모두에 두루 내재하는 것으로서의 하나의 표상일 것이다. 소설 속 화자는 바로 전수미의 동생 전수영이다. 수영의 성장 과정에 늘 전수미는 부모의 사랑에 접근하는 기회를 동생에게서 빼앗고, 온갖 교활한 사건사고를 통해 시선을 자신에게 붙들어 매어두는 존재다. 그로인해 수영은 모든 것을 양보하고, 관심으로부터 소외된 삶이 불가피하게 강제된 것이어야만 했다.

 

보란 듯 부모의 침실에 남자를 끌어들인 후 엄마에게 영상을 보내고 그 혐오스러운 적나라함을 목격하게 하는 전수미의 행위는 관심을 넘어 당혹과 걱정, 온 가족을 고통으로 몰아넣음으로써 획득되는 즐거움이다. 수영은 이러한 집안 상황에서 부모에게 그 어떤 연민이나 사랑도 기대할 수 없음을 안다. 이러한 전수미의 행위로 인해 닮은 모습의 수영은 앙심을 품은 또 다른 추악한 남자들로부터 기습적인 뭇매와 수모를 감당하는 일상이 계속된다. 그 누구라도 이 악으로 똘똘 뭉친 존재를 단지 피붙이라고 관용하기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영은 그 참담한 희생, 아니 일방적 피해로 점철된 현실에 이를 간다.

 

수영은 전수미라는 악의 물리적 접근이 가능한 집을 떠나기 위해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1년 내 몸이 파손되는 악명 높은 배송분류 아르바이트를 버텨낸다. 오직 악의 영역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작은 전세방이라도 구할 목돈의 마련을 위해서. 그 작은 돈으로 주변 환경이 열악해 값싼 방을 구하게 된다, 하지만 수영에게는 집을 피해 오직 자신만의 삶을 꾸릴 수 있기에 마음의 평온을 얻기에 충분하다. 그리곤 계속해서 주변에 지속해서 혐오시설들이 잔존하기를, 집세가 오르지 않기를, 그래서 계속해서 살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가족 내 악의 존재에 대한 증오의 서사는 수영이 새로이 개원한 노견(老犬)들의 돌봄을 전문으로 하는 동물병원에 취업함으로써 늙음과 그 노화에 따라붙는 곤혹스러운 질병들과 죽음이 그 당사자들의 가족들, 돌봄을 맡게 되는 존재들, 바로 우리들에 어떤 영향을 초래하는지 그 실상을 투영한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는 늙은 개들, 더는 이들을 바쁜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이 돌볼 수 없게 된 개들이 맡겨지는 죽음 이전에 경유하는 장소다. 수영은 원장의 말마따나 절실해서 뽑힌 직원이다. 그녀와 이유는 다르지만 또 다른 절실함으로 인해 취업한 소란과 함께 개들을 나누어 돌보는 노동을 한다. (노동자의 절실함을 이용하려는 탐욕스러움, 그 이기심이란!)

 

말 못하는 생명의 고통을 어루만지며, 그들을 씻기고 산책시키고, 이상 징후를 수시로 점검하는 가운데 늙음의 슬픔과 연민을, 그들 주인이었던 인간들의 사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맡긴 시간이 길어질수록 병원비의 부담이 가중됨을 암시하는 견주들의 감정적 징후의 변화와 함께 병원비에 대한 이의가 제기될 때면 개들은 적절한 시간에 맞추어 죽음이 행해진다. 이제 늙고 병든 인간은 으레 요양원으로 보내지거나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삶의 마지막 종착지처럼 여겨지곤 한다. 우리들의 부모이자 형제자매인 노인들이 겪게 되는 돌봄의 현주소와 교차되며 오늘 우리들의 심연에 자리한 불편과 부담이라는 언어에 가려진 작은 악의 모습을 보게 된다.

 


수영은 원장이 내건 동물 돌봄의 언어 뒤에 재화를 향한 꾀바른 욕망만이 있음을 안다. 오직 견주의 지불 능력의 판단에 따라 맡겨진 노견의 죽음의 시간이 정해진다는 것을, 요양원이라는 인간 돌봄 시설의 돌아가는 현 실태와 그리 다른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맡겨진 노쇠한 인간을 찾는 가족의 발길이 뜸해지고 어느 시점부터는 비용의 납부가 지연되거나 지불 능력이 사라졌음을 알아차리게 될 때, 그 인간의 운명 또한 얼마 남지 않았음의 표지로 작동한다는 것을. 이 세계의 작동이 예외 없이 돈의 지불 능력, 이 한 가지에 달려있다는 것을, 제아무리 생명의 고귀함, 신성함을, 그리고 도덕적 책무를 고상하게 떠벌리고 있지만, 우리들의 사회는 이러한 현실의 부담을 결코 나눠 가질 의도란 것이 전혀 없음을 확인하게 될 뿐이다.

 

수영은 노견 한 마리의 배 아래 쪽 망울이 느껴지고, 그것이 어떤 질병의 징후임을 어렴풋 감지하지만 원장에게 전하여 치료하는 것을 미루다 그것이 치료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러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한다. 수영이 그 개에 대한 연민이 없어서거나 돌봄의 게으름 때문이 아닌 표현할 수 없는 늙음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함께 그의 죽음을 방치코자하는 묘한 양가감정의 혼란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견주가 겪는 경제적 고통과 각박한 삶 속 심리적 상처를 헤아린 표현키 어려운 감정이 야기한 행위로 보인다. 이유야 어떻든 수영의 방치로 인해 개는 죽어 화장된다. 어느 날 망울을 반복적으로 어루만지는 수영의 동작이 녹화된 CCTV를 내미는 원장으로부터 묘한 협박을 받고, 이에 상응하여 병원의 실상에 대해 수영이 입을 다물 것을 넌지시 압박받는다.

 

이제 아주 중요한 이 작품의 정교한 구성을 말 할 때가 된 것 같다. 수영은 언니 전수미의 지속되는 악행의 피해자임에도 수동적 태도를 견지하며, 단 한 차례도 진실을 부모나 여타 인물에게 전하지 않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추리물처럼, 어떤 반전, 그 이면에 묻힌 진실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남기며 이 소설은 이야기의 힘을 잃지 않은 채 이어지게 하고 있다. 이 점만으로도 작품은 강력하고 정교한 구성력이 돋보인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수미가 수영의 어떤 약점을 틀어쥐고, 그 반대급부로 악행을 통해 버젓이 부모의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었음을 알게 된다. 전수미는 자신이 일하는 요양원에서 한 노인의 죽음을 방치함으로써 살릴 기회가 있었음을 고의로 회피했다는 증거에 의해 살인죄로 수감되어 있고, 그녀의 변론을 위해 변호사는 수영에게 가족으로서 우호적 증언을 요구하지만 수영은 그에 응하지 않는다.

 

수영은 어린 시절 유일하게 가족들이 함께 캠핑을 나섰던 어느 날을 기억한다. 전수미가 텐트에 불을 질렀던 그날에 벌어졌던 하나의 트라우마인 사건을, 하얀 껍질의 자작나무가 곧게 솟은 숲 속에서의 비밀을, 수영은 더는 세계의 뒷면에 나를 가둬두지 않을 것임을, 자신을 땅 속 어둠에 가라앉힌 그 비밀의 옭아맴으로부터 벗어날 것임을 다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난 전수미가 아니니까.”, 수영은 자신의 어둠, 작은 악의 모습을 보았다. 지금 그 출처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인간들의 의식적 인격이 확실히 도덕적인 태도를 지니기 위해서는 내면의 악을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기 안의 악에 대한 인식의 경고 문장이 이에 맞춤인 것 같다.

 

이 작품이 그 구성의 세밀함에 더해 또 하나의 미덕이라면 수영의 삶, 그녀가 사는 법을 체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는 법이란 결코 단순하고 진부한 언어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악을 조금씩 길들여 조절하는 작업이 바로 사는 법의 체득이다. 이것은 결단코 외로운 작업이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수영은 바로 견주들, 같이 일하는 동료인 소란, 그리고 노견들에 대한 사랑, 그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관계성을 회복하고 악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힘을 얻었던 것일 게다. 병원은 문을 닫게 되고, 오갈 때 없어진 소란에게 자신도 모르게 함께 지낼까하고 말한다. 그녀는 이것을 내가 진짜 하고 싶어 하는 말, 내 양심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비밀의 음습한 지대를 떠나 관계가 있는 연대의 세계로 나섬으로써 그녀는 세상의 일부가 되고 자기안의 악과 싸울 수 있게 되는 것일 게다.

 

오늘 우리들은 자기 안의 악은 한 번도 주시하지 않은 채 타인만을 판단하려하고, ‘나만큼은 선인이고 정상이다.’라고 주장하는 몽매함의 그 무섭고 집요한 한 인간을 보고 있다. 그 인간은 자기 안의 악은 외면하고 악을 자기 바깥의 세계로 몰아대는 비상식적 착각을 인지하지 못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어둠의 그림자에 압도된 인간, 악은 우리의 바깥에 있지 않다. 바로 자기 내면의 악에 압도된 인간, 무사고(無思考)적 인물이며, 에고이스트처럼 우리는 언제든 그와 같은 흉물이 될 수 있다. 안보윤 작가의 이 소설은 바로 이러한 우리들 내면의 악,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를 인식토록, 그로써 세상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전수영의 사는 법이라는 그 체득의 과정을, 그녀들에게 보내는 헌사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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