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여름 2024 소설 보다
서장원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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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마다 간행되는 소설보다는 내게 한국 문학(소설)을 체감하는 하나의 작은 통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작가들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품고 있는 언어와 그 개념에 대한 의미의 틈이 벌어졌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을 보는 관점, 관심사, 시대가 앓고 있는 현상들, 등등. 그렇다고 근대적 이해에 도전하는 모든 개념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보수적 편협성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유토피아를 꿈꾸는, 현실과 불화하는 희망의 전사이기를 그만 둔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때문에 나는 내 벌어진 개념의 틈을 이들의 연결하려는 노력과 지혜로부터 배운다.

 

서장원 작가의 리틀 라이프와 예소연 작가의 그 개와 혁명두 작품은 이러한 생각(개념과 의미의 틈)을 하게 골똘하게 만들었는데, 전자는 그 어느 시대보다 강력해진 타자의 시선이 개인 삶에 작용하는 영향이 비대해졌다는 것에 대한 것이고, 후자는 바로 그 벌어진 간극이 틈새가 아니라 의미작용의 변화라며 어떤 유대의 가능성을 주시하게 했다. 이와 달리 함윤이 작가의 천사들(가제)은 두 작품과 결이 다른 익숙한 주제로서 이별과 상실을 마주한 존재의 애도와 회복의 힘에 대한 것으로 여겨졌다.

 

예소연 작가의 그 개와 혁명

 

이번 여름호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예소연 작가가 이끈 것이고, 그 호감의 정체는 조금씩 성장해가는 내적 단단함 속에 내재된 어진 마음의 인물이 어른거리고 있다는 내가 간직한 인상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작가의 작품을 접한 것은 소설보다 2023, 겨울호에 실린 우리는 계절마다에서 인데, 이 소설의 문장에는 그 이상한 낙차라는 불가해한 타자의 힘과 벌어진 간극이 발산하는 견디기 힘든 그 무엇을 의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개와 혁명은 바로 이 낙차, 간극의 이해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암으로 죽음을 향해 있는 아빠 태수 씨58년생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인물이다. 아마 화자인 맏딸 수민이 듣고 자랐던 노동가치니 혁명이니 하는 무언가 도모하는 말들이 시대착오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물질적 풍요와 소비주의에 안주한 지금의 세대에게 이러한 말처럼 낯선 것도 없으리라. 아마 이 시대적 언어를 에워싸고 현재의 삶에서 이것들이 말 되어야 할지 아닐지에 대한 설득의 이야기라면 이 소설은 무척 재미없었을 것이다.

 

남자가 무조건 집을 해 와야 한다는 게 요즘 여자애들 생각이니?”, ‘요즘 여자애들’, 태수씨의 범주화된 언어들이 벌여 놓은 간극, 수민은 태수씨에겐 치열했던 삶이 있다면 자신에겐 참고 견디는 방식으로 이어져 온 삶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한 사람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안다. 두 부녀는 함께 울고 웃으며 사랑을 확인하며,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뜻, 의지, 그런 것들의 동일한 서로 다른 언어임을, 그래서 언어의 벌어진 틈이 이어진다.

 

소설은 죽음을 버티면서 삶을 버티는 행위로써 계획되었던 맏딸 수민이 상주로서 태수씨의 장례식을 치루는 한 바탕 즐거운 소동으로 대미를 장식하는데, 아빠 태수씨의 언어로 수민이 우리의 적은 제도잖아라고 발설하는 장면은 서로 다른 정치적 감정이 변화하는 시대의 다른 언어의 합일같아 영정 사진을 보며 웃는 수민과 같이 나도 활짝 웃었다. 세대의 차이를 웅변하는 서로 알지 않으려는 세상에 연결의 지혜를 말하는 슬프지만 경쾌한 이야기로 내게 남아 있을 것 같다.

 


서장원 작가의 리틀 라이프

 

소설은 퀴어 프렌들리한 콘셉트를 내세운 빈티지 의류를 거래하는 온라인 중개회사에 입사한 남성 트랜스젠더 토미를 통해 이 세계에 벌어진 인식의 틈을 보게 한다. 예소연의 작품이 언어와 의미의 틈을 말하고 있다면, 이 작품은 인식과 감정의 틈을 생각게 한다. 또한 겉모습이라는 시각적 물질성으로서의 인간이 마치 세계의 존재조건처럼 작동하는 세계가 또다른 틈처럼 보인다.

 

길거리에 빈티지 의류를 멋스럽게 차려입은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올린 동영상으로 회사를 홍보하는 소셜마케팅 팀 오스틴이란 인물은 164센티미터에도 미치지 않는 작은 키로 외모가 멋지지 못한 남자다. 자기 연출에 뛰어난 남자로서 뭇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만 매혹을 일으키는 존재는 아닌 것이다. 화자인 토미는 트랜스젠더 남성으로서 미약한 동지애를 느낀 동료로 가까이 한다. 한편 트랜스젠더인 토미는 성전환을 위한 탑 수술만 마친 아직 완전한 신체적 남성으로의 전환을 한 상태가 아니다. 그는 퀴어 퍼레이드 행렬의 잘 다듬어진 남자들을 서글픈 심정으로 지켜보며, 그들처럼 웃통을 벗고 싶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이 성소수자로 불리는 트랜스젠더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나는 오스틴, 토미로 대표되는 인물을 통해 시사하는 그들의 갈망인 매혹하는 존재, 즉 타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존재로서의 욕망에 주목했다. 경쟁의 승패가 외적 이미지로 갈리는 세계에 잠식당한 세상이다. 인터뷰이와 스캔들에 휘말림으로써 정직을 받게 된 오스틴은 자신의 콤플렉스인 신장을 늘리기 위해 사지연장 수술을 하고, 화자가 전 여자친구 혜령에게 성전환 헐리웃 배우의 트랜지션 시기에 대한 토를 달며 외모(신장)가 성공의 한 요소임을 말하는 장면은 세태를 대변하는 것만 같아 씁쓸하다.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 속에서 당사자의 고통을 생각해보라고 얘기하는 이도 있을 것이겠지만 왜 이러한 지배적 시선에 길들여져야 하는가, 이러한 시선에 저항하고 다른 길을 개척하려하지 않는가를 생각해 보았는가라고 반문하고 싶다.

 

소설은 분명 좋은 여자도 만나고요, 페미가 아닌 좋은 여자처럼 오스틴의 여성 혐오 발언을 통해, 화자가 반감을 지니게 되는 지점을 알리고 있지만, 화자가 더욱 오스틴에 절망하는 이유는 그가 병원 침대에 누워 토미의 탑 수술을 인지하고 있었다며 우린 그러니까, 전우 같은 거잖아요라는 말에 아니요...저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전혀 달라요.”라고 반발하는 장면에 더 시선이 간다. 아마 이 반발하는 마음은 성의 전환과 신체의 외형적 수술은 그 가치나 지향점에서 결코 같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일 것이다. 사실 쳇바퀴 돌 듯 퀴어 문제와 관련한 작품들은 한결같이 편견 없음이 편견이고, 편견 있음 또한 편견이라는 말로 외부 시선을 모두 싸잡아 비난하는 논조들로 가득하다. 물론 타자가 겪는 감정적 고통에 대한 섣부른 예단적 이해가 무례일 수 있다. 그렇다고 소설 속 혜령의 편견 없음이 오히려 몰이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이기적인 발상인 것만 같다. 화자는 이러한 생각을 너무나 집요한 생각이라 말하고 있지만, 자기 성찰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이 작품은 틈새를 연결하거나 매우기는커녕 그저 그 균열의 빈 허공만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작가의 의도와 다른 오독이라면 좋겠다.

 

함윤이 작가의 천사들(가제)

 

이 단편 소설의 제목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말로서 가제가 붙었는지, 아니면 소설 속 세 조로 나뉘어 연기되는 단편영화의 각본이 미완결 상태임을 말하는 것인지, 아무튼 소설의 제목은 소설 속 영화 각본의 제목이기도 하다. 화자 는 친구 항아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다섯 시간의 부산 여정에 오른다.

 

화자 는 기차 여행 중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꿈속에서 항아와 함께 제작하는 단편 영화를 위해 세 사람씩 한 개조로 구성하여 캐스팅을 위한 오디션을 진행한다. 남녀 두 여인과 한 명의 천사로 이루어진 즉흥극이 조별로 연기한다. 그런데 오디션을 진행하기 전에 열 명이 참가한 것으로 화자는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아홉 명만이 참석한다. 화자의 생각에 사라진 한 명은 보이지 않는 어떤 미지의 존재로서 즉흥 극 속의 천사와 동형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 같다.

 

즉흥극의 내용은 이렇다. 사랑하던 연인이 어떤 갈등으로 인해 이별하려 할 때 이를 중재하는 것이 천사의 역할이다. 각 조는 자신들만의 각기 다른 내용으로 열연한다. 이때 보이지 않으니 그 존재를 지각할 수 없는 이별하는 연인들에게 직접적 화법이나 행위로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천사의 역할은 불가항력이지만 미세한 변화를 야기한다. 나는 이 소설에서 무대 속 천사와 화자가 꿈속에 느끼는 열 명 째 존재로서의 천사, 이렇게 두 명의 천사만을 인식했으나 작가와 인터뷰를 나누는 이소 작가의 해석에서 또 하나의 천사가 존재하고 있음에 뒤늦게 동의하게 되었는데, 화자가 꿈속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열차의 안내방송이나 철도 여객원으로 느껴지는 누군가에 의해 다시금 꿈의 진행을 돕는 어떤 힘으로서의 천사다.

 

이 천사의 존재를 화자는 장례식에 온 선배에게 묘사하는 데,  서로 엉겨 붙는다, 나뉘어 떨어진다. 수면으로 올라가면 사라진다. 드물게 잔 밖으로 튀기도 한다. 밖으로 튄 방울은 손등에 스민다.”고 유리잔 속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기포들에 비유한다. 그리고 화자는 항아와 함께하는 오디션의 캐스팅이 종료되기 전에 꿈이 종결될까 안절부절하며 종착역에 이르기까지 집요하게 꿈속으로 향한다. 어쩌면 이 두 제재에 내재된 연약한 소통이 이 소설의 어떤 애절한 애도의 감정들을 견인하고 있는 것이라 느꼈다.

 

사실 이 작품은 두 작가의 인터뷰가 아니었다면 많은 것을 놓치고 읽었을 것 같다. 나와 너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자잘한 사건들, 이것들에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어떤 미지의 힘, 그것은 소설 속 화자의 애도의 감정일 수 도 있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 작가가 말하는 시절 인연일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리움과 인연에 대한 아스라함이 한 편의 기차여행 속 꿈결처럼 그려진 아름다운 작품으로 기억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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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여름에게 에세이&
최지은 지음 / 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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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들여다보는 일이 한 사람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 104, 나는 얌전히에서

 

이 책은 어두운 구멍에 던져 졌던, 아니 작은 상자에 넣어두었던 고유한 상실과 상처의 기억들 속에서 사랑을, 존재에 대한 연민을 길어 올리는 치유와 회복의 기록이라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고통을 껴안고 걷고 있는, 그것에 사랑이 깃들어 있음을 알기에, 없음(不在)에서 획득할 수 있었던 마음, 그 돌멩이를 움켜쥔, 불안이 끝나지 않기를 기도하는 시인을 나는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시인의 그리움과 사랑의 간절함에 울음을 운다.

 


소금물을 끓여 절인 오이지가 맛있다는 말에 손녀를 위해 한 솥 끓는 소금물을 내리다 큰 화상을 입은 할머니, 손톱을 둥글게 잘라주던 아버지, 어린 시인을 돌보았던 두 분의 죽음을 기억하는 그 쓸쓸함이 너무 맑고 깨끗해서 아파 나도 운다.

 

다섯 살, 아홉 살, 열두 살,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외로이 성장해야했던 서러움과 가난, 비뚤어진 성정의 어설픈 어른들의 눈총을 겪어야 했던 외로운 소녀, 불안과 결핍과 부재들이 부과했던 어린 시인의 상처들에 의해 성장한 시인은 그 기억 속 어린 시인을 안아준다.  놀면서도 도망을 가고 가난하고 배고픈 이야기를 하는 기억 속 어린아이가 하던 인형 놀이가 이제 부끄럽지 않다고, 시인은 바로 그것들과 함께 했음을 다행이라 한다. 이 무수한 불안의 요인들이 자신의 성장을 만든 것들이기에 연민과 사랑을 보낼 수 있음을 시인은 알기 때문이라고.

 

이 책은 시인을 이룬 상실과 죽음, 그녀에게서 앗아간 것들을 완전하게 버리기 위해 기억의 심연 속에 흩어진 것들을 하나하나 주워 모아 그 지독한 슬픔과 상처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엄숙하고도 간절한 치유와 회복의 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은 스스로 묻는다.  이토록 지독한 여름은 다 무엇일까요라고, 그리곤 답한다. 줄 곧 그 여름을 나 혼자 묻어두고, 꺼내보고, 또 한 겹 덮어두는 동안, 이 무서운 이야기는 저에게 그냥 사랑이었습니다.“라고.

 

상처를 가득 품고 있는 존재이지만 그것은 그저 슬픔이고 아픔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랑도 있었다는 것을. 시인은 그래서 그 아픔의 모습들과 사랑의 실재들을 되돌아보며 자신을 지켜온 홀로의 힘, 스스로에 대한 사랑에 믿음을 보낸다. 그리고 상실과 죽음으로 잃은 보고 싶은 시인의 영원한 르트루바유(Retrouvailles)인 할머니와 아버지와의 재회와 사랑을 마음에 담는 일, 아마 그것이 곧 시인 자신을 지키는 것이고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는 일임에 대한 믿음의 기록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의 해맑은 표정을 보는 내 마음이 좋다, 출처: 최지은 시인 인스타그램


모든 고통과 불안과 슬픔으로 구성된 자신을 꼭 안아주는 이야기다. 그럼으로써 조금 더 의연하고 용감해진 사람을 향한 조심스러운 걸음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이시다 센(石田千)이라는 일본 작가는 나그네는 몸에 몇 개의 씨앗을 품은 채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그네가 여행했던 사실조차 잊어갈 무렵, 고향의 정원에서 자그마한 꽃이 핀다고. 시인의 마음 저 깊은 곳 어린이가 겪었던 구멍들과 어둠의 오고감, 그리고 바다가 출렁이고 파도가 또 오고 갈 때 시인의 이해처럼 사랑과 용기와 신뢰의 씨앗들이 지금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일 게다. 나는 이 비밀 아닌 비밀의 책을, 그리고 시인을 그냥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만의 숨을 쉬는 시의 공간을 기대하게 된다. 간절함과 절실함이 담긴 사랑과 용기의 언어들을.  많은 독자들이 시인의 상자 속 언어들과 교감을 나누었으면 정말 좋겠다.

 

어린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어린 내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서로 달라졌다. 틈이 생겨버렸다. 구멍이 생겼고 어둠이 오갔고 바다가 출렁이고 

그 위로 파도가 오고 또 갔다. (...) 나는 그렇게 지금의 내가 됐다.”

-126, 오틸라, 제가 이룬 것을 보세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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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생트의 정원 문지 스펙트럼
앙리 보스코 지음, 정영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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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 지상에서 찾은 태초의 정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곧 나는 그 애가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걸 돌연 깨달았다.

그는 그 애를 마치 짐승처럼 길들여 놓았던 것이다.”

13, 반바지 당나귀의 한 대목, 이 작품 이아생트의 정원

내적 유대를 암시하려는 작가의 의도로써 머리말 격으로 인용된 문장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영혼을 빼앗긴 아이라는 섬뜩한 문장에 사로잡혔던 마음은 퓌를루브 아래 여러 오름 중 첫 언덕에 단단히 기대서 있는 평화와 신뢰 가득한 게리통 내외가 사는 아주 오래된 보리솔의 집에 이르기까지 마을과 풍경,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고결한 아름다움이 펼쳐지는 문장들에 그만 압도되어 어느새 평생토록 간직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부드러워진 마음으로 바뀌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리귀제라 이름 붙인 농가, 양 떼와 과원들, 가슴 따뜻하게 맞아주는 아멜리에르 마을, 늙은 신부의 어진 사랑이 가득한 성당, 끊어질듯한 샘물에 의존하여 참으로 적은 것만으로 살아가는 보리솔의 두 노인, 영혼이 끊임없이 새어나가 온갖 개념이 흘러내리듯 사라지는 무기력한 아이 펠리시엔, 고릿적부터 고독을 음미하며 그 추억을 지닌 채 고요하면서 생각깊은 옛 목자시대에 속하는 양치기 노인 아르나비엘, 배려와 열정적 사랑의 서열을 따르는 리귀제의 충직한 안 살림꾼 시도니까지 이들 모두의 침묵과 서두르지 않는 세심한 손길들과 심오한 감정들이 그 어떤 수다스러운 말의 향연을 초월하는 따스함과 평온으로 그득한 천상의 지혜를 펼쳐놓는다. 책을 읽어나감에 따라 생각의 소리를 전달하는 데 침묵이야말로 생각에 동반되는 깊은 의미임을 절로 깨달아가게 된다.

 

겨울과 봄, 그리고 여름, 가을, 계절에 따라 표상되는 자연의 정경들, 온갖 식물들과 동물들, 그리고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이 작품 속 아멜리에르와 리귀제, 보리솔, 그냥 거기 그렇게 있음으로 족할 만큼 기쁨과 행복감에 취하게 된다. 머리를 쥐어 짜낼 일도 없다. 물론 이 작품의 무수한 나무들, 꽃과 별과 뱀, 여우 등이 상징하는 종교적 영성의 의미들이 지상의 심원한 비의(秘意)들을 전달하고 있지만, 그저 꿈처럼 부드러운 구름 속으로 녹아드는 듯 초조함 없이 심취하면 그것으로 족하리라. 아마도 절로 가만가만해지고 목소리도 잦아드는 그런 포근한 솜처럼 감싸 안기는 듯한 그런 느슨함의 평화에 잠기게 된다.

 


이야기는 버리듯 맡겨진 텅 빈 시선과 생각과 말이 서로 교응交應하지 못하거나 혹은 간신히 교응하고 있는 듯한 무기력한 어린 소녀 펠리시안의 영혼을 잃은 비인격적 인간 존재에 대한 사랑의 여정을 한 축으로 한 지상에서의 삶의 축복에 대한 찬양일 것 같다. 시프리앵으로 표상되는 마법사 일기로부터 펠리시안이 영혼이 제거되고 그 영혼에 자신의 낙원을 실현하려 했으나 실패한 기록이 전해진다. 시프리앵의 태초의 정원을 완벽하게 재현하려는 시도는 좌절되고, 정원조성의 대상인 펠리시엔이 소녀 이아생트였음을, 그녀의 공허한 영혼은 잃어버린 천국, 인간의 가장 오래된 꿈의 실패한 반영이었음을 어렴풋 짐작케 된다.

 

이와 병행하여 작중 화자인 리귀제의 주인 메종의 현실과 꿈의 경계를 오가며 그의 주변에 펼쳐지는 지상의 풍경은 바로 지상에 실현된 낙원이다. 이것은 그를 신뢰와 배려로 섬기는 늙은 여인 시도니가 생에서 기다리는 것, 비록 그녀 생의 영혼은 다른 세상에 과녁을 두고 있지만 이 지상에서 열정적으로 기다릴 줄 아는 자의 표징 그것일 것이다. 소설은 더없이 아름답게 이야기를 종료하는데, 메종의 리귀제 별채에 찾아든 식물표본 채집을 한다는 수줍음을 실은 신중한 청년과 이아생트의 마주함이다. 청년은 펠리시엔을 바라보자 하느님...그리고 이아생트라고 그녀를 부른다.

 

이아생트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가만있었다. 하지만 심연의 침잠된 고요를 뒤흔드는 생명력이 그녀의 두 눈에 솟구쳐 올라오고 있었다.” -388

 

아마 이 장면을 통해 실패한 태초의 정원은 지상의 정원, 인간 세계의 낙원으로의 가능성이란 바로 여기임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침 말라버렸던 보리솔의 샘은 다시 물줄기가 흐르고 아몬드 나무 한 그루가 꽃을 피운다. 이제 이야기의 거대한 조류를 장악하는 손가락 사이에서 공기가 빠드득하는 걸 느낄 수 있을 만큼 라일락빛 부드러운 하늘상쾌한 공기의 생기발랄한 빛으로만 어우러진 하늘이 벨벳처럼 감싸는 듯 뺨에 쾌적한자연의 기운에 심취한 읽기를 뒤로하고, 조각조각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간 고귀한 상상력이 숨어있는 문장들을 세세히 다시 읽어나가야 할 것 같다


당나귀, , 시프리앵의 정원, 그리고 신비와 경이로운 풍광의 묘사 문장들이 발산하는 시적 메아리들을 음미하도록 숙독을 요청하는 마음의 외침이 격렬하기 때문이다. 켜켜이 쌓인 마음 떼가 씻겨 내려가 정갈해진 듯한 기분이다. 앙리 보스코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 누구든 작품 속 영혼들의 평온을 함께 누리는 시간이 될 것만 같다. 보스코의 이 소설은 모두에게 선익善益을 안겨주는 지혜의 총합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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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하는 이카로스 - 20세기 서양 문학과 문화
박설호 지음 / 울력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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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유폐된 소시민적 무관심과 무능력을 깨워 댄다.


‘20세기 서양문학과 문화를 기저(基底)로 한 예술비평이자 역사비평을 찾은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논의 대상으로 삼지 않거나 아예 말하기를 중단한 사유와 언어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고 해야겠다. 저자 박설호 교수의 이 책에는 베르톨트 브레히트크리스타 볼프를 제외하고는 국내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거나 아예 소개조차 되지 않은 작가와 작품들이 발하는 목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 책은 총 4부로, 14 편의 문학, 역사 평설로 이루어져 있다. 표제인 비행하는 이카로스(Ikarus)'의 신화는 2부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지고 있으며, 그것은 시대성과 개인의 갈망에 따른 동일 신화의 유형 연구를 기초로 인간 역사 인식의 전환을 발견하는 여정이다.

 

또한 더 이상 희망이나 이상에 대해 말하거나 꿈꾸지 않는 세계라는 이해에 터 잡은, 더욱이 현실이라는 주어진 조건에 반항하는 이들의 일탈에 눈을 흘기며, 혐오와 배제를 요구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여전히 희망으로서의 저항과 시대의 자기비판을 일깨우는 사유로의 초대이기도 하다. 아마 살아가는데 당장 필요한 도구적 지식에만 매달리는 오늘의 현상도 이러한 시선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지식은 개인의 이해를 떠난 공동체와 사회, 국가, 삶의 전반에 대한 어떤 사안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해주지 못한다. 아마 이렇게 환경 순응적 인간이 된 사람들이 이룬 집단이 바로 지금의 한국 사회이지 않을까? 그 어떠한 비전도 없으며 오직 눈앞의 자기 이익에 따라 갈팡질팡하는 현재의 정치권력의 작태가 사회경제적 현안 문제에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요인에 기인하는 것일 게다.

 

책의 1<망각된 독일 문학>을 여는 20세기 전반, 1차 대전과 2차 대전이라는 증오와 혐오로 뭉쳐진 비참한 시대를 살았던 독일 작가 ‘B. 트라벤은 내겐 생소한 이름이다. 1919년 뮌헨혁명정부의 주도세력으로 혁명재판소를 위한 준비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했던 혁명가이자 문인이다. 군주정을 옹호하는 귀족세력인 백위군은 바이마르 공화정 수립을 극렬하게 방해했다. 백위군에 체포되어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 대기를 하던 중 탈출하여 멕시코의 외진 촌 막에 은거하며 자신의 이름과 거주지를 숨기고 사회에 순응해 나가는 소시민적 인간 유형과, 신분증, 신원조회, 각종 증명서로 표상되는 국가의 통제와 감시체가 일상화되는 관료주의적 전체주의화에 혹독한 비판을 가했던 문명비판 예술가다.

 

B. 트라벤이란 이름에 대한 억측은 그의 사후에 미망인 로자 엘레나 루한에 의해 밝혀졌는데, ‘레트 마르트가 본명이며, ‘리처드 모허트, 여러 필명으로 활동했음이 드러났다. 이렇게 자신의 고정된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며, 신분을 철저히 숨긴 채 활동한 이유는 그의 다음의 문장으로 명료하게 규명된다.

 

정신적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자에게 사람들은 이력서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례한 짓이다.” -25쪽에서

 

예술가의 이름은 반드시 권위적 선입견을 조장시키기에 궁극적으로 예술의 고독하고 어려운 정도(正道)를 배반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예술가의 명성에서 비롯되는 권위의식을 사장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그것은 문화산업의 권력을 파행적으로 확장시키게 하고 거짓된 권위를 창출하는데 결정적 이유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자신의 이름을 죽을 때까지 숨긴 이유이다, 공정한 비평과 예술의 발전을 위해 가혹할 정도로 자기 성찰을 되풀이한 고결한 정신을 지녔던 한 예술가를 발견하게 된 것은 정의가 사라진 오늘의 세계에서 단비(甘雨)를 맞이한 느낌이다. 예술가의 이력부터 찾아보는 감상가의 체제순응적인 무의식적 습관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 속에 위치한 존재들임을 환기시키는 체제 이익의 주체인 자본주의를 냉혹하게 갈파한 시에라 마드레의 보물, 백장미등을 남겼다. 이에 대한 소개와 비평적 독해는 책에 미루기로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작품 부상당한 소크라테스는 거짓에 숨어든 자의 진리를 말할 진정한 용기에 대한 비유로 많은 책들에서 인용되고 있는 국내에도 제법 알려진 작품이다. 브레히트는 기원전 432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했던 소크라테스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며 그가 살지 않았던 기원전 480~477년 사이에 발생했던 페르시아 전쟁을 무대로 삼고 있다. 브레히트는 역사적 사실의 기술보다는 과거 속에 은폐된 어떤 주제상의 문제를 밝히는 것이 예술의 책무라 생각했던 까닭이다. 이 작품은 지배자들의 기득권과 이권놀음인 전쟁에 죽음을 불사하며 참전하는 소시민들을 길들인 독단의 이데올로기라는 잠에서 깨어날 것을 촉구한다.

 

아마 애국심이라는 맹신과 허위의식으로부터 심리적 방어벽을 형성하고 있는 맹목적 몽니를 허물기 위한 자기 인식의 전환에 대한 고뇌였을 것이다. 무지의 자궁으로부터 진리를 출산시키는 자로서의 소크라테스는 적절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작품의 소개에는 악처로 왜곡되어 설명되는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를 진리를 발견하는 산파 역할의 주체로 재발견함으로써 선입견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자기성찰의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인 소시민적 무심성과 무관심과 맹목성으로부터 어떻게 깨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과 맞닿아 있다.

 

이 책의 표제이듯 저술의도를 관통하는 이카로스 신화의 시대적 장소적 변화에 따른 신화수용의 양상을 통해 시대적 갈망들을 비교분석하는 2장으로부터 주어진 역사적 상황에서 문학과 예술 작품이 인간 경험을 어떻게 오늘의 우리들에게 드러내주는가를 읽게 된다. 신화 및 역사비평가인 귄터 쿠네르트(1929~ )’역사는 신화가 변형된 어떤 형체로서 협의 가능한 마지막 신화라고 역사를 삼킨 신화를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역사적 사실에서 인과율의 어떤 사슬을 찾으려하고 합법칙성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과거 신화에 나타난 고대 유형으로서 숙명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역사기술이란 신화에 봉사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193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신화적 의미를 부여한 제3제국이라는 파시즘의 발생과 형성과정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비참성을 수정하기 위해 파괴된 민족 신화를 재구성하는 것에서 반계몽적 이데올로기의 특성을 보았던 이유일 것이다. 결국 그는 신화의 추상성에 내재한 교훈성과 날조된 허황됨, 그리고 가식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어떤 뜻을 존재하는 무엇으로 기어코 찾아내려는 인간의 조작욕구를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다음의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지적 야수로서의 인간은 끊임없이 거짓된 합리성의 가상에 맹종하려 한다.” -116

 

이처럼 역사는 끊임없이 자신의 효용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미묘한 신화를 창출한다(물론 이는 부정적 인식으로서 파시즘을 비판하기 위한 논거이다)는 사전 지식아래 이카로스 신화의 시대성에 따른 변조된 유형은 인간의 갈망, 쿠네르트가 지적하는 바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 장을 읽으며 한스 블루멘베르크()-이론의 역사적 수용을 통한 인간 사유의 변천기록을 떠올렸는데 아마 방법론의 동일 유사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신화수용사로부터 인간 형상에 공통적이며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기본적 변모의 발견 가능성을 지적했었다. 이카로스 신화의 간략한 원형은 이렇다.

 

이카로스는 아테네 출신의 기술자이자 예술가 다이달로스의 아들이다. 다이달로스는 미로 속에서 길을 찾는 방법을 아드리아드네에게 가르쳐주었고, 아드리아드네는 연인 테세우스에게 전하였다. 이로써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살해한 다음 미로를 탈출. 미노스 왕은 이에 격분,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를 미로에 가두어버렸다. 다이달로스는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하늘 위로 비행했다. 의기양양해진 이카로스는 지나치게 태양에 근접, 밀랍이 녹아 떨어졌다. 이카로스는 추락하여 바다에 빠져 죽었다.  

- 121, 서양문학에 나타난 이카로스의 유형 연구에서

 

기원전 1세기 오비디우스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위한 비행에서 척도 내지는 절제 등이 관철되지 못했다고, 추락은 사랑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결과 때문이라 평가했다. 또한 변신 이야기에서는 청년 이카로스의 아버지에 대한 불복종으로, 조카 페르딕스를 질투로 살해한 아버지의 과거 범죄에 대한 응보라고 이카로스의 추락을 해석하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의 말년의 연작시 슬픔에서 자신의 비극적 고립을 이카로스의 처지에 비유하여 작가와 예술가가 겪는 삶의 고뇌와 해원이라는 주제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즉 고립된 예술가로 이카로스를 이해했다는 것인데, 한 인간에게 있어서도 동일 신화는 이렇게 다른 해석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화의 계통발생론적 갈등의 흔적을 담은 개방적 텍스트라는 발생 조건에 따른 욕구 변화로 초시대적 불변의 상을 읽으려 하는 것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것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14세기 기독교 교부들은 이카로스의 비행(飛行) 오만과 치기의 돌출행동인 비행(非行)으로 만들어 기독교 교화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한편 괴테는 파우스트23막에서 파우스트와 헬레나 사이의 아들로서 오이포리온(이카로스)을 등장시키는데, 파우스트의 이상과 헬레나의 아름다움이라는 두 극단의 특성을 중개하려는 존재이지만 그는 이를 융합하지 못한다. 결국 그는 부모의 발 아래로 추락하는데, 자기파괴적 비상 욕구의 불가피한 실패성을 그려내려 했을 것이다. 20세기 초, 1차 대전 후 독일 작가 고트프리트 벤은 이카로스를 맹목적 애국주의를 표방한 비행사들의 신랄한 비판 소재로 활용하기도 했으며, 1960년에 들어서서는 볼프 비어만에 의해 요절한 동료 혁명가 루디 두츠케의 비극적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불의한 권력에 포위된 노동 혁명가로 표상되기도 했다. 비극적 영웅으로 냉담한 세상을 미리 간파하지 못한존재의 상징이 된 것이다.

 

1560년경,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피터 브뤼헬(Pieter Bruegel)


어쩌면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 브뢰헬의 유화작품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에 그려진 끔찍한 파국과 세상의 냉담성 사이의 위화감 표현만큼 오늘의 시대성과 맞닿아 있는 해석도 없을 것 같다. 화폭에는 세 사람이 그려져 있는데 어느 누구도 추락하는 이카로스를 주시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주위에서 발생하는 끔찍한 파국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 이들 소시민의 태도에서 슬퍼할 줄 모르는 무심함과 냉담함, 일상인들의 안이함을 지적하려 했던 것 아니었을까? 슬퍼할 줄 모르는 무능력, 아마 오늘 우리사회에 팽배한 동료 시민의 죽음을 비아냥거리는 저 무례함과 무공감이야말로 이러한 무능력의 단적 현상일 것이다. 물신 숭배의 도구적 이성에 매몰된 현대인들은 진정한 인식을 위한 지식에서 너무도 멀어진 까닭일 것이다. 나는 죽더라도 자유를 선택하기 위해 비상하는 수미일관한 모험가의 자세로서 이카로스를 읽는다. 오늘의 사람들은 이 비행과 추락을 과연 어떻게 해독하게 될까?

 

책의 3부는 독일 소설가 유렉 베커브론슈타인의 자식들을 역사적 범죄에 대한 수용의 실태를 살펴보게 한다. 나치의 패망이후 동서독으로 분리된 동독 진영에서 이뤄진 정부의 양태는 당대 한국사회의 해방이후 미군정의 양상과 흡사한 형태였음을 읽게 된다. 동독의 통치를 통제했던 소련은 정치, 행정, 사법, 경찰 등 정부요원을 나치 부역자들로 그대로 채워버린다. 결국 사회주의를 표방하였지만 국가권력의 행태는 나치의 파시즘이 그대로 연장된 것이었기에 동독 사회는 청산되어야 할 역사의 과오를 정리하지 못했다. 여기서 하나의 중대한 과제가 떠오른다. “자발적이고 처절한 자기반성의 과정을 통한 자기 잘못과 오류의 시정이 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정의도 없다는 것을 역사는 실증한다는 것이다. 동독은 소위 회복적 정의가 실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동서독 공히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이후 양측 모두 단 한 번도 나치 범죄자에 대한 재판이 속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시즘을 물리친 것은 독일인이 아니라 연합군이 무력을 동원해서만 가능했다.”는 이 준엄한 문장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비장하다. 진정한 청산을 위해서 선결되어야 하는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일제 부역자에 대한 청산, 즉 동족을 배반하고 괴롭힌 친일 부역자와 그 후손들이 여전히 권력의 첨단에 서서 국가와 국민을 농락하고 있는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결코 역사에서 늦은 것이란 없다. 우리 또한 식민 조선에서 일제를 몰아낸 주체가 아니다. 미국의 무력에 의해 이루어진 해방이다. 동독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저 비열하고 후안무치한 친일 부역자 무리의 처단을 감행해야 할 것이라 믿는다.

 

끝으로 제 4부는 자연과학의 맹목적 욕구에 내재된 멈출 수 없는 갈망, 그리고 인간의 쾌락과 파괴 충동, 타인에 대한 폭력 충동의 동인인 경쟁 등 현대 인류사회를 장악한 비극적 세계관에 대한 거대한 환기를 말한다. ‘토마스 브라쉬7개 극작품과 시나리오, ‘크리스타 볼프원전 사고를 통한 이러한 과학 맹신주의의 일방성과 맹목성, 이상추구에 내재된 인류의 비극적 숙명을 일깨우는 글들이다. 결국 이 거대한 열네 편의 문화, 역사적 평설은 무지의 자궁에 갇혀 편협과 무감각, 무능력을 감지하지 못하는 소시민들의 안일성과 무심성으로부터의 탈출을 일깨우려는 고뇌의 흔적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이 저작은 다른 시대와 장소의 범례들을 통해 우리에게 문제해결 능력을 연마토록안내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세뇌당한 인간의 병적 성향,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처절한 자기성찰과 비판이 따르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이 보다 나은 삶을 생각하기 위해 첫 걸음을 과감히 내딛을 용기를 가진 사람들에게 그러한 자기반성의 출발점을 위한 인식 성장에 분명 가치있는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이 사회는 이러한 언어와 사유를 말하지 않는다. 결코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언어는 주류에 도전해서는 안 된다는 기득권적 금기의식 때문일 것이다. 체제가 가르쳐 주지 않고 은폐하는 것에 훨씬 거대한 삶의 진실이 숨겨져 있다. 우리들은 그러한 것들을 알 필요가 있다.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 능력은 그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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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사 문지 스펙트럼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최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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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뒤라스는 72세 되던 해 그녀의 구술로 써진 물질적 삶에서 자신의 작품들에 대한 짧은 소회를 말하면서 있는 그대로 손 댈 수 없는 책들이 있다고 이 작품 부영사를 비롯한 일곱 작품을 열거했다. 어떤 비극성으로 똘똘 뭉쳐진 자신에게 출구를 열어주기 위해 불가능할 정도의 안간힘을 썼던 글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손 댈 수 없음이라는 문장은 이 소설의 가장 의미심장한 일종의 부재 언어(혹은 구멍 언어)’로써 이 소설의 한 발단이 되는 캘커타 외교 당국에 치명적이라고 간주되는 사건의 구체적 설명이 거부되거나 모호하게 언급되며, 궁극적으로 진술되지 않는 것의 의미와 연결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라호르의 부영사에게는 재현 불가능한 실재인데, 때문에 라호르라는 실재의 지명은 상징으로서 상상계를 잇는 일종의 구멍이자 삭제로서 기능한다 할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심연에 똬리를 틀고 앉아 결코 풀어줄 것 같지 않은 욕망이나 죄의식, 죽음의 유혹과 같은 이상한 욕동(慾動)과 마주했다면 그 무서운 두려움과 떨림, 광기를 재현해 내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혹자들은 말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들은 출구 없는 비극성으로 압축할 수 있다고.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끊임없이 터져나오려는 무엇에 대한 표현할 수 없이 차단된 고통의 감정을 떨쳐내지 못했는데, 아마 그것은 재현되는 순간 현실의 일상성 언어로 진부화되어 하찮음으로의 전락을 참을 수 없어하는 인물들의 극한에 가까운 절제된 언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소설은 주요 등장인물인 대사부인 안-마리 스트레테르나, 그녀의 친구 중 한 명인 피터 모건에 의해 써 지고 있는 갠지스강에 이르러 10년의 길을 멈춘 걸인 여인도 어떤 비극성에 의해 삶의 목소리가 막혀있다는 느낌에서 라호르의 부영사 장-마르크 드 아슈와 다르지 않다. 이야기는 이들 세 사람에 대한 타자의 시선 - 익명의 소문이나 뒷담화, 혹은 소설 쓰기 - 에 의해 묘사되거나, 설혹 그들 자신의 말조차도 내부에 갇혀 터져나올 수 없는 그 어떤 목소리에 의해 차단되어 절제되거나 중단되어 발화됨으로 인해 부영사의 라호르 사건 진술서의 표현처럼 설득력 있게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캘커타 프랑스 대사관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백인사회와 자신들을 외부 세계와 분리하여 철책 바깥의 문둥이들, 걸인들로 형상화된 1930년대 부조리한 세계의 지점으로써 인도차이나와 인도의 대비로 상징되는 유럽 백인들의 왜곡된 시선에 대한 반성적 고찰이 한 축일 것이며, 이러한 인종과 지역에 대한 불안과 불신의 심리와 더불어 계절풍으로 대변되는 이 외부화된 기후적, 질병적 질시만큼이나 적대시되는 부영사에 대한 갖은 소문과 추측들은 존재가 야기하는 지옥 같은 외로움이거나 삶의 모든 욕망의 기억이 마치 표백되듯 증발해버린존재의 마지막 모습인 광기에 대한 인식의 성찰이 또 다른 하나의 축인 것만 같다.

 

캘커타의 백인들은 철책 밖의 세계와 어떤 접촉도 시도하지 않으며 단지 글로, 전해들은 소문과 추측된 정보들로 그 외부를 이해하려 할 뿐이다. 특히 문둥병으로 상징되는 그들 백인사회의 외부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부영사의 라호르에서의 사건과 관련하여 자신들보부터 그를 소외시키거나 한 존재에 대한 왜곡의 정당한 수단처럼 활용된다. 이 백인 무리의 배타성은 철책 안에 자신들을 가둔 일종의 유폐(幽閉)여서 그들은 라호르의 사건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캘커타의 백인들에게 부영사는 라호르의 사건을 재차 설명한다. 라호르 그건 희망의 한 형태였다. 여기서 라호르라는 부재의 상징적 언어는 구체적 상상의 형상을 하게 된다. 샬리마르 정원에서의 총질이라는 파괴적 사건은 희망을 일궈내기 위한 하나의 폭발, 시쳇말로 새로운 세계를 위해 거쳐야만 하는 파괴였음을.

 

자신 안에 철저하게 유폐된 갠지스강 밤 아래 노래 부르는 걸인 여자, 파괴, 죽음이 녹아내리기를 기원함으로써 즐거운 행복을 느꼈던 부영사, 캘커타 대사관과 프린스오브웨일스가 있는 백인무리들의 섬 속 별장을 오가며 유배자의 눈물을 흘리는 대사부인 안-마리, 이들 모두 오래된 상실의 고통으로 파괴되어 유폐된 인물들의 피할 수 없는 현실적 측면에 대한 이해를 대변하는 것일 게다. 파괴되지 않고는 결코 수리 될 수 없는 견고한 백인 사회의 부조리를 대상으로 한 깊은 고통의 앎(공감)에 대해서.

 

이들은 각자의 상징적 표상을 지니고 있는데, 유일한 단어 바탐방만을 말하는 갠지스강 걸인 여인의 밤 노래, “고독하고 음울하며 역겨운 행위에 대한 기억을 찢는 듯한 상처를주는 인디애나 송을 휘파람 부는 부영사, 권태와 습기처럼 이를 지워버리고자 할 때 안-마리가 치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번역자인 소설가 최윤의 해설처럼 수리 불가능한 고통 앞에서치루는 어떤 비장한 전환을 향한 예고를 감지케 한다.

 

이 소설은 특히 뚜렷한 세 축을 담당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발하는 지극히 분산 파편화되고 절약된 언어들을 짜 맞추고 유추하며, 독자는 인간 존재가 겪는 고통의 깊이와 결코 스스로 부패하여 멸실되지 않는 견고한 백인 사회의 부조리한 시선들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뒤라스 문학만이 주는 독특한 매혹이자 즐거움의 요소일 것이다. 상실과 파괴, 눈물, 그리고 욕망과 광기, 사랑으로 집약될 수 있는 출구 없는 인간 존재의 비극성을 설명될 수 없는 재현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어떻게 그것을 전달하려 애썼는지를 어렴풋 읽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모든 존재는 존재의 고통을 일깨우는 사건들을 통해

새로운 인식에 눈을 뜨며 존재적 변화를 겪는다.” - 옮긴이의 말에서

 

附記

텅 빈 테니스장을 둘러싼 철책에 기대어진 채쓸모없이 버려져있는 대사 부인 안-마리 스트레테르의 여성용 자전거 이미지는 뒤라스의 물질적 삶, 몸의 말에 대한 그 어떤 고통스러운 믿음을 떠오르게 한다. 내겐 이 소설의 모두를 배제하고라도 건지고 싶은 소설 속 이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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