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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여름 2024 ㅣ 소설 보다
서장원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6월
평점 :
계절마다 간행되는 『소설보다』는 내게 한국 문학(소설)을 체감하는 하나의 작은 통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작가들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품고 있는 언어와 그 개념에 대한 의미의 틈이 벌어졌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을 보는 관점, 관심사, 시대가 앓고 있는 현상들, 등등. 그렇다고 근대적 이해에 도전하는 모든 개념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보수적 편협성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유토피아를 꿈꾸는, 현실과 불화하는 희망의 전사이기를 그만 둔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때문에 나는 내 벌어진 개념의 틈을 이들의 연결하려는 노력과 지혜로부터 배운다.
서장원 작가의 「리틀 라이프」와 예소연 작가의 「그 개와 혁명」 두 작품은 이러한 생각(개념과 의미의 틈)을 하게 골똘하게 만들었는데, 전자는 그 어느 시대보다 강력해진 타자의 시선이 개인 삶에 작용하는 영향이 비대해졌다는 것에 대한 것이고, 후자는 바로 그 벌어진 간극이 틈새가 아니라 의미작용의 변화라며 어떤 유대의 가능성을 주시하게 했다. 이와 달리 함윤이 작가의 「천사들(가제)」은 두 작품과 결이 다른 익숙한 주제로서 이별과 상실을 마주한 존재의 애도와 회복의 힘에 대한 것으로 여겨졌다.
■ 예소연 작가의 「그 개와 혁명」
이번 여름호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예소연 작가가 이끈 것이고, 그 호감의 정체는 조금씩 성장해가는 내적 단단함 속에 내재된 어진 마음의 인물이 어른거리고 있다는 내가 간직한 인상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작가의 작품을 접한 것은 『소설보다 2023, 겨울』호에 실린 「우리는 계절마다」에서 인데, 이 소설의 문장에는 “그 이상한 낙차” 라는 ‘불가해한 타자의 힘과 벌어진 간극이 발산하는 견디기 힘든 그 무엇’을 의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개와 혁명」은 바로 이 낙차, 간극의 이해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암으로 죽음을 향해 있는 아빠 ‘태수 씨’는 58년생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인물이다. 아마 화자인 맏딸 수민이 듣고 자랐던 노동가치니 혁명이니 하는 “무언가 도모하는 말”들이 시대착오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물질적 풍요와 소비주의에 안주한 지금의 세대에게 이러한 말처럼 낯선 것도 없으리라. 아마 이 시대적 언어를 에워싸고 현재의 삶에서 이것들이 말 되어야 할지 아닐지에 대한 설득의 이야기라면 이 소설은 무척 재미없었을 것이다.
“남자가 무조건 집을 해 와야 한다는 게 요즘 여자애들 생각이니?”, ‘요즘 여자애들’, 태수씨의 범주화된 언어들이 벌여 놓은 간극, 수민은 태수씨에겐 치열했던 삶이 있다면 자신에겐 참고 견디는 방식으로 이어져 온 삶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한 사람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안다. 두 부녀는 함께 울고 웃으며 사랑을 확인하며,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뜻, 의지, 그런 것들”의 동일한 서로 다른 언어임을, 그래서 언어의 벌어진 틈이 이어진다.
소설은 “죽음을 버티면서 삶을 버티는 행위로써” 계획되었던 맏딸 수민이 상주로서 태수씨의 장례식을 치루는 한 바탕 즐거운 소동으로 대미를 장식하는데, 아빠 태수씨의 언어로 수민이 “우리의 적은 제도잖아”라고 발설하는 장면은 서로 다른 정치적 감정이 변화하는 시대의 다른 언어의 합일같아 영정 사진을 보며 웃는 수민과 같이 나도 활짝 웃었다. 세대의 차이를 웅변하는 서로 알지 않으려는 세상에 연결의 지혜를 말하는 슬프지만 경쾌한 이야기로 내게 남아 있을 것 같다.
■ 서장원 작가의 「리틀 라이프」
소설은 “퀴어 프렌들리한 콘셉트”를 내세운 빈티지 의류를 거래하는 온라인 중개회사에 입사한 남성 트랜스젠더 토미를 통해 이 세계에 벌어진 인식의 틈을 보게 한다. 예소연의 작품이 언어와 의미의 틈을 말하고 있다면, 이 작품은 인식과 감정의 틈을 생각게 한다. 또한 겉모습이라는 시각적 물질성으로서의 인간이 마치 세계의 존재조건처럼 작동하는 세계가 또다른 틈처럼 보인다.
길거리에 빈티지 의류를 멋스럽게 차려입은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올린 동영상으로 회사를 홍보하는 소셜마케팅 팀 오스틴이란 인물은 164센티미터에도 미치지 않는 작은 키로 외모가 멋지지 못한 남자다. 자기 연출에 뛰어난 남자로서 뭇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만 매혹을 일으키는 존재는 아닌 것이다. 화자인 토미는 트랜스젠더 남성으로서 미약한 동지애를 느낀 동료로 가까이 한다. 한편 트랜스젠더인 토미는 성전환을 위한 탑 수술만 마친 아직 완전한 신체적 남성으로의 전환을 한 상태가 아니다. 그는 퀴어 퍼레이드 행렬의 잘 다듬어진 남자들을 서글픈 심정으로 지켜보며, “그들처럼 웃통을 벗고 싶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이 성소수자로 불리는 트랜스젠더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나는 오스틴, 토미로 대표되는 인물을 통해 시사하는 그들의 갈망인 매혹하는 존재, 즉 타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존재로서의 욕망에 주목했다. 경쟁의 승패가 외적 이미지로 갈리는 세계에 잠식당한 세상이다. 인터뷰이와 스캔들에 휘말림으로써 정직을 받게 된 오스틴은 자신의 콤플렉스인 신장을 늘리기 위해 사지연장 수술을 하고, 화자가 전 여자친구 혜령에게 성전환 헐리웃 배우의 트랜지션 시기에 대한 토를 달며 외모(신장)가 성공의 한 요소임을 말하는 장면은 세태를 대변하는 것만 같아 씁쓸하다.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 속에서 당사자의 고통을 생각해보라고 얘기하는 이도 있을 것이겠지만 왜 이러한 지배적 시선에 길들여져야 하는가, 이러한 시선에 저항하고 다른 길을 개척하려하지 않는가를 생각해 보았는가라고 반문하고 싶다.
소설은 분명 “좋은 여자도 만나고요, 페미가 아닌 좋은 여자”처럼 오스틴의 여성 혐오 발언을 통해, 화자가 반감을 지니게 되는 지점을 알리고 있지만, 화자가 더욱 오스틴에 절망하는 이유는 그가 병원 침대에 누워 토미의 탑 수술을 인지하고 있었다며 “우린 그러니까, 전우 같은 거잖아요”라는 말에 “아니요...저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전혀 달라요.”라고 반발하는 장면에 더 시선이 간다. 아마 이 반발하는 마음은 성의 전환과 신체의 외형적 수술은 그 가치나 지향점에서 결코 같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일 것이다. 사실 쳇바퀴 돌 듯 퀴어 문제와 관련한 작품들은 한결같이 편견 없음이 편견이고, 편견 있음 또한 편견이라는 말로 외부 시선을 모두 싸잡아 비난하는 논조들로 가득하다. 물론 타자가 겪는 감정적 고통에 대한 섣부른 예단적 이해가 무례일 수 있다. 그렇다고 소설 속 혜령의 편견 없음이 오히려 몰이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이기적인 발상인 것만 같다. 화자는 이러한 생각을 “너무나 집요한 생각”이라 말하고 있지만, 자기 성찰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이 작품은 틈새를 연결하거나 매우기는커녕 그저 그 균열의 빈 허공만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작가의 의도와 다른 오독이라면 좋겠다.
■ 함윤이 작가의 「천사들(가제)」
이 단편 소설의 제목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말로서 ‘가제’가 붙었는지, 아니면 소설 속 세 조로 나뉘어 연기되는 단편영화의 각본이 미완결 상태임을 말하는 것인지, 아무튼 소설의 제목은 소설 속 영화 각본의 제목이기도 하다. 화자 ‘나’ 는 친구 항아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다섯 시간의 부산 여정에 오른다.
화자 ‘나’는 기차 여행 중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꿈속에서 항아와 함께 제작하는 단편 영화를 위해 세 사람씩 한 개조로 구성하여 캐스팅을 위한 오디션을 진행한다. 남녀 두 여인과 한 명의 천사로 이루어진 즉흥극이 조별로 연기한다. 그런데 오디션을 진행하기 전에 열 명이 참가한 것으로 화자는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아홉 명만이 참석한다. 화자의 생각에 사라진 한 명은 보이지 않는 어떤 미지의 존재로서 즉흥 극 속의 천사와 동형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 같다.
즉흥극의 내용은 이렇다. 사랑하던 연인이 어떤 갈등으로 인해 이별하려 할 때 이를 중재하는 것이 천사의 역할이다. 각 조는 자신들만의 각기 다른 내용으로 열연한다. 이때 보이지 않으니 그 존재를 지각할 수 없는 이별하는 연인들에게 직접적 화법이나 행위로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천사의 역할은 불가항력이지만 미세한 변화를 야기한다. 나는 이 소설에서 무대 속 천사와 화자가 꿈속에 느끼는 열 명 째 존재로서의 천사, 이렇게 두 명의 천사만을 인식했으나 작가와 인터뷰를 나누는 이소 작가의 해석에서 또 하나의 천사가 존재하고 있음에 뒤늦게 동의하게 되었는데, 화자가 꿈속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열차의 안내방송이나 철도 여객원으로 느껴지는 누군가에 의해 다시금 꿈의 진행을 돕는 어떤 힘으로서의 천사다.
이 천사의 존재를 화자는 장례식에 온 선배에게 묘사하는 데, “서로 엉겨 붙는다, 나뉘어 떨어진다. 수면으로 올라가면 사라진다. 드물게 잔 밖으로 튀기도 한다. 밖으로 튄 방울은 손등에 스민다.”고 유리잔 속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기포들에 비유한다. 그리고 화자는 항아와 함께하는 오디션의 캐스팅이 종료되기 전에 꿈이 종결될까 안절부절하며 종착역에 이르기까지 집요하게 꿈속으로 향한다. 어쩌면 이 두 제재에 내재된 연약한 소통이 이 소설의 어떤 애절한 애도의 감정들을 견인하고 있는 것이라 느꼈다.
사실 이 작품은 두 작가의 인터뷰가 아니었다면 많은 것을 놓치고 읽었을 것 같다. 나와 너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자잘한 사건들, 이것들에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어떤 미지의 힘, 그것은 소설 속 화자의 애도의 감정일 수 도 있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 작가가 말하는 ‘시절 인연’일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리움과 인연에 대한 아스라함이 한 편의 기차여행 속 꿈결처럼 그려진 아름다운 작품으로 기억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