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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하는 이카로스 - 20세기 서양 문학과 문화
박설호 지음 / 울력 / 2016년 9월
평점 :
이 책은 유폐된 소시민적 무관심과 무능력을 깨워 댄다.
‘20세기 서양문학과 문화’를 기저(基底)로 한 예술비평이자 역사비평을 찾은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논의 대상으로 삼지 않거나 아예 말하기를 중단한 사유와 언어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고 해야겠다. 저자 ‘박설호 교수’의 이 책에는 ‘베르톨트 브레히트’나 ‘크리스타 볼프’를 제외하고는 국내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거나 아예 소개조차 되지 않은 작가와 작품들이 발하는 목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 책은 총 4부로, 14 편의 문학, 역사 평설로 이루어져 있다. 표제인 ‘비행하는 이카로스(Ikarus)'의 신화는 2부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지고 있으며, 그것은 시대성과 개인의 갈망에 따른 동일 신화의 유형 연구를 기초로 인간 역사 인식의 전환을 발견하는 여정이다.
또한 더 이상 ‘희망’이나 ‘이상’에 대해 말하거나 꿈꾸지 않는 세계라는 이해에 터 잡은, 더욱이 현실이라는 주어진 조건에 반항하는 이들의 일탈에 눈을 흘기며, 혐오와 배제를 요구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여전히 희망으로서의 저항과 시대의 자기비판을 일깨우는 사유로의 초대이기도 하다. 아마 살아가는데 당장 필요한 ‘도구적 지식’에만 매달리는 오늘의 현상도 이러한 시선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지식은 개인의 이해를 떠난 공동체와 사회, 국가, 삶의 전반에 대한 어떤 사안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해주지 못한다. 아마 이렇게 환경 순응적 인간이 된 사람들이 이룬 집단이 바로 지금의 한국 사회이지 않을까? 그 어떠한 비전도 없으며 오직 눈앞의 자기 이익에 따라 갈팡질팡하는 현재의 정치권력의 작태가 사회경제적 현안 문제에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요인에 기인하는 것일 게다.
책의 1부 <망각된 독일 문학>을 여는 20세기 전반, 1차 대전과 2차 대전이라는 증오와 혐오로 뭉쳐진 비참한 시대를 살았던 독일 작가 ‘B. 트라벤’은 내겐 생소한 이름이다. 1919년 뮌헨혁명정부의 주도세력으로 혁명재판소를 위한 준비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했던 혁명가이자 문인이다. 군주정을 옹호하는 귀족세력인 백위군은 바이마르 공화정 수립을 극렬하게 방해했다. 백위군에 체포되어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 대기를 하던 중 탈출하여 멕시코의 외진 촌 막에 은거하며 자신의 이름과 거주지를 숨기고 사회에 순응해 나가는 소시민적 인간 유형과, 신분증, 신원조회, 각종 증명서로 표상되는 국가의 통제와 감시체가 일상화되는 관료주의적 전체주의화에 혹독한 비판을 가했던 문명비판 예술가다.
B. 트라벤이란 이름에 대한 억측은 그의 사후에 미망인 ‘로자 엘레나 루한’에 의해 밝혀졌는데, ‘레트 마르트’가 본명이며, ‘리처드 모허트’ 등, 여러 필명으로 활동했음이 드러났다. 이렇게 자신의 고정된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며, 신분을 철저히 숨긴 채 활동한 이유는 그의 다음의 문장으로 명료하게 규명된다.
“정신적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자에게 사람들은 이력서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례한 짓이다.” -25쪽에서
예술가의 이름은 반드시 권위적 선입견을 조장시키기에 궁극적으로 예술의 고독하고 어려운 정도(正道)를 배반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예술가의 명성에서 비롯되는 권위의식을 사장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그것은 “문화산업의 권력을 파행적으로 확장시키게 하고 거짓된 권위를 창출하는데 결정적 이유”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자신의 이름을 죽을 때까지 숨긴 이유이다, 공정한 비평과 예술의 발전을 위해 가혹할 정도로 자기 성찰을 되풀이한 고결한 정신을 지녔던 한 예술가를 발견하게 된 것은 정의가 사라진 오늘의 세계에서 단비(甘雨)를 맞이한 느낌이다. 예술가의 이력부터 찾아보는 감상가의 체제순응적인 무의식적 습관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 속에 위치한 존재들임을 환기시키는 체제 이익의 주체인 자본주의를 냉혹하게 갈파한 『시에라 마드레의 보물』 , 『백장미』 등을 남겼다. 이에 대한 소개와 비평적 독해는 책에 미루기로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작품 「부상당한 소크라테스」는 거짓에 숨어든 자의 진리를 말할 진정한 용기에 대한 비유로 많은 책들에서 인용되고 있는 국내에도 제법 알려진 작품이다. 브레히트는 기원전 432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했던 소크라테스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며 그가 살지 않았던 기원전 480~477년 사이에 발생했던 페르시아 전쟁을 무대로 삼고 있다. 브레히트는 “역사적 사실의 기술보다는 과거 속에 은폐된 어떤 주제상의 문제를 밝히는 것이 예술의 책무라 생각”했던 까닭이다. 이 작품은 지배자들의 기득권과 이권놀음인 전쟁에 죽음을 불사하며 참전하는 소시민들을 길들인 독단의 이데올로기라는 잠에서 깨어날 것을 촉구한다.
아마 애국심이라는 맹신과 허위의식으로부터 심리적 방어벽을 형성하고 있는 맹목적 몽니를 허물기 위한 자기 인식의 전환에 대한 고뇌였을 것이다. 무지의 자궁으로부터 진리를 출산시키는 자로서의 소크라테스는 적절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작품의 소개에는 악처로 왜곡되어 설명되는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를 진리를 발견하는 산파 역할의 주체로 재발견함으로써 ‘선입견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자기성찰의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인 소시민적 무심성과 무관심과 맹목성으로부터 어떻게 깨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과 맞닿아 있다.
이 책의 표제이듯 저술의도를 관통하는 이카로스 신화의 시대적 장소적 변화에 따른 신화수용의 양상을 통해 시대적 갈망들을 비교분석하는 2장으로부터 주어진 역사적 상황에서 문학과 예술 작품이 인간 경험을 어떻게 오늘의 우리들에게 드러내주는가를 읽게 된다. 신화 및 역사비평가인 ‘귄터 쿠네르트(1929~ )’는 “역사는 신화가 변형된 어떤 형체로서 협의 가능한 마지막 신화”라고 역사를 삼킨 신화를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역사적 사실에서 인과율의 어떤 사슬을 찾으려하고 합법칙성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과거 신화에 나타난 고대 유형으로서 숙명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즉 “역사기술이란 신화에 봉사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193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신화적 의미를 부여한 제3제국이라는 파시즘의 발생과 형성과정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비참성을 수정하기 위해 파괴된 민족 신화를 재구성하는 것에서 반계몽적 이데올로기의 특성을 보았던 이유일 것이다. 결국 그는 신화의 추상성에 내재한 교훈성과 날조된 허황됨, 그리고 가식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어떤 뜻을 존재하는 무엇으로 기어코 찾아내려는 인간의 조작욕구”를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다음의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지적 야수로서의 인간은 끊임없이 거짓된 합리성의 가상에 맹종하려 한다.” -116쪽
이처럼 “역사는 끊임없이 자신의 효용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미묘한 신화를 창출한다”(물론 이는 부정적 인식으로서 파시즘을 비판하기 위한 논거이다)는 사전 지식아래 이카로스 신화의 시대성에 따른 변조된 유형은 인간의 갈망, 쿠네르트가 지적하는 바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 장을 읽으며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원(原)-이론’의 역사적 수용을 통한 인간 사유의 변천기록을 떠올렸는데 아마 방법론의 동일 유사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신화수용사로부터 “인간 형상에 공통적이며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기본적 변모”의 발견 가능성을 지적했었다. 이카로스 신화의 간략한 원형은 이렇다.
이카로스는 아테네 출신의 기술자이자 예술가 다이달로스의 아들이다. 다이달로스는 미로 속에서 길을 찾는 방법을 아드리아드네에게 가르쳐주었고, 아드리아드네는 연인 테세우스에게 전하였다. 이로써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살해한 다음 미로를 탈출. 미노스 왕은 이에 격분,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를 미로에 가두어버렸다. 다이달로스는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하늘 위로 비행했다. 의기양양해진 이카로스는 지나치게 태양에 근접, 밀랍이 녹아 떨어졌다. 이카로스는 추락하여 바다에 빠져 죽었다.
- 121쪽, 「서양문학에 나타난 이카로스의 유형 연구」에서
기원전 1세기 ‘오비디우스’는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위한 비행에서 척도 내지는 절제 등이 관철되지 못했다고, 추락은 사랑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결과 때문”이라 평가했다. 또한 『변신 이야기』 에서는 청년 이카로스의 아버지에 대한 불복종으로, 조카 페르딕스를 질투로 살해한 아버지의 과거 범죄에 대한 응보라고 이카로스의 추락을 해석하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의 말년의 연작시 「슬픔」에서 자신의 비극적 고립을 이카로스의 처지에 비유하여 작가와 예술가가 겪는 삶의 고뇌와 해원이라는 주제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즉 고립된 예술가로 이카로스를 이해했다는 것인데, 한 인간에게 있어서도 동일 신화는 이렇게 다른 해석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화의 “계통발생론적 갈등의 흔적을 담은 개방적 텍스트”라는 발생 조건에 따른 욕구 변화로 초시대적 불변의 상을 읽으려 하는 것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것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14세기 기독교 교부들은 이카로스의 비행(飛行)을 “오만과 치기의 돌출행동”인 비행(非行)으로 만들어 기독교 교화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한편 괴테는 『파우스트』 2부 3막에서 파우스트와 헬레나 사이의 아들로서 오이포리온(이카로스)을 등장시키는데, 파우스트의 이상과 헬레나의 아름다움이라는 두 극단의 특성을 중개하려는 존재이지만 그는 이를 융합하지 못한다. 결국 그는 부모의 발 아래로 추락하는데, “자기파괴적 비상 욕구의 불가피한 실패성”을 그려내려 했을 것이다. 20세기 초, 1차 대전 후 독일 작가 ‘고트프리트 벤’은 이카로스를 맹목적 애국주의를 표방한 비행사들의 신랄한 비판 소재로 활용하기도 했으며, 1960년에 들어서서는 ‘볼프 비어만’에 의해 요절한 동료 혁명가 ‘루디 두츠케’의 비극적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불의한 권력에 포위된 노동 혁명가로 표상되기도 했다. “비극적 영웅으로 냉담한 세상을 미리 간파하지 못한” 존재의 상징이 된 것이다.
《 1560년경,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피터 브뤼헬(Pieter Bruegel) 》
어쩌면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 브뢰헬’의 유화작품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에 그려진 “끔찍한 파국과 세상의 냉담성 사이의 위화감 표현”만큼 오늘의 시대성과 맞닿아 있는 해석도 없을 것 같다. 화폭에는 세 사람이 그려져 있는데 어느 누구도 추락하는 이카로스를 주시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주위에서 발생하는 끔찍한 파국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 이들 소시민의 태도에서 슬퍼할 줄 모르는 무심함과 냉담함, 일상인들의 안이함을 지적하려 했던 것 아니었을까? 슬퍼할 줄 모르는 무능력, 아마 오늘 우리사회에 팽배한 동료 시민의 죽음을 비아냥거리는 저 무례함과 무공감이야말로 이러한 무능력의 단적 현상일 것이다. 물신 숭배의 도구적 이성에 매몰된 현대인들은 진정한 인식을 위한 지식에서 너무도 멀어진 까닭일 것이다. 나는 죽더라도 자유를 선택하기 위해 비상하는 수미일관한 모험가의 자세로서 이카로스를 읽는다. 오늘의 사람들은 이 비행과 추락을 과연 어떻게 해독하게 될까?
책의 3부는 독일 소설가 ‘유렉 베커’의 『브론슈타인의 자식들』을 역사적 범죄에 대한 수용의 실태를 살펴보게 한다. 나치의 패망이후 동서독으로 분리된 동독 진영에서 이뤄진 정부의 양태는 당대 한국사회의 해방이후 미군정의 양상과 흡사한 형태였음을 읽게 된다. 동독의 통치를 통제했던 소련은 정치, 행정, 사법, 경찰 등 정부요원을 나치 부역자들로 그대로 채워버린다. 결국 사회주의를 표방하였지만 국가권력의 행태는 나치의 파시즘이 그대로 연장된 것이었기에 동독 사회는 청산되어야 할 역사의 과오를 정리하지 못했다. 여기서 하나의 중대한 과제가 떠오른다. “자발적이고 처절한 자기반성의 과정을 통한 자기 잘못과 오류의 시정이 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정의도 없다는 것을 역사는 실증한다”는 것이다. 동독은 소위 ‘회복적 정의’가 실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동서독 공히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이후 양측 모두 단 한 번도 나치 범죄자에 대한 재판이 속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시즘을 물리친 것은 독일인이 아니라 연합군이 무력을 동원해서만 가능했다.”는 이 준엄한 문장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비장하다. 진정한 청산을 위해서 선결되어야 하는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일제 부역자에 대한 청산, 즉 동족을 배반하고 괴롭힌 친일 부역자와 그 후손들이 여전히 권력의 첨단에 서서 국가와 국민을 농락하고 있는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결코 역사에서 늦은 것이란 없다. 우리 또한 식민 조선에서 일제를 몰아낸 주체가 아니다. 미국의 무력에 의해 이루어진 해방이다. 동독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저 비열하고 후안무치한 친일 부역자 무리의 처단을 감행해야 할 것이라 믿는다.
끝으로 제 4부는 자연과학의 맹목적 욕구에 내재된 멈출 수 없는 갈망, 그리고 인간의 쾌락과 파괴 충동, 타인에 대한 폭력 충동의 동인인 경쟁 등 현대 인류사회를 장악한 비극적 세계관에 대한 거대한 환기를 말한다. ‘토마스 브라쉬’의 7개 극작품과 시나리오, ‘크리스타 볼프’의 『원전 사고』를 통한 이러한 과학 맹신주의의 일방성과 맹목성, 이상추구에 내재된 인류의 비극적 숙명을 일깨우는 글들이다. 결국 이 거대한 열네 편의 문화, 역사적 평설은 무지의 자궁에 갇혀 편협과 무감각, 무능력을 감지하지 못하는 소시민들의 안일성과 무심성으로부터의 탈출을 일깨우려는 고뇌의 흔적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이 저작은 “다른 시대와 장소의 범례들을 통해 우리에게 문제해결 능력을 연마토록” 안내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세뇌당한 인간의 병적 성향,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처절한 자기성찰과 비판이 따르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이 보다 나은 삶을 생각하기 위해 첫 걸음을 과감히 내딛을 용기를 가진 사람들에게 그러한 자기반성의 출발점을 위한 인식 성장에 분명 가치있는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이 사회는 이러한 언어와 사유를 말하지 않는다. 결코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언어는 주류에 도전해서는 안 된다는 기득권적 금기의식 때문일 것이다. 체제가 가르쳐 주지 않고 은폐하는 것에 훨씬 거대한 삶의 진실이 숨겨져 있다. 우리들은 그러한 것들을 알 필요가 있다.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 능력은 그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