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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합본 ㅣ 메피스토(Mephisto) 13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평점 :
은하계 버전의 천로역정(天路歷程)?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긴 제목을 한, 그리고 이의 후속편 5책을 합본으로 엮은, 작가의 말로 “지금 읽고 있는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책”이 바로 이 두툼한 1,235쪽의 책이다. 사실 이 책을 사두고서 첫 몇 페이지를 읽고는 책장에 꽂아두고 잊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 책에 별 한 개의 평점을 준 독자들의 푸념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소회들이 너무 재밌어서 다시 꺼내들어 내처 읽게 되었다.
한 독자는 ‘이걸 읽느니 전화번호부를 다섯 번 읽겠다’며 참을 수 없이 재미없어 치미는 화를 표현한다. 또 다른 독자는 ‘인생이 너무 지루하고 말이 안 되게 흘러가는 것 같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며 황당함과 지루함 그 자체라 혹평하기도하고, 어느 독자는 ‘이 책을 읽었다기 보다는 오기로 씨름 할 수밖에 없었’음을 토로하며 지루함과 인내의 독서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재치 넘치는 푸념과 비아냥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이를 상쇄할 만큼의 유머와 즐거움, 잘난척하는 인간 지성의 보잘 것 없음에 대한 해학의 문장들로부터 막대한 분량의 부담을 지울 수 있다, 더구나 가까운 지방을 히치하이커로 여행하려해도 그 비용이 만만치 않거니와 상상 속 은하계를 책값만 지불하고 여행하는 것은 실익이 훨씬 큰 거래일 것이다. 본디 이 세계와 삶이란 것이 권태요, 끝없는 환멸 아닌 게 있던가?
아마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만물의 영장이라며 분별없이 으스대는 인간의 지적 오만을, 그 어리석음의 무한함을 까발리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를 노골적 경멸을 동반한 진지한 언어로 그 치부인 약점을 들춰내면 그 반발이 눈에 선했을 것이고, 해서 선량한 표정으로 풍자와 해학으로 우회하여 참을 수 있게, 나아가 미소 지으며 반성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꾸며냈을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슬프고 씁쓸한, 무수한 모순 덩어리인 인간과 인간사회의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것일 게다. 지구가 찰나(刹那)에 파괴되어 사라지는 어느 특정 목요일의 한 장면을 보면 이렇다.
은하계 변두리 지역 개발 계획에 따라 지구를 관통하는 초공간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행성 지구를 파괴하려는 보고 행성의 공병함대 우주선단이 도착하여 지구인에게 철거실행을 고지한다. 이때 지구인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야단법석을 떨어대자, 보고인은 알파 켄타우리 행성 지역개발과에 지구 시간으로 50년간 공지했는데 알지 못한 지구의 야만적 생물체인 인간의 부주의를 나무란다. 이 장면은 인류사회의 관료제적 부조리와 인간의 지적 야만성을 비난하는 이중의 은유일 것이다. 익살과 해프닝과 유머로 긴장을 낮추며 피식거리며 웃다가 그 이면의 진실에 표정을 단속하게 하는 정말 뼈 때리는 이야기인 것이다.
인류와 지구 종말의 대참사를 묘사하는 실질적 문장은 오직 “갑자기 지구에 고요가 흘렀다.” 이다. 무슨 긴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저 사라졌을 뿐이니 말이다. 이 작품의 시작 문장도 이러한 관점의 읽기를 암시한다. “이 행성에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행성에 사는 대다수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불행했다”는 것이며, 그것은 “작은 녹색 종잇조각(달러貨)들의 움직임과 관련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는 “애당초 나무에서 내려오지 말았어야 하며, 그 자체가 엄청난 실수였다는 의견이 확산되었다”고 은하계의 고등 지적 생명체들 세계의 시선을 전하기도 한다. 급기야 “바다에서 나오지 말았어야”했다고까지 한다. 우주의 주인인 듯 행세하는 인간에 대한 자기 직시를 요구하는 조크이며, 신랄한 비난을 담은 유머다. 이러한 시작 문단의 해학적 분위기는 계속되는데, 가히 발칙하기까지 하다. “어느 목요일 한 남자가 이제는 사람들끼리 좀 잘해주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했다는 이유로 나무에 못 박힌 지 2천년이 지난 어느 목요일의 끔찍한 대참사”가 이야기의 발단이 될 것임을 예고한다.
인류와 지구는 파괴되고 사라졌다. 유일한 생존자인 아서 덴트는 친구인 베텔게우스 행성 출신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하 ‘은여히’로 표기함)》 이동 조사원인 포드 프리펙트 덕분으로 보고인 우주선에 탑승하게 되지만 곧 우주 공간에 버려진다. 공기가 없는 우주공간에서 생물체가 살아남을 무(無)에 가까운 확률에서 ‘무한 불가능 확률 추진기’로 운항하는 우주선 ‘순수한 마음호(號)‘에 구조된다.(책은 기꺼이 이 불가능속에서 마침 그곳을 지나갈 우주선의 확률을 제시한다) 이 책의 또 다른 측면에서 즐거움을 주는 요소인데, 인류 지식으로 이해 불가능한, 아니 황당하기조차 한 말장난으로 꾸며진 미래 과학에 대한 무한한 환상의 자극이다. 포드와 아서를 구조하는 순수한 마음호의 추진장치가 발견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범블위니 57 서브-중간자 두뇌의 논리 회로를 강력한 브라운 운동 생성기에 매달려 있는 원자 벡터 작성기에 연결하면 제한적 불가능 확률을 조금 얻을 수” 있다나 뭐라나 하며 상상을 무한하게 키워내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성찰과 보잘 것 없는 우주적 미물로서의 철학적 사유라는 굵직한 주제가 은닉되어 흐르며, 수십만 수백만 광년의 은하계 행성들을 누비며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의 초대를 통해 인간 지식의 초라함이라는 무지를 일깨운다. ‘순수한 마음호(號)‘는 은하계 항성 솔(태양계)의 반대편 나선 팔 다모그 행성에 주재하는 은하제국 정부의 대통령 자포드 비블브락스가 무한 불가능 확률 추진기로 운항되는 최초로 개발된 우주선을 탈취한 것인데, 그의 두뇌를 지배하는 그 어떤 욕망에 의해 ’마그라테아‘라는 미지의 행성으로 향한다. 여기서 우리들을 자극하는 케케묵은 물음이지만 그 명쾌한 답이 부재한 이야기가 출현한다.
마그라테아는 한때 행성을 만들어 은하계의 부를 끌어모아 흥성했던 행성이다. 그러다 은하계 행성간의 전쟁으로 경기가 위축되어 다시 은하계의 부가 모아질 때까지 긴 잠에 든 행성이다. 여기서 아서는 슬라티바트패스트라는 한 늙은이와 조우하게 되는데, 두 번째 지구를 만들게 된 사연을 들려준다. 물론 첫 번째 지구도 마그라테아 거주자들이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지구의 존속은 하나의 실험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실험이 막 종료되기 5분 전에 보고인에 의해 지구가 파괴되었기에 다시 실험에 착수하여야 되는 수고가 생긴 것이라는 얘기다.
그 사연은 이렇다.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주의 시원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삶과 우주와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한 궁극에 대한 물음’을 우주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컴퓨터 ‘깊은 생각’에게 묻게 된다. 깊은 생각은 답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곤 그 답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돌리는데 칠백오십만 년이 걸린다고 한다. 궁극의 물음에 대한 종국적 해답을 기다리기로 하고, 이윽고 그 시간에 이르러 깊은 생각은 “무지무지하게 엄숙하고 침착하게 42”라고 답한다. 여간 실망스러운 답이 아닐 수 없다. 작업 결과에 당황한 이들은 다시 묻는다. 칠백오십만 년의 작업결과가 겨우 그것이냐고. 컴퓨터는 말한다. “제 생각에 문제는 여러분이 본래의 질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라는 것이다.
궁극의 질문을 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진짜 질문이 무엇인지 알게되면 그 해답의 의미 역시 알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다. 궁극의 질문?, 궁극적 해답을 위한 궁극의 질문? 깊은 생각은 이를 위해 새로운 컴퓨터는 “미묘하게 복잡한 유기체가 작동 행렬의 일부가 된 컴퓨터, 즉 유기체 스스로가 새로운 형상을 취하고 컴퓨터 안으로 들어가서 천만년짜리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가능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류(類)의 물음에 대한 답이 42! 라는 이 우습기조차하지 않은 칠백오십만년짜리 해프닝은 우리에게 뭘 알려주려는 것일까? 더욱이 이 조차도 인간보다 높은 지적 생명체인 생쥐가 지구의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하고 있었다는 전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궁극의 질문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 생쥐의 실험 대상에 불과했던 인류에 대한 조롱이다. 저 광대한 은하계를 여행해보라! 그조차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뭐 그렇게 으스대는가? 따위의 비난이기만 한 걸까? 이 장면에 대해서도 그럴싸한 해석을 내리지 못하는, 우주 역사의 원인과 결과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알 턱이 있겠는가? 하~아, “인생이란 그런거야”라는 자조적인 운명론자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인가?
내게는 매우 중대한 조연으로 보인 인격을 지닌 로봇 ‘마빈’의 존재인데, 순수한 마음호의 탑승자들에 조력하는 로봇이다. 마빈은 인간을 비롯한 지적 생명체들과 이들에 의해 제작된 모든 자동화된 시설들, 지능체인 컴퓨터들의 작동과 행위, 그 사고(思考)의 얼개에 대해 시니컬한 관점을 지니고 있다. 유일한 지구 생존자인 아서를 궁극의 질문을 하기 위한 새로운 컴퓨터 제작을 위해 그의 뇌를 깍뚝썰기해서 매핑하려하는 위기가 발생한다. 아서 일행을 체포하기 위해 블라굴론 카파 행성의 경찰들이 공격을 가하다 갑자기 그들 전체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들로부터 벗어난 아서 일행은 순수한 마음호로 돌아오는데, 그때 차가운 먼지 속에 고개를 처박고 누워있는 마빈을 발견하게 된다. “마빈 뭐하는 거야?”, “절 아는 척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순수한 마음호 옆에 나란히 서있는 경찰 우주선을 가리키며 마빈은 저 우주선이 자신을 미워했다며 우울한 이유를 설명한다. 너무 지루하고 우울해서 경찰 우주선의 컴퓨터와 자신을 연결하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자 그 컴퓨터가 그만 자살해버렸다는 것이다. 마빈이 은하계의 모든 것을 관찰하고 사유한 것, 그 궁극의 결과는 생존(작동)의 이유가 없다는 것 아니었을까? 아서 일행을 공격하던 경찰들이 갑자기 사망했던 이유가 바로 마빈의 허무주의에 세례를 받은 경찰우주선 중앙 컴퓨터의 죽음이었음이 밝혀지는 대목이다. 마빈의 활약을 주목해야하는 충분한 동기가 되는 장면이다.
《은여히》에는 은하계의 주요 문명 단계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뚜렷하고 확연한 세 단계”를 거치는데, 그것은 “생존, 의문, 세련의 단계”로서, “어떻게, 왜, 그리고 어디의 단계”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떻게 먹을까? -> 우리는 왜 먹는가? -> 어디서 점심을 먹을까?’ 와 같은 질문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고. 지금의 인류는 어느 단계에 있는 것일까? 여전히 우리들은 왜라며 물음의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으며, 이 단계를 넘어선 그 어떤 의문도 불필요해진 여유 넘치는 풍요와 세련됨의 세계로 이행 할 수 있을까? 40여 년 전에 방송되고 쓰여진 이 오래된 코미디-SF 작품은 여전히 그 상상 속 사유와 인문학적 물음의 측면에서 실효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인간이 지각하고 있는 우주에 대한 토대이론은 아마도 다중우주와 시뮬레이션 이론이 배경인 것 같다.
아무튼 혹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렇게 지루해서 인내를 요구하는 것만도 아니며, 전화번호부만큼 의미없는 숫자들이 배열된 그런 책도 아니다. 어떤 책을 읽으면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앎이란 단어의 과장된 확장이며, 부당한 일반화다. 오히려 물을 수 있는 것만큼 보인다는 것이 더욱 명쾌한 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독자 자신이 평소 지니고 있던 체화된 의문들을 담고 있을 때 그 의문의 양적 질적 크기만큼만 보이는 것이 아닐까? 지금 여기에, 시대의 지배적 습관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이들에게 이 책은 분명 많은 상상의 사유(思惟) 지대로 안내할 것이리라 믿는다.
“이 우주가 무엇을 위해 있고, 또 왜 이곳에 있는지를 누군가 알아낸다면
그 순간 이 우주는 당장 사라져버리고 그 대신 더욱 기괴하고 설명 불가능한
우주로 대체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있다.”
- 더글러스 애덤스,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참조】 이야기를 끌어가는 중심인물에는 유일한 지구 생존자인 ‘아서 덴트’가 등장한다. 이 이름은 『천로 역정(The Pilgrim's Progress)』을 쓴 ‘존 버니언(John Bunyan)’에게 아내가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온 두 권의 책 중 하나인 『평범한 사람이 하늘에 이르는 좁은 길』의 저자와 같다. 때문에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의 저자 ‘더글러스 애덤스’는 이 구원을 향한 순례길에서 이 작품을 착안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은여히』는 행성 지구를 넘어 은하계까지 그 시야를 넓힌 범우주적 구도의 길을 향한 걸음을 쓰려했다는 데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사회의 무수한 부조리와 무지를 깨우치게 하며, 이 행성과 저 행성을 필사적으로 이동하며 영광의 문에 이르고자하는 여정을 담고있는, 그야말로 20세기판 ‘天路歷程’이라 읽어도 됨직한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이 글은 리뷰어의 생각일 뿐이지 그 어떤 기성의 해석과는 다른 것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