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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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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작은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을 완전히 처녀지대로 되돌려 놓는다.  지금까지의 역사기술 방식이나 역사관을 전복한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선형적 시간관념에 의해 일렬로 배열되어 필연성과 객관성을 갖는 역사법칙이 존재한다는 선형적 위계화의 역사를 비판한다. 여기에는 역사의 속성인 역사의 주체를 통해 쓰이고 가동되는 역사적 주체의 단일성과 자신의 모습에 따라 세계를 통합하려는 욕망, 즉 보편주의로 구성하는 단수의 역사는 소수의 역사들을 지우고 소수자의 삶을 망각의 어둠속에 밀어 넣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어떤 요소들이 동조하여 하나의 집합적 리듬을 만들어낼 때 그 리듬과 더불어 탄생”하는 것으로서의 ‘시간’개념에 대한 대결이다. 즉, 시간적인 동조의 요구, 시간적인 통제와 훈육을 통해 상이한 리듬의 신체를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통일하려는 힘, 그래서 자신의 시간 속에 타자의 리듬을 강제로 포섭하는 것으로서의 시간에 대한 대항만이 역사의 개념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견해이다.

즉 주체성을 장악한 자가 서로 다른 복수의 리듬을 하나의 척도적 중심으로 동일화하고 통합하여 자신만의 역사적 계열화의 선을 만들어내기에, “복수의 리듬들의 차이를 새로운 차이의 생성자로써 긍정하는 역사적 계열화의 선”으로 대항함으로써만 단일성, 통일성에 포함되지 못했던 지워지고 배제된 역사의 기억을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저술은 역사가 담을 수 없는 사건이지만 그렇다고 지워버릴 수도 없는 사건이란 의미에서 ‘역사적 이성’의 무능력 지대에 놓인 것들을 이야기하는 역사, 바로 그러한 역사담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소수자들이 역사 속에서 올바른 가치를 인정받고 제대로 된 지위를 할당받게 만드는 단순한 양심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역사화 될 수 없는 사건을 역사로부터 돌발하게하고 이로써 역사 안에서 다른 돌발의 지점들이 만들어지도록 촉발하는 역사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소수자의 역사’에 대한 정의는 “그때그때마다 지배적인 척도에 반하여, 척도적인 것과 대결하며 새로운 것을 창안하려는 성분”으로서의 ‘진보’와 결합하여, 어떤 세계로 하여금 내부에 안주할 수 없도록 그 내부를 끊임없이 동요시키고 벡터를 작동시켜 지배적인 것, 주류적인 것, 익숙한 것들을 전복하거나 변형하는 힘이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전태일 분신 사건’이나, 민주화운동이라는 주류의 역사에 포함되기 전에 불리던 ‘광주사태’그리고 어떤 민족의 이름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저항의 지대를 상징하는‘재일(在日; 자이니치)’은 ‘거대한 반역사적 돌발’로서 다름 아닌 소수자의 역사인 것이다.

바로 이 저술은 소수자의 역사, 또한 새로운 리듬으로서 계열화 된 선을 잇는 역사들을 수록하고 있는데, 근대와 비근대의 단선이 가져온 비시간적 세계와 시간적 세계를 이원화로 인해 근대이전의 한국사회가 가시화할 수 있었던 것을 볼 수 없게 되어버린 사건으로서‘세시풍속’의 미신으로서의 퇴출에 대한 고찰이나, 근대적 시간관이 문명화와 진보란 이름으로 삶의 깊숙한 곳으로 침투하여 시간 감각이 선험적 형식으로 대체되어 이질적인 삶의 요소들을 하나의 시간적 좌표계 안에서 통일하고 통합하여 구속하는 현상, 그리고 근대적 역사개념의 출현이 가져온 민족과 국민이라는 이중적인 역사적 주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통찰이나, 생명정치학으로서 작동한 가족계획이라는 국가적 관리전략 즉 권력기술에 대한 새로운 욕망의 성찰, 국가의 군대가 자국 국민들을 향해 총을 쏘며 학살한 비극적 사건, 대중과 감정의 정치학을 이야기하는 현 정권의 몰염치와 무지와 천박함에 대한 비평, ‘카피 레프트 운동’을 포함하는 FTA가 가져올 생명체 고유의 순환이득을 배타적 잉여가치로 변형시켜 자본의 소유물로 만드는 사태에 대한 경고, 이주자들을 착취하는 일반주민들의 경찰시선을 이용한 폭력 등이 다뤄지고 있다.

볼 수 없었던, 아니 보이지 않았던 역사들을 가시화한 이들 역사의 기술 만으로서도 이 저술은 탁월하고 독보적인 지위를 갖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지금껏 접하지 못했던 역사분석 도구로서 ‘개념적 배치’라고 하는 “하나의 단어가 다른 단어들을 구성 요소로 삼으며 일정한 의미를 체계적으로 형성하는 것”임을 통해, 신문 - 독립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 에 출현한 용어의 반복적인 계열화의 양상으로 역사관련 용어들의 의미변화를 추적한 근대영토의 개념이나, 지나간 단순한 사건들의 기록이라는‘사기(史記)’가 아니라 근대적 역사개념의 출현, 그리고 민족과 국가 개념에 이르는 역사적 인식의 도출은 앞으로 우리들이 역사를 성찰하는 방법론으로서 시사하는 바가 중대하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이끈 주제가 있는데, 제국주의 일본이 ‘동아협동체’, 또는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민족적 경계를 넘어 연대하자는 구호에 대해 “과연 식민지 인민은 어떻게 말하는가?”하는 것에 대한 방법론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억압받는 소수자가 권력을 손에 쥔 다수자에게 어떻게 항변할 수 있는가와 어떤 의미에선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특히 김사량의 소설 <덤불 헤치기>, 한설야의 소설<대륙>의 표현방식과 주제를 통해‘내파(implosion)전략’, ‘횡단 전략’, 동일시와 모방의 전략에 대한 설명은 이해의 체화에 효과적으로 기여한다.

저자의 집필 기대처럼 범람하는 흥미중심의 대중 역사서에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역사, 서발턴(subaltern)의 역사, 다수자들이 잊고 있는 것,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고 촉발하게 하는 역사서로 읽혀진다. 거대한 폭력의 힘에 의해 기억의 표면에서 지워진 것들, 국민적 기억의 망각에 숨겨진 것들, 그리고 역사화를 둘러싼 힘과의 대립 양상을 급진적 양식에 담아 전달하고 있다.

역사의 이성이 무능력을 나타내는 지대에 갇혀있는 것들을 드러내고, 한편은 역사의 바깥으로 불러내는 역사, 돌발지점에서 만나는 모든 소수자들의 역사가 열정적으로 기술되어, 용기요, 반항이요, 자유요, 새로움이며, 다양성인 클리나멘(clinamen)으로서 끊임없이 해체되고 다시 조성되는 영원도 없고 절대도 없는 정신으로 충만한 저작이며, 우리 자신의 삶을 외부로 잡아끄는, 즉 안일한 내부의 이탈을 촉발시킴으로써 새로운 민중의 도래를 요구하는 저술이다. 뜨고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우리의 눈을 비로소 開眼시켜주는 근현대사의 걸작이다.

[註]서발턴(subaltern): ‘그람시’가  감옥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를 지칭하는 용어로 대신 사용하였으며, 이탈리아 남부 시골농민들의 비조직적 집단으로서, 헤게모니에 종속되어 비통일적이며 결과적으로 수동적으로 위치될 수밖에 없는 집단을 의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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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연장통 -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
전중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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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본성에 대한 탐색은 인간중심의 세상이 유지되는 한 끊임없는 규명의 도전이 지속될 것이다. 이 저술 역시 “인간 심리의 모든 측면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서 진화심리학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대중에게‘진화심리학’이라는 용어는 이제 그리 낯선 분야가 아니다.
표제인‘오래된 연장통’이라는 은유는 바로 이러한 진화심리학이 지니는, 즉 “우리의 진화적 조상들이 수백만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부딪혔던 여러 적응적 문제들을 잘 해결하게끔 자연선택이 설계해낸 다양한 심리적 기제들의 묶음”의 다른 표현방식이다.

진화심리학하면 항상 논란이 되는‘본성 대 양육’, 다시 말해 유전자 결정론과 환경결정론의 문제가 대두되는데, 저자는 진화심리학은 유전자가 아니라 심리적 기제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유전적 결정론을 피해가지만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진화심리학만으로 모두 해석하기에는 여전히 미흡한 구석이 있음을 일단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이 저술은 진화적 접근을 통한 인간 심리, 인간의 본성을 해석하고 있다. 특히‘생존본능과 종족번식’이라는 대략 1만 년 전에 인간의 뇌(수렵시대와 동일한 우리 현대인의 뇌)에 프로그램 된 원초적 기제(機制;psychological mechanism)하에 인간의 모든 행동은 유발된다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이 이론에 근거하여 오늘의 우리네 일상의 행동적 양식을 흥미로운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이들의 이론적 근거와 실험적 입증을 하고 있는데, 이미 많은 진화심리학의 대중적 저술들에서 소개된 내용들을 재차 확인하는 과정이 되기도 하여 진화심리학을 처음 대면하는 것이 아닌 한 부분적으로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다만, 저자의 집필 의도와 같이 다윈주의 문학비평, 진화미학, 법의 진화적 분석, 다윈주의 문화연구....소비의 진화적 분석처럼 사회의 제반 현상을 통찰하는 현상 분석적 토대로서 그 적용범주의 확장과 같은 가치기반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유용한 성찰로 재조명하는 것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할 수 도 있다.

현대 인간의 본성이 수렵시대의 심리적 기제에 기반하여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야한 동영상에 등장하는 여성의 모습을 감상”하는 남성의 두뇌가 가상의 이미지와 실제를 구분치 못하고 아무런 실익이 없음에도 “심장박동수를 높이며 발기”하는 현상을 지적하며, 여전히 현대인간의 본성은 수렵시대의 그것을 탈피하고 있지 못함을 주장한다.
그리곤 생존의 유지와 종족 번식이라는 원초적 심리기제가 작동하는 현대의 제반 행동특성을 소개하고 있다. 예로서 매력적 이성에게 끌리는 것이라든지, 외인 혐오증과 자민족 중심주의, 과시적 소비행태, 매운 맛을 즐기고, 휘황찬란한 가을의 단풍 빛, 털 없는 유일한 유인원인 인간, 동성애 유전요소가 여전히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이유들 등 매혹적이고 실제 궁금하게 여기던 우리들의 행동원인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 중 몇 가지 납득하기 어려웠던 행동 양식으로서 누이의 자식에게 재산을 상속시키는 남성의 행위나, 실용적 이득이 존재할 것 같지 않은 꽃을 선물을 하는 남성과 이에 감동하는 여성, 가임기에만 외도를 하는 여성의 심리를 설명하는 부분은 ‘부성의 불확실성’에 대한 대비, ‘유용한 자원을 얻을 수 있는 단서’로서의 꽃, 실질적 유전적 이득을 얻기 위한 여성의 선택이라는 설명에 어느덧 진화심리학의 과학적 논리성에 매료되게 된다.

특히 주목하게 하는 대목이 있는데, ‘값비싼 선호이론(costly signaling theory)’이란 것으로서,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나타난 이건희씨가 수 백 만원에 달하는 귀마개를 하고 있는 것은 “불필요한 것을 유지할 정도로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철철 넘친다는 것을 과시”함으로써 “바람직한 배우자 자질을 광고”하는 본능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 과잉의 소비행태는 자본주의 속물주의의 탓이 아니라 인간본성의 자연스런 표현이라는 것으로서 과학지상주의가 보이는 철학부재의 우려스러운 한 단면의 대표적 실례라 할 수 있겠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수공작의 화려한 꼬리의 예를 이렇게 확장시켜 동일화 할 수 있을까?

한편 자연선택과 적응의 산물인 원초적인 심리적 기제로서가 아니라 심리적 적응들에 우연히 딸린 ‘부산물’, 즉 진화적 적응인 본능의 산물이 아닌 것으로서의 종교나 음악의 출현에 대한 해석은 학구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신선한 주제로서 읽혀지며, 또한 피셔의‘자연선택의 유전적 이론’에서부터 ‘냉각기구 가설’, ‘혈연 선택이론’, ‘해밀턴의 신호가설’까지 진화심리학을 지탱하는 화려한 이론들의 배경과 내용의 설명들은 자칫 흥미중심의 가벼움을 진중한 지식의 습득의 장으로서 균형을 잡아준다.

앞으로 진화심리학이 심리학을 대표하고, 세상의 모든 현상을 지배하는 지식의 토대가 될지는 모를 일이다. 더구나 ‘빈 書板’과 같은 환경결정론이 인간행동을 해석하는데 많은 부분에서 취약함과 오류를 노출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진화심리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인간의 모든 행위가 생명유지와 짝짓기, 번식행위로만 설명되지도 못한다. 다만 우리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게하는 유효한 도구로서 진화심리학을 이야기하는 ‘오래된 연장통’은 유익하고 흥겹고, 생각게 하는 저술임에는 분명하다. 저자의 말처럼 21세기 지적 패러다임으로서 현재 진행형인 다위니즘을 통해 우리 마음의 본능과 욕망의 진짜 얼굴을 만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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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The Gorgon's Look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0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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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은 사람들의 얼굴사진이 전시된 사진전시회장으로 작품은 시작된다. 눈을 감고서는 바로 그 눈을 감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이 사진전은‘보이는 나와 만들어지는 나’라는 라캉의 거울이론을 떠올리게 하고, 이후 소설의 제재(題材)이자 사건의 중심이 되는 라이프캐스팅(인체를 본떠 조각을 만드는 기법) 석고상이 지니는 본질로서‘이중복제’, 그리고 레플리컨트(replicant), 미메티즘(mimetism)과 같은 미술용어와 미학이론으로 연결되어 문자 그대로 작품에 세련된 양식미를 더한다. 허나 이는 소설에서 그저 흘려버릴 멋스런 장식물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작품의 묘한 매력은 인체의 손상이 없음에도 섬뜩함과 잔혹한 기운이 감도는 분위기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아내를 모델로 하여 발표한 모녀상 연작이 평론가들의 혹독한 비평에 시달리자 은퇴하였으나 암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조각가는 16년 만에 유일한 혈육인 딸의 신체를 본 뜬 석고상을 완성하고는 지병으로 사망한다. 그러나 완성된 석고상은 목 윗부분이 댕강 잘려나간 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가상의 살인”, “천연덕스러운 잔혹함”바로 그 자체인 소름끼치는 형상으로 발견된다. 석고상의 모델인 딸‘에치카’에 대한 죽음의 예고인가?

살아있는 인체의 본을 떠서 제작하는 라이프캐스팅이라는 조각기법에서 이미 야릇한 혐오감이 피어오르는데 기법의 속성상 조각가 생전 최고의 고뇌였다는 눈(目)의 처리는 더욱 불길한 전조가 되어 파고든다. 눈을 뜬 채 석고를 부을 수 없으니 감은 눈 이상을 묘사할 수 없는 한계.

“ 라이프캐스팅 조각은 시걸의 기법을 카피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델이 된 인체의 카피이기도 하다. 이른바 ‘이중 복제’란 도착된 태생을 가진 레플리컨트인 것이다.”

일종의 거울상인 머리가 잘린 석고상의 존재에 무성한 추리가 가해지지만, 이내 망자의 딸인 에치카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처럼 여느 추리소설과는 달리 본격적인 사건이 한참을 경과한 후 에야 발생함에도 긴장을 이끌어내는 것은 아마도 작가가 인터뷰에서 밝히듯이 수수께끼가‘서서히 풀려가는 경로의 재미’때문일 것이다.

거장의 컴백전을 준비하던 미술평론가‘우사미 쇼진’, 에치카를 추근대다 혼이 난 삼류사진작가 ‘도모토’, 죽은 조각가의 동생인 소설평론가인 ‘가와시마 아쓰시’, 망자의 내연녀, 이혼한 아내 ‘리쓰코’, 그의 남편 ‘가가미’등이 얽혀 사건은 종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져든다. 어찌보면 수상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모두 다 범인 같은 그런 상태.

또한 주인공인 탐정이자 추리소설가인‘노리즈키 린타로’의 잘못된 판단으로 결정적 과실이 발생하는 것은 이 소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 등장인물들 모두에 독자의 시선을 분산시켜 트릭을 보다 섬세하게 관찰케 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이는 추리를 전개해 나감에 있어 탐정의 실수를 통해‘다른 해법들을 소거(消去)하는 작업의 일환’이라는 점을 이해하면 보다 명료한 독해를 가능케 한다.

그러함에도 도처에서 섣부른 단정을 하게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그럴수록 작품의 스릴에 더욱 깊이 몰입하게 되고, 중반에 이르면 도저히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게 된다. 사라진 조각상의 머리, 급기야 진짜 시체의 머리가 더해지면서 이 두 개의 머리가 상징하는 유비성(類比性)에 거울(鏡)과 눈의 조각이라는 예술행위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상상의 세계를 그리는 매혹을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어진다.

절묘한 트릭, 진행 될수록 점증되는 서스펜스, 치밀하고 섬세한 디테일, 빼어난 세련미, 사건의 해결에 이르러 완벽하게 설득되는 상쾌한 로직은 추리문학을 숭고한 아름다움의 경지로까지 올려놓는다. “저편의 존재, 심연, 혹은 어둠이라는 표상 불가능한 것의 영역”에서 “의태라는 행위를 통해 예술의 다른 기원”으로 올라간 작품이라 하여야 할 것 같다. 라이프캐스팅기법에 잠자는 범인에게 물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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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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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오리 같은 겉잡기 힘든 열정의 시기가 지나고, 그 과잉의 감정이 스러지고 나면 “들에 핀 꽃나무가 누구를 향하지도 않으면서 세상을 밝히며 활짝 피어나듯” 그런 사랑을 이해하게 되는 것일까? 소설 속‘누경’의 “한 때의 공유와 공속, 공감, 공모, 개념으로 재단되지 않는 그 어떤 영역...”이라는  사랑, 강주의‘뜨거운 초연함’과 담백한 세속적 사랑을 낯 선 시선으로 바라보는 나를 발견한다.


금지된 사랑, 아내가 있는 50대의 교수와 30대 처녀와의 사랑이야기. 1970년대를 장식했던 연애스토리인‘별들의 고향’,‘겨울여자’류의 통속적 영화 장면이 떠오른다. 통속성이 유해하다, 무해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사람들이 그리는 사랑이란 세속성을 이탈하지 못한다는 것일 게다. 작품 속에서도 누경과 강주가 주고받는 대화에는 서로 속물 같아서 웃는 장면들과, 바로 그 속물성에‘따뜻한 사랑’의 감정이 내재하고 있다는 자기위안을 담고 있다.

“자꾸만 생각이 나, 네 속에 내가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온통 네 속에서 살고 있어.” 라든가, “포옹이 풀렸을 때. 우리의 두 눈은 꽃처럼 많은 겹으로 피어 있었다.”와 같이 많은 문장에서 낯 붉어지는 갈망과 미화된 표현들이 등장하는데, 그 만큼 사랑의 순간은 수식과 과장, 과잉의 포장을 하게 되는 모양이다. 시쳇말로 이들의 사랑은‘불륜’임에도 이를 도덕적 일탈로만 볼 수 없게 하는, “우리는 둘 다 매정하다. 우리는 둘 다 겁이 많다. 우리는 둘 다 내면이 강하다. 우리는 둘 다 이기적이다. 우리는 둘 다 순수하다. ~ 우리는 둘 다 부도덕하다...” 라는 객관적 상황인식의 나열이 등장하는데 짐짓 숭고함으로 위장하는 자기 정당화의 일면일 것이다.

한편, 고독한 천성과 사람을 최소한만 만나면서 영위하는 삶을 최선의 삶이라 생각하는 누경의 성격이나, 간결함과 앞뒤로 토막 쳐 함축된 지나치게 밀도와 강도가 높은 말을 뱉어내는 강주에게서 억제된 삶, 억눌린 감정의 참기 힘든 인내에서 풀려난 욕망을 다시 거둬들일 것이라는 또 다른 세속성을 목격하게 된다.
특히, ‘검은 콩과 매실’로 상징되는 견고하고 안정된 일상에 대한 희구가 두 사람의 짧은 여행이 지니는 의미와 대비되어 바라보는 것만으로, 또한 강주 부부의 안정된 삶과 명예를 지켜 주리라는 자기암시도 궁극의 위안이 되지 못하는 것은 어쩜 미완성의 귀결이 주는 아름다움일지도 모르겠다.

감정을 미진한 채 남겨둔 채로, 잠간의 남은 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이별의 걸음을 내딛는 누경을 이해케 된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속물 같아도 괜찮아, 그래도 섬에 가자.”하던 강주의 말이 그리움이 되어 인후를 아프게 하였으리라. 그리고 깨진 유리병을 녹여 다시금 완성한 녹색화병, 어둠속에서 건져 올린 고통의 앙금까지도 차라리 맑고 투명 했으리 만큼 봉합된 유리병이 전하는 사랑의 의미는 그대로 사랑의 진리가 되어 날아든다. “깨어지지 않는 것이 사랑이야”
그래 “어제의 무게를 내려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추락한다.” 사랑은 지속되는 것이지. 지금 나 역시 새로운 사랑을 꿈꾸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내안에 또 다른 나, 진정한 나, 나의 내부를 응시하는 시선, 적요(寂寥)와 우수, 그리곤 사랑의 아름다운 매혹을 말하는 작가의 진솔한 내면이 다시금 깨어난 작품이란 느낌이다.
선명한 욕구, 일탈과 격렬한 사랑, 그러나 “현재야말로 매순간 얼마나 눈부신 기회인지...”를 말하는 그녀의 전언은 그대로 진정한 삶을 포착한다. 이제 사랑이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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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이 아름답다 범우사상신서 35
E.F.슈마허 지음 / 범우사 / 198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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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40여 년 전만해도 세계 저개발국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사회가 이젠 개발도상국을 지원하는 원조국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 과정에 대한 시시비비는 차치하고 근대화, 산업화라는 서구열강의 흉내를 낸 것이 지금의 외형적 성장을 이룩한 것만큼은 사실이다. 결국 제한된 자원 하에서 여전히 성장을 도모 할 수 있는 지역적 환경의 덕을 보아왔으나 이젠 값싼 노동을 구하기 위한 이전의 틈새도 점진적으로 고갈되어 가고 있어 양적 성장만을 추구 하던 경제기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고려하여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할 수 있다.

한없이‘성장’을 밀고 나가기만 하려는 사고방식은 심한 장벽에 부딪히고 있다. 그 하나는 기본적인 자원의 제약이며, 다른 하나는 경제 성장에 의해 초래된 간섭이 자연이 감내 할 수 없는 한도에 이르러 있다는 점이다. 무한한 전면적 성장을 지향해도 수용되던 과거의 환경은 지나갔다. 더구나 끝없는 팽창주의로 자원과 환경의 양면에서 자연을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오염시키는 한편,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창조성을 억압하여 인간소외를 진행시켜온 결과는 인류 문명의 다양한 부문에서 붕괴와 몰락의 조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저술은 바로 이와 같은 기계화, 산업화를 통한 유물주의적 철학이 판치는 경제지상주의의 세계가 야기하는 인간과 자연의 심각한 손상과 인간을 배제하고 양(量)이 지배하는 시장논리로 질(質)을 논하지 못하는 실증주의의 과학을 비롯한 19세기 대사상의 비판과 이의 대안으로서 인간중심의 기술인 중간기술과 새로운 소유의 형태 등 인류사회의 영속적 존재를 위한 제안을 품고 있다.

무엇보다 “인간을 서로 다투도록 만드는 원인인 탐욕과 질투심을 의식적으로 조장시킴으로써 성립되어 있는 자본주의경제를 기초로 하여 평화를 이룩하려는 것은 二重의 환상”이라고 오늘을 지배하고 있는 경제사상을 비판하는 저자는 수량화의 발달로 놀라운 학문적 발전을 이룩한 듯한 근대경제학이 질적인 가치를 도외시하거나 파악치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일례로 국민총생산과 같은 수치의 신장을 단순히 선(善)으로만 바라보도록 하는 왜곡된 교육이 진행되고 있어, “그 신장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하고 질문하면” 답변을 할 수 없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무엇이 신장한 것이냐 라든지, 그 이익을 얻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냐 라는 문제 등은 간과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5파운드의 석유, 5파운드의 밀, 5파운드의 호텔비”등과 같이 총량에 한계가 있는 재생될 수 없는 재화와 반복 재생 될 수 있는 재화의 구분과 같이 본질적인 질적 차이에 대한 이해를 반영하지 못하는 근대경제학의 무분별한 합리성의 판단이란 것이 오직 공급하여 얻어지는 이윤율뿐이라면 이는 진정 합리적 신호라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질적 가치를 희생시키고 양적 가치, 다시말해 돈의 형태로 충분한 이익을 올리지 않는다면‘비경제적’이라는 기이한 사고를 정착시킨 오늘의 시장자본주의 사회의 가치이념은 오직 부를 손에 넣는 것만이 현대의 최고목표라는 물질 하나로 수렴되어가는 전례 없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물질적인 것이 본래의 정당한 지위인 종속적인 지위로 돌아가는 생활양식을 역어내는 것, 탐욕을 무장해제하고 기술과 조직의 틀을 바꾸고 새로운 생산과 소비 생활시스템을 만들어 노동의 인간화를 꾀하며 건강하고 아름다운 영속성을 지니는 경제를 살려내는 것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최고의 과제여야 할 것이다.

인간이나 자연까지 단순한 생산도구 이상으로 고려하지 않는 현대의 대량생산, 규모의 경제와 같은 거대(巨大)신앙은 윤리를 삼켜버리고 경제이외의 가치인 인간적 관점을 봉쇄해 버렸다. 또한 논리적으로 아무리 따져 봐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확산 문제)와 해결 가능한 문제(수렴문제)에 대한 구별없이 수렴되는 문제만 상대하고, “탐욕과 고리(高利)와 경계심(경제적 안전)을 신(神)으로 삼고”있는 오늘의 경제세계는 덕(德),사랑, 절개 등의 말조차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역사가 보여주듯 문명의 숙명을 좌우했던 토지의 이용 역시 경제적 효용가치로서만 인식될 뿐 생명, 목숨이 있는 무한한 살아있는 물질로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농업과 공업에 대한 차이인식의 결여, 재생불능 천연자원에 대한 오만한 태도, 근본적으로 자동차와 동물조차도 효용의 가치로만 구분하는 중대한 형이상학적 오류로 인한 위험, 즉 존재의 차원을 간과하고 있기에 이르고 있다.

한편, 인간으로부터 창조적 일을 빼앗고 파편화된 일을 떠넘긴 현대기술, 과학이 야기한 세 가지 동시적인 위기 - 기술, 조직, 정치 등이 인간성을 거역하여 사람의 마음을 침식하고, 생물계라는 환경 손상과 부분적 붕괴의 징후,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낭비 극도화로 인한 고갈 가능성 - 의 지적과 함께 인간중심의 기술로서 거대기술보다는 소박하고 값이 싸며, 제약이 적은 자립, 자주, 민중의 기술로서 중간(中間)기술에 대한 피력은 오늘의 남반구에 집중되어 있는 저개발국 및 농촌지역의 발전을 위한 대안으로 示唆하는 바가 높다하겠다.

그러나 이 저술의 꽃은 단연 3부 5장의‘새로운 소유 형태’라 할 수 있다. 사유와 공유, 시장경제와 계획경제, 자유와 전체주의를 매트릭스화 하여 오늘의 우리가 궁극으로 지향하여 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장으로서 사기업의 국영화에 대한 치밀한 제언들, 사적소유에 대한 마르크시즘의 경제적 교조주의를 비판하고 그만의 새로운 견해의 피력은 매혹적이라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적정규모의 소비로 인간으로서의 만족을 극대화하려는 간소와 비폭력, 모순되어 보이는 자유와 질서의 조화, 인간에게 주의를 돌리는 사고체계에 근간하는 대중생산체제에서 중간기술까지, 그리고 새로운 형이상학체제의 구축에 이르는 슈마허의 제안들은 오늘을 걱정하는 인류 모든 이들에게 중대한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다.

“생명이 없는 물질은 우아한 것으로 만들어져 공장을 나오지만,
인간은 거기서 부패하고 타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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