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의 도덕의식과 물화(物化)의 관계에 대해서

작성: 필리아(비의식)

 

나는 올 한해의 한국사회에 더없는‘물화(物化)’의 심화라는 비판적 모티브를 더하고 싶어진다. 단지 국가의 진정한 리더를 선택하는 것에서조차 오직 정치공학적인 물질적 놀음과 마케팅적인 이벤트로 뒤덮는 혐오스러움이 미디어를 도배질해 정작 이 사회의 뿌리깊은 문제점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되어버린 것은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독서시장을 뜨겁게 달구다가 이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처럼 이 사회의 비판적 자기 성찰이 잊혀지는 것이 못내 안타까워 다시금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올해의 책으로 올려놓는다. “정의로운 사회는 행복을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 만들 수도 없으며,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서로의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논의하는 문화”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정의의 실천적 사고라고 공정성, 불편부당성에 대한 도덕철학을 우리에게 생각게 했던 그가 공정성이라는 도덕규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도덕의식을 우리에게 상기시켰을 때 정말이지‘루카치’가 부활한 것처럼 꽤나 반가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바로 “특정 대상물의 관행과 가치평가를 변질시키는‘부패’라는 도덕의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시장만능의 경제적 논리가 인간의 모든 생활양식을 지배함에 따라 지금까지 도덕과 이의 사회 규범적 실천으로서의 법으로 존중받고 보호되던 영역들이 비도덕과 비법률적 영역으로, 즉 시장의 거래 대상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100년 전‘루카치’가 주장한 “상품교환의 강제 아래서는 주체들의 행동에도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 변화는 주체의 주변 세계에 대한 관계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는 말과 매우 닮아있다. 이것은, 인간들은 계산적이기만한 교환과정에의 참여로 모든 대상물을 물화하는 해석습관에 사로잡히게 됨을 지적한 말이다. 결국 루카치 이후 사라져가던‘물화‘라는 비판적 언어에 숨을 불어넣은‘악셀 호네트’와 함께‘마이클 샌델’을 경청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샌델의 책은 “돈이 잠식하거나 밀어낼지 모르는 태도와 규범에 담긴 도덕적 중요성의 인식을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것이라는 경고”의 의미에 비중을 두고 있지만, 그 논의의 근원적 사고는 “시장이 인간 삶의 고유한 비시장적 규범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이 우리 인간과 인간사회를 어떻게 손상시키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이는 곧 물화에 대한 현대적 환기이기도 하다. 상품 교환의 행위 영역에서 강제되는 모든 대상에 대한 물질적, 즉 교환, 거래 대상으로 측정하는 태도는 <<인정이론>>에서 호네트가 썼듯이 인간의 실존적 사실인‘인정의 태도’, 즉 자신의 기원에 대한 감을 상실한 인간들의 기억상실이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시장의 도덕적 한계, 이것은 온통 물화로 치달아 자신의 실존적 이해를 망각하고, 스스로 도덕적 영역을 비도덕화시켜 자신들의 건강성마저 훼손하는 한국인들과 한국사회의 현실을 깊이있게 들여다보게 해주는 절창이다. 내겐 그 어느 아름다운 시보다 샌델의 의식이 아름다웠으니 말이다. 먼저 우리들 자신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들의 모습이 지금 어떻게 보이는지, 어떤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이 작업을 하지 않고 법과 제도와 정치적 수장과 같은 형식을 바꾼다고 무엇인들 변화하겠는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올해의 책에 머물지 않고 인류사회가 물화를 끝내는 날까지 읽혀야 될 책이라 해도 과장되지 않을 것이다. 부패와 부정의 뿌리는 다름아닌 물화에 자리를 내준 우리들의 본모습인 '인정의 망각', 자기 기원의 상실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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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부하기 그지없는 구태의 물음을 하는 것은 우리가 현대라 부르는 오늘의 사회, 즉 근대의 민족국가가 비로소 성립함으로서 ‘정치’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삶, 그 자체가 되었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최근 기득권 세력의 보수 행동대원인 모(某)의원이 한 소설가에게 그의 소설들이 지나치게 정치적이라고 시비를 걸었다는 기사는 이 글의 발단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소설가는 이런 시비가 바로 정치적이라며 반박했다고 하지만 그들의 논쟁 장(場)이 소위 SNS라는 단문의 표피적 공간이다 보니 구구절절 무지한 사람에게 설명하지 않은 까닭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미흡한 반박이라 할 것이다.

 

내가 아는 근대적 소설의 목적이란 독자들의 도덕적 상상력을 확대시켜 인간 욕망의 복잡성에 대하여 시민들이 좀 더 알게 되고, 그 자신과 국가에 더욱 적절한 요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설가들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도덕적 질서를 찾는 인간의 영혼 속에 존재하는 혼돈을 그려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대국가 체제 속에서 인간 개인의 삶이 그 국가가 장치해 놓은 정치적 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개인의 행동과 언어, 심리적 상태와 욕망, 이념 등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미 정치를 떠나서는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엘리엇(T.S.Eliot)’은 “어떤 것이 문학인가 아닌가는 미학적 관점에서 결정되지만, 그것이 위대한 문학인가 아닌가는 비(非)미학적 관점에서 판단된다.”고 말했다. 또한 ‘토마스 만’은 “인간의 운명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결정되리라”고 하였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정치적으로 규정되는 것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공적인 충돌 속에서 겪은 개인적 경험이 소설의 주제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촘촘히 얽혀 있는 국가정치의 신경망이 현대인의 정신과 육체를 규율하고 통치한다. 따라서 개인들은 당해 국가정치가 표방하는 어떤 이념에 사로잡힌 한도 내에서 행동한다. 그러한 개인들이 자기 삶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부도덕성과 불평등을 호소하고, 불의와 부당성의 제거를 위해 고통과 혼돈을 말하는 것, 즉 정치적 표현을 하지 말라고 한다면 이처럼 지독한 무지와 독단이 어디에 있겠는가?

 

요즘 벌어지는 한국의 TV속 토론광경을 지켜보면 대립하는 양측이 사용하는 언어가 마치 다른 것처럼 보이곤 한다.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상호 소통이 불가능한 지경이라는 것이다. 다른 언어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자, 나의 이러한 감상은 정치적이라고 할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들이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의 규칙들, 경계들을 말하고 있으며, 그 불통에 대해 울화가 치밀기 때문이다.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이들의 언어와 행동 밑에 깔린 동기는 개인의 동기 뿐 아니라 전체 사회와 국가, 문화의 동기들을 보여줌으로써 자기가 정당하다는 신념, 욕심의 충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곧 소설의 소재이고 소설이 말하는 것이다.

 

근자에 발표된 한국 소설들을 열거해 보자. 미군기지촌이 배경인 ‘정한아’의 『리틀 시카고』,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차별적 시선을 그린 ‘강병융’의 『Y씨의 거세에 관한 잡스러운 기록지』, 가난의 상속자인 사회적 약자에 대한 주류사회의 양가적 행동을 묘사한 ‘김영하’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 물질과 과시와 폭력의 도시에서 신음하는 소시민들의 이야기인 ‘김사과’의 『테러의 시』, 타자에 무관심한 현대사회의 수많은 장치들의 혐오스런 작용을 고민케 하는 ‘구병모’의 『고의는 아니지만』, 한국사회 자본가들의 왜곡된 형성을 쓴‘황석영’의 『강남몽』, 소위 대선정국의 화두가 된 경제민주주의의 파행을 그린 ‘조정래’의 『허수아비 춤』등등, 이들 소설은 모두 정치적이지 않은가? 정치를 떠난 개인의 삶을 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근대 민족국가의 성립 이래 정치를 개인의 삶과 분리하여 생각 할 수 없게 된 연유에 있다.

 

성적 욕망도, 물질에 대한 소비의 욕구도, 지위에 대한 야망도, 권력의 탐욕도, 친구와의 우정도, 연인과의 사랑도, 어린아이의 까르르하는 웃음소리도, 노인의 쓸쓸한 고독도 모두 정치적이다. 정치라는 삶의 시스템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의 미세한 변화에 민감한 예술가는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그의 작품은 곧 정치적이다. 시민들, 민족의 촉각인 이들에게 정치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그건 부당함과 비정함, 불의와 폭력이란 암흑세계에서 쥐죽은 듯 살라는 말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소설은 인간 개인들의 비도덕적 상황을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소설이 이것을 쓰지 않는다면, 인간의 얘기를 쓰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을 써야 한다는 것일까? 현대의 소설은 그래서 정치적인 것이다.

                           

[참고도서]

1.‘폴 돌란’의 『정치와 소설 ; Fiction and Politics in the modern world』

2. '구스타프 야누흐‘의 『카프카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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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인문학 읽기

 

인문학을 왜 읽는가? 그리고 읽어야 할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진부할지 모르겠지만 이는 어떤 책이 진정한 인문학이냐 란 얘기와 상통한다는 의미에서 너무 중요한 것이 아닐까?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책에서 강신주가 말했듯이 “사회와 인간 삶의 문제에 실천적 전망을 제공하고”, “사회가 가진 치명적 결함을 발견”하기위한 지적바탕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건 읽어야 할 이유가 없는 책이 될 것이다.

 

쏟아지는 책들에서 이러한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책을 선별 한다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점차 선정이 신중해진다. 이번 달은 고심한 끝에 세 권의 책을 찾았다. 한 권의 직접적인 전망과 두 권의 간접적인 바탕이다. 한국인의 정신과 신체에 각인된 문화적 인식을 해부하여 오늘의 한국사회와 한국인들 자신의 결함을 직시하게 하는 것이 직접적 전망이고, 간접적인 지적 바탕을 제공하는 그 하나는 21세기 오늘의 인간과 시대적 배경의 원천이 된, 어떤 의미에서 인류의 사고에 대한 대 전환을 선언했던‘니체’의 사상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무심히 읽는 토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를 비롯한 문학의 정신에 대한 것이다.

 

일본의 젊은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의 말처럼 넓은 의미로서의 문학(텍스트)은 세상을 바꾸는 힘의 원천이고, 곧 혁명이다. 그래서 니체의 사상이, 나보코프의 문학비평이, 사회학자 정수복의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에 대한 고찰은 오늘, 지금의 우리와 우리사회를 보다 성숙한 관점으로 바라보도록 도와줄 것이다.

 

1.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 정수복 著

 

오늘을 사는 한국인은 대개가 일제강점기 이후의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일 것이다. 일본이 이식한 서구의 근대문명을 시작으로 미국의 해양문화를 통해 근대화를 숙성시키는 과정 속에서 훈육되고 세상을 체험하며 살았다는 의미이다. 그것들은 현세적 물질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민족주의, 국가중심주의 등등이란 모습을 하고 한국인들의 몸 속 깊이 각인되어 한국인만의 문화적 관점, 틀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것이 긍정적이기 만한 것이 아니어서 도처에서 심각한 결함의 신음소리를 들리게 한다. 그렇다. 이 책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에 내재된 부정적 효과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당연하다고 보는 세계를 낯설게 봄으로써 이 사회가 지닌 치명적 문제들을 직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그러진 한국인과 그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그 극복 방법과 대책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2. 니체 극장 ; 고명섭 著

 

니체의 평전이다. 초인을 선언한,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알리고, 초인이 된 그 인간들이 이제 세상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있다. 이 니체라는 사람의 사상을 우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의 책을 읽어보았는가? 그의 난해한 사상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읽어야 하는가? 오늘의 우리들이 바로 그가 말함으로써 탄생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를 아는 것은 책을 읽고, 세상을 이해하는데 중대한 인문학적 배경이 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니체의 심층심리부터 그의 제반 저술들과 사상적 토대를 세심하게 해설한 이 책은 실로 고마운 저술이라 할 것이다.

 

 

 

3. 나보코프 러시아 문학 강의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著

 

책을 읽는 행위, 그것은 세상을 바꾸는 행위이다. 즉 실천적 전망을 제공하는 것이 책이요, 특히 문학이기 때문이다. 아마 톨스토이, 고골, 고리키, 토스토옙스키, 체홉 등 러시아 문학처럼 우리에게 많이 읽힌 문학도 없을 것이다. 한국인의 정서, 감성에 여하튼 영향을 미치고 있다. 『롤리타』의 작가, 나보코프는 이들 작가와 작품을 통해 문학의 정신을 알리려 하고 있다. 공리주의를 비판하고 때론 예술성을 강조하기도하며 문학답지 못한 것들에 신랄한 멸시의 비판을 하면서. 그리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세계의 모든 독자에게 자유로서의 문학을 해설하고 있다. 문학을 읽고 느끼고 탐닉하는 방법을 거장으로부터 제대로 배우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삶의 바탕을 이해하는 인문학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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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문화'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것은 실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발설된다. 좁게는 문학, 미술, 음악등의 예술을 말하기도 하고, 조금 넓게는 패션이나 대중연예를 포함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특정 사회 사람들의 삶 전반을 매개하는 일상적 사상과 가치관 전반을 지칭하는 데 이의없이 사용한다. 이처럼 바로 그 사람들의 생활 양식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기에 문화는 더 없이 민감한 언어가 된다.

 

그래서 공기처럼 흡입되는 이 문화는 조금만 경계를 소홀히 하면 사람들에게 독소가 되어 삶을 피폐화시킬 수 있다. 문화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정당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 문화자본, 대중문화, 주류문화라는 화두를 지닌 다음의 책들은 이러한 까닭을 성찰하는데 훌륭한 안내가 되어줄 것 같다.

 

취향의 정치학

 

이 책은 부르디외가 말하는 아비투스(habitus), 문화자본, 계급적 에토스 등에 핵심개념에 접근하는 사상적, 언어적 개념에 대한 전반적인 배경지식의 이해를 지원하며, 또한 그의 명저 『구별 짓기』의 해설서라 할 수 있다.

 

부르디외의 사상은“인간의 행동은 엄격한 합리성과 계산을 근거로 행해지기 보다는 일정한 기억과 습관 그리고 사회적 전통의 영향을 받는다.”는 곳에서 출발한다. 즉 개인의 인식과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순수한 지식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전수되어온 도식(표상)이며, 문화적 성향을 만들어 내고, 사회적 행위에 일정한 코드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도식의 사회적 기능을 통해서 계급적 질서가 재생산되고 있다는 데 주목한 비판 사상의 걸작이다.

 

 

거리의 지혜와 비판이론

문화연구 분야의 가장 독창적인 책 중의 하나이다.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대중이 광고전문가들의 조작이나 지배권력의 수동적인 대상물이 아니라 능동적인 사회 문제의 제기자라고 하는 주장이다.

천박함, 상업주의, 권력의 조작이 아니라 대중의 일상 속에 강력한 진리가 담겨있으며, 누구보다 먼저 사회적 모순과 선전을 재빨리 알아차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토착이론’이라고 말하고 있다. 군중의 시대적 삶과 언어만큼 사회의 현상을 말하는 힘은 없다는 것이다.

 

과연 문화를 통한 지배권력의 조작이 아니라 대중이 권력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 이 주장은 옳은 것일까? 은근히 비판력을 자극하는 저작이다.

 

 

메인 스트림

주류(主流), 즉 사회를 견인하는 중심적인 추세, 경향을 메인스트림(main stream)이라고 할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반(反)문화, 하위문화, 니치 문화의 이면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메인스트림 문화라는 대중적인, 즉 “엘리트주의적이지 않은 문화라는 긍정적 의미와 상업적이고 규격화되어 있으며 단일화된‘시장 문화’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다는 말”이 된다.

 

결국 이것은 예술과는 대척점에 있음을 의미할 수 도 있다. 모든 사람을 매혹시키고자 하는 생각이나 운동, 그리고 주류에 속하게 하려는 정치적 입장과도 관련된다. 메인스트림이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긍정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비판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인가?

 

한국사회는 한류(韓流)라 하여 세계 속에 자신들의 대중문화를 확산시키는 데 어떤 단순한 논리적 관점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경제적 효율, 즉 경제적 이익과 문화적 헤게모니의 쟁취를 통한 국가적 위상의 제고와 같은 것. 메인스트림을 장악하는 것이 이처럼 이롭기만 한 것일까? 혐한(嫌韓)이라는 반대 논리에 부착, 누증되는 영향, 그 부정에도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세계 대중문화의 속살을 조사하기 위해 5년간의 발품으로 낳은 이 문화비평의 결실이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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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2-06-06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인 스트림, 의 소개글이 흥미롭네요. 좋은 소개글 잘봤습니다.
 

우리 말 중에서 ‘생각’이란 말처럼 폭 넓게 쓰이는 단어도 드물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생각에는 그야말로 다양한 뜻이 포함되어 있다. ‘오랜 생각 끝에 대답했다.’ 라고 했을 때에는 자신의 머리를 써서 깊이 헤아리고 판단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가하면 ‘그녀 생각이 간절했다.’라는 말에서는 어떤 기억이나 일을 간절히 하고 싶어 하거나 관심을 가졌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상상했다는 의미로서 ‘생각보다 사람이 많이 왔네.’라고 쓰이기도 한다.

 

생각의 의미는 이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나는 왠지 쓸쓸한 생각에 잠겼어.’처럼 어떤 일에 대한 느낌이나 의견을 지칭하기도 하고, ‘그는 생각이 깊다.’와 같이 사리에 대한 분별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처럼 생각이란 단어는 특정 의미로만 규정지을 수 없게 한다. 판단, 분별, 사려, 상상, 기억, 느낌, 혹은 ‘내 입장을 생각 좀 해주게.’에서와 같이 성의나 배려의 의미로까지 광범위하다. 그런데 이렇게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생각이 오늘의 우리에게서 실종되고 있는 듯하다. 생각이 없는 말만 난무하여 생각을 할 여지가 없는 말이 공허하게 세상을 채운다.

 

생각은 진지한 헤아림과 판단의 작용이며, 간절한 염원이기도 하고, 사리분별과 배려, 그리고 누적된 지식의 산물인 상상력이다. 생각이 없다는 말은 그래서 헤아림도 간절함도, 배려도 지식도 없다는 다른 표현이 된다. 이런 말들의 무성함에서 우리가 어떤 진실과 진리를 캐낼 수 있을까? 천박하고 표피적이며 정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게다가 아무런 지식도 없는 말이니 이러한 말들이 사회를 지배할 때 사람들은 허탈하고 소외되어 좌절과 분노에 내 몰릴 것이다. 생각을 하려면 소음에서 한 걸음 떨어져 천천히 그리고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극한적인 경쟁에 매몰된 사람들에게 이러한 주문은 현실적 감각을 갖지 못한 비상식적 얘기로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이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시간과 지식을 바탕으로 한다. 올바른 사려, 판단, 분별을 위해서 시간이 필요하고, 또한 지식과 지혜가 필요하다. 지식과 지혜는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책을 통해서,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행동을 관찰함으로서, 그리고 우주자연의 현상들을 체험함으로서 축적되는 것이다. 이 경험에 대한 겸허한 학습과 이에 대한 시간을 배려하지 못하고서는 어떠한 행위도 진실의 공감을 획득하지 못한다. 서로 공감하지 못하니 교감하지 못하고, 곧 소통이 단절된다. 신뢰에 금이 가고 불신과 의심이 세상을 가득 채워 거짓이 난무하고 갈등과 적대로 분열된다. 우리 사회의 모습이 꼭 이러하다. ‘생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조금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살아야 한다. 자신을 위해 생각하는 시간을 내 주어야 한다. 한국사회에 어느 때보다 절실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생각 없는 무수한 말들이 또 생각 없는 무수한 말들과 부딪히고 진리와는 한참이나 멀어진 어처구니없는 결과로 상처만을 입은 사람들이 씨근덕거린다.

 

생각은 얄팍한 테크닉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무슨 방법술이나 되는 것인 마냥 생각기술, 생각방법과 같은 상업주의에 편승한 자기계발류 따위의 책들이 서점가를 채우는 것을 보면 쓴 입맛을 다시게 한다. 그것들은 생각이 아니다. 상상력을 빼앗고, 자기학습의 진지함을 놓치게 하며, 세상의 사물과 현상에 대한 진중한 판단력을 결코 제공하지 못한다. 정말의 생각은 이러한 것이 아니다. 자기체험과 간절함과 성의를 기초로 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말하기 전에 생각을 하자. 생각하는 시간을 자신들에게 주자. 그래야 우리들의 사회는 소통이 증진되고 분열이 봉합되어, 서로 인정하고 이해하는 화합으로 유쾌한 상식의 사회가 될 것이다.

 

* 권하고 싶은‘생각’에 관한 좋은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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