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라, 세계를 향한 영혼의 승부
김한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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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많은 한국인들은 해외에서 벌어지는 유명 자동차경주대회를 접할 때마다 저 많은 차량 중에‘메이드인코리아(Made in Korea)'는 왜 없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느꼈을 법 하다. 효율성이라는 대량생산의 가치에 집중하는 체제에서 자기만의 고유의 가치와 상상력이 결합한 이러한 차량을 만들어 낸다는 의식이 자리 잡을 틈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즉 영혼을 투여하는 예술적이라 할 수 있는 창조의 정신,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내는 장인(匠人)정신이 어느 샌가 대량생산이라는 경제적 논리에 밀려났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저작의 표지와 삽화를 장식하는 날렵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스포츠카를 대하면서 우리에게도 포르쉐와 람보르기니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슈퍼카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이러한 노력이 대접받기에 턱없이 황폐한 환경에서 무모하기까지 할 수 있는 도전을 한 사람이 누군가하는 호감을 불러일으켰다고 해야 할까? “대한민국 최초의 수제 스포츠카”가 우리의 시선에 놓이기까지의 사연들과 그 제작과정, 한 젊은이의 꿈이 중년이 되어 비로소 실현되기까지의 여정이 소개되고 있다.

이태리 피렌체 국립미술대학을 거쳐 FIAT社가 있는 수제자동차의 본고장인 토리노 SDAD(디자인대학원)에서의 자동차디자인을 전공하면서 꿈의 실현을 한 단계씩 밟아나가는 청년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일종의 디자인 능력을 갖춘 자동차 공방(工房)이랄 수 있는‘카로체리아(Carrozzeria)', 즉 대량생산시스템을 구축하지 않고 솜씨 좋은 디자이너와 장인들이 어울려 수공업 방식으로 차를 만드는 그의 의지는 실현된다.

귀국 후 국내 자동차회사들의 디자인실에서의 경험, 그리고 마침내 아내와 프로토디자인이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직원들의 헌신적인 참여로 이상을 향해 매진하지만, 세상은 항상 장애를 마련해 순탄한 길을 열어주지 않는가 보다. 고난과 역경, 위기를 기회의 국면으로 이해하고, 극한의 낭떠러지에서 조차 희망을 버리지 않는 자에게는 구원의 손길은 기적처럼 다가온다. 진부해 보이기까지 하는‘해낼 수 있다’는 자기암시의 긍정적 최면은 분명 이처럼 현실로 다가온다는 것이 진실임을 목격하게 한다.

2007년“시속 100킬로미터에 이르는 데 걸리는 시간(제로백)이 3.8초, 최고속력 330킬로미터”의 슈퍼카인‘스피라 레이싱카’ 버전이 당당히 GTM(Grand Touring Masters)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 그 감격과 감동은 근 30년을 지속해 온 장인에게는 형언 할 수 없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자동차디자인 프로세스, 디자인과 설계기술자, 제작기술자의 조화와 협력, 자동차산업의 환경, 개인의 신념과 인간에 대한 신뢰와 감사의 곡진한 이야기들이 수제자동차의 제작이라는 꿈의 도전에서뿐 아니라 삶의 진정함까지 아우르면서 감동을 선사한다.

혼신을 다해 이루고자 하였던 그 과실이 마침내 열리고, 이젠 그 어느 때보다 탄탄한 토대에서 정말 세계의 명차들을 향해 우리도 장인정신이 이렇게 꽃을 피우고 있다고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은 저자 ‘김한철’의 긍지이기도 하겠지만,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서도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외면당했던 그의 분투가 더 많은 투자자들의 관심과 지원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21세기, 대량생산의 시대는 저물고 인간의 감성과 영혼을 담겨있는 장인의 시대로 전환하고 있지 않은가. 소량이지만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장인산업은 우리의 이상도 실현하고 충만한 미래의 삶을 일궈내는 새로운 가치일 것이다. 정말‘스피라’가 무럭무럭 자라나길 응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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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거짓말 - 무엇이 우리의 판단을 조작하는가?
마이클 캐플런 & 엘런 캐플런 지음, 이지선 옮김 / 이상미디어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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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저작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낳는 사회의 현상들에 도사리고 있는 믿음의 실체를 파헤친다. 그래서 그 믿음들에 내재하고 있는 무수한 오류와 위선, 기만을 만들어내는 근원의 탐색은 생물학적 반응으로서의 본능을 중심으로 인지과학, 진화생물학, 행동경제학을 넘나들며 신랄한 분석과 이해를 만들어내어 우리들의 불완전성과 몰이해를 냉정하게 되돌아보게 하고, 화합과 협력, 결속과 유대, 자유와 평등이 안정적으로 지속되는 사회를 위한 자기성찰의 지혜를 제공한다.

우리 인간들은 현실의 일상에서 결코 이성적이지도 않으며, 전통경제학이 말하는 것처럼 합리적 선택을 하는 경제인도 아니다. 또한 빈번하게 현실을 왜곡하는 인지오류에 빠지며, 많이 알고 있다는 오만으로 엄청난 실패를 만들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인종과 지역, 이념과 종교 등 수많은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갈등을 생산하고, 저마다의 도덕율과 정의를 부르짖는다. 그럼에도 개인들은 모두 자신의 생각과 판단, 행동은 정당하고 정의라고 주장한다. 무엇이 잘 못된 것인가? 개인마다 진실과 진리를 가지고 있다면 그 사회의 안정성이 지속될 수 있을까?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일을 처리 할 때마다 진리의 협상과 타협을 하여야 할 것이고, 세 사람이 모이면 또 다른 질서와 규범을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수없는 갈등과 충돌, 그 혼란으로 얼마 되지 않아 인간이란 종은 아마도 멸종을 면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신념과 행동의 오류를 낳는 것일까? 이는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말과 같은 의미가 아닌가? 저자는 이 원인을 인류의 역사가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속도를 능가하는 빠른 속도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오래된 마음(구석기 시대의 뇌)이 적응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세상을 창조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 차이는 인간 스스로를 궁지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우리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깃든 다양한 오류가 백과사전적으로 망라되어 소개되고 있다. 아마도 우리들의 마음과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이 오류의 모습들이 여기에 모두 진열되어 있는 것 아닐까 할 정도로 그 절망적 풍부함이 지천이다.

흥미롭고 날카롭기 조차한 오류의 사례들이 빼곡하지만 특히 우리사회에서 요즘 벌어지는 도덕성과 정의, 기후변화와 자원의 고갈과 같은 생태계의 문제, 그리고 이념과 종교와 같은 사상의 대립, 전문성으로 무장한 지식의 오만이 야기하는 문제점의 분석은 유독 관심을 집중시킨다.
인간의 심리적 기제를 말할 때면 단골로 등장하는‘죄수의 딜레마’와‘최종게임이론’은 바로 합리성이나 효율성과는 다른 결정을 하는 인간의 대표적 오류이다. 인간에게‘공정성’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으로 이성과 합리성을 가진 존재라는 인간의 정의를 완전히 파기한다. 여기서 우리는“강한 상호성”이란 의지를 발견하게 되고, 균형을 잃어버린 불공정이 발생하면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공정성이라는 정의를 주장하고 분노를 표시하는 사회적 대등관계를 중시하던 원시시대의 우리의 뇌를 보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한편 사회를 지탱하는 법칙의 근간인 우리가 도덕성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것일까 하면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자유를 위해서 상대를 죽이고, 정의를 위해서 또 상대와 싸운다. 도덕성이 왜 이렇게 서로 다를 수 있는가. 도덕은 감정적이고 추상적 요소에 의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사실 엄청난 충격을 가져온다. 위선, 배반, 무자비, 비방...같은 잘못에 대한 감각은 직관적인 동시에 무조건적이며, 단지 불쾌감을 자극하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느끼는 것이란 얘기다. 또한 도덕적 감정이란 영혼에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중재와 자존심을 만족시켜줄 만한 대안과 같은 집단내의 추상적 판단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역과 인종과 문화와 관습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랄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 원시시대의 뇌가 저지르는 기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누구나 이용 할 수 있는 공개된‘공유지의 비극’이론처럼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이 불일치 할 때 인간은 사적 이익을 최대한 추구하려는 이기심이 앞선 나머지 모두가 손해를 보는 비극을 자초한다. 일례로 전 세계에 개방된 공유지인 바다에서 참치는 이제 멸종의 위기에 처해있다. 이처럼 광물자원, 야생동물, 열대우림은 고갈되고 남획되어 공멸을 재촉한다. 또한 고정관념과 편견은‘그들’과‘우리’를 나누고 서로의 위협에 대한 반응으로 혐오를 부추기고 적대를 낳는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내재적 공동체의식이 직감과 본능적 감각들을 제어하는 한낱‘인슐라 ’라는 신경물질에 좌우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정치와 종교의 문제에 이르면 인간들은 이성을 상실하고, 극단적 감정에 휘둘린다. 여기에는 논리도 적용되지 않으며, 성장과정에서 습득한 저마다의 개념들에 입각한 동기에 따른 추론 결과를 사실인양 포장하고 그것에 강한 믿음과 정당성을 주장한다.

우리는 이처럼 이 저작에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의 오류를 만들어내는 근원을 알게 되고, 그 오류로 인한 인간사회의 위기를 직시하게 된다. 문제의 원인과 현상을 알게 됨으로써 우린 이들을 통제하고, 전환시킬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분리와 구별짓기와 배반과 비난, 혐오와 분노를 화합과 교감으로, 협력과 결속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영역 방호의 신호로 발생한‘춤’은 같은 영역을 공유한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또한 웃음은 상호신뢰의 표현으로서 진화한 산물이란다. 함께 춤을 추고 미소를 교환하는 인간관계에서는 결코 싸움이 잉태되지 않는다. 이에 더해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의 ‘엠마’를 인용한 여성의 성 선택의 흥미로운 일화와 함께 소개되는 비록 “두 환상의 교환, 두 피부의 접촉 이상은 아닌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세상을 움직이고, 서로에게 헌신함으로써 서로를 완전하게 한다.”는‘사랑’의 정의는 인류를 지배하는 엄청난 오류에 대한 희망의 언어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관념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이러한 대처가 궁극의 해결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지만, 경험을 단순화하도록 설계된 뇌가 조작한 허구에 기만당하는 인간들이 무작위성으로 가득한 세상에 의미를 주입하며 살려고 바둥대는 그 진실을 대면케 하는 것은 이 저작의 위대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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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다윈의 시대 - 인간은 창조되었는가, 진화되었는가?
EBS 다큐프라임 <신과 다윈의 시대> 제작팀 지음 / 세계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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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런 논쟁을 왜 하는가에 주목 할 필요성을 느낀다. 진화론은 생물학이라는 과학의 영역에 있는 여느 과학이론과 다를 바가 없다. 과학은 가설과 경험적 실험 등을 통하여 검증하고 그래서 보편적이랄 수 있는 진실을 밝히는 과정을 갖는다. 그래서 이 진실을 뒤집는 새로운 진실이 밝혀지면 수정되거나 폐기되기도 한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과학적 진실은 둥그렇다는 증거에 폐기되었으며, 인력에 의해 인간이 지구에 붙어있다는 진실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왜 유독 진화론을 향해서만은 유일신을 믿는 종교론자들이 자기검증 체제를 갖는 과학에 맡기지 않고 억척스러운 개입과 논쟁을 야기하는 것일까?

사실 이 저작물은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을 전제로 하지 않는 것 같다. 단지‘생명 탄생’의 말할 수 없음을 이유로 신비주의와 초월적인 그 무엇에 대한 다분히 종교적인 규명의 갈등에 맞추어져 있어, 세간의 유일신 근본주의자들의 창조론과, 기계론적 이상주의로 의사(擬似)과학이라 할 수 있는 지적설계론을 과학이론인 진화론에 대립시키는 잘못된 전제와 구성을 하고 있다. 이러한 실례로 미국에서 지적설계론이나 창조론을 진화론과 같이 과학 교과서에 실어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사법부의 판결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과 같이 과학이 아닌 것을 과학교과서에 반영하려는 기이한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행동을 소개하는 것처럼 이미 반영이 기각된 황당한 일화를 담는 것이 그것이라 하겠다.

또한 과학적 진리가 마치“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것이라는, 즉 진리란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이라는 극단적 상대주의적 논리를 보이기도 하며, 편의주의적 논의로 과학을 종교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표명하기도 하고, 영국의 특수한 현상을 보편적 세계의 현상으로 확장하여 무신론을 유신론에 대한 또 다른 종교인 듯 인식케 하는 신중치 못한 표현으로 객관적 성찰을 저해함은 물론 진화론의 과학적 논쟁이라는 본질을 흐리기도 한다.

어쨌든 주된 논점으로 제기하고 있는 진화론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 기획인 만큼,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라는 지적설계론자들의 진화론의 비판적 논의가 서두를 장식한다. 교과서에 잘못된 설명을 이유로 진화론 전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거나, 눈과 같은 생물체의 기관을 예로 들어, 환원할 수 없는 복잡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 누군가 지적설계자가 생명을 창조했다는 영적 신비로 자연을 설명하는 기계론적 이상주의자들의 주장을 장황하게 나열하고 있다. 결국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이론적 토대로 과학을 흉내낸 의사과학을 과학인양 오해토록 배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어처구니없게도 “진화론이 믿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는 이유로 종교의 교의처럼 되어버렸다.”는 논리의 비약으로 본질을 훼손하기도 한다.

특정 과학 이론을 신뢰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종교의 교의’가 된다고 하면, 만유의 인력의 법칙, 상대성 이론 등등 오늘의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모든 과학이론은 저마다의 종교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결국 유일신의 창조론이라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야기되는 비과학적 논쟁의 합리적 타당성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정말 기괴한 논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태초의 생명 탄생이라는‘발생학’에서 다루어야 할 분야를 진화론에 대입하여 학문적 경계를 혼동시켜 생명체의‘진화’에 대한 과학적 논증인 자연선택이론을 중심으로 하는 진화론을 무능한 과학처럼 비추는 태도와 같이 바람직하지 못한 논의도 보이고 있다.

한편 합리주의 이성중심의 오늘의 사회가 과학의 물질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음은 모두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며, 이로 인한 가치의 재고로서 과학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인류의 미래 가치에 대한 고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허나 진화론에 대한 종교주의자들의 비판을 물질주의로까지 확장하여 포괄적 과학비판의 일환으로 몰아넣는 것 또한 본질을 호도하는 무지한 자세라 아니 할 수 없다. 또한  한 지적설계론에 경도된 사람의 말을 인용하면서 “과학과 종교라는 다른 영역”이니 만큼 영역을 존중하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이는 과학은 종교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라는 적대의식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진화론이라는 과학이론 자체에 끊임없이 신비주의와 종교성을 주입하려는 편협성을 스스로 멈추지 않으려는 거친 의지라는 저의임을 숨기려는 것과 같다.

물론, 이 저작이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한 에드워드 윌슨, 데니얼 데닛, 제리 코인과 같은 저명한 진화론자들과 마이클 베히나 윌리엄 뎀스키라는 의사과학자들의 지적설계론, 그리고 앨빈 플랜팅카와 같은 창조론자들의 견해를 적절히 배열하여 각각 그들의 이론과 직접의 인터뷰를 통해 생생한 주장을 소개하고 있는 형식으로, 진화론과 종교의 간극을 좁혀보자는 취지임을 천명하고 있으나, 저마다의 주장을 산만하게 배열하기만 하고 있어 프로그램 기획의 진의를 명확하게 파악하기가 곤란하기도 하다. 다만, 진화론에 적의를 보이는 창조론자(지적설계론자 포함)들이 제기하는 논의의 쟁점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는 점과 과학과 종교의 갈등, 진화론의 발전적 현황에 대한 개괄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는 정보로서의 유익성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과학은 새로운 입증이 발견되면 기존의 이론은 스스로 폐기된다. 입증할 수도 검증할 수도 없는 신비주의를 과학이라고 주장하거나 불과 6,000년 전에 생명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황당한 창조론은 과학으로서 다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수없이 시중에 나도는 反진화론을 표명하는 저작들의 주장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이념적 대립으로 그 갈등을 키우고, 나아가 인류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발아점이 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존중하면 될 것이고, 과학은 과학 그자체로서 논박되고 다투어야 할 것이다. 종교로서 과학을 파괴하고, 과학으로 타자의 신념을 훼손하려는 행태는 지양(止揚)되어야 할 것이다. 진화론은 과학이다. 이를 전복할 새로운 과학적 증거가 발견 되었을 때 비로소 논의와 비판의 의의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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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나무 2010-09-14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례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 하시는 분이신지
여쭤 보고 싶네요.

검색하다 우연히 이 글 읽게 되었는데
이해에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별을 네 개나 주신 건
책 나름의 가치를 인정하신 건가요?
리뷰 내용을 보면 짜게 주셨을 것 같았는데...

2010-09-15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
데이비드 뱃스톤 지음, 나현영 옮김 / 알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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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저술은 단순히 아동의 노동과 성 착취에 대한 반복되는 줄거리의 이야기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이러한 현실의 배후 숨어있는 세계의 인신매매 및 노예노동의 추악한 실태에 대한 고발과 노예매매업자들의 범죄경로와 사슬 분석, 노예의 구출과 사후관리프로그램 등 구호조직과 운영현황의 검토와 같이 세계노예시장의 중요한 메커니즘의 이해를 통해서 노예노동에 의존하는 불온한 경제를 뿌리 뽑고, 세계의 선량한 사람들을 향한 구호에의 참여 제안을 요구하는 기획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리 쉬이 접하게 되는 표현이 아닌 이들 노예노동이 대체 실감이 나지 않아 먼 나라 남의 이야기정도로 들릴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과연 남의 나라 이야기일까? 그리고 우리나라 이야기, 내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무관심할 수만 있는 것일까?

불과 수일 전,‘제임스 레바인’의‘인도 뭄바이’의 사창가를 배경으로 하는『블루 노트북』이라는 9살 소녀의 성노예로서의 삶에 관한 작품을 읽어내면서 통렬한 아픔과 분노에 가슴을 떨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은 우리와는 무관한 부패하고 무능한 남아시아의 어디에서 일어나는 일화정도로 마음에서 떨쳐냈던 기억이 새로워진다. 이러한 일이 결코 우리의 사회에는 존재치 않으리라는 무지한 위안을 하면서 말이다. 허나 책장을 넘기자마자 한국은 인신매매와 노예이동의 출발지이자 종착지이며, 노예의 수요자이자 공급자로 내내 세계의 주목을 받는 국가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면 수치심과 내 연민의 가벼움에 부끄러움이 몰려든다.

노예매매의 최초 발생지, 종착지, 중간 기착지에 관여하는 나라가 150개국이 넘으며, 세계의 노예인구가 2,700 만 명이 넘어서는 것으로 추산되고, 노예산업이 연간 320억 달러로 폭발적 성장세를 이루는 산업이라는 세계노동기구(ILO)의 발표를 보면서 그만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된다. 더구나 이 수치에 한국이 빠지지 않고 한몫한다는 것은 나, 그리고 우리사회의 도덕적 불감증과 무지가 어느 정도인지 새삼 깨닫게 한다.
여기에 소개되는 주요 사례국은 캄보디아, 태국,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인도, 파키스탄 등 남아시아, 우간다, 수단 등 아프리카, 루마니아, 알바니아, 몰도바,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 페루 등 남미, 그리고 미국이지만, 한국은 이들 나라의 아동의 성 착취와 인신매매, 아동의 노예노동, 매매춘산업의 수요자로서 또는 공급자로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들 노예산업의 부도덕과 불의에 대해 이렇듯 세계가 명확하게 인식함에도 왜 근절 되지 못하는 것일까 하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그러면 영국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의 말을 인용해보자. “악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선량한 사람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우리 대다수의 사람들이 부정의에 대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현실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결과론적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원인을 해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의“시간과 돈과 재능”을 회피해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임을 강조해두자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에는 분명 “가난과 사회적 불평등이 만연한 곳” 즉 사회 안전망이 무너진 지역의 사람들이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서 인신매매업자들의 노예공급 사슬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다. 또한 자본주의의 자유 시장경제 하에서 노예 소유자의 입장을 보면 노예산업만큼 거의 모든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며 하늘 높은 고수익을 가져다주는 것이 없다는 점이며, 극도의 가난과 무력 갈등, 급격한 산업화와 폭발적인 인구 성장으로 사회의 안정성이 붕괴된 지역에서는“예비노예들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넘친다는 것이다. 소개되는 가슴 아픈 사례들은 바로 이러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인신매매업자들의 폭력과 납치, 채무노동을 미끼로 한 각종의 사악한 수법과 국경을 넘어서는 국제적 노예의 이동 루트를 조명하고 있기도 하다.

참혹한 중노동과 구금에 시달리던 일가족, 프놈펜 사창가의 어린 소녀의 노예화 과정에서 구호단체의 구출작전과 이들의 보호와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후관리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인 구제와 구호를 위한 세계의 숨은 노력들이 소극적이기만 했던 참여의 연민을 일깨운다. 더구나 우간다 반군에 납치되는 어린 소년, 소녀들이 살인기계로 양성되어 동족을 학살하는 무심한 인간으로 변질되는 과정의 추적은 법과 도덕적 질서가 무시되고 조롱되며 그 집행이 유명무실해진 나라에서 정의를 말하는 것은 정말 헛되기만 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갖게까지 되기도 한다. 급기야 권력의 상층부에 있는 정부관리들은 물론 경찰,검찰 등 공권력까지 성매매알선 사업에 깊이 개입하거나 결탁하는 페루와 같이 국가의 안전망이 완전히 해체된 사회에서는 아동과 여성들은 노예산업의 피해자로 그대로 노출되어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혹감을 넘어 세계사회의 분노를 보여주고 싶을 정도이기도 하다.

한편 서유럽 인신매매 루트의 주요 관문인 이탈리아의 어업도시‘산포카’를 보면서, 우리의 현실을 생각게 되는데, 미국사회를 발칵 뒤집은 미국일간지에 사흘에 걸쳐 특집기사를 장식한 “한국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팔려간 십대 소녀 이야기”는 더 이상 남의 문제로 간과하고 있을 일이 아니라는 각성을 하게 한다. 법집행기관과 인신매매업자의 결탁이란 현상을 내재하고 있는 이러한 양상은 곧 사회의 부패와 정의의 실종을 드러내는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세계 노예노동과 인신매매의 공급사슬에 버젓하게 이름을 내미는 우리 사회의 내부를 진지하게 점검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며,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경쟁력 높은 고수익 산업이란 물질중심의 탐욕이 만들어내는 노예산업의 공급사슬을 추적하고 그 뿌리를 뽑아내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 선량한 대중들은 이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범죄조직, 부패한 권력과 정의를 위한 싸움에 헌신하고, 자유가 박탈된 고통에 시달리는 성 착취와 노예노동에 신음하는 이들을 탈출시키고 구제키 위해 분투하는 인도적 구호기관과 단체, 그 구성원들에게 작은 격려와 참여로 지지를 보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사고 팔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한낱 구호로서가 아니라 더 이상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제가 몰고 온 이 처참한 물신주의의 폐해를 넘어 새로운 정신적 가치를 일궈내기 위한 노력으로서 인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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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월색 - 안국선.이해조.최찬식 소설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30
안국선.이해조.최찬식 지음, 권영민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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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의 영미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해외고전은 읽어도‘신소설(新小說)’이라 불리는 당대의 우리문학 작품은 왠지 국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정도로 치부하고 대중의 독서물(讀書物)로서는 부적절하다는 선입견을 가져왔다.
고작 신소설 작가 몇 사람의 이름과 작품명, 그리고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는 대강의 이야기흐름만을 가진 천박하고 막연한 이해로 식자연하는 것이 고작이었다는 것이 솔직한 모습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이들 신소설이 뛰어난 작품성을 지니고, 고고한 문학적 향취를 지녔다거나 세계의 고전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세풍을 견뎌낼 만한 숭고한 인류의 사상적 가치를 표현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한국의 문학사에 있어 본격적인 근대문학을 준비하는 토대가 되었으며, 신문명과 근대사상을 보급하는 중대한 역할을 하였던 작품들임을 결코 가벼이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신소설이란 1906년부터 약 10년간、구한말 개화기의 啓蒙文学이라 할 수 있다. 조선반도를 에워워싼 세계열강들의 외압에 대결할 만한 정신적, 물질적 기반이 모두 취약했던 당시로서는 근대화된 서구와 일본 등 외세에 무력 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개화된 일부 지식인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깨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지니게 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이 시기는 을사늑약과 한일합방이라는 식민지사회로의 이전이 있기에 자주독립, 신교육, 과학지식, 미신타파, 남녀평등과 여권확장, 민주주의와 같은 사상의 근대화는 절실한 것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 발표된 신소설 모두가 구한말 조선인의 순수한 정신적 각성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 작품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인 대동아공영의 찬양, 고무와 같은 친일(親日)적인 것들도 있지만 역시 야만에서 문명으로 개화한다는 근대성의 추구라는 의미만은 공통적인 것이었다 하겠다.

이 소설집은 1908년에 발표된 안국선의 『금수회의록』과 이해조의 『구마검』. 1910년에 발표된 이해조의『자유종』, 그리고 1912년 발표된 최찬식의『추월색』 네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따라서 1910년의 한일병합을 전후하여 계몽의 주제가 확연하게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장 이른 시기에 발표된『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은 그야말로 결딴난 당시 사회의 패악과 무력감을 냉혹하게 비난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해 그 부도덕함을 준엄하게 논박하고 있는 것은 수록된 여타 작품들에서는 발견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작품 모두(冒頭)에“지금 세상은 인문이 결딴나서 도덕도 없어지고, 의리도 없어지고, 염치도 없어지고, 절개도 없어져서 사람마다 더럽고 흐린 풍랑에 빠져 헤어 나올 줄 몰라서 세상이 다 악한 고로...”하고 시작한다. 결국 인간들은 금수나 초목보다 못한 것들이어서 바로 금수(禽獸)와 초목(草木)이 인간의‘무도패덕(無道悖德)’함을 공격한다는 명분을 부여하고, 이어 동물, 곤충들이 연이어 연단에 서서 고사성어를 빗대어 인간의 패덕을 조롱하고 비판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날더러 도적놈 잡으라하면 벼슬하는 관인은 거반 다 감옥서 감이요.”하는 구절에 이르면 오늘의 한국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100년 전의 그 때를 판박이 한 것만 같은 마치 시간이 과거로 회귀한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될 정도가 된다.

그러나 같은 해 발표된『구마검』에서는 일체의 정치적 자존을 외치는 목소리가 없다. 다만, 미신타파라는 하나의 주제로 허무맹랑한 무당의 사욕이 한 사대부가를 패망에 이르게 할 정도에 이르는 과정을 미신에 모든 행위를 기탁하는 무지한 아낙네를 중심으로 무참하게 그려내고 있다. 사실 극단적인 무당(巫堂)맹신의 서사는 지나치게 과장되어서 당시에 그 계몽적 효과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소위 공동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전통사회와의 단절을 획책하기 위한 근대화 전략에 지적고뇌 없이 백성들을 계도하려했던 당대 지식인의 한계를 보는 안타까움이 드는 작품이라 하겠다.

같은 작가의 작품인『자유종』은 합방을 불과 1개월 남짓 앞둔 시기에 발표된 작품인데,『구마검』과는 달리 부권(婦權)을 확보하자는 양성평등과 나아가 국력의 신장을 이루기위해서 여권(女權)은 절대적 필수라고 주장하며, 국세(國勢)가 빈약한 것은 학문이 없는 연고이며,  자국 정신은 간데없고 “중국 혼만 길러서 언필칭 『좌전』이라 『강목』이라 하여 남의 나라 기 천년 흥망성쇠만 노래하고 내나라 빈부강약은 꿈도 아니 꾸다가 오늘 이지경”에 이르렀다고 주체적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 역시 오늘의 한국사회가 미국중심의 일방적인 문화와 교육수용으로 사상의 불균형이 초래되고 사회분열을 조장하는 힘이 되어“주체는 없고 객체만 숭상”하는 모양과 한 치의 차이도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는“묵은 허물을 일제히 벗어버립시다.”고 주장하며, “조금 유식하다는 사람들과 늙은이들은 벗기가 극히 어려워 ~(中略)~ 반쯤 벗다가 기진하거나, 아니 벗으려고 앙탈하다가 죽는 사람도 왕왕있습니다...”하고 보수적 집단들의 변화에 저항하는 모습을 빗대어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아무튼 문학적 성취라 이를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우나 당대의 사회상을 오늘과 견주어 보는 재미가 쏠쏠한 것은 사실이다.

끝으로 합방이 이루어진 1912년 발표된 『추월색(秋月色)』은 그야말로 이전의 작품들과 완연한 차이를 인식할 수 있다. 작품의 배경 역시 일본 동경의 우에노(上野)공원, 신바시(新橋),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경성(京城)과 만주 봉천까지를 아우른다. 정임과 창영이라는 어린 소녀와 소년의 성장과정에서 겪는 천신만고(千辛萬苦)끝의 헤피엔딩이라는 다소 의아한 사건들의 진행 속에서 신문명의 당위를 강조하는 연애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어린 시절 혼인이 약조된 창영의 집안이 민란으로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자 시집을 보내려는 부모를 과감히 떠나 일본의 유학길로 도피하는 정임이라는 여성을 그려낸다.

구습(舊習)에 대항하여 신문명의 효율성과 합리성이란 장점, 그리고 물질적 풍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지나치게 우연성에 의지하는 등 소설적 엉성함이 다소 읽기를 방해하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봉천으로의 신혼 여행길에선 젊은 부부는 부설된 철도를 놓고“동양행복의 기초”, “황색인종도 차차 진흥되는 조짐”이라는 등의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를 향한 야욕을 비판 없이 수용, 편승하는 것과 같은 무지함이 있다. 다만, 수록된 네 작품 중에는 그나마 가장 근대문학에 가까운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는 비교적 세련된 작품이어서 춘원 이광수의『무정(無情)』과 유사한 느낌을 갖게도 된다.

한편 이 소설집은 잊혀진 우리말 표현들이나 고사성어들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어 여러모로 유익한 독서가 되기도 한다. 100년 전의 그 때와 오늘을 비교해보는 간접적인 사회학적 체험과 같은 뜻하지 않은 수확도 안겨 주며, 작품의 해설은 물론, 각 작품마다의 어휘들에 대한 사전이 수록되어 있어 우리 문학학습에 유용한 도서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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