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에게 날개 달아주기 - 이외수의 감성산책
이외수 지음, 박경진 그림 / 해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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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물과 부딪치다 보면 인생과 자연의 섭리, 우주 삼라만상에 대한 깨달음이 어느덧 깃들기 시작하고, 볼 수 없었던, 보지 않았던, 그리고 이성에 금지당하고 은폐되었던 진실과 조밀하게 연결된 세상의 진면목을 조금씩 알게 된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것을 어찌 보잘 것 없는 조악한 사람의 언어로 표현 할 수 있겠는가마는 어렴풋하게 인생의 길을 안내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젠 사유의 세계와 경험이란 연륜이 깊어진 작가가 이러한 삶의 지혜들을 자신의 목소리와 또한 이를 대변하는 명인들의 일화, 고사, 우화, 금언, 잠언 등 아포리즘(aphorism)으로 엮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인생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은 마음의 울림을 준다.

허영, 위선, 기만의 본성을 질책하기도 하고, 좌절과 절망으로 암흑을 헤매는 고통의 실체가 삶의 과정이며 도구임을 깨우치게도 해주며, 어리석음과 과욕이 불러내는 자멸의 이치, 부분의 집착으로 생명을 잃고 사물화하고 기계화되는 자아를 상실한 오늘의 우리들을 물질로 환원할 수 없는 감성의 숭고한 세계로 인도하기도 한다.
현실, 시대에 압도당해서 의지를 상실하거나 자유를 상실한 젊음에게 “선택의 여지없는 상황에”처해 선택을 강요당하는 불행을 자초하는 무지와 안이함을 번뜩 깨닫게 하고, 순간 우쭐함에 젖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개구리의 우화처럼 자만의 실체를 보여주거나, “남을 욕하고 싶을 때는 그가 당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생각하라.”고 인간 실체의 진실을 향한 전체상으로 이끌어주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구름이 무한히 자유로운 것은 자신을 무한한 허공에다 버렸기 때문이다.”처럼 자율과 자유란 무엇인지, “실 날 같은 소리라도 밖으로 표출하려면 실 날 같은 바람 한 가닥이라도 만나야 한다.”는 나와 세계와의 상호작용이란 존재의 섭리를 가르쳐주고, 무지와 발전, 그리고 궁극의 멸망이란 역사의 이치를 통해 자기인식과 반성 없는 현대인의 반복되는 우(愚)를 경고하기도 한다. 바로 이처럼 무질서하게 배열된 듯한 이 아포리즘들이 전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작가의 사람에 대한 진한 애정이 베어 가지런히 정렬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한편 뼈있는 진리들이 저절로 우리에게 체화되는 재미있는 일화들로 미소를 머금게 하는 재치넘치는 구성이나, 각 장마다 수록된 몇 편의 감성 시(詩)는 은유라는 보다 원천적인 마음의 세계로 시선의 지평을 확장케 하는데, 감칠맛 나는 다음과 같은 시는 해맑은 진솔함과 낭만, 그리고 우주와의 멋들어진 교감까지 산다는 것의 진면목을 느끼게 해준다.

「보름달」

얇은 속옷 밖으로 드러나는 네 무릎
어느 중이 훔쳐다가 부처님께 공양했나
달도 참 밝구나     - 본문 P 323 에서

아마 진리란, 지혜란 보려고 애쓰는 사람만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육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 따위에게 고작 생명 없는 물질밖에 더 보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절망 속에 창조와 희망이 있고, 시련 속에 평화가 있듯이 우연 속에 필연이 있다. 사람이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일상에서 우리가 잊고 지내던 삶에 깃든 진실들을 통해 희망과 행복의 날개를 달아준다. 작가와 같이 수록된 이 아포리즘들의 산책을 끝내고 나면 우리 내면의 그릇이 제법 커져 있음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세상살이에는 비록 서툴지 몰라도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혜안과, 행동의 용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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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나라의 작가들 - 대화적 관계로 본 문학 이야기
최재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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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있는 그대로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즉 모든 것을 독립적이고 부분적인 단절의 그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상호 연결된 구조로서 이해한다면 사실 우리들의 생각이 서로 닮은꼴을 하고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텐데, 어느 순간부터 고작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란 한계를 가지고 분석하고 짜깁기하는데 익숙해져 정작 진실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학 작품을 접하는 우리네에게 저자가 발견케 해주는 서로 다른 작품들의 다채로운 방식의 연결의 드러냄을 통해 알지 못했던, 또한 알려지지 않았던 의미의 발굴과 소개는 가려졌던 진실을 그의 말대로 “조금은 넓고 깊어지게”해준다.

선행자로부터 후행자에게 꽃다발이 전해지는 축적됨의 문학사적 의의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구조와 본질을 보다 넓고 깊게 전체적인 형상으로 볼 수 있게 하여주는 의미 깊은 시도라 하여야 할 것이다. 단지 문학적 영감의 일치라 볼 수밖에 없는 동일성에서부터 선배 문인(文人)에 대한 존경의 뜻을 가득 품은 오마주, 때론 원작을 비비꼬고 조롱하는 다시쓰기, 그리고 동일한 모티프나 서로의 작품에 우정과 사랑, 경외로 소통하는 작품의 형태까지 그 거울의 모습은 다양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그 대화의 질이 어떻든 그 소통의 변주들에서 우리네 심성의 보다 풍부한 전경을 읽게 되는 것은 이 저작의 진짜 힘이라 할 수 있다.

20여 쌍의 거울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지만 그 거울의 상(像)은 사랑이고 존경이며 공감이기도 하지만 저항과 뒤틀림, 적대감이기도 하다. 바로 이렇게 흥미로운 연결을 지닌 작품들을 대함으로서 미쳐 보지 못했던 의미를 비로소 보게 되고 앎의 지평이 넓어진다. 복제된, 독자적 하루로서 의미를 지닐 수 없는 반복의 하루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란 모티프는 아마 국경과 거리를 초월하는 인간의 보편적 형상일 것이다.‘안정효’와 ‘밀란 쿤데라’의 오묘한 영감의 일치처럼 말이다. 그리고 분명 같은 인물을 소설화하였음에도‘김동인’의 「김연실 전」은 ‘정이현’의 「이십세기 모단걸 - 신 김연실 전」에 와서 심하게 공격당하고 일약 창부에서 세대와 투쟁한 여성전사로 재해석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채만식’의 「치숙」은 존경을 그득 담은‘송경아’의 「치숙」으로 더욱 빛나고,‘최인훈’은‘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를 거의 일반명사화 시키는데 공헌하기조차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내면은 무릇 수많은 방해작용으로 제한된 대상만을 인식하지만 이들 작가들의 누적된 관점을 통해 보다 원형에 가까운 세상의 이해에 근접하게 된다. 더구나 이러한 거울 작품들이란 존재 자체가 두 세계의 본질이 여전히 바뀐 것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할 때 어쩜 동일함의 반복은 그리 달가운 현상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같은 곳을 바라보는 존재의 확인은 분명 기쁜 일임에 틀림없다. ‘신석정’의 「작은 짐승」과 ‘안도현’의 「저물 무렵」에서 발하는‘蘭이와 나’ 또는 ‘그 애와 나’처럼 말이다. 우리 문학작품을 새삼 넓게 열리고 깊이있게 이해하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저작이다. 저자의 기대를 넘는 문학의 영감까지 많은 도움을 받았다. 우리 문학의 이해를 높여 독자의 지평을 넓히는데 커다란 기여를 할 저작이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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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노바의 귀향.꿈의 노벨레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7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모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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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을 전후하여 인간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강요하는 전환의 시기에는 항상 인간을 분열적인 존재로 비치게 하는 그 무엇이 불안을 증폭시키는 모양이다. 20세기를 전후하여 독일사상의 한 축을 차지하는 프로이트, 말러, 클림트, 호프만슈탈, 베어호프만 등과 함께‘청년 빈파’의 일원이었던 슈니츨러의 작품들은 그래서 왠지 모를 수치심과 분노, 무력감이 교차한다.
두 편의 소설이 수록된 슈니츨러의 이 작품집은 젊고 자유분방한 욕망의 화신으로서의 카사노바가 아니라 노회하고 영락한 카사노바를 그리고 있는가하면, 제도적 결혼의 내밀한 분열을 도덕적 편견과 숨겨진 욕망의 갈등이라는 꿈의 환상을 통해 심리적 일탈을 겪는 부부의 내면을 쫓고 있다.

카사노바의 귀향(Casanovas Heimfahrt)에 대해서

중노년기에 접어든 카사노바, 한 때의 광채가 서서히 꺼져가는 모험가의 누추한 모습에서 시작된다. “새로운 사랑의 보금자리를 위한 하룻밤 동안에는 현세의 온갖 명예와 저세상의 온갖 지복도” 관심 밖이었던 사람, “열망에서 욕망으로, 욕망에서 열망”을 추구하던 영원한 젊음의 심벌같기만 한 카사노바의 늙고 낙망하여 실존의 위기에 처한 모습은 아주 낯섦, 그것이다. 추방당하여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가기만을 고대하던 차에 자신의 작은 도움으로 부유한 중산층으로 일어난 추종자의 초대를 받게 되고, 그 저택에 기거하는‘마르콜리나’라는 처녀에 대한 욕망으로 포위된다.

“욕망의 온갖 격정과 청춘의 모든 활력이 혈관을 통해 흐르는 것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지금의 나는 그 당시의 카사노바가 아닌가?”더구나 “그 보잘것없는 늙음의 법칙이 왜 내게도 적용돼야 하는가.”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부인은 교활하고 기만적인 사건을 만들어낸다. 카사노바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심드렁한 그녀를 소유하기 위해, 그녀의 애인인 청년장교 로렌초의 노름 빛을 대신 청산하여 주기로 하고 캄캄한 밤에 로렌초로 변장하여 침실로 잠입한다는 거래를 성사시킨다. 격렬한 정사를 치루고 성취에 취하여 깊은 잠에 빠져 날이 밝기 전에 내뺀다는 계획은 그르치고 만다.
수치심과 경악에 빠진 마르콜리나의 눈길에서 그는 “도둑놈, 난봉꾼, 악당”이란 분노를 본 것이 아니라 그 눈이 하는 말은‘늙은이’라는 것이었으니, 이만큼 그의 정체성, 존재를 명료하게 확인시켜 주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말처럼“늙음이 젊음을 형용키 어려울 만큼 속죄할 수 없는 능욕”이상임을 의미한다.

이‘에로스적 합일’의 파렴치하고 기만적 연출은 오히려 젊음과 남성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아니라 신화의 파괴, 정체성의 상실, 도덕적, 인간적 몰락이란 자기파멸의 재촉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에 더해 수치심으로 도피하다 마주친 로렌초를 죽이게 함으로써 젊음을 동일시한 카사노바의 신화적 정체성을 완벽하게 제거해 버리고, 이것도 부족했던지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와 여관방에 피로해진 몸을 누이는 카사노바를 꿈도 꾸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한 채 그저 잠들게 한다. 아마 이처럼 철저하게 신화를 파괴하는 작품도 드물 것이다. 결국 죽어서야 영속성을 얻는 자연의 순리가 이렇게 엄숙할 줄이야. 늙음, 늙은이가 되는 것에 저항할 길은 없다. 저항할수록 수치심만 깊어질지니...

꿈의 노벨레(Die Traumnovelle)에 대해서

이 작품은 니콜키드만과 톰크루즈가 열연한 영화 '아이즈 와이드 샷(Eyes Wide Shut, 1999)'의 원작이다. 내면의 심리적 묘사로 이루어진 소설이다보니 영화도 꽤나 몽환적으로 그려졌다는 기억이 든다. 가장무도회, 일탈, 에로티즘, 꿈과 현실, 현실과 꿈의 미묘한 교차와 혼동이 불러내는 은폐된 갈망의 모습들이란 언어만으로도 이미 선명함을 거부하는 내밀한 무엇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아내 ‘알베르티네’의 꿈으로 은폐된 현실의 욕망, 남편인 의사‘프리돌린’의 현실 속 욕망의 꿈에서 우린 포장된 거짓 환상이라는 위험한 심리적 위기를 읽게 된다. 꿈속의 에로스적 희구와 심리적 일탈을 고백하는 아내, 이와는 달리 현실에서 이중적 삶을 꿈꾸는 남자의 행로는 부부이지만 “우리 사이를 가르는 칼 한 자루”가 놓여있는 것처럼 각자 서로 낯선 다른 세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소설의 제목에 있는‘노벨레(Novelle)'란, 본디“하나의 갈등구조를 정점까지 고조시키는 드라마적 구조를 갖는 산문이나 운문”을 의미한다고 한다. 특히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이“이중 노벨레 (Doppel-Novelle)”였다고 하는 것은 프리돌린과 알베르티네의 에로스적 모험을 고조시키는 이중구조에서 잘 드러난다. 사실 평범한 우리네들의 내면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인데, 우린 사회의“금지령과 규정, 성적인 터부와 명예에 관한 불문율” 때문에 마치 모든 것이 안정된 것처럼 질서와 균형을 잡아가며 살고 있지만, 열정적 포옹과 애무에서도 예정된 고난에 대한 예감 때문에 몹시 우울한 느낌이라는 아내나, 늦은 밤 돌아와 아내의 몸에 닿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그 멀고 낯선 감정의 세계와 같이 내면의 세상은 비밀스럽고 위선적이기도 하다.

부부 사이에 드러낼 수 없는 숨겨진 욕망과 잠재된 갈등이 사회적 안정의 욕구와 에로스적 일탈의 심리를 반복하며 환상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종국에는 양자 모두 에로스에 대한 기대의 포기로 위기를 극복하고 제도와 규범, 안정을 선택하지만 내적 결속에까지 이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이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일면 외관상의 행복이 찾아온 것 같지만 침실에 나란히 누워있는 부부가 꿈을 꾸지 않고 있다는 작가의 짓궂음에서 왠지 쉽사리 깨질듯 한 유리병을 상기시킨다. 규범, 제도, 정체성,...이러한 모든 것들, 즉 사회적 장치에 얽매여 놓칠 수밖에 없는 많은 것들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꿈이나 꾸어야 할까? 아니면 좀 냉소적으로 이중의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내면의 흐름이 돋보이는 뛰어난 심리극이라 해야 할 것 같다. 30~40대의 부부들이 한 번쯤 읽어 볼 만 한 작품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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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 이야기 3 - 남방의 웅략가 초 장왕 춘추전국이야기 (역사의아침) 3
공원국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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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중국의 고서들을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옮겨오는 여타의 이야기책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12권의 저작은 신선하다. 서로 다른 내용의 진위를 검증하고, 허구에 불과한 진술이라면 왜 그러한지, 역사는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여야 하는 것인지, 오늘에서 우리가 발견하고 새겨야 할 것은 진정 무엇인지를 말하는 역사서이다. 지리적 역사성은 물론, 지역의 특수성과 당대의 역학적인 국제질서, 정치문화적 당위성의 배경에 대한 고증에서부터 『사기』,『여씨춘추』,『국어』,『신서』,『좌전』에 이르는 총체적인 사서들의 비교분석까지 실로 방대한 작업의 산물로서 저자의 노력을 읽을 수 있는 저술이다. 아마‘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서구 고대사를 대표한다면, ‘공원국’의 『춘추전국 이야기』는 동양 고대사로서 이를 뛰어넘는 저술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춘추시대란 기원전 8~5세기경 중국대륙의 고대국가들이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할거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방대한 저술 중 제 3권인 「남방의 웅략가 초(楚)장왕(莊王)」은 오늘날의 거대한 중국이라는 나라를 등장하게 한 기원전 7세기말~6세기 초의 중원 중심의 중국관을 요동치게 한 역사의 전환 시기라는 측면에서 예사롭지 않은 관심을 가지게 한다. 소위 남쪽의 오랑캐라고 치부하던 화하중심의 중국인의 허세를 여지없이 허물어대는 독자적인 남방문화의 발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초가 등장하지 않았으면 중국의 팽창은 거기서 멈추었을 것”이라는 역사인식처럼 황하이북의 중원의 낡은 사상만으로는 팽창하는 세계를 담지 할 수 없었다는 이해이다. 초(楚)의 대두는 그만큼 오늘의 중국을 이루는 결정적 역사의 대사건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한수와 장강을 끼고 있는 물의 나라, 물을 빼고는 말 할 수 없는 나라인 楚는 이미 많은 의미를 품고 있다. “흐르는 물은 소통의 물이자 싸움의 물이다.”라는 구절처럼 문물의 자연스러운 교통을 만드는가하면 곧 갈등이 도사린 불온의 상징이기도 하다. 힘이 강대하면 세력의 확장을 위한 유용한 통로이지만 반대의 상황에는 그만큼 불리한 것이다. 역사는 양면을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기원전 614년에 왕에 등극한 장왕(莊王)은 춘추오패 중 한 사람으로서 당대 중원중심의 무대에 초라는 나라를 등장시킨 인물이다. 일개 오랑캐로 치부되던 남방의 한 나라가 영토를 확장하며, 중원의 패권국으로 자임하던 진(晉)과 제(齊), 그리고 진(秦)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패자로 부상하였으니, 중원 중심의 중국 역사는 새롭게 재편되어야 했을 것이다.

비로소 역사의 무대에 초나라를 등장시킨 핵심 인물인 장왕, 그리고 장왕이 그러할 수 있도록 조력한 재상‘손숙오’의 됨됨이에 대한 기록은 그대로 정치학이고 도덕철학이 되고 삶의 지혜가 된다. 유명한 절영지회(絶纓之會)라는 고사처럼 장왕의 관대함은 돋보인다. 아랫사람을 끔찍하게 아꼈던 군주, 무(武)란 무릇 창을 멈춘다. 즉, 지과지무(止戈之武)를 말하며, “포학한 것을 금하고, 병기를 거두어들이며, 큰 것(나라)을 지켜가고, 공업을 안정시키며, 백성을 평안히 하는 것”이라 말하는 멈춤과 절제, 바름(正)의 정신이 선 군주가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어쩜 당연하게 보이기조차 한다.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을 때, 죽은 적군을 위해 슬퍼하고 승리를 상례로 처리하는 자세는 적에게까지 외경을 갖게 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중원의 패자인 진(晉)의 남하를 경계하기 위해 진의 위성국들인 정(鄭)과 송(宋),진(陳)등을 복속시킬 때에도 한 결 같이 무력보다는 화해와 동반자로서의 협력을 요구하는 덕의 정치의 진수를 보게 된다.

이와 더불어 『사기』에서 훌륭한 관료의 원형으로 칭송되는 재상,‘손숙오’의 청렴과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관료의 미덕은 장왕의 무사(無事)를 보완하는 탁월한 정책가로서 초의 성장을 주도한다. 이들 장왕과 손숙오의 사상적 배경으로『노자』사상이 깃들어 있음을 설명하는 장은 이 저술의 또 하나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운동은 관성의 지배를 받아 평형에서 멈추지 못하지만 멈출 줄 아는 것, 자신의 임계점을 명확히 인식하려 한 것이나,“골짜기는 낮은 곳에 처하기에 물을 받아들인다.”는 노자의 정신이 그대로 스며들어 그 낮춤이 주변국을 초에 끌어들임으로서 패자로서의 성장 동인(動因)이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인물의 해독에 못지않게 당대의 국제질서와 사건들에 얽힌 사회, 경제적 배경이나 각 나라들의 정치적 상황, 하물며 군제나 토지제, 기타 문화적 차이에 대한 치밀한 설명들이 왜 그러한 역사를 만들어내게 되었는지를 명쾌하게 납득시키고 있기도 하다. 일례로 초와 진(晉), 양국에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어낸‘언릉 전투’에 얽힌 진의 충신‘사섭’의“밖이 편하면 반드시 안의 우환이 있습니다.”라는 내우외환(內憂外患)에 대한 충언은 이 저술의 매력적 구성을 대변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사건과 그와 관련한 고사, 그리고 그 의미에 내재한 파급적 현상들이 미시적이고 때론 거시적 관점을 아우르면서 역사적 통찰을 해내는 것이다. 이로부터 오늘의 우리가 되새겨야 하는 지혜들은 정말 번뜩인다. 전쟁과 권력과 정치의 상관관계, 그리고 도덕성의 문제에 까지.

이 저작의 비판적 시각이 특히 돋보이는 것은 중원 중심의 북방 연합을 와해시키고, 춘추질서의 새로운 담지자로 등장한 초나라에 대해 중원과는 다른 강한(江漢)일대의 토착문명을 기원으로 독자적 정체성을 가진 국가로 재조명하고, 인간에 대한 관념적 선진성을 지닌 초의 사상과 문화를 흡수함으로서 비로소 초라하고 낡은 중원을 탈피해 중국의 팽창이 가능해졌음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중국 고대 한자 기록의 5할은 허구라고 초나라를 저평가한 편협한 중화사상과,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면 보이는 중국인들 특유의 정신승리법인 허세의 위선을 비판한다. 주 왕실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왕을 칭하며 황하가 아니라 한수와 장강에 제사를 지낸 남방의 패자, 낭만과 실용의 정신, “눈보라의 차가움과 꽃의 정열이 한꺼번에 있는 곳”, 초(楚)의 문화를 비범하게 읽게 해주는 걸출한 역작이다. 빛나는 성찰들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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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굴레 1 홍신 엘리트 북스 13
서머셋 몸 지음 / 홍신문화사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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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사회상태의 실정적 요소들에 사람이 어떻게 강제되고 그래서 순수한 이성에 때가 묻는지, 그런데 삶을 되돌아 볼 수 있을 정도의 경험이 쌓인 후에 그 영상들을 천천히 감상하게 되면 사람들이 그것을 성숙이라는 말로 터무니없이 포장하고 비로소 적응했다고, 온전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고 하는 황당함에 욕지기가 치미는 참을 수 없는 역겨움에 분노가 치미는 것이다.
이런 불쾌감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무런 의문도 없이 잘 길들여진 순한 양처럼 온갖 전략적인 사회적 장치들에 순응하여 살아 온 삶이 불현 듯 항의 할 구체적 대상을 찾을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필립’이라는‘서머셋 몸’의 소설 속 분신인 인물이 소년에서 장년에 이르며 마주하는 삶의 그 수많은 감정적 요소들이 마치 지금의 내가 감당해 온 삶의 역사와 다를 수 없다는 이해에서 기인하는 것일 게다. ‘몸’의 자전적 소설인 이 작품의 표제가 몇 차례의 변경 끝에‘스피노자’『윤리학』의 한 표제인「인간의 굴레」를 인용한 것은 사회의 유무형의 힘인 장치들이 작동하는 현장에 포획당하지 않고 그 속성을 관찰 할 수 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바로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이 빛나는 통찰의 언어만으로도 소설은 이미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린 어린 시절 가족들에게서 그리고 학교라는 집단의 규범 속에서, 또한 이상과 취향에 따른 또래들과의 상호작용에서, 나아가 이질적인 보다 큰 사회의 무리와 소통과 단절을 지속하면서 자기만의 삶을 구축해 나간다. 그러나 이 자신만의 삶이란 것이 순전히 개인의 자율로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가족, 학교, 또래집단, 사회의 이상과 규범으로부터 무언의 강제와 주입의 영향 하에 내면화되는 것이니 여기에 저항하는 사람이 되면 삶이 그리 순탄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의사인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어린 필립은 목사인 백부와 백모의 슬하에서 성장하게 된다. 아이가 없는 백모의 헌신적이고 조심스러운 사랑과는 달리 인색하고 속물적인 백부의 위압적인 훈육은 다리를 저는 아이의 사회성을 위축시키고 모든 언어와 행동을 내면으로 숨어들게 한다. 왕립학교에서의 생활은 절름발이 소년에 대한 또래의 공격과 조롱에 대한 저항과 순응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속성의 본질을 터득케 하고, 교사와 교장이라는 어른들, 기성 사회의 졸렬하고 구차한 삶의 위선들을 관찰하는 시간이 된다. 대학 진학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정형화된 구속을 벗어나기 위해 독일 하이델베르크를 향하는 필립의 저항적 행위는 청년으로 성장하는 소년의 정신세계를 풍부하게 하는 거름이 되지만, 자기 삶에 대한 주도적 능력을 기르지 못한 상태에서의 자유란 자칫 공허한 맹목의 방황 이상이 되지 못하기도 한다. 몸은 이 시기에 대해 어떤 해석을 내리지는 않는다. 다만 새롭게 인식되는 보다 다양한 삶의 모습들에 대한 경험과 이해의 과정, 그 자체로서 기억될 뿐이다.

한편, 필립에게 생의 불안정성, 한계를 암시하는 기호로서 부모가 남긴 2000파운드의 유산은 그의 삶을 실용적인, 아니 속물의 시선으로서 세상을 보게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결국 학업보다는 런던의 회계사무소 보조원으로서 안정적 직업으로 예견되는 생의 수단에 목적을 두지만, 이내 미술 스케치에 대한 주변의 칭찬이 자신의 뒤늦은 잠재력을 발견한 것인 양, 파리의 미술학교로 태도를 전환한다. 여기에서 통상 아이와 부모들은 갈등하고 반목하게 되는데, 직장을 이내 그만두고 돌연 미술공부를 하겠다는 인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아이에 대한 믿음의 상실과 자기 삶의 그럴듯함에 도취된 아이의 대립이다. 상충하는 인식들, 즉 인간의 삶에 유용하다고 간주된 방향을 향해 운용되고, 통치되며, 지도되는 실천과 앎, 제도의 세계에 대한 부딪힘의 결과는 체험만큼 훌륭한 진리는 없을 것이다. 서로 달리 습관화되고 내면화된 개인의 규범은 보다 보편적일 수 있는 기성의 장치에 종속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리에서의 미술학교 생활역시 자신의 역량에 대한 깨달음, 일종의 반면교사라 할 수 있는 재능 없는‘프라이스’라는 동료의 죽음은 이류 화가로서의 불투명한 미래를 확인케 되는 계기가 된다. 이 역시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한 이해보다는 생계의 원활한 수단으로서 자신의 미술세계가 가능치 못하다는 판단에 연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성사회의 장치에 타협하는 것이 그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결론은 확실한 소득을 가져다주는 직업의 길을 걷는 것이 된다. 아마 소설의 실질적 시작은 이제부터라 할 수 있는데,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사면허를 취득하는데 걸린 10년의 세월에 걸친 삶의 이야기이다.

여기 출발점에 서서 필립이 하는 위대한 말이 있다. 이는 그의 인생이 사회와 본격적으로 부딪히는 20대의 장구한 시간이 놓여있는데, 그 한 복판에‘밀드레드’라는 그의‘굴레’가 드러누워 있다. 밀드레드라는 천박하고 간특한 여성의 행동과 교차하며 사회의 속성을 선언하는 가히 몸의 빛나는 통찰력의 진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과의 투쟁에 있어서 사회는 세 가지의 무기를 가진다. 법률, 여론, 양심이 그것이다. 앞의 두 가지는 술책으로 대항 할 수 있는 무기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술책만이 강자에게 대항 할 수 있는 약자의 유일한 무기이다. ~ 中略 ~ 국가라는 유기체와 자의식을 가진 개인, 이 양자가 화목하게 손을 잡는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며...”
즉 사회의 실정성을 이루는 장치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삶의 지혜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필립은 찻집의 웨이트리스인 밀드레드란 여인에 사로잡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지만 여자는 사랑은 물론 그 어떠한 것도 필립에게 진실로 내어주지 않는다. 모욕과 좌절, 수치심만을 안겨주는 여인에 대한 갈망은 그 만큼 자기모멸을 심화시킬 뿐이다.

필립의 사랑과 돈을 마음껏 유린하곤 건달과 살림을 차린 탕녀가 건달의 아이를 임신한 채 잊혔던 필립을 다시금 찾아와 수단으로 그를 이용하며, 필립의 친구와 사통하는 과정은 진정 교활한 장치와의 타협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역설적이게도 이 사회와의 타협이란 것이 이처럼 구역질나는 술책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마 암이겠지만 죽을병에 결려서야 다시 찾아온 탕녀에게 비로소 내보이는 냉소적 연민은 사회와의 타협점을 암시한다. 마침내 밀드레드란 굴레를 벗어나 중단되었던 의사수업과 면허의 취득, 그리고 순수한 이성, 겸손과 배려의 미덕을 갖춘‘샐리’와의 결혼으로 맺는 이 소설은 인간의 성장기에 거치게 되는 의례들을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권력의 장치들과 연계하여 다면적이고 또한 규범의 안팎을 종횡하면서 관찰하게 해준다.

오이코노미아, 실정성, 장치, 규범과 이상이라는 정체성처럼,  그 용어와 의미의 범위의 차이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사회의 행동을 지배하는 모든 유무형의 전략적 힘으로서‘굴레’라는‘서머셋 몸’의 철학적 통찰을 실현한 이 소설은 가히 천재의 면모를 새삼스레 깨닫게 한다. 과연 선의지에 의한 순수이성만으로 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삶이란 어느 만큼은 술책을 용인하여야 하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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