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굴레 1 홍신 엘리트 북스 13
서머셋 몸 지음 / 홍신문화사 / 1995년 12월
평점 :
절판


한 사회상태의 실정적 요소들에 사람이 어떻게 강제되고 그래서 순수한 이성에 때가 묻는지, 그런데 삶을 되돌아 볼 수 있을 정도의 경험이 쌓인 후에 그 영상들을 천천히 감상하게 되면 사람들이 그것을 성숙이라는 말로 터무니없이 포장하고 비로소 적응했다고, 온전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고 하는 황당함에 욕지기가 치미는 참을 수 없는 역겨움에 분노가 치미는 것이다.
이런 불쾌감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무런 의문도 없이 잘 길들여진 순한 양처럼 온갖 전략적인 사회적 장치들에 순응하여 살아 온 삶이 불현 듯 항의 할 구체적 대상을 찾을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필립’이라는‘서머셋 몸’의 소설 속 분신인 인물이 소년에서 장년에 이르며 마주하는 삶의 그 수많은 감정적 요소들이 마치 지금의 내가 감당해 온 삶의 역사와 다를 수 없다는 이해에서 기인하는 것일 게다. ‘몸’의 자전적 소설인 이 작품의 표제가 몇 차례의 변경 끝에‘스피노자’『윤리학』의 한 표제인「인간의 굴레」를 인용한 것은 사회의 유무형의 힘인 장치들이 작동하는 현장에 포획당하지 않고 그 속성을 관찰 할 수 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바로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이 빛나는 통찰의 언어만으로도 소설은 이미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린 어린 시절 가족들에게서 그리고 학교라는 집단의 규범 속에서, 또한 이상과 취향에 따른 또래들과의 상호작용에서, 나아가 이질적인 보다 큰 사회의 무리와 소통과 단절을 지속하면서 자기만의 삶을 구축해 나간다. 그러나 이 자신만의 삶이란 것이 순전히 개인의 자율로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가족, 학교, 또래집단, 사회의 이상과 규범으로부터 무언의 강제와 주입의 영향 하에 내면화되는 것이니 여기에 저항하는 사람이 되면 삶이 그리 순탄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의사인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어린 필립은 목사인 백부와 백모의 슬하에서 성장하게 된다. 아이가 없는 백모의 헌신적이고 조심스러운 사랑과는 달리 인색하고 속물적인 백부의 위압적인 훈육은 다리를 저는 아이의 사회성을 위축시키고 모든 언어와 행동을 내면으로 숨어들게 한다. 왕립학교에서의 생활은 절름발이 소년에 대한 또래의 공격과 조롱에 대한 저항과 순응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속성의 본질을 터득케 하고, 교사와 교장이라는 어른들, 기성 사회의 졸렬하고 구차한 삶의 위선들을 관찰하는 시간이 된다. 대학 진학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정형화된 구속을 벗어나기 위해 독일 하이델베르크를 향하는 필립의 저항적 행위는 청년으로 성장하는 소년의 정신세계를 풍부하게 하는 거름이 되지만, 자기 삶에 대한 주도적 능력을 기르지 못한 상태에서의 자유란 자칫 공허한 맹목의 방황 이상이 되지 못하기도 한다. 몸은 이 시기에 대해 어떤 해석을 내리지는 않는다. 다만 새롭게 인식되는 보다 다양한 삶의 모습들에 대한 경험과 이해의 과정, 그 자체로서 기억될 뿐이다.

한편, 필립에게 생의 불안정성, 한계를 암시하는 기호로서 부모가 남긴 2000파운드의 유산은 그의 삶을 실용적인, 아니 속물의 시선으로서 세상을 보게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결국 학업보다는 런던의 회계사무소 보조원으로서 안정적 직업으로 예견되는 생의 수단에 목적을 두지만, 이내 미술 스케치에 대한 주변의 칭찬이 자신의 뒤늦은 잠재력을 발견한 것인 양, 파리의 미술학교로 태도를 전환한다. 여기에서 통상 아이와 부모들은 갈등하고 반목하게 되는데, 직장을 이내 그만두고 돌연 미술공부를 하겠다는 인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아이에 대한 믿음의 상실과 자기 삶의 그럴듯함에 도취된 아이의 대립이다. 상충하는 인식들, 즉 인간의 삶에 유용하다고 간주된 방향을 향해 운용되고, 통치되며, 지도되는 실천과 앎, 제도의 세계에 대한 부딪힘의 결과는 체험만큼 훌륭한 진리는 없을 것이다. 서로 달리 습관화되고 내면화된 개인의 규범은 보다 보편적일 수 있는 기성의 장치에 종속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리에서의 미술학교 생활역시 자신의 역량에 대한 깨달음, 일종의 반면교사라 할 수 있는 재능 없는‘프라이스’라는 동료의 죽음은 이류 화가로서의 불투명한 미래를 확인케 되는 계기가 된다. 이 역시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한 이해보다는 생계의 원활한 수단으로서 자신의 미술세계가 가능치 못하다는 판단에 연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성사회의 장치에 타협하는 것이 그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결론은 확실한 소득을 가져다주는 직업의 길을 걷는 것이 된다. 아마 소설의 실질적 시작은 이제부터라 할 수 있는데,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사면허를 취득하는데 걸린 10년의 세월에 걸친 삶의 이야기이다.

여기 출발점에 서서 필립이 하는 위대한 말이 있다. 이는 그의 인생이 사회와 본격적으로 부딪히는 20대의 장구한 시간이 놓여있는데, 그 한 복판에‘밀드레드’라는 그의‘굴레’가 드러누워 있다. 밀드레드라는 천박하고 간특한 여성의 행동과 교차하며 사회의 속성을 선언하는 가히 몸의 빛나는 통찰력의 진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과의 투쟁에 있어서 사회는 세 가지의 무기를 가진다. 법률, 여론, 양심이 그것이다. 앞의 두 가지는 술책으로 대항 할 수 있는 무기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술책만이 강자에게 대항 할 수 있는 약자의 유일한 무기이다. ~ 中略 ~ 국가라는 유기체와 자의식을 가진 개인, 이 양자가 화목하게 손을 잡는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며...”
즉 사회의 실정성을 이루는 장치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삶의 지혜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필립은 찻집의 웨이트리스인 밀드레드란 여인에 사로잡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지만 여자는 사랑은 물론 그 어떠한 것도 필립에게 진실로 내어주지 않는다. 모욕과 좌절, 수치심만을 안겨주는 여인에 대한 갈망은 그 만큼 자기모멸을 심화시킬 뿐이다.

필립의 사랑과 돈을 마음껏 유린하곤 건달과 살림을 차린 탕녀가 건달의 아이를 임신한 채 잊혔던 필립을 다시금 찾아와 수단으로 그를 이용하며, 필립의 친구와 사통하는 과정은 진정 교활한 장치와의 타협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역설적이게도 이 사회와의 타협이란 것이 이처럼 구역질나는 술책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마 암이겠지만 죽을병에 결려서야 다시 찾아온 탕녀에게 비로소 내보이는 냉소적 연민은 사회와의 타협점을 암시한다. 마침내 밀드레드란 굴레를 벗어나 중단되었던 의사수업과 면허의 취득, 그리고 순수한 이성, 겸손과 배려의 미덕을 갖춘‘샐리’와의 결혼으로 맺는 이 소설은 인간의 성장기에 거치게 되는 의례들을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권력의 장치들과 연계하여 다면적이고 또한 규범의 안팎을 종횡하면서 관찰하게 해준다.

오이코노미아, 실정성, 장치, 규범과 이상이라는 정체성처럼,  그 용어와 의미의 범위의 차이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사회의 행동을 지배하는 모든 유무형의 전략적 힘으로서‘굴레’라는‘서머셋 몸’의 철학적 통찰을 실현한 이 소설은 가히 천재의 면모를 새삼스레 깨닫게 한다. 과연 선의지에 의한 순수이성만으로 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삶이란 어느 만큼은 술책을 용인하여야 하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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