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노바의 귀향.꿈의 노벨레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7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모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세기말을 전후하여 인간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강요하는 전환의 시기에는 항상 인간을 분열적인 존재로 비치게 하는 그 무엇이 불안을 증폭시키는 모양이다. 20세기를 전후하여 독일사상의 한 축을 차지하는 프로이트, 말러, 클림트, 호프만슈탈, 베어호프만 등과 함께‘청년 빈파’의 일원이었던 슈니츨러의 작품들은 그래서 왠지 모를 수치심과 분노, 무력감이 교차한다.
두 편의 소설이 수록된 슈니츨러의 이 작품집은 젊고 자유분방한 욕망의 화신으로서의 카사노바가 아니라 노회하고 영락한 카사노바를 그리고 있는가하면, 제도적 결혼의 내밀한 분열을 도덕적 편견과 숨겨진 욕망의 갈등이라는 꿈의 환상을 통해 심리적 일탈을 겪는 부부의 내면을 쫓고 있다.

카사노바의 귀향(Casanovas Heimfahrt)에 대해서

중노년기에 접어든 카사노바, 한 때의 광채가 서서히 꺼져가는 모험가의 누추한 모습에서 시작된다. “새로운 사랑의 보금자리를 위한 하룻밤 동안에는 현세의 온갖 명예와 저세상의 온갖 지복도” 관심 밖이었던 사람, “열망에서 욕망으로, 욕망에서 열망”을 추구하던 영원한 젊음의 심벌같기만 한 카사노바의 늙고 낙망하여 실존의 위기에 처한 모습은 아주 낯섦, 그것이다. 추방당하여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가기만을 고대하던 차에 자신의 작은 도움으로 부유한 중산층으로 일어난 추종자의 초대를 받게 되고, 그 저택에 기거하는‘마르콜리나’라는 처녀에 대한 욕망으로 포위된다.

“욕망의 온갖 격정과 청춘의 모든 활력이 혈관을 통해 흐르는 것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지금의 나는 그 당시의 카사노바가 아닌가?”더구나 “그 보잘것없는 늙음의 법칙이 왜 내게도 적용돼야 하는가.”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부인은 교활하고 기만적인 사건을 만들어낸다. 카사노바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심드렁한 그녀를 소유하기 위해, 그녀의 애인인 청년장교 로렌초의 노름 빛을 대신 청산하여 주기로 하고 캄캄한 밤에 로렌초로 변장하여 침실로 잠입한다는 거래를 성사시킨다. 격렬한 정사를 치루고 성취에 취하여 깊은 잠에 빠져 날이 밝기 전에 내뺀다는 계획은 그르치고 만다.
수치심과 경악에 빠진 마르콜리나의 눈길에서 그는 “도둑놈, 난봉꾼, 악당”이란 분노를 본 것이 아니라 그 눈이 하는 말은‘늙은이’라는 것이었으니, 이만큼 그의 정체성, 존재를 명료하게 확인시켜 주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말처럼“늙음이 젊음을 형용키 어려울 만큼 속죄할 수 없는 능욕”이상임을 의미한다.

이‘에로스적 합일’의 파렴치하고 기만적 연출은 오히려 젊음과 남성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아니라 신화의 파괴, 정체성의 상실, 도덕적, 인간적 몰락이란 자기파멸의 재촉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에 더해 수치심으로 도피하다 마주친 로렌초를 죽이게 함으로써 젊음을 동일시한 카사노바의 신화적 정체성을 완벽하게 제거해 버리고, 이것도 부족했던지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와 여관방에 피로해진 몸을 누이는 카사노바를 꿈도 꾸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한 채 그저 잠들게 한다. 아마 이처럼 철저하게 신화를 파괴하는 작품도 드물 것이다. 결국 죽어서야 영속성을 얻는 자연의 순리가 이렇게 엄숙할 줄이야. 늙음, 늙은이가 되는 것에 저항할 길은 없다. 저항할수록 수치심만 깊어질지니...

꿈의 노벨레(Die Traumnovelle)에 대해서

이 작품은 니콜키드만과 톰크루즈가 열연한 영화 '아이즈 와이드 샷(Eyes Wide Shut, 1999)'의 원작이다. 내면의 심리적 묘사로 이루어진 소설이다보니 영화도 꽤나 몽환적으로 그려졌다는 기억이 든다. 가장무도회, 일탈, 에로티즘, 꿈과 현실, 현실과 꿈의 미묘한 교차와 혼동이 불러내는 은폐된 갈망의 모습들이란 언어만으로도 이미 선명함을 거부하는 내밀한 무엇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아내 ‘알베르티네’의 꿈으로 은폐된 현실의 욕망, 남편인 의사‘프리돌린’의 현실 속 욕망의 꿈에서 우린 포장된 거짓 환상이라는 위험한 심리적 위기를 읽게 된다. 꿈속의 에로스적 희구와 심리적 일탈을 고백하는 아내, 이와는 달리 현실에서 이중적 삶을 꿈꾸는 남자의 행로는 부부이지만 “우리 사이를 가르는 칼 한 자루”가 놓여있는 것처럼 각자 서로 낯선 다른 세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소설의 제목에 있는‘노벨레(Novelle)'란, 본디“하나의 갈등구조를 정점까지 고조시키는 드라마적 구조를 갖는 산문이나 운문”을 의미한다고 한다. 특히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이“이중 노벨레 (Doppel-Novelle)”였다고 하는 것은 프리돌린과 알베르티네의 에로스적 모험을 고조시키는 이중구조에서 잘 드러난다. 사실 평범한 우리네들의 내면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인데, 우린 사회의“금지령과 규정, 성적인 터부와 명예에 관한 불문율” 때문에 마치 모든 것이 안정된 것처럼 질서와 균형을 잡아가며 살고 있지만, 열정적 포옹과 애무에서도 예정된 고난에 대한 예감 때문에 몹시 우울한 느낌이라는 아내나, 늦은 밤 돌아와 아내의 몸에 닿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그 멀고 낯선 감정의 세계와 같이 내면의 세상은 비밀스럽고 위선적이기도 하다.

부부 사이에 드러낼 수 없는 숨겨진 욕망과 잠재된 갈등이 사회적 안정의 욕구와 에로스적 일탈의 심리를 반복하며 환상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종국에는 양자 모두 에로스에 대한 기대의 포기로 위기를 극복하고 제도와 규범, 안정을 선택하지만 내적 결속에까지 이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이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일면 외관상의 행복이 찾아온 것 같지만 침실에 나란히 누워있는 부부가 꿈을 꾸지 않고 있다는 작가의 짓궂음에서 왠지 쉽사리 깨질듯 한 유리병을 상기시킨다. 규범, 제도, 정체성,...이러한 모든 것들, 즉 사회적 장치에 얽매여 놓칠 수밖에 없는 많은 것들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꿈이나 꾸어야 할까? 아니면 좀 냉소적으로 이중의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내면의 흐름이 돋보이는 뛰어난 심리극이라 해야 할 것 같다. 30~40대의 부부들이 한 번쯤 읽어 볼 만 한 작품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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