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변 십자가 모중석 스릴러 클럽 31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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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動作)을 통한 심리수사라는 독특한 전문성으로 첫 선을 보였던 여성 수사요원‘캐트린 댄스’의 활약에 심취케 했던 『잠자는 인형(The Sleeping Doll)』이 소개된 지 2년 남짓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아마 목을 기다랗게 늘리고 국내 출간을 기다리던 독자들에게는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래서 내심 오랜 기다림이 오히려 실망으로 돌아서지 않을까하는 우려를 가지고 읽었다고 해야겠다. 혹여 작품의 시간적 반영으로 풍화되기라도 한다면 정말 맥 빠지는 것이기에 말이다.

 

전작(前作)은 컬트 범죄 집단의 교활한 연쇄살인범과 댄스와의 심리적 대결이란 소재를 중심으로 동작학의 기발한 진가를 보여주었다면 이번 작품은 블로그, 메신저, 이메일, 게임 등 가상공간으로서의 온라인의 폐해인 악의적, 감정적 폭력 등 사회 질병적 문제로 그 소재가 진화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자신들과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집단 따돌림, 약자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의 행태 등 기만적인 오늘의 세태도 가세하여 사이버 폭력의 본질을 헤집는다. 단순히 액션과 서스펜스를 버무려 스릴러의 긴장감이나 복선 따위로 독자를 현혹시키는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특히 캐트린 댄스의 두 번째 시리즈인 이 작품이 유혹적인 하나의 이유는 여성 주인공이 표출하는 감성이 여느 남성 중심적 작품과는 그 맛이 확연히 다르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아이들에 대한 관점, 부모와의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의 묘사, 남성의 세계에서 마주하는 여성 고유의 감수성 등이 그것들이다. 한편, 육백 쪽을 넘어서는 분량이 읽기를 압박하지만 차 뒤 트렁크에 갇혀 어디론가 끌려가는 죽음에 직면한 소녀의 긴박한 상황으로 시작되는 장면을 접하면 압도적인 분량을 그만 잊어버리게 된다. 역시‘제프리 디버’의 스토리텔링의 마력을 벗어나기는 수월한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고 해야 할까?

 

‘도로변의 십자가’란 교통사고로 사망한 고인을 추모하는 사고 장소에 세워진 일종의 추모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십자가에 표기된 날자가 혐오스럽고 소름끼치게도 살인을 예고하는 범죄의 표식일 때에는 연민과 숙연함은 사라지고 공포로 뒤바뀐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트렁크에 갇힌 소녀의 발견이 도로변 십자가의 날자와 일치하는 것이고 사건은 단순 범죄 이상의 의미로 해석되게 된다. 그리곤 사회정의를 표방하는 <칠턴 리포트>라는 한 블로그에 사건 피해자와 관련한 교통사고의 당사자를 겨냥한 악의적 댓글들이 사건을 극단적으로 증폭시킨다.

 

단지 가난하고 추레한 환경에서 산다는 이유만으로 동급생들로부터 무자비한 따돌림을 당하는 소년은 어떠한 증거도 없이 블로그의 한 포스트에서 익명의 무자비한 댓글들이 증폭되면서 도로변 십자가의 당사자인 범죄자로 확신되고, 급기야는 잔혹한 살인마가 되어버린다. 서로 다른 의견이 경쟁하면서 궁극에는 진실로 수렴한다는 낭만적인 인터넷 옹호자들도 있지만 현실은 마녀 사냥식으로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진실로 뒤바꾸어 무고한 희생자를 낳고 있다는 것을 우린 잘 알고 있다.

 

여기에 소위 파워 블로거니 스타 블로거니 하면서 자신들이 쏟아낸 말들에 대해 책임이란 단어의 의미를 회피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소음의 병폐는 간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소설은 이렇게 재미없는 주제를 무겁게 다루는 그런 부류의 작품이 아니지만, 사건의 중요한 발단 또는 매개체가 된 블로그의 운영자를 통해서 정보의 자유, 발언(언론)의 자유와 공공적 책임, 사회공동체에 대한 책무의 균형에 대한 세간의 팽팽한 견해의 대립을 자연스럽게 수사의 갈등 속에 녹여내고 있다.

 

캐트린 댄스 등 수사기관은 소년의 잠적에 따라 가상세계의 진위를 알 수 없는 악의적 댓글이 가리키는 소년을 찾기위해 모든 수사력을 동원하지만 블로그의 운영자는 고객의 비밀보호라는 도덕적 책무를 세워 수사의 협조를 거부한다. 도로변 십자가는 거듭 발견되고 피해자와 피살자가 늘어나면서 블로그 운영자의 미온적 협조가 이루어지지만 소년의 자취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부각되는 문제는 사이버 상에 노출된 무수한 익명자들이 흘려 놓은 정보의 악용, 그리고 이러한 익명자들이 키보드 뒤에 숨어 자신들의 분출하는 비상식과 분노를 이용하여 대중의 시선을 모으려는 탐욕, 그리고 이러한 바탕에서 가상의 공간에서야 비로소 힘을 갈구하는 익명자들이 순식간에 증폭시키는 악의의 글들이 발산하는 가학적 폭력성은 그 돌이 킬 수 없는 확산의 위력으로 우리 사회에서도 심각하게 우려 할 정도라 할 것이다. 악의적 댓글을 올렸던 익명자들이 거듭 피살되고 있음에도 블로그 운영에 사회적 긍지까지 가지고 있는 칠턴이라는 자는 바로 이처럼 믿음과 집착을 혼동하고, 옳더라도 틀릴 수 있음을 지각 할 줄 모르는 전형적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소설은 또 하나의 정치적 왜곡의 명제를 들려주는데, 영화, TV, 게임의 폭력성이 아이들을 폭력화 시킨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과연 시각적 폭력의 노출이 인간을 폭력화시키는 것일까? 다른 요인은 상관없다는 것인가? 인간을 폭력적으로 변하게 하는 것은 마음속에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대상, 원인으로부터이지 어찌 그것이 한낱 무체(無體)물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논리적으로 명쾌한 답변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증적으로, 경험적으로 영상물의 자극이 범죄의 근인이 아님을 ‘트레비스’라는 게임 매니아 소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또한 부정한 거대기업의 개발사업과 권력의 야합, 갈수록 감정적 폭력의 강도가 심각해지는 온라인 댓글의 포악성, 그리고 정의의 가면 뒤에 숨겨진 추악한 치정사건까지 더해지면서 소설은 박진감 넘치는 속도로 이야기에 독자를 완벽하게 포섭한다.

 

이러한 추진력에 주도권을 빼앗기고 몇 차례의 반전을 겪고 나면 이 모든 악의의 뿌리에 인간의 과시적 욕망이 안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살인자, 범죄자의 동기였음을 깨닫게 된다. 제프리 디버의 작품에 따라다니는 퀄리티 스릴러(quality thriller)의 정수라는 말을 이 작품에도 예외 없이 부여하게 된다.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점에 주력하다 캐트린 댄스의 활약을 소홀히 하게 되었지만 안락사의 용의자가 되어 소송에 휘말리는 엄마와 댄스의 갈등이나 상급 수사기관, 감찰기관의 일선 수사기관에 대한 위압적이고 기만적인 수사 방해도 볼만한 얘깃거리다. 아무튼 쏙 빠져들어 읽도록 하는 재미와 소재의 다양성이 주는 즐거움은 여느 작품의 추종도 불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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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7-26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캐트린 댄스 정말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리뷰가 딱 눈에 띄네요, 반갑구요....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필리아 2012-07-27 07:32   좋아요 0 | URL
네, 드디어 동작분석가 댄스가 올 여름 돌아왔네요. 재미, 구성, 스토리텔링 모두 더 강해져서 말이죠...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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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로운 일상에 순수하게 참여할 때...

 

내 일상에 무심히 스쳐가는 것들, 혹은 의도된 만남이나 의지를 요구하는 사물들을 대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런 것들을 내 삶에 하나의 의제로 삼아보는 여유가 있었던가 하는 물음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매일 지나는 거리의 주변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것들에 가해지는 시간의 풍화로 변화된 작은 다름은 없었는지. 아, 빈번하게 같은 엘리베이터의 공간에 있게 된 그와 그녀가 입었던 옷은? 그들의 표정을 보았던 적이 있었던가? 이것들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잠시도 멈추지 않는 그것들의 미세한 변화에 대해 나는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사태가 이러하니 상상력이 극도로 메말라 붙고, 세상의 이해도 협소해지고 만다. 거리를 바삐 걷는 누군가의 움직임으로부터도, 미디어를 장식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사연에 대해서도, 아니 똑 같기만 하다고 여겨지는 내 행동의 작은 변화조차도 나는 눈치 채지 못하고 살고 있다.

그런데, 하루키라는 이 사람은 정말 하찮고 소소한 것들을 바라보고 무엇인가를 상상하고, 느끼고, 그래서 자기를 비로소 말 할 수 있는 여유를 창조한다.

 

내가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무엇인지? 상상의 여유, 그 어느 것도 하찮을 수 있음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무심함에 익숙해진 건조해진 감성이 아닐까? 그저 변화란 당연한 것이라 여겼던, 아니 아무런 변화도 느끼지 못했던, 그래서 그 변화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했던 것들로 인해 내 감각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는 기형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하루키의 지극히 사적인 감상의 나열인 이 책이 삶의 신념을 바꾸게 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문득 ‘상상의 시간’을 내게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일요일은 오지 않는 신문에 대해 왜 나는 하루키처럼 의문을 갖지 않았을까? 왜 여행 중에 오디오 북을 들을 생각을 하지 못했지? 나는 언제부터 좋아했던 책 향(香) 느끼지 못했던가? 비닐정키인 하루키처럼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수집했던 진귀한 우표들의 수집 책은 지금 어떻게 되었지? 하는 등등의 실종된 지각들이 내 삶의 태도를 가볍게 두드린 것이다. 그래 이 책은 소박한 것들에 대한 애정, 늘 우리 곁에 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에 깃든 사연들에 대한 몽상이요, 여유이자, 산다는 것의 의미일 것이다.

 

뉴욕대의 예술교육자인‘에릭 부스’의 일상이란 재료에 대한 통찰이 떠오른다. “이미 존재

하는 재료를 바탕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즉 의미 있는 세계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제2의 존재방식을 찾는 것이라던 말이. 바로 하루키는 일상의 궤도를 맴도는 존재에게 새로운 감정, 생각, 새로운 세계관을 펼치듯, 상상력을 키우는 과정이 일상적 경험의 세계에서 성취 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앞에는 악마, 뒤에는 깊고 푸른 바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 몰리면 깊고 푸른 바다가 매혹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절망한 이가 바다에 뛰어드는 것 아니겠는가라는 상상은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나는 누군가가 그저 진저리나는 삶을 피해 자살했다고만 여겼을 것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연민도 삶의 이해도 없는 것이다. 내가 잃은 것은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삶이 풍성한 예술처럼 될 수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이 내 고뇌이고 고통이지 않았을까하는 상념이 찾아든다.

 

이것은 하루키가 지적하듯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뭐 논리대로 되는 것이 있겠는가라는 말과 상통하는 것 아닐까? 항상 예기치 않은 곳으로, 정말 어쩌다 생의 행로가 결정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의도한대로 되지 않았다고 낙심할 것도, 절망할 일도 아닐 것이다. 가려는 행로를 성실히 밟아나가다 보면 일상적 주변을 의미 있는 세계로 만드는 법을, 그래서 일상이 얼마나 매혹적인 것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얼마나 경이롭고 위대함이 가득한 세상인지를 깨우치게 되는 것일 게다.

 

채소들마다의 기분을 생각했던 하루키처럼, 아니 식물의 굴성(tropism)처럼 인간의 본능으로 존재하는 순수한 환희에 넘친 때 묻지 않은 감탄, ‘와!’하는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는 탄성이야말로 내면에서 무언가 일어났음을 의미 하고 무언가를 열고 무언가를 조절한 순수한 참여, 바로 예술, 공감의 행위를 자극하는 충동이며, 새로운 세계를 향한 반응이 시작된다는 통찰일 것이다. 이 상상의 여유는 체험적 지혜가 되어 마음에 직접적인 체득의 이해를 번쩍하는 깨우침으로 스며들게 할지도 모른다.

 

주의력, 관찰력을 섬세한 도구로 활용하게 된다면 저주를 축복으로 바꿔주기까지 하는 풍성한 삶의 행위자가 될 것 만 같다. 타자(타인 그리고 사물들)에게 적극적으로 뛰어듦으로서 그것에 담긴 의미를 찾는 세상 탐구하기가 진행되며 이는 낯 선 세계를 알게 되는 기회를 낳는다. 그리곤 지극히 평범한 삶의 한 부분에서조차 삶의 중요한 의미를 찾으려는 태도로 세상 읽기에 나서면 상징적 의미로 가득 찬 세상이 우리 눈앞에 펼쳐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 게다. 무심히 지나친 것들의 의미를 생각하는 삶의 여유, 상상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내 삶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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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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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겐 자신들과 상호성의 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을 부정하거나 억압하기 위하여 악랄하게 자신들이 내면화한 사회이미지의 수준으로 도덕적 정의를 강요하는 정치와 종교 권력에 대한 의심의 정당성을 말한 『의심에 대한 옹호』에 이어‘피터 버거’의 책은 이로써 두 번째의 접촉이다. 그러나 시종 중용의 사회학을 선언했음에도 근대성에 대한 서구의 일방적 시각, 푸코나 들뢰즈 등 일련의 비판 철학에 대한 비하와 극단적 보수주의의 가치관은 저자의 중용을 의심하기에 충분한 인상을 주었기에 이 선입견이 무너지기를 기대하면서 읽었다. 선입견이 확신으로 확인되었지만.

 

이 책은 일종의 지적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학문적 편력 - 대학원 공부, 연구와 논문 출간, 대학 강의 등을 중심으로 하여 종교 사회학자로서의 인생 전반에 대한 소소한 기억을 더듬고 있다. 이들 얘기 속에 자신의 주요 저작물들의 학문적 배경과 의도했던 주장들을 통해 사회학자로서 지향했던 인간적인 의지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자기변호와 주장은 있지만 반성은 어디에도 없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반성과 용서를 빌 것이 없을 수 있을까? 아마 지극히 자기도취적이고 이기심으로 뭉쳐지지 않고서는 가능치 않을 것이다. 결국 저자의 ‘인간주의적 사회학’이란 것에서 진정성을 발견 할 수 없다는 것이고, 많은 모순으로 가득하다는 얘기가 된다.

 

사회학자로의 길에 들어서게 한 뉴욕의‘사회조사 뉴스쿨’에서의 학업으로부터 자신의 사회학 방법론의 이론적 기반들과 특히 종교사회학자로서 베버에 대한 영향을 말한다. 그리고 뉴스쿨 쉬츠교수의 지식 사회학을 계승함으로써 인간주의적 인문학과 철학에 방법론상 가깝다고 학문적 배경을 정의하고 있다. 또한 루터의 광신자에서 온화한 개신교도로, 중도 우파 보수주의자라고 자신의 이념적 가치관을 선언하기도 한다. 물론 자신의 평가이고 주장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사실 앞선 그의 저술의 논지들조차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본의를 의심하게 될 정도였으니 ‘중도’니, ‘중용’이니 하는 수식어들이 이 사람으로부터 한없이 초라한 말이 되어버린다.

 

다만 그의 저서에서 반복되는 얘기지만 현대사회에 대한 정의에서‘다원성(Plurality)’에 대한 지적이나 ‘제한된 책임성’을 통해 근본주의의 해악을 주장하는 부분만큼에서는 사회학자로서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일례로 런던탑에 전시된 사형 집행인의 칼에 새겨진“‘내가 너의 목을 베는 것이 아니요, 예수께서 하심이라.’라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며, 단지 신의 도구일 따름이다.”라는 자기기만성이 바로 종교라는 폭로처럼 사악한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것이 사회학이라는 주장은 저자의 사회학이 어떤 부류인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나아가서 개인이 자기 역할 뒤에 숨을 수 있게 해주는 자기기만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인간주의적 사회학이란 것이고, 이것이 인간을 환상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좀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한다는 신념을 보여준다.

 

한편 근대성은 세속화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주장은 다원성과 연결되는데, 오히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는 신들이 늘어난 것이 그 예라고 하는 것이다. 다분히 서양인의 관점이다. 자신이 무지했던 영역을 뒤늦게 알게 됨으로써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마치 없었던 것이 새롭게 발생한 것처럼 얘기되는 것인데, 이러한 오만의 논리는 한국 등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을 후기유교주의문화의 발현이라고 단정하면서 급기야는 자본주의의 도덕적 선과 지고의 가치라고 선언하는 식이다. 현장을 직접 체험하는 사회학적 방법론이 자신의 학문적 무기라고 과시하며, ‘사회학적 관광’이라고 자부하는 그 겉핥기의 관광이 어떤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을 단정케 하는데 이르는 것을 보면 그저 실소밖에 나오지 않는다. 더욱 가소로운 것은 이렇게 신들이 늘어났으니 다원화된 것이고, 곧 세상은 세속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연 이 논리가 타당한 것일까?

 

여전히 계몽주의 이성에 뿌리를 내린 수구적 사유의 종교 사회학자의 아전인수식 관점을 지켜보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푸코의 성 혁명에 대한 이론에서 영성이 넘쳐난다고 왜곡하고, “고대의 음탕한 비밀 주신제를 희한하게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그의 무지라고 넘어가더라도, 한국, 대만, 싱가폴의 물질적 발전을 귀동냥하곤 바로 사회주의 사례는 유토피아적 상상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는 비약에는 그저 혀를 내두를 밖에 없어진다. 학문적 양심이나 사회학이 오물에 처박힌 느낌이다.

 

그리고 자신의 반 페미니즘적 언어 사용의 지적에 대해 ‘right of man'처럼 인권을 표현할 때 남성 명사인 man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총칭어로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항변하면서 페미니즘 수사학을 공박하는 것이나, 담배회사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받은 것에 대한 비난에 대해서는 금연운동의 정치적 오용이라고 말하면서 성공한 운동이란 이데올로기와 이권이 결합하는 것이고, 곧 “사회학은 분석해서 폭로한다!”라며 본질을 학문적 결실로 회피하는 모습은 지식이 얼마나 파렴치하게 동원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만하지 않을까? 소위 지식사회학이라 명명하거나 종교사회학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겐 어떤 참고가 될지 모르겠으나 내겐 기독교 극우 보수주의자의 탐욕스런 인생 편력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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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셀러 - 소설 쓰는 여자와 소설 읽는 남자의 반짝이는 사랑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3
아리카와 히로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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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모든 행위와 의사(意思)가 이야기다. 물론 이야기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사가 되는 것도 아니요, 더구나 소설이라는 텍스트가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이다. 아마 작가는‘이야기는 모두 소설이다.’ 라는 명제를 주장하고 싶은 모양이다. 한 명의 독자만 있더라도 작가일 수 있다는 다소 감상적인 의미를 끼워 넣으면서. 그래서 이 이야기는 단순히 스토리인가? 아니면 소설인가? 라는 경계를 오간다. 과연 소설일까? 즉‘문학’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은 서구 자연주의를 왜곡하여 받아들여 작가 자신의 사생활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는 사소설이 일본문학의 하나의 주류가 된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 같다. 타인의 일상사에 유독 관심을 보이는 특성 때문이 아닐까? 그러하다보니 그저 스토리를 가지면 소설문학이 된다는 인식에 공감하는 모양이다. 이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이야기이다. 그저 등장인물들의 시시콜콜하고 지극히 사적인 일상의 단편이요, 혹은 작가 내심의 반영, 이야기 작법의 다른 표현이란 느낌이다.

 

이야기는 두 편의 중편으로 이루어진, 연작(連作) 이야기다. 제목도 ‘side A’, ‘Side B’로 되어 각자의 상황적 측면에서 바라본 이야기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상황이란 아내의 죽음과 남편의 죽음이란 지극히 예상 가능한 사이드(Side)이다.

사이드 A는 사고(思考)를 하면 뇌의 수명이 단축되어 죽음에 이른다는 가상의 치명적 질병을 앓고 있는 아내에 대한 남자의 애틋한 연민을 그리고 있고, 사이드 B는 교통사고와 말기 췌장암에 걸린 남편에 대한 죽음의 이별이 만들어내는 탄식과 애절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여자는 모두 전업 작가이다. 굳이 이 이야기에 마음을 붙이려면 작가, 즉 쓴다는 행위와 읽는 행위의 관계에 대한 어떤 성스러움에 대한 진실일 것이다.

 

아내가 이 이상한 죽음의 병에 걸린 이유가 그녀의 가족들이 보이는 평온의 이면에 은폐된 이기심과 무관심, 무책임성이고, 타인의 성취에 보이는 치졸함의 폭력성이다. 여기에 여자의 작가적 역량을 무참히 짓밟았던 사람들의 정체성을 폭로하고, 그 트라우마를 극복케하는 남자의 헌신과 격려로 사랑의 얘기를 덧댄다. 그런데 대단히 실용적이어서 자신에게 극진했던, 작가로서 날 수 있도록 도와준 남편을 위해 저작권 등의 권리를 유산으로 남기는 마지막 대목은 지나치게 사실적이어서 허구적 즐거움을 일거에 날려버린다. 사랑이란 결국 물질적 보상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일까?

 

두 번째 이야기는 이 첫 번째 이야기에 비해 그 완성도가 더욱 취약하다. 이야기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의기양양하게 뽐내는 것인데, 한 이야기에서 여자를 죽였으니 이번엔 남자를 죽이면 그것은 또 어떤 반응일까하는 지극히 속물적 겨냥을 하고 있는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선망했던 한 남자와 우연히 마주친 어느 날, 그 남자의 품에 자신이 쓴 소설책이 있고 더구나 그 감동으로 눈가가 젖어있다면, 그리고 절판된 옛 문예지에 발표된 단편마저도 기억하고 소장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있을까. 여기서도 역시 여자는 Side A의 여자와 같이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된다. 남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인 여자의 집필을 위해 삶의 리듬과 행동을 헌신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아마 그러 할 것이다. 작가와 사랑하고 결혼한 남자, 그리고 그러한 남자의 헌신적 배려와 사랑이 고마운 작가인 여자의 이야기. 그런데 참으로 진부한 스토리 아닌가? 게다가 이러한 배우자가 불치병으로 죽음에 직면해 있다면, 그 이별만큼 인간을 간절하게 하는 상황도 없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한국 작가의 작품이라면 어떠했을까? 흔한 사랑과 이별의 애달픈 이야기에 어떤 관심을 보여줄 수 있을까? 단지 작가와 독자의 관계성에 대한 ‘아리카와 히로’의 분신, 그 생각을 엿본다는 것 이외에 말이다. 독자와 작가의 사랑이야기라는 소재말고..., 러브 스토리를 그저 경쾌하게 즐기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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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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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은 왜 읽는가? 라는 질문이 빈번하다. 그리고 왜 쓰는가? 라는 의문도. 그래서 당연히 어떤 의지가 작동하고 목적이 분명하며, 가능한 답변이 있으리라는 명령에 굴복해 이러저러한 답변들을 쏟아내고, 그것들이 그럴듯한 의미로 포장되어 ‘책 읽는 법’, ‘책 쓰는 법’ 따위의 제목을 달고 마치 다 알고 있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냥 뱉어내어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질문에 딱히 대답할 무엇이 없었고 제아무리 구실을 찾으려 해도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그저 책을 읽는 것이 좋다는 것이고, 그 순간만큼은 외부의 소음과 차단되어 평온해졌다는 것 정도이다. 그렇다. 읽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고 목적 자체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이유를 갖다 붙여야 한다는 말인가!

 

이 책의 저자는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고 누구도 부하로 두고 있지 않다.”라고 자유로운 정신의 실천가임을 선언하고 있다. 즉 외부의 기준이 아무것도 없는 발가벗은 형태의 읽기를 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오직 자신의 무의식을, 욕망을 텍스트에 직접 접속하는 고독한 읽기를 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자체인 즐거움을 누리면서. 이렇게 해서 그가 체득한 것은 무엇일까? “읽고 쓰는데 필요한 모든 문학적 학식 일반”이 바로 넓은 의미의‘문학’이요, 그 문학이 세상을 변혁시켜왔다는 주장이다. 분명 책이 세상의 형식을 변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데 동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저자가 지적하는 ‘중세 해석자 혁명’이라는 12세기 르네상스나, ‘대혁명’이라 지칭하는 루터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개혁이 바로 문학, 책으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에.

 

책을 읽고 쓰는 것, 문득 펼쳐본 미미한 책 한 줄이, 누군가의 조용한 서재 안에서 나온 철학적 개념이 한 문명을 파괴해버리는 일이 가능한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문학과 혁명’에 관한 얘기이다. 여기서의 문학은 오늘의 소설이나 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학의 어원으로부터 시작해서 문학이란 텍스트 일반, 성서, 법률서, 협의의 문학, 철학을 포함하는 총체이다. 이것들이 인간의 사고와 습속, 문명적 패턴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것의 예가 교황혁명 또는 중세해석자 혁명이요, 종교개혁이요 대혁명이다. 이 혁명이 지금 우리들이 체감하는 문명의 전환이자 초석이 되었음을 인지하는 것이다. 혁명이란 폭력혁명으로서가 아니라 이처럼 다른 형식, 문학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물론 인류 문명의 대전환을 만들어낸 이들 혁명이 문학혁명이 우선이고 폭력은 보충적이거나 사후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전적인 동의를 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혁명을 완성하는 것, 즉 이전의 사회적 인식과 질서를 새로운 인식과 질서로 바꾸는 힘에 있어서 과연 폭력이 항상 후발적이고 보완적 역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저자의 구구절절한 사실(史實)의 나열에 불구하고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내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다.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비로소 실현시킨 프랑스 대혁명이 민중의 폭력행사 없이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저자는 이와는 달리 이 역시 선행한 법률과 철학, 소설 등 문학이라고 말한다. 이 진실을 과연 누가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서 저자의 자유정신은 모순에 들어간다. 세계에 대한 전문가, 지식인들의 이론을 “자신을 하나의 우뚝 솟은 전체의 모습을 제시하려는 비참한 팔루스(Phallus)적 향락”이라고 비판하던 저자 자신이 바로 이러한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향락이 없는 책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잘 난체 하는 것, 내가 깨우친 것, 내가 발견 한 것을 쓰는 것이 비록 동의 받지 못하거나 허접 쓰레기에 불과한 들 그것들은 나쁜 지(知)요, 내 문학만이 좋은 지(知)라고 하는 것은 독선이 되고 만다.

 

다만, 문학과 혁명에 대한 저자의 관점만큼은 우리가 왜 책을 읽어야 하고 써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답변을 제공한다. 루터의 소위 종교혁명이 어떻게 가능했는가라는 측면에서 민중의 졸렬한 언어에 지나지 않았던 독일어를 근대 독일어로 정착시키고 확산시킨 성서의 해석, 다시 말해 성스러운 법을 속된 법으로 이관시키기 위한 무수한 번역작업과 세속화 작업이라는 대대적인 출판행위를 포착한 것이다. 루터 이전의 세상을 지배하던 성(聖)의 속(俗)으로의 변화는 이렇게 텍스트의 확산이 이루어낸 혁명이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저자는 혁명은 폭력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며, 폭력을 가진 자만의 의지로 되는 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 역시 많은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루터만큼 강력한 권력으로서의 폭력을 가진 자가 있었을까라고 묻는다면 텍스트의 선행과 폭력의 후행은 단언하기 어려운 국면에 빠져들고 만다. 지나치게 나아간 것 아닐까? 문학이, 책이 혁명의 저변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혁명의 다른 형식이 바로 문학이라 말하는 것은 미흡하다.

 

중세 해석자 혁명(12세기 르네상스) 역시 문학이라는 로마법을 주입받아 고쳐 쓰인 교회법의 텍스트를 갱신하고 체계를 이루어 근대국가의 원형을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복됨으로써 인간의 신체에 각인되고 주입되는 것의 기반이 문학이라고 만 말하는 것은 과도한 도약이 아닐까? 폭력은 인간에게 그보다 오래되고 근본적인 의례가 아닌가? 아무튼 텍스트가 인류의 문명을 뒤바꾼 대혁명의 결정적인 토대였음을 새롭게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어주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책을 읽고 쓰는 것이 혁명의 초석이 되고, 세상의 문제와 결별하고 변혁될 새로운 세상을 이루는 힘이 될 수 있음에 동의한다. 그래서 어설픈 이들이 지금 세상에서는“철학이 끝났다!”, “문학이 끝났다!”라고 하는 단언의 목소리는 맹랑하고 터무니없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미래가 마냥 낭만적인 것일 수는 없다. 누구나 죽음으로 끝내는 것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즉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고 해서, 병든 세상에 종말론적 시각을 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게다. 그만큼 오늘의 세상은 병들었다. 볼 수 없다고 해서, 알 수 없다고 해서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질병적 세상바라보기에 대해 지극히 혐오감을 가진 낭만적 미래관을 가진 저자의 또 하나의 편협한 독단론을 마주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시간이 아니다. 이웃 나라의 젊은 철학자의 독선에 쓴 웃음을 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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