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 김말봉 애정소설
김말봉 지음 / 지와사랑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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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말봉의 이 소설이 조선일보에 연재되던 1937년은 물론 1930년대의 시대상을 살펴볼 이유가 있다. 대체 일제 식민치하의 한국인들이 통속적 연애소설에 열광해야 했던가하는 이유와 이러한 소설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년대는 일제가 군국주의를 강화하던 시기이며, 더구나 작품이 발표되던 37년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해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식민지민은 무조건의 희생이 강요되고 삶은 더없이 피폐해졌으며, 민족말살정책이 고강도의 폭력을 동원하여 자행되던 시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애정소설이라니? 하는 의문이 들법하다. 그러나 일제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새로운 알레고리라고 관대하게 바라본다면, 또한 식민지하에 이루어진 근대화가 낳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인습의 파괴에 대한 대결과 갈등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관점으로의 성숙으로 파악한다면 한국문학의 일대 진전이라고도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조금은 너그러운 이해로 이 소설을 읽게 되면 신문의 상업화에 따른 전형적 대중통속 소설인 『찔레꽃』이 애욕과 순수사랑이 뒤얽힌 말초적 감성의 자극에 머물지 않고 개인적 욕망과 사회적 윤리의 갈등, 자본에 예속되어가는 인간 삶의 자문(自問), 자작농의 소작농으로의 전락과 같은 사회구조적 모순 등을 가로지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30년대 후반에 이르러 「백치 아다다」의 작가 계용묵과 같은‘인생파 작가’들이 파고들던 물질적 소유양식과 정신적 삶의 주관성이 인간의 가치와 행복에 미치는 영향의 조망이 이 작품에서도 중요한 주제를 형성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당대의 한국사회와 한국인들이 이미 근대 자본주의로 인한 물화(物化)를 근대화의 모순으로 이해하고 고민하고 있었음을 포착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젊은이들의 애정관계에 끊임없이 작동하는 시대의 현상들을 사건화하면서 식민주의적 근대성이 뿜어내는 모순과 문제들을 발설하고 있다. 중심인물인 스물두 살‘정순’이 가계의 곤궁함을 책임지는 가장의 부담을 안고 은행장인 신흥귀족의 가정교사로 입주하게 되면서 겪는 사랑의 애환에 얽힌 지극히 속된, 진정 통속(通俗)적인 전개를 하고 있다. 돈의 권세를 신봉하는 은행장 조만호의 탐욕스러운 육욕에 대비되어 만성적 심장병으로 누워 남편의 바람기에 히스테리를 보이는 안주인은 남성중심적인 당대의 왜곡된 성문화를 대변하고, 이들의 부에 힘입어 일본의 대학을 졸업하고 세계여행을 다니는 아들 경구와 딸 경애는 삶의 곤궁함, 자본에 예속된 삶을 직시하는 정순과 또 다른 대척에 놓여있다.

 

정순과 혼인을 언약한 대학생 민수는 이러한 대립 구조에 사회구조의 변화를 나타내는 중요한 성격을 지니고 애정 전선에 변수 역할을 수행한다. 마을 유지로서 광대한 농토를 소유했던 그의 집안이 연이은 집안의 우환으로 가세가 기우는데, 구시대의 인습으로서 장례 등 제례의 허식과 허례로 인한 과잉의 체면치레를 하나의 원인으로 천명하고 있다. 결국 민수네 농토가 은행의 경매로 인해 기반을 잃고 자작농이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농경사회가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구조적 전환을 하는 시대적 상황을 기술하고 있는 것인데, 이 사건은 민수와 은행장 조만호와의 악연을 빚어낸다. 경매 기일의 연기를 요청하나 거절당하고, 민수의 연인인 정순의 사랑이 어긋나는 것도 바로 이 사회구조적 변화기에 처해있던 소시민들의 저항할 수 없는 근대화의 폭력성의 한 단면일 것이다.

 

자신의 딸보다 네 살이나 어린 가정교사 정순의 뽀얀 목덜미와 여체의 탐닉을 그리는 조만호의 심욕은 추함 그자체이다. 또한 그의 육욕을 채우는 대상으로서 기생 옥란의 물질적 욕망이나, 조만호의 병약한 아내의 죽음이후 자신의 딸을 이용하여 조만호를 갈취하는 침모(針母)의 기만성은 황금만능의 물질주의가 이미 식민지민들의 정신을 얼마나 깊숙이 갉아대고 있는지를 묘파(描破)해내고 있다.

즉 자본주의 물결과 같이 이식되기 시작한 식민사회의 근대화는 물질적 욕망의 끊임없는 부추김과 새로운 물질적 노예와 자본 계급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김말봉의 연애소설이야말로 당시 해체되던 경향주의 문학과 모더니즘 문학의 전환기라는 시대적 성향이 그대로 스며있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야기의 줄기인 사각, 오각, 육각으로 얼기설기 얽힌 남녀의 연애로부터 자유연애와 여성의 정조관념에 대한 파괴적 담론, 구세대에 의해 여전히 주장되는 가부장적 결혼관과의 충돌로부터 옅은 여성주의의 싹을 볼 수 있지만, 신식 여성이라는 조만호의 딸 경애나, 침모, 옥란 등의 발설에서 남성의 권위에 대한 종속적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시대정신의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자원봉사운동을 하려는 조만호의 아들 경구를 통해 계몽적 확신으로 분열된 주체를 봉합하려는 당대 지식인들의 진정성에 대한 회의를 대변하기도 하는 등 소설은 당대의 거의 모든 사회적 현상들을 녹여내고 있다. 다만 70여년이란 시간적 간극은 한국 현대소설의 초기에 보이는 미숙한 문장들과 구성들로 독자의 상상력을 침범하여 재미를 반감시키기도 하는데, 작가의 주장이나 경향을 직접 소설 속에 발설하는 것이 한 예라고 하겠다. 어쨌든 다시금 출간되어 현대 독자들에게 1930년대 근대화에 매몰되어 있던 우리문학의 한 분류를 통해 당대의 시대정신을 엿볼 수 있게 된 것은 커다란 위안이고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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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권은 밤에게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3
이신조 지음 / 작가정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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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밤이란 꽤나 낯선 언어가 된지 오래된 것 같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의 적막과 소요의 묘한 대조, 시원(始原)으로의 회귀나 안온한 고요의 감동과는 동떨어진 삶의 세계에 익숙해진 탓이리라. 혹은 엄마의 자궁 속 그 태곳적 기억에서 벗어나 그 적요의 시간을 그리워하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서서히 자연의 순환은 다시금 밤의 시공을 생각게 한다.

 

밤에 관한 이런 나의 단상과는 달리 소설에는 도시의 밤거리와 어둠의 방을 찾아 헤매는 아직은 소녀를 벗어나지 못한 스물두 살 여자가 있다. 할머니와 재가(再嫁)를 한 엄마의 집을 오가며 살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 그리고 엄마의 돌연한 죽음, 할머니의 별세는 어린 여자에게 세상과의 이른 만남을 불가피하게 했다. 화장품 하청 공장의 공원에서 부동산중개업을 하는 계부의 요청으로 ‘아침 부동산’이라는 부동산사무소의 운영을 맡게 된다.

 

스물두 살의 여자와 부동산이 어긋난 삶의 모습 같기만 하지만, 그녀에게 의뢰된 집과 방들이란 이미지에 다가서면 그것은 곧 어둠이요, 평온이며, 위안의 장소로서 그리움, 회귀의 공간처럼 보여 더없이 적절한 만남으로만 여겨진다. 그래서 그녀가 불쑥 찾아들어 잠드는 허술한 단층의 빈집이나, 다세대주택 반지하방은 어둠과 밤의 공간이며, 엄마의 자궁처럼 그녀의 성장을 위한 장소가 된다.

 

‘집 임자는 따로 있는 거다’라는 말처럼 오랫동안 찾는 이 없던 빈 단층집을 계약하던 쌍둥이 노인 자매와 그녀들이 꾸며놓은‘나이트 룸’은 어둠의 평화로움으로 방황하는 영혼들의 심연을 위로하는 장소가 되고, 스물두 살 부동산 아가씨는 암흑의 응시에서 자신의 내면을 어루만진다.

한편 밤을 떠돌밖에 없는 가난한 고학생의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 그런 앳된 남자를 기웃거리기위해 도시의 밤거리를 걷는 여자의 연정, 알지 못하는 그리움, 동류에 대한 애틋함은 한 뼘만큼의 성장처럼 다가온다. 늦은 밤 남자와 찾은 반지하 방에서의 짧은 합일과 이별, 나이트 룸의 폐쇄는 그녀를 싸고 있던 껍질의 깨어짐을 알리는 신호였을까?

 

그녀의 허기진 마음을 달래는 인스턴트 음식들과 불어나 뚱뚱해 진 몸이 다시금 가냘픈 몸으로 돌아가는 날, 두터운 겨울외투와 초라한 미니 부츠를 벗어던지는 날, 엄마를 닮은 여인으로서의 자신을 믿게 되는 날, 자신의 안식처가 될 수 있는 깊이 잠들 수 있는 집을 느끼는 날을 이 도시가 허락할까?

한낱‘검은 덩어리’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던 자신에게 색을 입히고, 빛을 찾아주기 위해 상실과 상처, 자기연민에서 탈주하려는 그녀의 방황어린 발자취를 따라가는 독자의 마음은 이 살벌하고 무관심하며 소란스러운 도시가 과연 품어낼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하지만, 세상에는 작은 보살핌, 구원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옅은 희망의 가능성을 바라게도 된다. 스물둘의 여자아이가 지닌 상실의 애도를 아직도 경험하지 못한 나는 여전히 미숙한 채 머물러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래서 이제야 밤을, 어둠의 심연을 바라보게 되는 것일지도. 그렇담 나는 어떻게 밤을 통과해야 할까?...이 성장과 애도와 치유의 이야기가 알 수 없는 위로가 되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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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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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문학이 사람에게 선사할 수 있는 총체는 이런 것이다.’라는 소설의 전형(典型)이라 말하고 싶다. 자연 위에 군림하려는 무지하고 상상력이 부족한 인간의 오만성에 대한 따끔한 권언의 진중함이 작품 전체를 도도히 흐르는 가운데,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충돌과 화해와 적응의 지혜를 깨달아가는 노인의 연애 소설 읽기에서 사랑의 고통과 그것을 찾기 위한 분투, 그리고 글로부터 발견하는 앎에 대한 경외와 겸허의 이야기가 조우하며 인간과 삶과 자연의 본성에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

 

이 깊고 깊은 주제의 내면에 흐르는 이야기 또한 걸작이어서 권력이라는 기회주의적이고, 오만하며 무지와 위선으로 가득한 인물의 희화(戱畵)나, 양키로 대변되는 문명이란 자연에 대한 무분별과 몰이해의 표상은 조셉 콘래드의『암흑의 핵심』을 연상시키고, 자연의 순리에 무자비하게 개입하려다 야기된 살쾡이의 인간을 향한 도전과 노인과의 죽음을 건 대결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숭엄하다할 쟁투를 떠올리게 한다.

 

권력의 폭력을 피해 도착한 곳은 아마존 유역‘엘 이딜리오’라는 정글을 개간한 이주민의 작은 마을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우기와 범람하는 강에 고립되어 극도의 궁핍과 곤궁함으로 아내를 잃고,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우림지역의 원주민인 수아르족에 의해 도움을 받고 그들의 자연과 융화하여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체화한다. 의도하지 않은 원시부족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행위로 인하여 부득이 그들을 떠나게 된 볼리바르는 다시금 엘 이딜리오의 강가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지만 거세게 침투해들어오는 문명은 노인이 된 볼리바르의 평온을 놔두지 않는다.

 

백인들의 자연에 대한 무지와 군림의 욕망은 인간들의 이 작은 마을에 일대 사건을 가져 오는데, 살쾡이의 어린 새끼를 포획했던 양키가 어미 살쾡이에게 보복을 당한 것이다. 양키의 죽음은 인간이 자연에 지켜야 하는 한계를 넘어선 교만에 대한 응징이다. 정글을, 자연의 질서를 가장 잘 안다는 이유만으로 노인은 마을의 읍장(뚱보 읍장 - 권력의 기만과 위선에 대한 조롱)을 비롯한 탐색대의 일원을 안내하는 임무를 불가피하게 떠안게 된다. 문명이란 권력으로 방자함이 하늘을 찌르는 읍장의 정글 탐색의 행로는 그야말로 가관이다. 자연에 대한 그 완벽한 무지와 어리석음은 인간의 초라한 상상력, 그것의 빈약함만을 드러낼 뿐이다. 살쾡이의 연이은 인간의 살해와 마을로 좁혀오는 공격성에 읍장과 탐색대는 노인에게 대적을 맡기고 줄행랑을 친다.

 

아마 이 소설의 절정은 이것이 될 것이다. 『노인과 바다』의 거대한 물고기와‘산티아고’의 생명을 담보로 한 싸움처럼 노인 볼리바르와 2미터가 넘는 암살쾡이와의 정면대결 장면이다. 물론 산티아고는 패배하지 않는 인간의 정신이라는 현대적 영웅을 말하고 있지만, 볼리바르와 살쾡이는 동등한 자연의 존재라는 공감이 선행된다. 인간과 정면 승부를 벌이려는 살쾡이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인지한 행위이며, 동물이 인간에게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통해 자연과 생명에 대한 의미를 깨우치려 한다는 의미에서 두 소설의 사투는 전혀 다른 색깔을 지닌다. 그럼에도 두 싸움의 결과에서 우리는 문명에 따르는 정신적 공황에서의 해방,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겸허와 경외의 이해를 갖는다는 점에서 동일성을 느끼게 된다. 즉 우리가 인생을, 삶을,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되는가에 대한 어떤 본질적인 전환을 생각게 한다는 것이다.

 

사랑을 향한 인간들의 무수한 염원이 담긴 소설읽기로 소일하는 노인의 삶, 음절과 단어의 반복, 그리고 문장의 반복 읽기를 통해 읽어내는 소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상상의 어려움을 실로 대변한다. 노인의 인생엔 존재하지 않았던, 어떠한 경험도 없는‘뜨거운 키스’, ‘수상도시 베네치아’와 같은 소설 속 언어들에서의 방황은 우리 인간의 속성, 본질을 그대로 말하는 것일 게다. 글을 읽는 다는 것은 새로움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 알아감의 즐거움은 겸허와 겸손을 바탕으로 한다. 자연, 생태계 또한 결코 인간의 교활하고 오만함으로 군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닐 것이다. 반복해 읽을수록 의미가 더욱 풍부해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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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중석 스릴러 클럽 33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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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선 영원히 묻고 답하여야만 되는 문제일 것이다. 사적 자유와 공적 통제, 개인의 이익과 공적 질서의 대립, 가족연대와 공공선의 갈등 말이다. 형제자매와 부모와 자식이라는 혈연으로 묶인 가족 공동체와 사회라는 공동체를 위한 질서의 수호는 서로 도덕과 정의, 사랑과 유대라는 덕목의 치열한 교전을 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내 부모를, 내 자식을, 내 형제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 순간만큼은 정의도, 도덕성도, 법과 질서도, 그 어떠한 위협과 권력의 압력에도 대항하려 한다. 그러나...그들의 부모와 자식과 형제에 의해 회복할 수 없는 상처와 생명까지 잃어야 했던 사람들의 호소에 반한다.

 

사실 이 물음은 사회학, 도덕 철학 등은 물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학 작품들이 반복해온 주제이다. 그럼에도 이 질문의 영역에 빠지게 된 사람들이 다시금 물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은 어쩜 사람의 이성만으로는 해결 할 수 없는 층위(層位)의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할런 코벤’은 이것을 다시 묻고 다시 썼다. 그래서 인간이 회피 할 수 없는 본원적 욕망에 고통스러운 연민의 실체들을 투영하면서‘사랑의 연대(連帶)’는 우리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대처가 아니냐고. 아마 이것조차 우리들이 인정 할 수 없다면 삶이 어떻게 지탱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 같다.

 

이야기는 참혹하게 살해된 사체로 발견된 두 명의 아이를 비롯한 20 년 전 여름 캠프 숲속에서 사라져버린 아이들의 사건을 축으로 하여, 공적 질서 수호자로서의 상징적 인물인,‘폴 코플랜드’ 카운티 검사의 혐오스러운 사적 이익과의 첨예한 갈등을 대척점에 놓고 있다. 사회적 약자인 매춘부 여성에 성폭력을 가한 두 명의 청년을 심판하는 검사 코플랜드와 자식들을 유죄 판결에서 구해내려는 부모들의 무자비할 정도의 저항은 소설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 줄기인 네 명의 아이들을 삼켜버린 숲 속 사건이 현재화 되어 코플랜드의 앞에 나타남으로써 그의 행보를 과거의 아픔으로 이끈다. 살해된 것으로 알았던 실종자중의 한 명이 20년 전에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었으며, 이제는 또 누군가에 의해 피살되어 시체(屍體)공시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더구나 사체를 확인하기 위해 출두한 노부부는 자신들의 자식임을 부정하고, 동일인임을 확신하는 코플랜드는 당시 사체를 찾지 못했던 그들과 같이 사라져 버린 자신의 동생 ‘카밀’의 생존가능성과 함께 사건의 이면에 잠자고 있는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공적 대리인인 검사 코플랜드는 사건 인물들과 가족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개인적 이익을 보호하려는, 즉 사적 유대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 소설이 묻고, 답하고자 하는 물음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공공의 선을 위해 어느 누구보다 질서에 복종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이 과연 가족이라는 사적 관계를 외면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탐색토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동생 카밀의 실종 이후 삽을 들고 숲으로 들어가 땅을 파헤치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기억과 함께, 아내의 죽음 이후 그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준 횡령으로 피소된 남편의 구제를 호소하는 처제의 위증 부탁 장면으로 극화된다. 그는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까...

 

한편, 이 소설이 책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정교하게 짜여 사유를 요구하는 이 같은 주제라기보다는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배후에 대한 베일에 가려진 진실에 대한 점진적인 접근의 지속적인 기대라 할 수 있다. 결국 점진적인 드러냄에서 사라져버렸던 아이들과 그네들 부모의 소스라치게 놀랄만한 이기심과 부도덕성을 발견하게 함으로써 스릴러 고유의 신경중추를 지속적으로 흥분시키는 재미는 주제적 물음으로 회귀한다. 바로 급격히 상승하는 이야기의 속도와 함께 진전되는 내용과 형식미가 주제적 의미와 물 흐르듯이 연결되어 절로 곤혹스러웠던 우리네들의 질문에 답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무사히 그 숲을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코플랜드가 하는 이 상징적 독백은 실로 모든 것에 대한 응답일 것이다. 아마 우리 사람들은 이 연대의 숲, 추악의 숲, 욕망의 숲, 증오의 숲인 세상을 영원히 심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에 포획된 채...그것이 사람의 삶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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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들의 세계사 보르헤스 전집 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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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보르헤스가 자신의 소설세계를 처음으로 알린 작품집이다. 그만의 독특한 글쓰기의 초기 작품들이어서 이후의 그것들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디딤대가 된다. 그의 작업은 예전의 누군가가 쓴 글을 시대의 정신으로 다시 쓰는, 오늘의 언어로, 현재의 환경으로 옮겨놓는 글쓰기이다. 또한 보통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일상어를 벗어나지 않는 어휘, 평이(平易)한 문장에 대한 의지반영으로 더욱 친근한 이야기들이 되어 다양한 인간들의 읽기와 독해를 가능케 한다. 그의 말처럼 써진 글은 글쓴이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읽는 사람의 고유한 글이라는 취지에 부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집은 소위 마술적 사실주의로 대변되는 그의 작품세계에는 이르지 못했거나 옅은 전망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는 초기작들이지만 그의 또 다른 특징인 다시 쓰기라는 상호텍스트성의 원형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떠한 부족함도 없다. 여기에는 새롭게 쓰인 소설이 마치 이제껏 없었던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이란 생각에 대한 강한 거부의 의사가 있다. 이것은 새로운 글이란 것도 예전의 사람들이 이미 한 말을 변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오랜 시간 전에 누군가가 쓴 글을 오늘의 자기 언어로 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창작이 아니겠는가 하는 신념이라 할 것이다.

 

『불한당들의 세계사』라는 표제처럼 수록된 단편들은 문자 그대로 역사 속에 그야말로‘불한당’- 도둑놈, 사기꾼, 해적, 살인자들 등등 - 이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시 쓴 글이다. 그러나 이 인물들이 암약하는 세상에서 그들이 죽음에 이르는 가면의 벗겨짐 이전까지 항상 불한당으로 지목되는 것은 아니다. 한 예를 들면, 이 소설집에 마력처럼 몰입하게 하는 원동력으로써, 책의 가장 앞에 있는 작품, 「잔혹한 구세주 라자루스 모렐」의 대상 인물인‘모렐’의 개인사가 보여주는 세상의 터무니없음이다. 희대의 말(馬)도둑이자 잔인성으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다. 흑인 노예상(商)으로 사업영역을 넓히는 것인데, 이 방법이 또한 걸작이다. 노예의 도망을 부추기고 도망한 노예를 다시금 타 지역의 백인에게 팔아넘김으로써 그 수익을 서로 나누어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약속이 지켜질리 없는 것이지만, 노예해방을 부르짖던 남북의 대치라는 혼란스런 시대 상황에 따라 모렐은 정치적으로 노예해방 운동자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잔혹한 강도이자 가장 부도덕한 인신매매(人身賣買)범이 오히려 도덕적 정치인의 선도자가 되는 것, 곧 세계는 불한당들의 역사라는 아이러니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처럼 세계를 획일적인 불한당의 역사라거나 아이러니의 세계로만 의식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 각지에 처박혀 있던 이야기들이 보르헤스의 재구성, 재편집이라는 이 희한한 글쓰기에 의해 이미 풍자가 되고 조롱이 되는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바로 보르헤스의 이 행위 자체에서 어쩜 상당한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죽은 아들에 대한 상심으로 아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귀부인의 애틋한 모성을 이용하여 뻔뻔하게 살아 돌아온 자식으로 행세하는 사기꾼 ‘톰 카스트로’의 이야기, 일본 사무라이 전설의 한 토막을 다시 쓴 ‘무례한 예절 선생’의 불명예스런 죽음의 이야기, 이야기 속에 다시 쓰기에 대한 작가의 주장이 스며들어 “우리들이 기거하고 있는 지상은 하나의 실수, 덧없는 패러디”임을 선언하는 ‘위장한 염색업자 하킴’의 이야기 등은 인간세상에서 혐오감은“본질적인 미덕”인 것이 아닌가하고 묻는다.

 

그리고 짧은 이야기 속에서 작가의 뻔히 보이는(이것도 작가의 의도) 숨바꼭질 같은 유머가 빛나는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라는 작품이 있는데, 절묘한 반전과 그 음울한 유쾌함이 거의 절대적으로 각인이 될 만큼 감성을 자극한다. 거들먹거리고 젠체하며 마을의 절대자로 행세하던 자가 여러 마을을 휩쓸던 상대가 눈앞에 나타나자 비겁하고 초라하게 도망치는 것과는 달리 보이지 않을 만큼 무시되던 존재였던 화자(話者)에 의해 소리 없이 처리되고, 정말의 승자가 누구였는지를 간접적이고 우회적으로 넌지시 암시하는 기교에는 그만 슬그머니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게 한다. “그날 밤 루하네라(강자가 차지하던 마을 최고의 여성)가 나의 집에 묵으로 왔고”라는, 사실 이 반전의 문장이 소설의 처음에 있었음을 깨닫는 허를 찌르는 술수 탓에 작가의 재치가 더욱 좋아지는 것이다. 문학에 있어서의 문제는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하는 데 있지 않고 기존의 이야기를 어떤 방법으로 재편성, 재해석하느냐에 있는가, 즉 문학의 절망적 본질에 대한 탁월한 탐구를 비로소 접한 즐거움은 이처럼 기대 이상의 것들로 그득한 포만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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