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 김말봉 애정소설
김말봉 지음 / 지와사랑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김말봉의 이 소설이 조선일보에 연재되던 1937년은 물론 1930년대의 시대상을 살펴볼 이유가 있다. 대체 일제 식민치하의 한국인들이 통속적 연애소설에 열광해야 했던가하는 이유와 이러한 소설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년대는 일제가 군국주의를 강화하던 시기이며, 더구나 작품이 발표되던 37년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해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식민지민은 무조건의 희생이 강요되고 삶은 더없이 피폐해졌으며, 민족말살정책이 고강도의 폭력을 동원하여 자행되던 시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애정소설이라니? 하는 의문이 들법하다. 그러나 일제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새로운 알레고리라고 관대하게 바라본다면, 또한 식민지하에 이루어진 근대화가 낳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인습의 파괴에 대한 대결과 갈등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관점으로의 성숙으로 파악한다면 한국문학의 일대 진전이라고도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조금은 너그러운 이해로 이 소설을 읽게 되면 신문의 상업화에 따른 전형적 대중통속 소설인 『찔레꽃』이 애욕과 순수사랑이 뒤얽힌 말초적 감성의 자극에 머물지 않고 개인적 욕망과 사회적 윤리의 갈등, 자본에 예속되어가는 인간 삶의 자문(自問), 자작농의 소작농으로의 전락과 같은 사회구조적 모순 등을 가로지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30년대 후반에 이르러 「백치 아다다」의 작가 계용묵과 같은‘인생파 작가’들이 파고들던 물질적 소유양식과 정신적 삶의 주관성이 인간의 가치와 행복에 미치는 영향의 조망이 이 작품에서도 중요한 주제를 형성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당대의 한국사회와 한국인들이 이미 근대 자본주의로 인한 물화(物化)를 근대화의 모순으로 이해하고 고민하고 있었음을 포착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젊은이들의 애정관계에 끊임없이 작동하는 시대의 현상들을 사건화하면서 식민주의적 근대성이 뿜어내는 모순과 문제들을 발설하고 있다. 중심인물인 스물두 살‘정순’이 가계의 곤궁함을 책임지는 가장의 부담을 안고 은행장인 신흥귀족의 가정교사로 입주하게 되면서 겪는 사랑의 애환에 얽힌 지극히 속된, 진정 통속(通俗)적인 전개를 하고 있다. 돈의 권세를 신봉하는 은행장 조만호의 탐욕스러운 육욕에 대비되어 만성적 심장병으로 누워 남편의 바람기에 히스테리를 보이는 안주인은 남성중심적인 당대의 왜곡된 성문화를 대변하고, 이들의 부에 힘입어 일본의 대학을 졸업하고 세계여행을 다니는 아들 경구와 딸 경애는 삶의 곤궁함, 자본에 예속된 삶을 직시하는 정순과 또 다른 대척에 놓여있다.

 

정순과 혼인을 언약한 대학생 민수는 이러한 대립 구조에 사회구조의 변화를 나타내는 중요한 성격을 지니고 애정 전선에 변수 역할을 수행한다. 마을 유지로서 광대한 농토를 소유했던 그의 집안이 연이은 집안의 우환으로 가세가 기우는데, 구시대의 인습으로서 장례 등 제례의 허식과 허례로 인한 과잉의 체면치레를 하나의 원인으로 천명하고 있다. 결국 민수네 농토가 은행의 경매로 인해 기반을 잃고 자작농이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농경사회가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구조적 전환을 하는 시대적 상황을 기술하고 있는 것인데, 이 사건은 민수와 은행장 조만호와의 악연을 빚어낸다. 경매 기일의 연기를 요청하나 거절당하고, 민수의 연인인 정순의 사랑이 어긋나는 것도 바로 이 사회구조적 변화기에 처해있던 소시민들의 저항할 수 없는 근대화의 폭력성의 한 단면일 것이다.

 

자신의 딸보다 네 살이나 어린 가정교사 정순의 뽀얀 목덜미와 여체의 탐닉을 그리는 조만호의 심욕은 추함 그자체이다. 또한 그의 육욕을 채우는 대상으로서 기생 옥란의 물질적 욕망이나, 조만호의 병약한 아내의 죽음이후 자신의 딸을 이용하여 조만호를 갈취하는 침모(針母)의 기만성은 황금만능의 물질주의가 이미 식민지민들의 정신을 얼마나 깊숙이 갉아대고 있는지를 묘파(描破)해내고 있다.

즉 자본주의 물결과 같이 이식되기 시작한 식민사회의 근대화는 물질적 욕망의 끊임없는 부추김과 새로운 물질적 노예와 자본 계급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김말봉의 연애소설이야말로 당시 해체되던 경향주의 문학과 모더니즘 문학의 전환기라는 시대적 성향이 그대로 스며있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야기의 줄기인 사각, 오각, 육각으로 얼기설기 얽힌 남녀의 연애로부터 자유연애와 여성의 정조관념에 대한 파괴적 담론, 구세대에 의해 여전히 주장되는 가부장적 결혼관과의 충돌로부터 옅은 여성주의의 싹을 볼 수 있지만, 신식 여성이라는 조만호의 딸 경애나, 침모, 옥란 등의 발설에서 남성의 권위에 대한 종속적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시대정신의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자원봉사운동을 하려는 조만호의 아들 경구를 통해 계몽적 확신으로 분열된 주체를 봉합하려는 당대 지식인들의 진정성에 대한 회의를 대변하기도 하는 등 소설은 당대의 거의 모든 사회적 현상들을 녹여내고 있다. 다만 70여년이란 시간적 간극은 한국 현대소설의 초기에 보이는 미숙한 문장들과 구성들로 독자의 상상력을 침범하여 재미를 반감시키기도 하는데, 작가의 주장이나 경향을 직접 소설 속에 발설하는 것이 한 예라고 하겠다. 어쨌든 다시금 출간되어 현대 독자들에게 1930년대 근대화에 매몰되어 있던 우리문학의 한 분류를 통해 당대의 시대정신을 엿볼 수 있게 된 것은 커다란 위안이고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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