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주체
사카이 나오키 외 지음 / 이산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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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에 대한 동일화의 욕망을 부르는‘쌍형상화’,‘문화본질주의’, ‘근대성’과‘보편주의’의 담론을 통한 근대‘일본’을 비롯한‘문화국민주의’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라 할 수 있다. 1910년 한⋅일 강제 합병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사과라는 것이 100 년 만에 나왔다는 발표는 일본 제국주의 사상의 근간이랄 수 있는‘와쓰지 데쓰로’의 전체성의 기획을 위한 문화적 국민주의에 대한 비판론이 주요부분을 장식하는 이 저술의 시각을 이해할 때 혹여 2010년의 일본, 일본인이 자기중심적 역사의 허구와 서양에 대한 동일시의 욕망인 부정적, 대립적 분리주의를 벗어날 정도의 각성이 이루어질 만큼 성숙해졌나 하고 의아해 질정도이다.

저자‘사카이 나오키’의 발화자로서의 위치는 일본인이나 미국인으로서가 아니라 未知의 타자, 즉 상호 말이 통할 지 알 수 없는 자로서의‘외국인’이라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이 저술의 첫 장인 31 세로 요절한 재미 한국인‘차학경’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딕테』가 집요하게 시도하는‘말하는 주체’의 제작을 유산시키고, 안과 밖을 가르는 대칭적 경계선을 혼란시켜 쌍형상화 과정을 위기에 빠뜨리고자 하는 작업의 독해와 일맥상통한다. 식민지민으로서 모국어를 사용할 수 없고 강제된 외국어를 사용해야만 했던 어머니, 그리고 미국의 이민자로서 영어를 쓰지만, 말하는 것과 의미사이의 거리가‘0’으로 환원이 불가능함으로써, 신체가 보이는 완강한 단념으로서의 상실의 발견을 통해 주체적 기술의 작업을 무효화시키는 문학의 정치성을 읽어내는 것과 같다.

서양의 근대적 담론에 의해 제작된‘민족공동체’나‘국민 주체’라는 작위적인 주체 만들기를 통한 ‘일본국민’의 제작 과정에서부터 서양에 대결하는 것으로서의 발상으로서 단지 욕망의 재생산 이상이 아닌 자기의 사상이나 역사의 잘못된 출발을 지적한다. 사실 이러한 역사적 오류는 우리의 역사에서도 동일한 모방을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리적 이름과 그 영역에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예로서 상고시대에도 과연 한국이라는 지역이 있었던 이상 민족으로서 한국인 또한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타당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서양과의 대칭성과 평등에 대한 요청에 의해 발상된 국가와 역사라는 관념은 현재의 지리적 영역에는 고대에도 자신의 민족이 존재하였다고 정의해버리고, 그저 시대를 확장해 버린다.‘일본사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지적하는 이와 같은 문제는 비서양의 역사에서 거의 동일한 형태로 목격된다. “사료들에 나타난 사고방식이나 감정은 현대 일본인에게는 부정할 여지없는 이국적인 것”이라고 역사인식의 오류에 쐐기를 박는다. 자기중심적이고 세계시민주의 전체론적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 국가에 의해 매개된 합리적 이성 공동체라는 국민을 만들어내는 것은 타자의 관점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싶은 전이적인 욕망의 발현, 즉 쌍형상화 도식에 이미 연관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의 황국사관을 정립한‘와쓰지’의『윤리학』과 『풍토』의 담론들을 통해 이 저술의 중심주제인 문화국민주의에 대한 자아도취적 메커니즘과 반역사적 태도의 비판론은 오늘의 일본,일본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또한 국민의 정체성과 동일한 전체의지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한 가시성의 구조에 대한 천황제에 대한 담론은 우리 정치사회의 현실에서도 유의미한 관점을 해독케 한다. ‘쇼와 ’천황이 죽기 3개월 전부터 일본대중매체를 통해 천황상을 쏟아내지만 실은 천황의 신체는커녕 병실조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대중매체에 의해 주어진 정보와 이미지라는 가시성의 구조 속에서 실은 내내 불가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국민은 부재상태에서 보는 것을 욕망할 것이라고 가정된 집단으로 재정의 되어“같은 욕망을 공유하며 같은 대상을 걱정하고 관심을 가지며 같은 목적을 위해 행동하리라 생각되는 사람들로 국민을 정의”하려는 시도로서 해석되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 어떠한 이의신청을 하면 바로 억압되고, 암묵적으로 굴복을 강요하는 공감의 일체화과정을 유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서민의 복지정책을 말하면 친북세력, 빨갱이로 치부되는 한국 보수사회의 집단적 세뇌 과정과 같다 할 수 있다.

이는 와쓰지의 철저한 인간 개별성의 부정과 사람에 내재하는 전체성만을 인정하는 인간론의 모습, 즉 감정이 무매개적으로 공유됨으로써 공감의 일체화가 이루어지는 전체성으로의 합일에 대한 사례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을‘문화적 본질주의’라 할 수 있는데, 공유된 심미적 정서로 통합된 문화적 공동체와 국가의 통합체로서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와쓰지의 담론에서 아주 야릇한 오늘의 일본인 정서를 엿볼 수 있는데, 살아있는 전체성으로서의 국민이지만 전체성으로서의 전체의지는 그 존재말고는 아무것도 실현하지 않으니, 전체의지는 무언가를 함으로써 그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보이지 않는 전체성을 어떻게 대상적이고 눈에 보일 수 있게 하느냐는 것으로서 일본인들은 그것을‘천황’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천황은 사회의 유기적 연대를 상징할 뿐 어떠한 정치적 귀결에 대해서도 결코 책임이 없다는 얘기와도 상통하는 것이니, 아주 인상적이고 주체에 대한 교묘한 논리이지 않은가? 어쨌거나 자의성과 문화적 국민주의가 동원된 사례로서 와쓰지의 천황제론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국민’과 ‘국가’, 그리고‘전체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의 토양을 마련해준다.

한편 지배력을 가진 실정성으로서의 서양이라는 상징된 통일체가 “지정학적인 것을 역사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담론 도식의 역할”로서 ‘근대성’을 정의하고, 세계를 역사적 지정학적으로 다르게 생각해 볼 가능성을 배제하는 일종의 뒤틀림으로 봄으로써 서양이라는 통일체를 구성하는 담론 편제로서 보편주의와 특수주의를 설명하는데, 서양의 합리주의를 말할 때면 보편성과 서양세계를 연결하는 식의 일정한 권력관계를 정식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등장하거나, 힘의 우월성에 의한 일종의 몽상임을 논증하기도 한다. 보편과 특수주의에서 보듯이 역사의 주체는 복수이며 역사적 주체의 위치는 일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결국 이종혼성성과 타자성에 얼마큼 열려있는지, 다원적 결정을 고려할 줄 아는, 그래서 역사 주체들 사이의 작용과 반작용을 여하히 포섭하여 나가느냐 하는 것은 슬기로운 역사인식의 관건이 될 것이다. 인식론적 subject인 주관에서 탈피하여 지속으로서의 시간에 마련되는 주체(主體)를 정립 할 것인가는 실로 자명한 귀결일 것이다. 실로 다양한 담론들로 구성된 역사 비평서이자 문화에 대한 명료하고 실천적 힘을 부여하는 보배 같은 실천철학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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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리
고봉황 지음 / 왕의서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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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민중들의 삶이란 항시 치욕과 모멸, 눈물겨운 인고(忍苦)의 시간임을 역사는 말한다. 그래서“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보면 살아진다)”는 무념의 체념어린 신조가 삶 그자체가 되어버린다. 그저 질긴 목숨 이어가기만 하는 것이다. 적어도 타인에게 종속되지 않고 방해받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이 인간사, 아니 이 사회의 더욱 두드러진 모습일 것이다.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빼앗긴 것을 찾기 위해 몸부림쳐야하는 사람의 연대기를 좇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 작품은 그래서 가뜩이나 호젓한 우리네들의 마음을 더욱 아리고 슬프게 하고 분노와 통증으로 괴롭게 한다.

1958년 제주 4.3민중항쟁의 시기를 배경으로 시작하여 생의 전반을 치유되지 못한 화인(禍因)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송지하’라는 여인과 그녀를 에워싼 비극의 일대기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이 땅에서 권력과 부가 행사되고 장악되는 모양이 추악한 형상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지도 않은 것이지만 이로 인해 민중의 삶이 시련과 고통으로 점철되어 왔으며, 바로 이 시간에도 그 고통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반복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퇴색시키지는 않는다.
당시 이념이란 것이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자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상이 아니었음은 자명하다. 일개 경찰관이 무슨 이념적 철학관과 신념이 있었겠으며, 미군정청에 아부하는 자들이 권력과 재산의 증식말고 어떠한 자기이해가 있었겠는가.

이승만 정권의 권력유지를 위해 착안된 빨갱이라는 적대전략의 명맥은 지금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며 하며 활개 친다. 역사의 혼란과 전환기는 이 땅에 오늘도 이어지는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가져와 정의와 도덕성과는 거리가 먼 사회를 고착화시키고 있다. 소설은 이러한 사회가 빚어낸 인간들의 제어되지 않은 비열함과 추접스러운 욕망이 한 가계(家系)의 파괴에 작동한 일그러진 모습을 그려낸다. 위조하고 협박해서 강탈하고, 저항하면 죽음으로 보상하는 세계, 부도덕한 권력에 반항하면 빨갱이가 되어 도살된다. 아버지와 오빠, 사랑했던 연인까지 잃어야 했던 여자. 죽음을 피 할 수 없는 연인의 간절한 부탁인 그의 아이를 가진 여자와 배 속의 아이를 지켜내야 했던 여인, ‘지하’의 인생은 그렇게 시작된다. 연인의 무력한 죽음을 구제키 위해 극악한 경찰관에게 몸을 맡겨야하는 비참함, 악의 씨앗이 잉태되고, 연인의 아이까지 양육해야 하는 여인의 마음속 응어리는 비극에서 비극으로 치닫는다.

사랑했지만 손이 닿지 않는 사람,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의 아들과 자신의 혈육이지만 악의 씨앗인 딸의 양육은 비뚤어진 사랑과 학대를 낳는다. 빼앗긴 한라산 기슭의 광활한 목장을 되찾는 것은 도적들인 지배권력과 재산가들에 대한 복수의 표상이다. 주정사업을 통해 억척스럽게 재산을 모으는가하면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간절함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헌신적인 그의 자식에 대한 양육은 극단적인 외면과 학대로 이어지는 자기의 딸과 대조되어 회복될 수 없을 것 만 같은 슬픔의 심연으로 몰아넣는다. 악연의 뿌리는 이리 휘감기고 저리 감겨서 사랑이 되고 또 다른 불신과 이별, 고통을 낳는다. 그러나 여기에 움츠리고 있는 또 하나의 상처, 지주계급인‘지하’의 상처와는 달리 바라보아야만 하는 태생적 통한을 안고 있는‘우찬’이란 인물은 바로 우리네의 모습, 우리들의 어버이와 조상처럼 희생되고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의 전형이어서 그 개입만큼이나 균형자로서의 객관적 시선을 생각게 한다.

인생을 앗아간 자의 아내 역까지 해내면서 되찾아야만 했던 빼앗긴 땅, 그렇게 찾은 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미한테 따뜻한 손길 한번 받지 못하고, “바닷물로 눈물을 씻어내며 자맥질을 하던”딸의 한 맺힌 죽음, 자신 만큼이나 헌신적인 희생과 사랑을 주었던 사람에 대한 몰이해가 황혼이 뉘엿뉘엿 내릴 때에야 비로소 이해되는 것은 진정 어리석음의 고통일 것이다. 제주 여인들의 그 모진 비바람이 시대의 쓰라린 역사와 궤를 같이하여 민중의 삶과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한다. 비록 400쪽 남짓의 짧은 소설이지만 여느 대하소설 못지않은 장엄한 스케일로 비바리, 제주 여인 3대에 걸친 피울음의 흐느낌이 문장의 곳곳에 스며 흘러간다. 사랑과 희생, 집요한 욕망으로서의 모성에 대한 갈증이 빚어낸 뜨거운 삶의 이야기다.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숭고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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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장 - 기억, 시간 그리고 나이
다우어 드라이스마 지음, 권세훈 옮김 / 에코리브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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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 그리고 나이를 들어가고 인생의 많은 시기가 노년의 삶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 이즈음에 중년이란 그럴듯한 시기를 지나 초로의 삶을 그려보기 시작해서 때문일 터이다. 심리적, 신경생리학적 배경이 이 저술의 근간(根幹)이고, 그래서 정신의학적인 조언과 나이듦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고 있지만, 내겐 기억과 시간의 문학적이고 철학적이기까지 한 저자의 담론에 더욱 매료되었다고 하여야겠다. 아마 삶이란, 아니 내 존재에 대한 의미가 시간의 인식과 함께하고 있다는 이해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며, 그 가운데 불현듯 과거로 연결되는 추억들에 대한 감상적 기운 탓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 어떤 것을 추억한다는 것은 “추억 속에서 오늘 바라본 예전의 자아가 나타날 뿐만 아니라 추억하는 순간의 감정과 생각의 일부”일 것이다. 이처럼 모든 추억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두 극 사이의 접촉을 의미한다. 나이 들어 남은 미래가 짧아지고, 그래서 시선을 과거로 향하게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불안한 연결, 즉 현존재에서 기인한 불편한 측면에서 잠시 벗어나게 만드는 무의식적인 메커니즘이라는 설명에 수긍하게 된다.
부쩍 과거의 이야기로 수다스러워진 부모님을 대하면서, 또한 자식들이 마지막으로 찾아 온 시간을 훌쩍 먼 시간으로 이해하는 모습처럼 시간의 흐름과 반대 방향으로 인식을 작동시키는 그 분들의 세상보기를 내 아이들이 20대를 훌쩍 넘기고서야 이해하는 것은 어느새 인생의 계단에서 정점을 찍었다는 자각에서 인지도 모르겠다.

‘늙은 몸’이 섭생, 위생, 보살핌을 통해 어느 때보다 잘 보존되고, 노인들이 오늘 만큼 건강한 시대도 없을 것이며, 노년기가 인생의 어떤 시기보다 길어졌다. 그럼에도 우린 노인, 노년을 말하기를 주저한다. 왠지 방어하고 거리를 두고 싶은 그 시기, 그 만큼“노년을 원래의 의미에 맞게 평가하는 것에 우린 어려움”을 겪는다. 여기엔 우리의 나이에 대한 이중적 태도가 잠자고 있기 때문인데, 대체로 늙음을 자신의 이야기로 말하지 않고 남의 이야기로 하는 모습이나, 세간의 노인을 위한 광고나 잡지, 책들에서 나이에 대한 암시를 피하는 현상에서 목격할 수 있다. 마치 노년은 현명함과 성숙한 인식을 품고 있는 인생의 단계처럼 수식하지만 쇠퇴와 질병, 우둔함과 탐욕스런 노인들이란 실체를 숨길수도 없다. 노년은 그러한 것이다. 자연스러움에 저항할수록 시선은 왜곡될 뿐이다. 이 저술은 이러한 노년의 그러함 중에서도 기억과 시간, 즉 망각에 대한 삶의 철학을 얘기한다.

나는 삶의 나이가 아직 노년에 이르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선명한 추억도 그려내지 못한다. 그러나‘귄터 그라스’나 ‘올리버 색스’가 그들의 자서전에서 술회하고 있듯이 60세가 넘은 어느 시기에 문득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어린시기의 장면들이 뚜렷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처럼 오래된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 이 저술의 주요 논제라 할 수 있다.  이것을‘망각의 역현상 효과’라 한다. 노년의 시기에 최근의 사건이나 기억은 흐릿한 반면 오히려 과거의 어린 시절이 선명하게 기억되는 현상이다. “노인에게 미래는 확정적인 불가능한 것들의 합”이며, 내적 시선은 그 어느 시기보다 훨씬 예리해진다. 또한 회고는 노인들이 현재의 요구들에서 벗어나게 만들며, 바로 지금 급박하게 필요한 인지활동의 중단을 촉구한다. 그래서 현재와 불편한 충돌을 회피하게 한다. 그 거북한 죽음의 연결이라는 긴장을 피하고 과거의 행복으로 돌아가게 하는 이 자연의 메커니즘에 숭엄함을 느끼게 된다.

그럼 왜 과거의 행복하고 선명한 기억들이 청소년이나 청년기의 추억에 집중되는 것일까? 기억과 집중력 같은 인지능력은 청년기와 성년기에 최상의 상태에 이른다고 한다. 즉, 이 시기에 체험한 것은 이후 삶에서 일어날 일보다 저장하기에 더 좋은 기회를 갖게 되며, 더 나은 조건에서 저장될 수 있어 나중에 추억으로 더 자주 떠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시대를 대표하는 영화나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결정적인 책’역시 우리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시기와 관련되는 20대를 전후하고 있으며, 이 시기는 바로‘처음으로’라는 삶에서의 충격적인 기억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망각의 역현상이 다른 기억력이 감퇴하는 시기에 부상하여,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던 추억들이 돌아온다는 점은 얄궂은 당혹감과 신비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봉인되었던 시간이 진정 필요한 삶의 시기에 열린다는 이 자연의 경외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사실 내게 있어서 이 저술은 기억과 시간에 대한 깨달음으로서 중요한 영감들을 제공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보다 풍부한 지적영역들이 있다. 노령화사회에 도달한 오늘의 세계에서 약삭빠른 시장의 기만과 허위도 주시하고 있으며, 기억에 대한 사회학적, 문학적 성찰들은 물론 나이의 심리학적, 인구통계학적 담론들을 통한 예리한 인문학적 메타포들로 삶에 대한 투시력을 제고시켜주기도 한다. 한편‘제발트’의 『이민자』들을 상기시키는 시간과 기억이 만들어내는‘향수(Nostalgia)’에 대한 사회학적 성찰의 이야기는 한편의 서사시이자 지구화로 인한 인류의 유목민적 통증에 대한 연민과 문제의식을 자극하기도 한다.

“희망은 미래를, 추억은 과거를 향한다. 젊은이들에게 미래는 길고 과거는 짧다. 그들은 희망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노인은 희망보다는 추억 속에 산다.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망각의 자연스러움, 삶의 시간과 추억에 대한 그 어느 저술보다 안온한 느낌을 갖게 하여주는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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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 - 자유주의적 우생학 비판 나남신서 553
위르겐 하버마스 지음, 장은주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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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공학이라는 생명 자연에 대한 기술화가 점점 인간이라는 자연의 본성에 간섭하고 개입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배아 줄기세포를 도구적으로 이해해도 좋다는 공리주의적 인증이 의학적 정당화와 경제적 정당화라는 탐욕의 동력에 기초하여 우리의 도덕적 감수성을 당황하게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이라는 종의 생명윤리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아무리 반복한다 해도 거듭 해야 하는 긴 호흡이 필요한 규범적 해명과정을 요구한다. 이것은 인간 상호간의 대칭적인 책임 묻기의 관계를 제한하고, 인류 전체의 자기이해를 건드리는 본원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근간에 소개된‘마이클 샌델’은 그의 저술,『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에서 이러한 생명공학 기술을 “인간의 미래를 불투명한 어둠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말하면서, “불공정성의 고착화를 내재하는”“이기적 경쟁의 논리가 만들어내는 불평등이라는 프로메테우스 적 욕구”라고 비판하고, 정복과 통제의 가치로 유전학 기술을 사용하려는 계층의 야욕이라는 관점을 보여주었다. 이는 생명공학기술을 경제-정치적 자본의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공정성의 개념에서 접근한 시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하버마스’의 이 저술은 보다 근원적인 인간의 도덕성 그 자체에 대한 관점, 즉 생명의 객체화, 대상화, 사물화(생산물화)로 인한 인간 고유의 정체성 변질, 인간 종(種)의 윤리적 자기이해를 허물어 버리는 자유주의 우생학에 대한 비판을 기초로하여 더 이상 자기 삶의 역사의 고유한 저자로서의 주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인간 도덕의식의 변질 또는 파괴에 대한 성찰이라 할 수 있다.

생명공학 기술자들과 이들의 투자자, 그리고 자기이익을 고려한 권력의 타협은 유전적 질병들을 유전자에 대한 교정적 간섭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능한 줄기세포에 대한 연구를 지지한다. 그래서‘착상전 유전자 검사(PID)’, ‘배아에 대해 아직 미숙한 단계에서 예방차원의 유전학적 검사’와 같은 우생학적 자유주의를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배아를 사전에 검사하여 성을 구별하고, 재능과 신체적 형질이 부모의 의도된 설계에 부합하는가에 따라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를 결정하고, 자의적인 유전자 변형을 가하여 기대하는 소질의 형질로 디자인하여 부모인 자신들의 욕망을 반영한 아이를 생산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일정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며, 유전적 검사이후에야 비로소 존재할 만 하다고 인정될 경우에 생산하겠다.”는 의미이다. 과연 이러한 행위가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부합하는가?

이처럼 인간이 다른 인간을 기획할 수 있다는 전망에 우리는 경악하고, 직관적인 도덕적 감수성은 당황하지 않는가?  이는 우리의 가치척도의 바탕에 놓여있는 우연과 결정의 경계를 허문다. 인간 생명을 목적을 위하여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생명공학기술자와 지지자들은“잘 정의된 심각한 유전병에 제한되는 경우라면 도덕적으로 허용하는 소극적 우생학”은 도덕성에 있어서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그러나 적극적 우생학과 소극적 우생학이라는 둘 사이의 경계가 개념적이고 실천적일 뿐만 아니라 경계가 유동적인 바로 그런 차원에서는 그의 넘나듦에 대한 모호한 기준이 말장난에 불과한 것임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PID결과 유전적 질병의 소견이 예상된다고 배아세포를 폐기해버려도 된다는, 즉 삶과 죽음의 결정이 잠재적 소질이라는 척도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엽기적이기까지 하지 않은가? 도덕적으로 날카로운 경계선을 설정하려는 모든 의도는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생명을 일단 한 번 도구화하기 시작한 사람, 살 가치가 있는 것과 살 가치가 없는 것을 구분하기 시작한 사람은 정지 없는 궤도를 달리게 된다.”

부모라는 디자이너가 자기의 의도에 맞춰, 소위 목적하는 질적 수준에 맞춰 생산한 인간은 대체 자연발생적인 우연과 결정에 의해 출생한 인간들과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자연발생적인 것과 만들어진 것 사이의“범주차이가 없어진 인간사회의 규범은 분명 변화”되어야만 할 것이다. 인간 자연의 기술화는 윤리적 자기이해를 변화시킨다. 만들어진 자가 자신의 삶의 저자이자 도덕 공동체의 평등한 권리를 지닌 성원이라 이해 할 수 있겠는가? “변화된 자기이해는 자율적으로 살면서 책임 있게 행위 하는 인격체란 규범적 자기이해와는 더 이상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은 스스로를 인간으로서 동일시하고 다른 생명체와 구분해주는 직관적인 자기이해를 가지고 있다. 염기서열의 예측 불가능한 결합으로 귀결되었던‘우연적 생식과정의 조작불가능성’을 마음대로 조작하여 자기 도구화와 자기 최적화로 생산된 종을 인격의 불가침성과 인격의 자연발생적 신체적 구현양식의 조작 불가능성에 의해 출생한 우리 인간 종과의 사이에서 눈에 띄지 않는 규범적 협력관계가 제대로 작동 할 수 있을 것인가? 


배양된 난세포의 게놈에 대한 간섭 여부를 부모의 판단에 맡기는 자유주의 우생학 지지자들은 출산의 자유, 부모의 권리라는 고전적 자유주의에 입각하여 국가에 맞서 개인이 누려야 할 기본권의 물질적 확대가 무엇이 문제냐고 항변한다. 자녀의 유전적 소질의 조합은 부모에게 위임되는 것이 자명한 일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생명공학이 암묵적으로 우리들의 유전 존재라는 정체성을 허물고 있는 지금, 전인격적 인간 생명을 단순히 손익계산에 내맡기고, 주관적 권리를 보호할 수 없는 태어나지 않은 생명을 조작, 통제, 폐기하는 것은 공적자유의 권리에 배치된다


어느 날 자식의 바람직한 유전적 소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생산물로 여기고 그 생산물을 위해 자식의 선호에 따라 적절한 디자인을 기획하게 되는 순간, 결과물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게 된다. 결코 사람에게 행사되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그런 지배 말이다. 인격과 사물의 경계를 허문 결과, 게놈의 생산자를 고려하면서 사는 삶, 더 이상 인간 자신이 자신의 고유한 저자가 아닌 삶은 자기의식과 책임의 대칭적 균형을 상실케 한다.

급기야는 생명공학 기술자, 자유주의 우생학 지지자들은 도덕적 냉소를 보인다. 우리가 왜 도덕적이기를 원해야 하는가? 고 말이다. 이들 말대로 우리 인간들이 도덕적 존중을 확대해 오지 않았다면 , 도덕적 죄악이 아무런 부정적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면, 인간이 살고 있는 우주는 어떤 모습일까? 견디기 힘든 곳이 되었을 것이다.“도덕적 진공상태에서의 삶, 도대체 도덕적 냉소주의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그런 삶의 형식 안에서 삶은 아마도 살 만한 가치가 없을 것이다.”

인간 생명은 목적을 위해, 도구로 사용되는 사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자연의 기술화가 이와 같이 외적 자연과 내적 자연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순간, 인간의 태도는 변화되어야 한다. 새로운 종의 정의와‘윤리적 신세계’가 성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암묵적 전제에서 출발한다.‘자신으로 있을 수 있음’, 즉 “자신의 삶의 기획을 성공시키는 데 무한한 관심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 윤리적 자기반성자기선택의 형식”을 말이다. 


인간을 사물화시키고 구속시키며 생명의 죽음과 삶을 자의적으로 결정하겠다는 자유주의 우생학은 그래서 인류 전체의 자기이해와 규범적 동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유전자에 교정적 간섭을 당연시하려는 생명공학 기술, 아니 인류의 자기 도구화에 대한 탈형이상학적 사유의 최고의 저술이라 할 수 있다. 여러 도덕론자들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자기 의식적 실존의 단독자인 인간이란 종의 근원에서 고찰한 숭엄한 생명윤리 고찰의 최고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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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1 세계문학의 숲 1
알프레트 되블린 지음, 안인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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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황폐함, 혼란과 불안에 유동하는 인간들, 전환기의 이념적 갈등이란 배경 속에서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한 인물을 통해 당대의 일상성에 대한 비루함을 시시콜콜 조망하는 작품이다. 베를린 중심부와 동부에서 그렇고 그런 인물들의 흔적을 뒤쫓고, 공적, 사적 사건들이 무질서하게 망라되어 탐색된다. 자기이익과 물질주의, 산업화와 상업화로 갈수록 비대해지고 혼탁해지는 도시의 혼돈과 메마름, 그리고 전후(戰後) 사회주의의 실패와 나치 파시즘의 대두가 교차하는 시대의 클로즈업은 보다 거시적인 역사의 당위성을 생각게도 한다.

이러한 시대의 거칠고 조악한 조명에 못지않게 이 작품을 흥미롭게 대하게 되는 것은 내면, 즉 인물의 심적인 흐름을 통해 피폐한 세상의 단면들과 그로인해 더욱 경외감을 갖게 하는 인간성의 명징한 은근한 회복이라 할 수 있다. 연인 ‘이다’를 살해하고 4년의 수감생활 끝에 대도시 베를린의 사람과 건물 숲에 묻히는 보잘것없는 ‘비버코프 프란츠’ 란 인물의 배경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의 직관적 공감을 상실하고 있지 않다는데 매력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작품 초반의 출옥 후 낯설어진 도시의 일원이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당황하는 인물,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타인에 연민을 보이는 유대인의 호의와 삶의 의지를 일깨우는 일화는 사실 잃어버려 알지 못하는 오늘의 감성 탓으로 그 인간적 관심과 동정이 조금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점차 프란츠란 인물에 내 자신의 대입이 자연스러워지고, 지극히 정당하고 당연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처럼 시대를 건너뛰는 보편적 공감으로 몰입하게 된다.

시민에게 의식주의 안정적 보장을 해주지 못하는 사회주의, 이것은 이념의 이론적이고 진실성과는 무관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어떤 강요도, 지지도 취약하게 한다. 교할하고도 민활하게 이러한 인식의 공백을 침투하는 것은 그럴듯한 물질적 자기만족의 체험이고, 이는 나치의 파시즘이 당시 독일인들에게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될 것이다. 나치당 기관지를 가판(街販)하면서 살아가는 프란츠에게는 사회주의자들의 공허한 구호보다 이것이 실질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들 이념정당과 지배권력 자체에는 어떤 믿음도 없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우린 전쟁터(1차 대전)에서 피를 흘렸어요. 사람들은 우리더러 기다리라고 하지요. 무엇이든 지들 하고 싶은 대로요.” 

 

한편, 소, 돼지 등 가축들의 도축장면의 여과 없는 사실적 묘사에서부터, 상인조합과 부패한 지방권력의 힘겨루기, 당대 여성들에 대한 성적착취, 사기와 도둑질이 만연하는 물질에 대한 비루하고 집요한 집착들, 신발 끈, 신문, 과일판매 등 도시 서민들의 생업수단들, 광고문구와 신문기사에 이르는 망라된 도시의 일상과 면모들이 그대로 열거되어,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나타내는 표현주의 기법은 당대를 상징하는 기계화, 산업화, 도시화, 이기적 물질주의화, 생명, 타자에 대한 무관심등의 폐해에 대한 말없는 저항을 보여준다. 이미 타락한 사회, - “로마도, 바빌론도, 니니베도 이렇게 망가졌고, ~ 中略 ~ 이들 도시들이 그 목적을 다했다는 걸 ~ 中略 ~ 이젠 새로운 도시들을 건설 ~ 中略 ~ 새것을 사야지, 그래야 세계가 살지.” - 구태여 어떠한 자기주장 없이도 붕괴되는 정신과 사회의 변화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뚜렷한 주제를 포획하거나 병행하면서 흐르는 프란츠란 인물의 의식을 따라가는 것은 이 소설의 진정한 묘미이다. 활력도 없고 탈탈 말라버린 두뇌가 되어버렸다는 자각으로부터 시작해서 에로틱한 흥분을 제어하는 의학적 유비를 대입한 원시적 두려움의 묘사라든가, 떠나지 않는 죄의식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 악몽, 불안한 잠, 통증” 에 대한 오이디프스적 은유, 추악하게 오염된 현실을 대치하는 구약의 절묘한 배치는 독서의 풍미를 더해준다.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프란츠의 치졸한 쾌락의 여지조차 인물의 됨됨이를 강화 한다. 죽인 연인의 언니를 찾아가 범하고, 자기의 생존에만 골몰하는 이기적이고 본능적이기만 한 인간이지만, 사기와 도둑질 같은 물질적 이기심에 대한 도덕적 혐오를 보이는 모순된 인간상에서 가치관의 혼란을 보게 된다. 비록 불규칙하고 작은 수입이지만 성실한 대가를 위해 생업에 종사하는 인물로서, 또한 여성을 단지 성적 도구로만 여기는 인간에 대한 교화를 뿌듯해하고, 자신을 기만하여 범죄에 개입케 한 인물들과 집단에 대한 반감까지 악의 유혹에 저항하지만 죽음으로 내모는 극단적 폭력에 버려지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자신을 파괴하려한 인물들에 대한 복수를 관용으로 승화하여 자기 존재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 즉 평화로운 삶의 희구를 하지만 자기의 범죄행동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은 은폐와 두려움의 해소를 위해 악을 멈추지 못한다. 아마 악의 관성(慣性)때문일 것인데, 이처럼 인간사회를 표현주의 방식으로 들여다보고 망라적 관찰자의 시점을 갖게 해주는 것은 이 소설의 특성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독자에게 그리 친절한 작품은 아닌데, 감정이나 심리적 공감의 연결이 뚝뚝 끊어지고, 인간의 고통이나 슬픔, 즐거움이나 기쁨을 굳이 서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 때문에 초반에는 고생하는데, 조금만 더 나아가면 바로 이러한 기법덕택에 작품이 더욱 흥미롭고 즐거워지기까지 한다. 독일 표현주의의 대표적 걸작을 접한 지적 보상이 분명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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