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 - 자유주의적 우생학 비판 나남신서 553
위르겐 하버마스 지음, 장은주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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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공학이라는 생명 자연에 대한 기술화가 점점 인간이라는 자연의 본성에 간섭하고 개입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배아 줄기세포를 도구적으로 이해해도 좋다는 공리주의적 인증이 의학적 정당화와 경제적 정당화라는 탐욕의 동력에 기초하여 우리의 도덕적 감수성을 당황하게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이라는 종의 생명윤리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아무리 반복한다 해도 거듭 해야 하는 긴 호흡이 필요한 규범적 해명과정을 요구한다. 이것은 인간 상호간의 대칭적인 책임 묻기의 관계를 제한하고, 인류 전체의 자기이해를 건드리는 본원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근간에 소개된‘마이클 샌델’은 그의 저술,『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에서 이러한 생명공학 기술을 “인간의 미래를 불투명한 어둠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말하면서, “불공정성의 고착화를 내재하는”“이기적 경쟁의 논리가 만들어내는 불평등이라는 프로메테우스 적 욕구”라고 비판하고, 정복과 통제의 가치로 유전학 기술을 사용하려는 계층의 야욕이라는 관점을 보여주었다. 이는 생명공학기술을 경제-정치적 자본의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공정성의 개념에서 접근한 시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하버마스’의 이 저술은 보다 근원적인 인간의 도덕성 그 자체에 대한 관점, 즉 생명의 객체화, 대상화, 사물화(생산물화)로 인한 인간 고유의 정체성 변질, 인간 종(種)의 윤리적 자기이해를 허물어 버리는 자유주의 우생학에 대한 비판을 기초로하여 더 이상 자기 삶의 역사의 고유한 저자로서의 주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인간 도덕의식의 변질 또는 파괴에 대한 성찰이라 할 수 있다.

생명공학 기술자들과 이들의 투자자, 그리고 자기이익을 고려한 권력의 타협은 유전적 질병들을 유전자에 대한 교정적 간섭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능한 줄기세포에 대한 연구를 지지한다. 그래서‘착상전 유전자 검사(PID)’, ‘배아에 대해 아직 미숙한 단계에서 예방차원의 유전학적 검사’와 같은 우생학적 자유주의를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배아를 사전에 검사하여 성을 구별하고, 재능과 신체적 형질이 부모의 의도된 설계에 부합하는가에 따라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를 결정하고, 자의적인 유전자 변형을 가하여 기대하는 소질의 형질로 디자인하여 부모인 자신들의 욕망을 반영한 아이를 생산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일정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며, 유전적 검사이후에야 비로소 존재할 만 하다고 인정될 경우에 생산하겠다.”는 의미이다. 과연 이러한 행위가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부합하는가?

이처럼 인간이 다른 인간을 기획할 수 있다는 전망에 우리는 경악하고, 직관적인 도덕적 감수성은 당황하지 않는가?  이는 우리의 가치척도의 바탕에 놓여있는 우연과 결정의 경계를 허문다. 인간 생명을 목적을 위하여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생명공학기술자와 지지자들은“잘 정의된 심각한 유전병에 제한되는 경우라면 도덕적으로 허용하는 소극적 우생학”은 도덕성에 있어서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그러나 적극적 우생학과 소극적 우생학이라는 둘 사이의 경계가 개념적이고 실천적일 뿐만 아니라 경계가 유동적인 바로 그런 차원에서는 그의 넘나듦에 대한 모호한 기준이 말장난에 불과한 것임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PID결과 유전적 질병의 소견이 예상된다고 배아세포를 폐기해버려도 된다는, 즉 삶과 죽음의 결정이 잠재적 소질이라는 척도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엽기적이기까지 하지 않은가? 도덕적으로 날카로운 경계선을 설정하려는 모든 의도는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생명을 일단 한 번 도구화하기 시작한 사람, 살 가치가 있는 것과 살 가치가 없는 것을 구분하기 시작한 사람은 정지 없는 궤도를 달리게 된다.”

부모라는 디자이너가 자기의 의도에 맞춰, 소위 목적하는 질적 수준에 맞춰 생산한 인간은 대체 자연발생적인 우연과 결정에 의해 출생한 인간들과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자연발생적인 것과 만들어진 것 사이의“범주차이가 없어진 인간사회의 규범은 분명 변화”되어야만 할 것이다. 인간 자연의 기술화는 윤리적 자기이해를 변화시킨다. 만들어진 자가 자신의 삶의 저자이자 도덕 공동체의 평등한 권리를 지닌 성원이라 이해 할 수 있겠는가? “변화된 자기이해는 자율적으로 살면서 책임 있게 행위 하는 인격체란 규범적 자기이해와는 더 이상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은 스스로를 인간으로서 동일시하고 다른 생명체와 구분해주는 직관적인 자기이해를 가지고 있다. 염기서열의 예측 불가능한 결합으로 귀결되었던‘우연적 생식과정의 조작불가능성’을 마음대로 조작하여 자기 도구화와 자기 최적화로 생산된 종을 인격의 불가침성과 인격의 자연발생적 신체적 구현양식의 조작 불가능성에 의해 출생한 우리 인간 종과의 사이에서 눈에 띄지 않는 규범적 협력관계가 제대로 작동 할 수 있을 것인가? 


배양된 난세포의 게놈에 대한 간섭 여부를 부모의 판단에 맡기는 자유주의 우생학 지지자들은 출산의 자유, 부모의 권리라는 고전적 자유주의에 입각하여 국가에 맞서 개인이 누려야 할 기본권의 물질적 확대가 무엇이 문제냐고 항변한다. 자녀의 유전적 소질의 조합은 부모에게 위임되는 것이 자명한 일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생명공학이 암묵적으로 우리들의 유전 존재라는 정체성을 허물고 있는 지금, 전인격적 인간 생명을 단순히 손익계산에 내맡기고, 주관적 권리를 보호할 수 없는 태어나지 않은 생명을 조작, 통제, 폐기하는 것은 공적자유의 권리에 배치된다


어느 날 자식의 바람직한 유전적 소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생산물로 여기고 그 생산물을 위해 자식의 선호에 따라 적절한 디자인을 기획하게 되는 순간, 결과물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게 된다. 결코 사람에게 행사되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그런 지배 말이다. 인격과 사물의 경계를 허문 결과, 게놈의 생산자를 고려하면서 사는 삶, 더 이상 인간 자신이 자신의 고유한 저자가 아닌 삶은 자기의식과 책임의 대칭적 균형을 상실케 한다.

급기야는 생명공학 기술자, 자유주의 우생학 지지자들은 도덕적 냉소를 보인다. 우리가 왜 도덕적이기를 원해야 하는가? 고 말이다. 이들 말대로 우리 인간들이 도덕적 존중을 확대해 오지 않았다면 , 도덕적 죄악이 아무런 부정적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면, 인간이 살고 있는 우주는 어떤 모습일까? 견디기 힘든 곳이 되었을 것이다.“도덕적 진공상태에서의 삶, 도대체 도덕적 냉소주의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그런 삶의 형식 안에서 삶은 아마도 살 만한 가치가 없을 것이다.”

인간 생명은 목적을 위해, 도구로 사용되는 사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자연의 기술화가 이와 같이 외적 자연과 내적 자연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순간, 인간의 태도는 변화되어야 한다. 새로운 종의 정의와‘윤리적 신세계’가 성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암묵적 전제에서 출발한다.‘자신으로 있을 수 있음’, 즉 “자신의 삶의 기획을 성공시키는 데 무한한 관심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 윤리적 자기반성자기선택의 형식”을 말이다. 


인간을 사물화시키고 구속시키며 생명의 죽음과 삶을 자의적으로 결정하겠다는 자유주의 우생학은 그래서 인류 전체의 자기이해와 규범적 동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유전자에 교정적 간섭을 당연시하려는 생명공학 기술, 아니 인류의 자기 도구화에 대한 탈형이상학적 사유의 최고의 저술이라 할 수 있다. 여러 도덕론자들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자기 의식적 실존의 단독자인 인간이란 종의 근원에서 고찰한 숭엄한 생명윤리 고찰의 최고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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