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장 - 기억, 시간 그리고 나이
다우어 드라이스마 지음, 권세훈 옮김 / 에코리브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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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산다는 것, 그리고 나이를 들어가고 인생의 많은 시기가 노년의 삶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 이즈음에 중년이란 그럴듯한 시기를 지나 초로의 삶을 그려보기 시작해서 때문일 터이다. 심리적, 신경생리학적 배경이 이 저술의 근간(根幹)이고, 그래서 정신의학적인 조언과 나이듦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고 있지만, 내겐 기억과 시간의 문학적이고 철학적이기까지 한 저자의 담론에 더욱 매료되었다고 하여야겠다. 아마 삶이란, 아니 내 존재에 대한 의미가 시간의 인식과 함께하고 있다는 이해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며, 그 가운데 불현듯 과거로 연결되는 추억들에 대한 감상적 기운 탓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 어떤 것을 추억한다는 것은 “추억 속에서 오늘 바라본 예전의 자아가 나타날 뿐만 아니라 추억하는 순간의 감정과 생각의 일부”일 것이다. 이처럼 모든 추억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두 극 사이의 접촉을 의미한다. 나이 들어 남은 미래가 짧아지고, 그래서 시선을 과거로 향하게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불안한 연결, 즉 현존재에서 기인한 불편한 측면에서 잠시 벗어나게 만드는 무의식적인 메커니즘이라는 설명에 수긍하게 된다.
부쩍 과거의 이야기로 수다스러워진 부모님을 대하면서, 또한 자식들이 마지막으로 찾아 온 시간을 훌쩍 먼 시간으로 이해하는 모습처럼 시간의 흐름과 반대 방향으로 인식을 작동시키는 그 분들의 세상보기를 내 아이들이 20대를 훌쩍 넘기고서야 이해하는 것은 어느새 인생의 계단에서 정점을 찍었다는 자각에서 인지도 모르겠다.

‘늙은 몸’이 섭생, 위생, 보살핌을 통해 어느 때보다 잘 보존되고, 노인들이 오늘 만큼 건강한 시대도 없을 것이며, 노년기가 인생의 어떤 시기보다 길어졌다. 그럼에도 우린 노인, 노년을 말하기를 주저한다. 왠지 방어하고 거리를 두고 싶은 그 시기, 그 만큼“노년을 원래의 의미에 맞게 평가하는 것에 우린 어려움”을 겪는다. 여기엔 우리의 나이에 대한 이중적 태도가 잠자고 있기 때문인데, 대체로 늙음을 자신의 이야기로 말하지 않고 남의 이야기로 하는 모습이나, 세간의 노인을 위한 광고나 잡지, 책들에서 나이에 대한 암시를 피하는 현상에서 목격할 수 있다. 마치 노년은 현명함과 성숙한 인식을 품고 있는 인생의 단계처럼 수식하지만 쇠퇴와 질병, 우둔함과 탐욕스런 노인들이란 실체를 숨길수도 없다. 노년은 그러한 것이다. 자연스러움에 저항할수록 시선은 왜곡될 뿐이다. 이 저술은 이러한 노년의 그러함 중에서도 기억과 시간, 즉 망각에 대한 삶의 철학을 얘기한다.

나는 삶의 나이가 아직 노년에 이르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선명한 추억도 그려내지 못한다. 그러나‘귄터 그라스’나 ‘올리버 색스’가 그들의 자서전에서 술회하고 있듯이 60세가 넘은 어느 시기에 문득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어린시기의 장면들이 뚜렷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처럼 오래된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 이 저술의 주요 논제라 할 수 있다.  이것을‘망각의 역현상 효과’라 한다. 노년의 시기에 최근의 사건이나 기억은 흐릿한 반면 오히려 과거의 어린 시절이 선명하게 기억되는 현상이다. “노인에게 미래는 확정적인 불가능한 것들의 합”이며, 내적 시선은 그 어느 시기보다 훨씬 예리해진다. 또한 회고는 노인들이 현재의 요구들에서 벗어나게 만들며, 바로 지금 급박하게 필요한 인지활동의 중단을 촉구한다. 그래서 현재와 불편한 충돌을 회피하게 한다. 그 거북한 죽음의 연결이라는 긴장을 피하고 과거의 행복으로 돌아가게 하는 이 자연의 메커니즘에 숭엄함을 느끼게 된다.

그럼 왜 과거의 행복하고 선명한 기억들이 청소년이나 청년기의 추억에 집중되는 것일까? 기억과 집중력 같은 인지능력은 청년기와 성년기에 최상의 상태에 이른다고 한다. 즉, 이 시기에 체험한 것은 이후 삶에서 일어날 일보다 저장하기에 더 좋은 기회를 갖게 되며, 더 나은 조건에서 저장될 수 있어 나중에 추억으로 더 자주 떠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시대를 대표하는 영화나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결정적인 책’역시 우리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시기와 관련되는 20대를 전후하고 있으며, 이 시기는 바로‘처음으로’라는 삶에서의 충격적인 기억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망각의 역현상이 다른 기억력이 감퇴하는 시기에 부상하여,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던 추억들이 돌아온다는 점은 얄궂은 당혹감과 신비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봉인되었던 시간이 진정 필요한 삶의 시기에 열린다는 이 자연의 경외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사실 내게 있어서 이 저술은 기억과 시간에 대한 깨달음으로서 중요한 영감들을 제공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보다 풍부한 지적영역들이 있다. 노령화사회에 도달한 오늘의 세계에서 약삭빠른 시장의 기만과 허위도 주시하고 있으며, 기억에 대한 사회학적, 문학적 성찰들은 물론 나이의 심리학적, 인구통계학적 담론들을 통한 예리한 인문학적 메타포들로 삶에 대한 투시력을 제고시켜주기도 한다. 한편‘제발트’의 『이민자』들을 상기시키는 시간과 기억이 만들어내는‘향수(Nostalgia)’에 대한 사회학적 성찰의 이야기는 한편의 서사시이자 지구화로 인한 인류의 유목민적 통증에 대한 연민과 문제의식을 자극하기도 한다.

“희망은 미래를, 추억은 과거를 향한다. 젊은이들에게 미래는 길고 과거는 짧다. 그들은 희망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노인은 희망보다는 추억 속에 산다.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망각의 자연스러움, 삶의 시간과 추억에 대한 그 어느 저술보다 안온한 느낌을 갖게 하여주는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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