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우연의 역사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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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간의 역사에서도 그러하겠거니와 평범한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어떤 짧은 순간에, 또는 이해할 수 없는 모순 속에서 숙명적인 결과가 일어난다는 것은 실로 당혹스러운 진실이 아닐 수 없다. 그 결정적 순간이나 몰락으로부터 무한한 상승의지가 솟아나는 위대한 모순을 알 수 있었다면 우린 천재로 불리고 삶과 역사의 전환자로서 우뚝 서있을지도 모른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순간’, 그리고 ‘위대한 비극’을 포착했다. 이것들에 드리운 광기, 바로 인간 내면의 심층에서 역동하는 어리석음과 무서운 본능이 지배하는 인간사와 인류의 역사의 전환적 사건들의 실체를 보았다는 것이다. “본질적이고도 지속적인 것은 모두 아주 드물고도 짧은 영감의 순간에 창조된다.”는 그의 말은 이 책에 소개되는 인물들과 역사적 사건 모두를 정의하기에 충분하다. 빼어난 이야기꾼이 문학적 향기 그득한 문장에 담아 들려주는 운명의 진실들, 우린 한 걸음 더 우리 자신의 역사에 다가가게 된다.

선택의 순간, 단 1초의 무의식적이기도 하고 의식적이기도 한 망설임, 그리고 역사의 페이지는 넘어간다. 한 개인은, 인류는 오늘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이길 수 없는 운명의 거대한 힘에 맞서려는 광기가 없었다면 예술도, 과학도, 문명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역사는 우연과 광기가 낳은 위대한 모순의 산물이라고도 할 것이다.

세계사를 바꾼 ‘1초’

1815년, 유럽, 나아가 세계를 뒤흔든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온이라는 인물의 정치생명과 유럽대륙의 패권 향방을 가름 짓는 절대 절명의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 세계사적 전투가 운명의 부름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어리석고 무능한 장군, ‘그루쉬’라는 인물의 한 농가에서의 1초, 순간적 오판의 결과였다는 것은 인류의 엄청난 역사라는 것도 사실은 대부분의 일상적이고 지루함이며 본질적인 것은 그 속의 아주 짧은 순간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 우연의 순간 말이다. 이미 이 미련한 프랑스군 장수를 따돌리고 영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워털루로 달려간 프로이센군의 흔적만을 찾는 그루쉬의 1초는 세계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이 1초라는 순간의 시간, 어떤 우연함에 의해 찾아든 시간은 그 순간만큼 무한히 확장되는 시간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정치범으로 처형대에 끌려가 검은 두건에 시야가 가려지고 사형되기 직전에 교차하는 불타오르는 죽음의 키스, 영원한 빛으로 나아가는 기쁨과 행복이 어울린 지상의 마지막 고통, 그리곤 삶의 달콤함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그 찰나(刹那)의 상념들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칼이 내려치려는 직전의 순간, 처형은 정지되고 생의 순간으로 복귀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얼굴에 매달린“창백한 노란 웃음”은 실로 형언 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의 미지의 숭고한 무엇이다.

역사의 우연, 그 순간들이 소설이 되어 흐르고, 웅장한 서사시가 되어 호수의 잔잔한 물결처럼 우리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다. 삶과 역사의 대부분은 지리멸렬하고 초라하다. 어떠한 것도 지속으로 내내 운명적이지 못한 것이다. 그 짧은 찰나의 시간이 우리의 영원을 규정하고, 지탱한다. 흔해빠진 역사의 소재가 아름다운 문학적 문장으로 변신하여 웅숭깊고 지고한 삶의 교훈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경이로운 통찰이 되어 심장을 파고든다.

인간의 진실, ‘광기’, 그 모순의 세계

감성의 억제, 이성의 채로 걸러진 이지적 감성을 말하던 대문호 ‘괴테’의 노년에 찾아든 열정, 아마 죽음이 임박한 일흔 네 살의 노(老) 대가에게도 그 불안의 강렬함은 마지막 욕망과 마지막 체념의 경계를 오르내리게 했던 모양이다. 열아홉 살 소녀, ‘울리케 폰 레베초프’를 향한 연정, 다시금 청춘을 소유하고 싶다는 열망, 늙은 베르테르가 다시 깨어나는 그 전환적 외침은 광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광기! 그 인간적 진솔함, 가장 깊고 가장 성숙하고 정말로 가을처럼 이글거리는 문학작품이라 불리는 『마리엔바트의 悲歌』의 탄생을 가져왔으니 말이다.

“어찌 다시 만나기를 희망하랴,
이 날에도 아직 닫혀있는 저 꽃 봉우리를.
낙원도 지옥도 네 앞에 열려 있으니
마음 속 생각들은 얼마나 불안하게 흔들리는지!”

울리케의 키스를 받으며 이별하고 돌아오는 노인의 체념에는 잊을 수 없는 내적 갈등이 안타깝게 출렁인다.

이처럼 광기는 열정이요, 집념이며, 생래적 부조리에 대한 대항이다.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마흐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플 성벽공략을 향한 집념의 산물들, 거대한 대포, 노출된 바다를 우회하기위해 산을 오르는 배는 그야말로 욕망의 실현을 위해 인간이 행하는 광기의 정수를 보여준다.
또한 유럽인들에게 신대륙의 진면을, 광활한 대양 태평양을, 나아가 잉카에 이르는 길을 최초로 드러낸‘발보아’란 인물의 불멸을 향한 도주의 행로는 한 인간의 광기가 세계사의 흐름을 어떻게 뒤바꾸는지를 찬란하게 드러내며, 성공이라는 우연성에만 집착하며 불타올랐던 남극탐험가 스콧의 장엄한 도전은 위대한 비극의 진한 감동을 일깨운다.

더구나 근대적 시간관, 지상에서의 속도, 그 규모나 리듬에 있어서 근본적 변화를 가져온 1837년의 세계사적 사건을 주목하게 하는데, 한 인간의 굽히지 않는 소박한 용기, 그래 광기다. 격리되어 있던 인간 체험을 동시적인 것으로 만들어 준 대 역사, 구대륙과 신대륙을 잇는 대서양의 해저 케이블 설치는 미친 짓이었을 것이다. 모르스부호가 전신(電信)을 타고 순식간에 세계를 연결하였으니, 오늘날의 이동통신기술은 사실 이 최초의 진보를 향한 도전에 비할 것이 못된다.

에필로그

일생의 작품세계에서 인간의 숨겨진 악마성, 광기와 욕망의 본성, 그 순간의 우연에 천착한 ‘슈테판 츠바이크’의 시선이 녹아든 이 저작은 예리한 역사적 통찰을 문학 향기 그득한 소설로, 서사시로, 희곡작품으로 둔갑시켜 우리네 삶의, 감성의 한복판으로 흐르게 한다. ‘헨델’의 숭엄한 <메시아>의 선율로, 공병장교‘루제’의 하룻밤 열정이 조국 프랑스의 국가인 <라마르 세예즈>가 되어 울려 퍼진다.
그리고 ‘톨스토이’의 미완성 희곡 『그리고 어둠속에 빛이 비친다』는 폭력과 권력에 대한 이중 잣대로 가장했던 대문호의 양심을 하나의 희곡으로 완성하기도 한다. ‘아스타포보’ 기차역 대합실에 붙어있는 작고, 좁고, 낮고 가난한 침대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가장 멀리 도망쳐야 했던 노 작가의 죽음을 승화시키면서.

가끔 우리는 거대한 당위를 거스르는 위험한 광기에도 휩쓸리며, 우연한 어느 순간에 자신의 길을 벗어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한없이 작기만 한 인간이지만 그것에 저항하는 위험한 우리의 모순된 행동이야말로 바로 위대한 비극 아니겠는가? 삶이란 역사란 그런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위대한 전기 작가이자 소설가이며 시인인 츠바이크의 역사, 세상, 인간보기에 다시금 매혹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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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도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4
다나카 요시키 지음, 손진성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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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의민주주의와 공화정을 토대로 하는 현대 정치의 그럴듯한 합의의 이면에 내재한 추악한 욕망과 부조리함의 실체를 냉소적 지성에 담아낸 걸작 우화이다.
권력이 행사하는 탐욕의 현장마다에서 툭툭 내던져지는 문장들에는 더없이 예리한 통찰과 지성이 빛나고, 인간과 인간사회의 본성에 대한 신랄하고 냉혹한 비판의 목소리가 어떤 심정적 정화(淨化)를 느끼게 한다.

때는 지구의 대전도(Big Falldown)로 인한 인류의 멸망을 지켜보던 달에 거주하던 200만 명의 인간이 새로이 형성된 지구 대륙의 일곱 지역에 인류문명의 재건을 시도한 이래 100여년이 지난 2190년, 22세기 말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지상 500미터 이상의 높이로는 날수도 없으며 어떤 시설물도 이에 이를 수 없다. 도달하는 순간 지상인에 대한 감시시스템이 작동하여 레이저로 파괴된다. 월면도시의 인간이 지구 인간들의 하늘, 우주를 박탈 한 것인데, 인간의 약탈적이고 탐욕적인 본능을 제지하겠다는 의지이자,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월면도시로 부터의 통신이 두절되면서 달에 있는 인간의 생존이 불투명해지고, 이는 지구표면 인간들의 억제된 본능의 표출로 이어진다.

얄궂은 장치인데, 하늘을 상실한 인간, 그리고 광대한 대륙에 소수의 인간들이 일곱 개의 도시로 분산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 양식을 단순화시켜준다. 그래서 보다 투명하고 밀착된 인간의 관찰이 가능하고 그 비루하고 취약한 인간성과 인간사회의 본질을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멸망 후 불과 1세기만에 인간들은 권력을 만들어내고 폭압과 독재의 뿌리를 내린다. 내 것을 더 많이 소유하고 그것을 과시하며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욕망을 재현하고 확장해나간다. 착취와 억압을 통해 확보된 부와 권력이라는 힘에 의존하는 것인데, 결말이 뻔한 폭력과 전복이라는 인류 역사의 반복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쫓겨난 권력자는 자기 도시의 이익을 담보로 타도시의 힘을 빌리고, 침략전쟁을 벌인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전쟁에 참여하는 전쟁 수행자는 누구인가? 전쟁을 지시하는 권력자, 지배자는 결코 전쟁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다. 인류가 전쟁이라는 편한 수단을 발명한 이래로 결코 변하지 않는 만고불변의 진리. 그것은 “전쟁을 시키는 사람이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보다 저수준의 생활을 보낸 예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빼앗기 위해 권력이란 녀석은 타인을 합법적으로 희생시킬 수 있는 힘을 행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소설은 권력의 행사와 그 본질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는 자에 대한 본성의 조명을 통해 인간성이란 것의 졸렬함과 비열함, 던적스러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더구나 이들 책략의 설계 주체인 정치와 권력의 천박성과 저열함의 맨 얼굴들을 여지없이 구정물에 처박는다.
일곱 도시의 수장들과 이들의 힘을 실행하는 무력장치인 군(軍)의 리더들의 면면을 통해 정치적 술수, 조직에서의 생존, 인간적 삶이란 무엇인지, 권력과 정치의 현실적 생태와 당위로서의 진실들을 얘기한다. 나아가서 국제정치라 할 수 있는 도시간의 동맹과 전쟁 등, 힘의 균형을 향한 소위 외교라는 것의 은폐된 진실로부터 인간사회에 근원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이기심, 그 비굴함과 야비함을 파헤치기도 한다.

한편, 소설의 서사 축을 지탱한다고도 할 수 있는 장군들, 성공한 가해자라는 파렴치한 정치와 거리를 두려는 인물들, 그리고 탐욕만으로 뭉쳐진 권력자들과 같은 인물들의 성격과 행동을 따라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사실적 묘사들은 바로 이거야! 라고 오늘의 현실에서 오는 답답하고 엉켰던 심란한 마음을 풀어준다. 일례로 “우리 시(市)에 리더가 될 수 있는 놈은 한 놈도 없다. 작은 이익을 탐식하는 쥐새끼들이 있을 뿐이다.”라던가, “기업이나 업계에 결탁해 그 이익을 대변하는 것에 만족”하며, “정계는 정치 업계에 지나지 않았고”와 같은 비루한 정치의 현실상을 말하듯이 오늘의 우리 사회에 발어지고 있는 현실과 중첩되면서 낯설지 않은 문장들로 다가온다.

더구나 “이익을 좇다보니 시야가 좁아지고, 그에 따라 논리가 아닌 힘에 의지한다는 순서”와 같은 구절에 이르면 “시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에 지나지 않는 권력을 자신의 사유물로 착각하고 일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에 광분하는 모습에는 진절머리가 났다.”는 것처럼 정치인들의 더러운 욕구로 침해당하는 시민의 고단한 삶을 바라보는 듯하여 울화가 치밀기도 한다.

또한 유능한 정치가도 아닌 자가 “정치가는 도덕이나 윤리에 의해 판정받는 게 아니라 정책이나 능력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고 떠들어대기도 한다. “이런 대사는 부패 했을 뿐 아니라 무능한 정치가가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해야 할 것은 아니다.”이와 같은 한국의 저열한 정치사회, 거기에 지적 판단력까지 성긴 우민화된 대중까지 더해 이러한 인간적 결함이 증폭되기만 한다.

대의민주주의는 과연 이대로 유지되어야 하는 것일까? 시민은 권력자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선거 때에는 표이며, 세금에 관해서는 납세카드 한 장, 그리고 전쟁 때에는 소모품으로서의 일개 병사.”라는 말이 오늘의 진실이 아닐까? 마치 삼국지를 보는 듯, 또한‘조너던 스위프트’가 냉혹하게 비판하던 야후같은 인간들의 세상이 떠오른다. 어쩌면 사용하는 언어만 복잡해졌을 뿐, 정신 수준은 유치원생의 야만적 탐욕과 다르지 않다는 진단처럼 한국사회의 정치를 일갈하는 문장도 없을 듯하다.
“범용한 정치가에게 진리를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나 하겠는가? 혹 한국 정치를 비판하는 것이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은거한 천재 정치인‘류 웨이’가 말하듯이 정치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범죄를 규탄하는 것이다! 진정한 정치는 자취를 감추고 범죄와 더러운 욕망만 난무하는 세계를.

재치와 기발한 서사로 구성된 일곱 도시의 동맹과 분열, 전쟁과 야합의 시나리오는 읽는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하게 한다. 변하지 못하는 추악한 인간성의 적나라함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인간사회의 정치라는 위악에 대한 촌철살인의 명문장들이 가져오는 감동, 위트와 냉소가 뒤섞인 번뜩이는 비판적 통찰력 때문이다. 배경 장치의 탁월함은 물론 전쟁과 정치와 같은 제재의 적합성, 스토리의 완벽성, 인물이 제공하는 인간성의 투명한 관찰들까지 매혹적 지성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아니 이 소설이야말로 걸작이란 이름을 붙여야 할 것이다. 고전적 지위를 얻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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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10-18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 달의 당선작에서 보고 이렇게 찾아와 글을 읽습니다. 이 작가가 은하영웅전설의 작가가 맞는지요 ^^ 참으로 대단한 작품을 쓰는 작가라고 생각이 드네요. 은하영웅전설 역시 마음을 졸이며 읽었는데 그의 작품이 또 이렇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네요.
정치적 현실을 우화로 쓴 소설을 참 좋아하는데 이 소설도 꼭 읽어 봐야 겠네요. ^^

필리아 2011-10-20 20:05   좋아요 0 | URL
네, 동일 작가의 작품입니다. 꽤 오래된 작품인데 국내에 선을 늦게 보인것이죠. 대단한 작가라는데 동감입니다. ^^

달사르 2011-10-23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치우화. 잼있겠어요!
저는 지금 '은하영웅전설' 보고 있거든요. 제가 지금까지 읽고 있는 부분은 지구와는 무관한 우주의 타 행성들에서 서로 전쟁을 벌이고, 전제주의가 등장하고, 전제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그 반대파가 조금씩 변질되어가고, 그 와중에 영웅이 한 명씩 나타나고 뭐 이 정도인데요. 인간은 우주에서도 지금과 비슷하구나..싶더라구요.

근데, 어머나. 동일 작가의 작품이로군요? ㅎㅎ 리뷰 잘 봤습니다. '은하영웅전설' 다 보고나서 이 책도 봐야겠어요.

필리아 2011-10-23 20:13   좋아요 0 | URL
와~ 부럽습니다. 전 재출간된 이번의 세트 구입을 벼르고만 있거든요...^&*
 
산마처럼 비웃는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5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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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이함, 아마 인간의 지성으로 헤아려지지 않는 무엇에 붙여진 표현일 것이다. 혹은 직면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나 꺼림직 한 것, 무언가 은폐하고 싶은 것에 접근치 못하게 하려는 제약, 금지의 다른 표상일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마을이나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이러한 기담은 사실 이러한 것들이 응집된 이야기이기에 당대의 시대상이나 은닉된 진실이라 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 으스스하고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기담의 요소들이 진실에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을 회피하게 한다. 그래서 이 터부의 실체를 들여다보려면 그 부정하거나 속된 것으로 들어갈 용기가 필요하다. 
작가‘미쓰다 신조’는 바로 이러한 괴이에 명철한 이성의 메스를 갖다 댐으로써 호러물의 공허한 공포를 현실이란 추리의 세계로 끌어낸다. 초월적 또는 환상적 세계를 현실, 속세의 감추어진 욕망의 세계로 전환하는 것이다. 금기란 바로 이처럼 음흉함을 이면에 감추는 가해자의 그럴듯한 장치라 할 수 있다.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는 소설의 시작 부는 ‘고키 노부요시’라는 자의 괴이한 체험기이다. 고향마을 하도의 전통의식으로서 성년의 통과의례인 성인참배를 위해 신산(神山)인 삼산(三山)을 홀로 종주하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이 행로에서 고키는 산녀(山女), 산마(山魔)에 쫒기는 환영과 괴이한 울음소리 등 환청에 시달리다가 길을 잃어 흉산(凶山)인 부름산에 들어가게 되고 산속에 어울리지 않게 서있는 집과 사람들을 만난다. 산 넘어 가스미가(家)의 20여 년 전 집을 떠났다는 ‘다쓰이치’일가를 만난 것인데, 아침에 일어나자 홀연히 이들 가족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이 기이함과 산마의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고키가 ‘도조 겐조’라는 기담수집가이자 아마추어 탐정에게 체험의 기록을 보내 그 실상의 규명을 의뢰한 것인데, 여기서부터 향토색 짙었던 괴담은 과학적 이성의 추리, 경찰의 수사라는 현실의 세계와 융합하기 시작한다.
이 기담이 현실로 진입하는 사건의 발단은 다쓰이치 일가가 사라졌다는 부름산의 주인인 가지토리가(家)의 당주인‘리키하라’의 도움을 받아 산 속 밀폐된 집에서 얼굴이 불타는 시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안에서만 잠기는 대문의 집 안에서 살해자는 자취가 없고 막 살해된 듯한 사람의 얼굴을 숨기려 한듯 얼굴을 알 아 볼 수 없게 불을 지른 것이다. 소위 밀실트릭이란 열린 공간의 상식을 차단하려는 은폐 술책이다. 당연히 이 밀실책략에 무언의 진실이 숨겨져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흉산인 부름산이 오래전 금광이 있었다는 전언이나, 다쓰이치나 그 형제인 다쓰조의 금광에 얽힌 끔찍한 소문이 실려 금기란 바로 금, 재물에 대한 탐욕의 은폐가 오랜 세월 축적된 현상임을 암시한다. 살해된 자의 신분이 다쓰이치, 다쓰지, 다쓰조 삼형제의 집안인 가스미가를 지키는 다쓰지임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본격화한다. 죽은 다쓰지는 구마도를 수호하는 신령인 여섯 지장의 첫 번째인 백색지장의 표식을 한 형상이다. 연쇄 살인을 예고하는 것인데, 곧 이어 두 번째인 흑색지장을 모신 기도당에서 다쓰지의 아들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이제 살인 사건은 가미스가 가족 간의 금광에 대한 물밑 다툼으로 추정되지만 기담가 겐조를 돕던 가지토리가의 당주 리키하라가 살해됨으로써 사건은 오리무중에 빠진다.

어느 향토마을의 흉산에 얽힌 민담의 이면에 인간의 추악한 사욕이 잠자고 있다는 이야기는 사실 진부하기까지 한 소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스미가 세 형제의 사라짐과 죽음의 추정, 여인네의 치정, 재물다툼, 그리고 기괴한 산마의 전설과 얽혀 교묘한 속임수이거나 함정으로 작동하며 정교하고 치밀한 추리의 지적 세계로 일궈내는 작가의 구성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참신하다. 이윽고 가스미가의 성인 모두가 살해되는데 이르고 현지에 차려진 수사팀은 범인을 찾아내는데 한계에 몰린다. 외지인이라고는 기담가 겐조와 수도를 하는 순례자, 단 두 명뿐인 작은 마을의 연쇄살인범이 오리무중이라는 것은 혹시 모를 다쓰이치 일가나 오래전 죽었거나 실종되었다는 다쓰조로 인해 수사팀을 흉산의 수색으로 이끈다.

현지 수사팀을 지휘하는 경부의 신뢰 속에 범인의 실체로 다가가는 겐조의 논리와 추리력은 감탄을 연신 터뜨리게 한다. 범인으로서 완벽한 배경논리가 정립되었는가하면 여지없이 반론, 반대증거로 허물어진다. 반전, 대반전, 그리고 허를 찔리는 역전에 작품의 묘미는 한없이 고조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일생, 삶을 지탱케 하는 가치가 있다.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어 정체성이 손상된다면 엄청난 화를 불러 올지도 모른다. 산마가 어디 있겠는가! 타인을 단지 조롱하는 것만으로도 멸문(滅門)의 끔찍한 재앙에 직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트릭의 정수를 보았다는 느낌이다. 깔끔하고 알찬, 진정 명쾌하고 세련된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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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8, 우연히 데이브 거니 시리즈 1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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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나의 무의식을 지배당한다면? 내 생각과 행동을 나보다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내게 위협을 가해온다면 그에게 항거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란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다. 그로부터 야기되는 두려움과 공포를 무어라 할 수 있을까?
날아든 편지, 1000 이하의 숫자를 떠올려보라는 황당한 요구, 그리곤 무심히, 어떠한 연고도 없는 숫자 ‘658’, 단지 그 순간 마음속에 그린 숫자가 동봉된 다른 봉투에 똑같이 적혀있다면 아연실색할 것이다.

게다가 숫자가 야기하는 전율과 공포를 훌쩍 뛰어넘어 의도적으로 남긴 무수한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답변이 불가능한 살인사건에 봉착하면 그야말로 초월적 존재를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타인의 생각과 심리를 꿰뚫어보는 존재, 담배꽁초, 부츠, 깨진 술병 등 범행도구까지 즐비한 증거가 수사상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을 뿐 아니라 갑자기 사라진 눈 위의 발자국처럼 황당하기까지 하다면 신비와 영적 현상이라 치부해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이 작품은 독자들의 상상력의 한계를 자극하고, 취약한 정신세계를 조롱한다. 지적 도발이다! 그래서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흩뿌려지는 단서들을 알아차리고 그것들을 조합하여 사건의 중심에 다가가려는 시도에 몰입하게 한다. 또한 삶의 아픔과 사랑, 자기 바라보기, 타자에 대한 이해와 조화 등 인생의 고귀한 어떤 것들과 같이 문학적 향취까지 더해지면서 한 단계 진화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스릴러 문학의 정수를 보는 충만한 기쁨까지 느끼게 한다.

사건은 은퇴한 뉴욕경찰의 1급수사관, ‘거니’에게 25년 만에 찾아온 대학동창의 도움의 요청으로 시작된다. 야릇한 편지와 숫자, 그리고 죽음의 복수를 암시하는 8행시, 숫자 658, 19 등 협박자는 동창생‘맬러리’의 생각을 읽고 있다. 그러나 협박자의 서신이나 전화로부터 구체적 실마리를 찾아내지 못하던 중에 동창생은 살해된 채 발견된다. 경찰에 대한 증오와 조롱이 담긴 쪽지가 발견되고 남겨진 증거들에서 어떠한 단서도 발견하지 못한다.
현직 경찰이 아닌 은퇴자인 전직 형사인 거니가 이 사건에 참여할 의무란 없다. 뉴욕 교외의 전원주택에서 은퇴생활을 시작한 그가 자기만의 세계, 직업적 도피처로 달아나려는 것은 아내와 가족에 대한 진실한 사랑으로의 접근을 차단한다. 그럼에도 그는 사건 담당 지방검사의 수사참여 요청에 동의하고 다시금 살인사건에 몰입한다.

여기서 작품은 두 갈래 길을 걷는다. 은퇴형사 거니의 삶에 드리운 고통, 그의 트라우마를 구성하는 고뇌의 원천, 그로부터 야기되는 아내‘메들린’과 아들, 가족과의 소원함으로부터 야기되는 자기 삶의 성찰과 삶의 진실성에 대한 추적이 배경이 되어 흐르며, 한 편은 살인의 단서와 동기, 살인자의 행적을 쫓는다. 침착함, 치밀한 계획과 완벽한 실행, 의식(儀式)적 행위, 천재적 완전성 등 범인은 사건을 완전하게 지배하고 있다. 단지 경찰을 향해 내뱉는 짙은 혐오와 분노가 어렴풋이 가리키는 방향을 추적한다. 동일한 협박과 이에 반응한 사람들의 연쇄적인 죽음, 이 잇단 피살에 은닉된 공통성을 찾아야 하며, 그리고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의 사소한 대화에 깃들지도 모를 단서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 한다.

교활하고 가히 천재적인 연쇄 살인범, 상황을 완전히 지배함으로써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려하는 이 사이코패스의 추적은 수사팀의 회의장면을 통해서 또 하나의 멋진 드라마를 보여 준다. 권위와 지위에 아부하고 부하에겐 한 없이 편협한 무능한 리더인 수사반장, 노련미 넘치는 정치지향의 지방검사, 예리함과 통찰력 넘치는 젊은 형사들, 범죄 심리학자를 통한 사건전개의 예측 등, 조직과 영역에 놓인 인간들의 적나라한 모습들을 관찰하게 하는가 하면 사건의 단서와 복선까지 혼재케 하여 지속적인 긴장감과 흥미를 놓지 못하게 한다.

살인, 복수의 의식을 완성하려는 연쇄살인범과 그의 실체를 밝혀내려는 형사 거니의 교우는 불가피하다. 회피하고 외면하려 하는 어두운 심연에 묻어둔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는 거니의 살인범의 추적은 곧 자기성찰과 삶에서 정작 중요한 것들의 이해로 다가서는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범인과의 극적인 조우는 사건의 종결이라는 의미와 함께 가족에 대한 작고 소박한 소통과 관심과 같은 우리가 잃어버린 귀중한 미덕들에 대한 각성으로 모아진다. 열린 수사, 다층적 추리, 숫자와 밀실의 트릭 등, 다채로운 기법들과 퍼즐처럼 제자리를 찾아가야만 하는 단서들의 조합과 전개까지 더해져, 모처럼 경계를 벗어나는 의식의 창발을 하게하는 작품이다. 아마 훗날 이 작품부터 21세기 새로운 형태의 스릴러문학이 시작되었다고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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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
멜라니 킹 지음, 이민정 옮김 / 사람의무늬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인류의 “근원적인 공포와 집착의 대상”인 삶의 소멸로서의 죽음이란 부조리는 그 알 수 없는 세계, 무지로 인한 호기심으로 기이한 행동과 생각을 만들어 낸다. 또한 삶과 죽음을 가르는 그 경계, 대체 언제 인간은 완전히 죽은 것인가에 대한 정의조차 애매하기 그지없어, 시대의 사회전반을 지배하는 철학적 문화적 사고에 따라, 나아가 발전된 기술의 상황에 따라 달리 정의되고 있으니 인간의 상상력으로 정의할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쨌든 1768년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은“영혼과 육신의 분리”라고 죽음에 대한 거친 정의를 남겼다가, 2007년 판에서는 “모든 생물이 종국에 경험하게 되는 생명이 완전히 중단되는 현상”이라고 조금은 신중한 정의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역시 모호하기 짝이 없긴 마찬가지다. ‘생명이 완전히 중단되는 현상’이란 이 말은 사실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 현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심박과 호흡의 완전 중단? 인공호흡법과 생명유지기술로 인해 이 정의도 “반사행동과 인지, 고통이나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 완전히 결여된 상태”라는 새로운 사망의 척도에 갈아치워졌다. 그럼 이를 통제하는 뇌간의 손상이나 괴멸로 진단되면 죽은 것인가? 여전히 PVS(식물인간)진단을 이끌어 낼만한 임상 실험 방법이 없는 오늘의 의료계나 뇌사판정의 오류를 보더라도 이 역시 죽음에 대한 완전한 판단이 되지 못한다.

하물며 1세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대의학 이전의 세상에서 이 죽음에 대한 진단은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구별의 신뢰성을 저하시킨다. 그래서였던지 죽었다고 판단하여 매장한 사람들이 깨어나는 끔찍한 사례가 빈번했던 모양이다. 단단하게 못질된 관속에서 몸부림쳤던 흔적들, 이후 이를 방지하기 위해 완전한 부패로 죽음을 확인하기 위한 사체대기소가 만들어지고, 절명의 판단을 위한 엽기적인 진단법이 시도되거나, 깨어나면 흔들어댈 종을 연결하는 등 기발한 아이디어의 관들과 묘지들이 제작, 설치되었다니 오늘의 시선으로 보면 우습기조차 하다.

그러나 이 희극 같은 사망의 진단과 매장의 모습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집착이나 죽음의 두려움을 읽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매장된 사체의 도난이나 훼손과 같은 산 자들의 탐욕까지 더해지면 망자와 가족들로서는 곤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죽음이란 이 알 수 없는 공포에 대한 호기심은 역설적이게도 산 자들의 더없이 훌륭한 생존 수단이자 삶의 수호자로 활용되기에 이른다.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필요와 욕망실현의 대상이라는 모순성을 아울러 갖는다. 의대 해부학 재료로 사체가 밀매되고, 조형예술작품으로 둔갑하기도 하며, 부위별로 약재로 판매되는가하면, 영적 효험이나 미신적 상징물로 보존되고 거래되기도 한다. 죽음의 훼손과 경외라는 이율배반적인 이러한 인식과 행동에는 기막힌 공리주의적, 과학적 합리주의 윤리관이 스며있다. 게다가 교활한 인간의 탐욕까지도. 이처럼 인간이‘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실로 얄궂다.

이러한 탐욕에는 권력의 과시와 명예의 보존과 같은 비물질적 욕망은 물론 삶의 연장과 부의 축적과 같은 물질적 갈망까지 삶의 전 영역에 이른다. 죽음조차 산 자의 이기심에 활용되는 것인데, 망자는 죽어서도 자신의 육신을 편히 쉬지 못하는 것이다.
‘대지에서 나온 이 대지로 돌아간다.’는 말은 오늘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 고대사회부터 이미 인간은 이 말이 공허한 말인지 알았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를 비롯한 남아메리카, 중국사회의 시체 방부기술은 죽어서도 부패하지 않고 영원하겠다는 믿음의 미라를 만들어 냈으니 말이다. 스탈린이 자신의 권력유지를 수단으로 레닌의 사체를 방부처리하여 전시함으로써 소비에트 시민의 체제불만의 시선을 돌리려 한 것이나, 마오쩌둥, 김일성의 방부처리 보존은 이러한 대표적 사례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고대의 미라는 파헤쳐져 각종 질병에 효험이 있다는 약재로 둔갑하여 갈리고 빻아져 호사가들의 위장 속으로 들어갔으니 영원을 기대했던 미라들은 죽어서도 그리 편한 여정은 못하고 있으니, 영혼을 연장시켜 죽음을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인간들에 대한 연민이 앞선다. 여기에 자신의 유골이나 사체의 재를 이용하여 다이몬드로 가공하여 보존하거나 회화의 재료로 그림에 남아있도록 하는 행위들이 산업화되어 죽음을 상품화하는 시대에 이르렀으니 가히 죽음에 대한 인간의 의식은 더 이상 고전적인 인식으로는 해석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내용인즉 추모(追慕)라는 그럴듯한 진지함이 있어 보이지만, 영원성에 대한 집착이외에 무엇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제 죽음이란 부조리에 대한 공포는 오만한 과학을 등에 업고 “불가피한 것만은 아니다”라고 외쳐대기까지 한다. “얼마간의 자금과 적절한 장치, 질소 용액만 있으면 피해갈 수 있다?” 영생주의자들은 냉동보존을 하고 냉동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유리상태의 보존기술을 말하는가하면, 뇌만 보존시키는 신경보존술과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을 초월하는‘포스트 휴먼’이란 기계와 인간이 복합되고 조합된 인간을 통한 영생을 기도하기까지 한다. 결국 죽음에 대한 삶의 단절을 회피하기 위한 탐욕스런 집착이 인간을 질기게 잡아끌고 있다는 말이 된다. 존재자로 체감하는 현재성을 상실한 인간이 과연 인간일까? 현재성의 미학을 상실한 괴물이 아닐까? “삶의 연장이란 곧 고통의 연장이자 죽음의 배가를 의미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삶이란 죽음으로 인해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닐까?

존엄사(안락사)와 사망진단에 대한 의학적, 윤리적 재성찰을 통한 생명에 대한 존엄성의 강조, 인류사회의 매장문화와 장례의식이 지니는 영적의미는 물론 은폐된 속세 욕망들의 실체들, 미라 제작술과 방부처리 및 표본화 기술에 내재한 풍부한 역사적, 종교적 의미와 사례들, 이승과 저승의 경계로서의 연옥을 말하기 시작한 기독교의 사후세계를 이용한 사기술책, 신기술의 발전에 따른 죽음의 재발견 등 그야말로 다종다양한 죽음에 깃든 인간의 역사를 이 책은 경쾌한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매양 일상에서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 수는 없다. 그렇다고 죽음을 잊어서도 안 된다. 죽음은 우리의 삶을 겸허하고 소중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죽음의 역사를 훑어보는 여정으로부터 조금은 넓고 포용력 있는 시선을 갖게 해주는 저술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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