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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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발칙한 인간 정신, 그리고 사회심리에 대한 해체이다. 어떤 지배 질서에 반목하는 존재들의 광신적인 몰입이 없다면 진보도 발전도 없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주류의 무능과 무력함이 노정될 때 자기모멸과 자기 책임회피를 도모하는 좌절한 인간들의 결집이 대중운동의 본성이며, 바로 이러한 운동에 참여하는 맹신적 믿음에 포획되는 인간의 심리를 역사적 통찰을 통해 분석해 내고 있다. 또한 교활한 언어로 말한다면 민중봉기를 위한 심리교본이자 대중운동 지도자의 지침서라고 해도 될 듯하다.

인간의 역사 이래 이러한 대중운동의 유형은 종교적 맹신, 민족주의적 맹신, 체제와 이념에 대한 맹신이라는 종교화된 광신적 현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무릇 인류의 역사는 기존의 질서를 전복함으로써 새로이 열리는 과정의 반복이다. 이러한 전복, 혁명은 대중이 질서정연하고 평화로우며 쾌적한 세상에서 실현 된 적은 없다. 현실의 삶에 환멸을 느끼고 무력감에 젖어들며, “창조적 물줄기가 메말라버려” 좌절하게 되는 시대를 토양으로 한다. 설혹 이와 같은 환경이 무르익어 민심이 이반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운동할 적정의 대지를 조성하고, 대중을 설득하여 운동의 대열에 참여케 하는 종교화된 열정을 주입하고 유지하며 혁명을 도모 할 수도 있다. 실제 역사는 그런 모습들을 보여준다.

맹신자들은 대체누구인가?

그렇다면 운동에 참여할 대상인 대중이란 누가 적절한가? 지배 질서에 냉소적이고 저항하는 사람들은 누구란 말인가? ‘에릭 호퍼’는 그들을 ‘좌절한’ 사람들이라고 답한다. 현재의 삶에 충만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세계를 좋은 곳으로 인식하는데 굳이 현실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결국 변화를 선호하는 것은 좌절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좌절의 원인이야 재산이기도 하며, 창조력이기도 할 것이고, 사회의 지위 등 계급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해소되지 못한 권태에 만연한 자이기도 할 것이며, 이기심으로 뼈저린 실망에 사로잡힌 자일수도 있고, 죄의식에 휩싸인 인간일 수도 있다.

한편 이 좌절한 사람들은 결코 중산층의 대중에서 출현하지 않는다. 역사란 놀이는 항상 최상과 최하위층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평균적인 인간들인 중산층은 타성적이어서 현재의 삶을 파괴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최하층의 사람들이 두드러진 영향을 발휘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현재 상태를 털끝만치도 존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며, “언제든 현재의 인생을 내버리고 파괴할 준비가 되어있는”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최상층의 혁명도 이와 다르지 않다. 17세기 영국의 지주와 귀족이 사회질서를 전복한 부자들이 일으킨‘종획운동’이나, 19세기 초‘산업혁명’은 현재를 파괴함으로써 혁명을 완수한 불만세력의 대표적 봉기이다.

그렇다면 이들 좌절한 사람들의 열정적 헌신에 의해 결집된 대중운동을 성숙, 유지시키고, 성공적 혁명 완수를 위한 요소와 조건들은 무엇일까? 이 좌절한 사람들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에 해답이 있다.
이들에게 대중운동이란 자기발전 욕구를 충족시켜서가 아니라 자기부정이란 열망을 충족시켜준다는 데 있는 것이다. 즉 대중운동의 숭고한 대의에 대한 신념이 잃어버린 자신의 믿음을 대신한, 개인적 희망을 대체하는 것이기에 그들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몰입한다.

맹신자들을 계속 맹신자로 이끄는 법

숭고한 대의, 국가나 세계를 변혁하려는 운동에 나섰다면 이들 맹신자들을 변함없이 대중운동에 붙들어 매야한다. 그들에게 부푼 희망의 불을 지피고 일으키는 방법을, 그리고 유지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두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 좌절한 맹신자들 중 가장 강경한 맹신자들, 뛰어난 광신자들을 추려내야 할 것이다. 절망적 열정에 사로잡혀 숭고한 대의에 헌신할 자들 말이다. 아마 글쓰기, 그림, 작곡 따위의 창조활동을 향한 열망에서 가차 없이 실패한 자들만큼 영구적 부적응자도 없을 것이다. 이들 지식인층의 무리는 대중운동의 끈끈한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잊음으로써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수레바퀴에서 헤어 나오는 것이니, 그 어떤 좌절자보다 열정적인 광신자들이 된다.

이처럼 “지지자들을 끌어들이고 지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좌절한 사람들의 심리 고유의 경향과 대응 방식을 고취하도록 도야하는 필수불가결의 기술”이다. 효과적 대중운동을 위해서 죄의식을 키우는 것 만한 것도 없다. 개인의 개성과 독립성을 벗겨내어 도덕적으로 저열하다고 가르치는 것, 구원은 자신을 잊고 전체와 하나 되는 행위이다. 유대 기독교가 그러했고, 프랑스혁명, 독일민족주의, 모든 대중운동이 그러했다. ‘나’라는 개인이 깨어나서는 안 된다. 또한 현재를 비열하고 비참한 것으로 끊임없이 묘사해야 한다. 울적하고 고단하며 억압적이고 생기 없는 개인의 삶이라는 원형을 빚어내어 현재는 단지 영광된 미래의 연결고리에 불과하다고 금욕적 설교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를 증오하고 증명 할 수 없는 미래의 환상에 맹목적인 믿음을 헌신케 해야 한다. 강력하고 영광스러우며 파괴되지 않는 무언가의 일부가 된다는 환상,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시온주의는 바로 이러한 불멸의 민족이란 웅원한 이상의 일원이 된 존재임을 강력하게 주입한 대표적 예이다. 이것은 그 대의가 신성하거나 정의로워서가 아니다. 자신들이 열정적으로 매달릴 무언가가 성립했기 때문인 것이다. 믿음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불신이 필요할 뿐이다. 의식과 이성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절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난해하면서 모호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증명 할 수 없는 이상이어야 안전하다. 광적인 신념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은 오직 전체의 일부로서 불멸의 존재라고 느끼게 하여야 한다. 맹신자는 영원히 불안한 존재이다. 개인이 자신의 지성을 믿고 의지하는 순간 운동은 실패한다.

대중 운동의 시작과 성공

평화 시(時)의 민주주의 국가, 다소 자유로운 개인으로 구성된 체제에서 대중운동이 시작될 가능성은 없다. 더구나 자기희생을 덕목으로 하는 맹신의 환상이 확산되기에는 더없이 열악한 환경이다. 더구나 권력층과 지식층의 유대가 돈독하고, 교육 받은 자가 전부 관료이거나 이들에게 높은 지위가 인정되는 곳에서는 저항운동이 들어서기 어렵다. 조선의 양반사대부 사회가 그렇고 유럽의 중세가 그러했다. 교육 받은 자가 모두 성직자였던 시대, 양반귀족이었던 시대는 저항세력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교육이 이들의 전유물에서 풀려나는 순간 종교개혁이,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민족주의 광풍을 타고 일어난 프랑스 혁명, 독일 지식인들에 의한 민족주의 창시가 그러했다.

지식인이 끊임없이 지배질서를 소용돌이치게 하여야한다. 무능하고 무력하며 부정하고 부패하여 환멸만을 낳는 기성 권력에 대해 증오를 발산하여야 한다. 그러나 창조적 지식인은 현재에 애착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결코 현재의 파괴에 나서지 않는다. 창조의 장벽에 막혀 좌절한 지식인이어야 한다. 그들은 막힌 자신들의 열정을 강렬한 증오로 뿜어 낼 것이다. 그리곤 좌절한 사람들 - 빈민, 부적응자, 부랑자, 소수자, 청소년, 야심가들, 따분한 자, 실업자, 신빈곤층, 불평분자 - 의 운동 참여를 통해 그들의 부담스런 자유를 구제해 주어야 한다. 운동의 대열이란 “소속되고자 하는 열망, 다수의 결집에 대한 열망, 강력한 전체라는 위엄 넘치는 장관 속에서 저주 받은 개인으로서의 존재를 해체하고자 하는 열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대중운동

에릭 호퍼가 이 책을 썼던 1960년대와 오늘의 시대적 환경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대중의 심리적 근인(根因)은 바뀌기는커녕 오히려 더더욱 답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이익만 좇는 무차별적 금융자본을 앞세운 시장자유주의는 양극화의 고착화로 점차 엘리트 관료사회화 하며, 지배계급을 고착화시키고 있다. 양질의 교육받은 자가 모두 엘리트관료가 되려는 사회, 유럽의 중세와 조선 사대부사회와 다를 것이 없다. 진정한 정신의 변화가 멈추고 정체되어 썩어 문드러지는 암흑의 시대, 과거로의 복귀라는 수구의 시대로 회귀하려 한다.

이는 진정한 민중봉기의 씨앗을 밟아 인류사회의 진보와 발전, 문명의 지속적 부흥을 봉쇄할 수 있다. 더구나 역사를 보는 인식조차 사대주의와 수구적 태도로 인하여 민족학적 지능이 위축되어 시민정신이 제대로 발육하지 못하고 있다. 이젠 미국을 유럽을 모방하는 자세로는 한없는 추락의 길만을 마주할지도 모른다. 새롭게 미치기 위해 우린 이러한 지배체제와 불화하여야 한다. 눌려있는 대중의 잠재적 역량은 깨어나야 하며 고인 물을 퍼내고 그래서 새로운 수로를 만들어 내야 한다. 맹신, 광신주의는 영혼의 질병이기도 하지만 이 질병을 통해서 우리 인간은 부활한다. 대중운동의 발동은 사회부흥이라는 과업을 성취하는 대중의 가장 유용한 도구이다. 무함마드, 루터, 칼뱅, 히틀러, 레닌, 스탈린 같은 광신자들도 있지만 이들 못지않게 대중운동의 생리를 터득해 인류의 혁명적 진보를 완수한 링컨, 간디, 처칠 같은 이들도 있다. 대중운동의 선동책이란 비루함이나 교활함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자칫 부패하기 쉬운 인간 사회를 교정하는 안내서로서, 사회 지도자의 대중 리더십을 위한 지침서로서 읽는다면 호퍼는 진심의 환한 미소 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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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인의 집 매그레 시리즈 14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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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농’의 ‘매그레’시리즈 작품과의 첫 대면이다. 첫 인상치곤 낯설지 않다. 격렬한 긴장이나 수위 높은 자극으로 과도한 감정의 소모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편안한 자세로 느긋하게 읽어야 할 작품이란 의무감을 들게 할 정도이다. 그래서 소파에 길게 누워 읽을 요량이었는데, 어느 새 입맛을 다셔야 하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는 아쉬움으로 게으름의 만끽을 앗아가 버린다. 설명이 필요 없는 감정, 정말 재미있다는 것이다.

어디 출장이나 여행 갈 일이 생기면 짐 속에 필히 시리즈 중 한 권을 끼워 넣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상의 강박을 해소하는 가벼운 긴장, 그리고 여유로움, 권태에서 살짝 비켜난 즐거움이 있다.  특히 이 작품에서만 그러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사건의 해결을 위해 달려가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매그레 반장의 관찰자적 행동이 주는 중립성의 어떤 위안이랄까? 심드렁한 무심함 속의 예리함, 요즘에는 발견하기 힘든 외유내강의 인물이 발산하는 매력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꽤나 빨리 매그레란 인물에 대해 친근함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하다.

라인강이 흐르는 벨기에와 프랑스의 국경지대 작은 마을‘지베’, 호우로 불어난 강물로 인해 운송선들은 발이 묶여있고, 플랑드르인 가족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가 외로이 불을 밝히고 있는 전경이 눈에 그려지는 듯하다. 친지의 서신을 지닌 여인의 부탁으로 살인의 누명을 쓴 그녀의 가족을 위한 일종의 구명 수사를 위한 사적(私的) 방문이다. 법학 공부를 하는 남동생의 정부인 여인의 실종, 프랑스인이 주류인 마을의 여론은 돈 많은 이 플랑드르인 가족을 용의자로 몰아간다.

        

보잘것없는 공장 노동자 집안의 단정치 못한 여자가 아이까지 낳아들고 변호사가 되려는 플랑드르인 가족의 청년과의 결혼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이 불온한 여자의 행위는 플랑드르인 가족의 평온과 이상을 위협하는 것이다. 바로 그 여자가 실종되었으니 곱지 않은 시선을 이들에게 보내는 것은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마치 사건의 수사, 범인을 찾아내려는 의지를 잃어버린 듯이 실종된 여자의 가족과 플랑드르인 가족의 면면, 즉 개개 인간들의 삶의 이면을 좇는다. 아마 이처럼 사람들 저마다의 내면을 형성하는 기질들, 그것들이 품고 있는 사연들에 우리의 관심은 훨씬 증폭되기 마련이고 그 신호들에 본능적으로 빠져들도록 유인하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사의 진행 상황은 매그레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건담당 형사로부터 듣게 되지만 그가 진실에 접근하는 것은 애당초 어렵다는 것을 독자는 알게 된다. 왠지 진실은 매그레가 관심을 갖는 인간들의 삶의 모습이 내지르는 그 속성에 있는 것 같다는 믿음이 드니 말이다. 마을의 적대감에 고립된 플랑드르인 가족의 자기 보호를 위한 공고한 가족의 연대라는 중요한 덕목, 그들이 지켜내야 할 가치, 그 기대에 대한 정념은 구원수사 의뢰자인 ‘안나’라는 여성을 통해 어떤 과잉의 으스스함을 더한다.  

흐트러짐 없는 표정, 무표정한 온화함을 걸친 회색빛 여인, 그녀에 대한 매그레의 관심, 그것은 독자의 관심을 집중시키는데 이 특별한 여성의 성격은 이 소설의 분명한 매력 요소이다.
한편 반복되어 등장하는 피아노의 선율을 타고 흐르는 ‘입센’의 시(詩) 「솔베이지의 노래」는 이야기의 끊임없는 매개체가 되고 있는데, 사랑의 기다림을 약속하는 그 애절한 내용에 마비되는 것은 동서고금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겨울이 지나가도 / 사랑스러운 봄날이 / 흘러가 버려도... / 가을 낙엽과 / 여름의 열매가 / 모두 스러질지라도..., / 당신은 돌아올 거예요, / 오, 나의 멋진 연인이여, / 영원히 내 곁에 머물기 위해....”

여기에 비 내리는 부두와 물결에 흔들리는 무력한 배들의 한가로운 무리, 진흙길을 지나는 드문 발길들, 뿌연 빗줄기 너머 불 밝힌 외딴 주점, 경계에 선 사람들이 뿜어내는 알 수 없는 우수(憂愁)까지 더해 범죄 추리를 초월한 심연의 무엇을 자극하는 안온함이 작품 전체를 감싸 흐르는 것 같은 느낌에 빠져든다. 그것의 정체가 인간에 대한 연민이든, 고상하게 휴머니즘이라 말하든 따뜻한 밥이 차려진 식탁에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하고 있는 그런 좋은 기분이다. 아무래도 시리즈 나머지 작품들도 주문해야 할 것 같다. 물 흐르듯 유연한 인간 개성의 탐사와 함께 절로 다가서는 사건의 진실에 대한 접근은 가히 이야기의 참 맛을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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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최고의 날
카를로스 발마세다 지음, 박채연 옮김 / 북스토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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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발마세다’의 소설은 달콤하고 관능적 음악이 흐르고 열대의 찬란한 색감들로 조화롭게 꾸며진 최고의 요리들, 자신들의 지성과 탄력 있는 육체를 과시하려는 선남선녀들이 즐비한 화려한 잔치를 연상시킨다. 감각의 풍요로운 향연, 드라마틱한 전개와 즐비한 지성의 요리들, 이 모두가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육체와 정신의 구분이 없어지는 지고의 쾌락에 흠뻑 빠지게 된다. 요리와 섹스, 그리고 잘 갈린 은빛 칼날이 은밀하게 반짝이는 그의 전작(식인종의 요리책)이 발가벗겼던 인간의 욕망이 여기서 또 다시 빛을 발한다. 이번에는 신화와 문학, 오페라, 회화를 아우르는 예술 작품 속에 표현된‘열정적 사랑’에 깃든 본질의 탐색이다.

작품의 무대 역시 아르헨티나 남부 해안도시‘마르텔 플라타’이다. 왠지 이 도시에 있으면 절로 사랑에 빠지고 오감이 깨어나 생명력이 충만해질 것만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첫 페이지부터 감각들을 바짝 긴장시킨다. 절정과 감미로운 노곤함에 눈꺼풀을 스르르 감는 여인, 그녀의 기억을 여기에 멈추게 했던 사랑의 고고학적 발굴이 시작된다.

문학을 전공하는 서른 살의 대학 강사, ‘파울리나’는 박사 학위를 위해 <사랑과 연인들의 책>이라는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이것이 걸작인 게 소설 속에 총 9개장으로 이 논문이 에세이처럼 소개되고 있는 것인데, 주제의식과 사랑의 본질에 대한 제법 경이로운 이론까지 완비하고, 스토리와 상호 교섭하여 암시와 복선을 주고받으며 소설의 품격을 진부한 로맨스와 복수극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또 하나의 신화적 작품으로 올려놓는다는 것이다.

사랑과 배신, 증오와 복수의 실체, 열정과 그 소멸, 이에 반응하는 연인들의 참담함, 그리고 그 열정의 본질에 대해서 그리스 비극 『아이네이스』를 시작으로 『오셀로』,『트리스탄과 이졸데』,『페르 귄트』, 『피아노 치는 여자』등 오페라와 소설문학 속 비련의 연인들의 사랑의 자취를 거닐며, ‘옥타비오 파스’의 사랑의 비평과 ‘피카소’의 자화상이랄 수도 있는 인간의 육신을 한 수소 ‘ 미노타우로마키(La Minotauromachie)’가 뿜어내는 남성의 굶주린 욕망의 파멸성에 대한 해석까지 더해, 남자와 여자의 사랑의 색깔을 조명한다.

새로 부임한 동료 교수‘호나스’라는 남자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것인데, “사랑은 육화된 열정”인 것 같다는 파울리나의 열정적 사랑에 대한 고백처럼, 쾌락을 줄 수 있는 서로의 몸을 느낄 수 없는 사랑이란 강박관념 같은 고통, 좌절과 공허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사랑에 대한 체험적 논의들이 예술 작품들 여기저기를 누비며 사랑과 육체의 불가분성은 물론 연인의 육체에 대한 남성의 욕망의 속성, 그리고 사랑이 배신과 분노로 변질되고 증오와 죽음으로 연결되는 여정에 도사린 육체의 한계성을 부정으로서가 아니라 본질로서 파헤쳐 댄다.

여자의 사랑, 더구나 육화된 열정, 즉 육체를 잃어버린 사랑이란 이미 사랑이 아니라는 여자를 배신하는 것은 아마 죽음을 예약하는 무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스 비극작가‘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는 바로 배신한 사랑에 대처하는 여성의 화신이다. ‘입센’의 소설 『페르귄트』가 파울리나가 선택하게 될 사랑을 알려준다면, 『메데이아』는 사랑의 배신이 가져올 귀결이다. 열정은 그 열정의 사그라짐이 두려워 어느 순간부터 사랑을 확인하기 시작하려 한다. 그것은 공포다, 믿음을 흔들어대는 의심이 피어나는 순간 우린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곤 다가오는 상실의 고통, 사랑은 그런 것이다. 사랑이란 육화된 열정처럼 간절한 쾌락임을 부정할 이유는 없지만 미노타우로스의 야수적 성애가 있다면 메데이아의 복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두어야 할 것만 같다. 가히 매혹적인 사랑의 고고학적 탐사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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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시장 - 부자나라들과 투자집단의 은밀한 세계 장악을 폭로한 충격 보고서
에릭 J. 와이너 지음, 김정수 옮김, 곽수종 감수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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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경제패권이 약화 되는 이유를 세계 자본시장의 동향을 통해 분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세계 경제 세력의 변화를 야기하는 거대자본의 은밀한 실체를‘그림자 시장(shadow market)'이라 지칭하면서 이들 그림자 시장의 주체인 나라들의 투자 행동에 경계와 적대적 시선을 놓지 않는다. 이것은 군사적 전면전 같은 수많은 인명을 담보로 하는 유혈 전쟁이 비용때문에서도 선택 수단이 되지 못함에 따라 막강한 외교적, 정치적 힘의 지배력을 행사하게 된 거대 금융자본의 국가주의라는 불안한 행보 때문이랄 수 있다.

사실 20세기 세계 경제와 정치적 리더십을 행사하던 미국으로선 새로운 자본 부국의 등장이 위협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라면 위기의식은 더욱 고조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제2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최대 채권국인 중국, 페르시아만에 모여 있는 제2의 채권국인 중동국가들의 금융자본이 한없이 침울한 그림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국에게만 이들 자본이 위협인 것은 아니다. 저임금으로 생산한 제품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중국이나 공짜 재화인 석유로 막대한 자본을 쌓은 중동국가들의 금융자본이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자신들의 이익 추구를 위해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으니 말이다.

금융자본주의를 세계에 전도한 장본인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 제국이다. 시장자유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개발도상국, 후진국들의 자원과 산업을 유린하고 다니던 것이 그리 먼 얘기가 아니다. 그것이 이제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신흥 자본 부국들의 손아귀로 옮겨가고 있고 실제 그들의 자본에 종속되어 가고 있는 형국이랄 수 있다.
2조 달러가 넘는 미화와 미 정부 채권을 가지고 있는 중국은 미국이 자신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하면 서슴없이 달러를 투매하여 미국 경제를 혼란에 빠트릴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하고 있다. 영국은 자국의 침체한 산업과 경제를 위해 오일머니로 자본시장을 호령하는 리비아로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며 수 백 명의 인명을 살상한 테러리스트를 석방하고 막대한 투자를 유치한다.

문제는 이 자본이란 것에 도덕성이란 것이 없다고 가르친 것이 바로 서구자본주의라는 아이러니가 있다. 자본에는 연민도 감상주의도 없다. 오직 이익추구, 탐욕이 선이라고 주장해왔다. 물론 20세기 세계 경제의 패권자인 미국은 나름 상식적인 경제 리더십을 행사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의 그림자 시장의 자본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어떠한‘경제 지도국’도, 강력한 국제적 금융기구도 없는 무법천지의 야만적 시장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되었다. 그저 자기네들의 이익만 실현하면 되는 것이지 투자국의 경제야 무관한 것이다. 아무런 조건도 없다. 수익을 실현 할 수 있는 대상이면 된다. 이러한 생리는 저자가 그림자 국가라고 지목한 중국이나, 페르시아만 국가들, 러시아, 베네수엘라 등 산유국만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금융자본 역시 이러한 잔혹한 비도덕적 먹튀전략으로 부정하게 부를 착취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처럼 책은 미국과 유럽의 침몰, 그리고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신흥 부국, 중동의 오일머니로 세계금융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중동국가들로 경제 권력이 이동하는 양상에 위기 신호를 보내고 있다. 서구에서 동양으로의 권력 재편에 대한 우려와 자국으로서 미국의 경제적 대응 전략을 위한 지피지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저자의 논리에 모두 공감할 이유는 없지만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인 우리의 입장에서 귀담아 들어야 할 중차대한 교훈들과 사례들, 현실 경제의 냉정한 이해들이 있다.

그 중 첫째는 자본 부국으로 부상한 중국에 대한 인식이다. 중국이 엄청난 외화자본을 축적한 경제 대국으로서 그들의 금융 자본이 매혹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본의 행동은 신뢰 할 수 있는 도덕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또한 자국 내 외국 투자자본이나 기업에 대해 일관된 안정적 기반을 제공하지 않는다. 일례로 공산당 독재정부가 자신들의 국부 전체를 움직이고 있어 이들의 금융자본은 곧 정치라는 점이다. 순수한 비즈니스가 언제 정치적 의도에 의해 희생될지 알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게다가 이들은 국가안보라는 명분으로 자국에 투자한 기업들을 수없이 구금하고, 압박하는 등 강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전략을 빈번히 행사한다. 게다가 거침없는 산업 스파이, 컴퓨터 해킹 등 상식을 뒤엎는 횡포를 자행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중국이 세계의 최대 자본부국이 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일지라도 그들이 경제 리더십을 갖는 것은 역시 경계하여야 일이라 하겠다. 세계의 그 어떤 자본보다 중국의 자본은 정치적 담보가 될 수 있음이다.

둘째는 북해의 최대 산유국인 노르웨이의 국부펀드 운영 정책에 대한 제도적 성격이다. 저자는 이들의 오일펀드가 도덕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폄하하고 있지만, 막대한 석유수입의 직접 유입을 제어하여 영국과 네덜란드가 석유 수익으로 인해 자초한 경제침체의 전철을 차단하고 현금 흐름을 규제함으로써 산업 관리와 자원보존 등 공공성을 강화했을 뿐 아니라 기금의 실적보고나 세심한 감시제도의 확립 등으로 건전성과 동시에 무시할 수 없는 거대 금융 자본 보유국이 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금융 자본이 인류의 인권과 환경보호, 평화를 위한 권력으로 행사될 수 있음을 실증하고 있다는 것은 자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한다.

끝으로 침몰하는 유럽의 거함들, 프랑스와 독일의 국부펀드 전략과 국가투자의 규제 정책에 대한 사례를 들 수 있는데, 해외 투자를 통해 부를 쌓는 국부펀드의 개념을 역전시켜 국내 기업발전 촉진 투자라는 보호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이나, 유럽연합 이외 국가가 자국의 기업의 25%이상 지분 매입을 하는 투자의 경우 국가가 심사하고 거부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하는 것처럼 그림자 자본의 무차별적 침투를 제한하기 위한 정책들은 외면 할 수 없는 관심을 촉발한다. 시장자유주의를 부르짖던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이 너나할 것 없이 자국경제의 안정을 최우선으로 중시하며 오히려 자유시장 파괴의 선봉에 서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정책의 향방을 주시하는 것도 우리에겐 특별한 교훈이 될 것이다.

어쨌든 세계의 자본은 서(西)에서 동(東)으로 옮겨오고 있으며, 지난날 세계경제의 지배 국가들인 G7은 한국, 브라질, 터키, 인도네시아, 중국 등 신흥부국이 포함된 G20에 경제 권력을 넘겨야 했고, 2040년에는 E7(중국, 인도, 터키, 브라질, 인도네시아. 멕시코, 러시아)이 G7의 GDP를 20%이상 초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각국은 거대 국부펀드라는 금융자본을 조성하여 세계 금융전쟁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 다양한 투자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자본이 외교이고 정치력인 세계이다. 더구나 어떤 나라가 자신이 거래하는 기업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림자 시장이 지배하는 영역이 점점 확장되고 있다. 상호 확증이 파괴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음침한 자본이란 깡패가 언제 우리 경제의 뒷덜미를 잡아챌지 모른다. 각국의 경제 위상의 변화는 물론 자본의 흐름과 자본의 행동전략, 나아가 이들 자본의 주체인 그림자 국가들에 대한 정책들을 접하는 귀중한 기회를 제공하는 이 책은 우리의 경제적 현실에 대해 신중한 검토를 요구케 한다. 그 어느 때보다 새로운 경제 리더십, 새로운 금융 자본의 패러다임을 위한 창의적 연구가 필요 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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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1-10-20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IMF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경제 주권을 거의 상실했다고 해도 무방하니까요.. 자본 깡패의 역습에 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하죠.. 어렵습니다.

필리아 2011-10-20 19:45   좋아요 0 | URL
노르웨이의 오일펀드라 불리는 국부펀드나, 프랑스 정부가 운용하는 특별기금은 국부펀드의 유용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정부 역시 이러한 국부펀드를 가동해야 할 겁니다. 아부다비나 두바이의 국부펀드는 실로 세계경제는 물론 국제사회에서 자국의 정치적 실리를 얻는데 결정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거든요.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신자유주의, 시장자유주의노선은 수정되어야 할겁니다. 그런의미에서 프랑스 사르코지 정부의 보호주의 경제정책은 우리에게 시사하는바가 크죠. 시장자유주의로부터 실익을 진정 얻기를 원한다면 속까지 시장자유주의자여서는 안된다는거겠죠....
 
일본의 사소설 살림지식총서 232
안영희 지음 / 살림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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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자신의 사생활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고백하는’ 양식의 소설인 사소설(私小說)은 내겐 기이하고 혐오스런 느낌을 주었다고 해야겠다. 자기의 실제경험을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소위 리얼리티를 진정한 문학이라고 하는 소신인데, 이게 거북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일본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2011년 수상작이 사소설인 『고역열차』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은 1920년대의 서구 자연주의 문학이 왜곡되어 이해된 일본문학의 특수한 형태가 왜 21세기 일본의 현대문학 시장에서 다시금 부상하게 되었는가하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부랴부랴 사소설의 탄생 배경과 사소설의 요소와 특성, 일본인의 의식과의 연관성 등에 대한 궁금증의 해결로 나가게 했다. 소설의 화자는 곧 작가인 소설, 경험 사실을 소설적 형태로 서술한 것, 그렇다보니 작가의 경험을 한 치도 넘어서지 못하기에 갈등구조나 해결방식, 절정과 대단원에 이르는 소설의 양식을 담아내는데 한계가 있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로 인해 삶의 균형을 상실하는 수많은 사건들을 허구가 아닌 현실에서 체험하여야 하다보니 사소설 작가들의 인생이란 밑바닥 삶과 소외되고 저열한 생활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처럼 개인의 지루하기 그지없는 사생활을 들려주는 얘기가 독자에게 대체 어떤 의미를 주기에 문학으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일까? 사실 한국의 현대문학에서는 이러한 유형의 작품은 발붙이기 어려운 장르라 할 수 있다. 타인의 개인사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으며, 고작 험난하고 비참하며 비루한 일상을 읽어야 할 동기유발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인들과 그들의 사회는 온통 빠져들고 칭송한다. 이것은 일본인 고유의 정서와 인식과 사소설이 지니는 속성과의 강한 유대관계를 의미한다. 근대 서구 자연주의문학이 일본에 유입되면서 사소설이라는 변태적 리얼리즘 문학으로 정착된 이유이기도 할 것이며, 일견 퇴행적인 문학양식이 여전히 그 생명이 단절되지 않고 오히려 지지받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사소설의 탄생

사소설이란 장르의 개막은 일본의 자연주의 시작과 궤적을 같이하는 모양이다. 사실의 충실한 재현과 노골적인 묘사를 원칙으로 하는 자연주의가 천황의 강력한 지배하에 놓인 1900년대의 일본사회에서 “구시대의 비판이 사회와의 대결”이라는 방식으로 나가지 못하고, “신변으로 시야를 좁힌 관조의 리얼리즘”으로 안착된 것은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다. 결국 일본의 자연주의는 개인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표출, 즉 사생활을 중시하는 고백문학의 탄생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적나라한 자기고백, 소설의 묘사는 어떠한 것도 진실이어야만 한다는 신념은 당대 일본문학계의 주류가 되기에 이른 모양인데, 이의 대표적 작품이자 사소설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1907년에 발표된‘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의 『이불(蒲團)』이다. 도키오라는 중년 작가가 자신의 집에 기숙하는 여 제자를 향한 비밀스런 애욕을 그린 작품으로 결코 충족할 수 없는 남자의 욕망이 그야말로 노골적으로 서술된 이야기다. 이것은 작가 자신의 실제 현실의 그대로의 재현으로서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리얼리즘 소설이 아니라 단지 사생활을 소재로 작가 자신의 내면을 그린 이야기다.

여기서 일본 사소설의 고유한 특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철저하게 사회와 격리된 사적 생활의 기술에 머문다는 점이다. 다야마 가타이의 변형된 자연주의에 매료되어 사소설의 양식을 확정시킨 작가 중 한명인 ‘이와노 호메이’의 『오부작』은 사회성을 배제한 채 온전히 자전으로서 자신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드려내고 있다. 그가 이렇게 자신의 사생활을 모델로 소설을 쓴 이유는 “생활과 예술 그리고 사상이 합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생활이 그대로 예술이 되기를 원했고 자신의 사상과 문학을 일상생활에서 그대로 구현하려 했다고 하니, 망상도 이쯤 되면 할 말을 잃어버리게 한다.

사소설 작가와 일본인의 의식구조

1.

이처럼 자기 사생활을 소설이란 구조에 담아내려다보니 감동을 주어야 하는 자기 폭로에 한계를 느끼는 것은 불가피한 귀결이다. 소재의 고갈이 극명하게 다가오는 것인데, 그렇다보니 밑바닥 삶과 자극적 사건을 몸소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따라서 사소설 작가들 대다수는 어린 시절부터 비참한 환경에서 성장하고 철저하게 고립된 생활을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설혹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소설을 쓰는 작가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상적 균형이 수시로 파괴되는 것이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 현실의 무참한 폭로라는 비애를 감수하면서 사소설을 쓰는 작가이기 위해서는 이 폭로로 인해 자신이 더 이상 침몰하지 않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 올해 아쿠타가와상 수상자인 ‘니시무라 겐타’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중졸의 학력에 날품팔이의 무력한 노동자이며, 성범죄자의 아들이다. “그들은 출발시점부터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는‘생활 실격자’”였으며, 픽션과 같은 외출복은 필요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 빈번하게 번역판이 출간되는 사소설 『인간 실격』의 작가‘다자이 오사무’는 유산계급의 자식이었으니, 이 자는 거꾸로 사소설의 소재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파멸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의 소설처럼 반복되는 자살과 사창가 여인과의 도피 등, 자기 예술의 승화를 위해 극단의 생활을 추구했으며, 궁극에는 이 기이한 예술의 모순을 마감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여 해결하는 길 이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하면서 그들은 왜 써야 했을까? 소외되고 고립된 그들로서는 누구 내 말 좀 들어줘요.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고, 뭔가를 쓰는 것은 피난처이자 자기 위안이었을 것이다. 특히 이 쓴다는 것은 타인과 직접 대면하고 말하기 어려워하는 일본인 고유의 습성 탓에 상대적으로 쉽게 느낀다는 것이며, 자기 객관화 능력이 떨어지는 일종의 어리광, 나르시시즘이라는 일본인 전형의 인격구조 탓이라는 분석도 있다. 또한 고백행위라는 작가의 자기희생 행위를 칭찬하는 일본인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인식구조도 한 몫 한다. 그러나 글을 쓰기 위해 불행한 처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단조로운 일상으로 인한 소재고갈을 뛰어 넘기 위해 끊임없이 불행한 생활이라는 자기 연출에 내몰리게 한다. 자신의 사적 생활 영역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소설의 한계는 문학이라 부르는 것을 주저하게 한다.

2.

어쨌거나 이 자폐증적 요소를 지닌 사소설은 일본의 문화코드와 분명 연관되어 있다. 일본의 대중 영상물을 보면 공통된 특징을 발견하게 되는데, 유독‘엿보기’를 즐긴다는 것이다. 일본처럼 TV, 신문, 잡지에서 루머나 유명인의 사생활을 화제로 많이 다루는 나라가 없다고 한다. 자신인 ‘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지만, 타인인 내가 그것을 살짝 엿봄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교사하는 심정이 잠재해 있으며, 사소설은 바로 이러한 공공연한 엿보기를 충족시켜 준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도 이러한 일본 문화의 영향에 노출됨에 따라 무분별한 관음증이 각종 미디어를 휩쓸고 있다. 어쩜 이러한 현상이 일본문학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사소설의 ‘사실성’이라는 소설 속에 그려진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은 일본인에게 사실에 충실한 작가라는 신뢰를 준다는 것인데, 이것은 작가와 동일한 인물인 소설 속 주인공에 친밀감을 갖게 하고 나아가 ‘자기 동일화’로 더욱 빠져들게 한다. 특히 사실을 숭상하고 허구를 배척하는 일본사회의 특수성은 사소설의 자전적이고 현실의 생활기반 중심의 이야기가 본능적으로 수용되는데 거부감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사소설은 사회에서 도피하여 사적 공간에 머묾으로써 정치사회적 무관심에 놓이고 자기 내면에만 골몰하며 자기연민에 빠진 인간을 양산한다. 결국 사소설이 개인사를 얘기함으로써 반사회적 의식을 시사하더라도 예술을 관철하기 위해 자기 현실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치 전도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글쓰기인 이상 자기 파멸적, 멸망의 문학이란 오명을 피하기도 쉽지 않다.

고백문학, 일기문학, 수기문학으로서 작가가 화자인 사소설은 작가의 시선이 주인공과 객관적 거리를 가지지 못함으로써 자기반성이 불가능한 문학이다. 반성이 없으니 변화가 없고 때문에 발전이 없다는 일본 현대문학의 거장‘미시마 유키오’의 지적처럼 “자유로운 인격의 발전” 혹은 “자신이 책임지는 자율적 개인의 인격형성”이라는 가치와 갈등을 일으킨다.
허구를 배제하고 사실을 추구하는 기이한 소설, 객관적 거리감을 상실한 문학인 사소설이 일본문단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배경은 일본인들의 정신구조와 관련하여 이처럼 비상한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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