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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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발칙한 인간 정신, 그리고 사회심리에 대한 해체이다. 어떤 지배 질서에 반목하는 존재들의 광신적인 몰입이 없다면 진보도 발전도 없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주류의 무능과 무력함이 노정될 때 자기모멸과 자기 책임회피를 도모하는 좌절한 인간들의 결집이 대중운동의 본성이며, 바로 이러한 운동에 참여하는 맹신적 믿음에 포획되는 인간의 심리를 역사적 통찰을 통해 분석해 내고 있다. 또한 교활한 언어로 말한다면 민중봉기를 위한 심리교본이자 대중운동 지도자의 지침서라고 해도 될 듯하다.

인간의 역사 이래 이러한 대중운동의 유형은 종교적 맹신, 민족주의적 맹신, 체제와 이념에 대한 맹신이라는 종교화된 광신적 현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무릇 인류의 역사는 기존의 질서를 전복함으로써 새로이 열리는 과정의 반복이다. 이러한 전복, 혁명은 대중이 질서정연하고 평화로우며 쾌적한 세상에서 실현 된 적은 없다. 현실의 삶에 환멸을 느끼고 무력감에 젖어들며, “창조적 물줄기가 메말라버려” 좌절하게 되는 시대를 토양으로 한다. 설혹 이와 같은 환경이 무르익어 민심이 이반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운동할 적정의 대지를 조성하고, 대중을 설득하여 운동의 대열에 참여케 하는 종교화된 열정을 주입하고 유지하며 혁명을 도모 할 수도 있다. 실제 역사는 그런 모습들을 보여준다.

맹신자들은 대체누구인가?

그렇다면 운동에 참여할 대상인 대중이란 누가 적절한가? 지배 질서에 냉소적이고 저항하는 사람들은 누구란 말인가? ‘에릭 호퍼’는 그들을 ‘좌절한’ 사람들이라고 답한다. 현재의 삶에 충만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세계를 좋은 곳으로 인식하는데 굳이 현실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결국 변화를 선호하는 것은 좌절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좌절의 원인이야 재산이기도 하며, 창조력이기도 할 것이고, 사회의 지위 등 계급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해소되지 못한 권태에 만연한 자이기도 할 것이며, 이기심으로 뼈저린 실망에 사로잡힌 자일수도 있고, 죄의식에 휩싸인 인간일 수도 있다.

한편 이 좌절한 사람들은 결코 중산층의 대중에서 출현하지 않는다. 역사란 놀이는 항상 최상과 최하위층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평균적인 인간들인 중산층은 타성적이어서 현재의 삶을 파괴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최하층의 사람들이 두드러진 영향을 발휘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현재 상태를 털끝만치도 존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며, “언제든 현재의 인생을 내버리고 파괴할 준비가 되어있는”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최상층의 혁명도 이와 다르지 않다. 17세기 영국의 지주와 귀족이 사회질서를 전복한 부자들이 일으킨‘종획운동’이나, 19세기 초‘산업혁명’은 현재를 파괴함으로써 혁명을 완수한 불만세력의 대표적 봉기이다.

그렇다면 이들 좌절한 사람들의 열정적 헌신에 의해 결집된 대중운동을 성숙, 유지시키고, 성공적 혁명 완수를 위한 요소와 조건들은 무엇일까? 이 좌절한 사람들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에 해답이 있다.
이들에게 대중운동이란 자기발전 욕구를 충족시켜서가 아니라 자기부정이란 열망을 충족시켜준다는 데 있는 것이다. 즉 대중운동의 숭고한 대의에 대한 신념이 잃어버린 자신의 믿음을 대신한, 개인적 희망을 대체하는 것이기에 그들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몰입한다.

맹신자들을 계속 맹신자로 이끄는 법

숭고한 대의, 국가나 세계를 변혁하려는 운동에 나섰다면 이들 맹신자들을 변함없이 대중운동에 붙들어 매야한다. 그들에게 부푼 희망의 불을 지피고 일으키는 방법을, 그리고 유지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두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 좌절한 맹신자들 중 가장 강경한 맹신자들, 뛰어난 광신자들을 추려내야 할 것이다. 절망적 열정에 사로잡혀 숭고한 대의에 헌신할 자들 말이다. 아마 글쓰기, 그림, 작곡 따위의 창조활동을 향한 열망에서 가차 없이 실패한 자들만큼 영구적 부적응자도 없을 것이다. 이들 지식인층의 무리는 대중운동의 끈끈한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잊음으로써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수레바퀴에서 헤어 나오는 것이니, 그 어떤 좌절자보다 열정적인 광신자들이 된다.

이처럼 “지지자들을 끌어들이고 지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좌절한 사람들의 심리 고유의 경향과 대응 방식을 고취하도록 도야하는 필수불가결의 기술”이다. 효과적 대중운동을 위해서 죄의식을 키우는 것 만한 것도 없다. 개인의 개성과 독립성을 벗겨내어 도덕적으로 저열하다고 가르치는 것, 구원은 자신을 잊고 전체와 하나 되는 행위이다. 유대 기독교가 그러했고, 프랑스혁명, 독일민족주의, 모든 대중운동이 그러했다. ‘나’라는 개인이 깨어나서는 안 된다. 또한 현재를 비열하고 비참한 것으로 끊임없이 묘사해야 한다. 울적하고 고단하며 억압적이고 생기 없는 개인의 삶이라는 원형을 빚어내어 현재는 단지 영광된 미래의 연결고리에 불과하다고 금욕적 설교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를 증오하고 증명 할 수 없는 미래의 환상에 맹목적인 믿음을 헌신케 해야 한다. 강력하고 영광스러우며 파괴되지 않는 무언가의 일부가 된다는 환상,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시온주의는 바로 이러한 불멸의 민족이란 웅원한 이상의 일원이 된 존재임을 강력하게 주입한 대표적 예이다. 이것은 그 대의가 신성하거나 정의로워서가 아니다. 자신들이 열정적으로 매달릴 무언가가 성립했기 때문인 것이다. 믿음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불신이 필요할 뿐이다. 의식과 이성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절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난해하면서 모호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증명 할 수 없는 이상이어야 안전하다. 광적인 신념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은 오직 전체의 일부로서 불멸의 존재라고 느끼게 하여야 한다. 맹신자는 영원히 불안한 존재이다. 개인이 자신의 지성을 믿고 의지하는 순간 운동은 실패한다.

대중 운동의 시작과 성공

평화 시(時)의 민주주의 국가, 다소 자유로운 개인으로 구성된 체제에서 대중운동이 시작될 가능성은 없다. 더구나 자기희생을 덕목으로 하는 맹신의 환상이 확산되기에는 더없이 열악한 환경이다. 더구나 권력층과 지식층의 유대가 돈독하고, 교육 받은 자가 전부 관료이거나 이들에게 높은 지위가 인정되는 곳에서는 저항운동이 들어서기 어렵다. 조선의 양반사대부 사회가 그렇고 유럽의 중세가 그러했다. 교육 받은 자가 모두 성직자였던 시대, 양반귀족이었던 시대는 저항세력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교육이 이들의 전유물에서 풀려나는 순간 종교개혁이,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민족주의 광풍을 타고 일어난 프랑스 혁명, 독일 지식인들에 의한 민족주의 창시가 그러했다.

지식인이 끊임없이 지배질서를 소용돌이치게 하여야한다. 무능하고 무력하며 부정하고 부패하여 환멸만을 낳는 기성 권력에 대해 증오를 발산하여야 한다. 그러나 창조적 지식인은 현재에 애착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결코 현재의 파괴에 나서지 않는다. 창조의 장벽에 막혀 좌절한 지식인이어야 한다. 그들은 막힌 자신들의 열정을 강렬한 증오로 뿜어 낼 것이다. 그리곤 좌절한 사람들 - 빈민, 부적응자, 부랑자, 소수자, 청소년, 야심가들, 따분한 자, 실업자, 신빈곤층, 불평분자 - 의 운동 참여를 통해 그들의 부담스런 자유를 구제해 주어야 한다. 운동의 대열이란 “소속되고자 하는 열망, 다수의 결집에 대한 열망, 강력한 전체라는 위엄 넘치는 장관 속에서 저주 받은 개인으로서의 존재를 해체하고자 하는 열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대중운동

에릭 호퍼가 이 책을 썼던 1960년대와 오늘의 시대적 환경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대중의 심리적 근인(根因)은 바뀌기는커녕 오히려 더더욱 답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이익만 좇는 무차별적 금융자본을 앞세운 시장자유주의는 양극화의 고착화로 점차 엘리트 관료사회화 하며, 지배계급을 고착화시키고 있다. 양질의 교육받은 자가 모두 엘리트관료가 되려는 사회, 유럽의 중세와 조선 사대부사회와 다를 것이 없다. 진정한 정신의 변화가 멈추고 정체되어 썩어 문드러지는 암흑의 시대, 과거로의 복귀라는 수구의 시대로 회귀하려 한다.

이는 진정한 민중봉기의 씨앗을 밟아 인류사회의 진보와 발전, 문명의 지속적 부흥을 봉쇄할 수 있다. 더구나 역사를 보는 인식조차 사대주의와 수구적 태도로 인하여 민족학적 지능이 위축되어 시민정신이 제대로 발육하지 못하고 있다. 이젠 미국을 유럽을 모방하는 자세로는 한없는 추락의 길만을 마주할지도 모른다. 새롭게 미치기 위해 우린 이러한 지배체제와 불화하여야 한다. 눌려있는 대중의 잠재적 역량은 깨어나야 하며 고인 물을 퍼내고 그래서 새로운 수로를 만들어 내야 한다. 맹신, 광신주의는 영혼의 질병이기도 하지만 이 질병을 통해서 우리 인간은 부활한다. 대중운동의 발동은 사회부흥이라는 과업을 성취하는 대중의 가장 유용한 도구이다. 무함마드, 루터, 칼뱅, 히틀러, 레닌, 스탈린 같은 광신자들도 있지만 이들 못지않게 대중운동의 생리를 터득해 인류의 혁명적 진보를 완수한 링컨, 간디, 처칠 같은 이들도 있다. 대중운동의 선동책이란 비루함이나 교활함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자칫 부패하기 쉬운 인간 사회를 교정하는 안내서로서, 사회 지도자의 대중 리더십을 위한 지침서로서 읽는다면 호퍼는 진심의 환한 미소 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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