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랑드르인의 집 매그레 시리즈 14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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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농’의 ‘매그레’시리즈 작품과의 첫 대면이다. 첫 인상치곤 낯설지 않다. 격렬한 긴장이나 수위 높은 자극으로 과도한 감정의 소모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편안한 자세로 느긋하게 읽어야 할 작품이란 의무감을 들게 할 정도이다. 그래서 소파에 길게 누워 읽을 요량이었는데, 어느 새 입맛을 다셔야 하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는 아쉬움으로 게으름의 만끽을 앗아가 버린다. 설명이 필요 없는 감정, 정말 재미있다는 것이다.

어디 출장이나 여행 갈 일이 생기면 짐 속에 필히 시리즈 중 한 권을 끼워 넣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상의 강박을 해소하는 가벼운 긴장, 그리고 여유로움, 권태에서 살짝 비켜난 즐거움이 있다.  특히 이 작품에서만 그러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사건의 해결을 위해 달려가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매그레 반장의 관찰자적 행동이 주는 중립성의 어떤 위안이랄까? 심드렁한 무심함 속의 예리함, 요즘에는 발견하기 힘든 외유내강의 인물이 발산하는 매력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꽤나 빨리 매그레란 인물에 대해 친근함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하다.

라인강이 흐르는 벨기에와 프랑스의 국경지대 작은 마을‘지베’, 호우로 불어난 강물로 인해 운송선들은 발이 묶여있고, 플랑드르인 가족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가 외로이 불을 밝히고 있는 전경이 눈에 그려지는 듯하다. 친지의 서신을 지닌 여인의 부탁으로 살인의 누명을 쓴 그녀의 가족을 위한 일종의 구명 수사를 위한 사적(私的) 방문이다. 법학 공부를 하는 남동생의 정부인 여인의 실종, 프랑스인이 주류인 마을의 여론은 돈 많은 이 플랑드르인 가족을 용의자로 몰아간다.

        

보잘것없는 공장 노동자 집안의 단정치 못한 여자가 아이까지 낳아들고 변호사가 되려는 플랑드르인 가족의 청년과의 결혼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이 불온한 여자의 행위는 플랑드르인 가족의 평온과 이상을 위협하는 것이다. 바로 그 여자가 실종되었으니 곱지 않은 시선을 이들에게 보내는 것은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마치 사건의 수사, 범인을 찾아내려는 의지를 잃어버린 듯이 실종된 여자의 가족과 플랑드르인 가족의 면면, 즉 개개 인간들의 삶의 이면을 좇는다. 아마 이처럼 사람들 저마다의 내면을 형성하는 기질들, 그것들이 품고 있는 사연들에 우리의 관심은 훨씬 증폭되기 마련이고 그 신호들에 본능적으로 빠져들도록 유인하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사의 진행 상황은 매그레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건담당 형사로부터 듣게 되지만 그가 진실에 접근하는 것은 애당초 어렵다는 것을 독자는 알게 된다. 왠지 진실은 매그레가 관심을 갖는 인간들의 삶의 모습이 내지르는 그 속성에 있는 것 같다는 믿음이 드니 말이다. 마을의 적대감에 고립된 플랑드르인 가족의 자기 보호를 위한 공고한 가족의 연대라는 중요한 덕목, 그들이 지켜내야 할 가치, 그 기대에 대한 정념은 구원수사 의뢰자인 ‘안나’라는 여성을 통해 어떤 과잉의 으스스함을 더한다.  

흐트러짐 없는 표정, 무표정한 온화함을 걸친 회색빛 여인, 그녀에 대한 매그레의 관심, 그것은 독자의 관심을 집중시키는데 이 특별한 여성의 성격은 이 소설의 분명한 매력 요소이다.
한편 반복되어 등장하는 피아노의 선율을 타고 흐르는 ‘입센’의 시(詩) 「솔베이지의 노래」는 이야기의 끊임없는 매개체가 되고 있는데, 사랑의 기다림을 약속하는 그 애절한 내용에 마비되는 것은 동서고금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겨울이 지나가도 / 사랑스러운 봄날이 / 흘러가 버려도... / 가을 낙엽과 / 여름의 열매가 / 모두 스러질지라도..., / 당신은 돌아올 거예요, / 오, 나의 멋진 연인이여, / 영원히 내 곁에 머물기 위해....”

여기에 비 내리는 부두와 물결에 흔들리는 무력한 배들의 한가로운 무리, 진흙길을 지나는 드문 발길들, 뿌연 빗줄기 너머 불 밝힌 외딴 주점, 경계에 선 사람들이 뿜어내는 알 수 없는 우수(憂愁)까지 더해 범죄 추리를 초월한 심연의 무엇을 자극하는 안온함이 작품 전체를 감싸 흐르는 것 같은 느낌에 빠져든다. 그것의 정체가 인간에 대한 연민이든, 고상하게 휴머니즘이라 말하든 따뜻한 밥이 차려진 식탁에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하고 있는 그런 좋은 기분이다. 아무래도 시리즈 나머지 작품들도 주문해야 할 것 같다. 물 흐르듯 유연한 인간 개성의 탐사와 함께 절로 다가서는 사건의 진실에 대한 접근은 가히 이야기의 참 맛을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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