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최고의 날
카를로스 발마세다 지음, 박채연 옮김 / 북스토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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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발마세다’의 소설은 달콤하고 관능적 음악이 흐르고 열대의 찬란한 색감들로 조화롭게 꾸며진 최고의 요리들, 자신들의 지성과 탄력 있는 육체를 과시하려는 선남선녀들이 즐비한 화려한 잔치를 연상시킨다. 감각의 풍요로운 향연, 드라마틱한 전개와 즐비한 지성의 요리들, 이 모두가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육체와 정신의 구분이 없어지는 지고의 쾌락에 흠뻑 빠지게 된다. 요리와 섹스, 그리고 잘 갈린 은빛 칼날이 은밀하게 반짝이는 그의 전작(식인종의 요리책)이 발가벗겼던 인간의 욕망이 여기서 또 다시 빛을 발한다. 이번에는 신화와 문학, 오페라, 회화를 아우르는 예술 작품 속에 표현된‘열정적 사랑’에 깃든 본질의 탐색이다.

작품의 무대 역시 아르헨티나 남부 해안도시‘마르텔 플라타’이다. 왠지 이 도시에 있으면 절로 사랑에 빠지고 오감이 깨어나 생명력이 충만해질 것만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첫 페이지부터 감각들을 바짝 긴장시킨다. 절정과 감미로운 노곤함에 눈꺼풀을 스르르 감는 여인, 그녀의 기억을 여기에 멈추게 했던 사랑의 고고학적 발굴이 시작된다.

문학을 전공하는 서른 살의 대학 강사, ‘파울리나’는 박사 학위를 위해 <사랑과 연인들의 책>이라는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이것이 걸작인 게 소설 속에 총 9개장으로 이 논문이 에세이처럼 소개되고 있는 것인데, 주제의식과 사랑의 본질에 대한 제법 경이로운 이론까지 완비하고, 스토리와 상호 교섭하여 암시와 복선을 주고받으며 소설의 품격을 진부한 로맨스와 복수극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또 하나의 신화적 작품으로 올려놓는다는 것이다.

사랑과 배신, 증오와 복수의 실체, 열정과 그 소멸, 이에 반응하는 연인들의 참담함, 그리고 그 열정의 본질에 대해서 그리스 비극 『아이네이스』를 시작으로 『오셀로』,『트리스탄과 이졸데』,『페르 귄트』, 『피아노 치는 여자』등 오페라와 소설문학 속 비련의 연인들의 사랑의 자취를 거닐며, ‘옥타비오 파스’의 사랑의 비평과 ‘피카소’의 자화상이랄 수도 있는 인간의 육신을 한 수소 ‘ 미노타우로마키(La Minotauromachie)’가 뿜어내는 남성의 굶주린 욕망의 파멸성에 대한 해석까지 더해, 남자와 여자의 사랑의 색깔을 조명한다.

새로 부임한 동료 교수‘호나스’라는 남자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것인데, “사랑은 육화된 열정”인 것 같다는 파울리나의 열정적 사랑에 대한 고백처럼, 쾌락을 줄 수 있는 서로의 몸을 느낄 수 없는 사랑이란 강박관념 같은 고통, 좌절과 공허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사랑에 대한 체험적 논의들이 예술 작품들 여기저기를 누비며 사랑과 육체의 불가분성은 물론 연인의 육체에 대한 남성의 욕망의 속성, 그리고 사랑이 배신과 분노로 변질되고 증오와 죽음으로 연결되는 여정에 도사린 육체의 한계성을 부정으로서가 아니라 본질로서 파헤쳐 댄다.

여자의 사랑, 더구나 육화된 열정, 즉 육체를 잃어버린 사랑이란 이미 사랑이 아니라는 여자를 배신하는 것은 아마 죽음을 예약하는 무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스 비극작가‘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는 바로 배신한 사랑에 대처하는 여성의 화신이다. ‘입센’의 소설 『페르귄트』가 파울리나가 선택하게 될 사랑을 알려준다면, 『메데이아』는 사랑의 배신이 가져올 귀결이다. 열정은 그 열정의 사그라짐이 두려워 어느 순간부터 사랑을 확인하기 시작하려 한다. 그것은 공포다, 믿음을 흔들어대는 의심이 피어나는 순간 우린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곤 다가오는 상실의 고통, 사랑은 그런 것이다. 사랑이란 육화된 열정처럼 간절한 쾌락임을 부정할 이유는 없지만 미노타우로스의 야수적 성애가 있다면 메데이아의 복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두어야 할 것만 같다. 가히 매혹적인 사랑의 고고학적 탐사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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