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 : 거짓의 쇠락 위대한 생각 시리즈 10
오스카 와일드 지음, 박명숙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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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존재하는 사상과 물질, 제도와 질서 등 시대의 조류에 편승한 익숙한 것들에 대한 혐오, 이러한 것들로부터 탈주하려고 지난한 몸부림을 치던 한 사람이 있었다. 도덕적 위선으로 가면을 쓴 귀족들과 유산계급의 사치와 허영이 휩쓸어대던 빅토리아 시대는 가히 구역질나는 것이었을 게다. 때문에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인 오스카와일드의 문학세계는 아마 온통 이러한 기성질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름과 새로움의 창조를 향한 상상력으로 채워진 세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 수록된 예술 에세이네 편은 이러한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의 하나는 "삶이 예술을 모방한다"는 예술지상주의의 주창이고, 또다른 하나는 주변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기만의 고유한 개성, 삶을 더없이 완벽하고 충만하게 꽃피우기 위한 자유로운 자기실현인 에고티즘(egotism)의 독특한 '개인주의의 추구'이다. 전자는 에세이 거짓의 쇠락: 항의에서, 후자는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을 통해 역설하고 있다. ‘거짓의 쇠락은 작가 스스로가 대화체로 쓴 나의 최초이자 최고의 글이라고 평했던 글이다.

 

그런 만큼 그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중심적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문학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예술지상을 형식으로 두르고 기성의 사실이라는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때문에 당시 예술계를 지배하던 주류인 고작 자연과 삶의 현실세계를 묘사하는데 치중하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는 그에게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이는 곧 질서에 순응하고 복종하며 지배질서를 답습하는 것에 대한 지극한 회의와 저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지배계급이 요구하던 사회질서, 즉 체제내적 순응 세계의 주입에 참여했던 고전 동화들 -샤를 페로, 그림형제, 안데르센 - 에 대한 저항을 위해 동화를 창작했던 일군의 작가들에 대한 전환적 노력을 보기 위함이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소설가이자 시인이었던 만큼 당대의 뛰어난 동화 작가이기도 했다. 바로 그의 동화들의 정신을 담고 있는 글이 바로 거짓의 쇠락: 항의이다. 또한 이 글은 대표작인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전반부를 흐르는 삶이 모방하는 예술,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강렬한 논고이기도 하다.

 

1. 예술지상주의 미학에 대해서

 

여기서 거짓의 의미는 예술에 있어서의 거짓말이다. 모든 걸 자연과 삶속에서 직접 캐내기를 고집해 허구를 가장해 지루한 사실들을 전해주는 고작 유용성의 문학이 예술을 메마르게 하고, 아름다움이라는 예술의 본질인 토대를 상실하게 되었음에 대한 역설로서의 거짓이다. 다시 말해 이야기를 너무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려다가 현실성을 박탈해버리는 비예술이 되어버렸다는 지적이다. 태양이 언제나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발상의 예술은 죽은 생각들이란 것이다. 그는 에밀 졸라와 기 드 모파상을 천재는 재치라고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고결한 원칙에 충실함으로써 천재성은 없어도 적어도 지루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보여준 소설가라 비난한다.

 

그들의 작품은 윤리적 관점에서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진실하며 정확하지만 와일드는 이들의 분노에 동조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선언하며, 문학은 과학적 사실의 증명이 아니라 차별성, 아름다움, 상상력, 매력을 축으로 하는 거짓, 다름과 새로움의 세계 창조를 위한 예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예술관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문장이 있다.

 

헤카베의 슬픔이 비극의 훌륭한 모티브가 될 수 있는 건

바로 그녀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인 거야.”  -41

 

이 문장은 어떤 것이 유용하거나 필요한 한, 또는 고통이나 기쁨 그 어느 쪽으로 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거나 우리의 공감을 강력하게 호소하는 한, 또는 우리가 사는 환경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는 한, 그것은 진정한 예술의 영역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 말을 다시 읽으면 예술의 목적은 단순한 진실이 아니라 다양한 아름다움의 추구여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자연주의 문학에 대한 비난이기도 하지만 현존 질서의 언어를 가지고 그 사실만을 맴도는 문학의 체제 내적 욕망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때문에 와일드의 예술지상주의를 탐미주의로 한정하여 쾌락주의 문학으로 폄훼하는 독서는 심한 오독이 되고 만다. 그는 도덕주의의 위선에 대한 저항 수단으로 예술을 위한 예술로서의 문학을 지향했던 것이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세계, 유토피아, 이상향을 모색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예술지상주의는 지독한 저항 문학이 된다.

 

그는 문학을 통해 사람들을 매혹하고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전적으로 완벽한 거짓 세계를 펼쳐보임으로써 삶의 진실을 추구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예술은 삶의 거울이 아니고 베일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처럼 베일 뒤에 숨겨진 알지 못하는 숲과 꽃들, 그 어떤 삼림도 갖지 못한 새들을 상상해내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예술이 실재이고 삶은 거울일 뿐이다. 위대한 예술가가 하나의 유형을 창조해내면 삶은 그것을 모방하고 대중적 형태로 재생산한다. 따라서 위대한 예술가는 그의 작품처럼 살아가는 이들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도리언이 탄생한다. 삶은 예술의 유일하고도 가장 훌륭한 제자가 됨으로써.

 

거짓의 쇠락에 대한 이 강력한 저항의 이유들은 아름다고 불가능한 것들,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들,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해야만 것들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잃어버린 거짓말의 기술을 연마해야 하는 것이 된다. 매혹적이고 아름다움으로 풍성한 상상의 세계, 그 거짓의 세계야말로 진정 도달해야 할 진실의 세계일 것이라는 말이다. 때문에 예술은 현실적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만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하며, 살고 있는 시대만 빼고는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것만이 유일하게 아름다울 수 있음을, 이를 포기하는 순간 형편없는 예술, 즉 삶과 자연의 구렁텅이를 맴돌아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술의 목표는 삶에 에너지를 구현할 수 있는 아름다운 형식을 제공하는 의식적 자기표현이어야 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오스카 와일드가 도달한 예술지상주의 미학이다.

 


2. 개인주의 에고티즘, 자유로운 개성의 발현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문학적 유토피아를 향한 야심찬 평설인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은 자유로운 개성이 펼쳐지는 세상, 곧 그 새로운 세계의 입구에는 너 자신이 되어라라가 나 자신을 알라를 대체한 곳, 가장 강력한 개성의 발현인 예술이 있는 장소를 말한다. 자신을 둘러싼 담의 보호를 받으며, 자신의 완벽성과 가치를 드높이는 에고티즘의 세계이다. 개인주의의 특수한 에고티즘과 에고이즘(이기주의)을 구별하기 위해 이기주의를 간략하게 정리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살기 바라는 대로 살 것을 요구하는 것, 즉 자기 욕구의 실현을 위해 다른 이들의 수용과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다. 이와달리 에고티즘(개인주의)이란 다른 사람들의 간섭과 침해를 배제하고 무한한 다양성을 인식하며 자기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자아가 완벽히 구현되는 세계로서 권위주의적 정치권력이나 산업독재가 배제된 자기 개성의 완전 발현이 보장되는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기획하고 있다. 이로써만이 개인주의, 삶을 더없이 완벽히 충만하게 꽃피우는 세상이 열릴 수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시인, 철학자, 과학자 등 지식 엘리트 계층과 축적된 충분한 부를 향유하는 자산계층은 자아실현을 부분적이나마 누리고 산다. 그러나 많은 다수의 사람들은 가축처럼 일해야 빈곤의 모멸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러한 계층에게는 사실 자아실현이니 개성의 발현이니 하는 말들이 한낱 헛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 개성을 발휘하며 에고티즘의 세계를 향유 하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와일드는 거대한 정치 기획으로서 사회주의를 구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삶인 곳, 개성이 제약없이 만발하는 시공으로서 사회주의이다. 어떤 주류의 지배질서가 있어 불복종과 반항을 해야 할 필요가 없는 곳, 인간의 소유물이 인간의 개성을 완전히 장악하여 존재보다 소유가 중시되는 곳이 아닌 곳, 따라서 지겹게 재산을 축적하는 데 인생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그런데 지금의 인간 세계는 어떤가? 세상은 온통 권력에 순응하라는 메시지로 가득 차있다. 지배질서의 역겨운 야만성이 가득 차 있는 세계이다. 때문에 이를 벗어나는 자유로운 개성의 실현, 개인주의는 용납되지 않으며, 인간 삶을 심하게 격하시키고 있다.

 

이러한 말이 있다. 최악의 노예주는 자신의 노예들에게 친절히 대해주는 사람이다.’ 이럴 때 노예로서 고통받는 인간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거나 제도적 문제점을 고찰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가장 선한 일을 많이 하려는 인간이 가장 유해한 인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압박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애완동물처럼 천박한 안락함에 길들여져 한 순간도 진정한 자신이 되지 못한다. 이것이 자기 소외이고 예술이 불가능한 세계이다. 와일드는 이러한 압박과 제약, 즉 예술의 자기실현을 훼방하고 개인의 개성 발휘를 못마땅해 하는 권력에 대해 몸서리를 친다. 독재 또는 과두제에 의한 국가권력, 그리고 사회통념과 편견에 매몰되어있는 우중으로서의 대중 권력을 지적하면서 예술은 결코 대중적이고자 해서는 결코 예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음과 같은 역설적 조롱의 언어는 대중의 관심을 벗어나는 것이 예술임을 보여주는 아이러니의 예일 것이다. 대중의 관심을 벗어나 대중이 읽지 않음으로써 가장 훌륭한 예술이 된 시()야말로 대중의 통제에서 벗어남으로써 그들의 저속하고 무지한 통속성으로 망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중에 공개되자 아주 이해하기 쉽고 높은 도덕성을 지닌 작품으로 인정받는다면 그것은 분명 삼류거나 예술적 가치가 전혀 없는 건 아닌지 자문해야 보아야 한다는 경고처럼 권력화된 질서는 개성과 개인주의를 억압하여 예술이 들어설 기회를 차단한다.

 

저속함과 어리석음은 현대적 삶에서 매우 두드러지는 특징이라고 한다. 결국 오늘날의 예술이라는 언어로 포장된 많은 것들이 대중이 그 대가를 지불할 것이라 생각된 것들이다. 있는 것을 조작, 변형하여 유행에 따라 포장된 것이니 지극히 진부하고 불건전하며 지각없고 심미성이 결여된 것들이 난무한다. 또한 이러한 것들이 권력화되어 무지를 조장하고 무능과 부패를 은폐한다. 상상력, 창의가 넘치는 개성, 새로운 세계를 위한 거짓의 세계가 실종되어 존재하는 것만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이상을 향한 모험과 도전은 위험하고 불순한 것으로 매도되곤 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기존에 없었던 예술로부터 비롯된다고 했다. 이 예술 비평은 삶의 가치에 대해서, 개성과 에고티즘(개인주의)의 자유로운 발현을 위한 세계의 창안에 대해서, 그리고 그러한 세계의 필요인 예술의 의미에 대한 다채로운 영감을 제공한다. 그러함에도 인간 삶의 형식은 끊임없이 변화해왔기에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수용할 여지가 있는 글이기도 하다. 자선, 동정심, 박애에 대한 이타적 충동이 설혹 개인주의의 발현, 개성의 자유를 방해한다는 귀족적 이유로 비난당하는 것처럼 섣불리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도 있다.

 

물론 와일드는 이러한 사회의 음지에 대한 외면과 무시에 입각한 자신의 믿음을 후일 반성하기도 했으며, 그것은 그의 동화 작품들을 통해 변화 반영되기도 했다. 아무튼 이 예술비평 에세이들은 단지 와일드라는 작가와 작품의 이해뿐 아니라 이 세계를 구성하는 기성의 질서를 탈주하려는 위대한 이상을 향한 염원이기도 하다. 혹여 지금까지 문학, 미술, 음악 등 예술에 대해 잘못된 이해와 왜곡을 가하지 않았는지 반추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이제 그의 동화 작품 세계로 들어가 보려 한다. 안일하고 획일적 상식의 세계로 아이들과 사람들의 의식을 통제하려했던 고전 동화의 추오를 어떻게 이탈하여 전환하려 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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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의 두 얼굴 - 조선의 권력자들이 전하는 예와 도의 헤게모니 전략 지배와 저항으로 보는 조선사 4
조윤민 지음 / 글항아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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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문제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믿음과 생각의 경향성에 있어 개인의 불가피한 지적 역량과 행위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알지 못하니 그 앎에 대해 생각도 행위도 할 수 없으며, 고작 좁쌀만 한 알량한 것에 의지해 자기 삶의 지평이 의존 될 도리밖에 없게 된다. 이는 수동성을 낳고 남이 부과한대로 주입한대로 순응하는 삶, 생각할 필요가 없는 삶으로 이끈다. 그래서 사회의 주류의식이며 지배의식이 가리키는 것만을 바라보며, 그 가리킴으로 은폐된 것, 실재(實在)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의 형상이라고 우겨댄다. 그것이 진실이라고. 이 의심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주체에게는 바로 앎이란 것, 의심하고 사유하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부가 필요하다. 통상적이고 보편적이라고 주류의식이 말하는 것이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를, 그 무엇을 알아야 하나의 현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며, 비로소 판단이라는 것에 이르러 어떤 숙고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오늘 우리들의 세계에 여전히 남아 문화유산이라는 광휘(光輝)를 발하는 축조물과 건축물들은 우아함이나 장려함과 같은 그 예술적 미로 찬양되곤 한다. 이 책은 조선조의 왕릉과 궁궐, 성벽, 그리고 서원과 사찰의 유산적 가치라는 이면에 가려진 사상과 이념, 권력의 욕망을 보게 함으로써 빛으로서의 문화유산만이 아니라 그것이 드리운 그림자를 정면에서 직시하는 지혜를 제공한다. 이들 유산에 서린 아픔을 보듬을 때 이 세상에 대한 더 넒은 지평이 열릴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이가 있을까? 물론 역사를 부정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인간들이 있으니 그러한 것들에게 공부를 말해 무엇 하겠는가.


【 247쪽 부분 발췌


이 인용 글은 이미 병자년 전쟁이 한참이나 지난 효종조에 남한산성 성벽 축조에 대한 대신의 항소 내용이다.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고통스런 공역의 중지를 요청하는 글이다. 오늘날 우리네가 유흥을 위해 찾는 그 남한산성의 성벽 증축 및 보수공사다. 이 공사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백성인가? 아니다, 북방으로부터의 침략을 두려워 한 오직 왕과 그 일족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오늘날 남아있는 성벽을 비롯한 건축물이란 백성의 땀과 피눈물의 소산이지 어느 왕이나 대신의 노고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 축조물 및 건축물은 그 조성으로 얻고자 하는 목적이 숨어있다. 그것은 위세와 존엄, 통치 행위를 정당화하는 기제이자, 권력행사를 순조롭게 하는 지배전략으로서의 욕망, 권력이 복종시키고자 하는 순응의 요구이며 자신의 안락을 위한 장치다. 결국 지배층의 욕망충족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왕릉, 궁궐은 오늘 우리들에게 자부심이기만 한 건가?

 

조선 시대에 조영된 왕과 왕비의 능이 44기인데, 북한에 있는 2, 광해군과 연산군 2기를 제외한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있다. 등재 이유는 살아있는 유교문화의 정수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살아있다는 유교규범과 풍수지리 사상이 어우러진 건축미와 조경(造景)미가 왕과 왕비 능의 존재 보전 의미 전부인가? 그저 그 예술성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과연 자부심의 대상이기만 한 것인가?

 

왕과 왕비의 능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영역 선정이 필요하며, 그 영역 내에 있던 기존의 집과 묘는 모조리 철거 이전해야 한다. 또한 능역은 능을 중심으로 사방 500보라는 광활한 조성 구역이 필요했으며, 이는 목재와 기타 식물을 생존 수단으로 삼던 곤궁한 백성들에게는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능을 조성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과 소요 물질이 백성에게 전가되었으며, 능을 경계하는 수호군이라는 신역(身役)을 져야했으며, 능 관리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능은 왕과 지배세력의 권력 과시 도구이자 절대권력을 상징하는 공간이었으며, 정례적 제례와 규범화된 의례를 통해 권력자에 대한 숭배와 자발적 복종을 체화시켜 지배정당화를 강요하는 공간이었다.

 

지배 권력을 위해 공역을 부담하고 생존을 위협당하면서 게다가 자기훈육까지 당해야하는 참담함의 형상이 바로 왕릉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 조상들의 눈물과 땀과 피가 배어있는 곳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빛 뒤에는 그림자가 있음을. 그 그림자를 외면하는 역사는 올바른 역사가 아니다. 소수의 지배층을 위해 다수의 백성이 신음해야했던 철저한 신분제 사회 조선의 음영이, 그 슬픔이 간직된 것이다. 문화유산임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예술적 역사적 가치와 더불어 은폐된 그 실재의 의미까지 아울러 보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풍수지리와 유교 논리를 통해 정치적 세력 다툼의 재료로 왕릉은 줄 곧 이용되어 빈번하게 능을 옮기는 천릉(遷陵)과 많은 인력과 물자를 필요로 하는 왕의 능행까지 백성의 부담과 고통은 늘 가중되었다. 한편 궁궐의 건설은 조선조 내내 진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조선조 개국으로 인한 한양 천도로부터 시작된 궁궐 공사는 조선조가 망할 때 까지 계속되었다.

 

저자는 조선 궁궐에 대한 오늘의 주류 학자들의 글을 인용하고 있는데, 미술평론가 유홍준은 자연과 어울림이라는 미덕을 지니고 있으며, 포스모던적 어울림이라 했으며, 한국학자 최준식은 창덕궁을 꽉 짜인 질서보다 느슨하고 자유로운 구도를 좋아하고 대칭적인 것보다 다양하고 비균제적 것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이 작동한 것이라 했고, 미술사학자 최순우 는 잔재주를 부릴 줄 모르는 한국인의 성정과 솜씨를 가늠하며, 실질미와 단순미를 지닌 한국의 멋이라 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이들 모두에서 한결같이 자연이나 심성이라는 인식 틀만을 갖다대는 것을 본다. 조선의 궁궐을 바라보며 이 외에 다른 해석개념은 마치 없다는 듯 말하는 이들을 점잖게 비판하는 것 같다.

 

한글 창제로 백성에게 글을 준 성군(聖君)이라 칭송되는 세종의 경우를 보자. 모든 임금이 궁궐 증개축과 보수, 더불어 이궁의 신축까지 궁궐공사를 하지 않는 자가 없다, 왜 그러했을까? 이것은 곧 왕권강화와 관료의 위계질서 확립, 즉 지배제체 강화를 의미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를 둘러싼 왕과 지배층의 힘겨루기와 지배계급 간의 정치 세력 다툼이 그친 적이 없다. 세종은 경복궁 강녕전, 경회루, 남대문 토축공사, 물시계 조성공사 등등 수많은 공역을 동시에 추진했다. 한재와 홍수로 어려움을 겪는 백성의 피해가 커 공사시기를 재고해달라는 상소가 있었으나 세종은 이를 무시하고 백성들의 공역을 가속화했다. 그에게는 왕권의 신성화와 위계라는 계급적 질서의 강고화를 통한 권력의 항구적 안정화가 중요했지 백성의 삶이란 그의 유교질서에 자리가 없었던 까닭이다.

 


때문에 분별과 차등, 위계에 따른 역할과 책임 의식 고취를 위한 궁궐의 배치, 세부적 장식, 극히 작은 제사에 이르기까지 사전 연습의 시행은 물론 예규로 정해놓기까지 했다. 그의 과학적 업적이라는 물시계 또한 궁궐에 설치한 것은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권력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었기 때문이며, 만백성의 일상행위를 제한하는 장치(세종실록 77, 1437628)로 삼았음을 기록이 전하고 있다. 이는 행동에 동시성을 부여하여 일사불란한 사회질서 유지를 통해 지배체제를 강화하려는 왕의 욕망의 실현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파의 온상이자, 착취 도구로서 성곽과 서원, 향교

 

성곽 건설과 증개축 및 보수 공사는 그렇다면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위한 방어전략을 위한 군사적 목적이었을까? 조선은 엄격하고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유교의 인()과 덕()은 명분을 위해 소용되었지 정작 백성을 위한 덕목이었던 적이 없다, 단지 예를 실현하기 위한, 즉 지배계급에 복종하기 위한 순응성을 위한 가치였을 뿐이다. 차별과 특권으로부터 백성을 분리하기 위한 덕목.

 

서울 성곽은 지배계급과 그 가솔, 그리고 성곽 내의 이들 지배계급의 일상생활이 가능케 하는 모든 노동과 생산자인 백성은 성곽 외로 나누어져 있었다. 실제 성곽은 5미터에 불과할 정도로 낮았으며, 여타 방어물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즉 신분의 차별을 위한 분리 책략의 도구였을 뿐이다. 그 분리 장벽에 내몰려 국가의 보호로부터 배제된 이들 성곽 밖 백성들의 공역으로 축조되고 유지 보수된 것이다. 이 기괴함, 착취적 행위의 산물임을 오늘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지방의 성곽이란 정치 세력간 다툼의 지대였다. 군사를 배치하여 자기 당파의 세력화를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곽이 축조되었다. 남한산성 외성의 축조와 관련한 치열한 당파 싸움의 실상이 고스란히 실록에 전해져오고 있다. 조선조의 성곽들에 서린 그 천박한 양반무리들의 이전투구와 백성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일제가 조선 병탄 전후하여 성곽 철거와 궁궐의 훼손에 나선 것은 곧 조선 왕조와 지배계급의 권위라는 지배질서를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백성의 심신에 각인된 그 오래된 존엄과 숭배의 상징을 해체한 것이다.

 

1907년 일본은 숭례문 좌우 성벽 철거를 시작으로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 경복궁을 훼손, 파괴하고, 궁중 의례와 제도를 파기했다. 오늘 한국의 총리는 당시 일제가 적국이었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라며 이들의 침략 역사에 대한 실제를 회피하기까지 한다. 궁궐과 성곽이 왕의 존엄성을 해쳐서가 아니라 백성의 고혈이 쌓아올린 민족의 유산이기에 분노하는 것이다. 일본은 궁궐의 헐린 전각과 초석, 댓돌을 연못 조성에 써버리거나 경매에 넘겨 일국의 얼을 조롱했다. 이렇듯 건축 및 축조물은 인간의 정신을 길들이고 지배자가 요구하는 질서에 순응케 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의미에 더해 소수의 지배계급에 무한히 착취당하여야만 했던 우리 선조들의 눈물과 땀이 배어있다.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의문이 있다. 1907년 일본인으로 구성된 성벽처리위원회의 주도하에 서울의 성곽과 그 출입구인 돈의문(서대문), 소의문(서소문), 혜화문(동소문)등 빠짐없이 모두 철거되었음에도 일제가 왜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남겨두었을까 하는 물음이다. 이는 300년을 거슬러 1592년 임진년 왜군이 서울을 함락을 위해 입성한 곳이 이 두 개의 문이었기에 승전문이라는 유래를 지녔다는 것이다. 침략자인 일제에게는 전승 기념물로 보존할 역사적 유산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문경 조령의 관문, 전주 풍남문 등이 남았다. 철거된 성벽재는 신작로와 철도 바닥 다지기 재료로 소모되었다. 우리의 유산은 이렇게 일제에 의해 파괴, 유린되었다. 이처럼 한 나라의 정신과 물질적 유산을 철저하게 파괴한 적을 적이라고 하지 않는 세칭 친일파라는 인간들이 오늘 한국인의 정신을 다시금 유린하고 있다.

 

【경북 안동 도산서원, 이황이 지은 서당을 모태로 안동과 예안 지역민이 주도해 건립, 305쪽에서


아마 저 산간벽지와 촌락의 백성에게까지 성리학이라는 유교적 질서, 즉 소수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한 분리 차별책을 강요하고 착취하는 권력의 끝판 왕이라 할 서원과 향교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퇴계 이황이 설립한 영남 사림의 본산인 도산서원은 오늘에도 그 위용을 떨치고 있다. 서원이 지방 교육기관의 기능을 가지고 사회규범과 생활전반을 규율하는 유교화 진행의 첨병 역할을 했음은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도 이들 서원은 백성을 착취하는 세력들의 단체로 그 악명을 떨쳤는데, 1920년의 서원철폐 운동이 대두된 것은 이들이 소작인을 비롯한 인근 백성을 얼마나 심하게 착취했는가의 반증적 사건일 것이다.

 

이들 서원에 소속된 유림은 군역 면피는 물론 잡역까지 면제받았다. 특히 이들 유림은 대지주 양반들로 구성되어 지배층의 이익을 담보하는 착취기구이자 일종의 권력기관으로 행세했다. 인근 사찰과 점촌(店村)의 예속을 통해 경제기반으로 삼음으로써 서원세력은 확보된 재력으로 고리대 놀이를 함으로써 더욱 백성의 삶을 핍박했다. 이황조차 이 식리(殖利)를 서원 재정 확보 수단으로 인정했을 정도이니 사대부 계급이 백성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었는지, 그 골 깊은 신분 차별책의 사악함을 볼 수 있다. 일제하에 서원 세력은 식민지 지배정책에 참가하여 총독부 정책에 적극 부응하는 세력이 되었으며, 총독부 정책 보조 선전도구 역할에 앞장서기까지 했다. 오늘 우리들은 자연 경관과 어우러져 고즈넉하고 학문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서원을 찾으며 옛 선조의 고상한 취향을 칭송한다. 그러나 이들이 훼손되지 않고 남아 문화유산이 된 것은 그리 고상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조선조에는 지배권력의 착취기구였으며, 일제식민체제에서는 적국의 부역에 충성했기 때문이다. 실로 아이러니한 역사 아닌가? 민족을 착취하고 배신함으로써 문화유산이 되어 그 고유의 사적(史的) ()로 후손들의 내방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맺으며 - 차가운 이성을 위해서

 

저자의 지적처럼 많은 이들이 서원을 두고 장식을 멀리한 엄숙한 건축물이라 평가하며, 인공물과 자연과의 흔쾌한 조화미를 칭송한다. 그러나 자기 당파의 위상을 높이고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한 지배권력의 파당적 공작공간이었으며, 농민을 압박하고 관권을 대행하여 권세가로 주민을 통제하는 파렴치한 이익기구이자 권력기관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조선조의 건축물, 축조물들은 조선의 지극히 철저한 신분제 질서를 위한 상징물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 내부의 설계와 배치에서부터 그것들의 경영에 소용되는 각종 의례와 제도에 이르기까지 차별과 분리라는 위계질서의 장치였다.

 

"시각질서와 제국권력은 불가분의 관계였다....로마의 판테온도

남자들과 여자들로 하여금 보고 믿고 복종하게 하려는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 리처드 세넷 著, 살과 돌 (Flesh and Stone)』, 문학동네刊


한결같이 이들은 백성들의 눈물과 땀이 밴 노역과 물질적 공역에 의존한 산물들이다. 양반과 왕가는 결코 이러한 산물을 위해 어떠한 공여도 한 것이 없다. 오직 착취만 있었을 뿐이다. 더욱이 오늘 남아 전해지는 문화유산이라는 것들의 많은 것들이 불의를 통해 존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맺는말에서 유려한 문장으로 반추할 문장을 남기고 있다. 산세 그윽한 저 왕릉은 누구를 위해 그리도 오래 엄숙했는지 눈 시리게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문화유산에 배어있는 아프고 쓰라린 민초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오롯이 그것을 우리들의 것으로 품어낼 수 있을 때 그 유산은 정말 우리들의 얼과 혼으로서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조선 시대의 왕릉과 궁궐, 읍치와 성곽, 서원과 향교 등이 지배질서를 정당화하며 신분우위와 특권행사의 근거를 마련하던 지배전략의 산물이었음을, 양반 지배집단의 헤게모니 전략의 본거지로서 기획된 진지였음을 알게 된다. 지배이념 주입과 순치의 전진기지였음을.” 이처럼 이들 유적이 전하는 어두운 이면이 비록 암울하고 부정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이들의 문화적 가치와 예술적 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빛과 그림자, 양면을 모두 끌어안음으로써 비로소 그 유산의 역사적 의미는 보다 견고해지리라는 앎의 믿음이다. 그저 감탄하고 자긍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 피땀의 무덤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그래야 오늘 권력을 지닌 자들이 무엇을 숨기려 하고 무엇을 주입하려하는지를, 또한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차디찬 이성으로 판별할 수 있게 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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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은 창백한 손으로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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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반성보다 자기 합리화를, 고통보다는 안락과 포만감을 추구한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뇌는 (자기 생존에 불리한)기억을 삼켜버린다.”

- 67쪽에서

 

소설의 문을 열기 전에 거치는 것이 유익한 읽기가 있다. 이 책에는 별책 부록으로  짧은 소설 낙원의 기억이 있는데, 15년 전 만우절 학생주임의 티코 자동차를 엉뚱한 곳에 옮겨놓고 골탕 먹였던 기억의 장면들이다. 이를 바라보며 뿌듯하게 웃음 짓는 아이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마지막 문장이 이어진다. 적어도 살아남은 사람들에 한해서

 

그리고 본 작품인 낙원은 창백한 손으로의 프롤로그에는 삽을 들어올려 고통을 끝내주겠다고 선한 마음으로 머리를 다시 한번 내리찍는 남자의 정제되고 효율화된 행동이 이어진다. 여기까지가 소설을 읽기 위한 워밍업이다. 두뇌 엔진이 충분히 가열되었으니 드디어 시작된다. 새해 첫날 변호사 차도진은 의문의 쪽지를 받는다. 선양 경찰서에 체포된 용의자의 변호를 맡을 것. 만일 그러지 않을 경우 15년 전 그날의 일을 낱낱이 밝히겠다....”

 

지역에서 명망과 보이지 않는 권력을 휘두르던 에덴종합병원 원장 차요한의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위해 서울청에서 파견된 정호연 경위는 용의자로 지목된 간호사를 취조하던 중 불시에 들이닥친 용의자의 선임 변호사라는 차도진과 마주하게 된다. 차도진은 자신이 변호하는 사건을 알지 못한다. 자신의 아버지인 차요한의 피살 사건임을 뒤늦게 인지하게 된 차도진은 당혹감과 함께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임을 알게 된다. 사건은 15년 전, 차도진이 자신의 기억에서 지운 어떤 사건의 진실로 향하게 된다.

 

폐광되면서 돈과 가족마저 잃은 은퇴한 광부들이 우글대는 곳, 이들은 오랜 질병인 폐결핵과 함께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차요한은 손쉽게 구할 수 있으며, 사회의 주변으로 배제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도 그 어떤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을 무수한 이들 은퇴광부들을 이용해 신약 개발의 실험도구로 이용한다. 차요한은 주장한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다. ...사회에 도움이 되었으니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한 거다.”, 즉 신약개발을 위한 실험 도구로 이용되어 그 부작용으로 신체의 근육과 뼈가 뒤틀리고 부러져 사망하는 것은 소위 의학의 발전이라는 대의를 위해 정당하며, 희생자들은 의미있는 죽음을 가진 것이니 영예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생텍쥐베리가 자신의 소설 야간비행을 통해 인도적인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내버릴 때 인간은 비로소 위대해 진다.’라는 인간의 독자성과 생명윤리를 문명의 위대성과 맞 바꾸어 영웅적 행동이라며 공리주의적 셈법을 들이대는 그 터무니없이 기만적인 문장이 떠오른다. 이렇다 할 야간 비행을 위한 기술적 수단도 없이 오직 조종사들의 생명을 담보로 한 시행착오를 반복함으로써 새로운 야간 조종술과 항공로의 개척이라는 목적을 위대한’ ‘인간 본연의 책임이라고 선언하는 그 메마른 비윤리성을. 류의 진보라는 대의(?)를 위해 인간 개개인의 생명은 그것의 수단으로 소용될 수 있다는 인간 도구화의 이 주장은 악의 기괴한 미화 아닌가?

 


이 악덕은 또 다른 악덕으로 순환한다. 15년 전 고등학생이었던 차요한의 아들 차도진은 에덴병원을 둘러싼 흉흉한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시체들이 즐비하게 싸여있다는 장소에 숨어들고 두 친구는 홀린 듯 살아있는 사람을 끌고가 소각시키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두 학생은 두려움과 친구 차도진을 위해 본 것에 대해 입을 다문다. 인간이 한 개인의 야심을 위해 한낱 실험도구로 사라지는 현실이 정당화되는 세계, 여기서부터 모든 것은 뒤틀어지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가면 뒤에 숨겨진 흉측한 본색, 아이는 절망하고 방황한다.

 

생텍쥐베리식() 대의에 굴종된 세계, 경찰도 학교도, 그 세계의 모든 어른들도 불의에 협력하거나 방관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에 열중한다. 실의로 절망한 소년 차도진은 실험용 주사액을 자신에게 주입하지만 극단의 환각과 폭력상태에서 차요한의 환상을 살해한다. 그러나 그 실제의 대상은 다른 이였다. 선양지역의 실질적 권력자에 빌붙어 부정한 돈을 챙기는 경찰은 범죄를 둔갑시켜 억울한 희생자를 만든다. 가난한 약자의 아들은 친구들의 거짓 증언과 조작된 증거에 희생되는 것이다. 그 위대한 대의라는 인간도구화의 악덕은 인간을 지속적으로 살해하며, 공권력과 결탁하여 법()망까지 무력화한다. 악은 이렇게 또 다른 악으로 순회한다.

 

15년 전 사건의 진실 속으로, 그 끔찍하게 부도덕한 생체 실험의 세계와, 권위와 재화에 종속되어 불의가 정당화되는 현실을 파들어 간다. 한편 사건을 축소, 은폐하기에 바쁜 부패한 선양 경찰을 피해 본청에서 파견된 민완 여수사관 정호연은 사건의 본질에 접근해간다. 새로 부임한 선양경찰서장의 피살, 에덴병원 간호사의 죽음 등 연쇄적인 살인이 이어지며, 사라진 도진의 15년 전 친구들과 유력한 용의자의 인상을 주는 인물들을 통해 소설의 미스터리적 구성미를 강화하며 강렬한 흥미로 독자를 몰아넣는다. 차요한의 살해자를 추적하는 현재의 수사 이야기와 현재의 범죄를 초래한 15년 전 진실의 이야기가 미로처럼 얽혀들며 핏빛으로 물든 농장 낙원에 이르게 된다. 나약한 짐승은 결국 강자의 도구일 수밖에 없다는 그 주장이 과연 이 세계를 어떻게 지옥으로 추락시키는지의 또 하나의 강력한 이야기다. 물을 마시다 죽게 될 걸 알아차린 사슴의 눈에 방아쇠를 당기는 이들로 세상이 들어차게 된다면 인류의 존속은 아마 불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자기 안락과 이익을 위해 기억을 삼켜버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그러나 그럴 수 없게 되는 때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악의 고리를 자르고, 그 뿌리를 뽑아내기 위해서 또 다른 악이 실행되어야 하는 이 세계를 확인하는 것은 사실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작가의 전작인 이름 없는 사람들의 스릴러 판본이라면 곡해일까? 전작에서 말한 사라져 가는 사람들을 대가로 빚을 가리고 이득을 보는 도시, 그들의 실패와 죽음을 연료로 휘황하게 빛나는 도시가 바로 선양일 것이다. 선양!, 바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도시와 인간들의 이야기다. 비윤리와 비굴함, 불의한 권위와 부패한 권력, 악의 처단을 위해 또 다른 희생양을 요구하는 악이 순환하는 세계. 속도감 넘치는 스릴러 작품이지만 함의하는 무게는 꽤 묵직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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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또 내일 또 내일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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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좁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 다니는 그림자, 시간을 보내다 사라지는 서툰 배우, 소음과 분노로 가득찬 백치의 이야기라고 읆조리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속 주인공 맥베스의 이 독백은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내일이라는 오지 않은 미래를 반복하며 시작한다. 이 차용된 무한 반복 음절의 제목과 함께 배와 인간에 비해 엄청난 규모의 파도를 그린 호쿠사이를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생애지만 끊임없이 두들겨대는 거친 풍파라는 통과의례를 버텨내야만 하는 것이 생이라는 의미일까?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자신의 한 쪽 다리가 산산조각나 거듭되는 수술로 입원 중인 소년은 병원의 한 귀퉁이에 마련된 곳에서 입을 굳게 다문 채 게임에 몰입하고, 언니의 병 수발을 들기 위해 무료하게 대기 중이어야 하는 어린 소녀는 소년의 입을 연다. 소년 샘과 소녀 세이디는 게임이라는 단일 현상에 함께 반응하며 같은 세상 속에 있음을 확실하게느낀다.

 

그러나 이 우정은 세이디의 봉사활동을 증빙하는 시간기록지로 인해 단절된다. 샘은 세이디와 함께한 시간이 우정이 아니라 어린 환자를 돌봤다는 봉사에 불과했음에 분노한다. 인간의 감정이란 것이 어디 그렇게 무 자르듯 잘라지던가. 샘은 수학경시대회 등 먼발치에서 세이디를 바라보곤 하듯, 그의 마음속을 떠돈다. 세월은 흐르고 하버드 수학과에 진학한 샘은 어느 날 인파로 들끓는 지하철에서 세이디를 발견한다. 샘은 용기를 내어 세이디를 부른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때 샘은 어린시절 둘 만의 문장을 더해 세이디를 소리쳐 부른다. 그녀는 뒤 돌아보고 미소 짓는다. 이 스치듯 짧은 만남에서 샘은 세이디가 수업과정에서 준비하던 게임 프로그램을 받는다. 네 생각을 들려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그녀는 그로부터 멀어진다. 점점 작아지는 옛 친구의 모습을 바라보는 샘의 시선이 느껴진다. 게임 명 <솔루션>, 게임을 실행하곤 천재의 작품임을 친구 마크스와 함께 가능성을 본다.

 


샘은 세이디에게 <솔루션>을 완성된 게임 프로그램으로 만들 것을 제안하고, 두 사람은 <이치고>라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강력한 게임을 발표하고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후일 모교의 강단에 선 세이디는 한 수강생으로부터 <솔루션>에서 <이치고>로 실력이 훌쩍 도약하게 된 이유의 물음을 받게 된다. 그것은 이기심과 원한과 불안으로 똘똘 뭉쳐 독기를 지녔기에 가능했음을 되돌아보듯이 자신을 둘러싼 인간관계와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의 발현이었음을 떠올린다.

 

게임 제작의 장소를 내주었던 마크스와 게임개발의 주축인 세이디와 샘은 언페어(unfair) 게임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게임제작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어쩌면 이 회사명의 설정에 세 사람이 각자 자신들의 관념으로부터 나왔다고 여기듯, 인물들의 믿음이자 감성이며 이상의 한 자락의 표현처럼 보인다. 템페스트의 한 구절처럼 공정함으로부터이기도 하며, 어린시절 불만의 표현인 불공정에 대한 시정의 희망일수도 있고, 게임이야말로 인생보다 공평한 것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이 회사명이 그네들 각자 인생의 커다란 축을 상징한다면 지나치게 직관적이기만 한 것일까?

 

소설은 이렇게 게임과 인생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듯하다. 게임의 축은 게임 개발과 관련한 기획, 디자인, 엔진개발, 마케팅 등 게임제작 산업에서 펼쳐지는 섬세한 과정 속에서 전개되는 갈등과 협력의 생생한 실체를 보여준다. 인생이란 피할 수 없는 윤리적 타협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세이디 할머니의 조언처럼, 이들은 끊임없는 타협과 양보, 중재와 불가피한 봉합 등으로 위기를 넘어서곤 한다. 그러다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이해불능과 타협불가능의 지점에 이른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게임의 세계, 지긋지긋한 갈등과 이별, 건널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른 오해, 그리고 상실 너머 자신만의 세계가 구축된 곳으로, 바로 그것을 창조하는 지대, 생의 위로와 위안이 되는 곳으로 향한다.

 

패혈증에 이를 정도로 악화된 조각난 뼈를 간신히 이어붙인 다리로 개발 프로그램을 알리기 위해 대중 앞에 서야만 했던 샘, 프로그램 개발의 기술적 중심이라 생각하는 세이디는 샘이 자신의 명성을 가로챈다고, 자신을 이용하는 이기적 인물이라 곡해하고 증오에 휩싸인다. 샘은 이러한 세이디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녀와 함께 게임을 만들어내는 일이 삶의 유일한 기쁨일 뿐이다. 샘은 자신의 사랑을 말하지 못한다. 끝내 절단해야만 했던 다리, 환지통으로 겪어내야만 했던 많은 고통의 날들에도 불구하고, 혹여 이러한 상태가 자신이 사랑하는 세이디에게 부담과 거북함이 될까 결코 연인으로 다가서지 못한다.

 

정말 인생은 단지 서툰 배우의 소음과 분노에 찬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무수히 겪어내야만 하는 상실과 남겨진 자의 고독과 고통, 그리고 또 다시 내일을 말할 수 있기까지의 그 통증들이 내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게임의 세계는 이 서툰 배우들의 삶 너머의 신뢰와 사랑이 실현되는 고유의 공간이 되어줄 수 있을지도. 나는 이러한 가상의 공간과 현실의 공간을 넘나들며 내 운명을 토닥거리지 못한다.

 

왠지 서로 다른 사랑을 말하는 것만 같은 샘과 세이디를 보는 것, 그들이 공항에서 주고받는 사랑해라는 언어가 내게는 결코 상대에게 다른 울림이 될 것 같은 영원한 작별의 소리로 들려온다. 정말 지극히 고통스러운 사랑의 이야기이며, 가능성 넘실대는 게임 이야기이자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인간들의 아린 이야기이다. 무한한 부활, 무한한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없는 내겐 맺을 수 있는 결말과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는 프로그래머의 시선에 가닿지 않는다. 다만 머리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누군가와 함께 같은 현상에 반응 할 수 있는 게임 속 다르달로스와 에밀리가 되어 볼 수 있었음에 감사할 뿐이다. 익숙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거닌 느낌이다. 책장을 덮으며 나 또한 내일을 읊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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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교본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이승진 옮김 / 눈빛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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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히틀러가 독일 연립내각의 총리로 선출됨으로써 극우집단인 국가사회주의노동당(National 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 일명 Nazi)’에 의한 파시스트 국가가 된 시기부터 시작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는 시점까지의 사진과 결합된 브레히트의 4 행시로 구성된 사진시집(寫眞詩集)이다. 브레히트는 이를 포토에피그램(Fotoepigramm)’이라 불렀다.

 

1931년 브레히트는 노동자-화보신문창립 10주년 기념을 위해 쓴 글에서 눈부신 사진기술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진실을 밝히는 도구이기는커녕 진실에 역행하는 공포를 만드는 무기가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사진매체가 실제로는 사실 은폐에만 기여해왔다고 당시 각광받던 이미지매체로서의 사진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다시말해 이 책은 이러한 사진의 오용과 기만을 바로잡아 진실을 말하는 도구로 돌려놓기 위해 이 매체를 예술적 재생산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방법, 그 해독을 위한 학습의 장으로 기획된 것이라 하겠다.

 

오늘 우리들은 책과 잡지, 신문과 방송을 비롯한 각종의 디지털 이미지 매체에 편집되어 대중에게 보여지기위해 시사에 이용되는 이미지(사진 등)를 별다른 의심없이 사실로서 받아들인다. 또한 해당 사진에 설명을 통해 그 사진과 기사를 쓴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독하고 만다. 이렇게 유도된 해독은 특정한 이익을 목적으로 한 것이지 공익을 위해서거나 불편부당이라는 정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더구나 사실을 은폐하거나 어떤 숨겨진 저의(底意)를 위해 사용되기 일쑤며, 편파적 견해나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도구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일반 대중은 사진을 해독할 줄 모르거나, 그 이미지의 사용을 의심할 줄 모른다. 브레히트는 바로 이러한 우매한 민중에게 스스로 대상에 대한 인식을 획득 할 수 있는 학습의 장을 마련한 것이며, 또한 그의 문학 실험장이기도 하다. 4행시라는 문학(특히 )을 사진과 결합함으로써 사진매체를 새로운 측면에서 해독할 수 있는 관점을 촉발하고, 독자 스스로 대립되는 관점으로 논쟁할 수 있는 비판 의식을 지닐 수 있도록 주체화한다. 역자의 설명처럼 이 책은 고도의 미학적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 사진과 문학이 결합된 예술 작품집이다.



책 표지의 사진은 총 69컷의 사진 시 중에서 ‘61번 포토에피그램이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참패하고 러시아에 남겨진 독일군들이다. 다친 눈을 붕대로 싸맨 사람부터 모든 의지와 자부심을 상실한 얼빠진 얼굴들과 추위로 잔뜩 움추린 모습들이다.  러시아에 발을 깊숙이 들여놓을수록 이들은 추위에 떨며 죽어갔다.”는 사진설명이 붙어있으며, 브레히트는 다음과 같은 4행시로 사진의 진실을 생각게 한다.

 

보시오 우리 아들들을, 온몸이 마비되고 피범벅 되어

얼어붙은 탱크로부터 이 곳에 내던져졌소

사나운 늑대조차도 숨을 구멍이 필요한 법이라오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시오. 그들은 춥소.

 

전쟁을 누가 일으켰나?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 추위에 떨며 죽어가는 군인은 누구의 자식들이고 아비 혹은 형제인가? 이들은 왜 러시아 추운 벌판으로 나왔는가? 시는 사진에 구체성을 부여하며 모순된 현실을 드러낸다. 바로 이 모순을 발견하고 해결함으로써 현실은 시정될 수 있다. 브레히트가 추구한 것은 이렇게 사진과 문자를 결합함으로써 현실의 모순과 해결책을 사유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적 재생산 수단인 이 에피그램을 시도한 것이다.

 

특히 이 포토에피그램에서 오늘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내용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나치당에 손을 들어줌으로 민중 자신들의 적대계급인 극우 파시스트인 히틀러를 선택한 독일인의 우매성에 대한 지적이다. 민주정이었던 바이마르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파상적인 매체 선전에 현혹된 독일 민중의 잘못된 선택이 무엇을 초래했는지를 직시하라는 요구이다. 그래서 이 사진시집의 1번 시와 2번 시는 그 우매한 선택으로 전쟁준비에 동원되어 비록 나라는 다르지만 같은 민중에게 총부리를 돌리는 그 어리석고 모순된 자신들의 행위를 돌아보게 한다.

 

사진은 그 자체로 진실을 더 이상 말하지 않는 매체이다. 해독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말해 모든 대중은 매체 해석 능력을 지녀야 한다. 의심하고 새로운 측면에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56번 포토에피그램이다. 이 사진에는 모스크바 야전병원에 누워있는 실명한 독일군 병사라는 설명이 있다. 이 독일인은 왜 이러한 고통을 겪고 있는 건가? 누구의 책임인가? 히틀러와 나치당의 책임인가? 독일인은 히틀러와 나치를 선택하지 않았나? 그 선택의 주체인 이 독일인은 자신의 책임을 부인할 수 없다. 브레히트는 이 사진에 다음과 같은 시를 붙이고 있다.

 

모스크바를 눈앞에 두고, 이 한심한 사람아, 자넨 시력을 헌납했구나

오 눈먼 인간이여, 이제는 알겠는가.

사이비 지도자가 모스크바를 손에 넣지 못했다는 것을

그가 손에 넣었더라도 자넨 그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네.

 

2차 대전은 제국주의적 탐욕의 열망이 만들어낸, 소위 제국주의적 사업계획 실행의 충돌이다. 계속하고자 했던 장물아비 짓의 거대한 실패이다.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지배자들의 더러운 욕망에 야합하기로 함으로써 독일인은 그 굴레를 스스로 뒤집어 쓴 것이다. 민중의 어리석음은 곧 민중의 고통으로 필연적으로 돌아온다. 바로 매체를 잘 못 읽고 그릇된 해석을 함으로써.  브레히트는 그의 희곡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에서  전쟁은 또 다른 형태의 장사일 뿐 , 그저 치즈 대신 탄약을 쓰지요.”라고 했다. 이 냉철한 지적처럼 군산복합체는 민중을 전쟁으로 몰아냄으로써 거두는 지배권력의 잔인하고 혹독한 탐욕이다. 전쟁은 권력과 결합한 산업의 욕망 실현 그 이상이 아니다.

 


이 책은 연대기 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지막 69번 시는 히틀러를 선택함으로써 그 어리석은 고통이 시작된 1번 시와 수미상관(首尾雙關)을 이루어 제 3제국의 멸망을 상징하는 사이비 지도자 히틀러로 마무리된다. 브레히트는 이 마지막 4행시에서  저기 저것이 하마터면 세상을 온통 지배할 뻔 했지....축배는 아직 안 들면 좋겠어/ 저것이 기어 나온 그 자궁이 아직도 생산능력이 있거든이라고 썼다. 자기 욕심 우선의 사이비 지도자의 손을 들어준 우민들아 각성해라, 라는 얘기다.

 

더구나 그것이 죽었다고 파시즘의 근원이 사라진 것은 아님을 말한다. 이것은 깨어나지 않는 우민이기도 하며,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우파집단의 이기심이고, 추악한 작물아비의 근성이기도 하다. 브레히트가 실명한 군인에 동정심을 보이지 않고 그에게 냉혹하게 책임을 물었다고 비인간적인 인간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판이다. 다른 시에서 그는 코 꿰인 노예들이 되기엔 너희들이 너무 선량하다는 그 생각은과 같이 비인간적 일을 행하도록 요구된 사람들에게 동정과 우애를 보인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우매함의 껍질을 벗어난 인간에만 보내는 엄격한 사랑이다.

 

전쟁의 불사를 무책임하게 발설하는 권력자의 행위란 민중의 희생에 아무런 관심없음 이라는 의미를 품은 것이다. 그들에게 전쟁은 자기 부 축적의 수단이지 그 외의 어떤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본질은 오직 장사 속 그 외의 것이었던 적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전쟁 교본이라는 제목을 하고 있지만 이 책은 매체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한 대중 교습서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브레히트는 사진 매체와 시(문학)를 결합함으로써 현실을 보다 구체적이고 진실에 이를 수 있는 시야(視野), 그 해독 능력을 열어준다. 또한 문학을 진실을 말하는 예술적 재생산도구로 사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늦은 독서이지만 지금이야말로 시의적이라 할 책이라 해도 그릇된 판단은 아닐 것이다. 배움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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