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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교본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이승진 옮김 / 눈빛 / 2011년 2월
평점 :
이 책은 히틀러가 독일 연립내각의 총리로 선출됨으로써 극우집단인 ‘국가사회주의노동당(National 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 일명 Nazi黨)’에 의한 파시스트 국가가 된 시기부터 시작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는 시점까지의 사진과 결합된 브레히트의 4 행시로 구성된 사진시집(寫眞詩集)이다. 브레히트는 이를 ‘포토에피그램(Fotoepigramm)’이라 불렀다.
1931년 브레히트는 『노동자-화보신문』 창립 10주년 기념을 위해 쓴 글에서 ‘눈부신 사진기술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진실을 밝히는 도구이기는커녕 진실에 역행하는 공포를 만드는 무기가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사진매체가 실제로는 사실 은폐에만 기여해왔다’고 당시 각광받던 이미지매체로서의 사진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다시말해 이 책은 이러한 사진의 오용과 기만을 바로잡아 진실을 말하는 도구로 돌려놓기 위해 이 매체를 예술적 재생산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방법, 그 해독을 위한 학습의 장으로 기획된 것이라 하겠다.
오늘 우리들은 책과 잡지, 신문과 방송을 비롯한 각종의 디지털 이미지 매체에 편집되어 대중에게 보여지기위해 시사에 이용되는 이미지(사진 등)를 별다른 의심없이 사실로서 받아들인다. 또한 해당 사진에 설명을 통해 그 사진과 기사를 쓴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독하고 만다. 이렇게 유도된 해독은 특정한 이익을 목적으로 한 것이지 공익을 위해서거나 불편부당이라는 정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더구나 사실을 은폐하거나 어떤 숨겨진 저의(底意)를 위해 사용되기 일쑤며, 편파적 견해나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도구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일반 대중은 사진을 해독할 줄 모르거나, 그 이미지의 사용을 의심할 줄 모른다. 브레히트는 바로 이러한 우매한 민중에게 스스로 대상에 대한 인식을 획득 할 수 있는 학습의 장을 마련한 것이며, 또한 그의 문학 실험장이기도 하다. 4행시라는 문학(특히 詩)을 사진과 결합함으로써 사진매체를 새로운 측면에서 해독할 수 있는 관점을 촉발하고, 독자 스스로 대립되는 관점으로 논쟁할 수 있는 비판 의식을 지닐 수 있도록 주체화한다. 역자의 설명처럼 이 책은 ‘고도의 미학적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 사진과 문학이 결합된 예술 작품집이다.
책 표지의 사진은 총 69컷의 사진 시 중에서 ‘61번 포토에피그램이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참패하고 러시아에 남겨진 독일군들이다. 다친 눈을 붕대로 싸맨 사람부터 모든 의지와 자부심을 상실한 얼빠진 얼굴들과 추위로 잔뜩 움추린 모습들이다. “러시아에 발을 깊숙이 들여놓을수록 이들은 추위에 떨며 죽어갔다.”는 사진설명이 붙어있으며, 브레히트는 다음과 같은 4행시로 사진의 진실을 생각게 한다.
보시오 우리 아들들을, 온몸이 마비되고 피범벅 되어
얼어붙은 탱크로부터 이 곳에 내던져졌소
사나운 늑대조차도 숨을 구멍이 필요한 법이라오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시오. 그들은 춥소.
전쟁을 누가 일으켰나?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 추위에 떨며 죽어가는 군인은 누구의 자식들이고 아비 혹은 형제인가? 이들은 왜 러시아 추운 벌판으로 나왔는가? 시는 사진에 구체성을 부여하며 모순된 현실을 드러낸다. 바로 이 모순을 발견하고 해결함으로써 현실은 시정될 수 있다. 브레히트가 추구한 것은 이렇게 사진과 문자를 결합함으로써 현실의 모순과 해결책을 사유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적 재생산 수단인 이 에피그램을 시도한 것이다.
특히 이 포토에피그램에서 오늘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내용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나치당에 손을 들어줌으로 민중 자신들의 적대계급인 극우 파시스트인 히틀러를 선택한 독일인의 우매성에 대한 지적이다. 민주정이었던 바이마르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파상적인 매체 선전에 현혹된 독일 민중의 잘못된 선택이 무엇을 초래했는지를 직시하라는 요구이다. 그래서 이 사진시집의 1번 시와 2번 시는 그 우매한 선택으로 전쟁준비에 동원되어 비록 나라는 다르지만 같은 민중에게 총부리를 돌리는 그 어리석고 모순된 자신들의 행위를 돌아보게 한다.
사진은 그 자체로 진실을 더 이상 말하지 않는 매체이다. 해독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말해 모든 대중은 매체 해석 능력을 지녀야 한다. 의심하고 새로운 측면에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56번 포토에피그램이다. 이 사진에는 “모스크바 야전병원에 누워있는 실명한 독일군 병사”라는 설명이 있다. 이 독일인은 왜 이러한 고통을 겪고 있는 건가? 누구의 책임인가? 히틀러와 나치당의 책임인가? 독일인은 히틀러와 나치를 선택하지 않았나? 그 선택의 주체인 이 독일인은 자신의 책임을 부인할 수 없다. 브레히트는 이 사진에 다음과 같은 시를 붙이고 있다.
모스크바를 눈앞에 두고, 이 한심한 사람아, 자넨 시력을 헌납했구나
오 눈먼 인간이여, 이제는 알겠는가.
사이비 지도자가 모스크바를 손에 넣지 못했다는 것을
그가 손에 넣었더라도 자넨 그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네.
2차 대전은 제국주의적 탐욕의 열망이 만들어낸, 소위 제국주의적 사업계획 실행의 충돌이다. 계속하고자 했던 장물아비 짓의 거대한 실패이다.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지배자들의 더러운 욕망에 야합하기로 함으로써 독일인은 그 굴레를 스스로 뒤집어 쓴 것이다. 민중의 어리석음은 곧 민중의 고통으로 필연적으로 돌아온다. 바로 매체를 잘 못 읽고 그릇된 해석을 함으로써. 브레히트는 그의 희곡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에서 “전쟁은 또 다른 형태의 장사일 뿐 , 그저 치즈 대신 탄약을 쓰지요.”라고 했다. 이 냉철한 지적처럼 군산복합체는 민중을 전쟁으로 몰아냄으로써 거두는 지배권력의 잔인하고 혹독한 탐욕이다. 전쟁은 권력과 결합한 산업의 욕망 실현 그 이상이 아니다.
이 책은 연대기 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지막 69번 시는 히틀러를 선택함으로써 그 어리석은 고통이 시작된 1번 시와 수미상관(首尾雙關)을 이루어 제 3제국의 멸망을 상징하는 사이비 지도자 히틀러로 마무리된다. 브레히트는 이 마지막 4행시에서 “저기 저것이 하마터면 세상을 온통 지배할 뻔 했지....축배는 아직 안 들면 좋겠어/ 저것이 기어 나온 그 자궁이 아직도 생산능력이 있거든”이라고 썼다. 자기 욕심 우선의 사이비 지도자의 손을 들어준 우민들아 각성해라, 라는 얘기다.
더구나 그것이 죽었다고 파시즘의 근원이 사라진 것은 아님을 말한다. 이것은 깨어나지 않는 우민이기도 하며,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우파집단의 이기심이고, 추악한 작물아비의 근성이기도 하다. 브레히트가 실명한 군인에 동정심을 보이지 않고 그에게 냉혹하게 책임을 물었다고 비인간적인 인간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판이다. 다른 시에서 그는 “코 꿰인 노예들이 되기엔 너희들이 너무 선량하다는 그 생각은”과 같이 비인간적 일을 행하도록 요구된 사람들에게 동정과 우애를 보인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우매함의 껍질을 벗어난 인간에만 보내는 엄격한 사랑이다.
전쟁의 불사를 무책임하게 발설하는 권력자의 행위란 민중의 희생에 아무런 관심없음 이라는 의미를 품은 것이다. 그들에게 전쟁은 자기 부 축적의 수단이지 그 외의 어떤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본질은 오직 장사 속 그 외의 것이었던 적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전쟁 교본』이라는 제목을 하고 있지만 이 책은 ‘매체’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한 대중 교습서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브레히트는 사진 매체와 시(문학)를 결합함으로써 현실을 보다 구체적이고 진실에 이를 수 있는 시야(視野), 그 해독 능력을 열어준다. 또한 문학을 진실을 말하는 예술적 재생산도구로 사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늦은 독서이지만 지금이야말로 시의적이라 할 책이라 해도 그릇된 판단은 아닐 것이다. 배움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