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위안 -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청미래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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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으로 상처 난 마음을 어르고 달래서 평점심을 되찾게 하는 것을 위로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임시변통의 수완으로서 위무는 그리 달갑게 여겨지지 않는다. 살아가는 데 있어 무수한 고통의 형태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그 순간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에서이다. 그 다양한 형상을 하고 다가오는 고통이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그것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이해하여야 하는 것인지를 깨우치는 것이 진정한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라는 것이다. 그래야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다시 마주하게 될 고통에 대해서 조금은 나은 관점을, 너그러운 포용의 여유를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이 책은 어떤 획기적이고 단순 명쾌한 위로의 방법을 제시하는 따위의 장밋빛 미사여구가 아니다. 다친 마음을 토닥이며 친절한 연민을 보내며 쓰다듬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 인간 존재가 마주하는 고통에 대한 해석을, 인류 사상의 축을 이루는 철학자들의 삶과 글을 통해 근원적 위로로써 건네준다. 그것은 우리를 비난하고 소외시키는 것들이며, 원인을 미처 알지 못해 성취되지 않는 욕망 충동의 실체이고, 현실과 희망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좌절이며, 평범성에 부착된 세상의 부적절함의 낙인이고, 삶의 본질에서 오는 낙심과 슬픔이며, 수없이 다가오는 번민과 절망과 비탄이라는 삶의 곤혹스러운 감정들의 의미이다.

 

소크라테스로부터 에피쿠로스와 몽테뉴를 거쳐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이르기까지 그들 철학자는 인간 존재가 부딪치는 이러한 고통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을까? 그것이 삶에 있어 대체 어떤 무엇일까를 알랭 드 보통은 그 익숙한 사상가들의 친숙한 글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유려하게 엮어내어, 고작 지식의 창고에 축적되어 그 진정한 의미를 삶의 현장에 불러낼 줄 몰랐던 멍청함에서 깨어나게 돕는다. 여섯 명 철인(哲人)의 주저(主著)를 중심으로 인기와 가난과 좌절, 부적절성, 상심, 어려움의 여섯 고통의 실체를 풀어, 애면글면하는 우리네 삶을 한 차원 승화시킬 수 있는 단계로 이끈다. 곰팡내 나는 지식이 아니라 삶의 실천적 지혜로서의 앎의 지대로, 철학이 생의 현장으로 나와 인간 존재의 삶 그 자체를 위로한다.

 


첫 번 재 마주하는 것은 다른 인간의 시선에 붙들려 그들이 나를 어떤 존재로 받아들일지 노심초사함으로써 외면당하거나 무시되거나 부정되었을 때 다가오는 고통이다. 아마 이러한 고통을 가장 극명하게 인식했던 이로서 소크라테스를 호명하는 것은 타당할 것이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사회적 기틀을 깨뜨렸으며, 젊은이들을 아버지에게 대들게 만든 괴상하고 사악한 인간이라고 고발당하여 독배를 들어야 했으니 말이다. 끝까지 이성적으로 남을 수 있는 신념을 지녔던 철학자가 사유없는 직관에 의존하는 어리석은 시민들의 질투와 염세적 비난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았을 때, 나라면 과연 어떤 행동을 보였을까? 아마 극심한 분노와 부정의(不正義)한 인간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고통스러워했을 것 같다.

 

그러나 모두가 더불어 사는 인간 세계에 산다는 것은 자신의 실제와 다른 사람의 평가와의 간극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가혹한 적들은 힘있는 자리에 올라 무고한 철학자에게 불공평한 혐오를 쏟아 붓기 일쑤다. 정의(正義)는 수시로 왜곡되어 그럴듯하게 위장되고 뒤틀려 대중을 편견과 충동에 사로잡히게 한다. 최근 수년 간 벌어진 한국의 정치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의를 실천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인간들의 손아귀에 한 무고한 철학자가 쓰러져야 했다. 다수의 미움을 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중으로부터, 다수로부터 외면받는 것이 오류와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을 이 고대의 사건은 생생하게 보여준다. 폭넓게 믿어지거나 매도당하느냐는 하나의 관념이나 행동의 옳고 그름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편견과 질투가 사라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부당함에서 비롯된 고통은 기다려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죽고 그를 고발한 3(시인 멜레토스, 정치인 아니토스, 웅변가 리콘), 멜레토스는 사형에 나머지 둘은 유형에 처해졌으며,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중심에 동상이 세워졌다. 고차적 정의(定義)를 즉각 구분하는 일은 그리 간단하게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적 인내를 필요로 하는 숙고의 과정을 요하는 일이 너무도 간단하게 처리되었다. 오늘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받는 관행이나 관념을 맹목적으로 따르려는 무기력한 성향이 아니라, 이에 맞서는 이성적 균형을 취할 수 있는 지혜임을 한 위대한 철학자의 죽음으로부터 배운다. 책의 이 첫 장은 지적 회의(懷疑)에 대한 빛나는 초대장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이처럼 비난에 처했을 때 흔히 보이는 병적 흥분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의 확신으로 남을 수 있는 신념이었다. 그로부터 1세기 후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에게 철학의 임무는 인간 존재에게 수시로 침몰하는 우울과 욕망의 충동에 대한 해석이었으며, 행복추구에 대한 돌봄이었다. 고통을 합리적으로 조절함으로써 욕망을 치유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 그는 이를 쾌락이라 보았다. 그는 이 쾌락을 인간의 일생을 행복하게 해주는 지혜로서 우정과 자유와 사색, 세 가지를 꼽았다. 정치적 권력도 아니고, 사회적 명예나 경제적 부()도 아니었다. 소박한 희열, 친구와의 대화, 오후의 햇살, 깨끗한 집, 갓 구운 빵에 치즈를 바르는 행위에 정성을 쏟는 삶이었다. 오늘 우리네 세상에는 사치스러운 생산품과 비용이 많이 드는 생활환경을 선택하도록 유혹하는 이미지가 넘쳐흐르며, 성숙한 자기인식과 소박함에 대한 존중은 사라져버렸다. 불필요한 욕망으로 얼마나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은가? 과연 꼭 필요한 물질적 욕구인지, 그것으로 만족되는 내면의 충동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볼 것이다. 에피쿠로스가 실천했던 소박함을 믿는다면 아마 많은 불행들이 사라질 것이다.

 

책의 세 번째인 좌절한 존재를 위한 위로의 철학자는 스토아 철학자인 세네카다. 나는 세네카의 숙명론을 지지하는 알랭 드 보통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세네카를 비롯한 스토아주의자들의 질서 순응적 도덕관과 타자 외면의 논리에 혐오를 느낀다. 책의 저자는 멍에에 저항할 때보다 순응 할 때 더 다치는 멍에란 없으며, 숙명과 자신의 느슨한 관계를 적절히 확보함으로써 자유를 증대시킬 수 있다고 제한된 자유라도 받아들이는 자의 태도에 따라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며 세네카에 동조한다. 변화 불가능한 현실은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라는 것이다. 인간의 조건은 외부 환경에 굴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세네카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마차와 마차에 쇠줄로 매여 있는 개의 비유를 든다. 마차가 진행하는 방향과 일치하면 개는 쇠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 만일 마차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으면 쇠줄에 목이 당겨 개는 고통을 느껴야 한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 질서가, 권력이 요구하는 대로 따르면 쇠줄만큼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실이라는 주어진 숙명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쇠줄만큼의 자유? 목줄이 매여 있는 자유? 대체 이러한 순응성과 굴종의 자유를 누가 자유라 부른단 말인가? 삶의 단편들을 놓고 흐느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기꺼운 마음으로 숙명에 복종하라는 위로는 내겐 위로가 아니라 가장 잔인한 분노를 야기할 뿐이다. 로마의 거부이자 네로의 최측근 정치인이었던 자의 기회주의적 숙명론은 시대착오적 인용이라 봐야 할 것 같다. 그 무엇으로 수식해도, 설혹 운명의 여신은 절대로 도덕적 재판관이 아니라는 말로도 굴복할 수 없다. 비판으로 지면을 낭비하는 수고는 여기서 멈춰야겠다.

 

출처책 354쪽 부분 발췌


이 책의 견해에서 내 마음에 반향을 준 것은 몽테뉴와 니체를 통한 존재의 위무였다. 반은 지혜롭고 반은 멍청이 같은 삶의 방식으로도 여전히 적절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케 하는 몽테뉴와, 인간의 삶에서 긍정적인 요소들과 부정적인 요소들, 이를테면 완성과 어려움의 상호 의존성을 이끌어낸 니체의 해설은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삶을 완성된 삶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고통에 대한 인식을 조금은 수정해준다. 물론 사랑으로 인한 슬픔의 치유에 있어 철학자들 중에 단연 최고라는 쇼펜하우어의 생에 대한 의지(Wille zum Leben, will-to-life)’, 인간 존재의 내부에 고유한, 살아남고 싶고, 번식하고 싶어 하는 본능적 욕구라는 정의를 기반으로 한, <쇼펜하우어 해설을 곁들인 현대인의 러브 스토리 한 토막>은 이 염세적 철학자의 비통함을 쾌활함의 역설로 안내하기도 한다.

 

내가 몽테뉴에 제대로 빠져든 것은 아마도 인간 참모습의 대부분을 배제해버린 초상화를 대신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데 관심을 집중했던, 소탈한 자기 공개의 내재된 긴장의 해방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정한 지혜는 속된 자아와의 조화를 필요로 한다.”는 말처럼, 자신을 짓누르는 억압적 관념들, 약점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얼마간의 가벼움의 철학에 대한 각성이었다고 하겠다. 더구나 그가 보이는 순수한 지적 겸손은 그 어떤 고매한 사상보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 영혼에 혹여 잔존하고 있을 지적 오만을 쓸어낼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수상록(Esse)을 새로운 판본으로 다시 구입해야겠다고 생각하게 할 정도였으니, 삶에서 간과하고 있는 것들을 천천히 읽어내야 할 것 같다. 새롭게 받아들여야 할 인간 조건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뿌리들을 모조리 잘라버리는 것은 동시에 한 참 뒤 그 뿌리에서 

자라날 식물 줄기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질식 시켜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선악을 넘어서에서

 

니체가 이해한 고통, 즉 삶의 필수적 요소로서, 다시 말해 삶의 완성을 위한 절대 요소로서 고통을 설명하는 알랭 드 보통의 스위스 남동부 엥가딘 지역 작은 마을, 해발 1800미터 질스-마리아에서의 니체의 삶이 의미했던 것과 교통하며 빚어내는 그의 철학 정신의 비범한 옹호는 그야말로 절창이다. 질스-마리아의 집에서 가까운 코바치 봉을 올라 그 엄청난 높이가 호흡을 멎게 하지만, 오히려 의기양양해진 정신과 내부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순진무구한 웃음은 고통이란 부정성이 삶의 긍정적 요소와 어떻게 상호의존을 맺고 있는지 열 문장의 사변보다 깊은 감응과 이해를 가져다준다.

 

완성된 삶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태도에 달려있음을, 범접할 수 없는 정적이 감도는 고산을 오르내리다 보면 그 지고한 정신, 세상의 지붕까지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은 어떤 충만함으로 마음이 가득 채워진 느낌을 갖게 된다. 지식으로서의 철학, 고매하고 오만한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동행 지혜로서 철학을 읽게 된다. 삶의 위안이란 아마 이런 것이어야 할 테다. 순간의 자기연민과 위무가 아니라 마주하게 된 좌절과 번민과 분노의 고통이 삶에서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임을. 모처럼 마음이 평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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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왈츠 밀란 쿤데라 전집 4
밀란 쿤데라 지음, 권은미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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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가가 자신의 다른 소설들보다 더 즐겁고 흥겹게 썼다는 이 통속희극을 읽으며 인간의 일생이란 하나의 아이러니란 생각을 떠올렸는데, 사전적 정의인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가 바로 삶을 구성하는 것이리라는 별스런 깨달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설과 역설이 뒤섞이는 이중적 혼돈, 밀란 쿤데라가 일관되게 말하려는 가벼움의 무거움, 혹은 무거움의 그 가벼움이라는 상호 전복시키는 감응의 변주가, 반성할 줄 아는 인간 정신의 한 진실일 것이라는 동의였을 것이다.

 

작가는 프랑스 문학평론가 살몽(Christian Salmon)과의 예술의 구성에 관한 대담에서 우리의 드라마를 끔찍한 무의미를 통해 드러내 보여려 했다며, 기대하지 않은 과장된 일치라는 장치를 엄청나게 부각하는 형식으로 이 작품 이별의 왈츠(La valse aux adieux)를 통속적 희극으로 썼다고 말했다. 때문에 그의 여타 작품들과 달리 이 소설은 동질적 이야기들이 일탈도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고 있어, 기꺼이 이야기를 따라가며 읽을 수 있는 부담없는 읽기가 되어준다. 소설은 몇 안 되는 등장인물들과 사건이라곤 루제나라는 간호사의 임신과 낙태라는 자못 구태스러운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질투의 속성, 인간 존재의 의미, 도덕적 오만, 삶의 진실적 국면이 발생하는 인생 밖의 지대 등 실로 무수한 인간 운명의 진실들이 빼곡하다. 감상은 이러한 인간 속성들에 대한 단상이 되는 것이 왠지 마땅해보인다.

 


1. 인간의 잔인함과 저속함에 대해서

 

내가 언제나 가슴 깊이 역겹다고 생각한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인간의 잔인함과 저속함, 그리고 어리석음이 어떻게 서정적인 가면으로 가려지는지 보는 겁니다.” -164

 

이 문장은 온천장의 불임치료 의사인 슈크레타의 친구인 국가 권력에 의해 박해받고 소외된 지식인으로 조국을 떠나기 전 친구와 피후견인 올가와 이별을 고하기 위해 찾아 온 야쿠프의 목소리다. 온천장에 돌아다니는 개들을 질서란 명분으로 무차별적으로 포획하는 일종의 자경단의 행위가 발산하는 폭력의 역겨움에서 비롯된 인간에 대한 증오 욕구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다.

 

그는 이들 자경단이 지닌 질서의 속성에서 개인을 말살하는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구실로 자신들의 가혹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증오 욕구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에 자신을 동일시하여 구경꾼으로 무대에 등장한 간호사 루제나가 돌아다니는 개를 구제하려는 야쿠프의 행동을 막아서며, 특권층에 속하지도 못하면서 마치 자신이 그들인 듯 끔찍한 처형에 가세하는 형국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다.

 

유명 트럼펫 주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주장함으로써 여자들만 우글대는 이 소도시를 벗어나리라 생각하는 간호사 루제나의 이성 초월적 계시같은 망상의 믿음 또한 그 천박함과 동일시의 몽매성도 잔인성과 멀지 않은데, 자기가 멸시하는 남자가 원인일 수 없는 임신이라며 논리적 추론을 외면하고 의도적인 왜곡으로 유부남인 유명 연주자를 아이의 아버지로 스스로 납득시키는 것이다.

 

2. 인간 경멸에 숨은 오만한 자의식

 

루제나의 배속 씨앗의 아버지인 연하의 배관공 프란티셰크에 대한 경멸이나, 야쿠프의 도덕적 오만이 뿜어내는 인간 정신에 대한 혐오는 사실 그리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닌데, 야쿠프가 친구 슈크레타 의사에게 맡겨 보호하는 올가에 대한 후견의 행위가 스스로 관대함을 증명해 보이기 위한 더러운 자기 과시에 불과한 것이고, 흉내 낼 수 없는 올가의 젊은 개체성을 비웃고 격분하는 온천탕 속의 상스러운 흥겨움에 가세하여 모욕하고 우롱하는 루제나의 잔인한 의식의 동일시 장면은 쿤데라가 증명하려는 인간 의식의 더러움, 바로 그것일 것이다.

 

특히 야쿠프의 이 인간 정신에 대한 경멸은 루제나에게 투사되어 그가 그토록 혐오하던 이웃들에 대한 그 무심하고 잔인하게 내려지는 판결들을 내리는 얼굴과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란 것이 결코 다른 것이 아님을 반성하는 것이다. 그의 무의식에 깊숙이 자리한 인간에 대한 경멸이 루제나라는 혐오스러운 인간을 발견함으로써 인간 처벌의 준비가 소극적으로 실행되었음을 지각하는 것인데, 인간에게 타인의 생명을 희생할 권리가 없다는 강렬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부작위에 의탁해 한 인간의 죽음을 방조한다.

 

야쿠프는 죄의식을 느끼려고 간호사가 진짜 죽었다고 상상해보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는 감미롭고 기분 좋은 경치를 가로질러 차분하고도 평화로운 마음으로 차를국경으로 몰아간다. 그는 자신과 고리대 노파를 살해했던 라스콜니코프가 느꼈던 살해 후의 내적 공포와 회한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행위가 조금도 무게가 나가지 않음에, 너무도 가벼움에 놀라며, 러시아 주인공의 히스테릭한 감정보다 더 끔찍한 게 아닌가 자문한다. 그는 그토록 오랜 삶의 믿음이었던 도덕적이고 정치적 자만심을 상실하고 만다. 자신도 정적을 살해하는 국가 폭력자들과 다를 바 없는 한 명이라는 이해, 살인자들의 형제임을 자각하는 것인데, 자기 정신만은 타인과 다르게 고매함과 섬세함을 지녔다는 오만이 얼마나 근거없는 것인지를, 인간이란 결코 잘 못 창조된 신의 오류라는 것일까? 신의 사랑만이 귀결이라고 말하는 듯한 이러한 결론은 왠지 형이상학에 손쉽게 의존하는 편리함만 같아서 불편하다.

 


3. 눈 먼 질투심과 감춰진 운명 밖 보기

 

질투는 정열을 쏟는 지적인 일에 몰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완벽하게 

정신을 사로잡는다그때 정신은 단 일 초의 휴식도 없다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은 권태를 모른다.“  -283

 

이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굵은 하나의 나무에서 뻗은 수많은 가지들의 울창함 때문이다. 트럼펫 연주자의 아내인 카밀라는 기독교 신자가 신의 존재를 믿는 것처럼 자기 남편의 부정을 믿는 것인데, 때문에 남편의 연주회가 진실임을 믿지 않아 확인을 위해 온천장 연주회를 찾는다. 한편 루제나의 젊은 연인 프란티셰크는 루제나의 유명인 클리마와의 밀착된 만남을 24시간 감시하며 사랑의 집착이 키워낸 질투심에 의해 원격조정 되듯 이야기에 투입된다.

 

질투라는 인간 정신의 불모성을 위의 문장보다 잘 표현하기는 힘들 것 같다. 확인하려는 진실은 확인하려는 자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고, 질투로 인한 믿음은 혼란을 맞이한다. 세상사란 것에 작동하는 요인이란 것이 어디 한 두 가지이든가? 아주 사소한 요인도 정말 우연히 특별한 의미를 띠고 작동하여 별난 사건으로 치닫는 것이 삶의 실상이다. 야쿠프가 마지막 이별 인사를 마치고 온천장을 떠나기 전 우연히 카밀라와 마주하게 되자 낯선 아름다움을 발견하곤 자신이 알아 온 인생이란 것 밖에 감춰진 운명이 있음을 깨닫게 되듯, 카밀라 또한 야쿠프가 건넨 새로운 세계로의 떠남과 동시에 마주하게 된 발견의 이야기로부터 자신의 내부를 얽애맨 질투의 본질을 직시하게 됨으로써 자유로의 탈주가 시작된다.

 

4. 한 편의 코미디적 상상, 전체주의적 유토피아의 몽상

 

의사 슈크레타는 아기를 갖길 위해 찾아오는 여성들에게 아기를 선사한다. 아이를 갖지 못했던 여성들이 이 온천장을 찾는 것도 슈크레타의 치료법이 성공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친구 야쿠프에게 진실을 털어 놓는데, 이 구제불능의 몽상가는 자신의 번식력이 왕성한 액체를 주입함으로써 많은 여성들에게 아기들을 잉태케 한다. 세상은 작은 슈크레타들로 확산된다. 슈크레타의 우생학 프로그램은 성공적으로 세계를 자신의 정신을 계승한 인간들로 채우는 것이다. 이 유토피아적 전체주의적 몽상의 에피소드는 인간의 욕망을 조롱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 가벼움에 일말의 진지한 의도가 있는 것인가? 작가가 진정 무엇을 겨냥한 것인지 나로서는 해독해내지 못했다.

 

사실 이 소설 속 인물들 중 진정한 인생의 승자는 누구일까를 생각해보았는데, 야쿠프의 피후견인으로 온천장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올가를 주시하게 되었다. 그녀는 지나간 시절의 고통으로 자신의 박물관을 지은 야쿠프의 관대한 이타주의적 태도의 본질을 알고 있으며, 그의 박물관에 자신이 살아있는 핵심 오브제임을 제대로 통찰해내고 있다. 올가는 뭇 여인네들과 달리 그 어떤 희생제물의 역할도 당당히 거부하며, 그러한 인간들의 잔인한 의식을 거부한다. 또한 야쿠프가 보이는 자신에게 내보이지 않는 육체와 영혼을 기꺼이 자신에게 내어줄 것을 몸으로 밀어부처 야쿠프의 육체를 허물어뜨리기도 하며, 자기 주체를 적극적으로 회복한다. 그녀는 세계 내 질서, 인간들이 말하는 정의 밖에서 살고자 한다. 혐오스러운 인간들과 결단코 협력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하면서.

 

아무튼 이 소설은 통속 희극이라는 가벼운 이야기에 정말 진지함이 무한하게 채워져 있는 인간에 대한 놀라울 만한 관찰기다. 다른 지면에서 작가가 이 작품을 말했듯 지극히 무거운 문제를 지극히 가벼운 형식과 결합시키려 했던노력의 결실이라 할 것이다. 다행히도 밀란 쿤데라의 거의 모든 작품들이 국역되어 이 특출한 작가의 작품을 읽을 수 있음은 축복이다. 그의 말처럼 소설은 인간이 삶에 부대끼며 살아 갈 수 있게 해주는 마지막 보루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러한 위대한 작품의 하나이다.

 

극단까지 몰고 간 가벼움은 무시무시한 가벼움의 무거움이 되었고...”

-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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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1-20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별의 왈츠네요...예전에 작은 사이즈 하드커버로 읽은 기억이 있는데...얇지만 임팩트가 있었던 기억이 있어요. 지금은 무는 내용인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읽어야 할 작품입니다..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필리아 2023-11-20 11:03   좋아요 0 | URL
소설 제목이 이야기의 전체를 상징적으로 아우르고 있어요. 모든 이야기가 원무를 추듯 돌고 돌아 이별, 스스로 억죄고 있던 사슬로부터 벗어나 자유의 길을 떠나네요. 멋진 이야기를 쿤데라가 동시대인들을 향해 선사한 선물같습니다. Yamoo님, 댓글 고맙습니다~ :)
 
날개 절제술 트리플 21
서윤빈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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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 같이 발을 딛고 서있는 이 행성에 있는 사람들, 그들이 서로서로 맺고 있는 여러 유형의 관계방식들, 그리곤 마침내 소멸과 생성으로 순환하며 다른 무엇으로 변화해가는 세계를 생각해 본다. 이 작은 소설집의 세 단편을 읽으며 떠올랐던 흐릿한 감상이다. 수록된 작품은 날개 절제술, 리튬, 다이윗미세 편의 짧은 소설과 한 편의 에세이다. 각기 30쪽 내외의 작품으로 순식간에 읽어낼 수 있지만, 그 의미까지 단번에 이해를 허락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내 열악한 상상력 탓이겠지만, 날개를 달고 태어나는 천사 아기나, 태양계가 속한 막대나선은하의 한쪽 팔 끝에 있는 항성계에 사는 B보다는, 작은 철물점에서 고장 난 라디오를 수리하는 주인공이 있는 단편 리튬에 마음이 더 붙들렸다고 해야겠다.

 


■ 「리튬

 

리튬은 철지난 가전품 등의 수리를 하는 한 남자가 주인공이다. 소설의 도입부에 3년 만에 걸려온 딸의 전화내용을 전하는 문장이 상징적으로 이 인물의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딸은 설계도처럼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 우리의 대화는 언제나 수직을 이루는 90도였다.” 설계도와 수직의 90도는 일종의 논리어(論理言語). 결과는 무언가의 원인과 결부된다는 생각, 즉 모든 것은 규명가능하다는 인과성에 대한 믿음의 방식이다. 뜬금없이 집에 와 달라는 딸의 전화에 남자는 귤 상자를 들고 찾아간다. 딸은 귤 상자를 들고 먼저 집 안으로 쑥 들어갔다.”, 부녀의 관계가 어떠했던 것인지를 간결하게 보여준다.

 

딸 내외는 자신들의 집에 수시로 들려오는 소음에 대해 말한다. 아빠가, 장인이 이 문제를 해결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남자는 이 부탁에 따라 집안 구조를 파악하고 곳곳에 소음 측정기를 설치하고는 소음 발생 원인을 탐색한다. 남자에게 하나의 개념이 머리를 스치고, ‘공명(共鳴)’ 즉 무언가들이 진동시켜 함께 울려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것을 최초가설로 설정하고,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다가 딸아이의 서랍 속 가득한 핸드폰 더미들을 발견한다. 마침내 텅 빈 배터리가 울림통이 되어 남아있던 잔여 전력에 의해 진동하는 것이라 추정하게 된다. 그는 이를 리튬 효과라 명명하고 이 특별한 상호작용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전자 기기나 기계류는 분명 이러한 논리적 접근 방식이 문제 해결의 한 방법이 되어 줄 수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도 이처럼 논리적 탐색으로 가능한 것일까? 그는 예전 라디오 공장 운영시절 워크맨을 역설계 분석하여 새로운 개조제품을 시도했던 기억을 되살려 소음의 공명현상에 대한 역 추적을 시작한다. 그는 여러 번 바뀌는 바깥의 온도 때문에 집의 고유 진동수가 변하기 때문에 집 안의 무엇이 특별 상호작용을 만들어 낸 것이라 추정한다. 그리곤 그는 이 특별한 상호작용의 진화, 어떤 몸부림을 연구해야만 함을 안다.

 

이 분석적 탐색으로 도출해 낸 상황의 이해는 그와 딸, 그의 사업이 망하자 그를 떠나버린 아내와의 관계에 여전히 어떤 이해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 같다. 고작 우연한 오류의 반복일 뿐일까?”라고 되뇌는 목소리에서 그의 고독한 인간관계는 영원히 회복되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그는 딸의 집에서 쓰지않는 핸드폰 더미를 가지고 돌아온다. 딸에게는 전화가 오지 않는다. [...] 나는 휴대폰들을 서랍에 몽땅 쏟아 넣고, 기다린다. 평생을 그래왔던 것처럼.” 남자는 그저 기다리는 삶으로 점철(點綴)되어있다. 과연 그의 삶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을까? 분석적 탐색을 통해 알아낸 어떤 몸부림과 상호작용을 사람과의 관계 속에 실천으로 연결 짓지 못하는 것 같다. 앎과 분리된 삶, 삶의 관계 속에 녹아들지 못하는 앎이란 것, 대체 무엇 때문에 앎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 「날개 절제술

 

날개 절제술은 인간사회의 사랑의 한계에 대한, 아니 인간사회의 독특한 사랑의 실체에 대한 자기반성적 고찰이라 할까? 날개를 단 아이가 태어난다. 이 기형적 신체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아는 부모들은 아이의 날개를 절제하고 천사임을 숨긴다. 아이에게는 자기 것이란 개념이 없다. 유치원에 보내지만 아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다. 부모는 아이에게 베푸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것이 아님을 이해시키는 데 실패한다. 이기적 인간으로 성장하기를 희망하며 아이를 협력과 우정이라는 교과목은 없는차세대 경영인 학원에 보내고, 학원은 지렛대 원리가 이 사회의 모든 경쟁원리의 핵심임을 가르친다.

 

대도폐유인의(大道廢有仁義) - 자연스런 도가 무너지면 인위적으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규범이 등장하게 된다.” - 老子,道德經18장 첫 구(), 날개 절제술, 33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 모든 이를 향한 보살핌의 태도는 유치원, 학원의 가르침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리고 아이는 퇴원(退院)하고 만다. 아이가 성장하여 이윽고 도덕선생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랑을 열변하고 있을 때, 아이의 머리위에 천사의 동그란 황금색 원이 빛나기 시작한다. 아마 이 소설의 주제를 관통하는 순간의 장면일 것 같은데, 선생은 아퀴나스가 신에 대한 사랑, 인간적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을 혼용하고 있다고, 신에 대한 사랑이외의 사랑은 상호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아이는 후일 법을 공부하며 자신이 선의에 관해 오해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인간사회는 모두를 사랑하면 누구의 사랑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사랑을 위해 얼마나 많은 악의가 필요한지를 이해한 것이다. 서글픈 사랑의 드라마다. 모든 이를 위한 사랑과 보살핌이 오히려 극단적 양극화를 만들어내고, 요행이라는 나태의 세계를 야기할 뿐이라는 역설의 세계임을. 사랑을 위해 많은 악의가 필요하다는 이 소설의 패러독스 앞에서 답이 궁한 나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아무래도 수양을 조금 더 해야 할 것 같다. 신이 부재한 이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답변에 대해서.

 

■ 「다이윗미

 

단편 다이윗미는 유행하는 영상인 스터드윗미(study with me)를 차용한 제목이다. 공부하는 모습을 그저 몇 시간이고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영상처럼, ‘Die with me' 또한 인간 존재의 소멸을 관찰하는, 우주적 시선의 탐색기라 해도 될 것 같다. 화자는 자신의 고향 집에 망원경을 설치하고, 태양계가 속한 은하의 한 쪽 팔 끝에 위치한 작은 항성계에 파견되어 살아가는(혹은 죽어가는) 기술대학원에서 알게 되었던 B라는 동료의 미래를 관찰한다.

 

아마 세계란 고작 하나의 플랫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화자의 말처럼, 망원경과 물리학 지식에 따른 시간에의 접속을 통해 훤히 열린 과거와 미래를 보는 것이다. 이 우주적 시선에 의한 인간 삶의 관찰기는 위치 에너지 변화를 계산하면 B가 죽음에 가까워지는 속도를 측정할 수도 있다, 인간의 시간을 지극히 왜소하게 느끼게 하고, 인간 존재 소멸을 더욱 극명하게 체험토록 한다. 이 낯선 시간에의 체험은 언어조차 거치지 않은 순수한 마음이란 것, 물질과 분리된 문자 정보인 이 소설의 의지를 생각토록 이끈다. 아무튼 이 작품은 내겐 조금 아득한, 체감되지 못하는, 아니 이 중첩된 시간관에 적응하지 못한 아둔함으로 남았다.

 


시간의 이 마법적 체감이야말로 수많은 인간의 그 한결같은 다름에 의한 불가피한 실제의 차이의 규명이기도 할 것 같다. 어긋나고, 마주치고, 일치하는 우연의 순간들, 누군가에겐 과거인 것이, 누구에게는 현실이며, 미래일 수밖에 없는 그것, 그래서 동시성의 비동시성이라는 이 실체적 진실은 더욱 쓸쓸한 감정이 되어 다가온다. 소설가 서윤빈은 이 책의 자필서명과 함께 바라보기 잊지 않기라고 썼다. 나는 나를 볼 수가 없다. 결국 타자를 바라보는 것을 망각하지 말라는 말일 것인데, 아니 내 안의 타자까지도.  그것은 천사 아이와 철물점 남자와 B를 관찰하는 나의 시선에 함축된 무엇들일 것이다. 동의 또는 공감하지 못하는 시선도 있을 것이며, 머리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아마 나는 리튬효과를 말하는 남자의 시선에서 결여된 것에 공감했을 터이다. 나와 타자의 관계는 영원히 풀어야 할 과제로 동행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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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11-15 0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용이 범상치가 않습니다.
날개절제술이란 제목부터...
장바구니에 넣어놓고 기억해둬야겠습니다.

필리아 2023-11-15 10:10   좋아요 1 | URL
천사의 날개가 인간 세계에서는 잘라내야 할 상징입니다. 이처럼 천사 아이의 모든 인간을 향한 사랑은 자본의 세계에서는 적대시되죠. Maybe 천사도 인간 세상에서는 사랑도 배워야 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하 등등은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생략~ ^* 소설의 문체는 젊고 경쾌하답니다.
유쾌한 하루 되시기를 ~ 고맙습니다, 그레이스님 :)
 
어신漁神을 찾아서
장웨이 지음, 최창륵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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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배였다. [...] 넓은 바다 위에서 그것은 움직이는 점이자 흔들리는 점이었으며 하나의 불가사의였다. [...] 그것은 불변의 고정된 지표가 되기를 거부했으며 흐름을 멈추지 않았다. [...] 배와 움막, ... 배와 도시의 구별은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었다. [...] 이 무궁한 우주에서 인간은 결코 자신의 선택을 멈추거나 끝내서는 안 된다.” - 바닷가 호루라기중에서

 

지금 나는 명료한 듯 나있는 길을 걷는 일, 지나치게 조급해하며 앎을 추구하는 삶을 피하려는 마음이다. 벌집과도 같이 한 곳으로 집중되도록 얽히고설킨 이 도시의 굴레로부터 조금은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맞춤한 듯, 중국 생태주의 문학을 연 장웨이(張煒)의 작품집이 출간되었다. 내 마음의 평안과 모처럼의 진짜 사유의 시간이 되어 주리란 기대에 집어 들었다. 성공이다! 작가의 초,,후기의 굵직한 세 작품의 서로 다른 배경의 자연과 그 속에서 고독한 삶을 일궈나가는 인물들에 매료되었으니 말이다.

 

표제작인 《魚을 찾아서(2015)라는 중편(혹은 장편)은 대자연의 위엄과, 그것과 일체화되어가는 인간의 삶을 동화적(童話的) 분위기로 그려낸 후기의 작품이다. 그리고 푹 빠져 읽은 중편 바닷가 호루라기(1987), 비교적 초기작품으로 토속적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젊은이들의 세대 전환을 향한 충돌과 극복의 용기를 유쾌하게 그려낸 단편 원두막의 밤(1983) 세 작품으로 구성된 알찬 작품집이다. 한 작가의 초기 작품과 비교적 최근작으로 편성되어, 첫 대면하는 독자에게 접근의 폭을 넓혀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다만, 해당 작품들의 원 작품명을 밝히지 않아 중국어 원작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아쉬움이라 하겠다.

 


1. 중편 혹은 장편 바닷가 호루라기

 

책의 구성이야 어쨌든, 나는 중편 바닷가 호루라기의 힘줄 투성이 늙은이 라오진터우(老筋頭)’에 반했는데, 아마 마을로 표현되는 인간들의 세계와 이들 세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바다와 사이에 있는 해안 모래 턱 움막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란 설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자유란 무엇인지, 얼마나 힘겹게 획득되는 것인지를 지펴낸 거대한 은유이자 신화라 해도 될 것 같다.

 

생명의 반 이상을 작은 배와 나눠 가진 늙은이는 가없는 바다에서 이 작은 배에 몸을 싣고 짙푸른 바다 위에서 자유자재로 떠다닌다. 이 자유로운 유동의 물결위에서 꾸는 꿈 또한 걸작이다. 그의 배에 바퀴가 돋아나 오로지 길만 따라 앞으로 내닫는 차가 된 것이다. 그는 도무지 이 구속을 참을 수 없어 바퀴를 깨부순다. 이 감상글의 모두에 인용한 문장이 바로 이 꿈에 나타난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불변의 고정된 삶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완전한 자유를 위한 멈추지 않는 유동의 선택에 대한 묘사일 것이다.

 

그는 말한다. 참으로 길이란 사람의 사고의 흔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생각이란 곧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길 역시 마땅한 거리보다 더 많이 걷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나있는 길 위로만 걸으려 한다. 소설의 아름다움은 늙은이를 찾아오는 또 다른 늙은네와 꼬마친구 시창우(細長物), 그리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는 여인 쓰팡만이 마을의 큰일을 벗어나 굶주린 배를 움켜주고 늙은이의 말동무가 되어준다. 늙은이의 몽상은 한 편의 무릉도원이고, 이상향이며, 현실과 이상의 경계사이를 오가는 동화로 읽는 이의 마음을 그 자유의 시공 속에서 함께 거닐게 한다.

 

소설에는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도 손상이 없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지고한 사랑얘기에 실려, 그에게는 낯설지만 오래 전부터 누군가가 걸어왔던 자유의 길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던 늙은이의 과거 이야기로 꿈결같이 흐르며, 삶의 비의(秘意)가 더욱 짙게 가슴을 파고들게 한다. 재산도 마다하고 해진 옷을 입을지언정 벌집 같은 도시의 족쇄와 굴레가 싫어 사랑하는 여인 샤오홍하이(小紅孩)와 함께 도주하여 찾았던 원시림 가득한 숲 속 움막의 생활,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살아 숨 쉴 수 있었던 삶을 다시금 떠나야 했던 아내의 임신과 그녀의 죽음을 묻은 해안가 모래턱의 사연은 이미 충만된 감동을 더한다.

 

소설은 대약진운동에 대한 간접적 묘사로서, 굴껍데기로 간장을 제조하기 위해 마을의 큰 집에 주민을 모아 하나의 망상을 일사불란하게 쫓는 기상천외한 큰일로 형상화하며, 누군가에게 제자리를 지키도록 강요하는 도구인 쇠 호루라기를 목에 건 아이로 상징되는, 질서라는 굴레와 오로지 나있는 길 위로만 다닐 수 있는 마차를 모는 존재의 죽음, 그리고 마침내 이 강요된 질서의 속박을 털고 생의 진실한 욕구를 찾아 움막으로 몰려오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으로 맺는다.

 

끝내 왔구려, 자네들이 왔으니 이젠 난 떠나야겠네! 난 본디 강의 사람이요,

바다의 사람이네! [...] 작은 배는 뱃머리를 잔뜩 쳐든 채 노도와도 같은

화염 속을 헤치며 먼 항행을 시작했다.

-중편 바닷가 호루라기마지막 문장에서, 340

 

많은 사람들과 이들로 구성된 사회가 남긴 지표들, 이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규정된 세계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 진정한 자유를 향한 항해는 그리 쉬운 길이 아니다.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수많은 괴로움과 상처, 외로움을 동반하는 비장한 선택의 길이다. 라오진터우(老筋頭), 샤오홍하이의 남편 좡난(壯男)의 또다시 시작되는 자유를 향한 이 먼 항행의 장면은 감응의 격정적 떨림으로 맴돈다.


2. 장편 《魚을 찾아서

 

아마 이 작품은 동화(童話)로 집필 된 것일 수 있는데, 산 속 외딴 집, 종일 걸어도 사람과 만날 수 없는 그런 산 속 깊은 집,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소년이 살고 있다. 여든이 넘은 늙은이가 어린 시절, 그의 꿈이었던 어신을 찾아 집을 나서고 스승을 찾아 자신이 찾던 꿈의 의미를, 삶의 진실을 깨닫는다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산 속에서 물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요, 꿈속에서라도 먹는다는 것은 너무도 귀한 일인 곳이다. 때문에 만약에 두 뼘 크기의 물고기를 잡는 일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족장님에게 가져다 드려야 하는 귀한 것이다. 그러니 소년은 물론 그의 부모에게 있어서도 일생의 꿈같은 일이다.


 

제일 먼저 잡은 큰 물고기는 족장님에게 가져다 드려야 한단다나는 내키지 

않았으나 반박하지 않았다. 어떻게 반박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魚을 찾아서중에서, 39

 

큰 물고기를 잡는 일은 아버지도 이루지 못한 꿈이다. 큰 생업일수록 재주가 따라야 하고, 더구나 소질은 스승에게 배워야 하는 일이다. 말로 할 수 없는 이 재주는 각자의 마음 속, 몸과 마음이 일체화되어 터득되는 것이다, 때문에 아버지가 기회를 얻지 못했던 모든 고기잡이꾼들의 스승인 어신을 찾아 소년은 집을 떠난다. 진정한 어신은 종래 자신을 내세우지 않기에 어신을 찾는 일은 지난한 과정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마침내 소년은 수많은 산봉우리들과 산골짝을 지나 첩첩산중에서 동그란 눈이 무척 빛나는 마주보기에 겁먹을 정도의 스승을 만난다. 스승은 자신이 어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년은 그가 어신임을 느낀다. 스승의 눈이 말하는, 그 소리없는 말들을 오로지 마음속으로 추측하며, 그 숨겨진 지혜에 조금씩 가까이 다가간다. 너는 왜 물고기를 잡으려 하느냐? 소년은 스스로 물음을 던진다. 나는 큰 물고기가 많이 필요해. 많을수록 좋아! 비길 수 없는 유일한 어신이 되고 싶다.” 스승은 말한다. 그리 많은 물고기를 잡을 생각도 없다. 먹고 싶을 때가 되어 한 마리씩 잡으면 되지.”

 

스승은 지닌 재주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재주를 감추는 법이며, 그래야 삶이 무탈하다고 가르친다. 그리고는 자신은 자맥질을 할 줄 모르는 반쪽 물고기잡이라 말한다. 물이 그리 많지 않은 첩첩산중의 물고기 잡이는 물웅덩이, 작은 시냇물에서 고기를 잡는 한수(旱手)라고. 어신은 한수와 수수(水手)의 재주를 모두 지닌 물고기잡이라고 알려준다.

 

재주란 말이다, 그냥 남에게서 얻는 것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도 찾아내야 하는 것이란다. 매번 조금씩 찾아내서는 조금씩 내려놓곤 해야 하는 것이란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야말로 진정 참재주인 것이지...” -107

 

왜 애써 찾아낸 다음에 내려놓아야 하는 것일까? 그래도 내려놓아야 한다고 스승은 말한다. 어떤 재주는 남겨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고. 한수인 스승은 아이에게 자신의 재주에 대해, 어신의 아들로 성장하며 겪었던 곡절들을 통해 삶과 배움의 지혜를 전달한다. 수수였던 마을의 경쟁자에 의해 죽은 한수였던 아버지의 사연, 수수어신의 막내딸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가 애틋하게 흐른다. 원수의 딸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야기, 이젠 수수이자 한수로서의 재주까지 모두 지닌 그녀가 바로 어신임을. 노쇠한 스승의 유언에 따라 소년은 어신인 노파를 찾아 다시금 미지의 길을 걷는다.

 

소년은 마침내 사람은 잘 몰라도 괜찮은 것이 있다는 것, 결코 조급함은 지혜가 아니라는 것, 큰 물고기도 큰 기와집도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온몸과 마음으로 깨우쳐나간다. 이 소설을 읽으며 다가오는 것들은 물론 삶의 겸허한 지혜들이지만, 이보다 더 자연스레 다가오는 것은 인간의 정념들이다. 타인의 마음을 여는 것, 그리고 그 마음과 교감하는 것, 존경과 겸허가 무엇인지, 또한 인간의 진정한 성장이란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것일 게다. 특히 장웨이의 소설에서 주목되는 것은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이란 개념을 떨어버리고 이 같은 새로운 정서로 만들어지는 소규모 공동체의 구성이다. 이 작품 《魚을 찾아서, 바닷가 호루라기의 마지막 장면은 새롭게 형성된 일종의 가족 공동체의 탄생이다. 새로이 구성된 그들의 연대는 그야말로 이상적 지대로 구현되는데, 이것을 사람들은 생태주의적 유토피아라 부르는 것일 테다. 이 지점만으로도 또 하나의 감상이나 유토피아론()이 출현 할 수 있을 것 같다.

 

3. 단편 원두막의 밤

 

작가의 초기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1970년대 초 문화대혁명기의 부조리를 유쾌하게 비판한 농촌무대의 소설이다. 국가주의적 운동이란 것들의 전체주의적 제도나 질서란 사실 하나의 코미디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질서 내에 있는 자들이야 외부의 시선을 지닐 수 없으니 자신들의 행위와 언어가 얼마나 유치하고 저열한지 모를테니 말이다.

 

이 소설에는 옆구리에 부추 칼을 차고 다니며 사람들을 위협하여 갈취하며 사는 라오훈훈(老醺醺)’이라는 늙은 건달이 등장한다. 문화대혁명이란 가난하고 고생스럽던 생활을 되새겨 몸소 체험하는 생활을 통해 경제를 부흥시키자는 일종의 생활운동이다. 따라서 억고(憶苦)’라는 스스로 고통을 기억하기 위한 실천활동이 있었는데, 라오훈훈(老醺醺)이란 자는 남의 것을 빼앗아 먹고사는 건달이니 재산이랄 것이 없다. 하여 몸 하나 겨우 눕힐 만한 움막같은 것에 새우처럼 누워 잘 도리밖에 없는 인간이다. 당 관리가 현장 시찰을 돌던 중 라오훈훈의 이 모습을 보고는 계급 각오가 매우 높은 사람이라고 칭송하였다는 것이다. 한번 웃고 넘어가자.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에 대해서 누구도 입을 벙긋하지 못하는데, 이를 비판하면 당 정책을 비난하는 꼴이 되고, 또한 건달 라오훈훈의 보복(폭력)이 두렵기 때문이다.

 

당시 밭을 국가가 농민들에게 직접 배분하였는데, 1/3은 농민의 자유농사고, 2/3는 책임경작이라 하여 국가에 지정된 소출을 바쳐야하는 땅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2/3인 책임 경작지 때문에 사달이 나는 것인데, 라오훈훈같은 건달들이나 도적들은 남의 경작지 과실물을 빼앗는 것이 살길이었던 것이다. 소설에서 라오더(老得)라는 농민시인은 이러한 약탈자들을 어두운 것들이라 부르는데, 국가는 이 어두운 것들의 빈곤한 삶을 억고의 실천으로 칭송하고 있으니, 정작 고된 경작일로 땀을 흘리는 농부들에게는 기가 막힌 일이다. 때문에 농부들은 원두막을 짓고 자신들의 경작지를 약탈하려는 인간들의 동향을 감시한다.

 

굵은 땀방울은 땅을 적시고/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맞이하였네./ 밭을 지켜 

야경을 서는 사람들은 용감도 하여라./ 신성한 노동의 성과를 지켜냈다네!...”

- 단편 원두막의 밤중에서

 

배경 설명이 길어졌는데, 사실 이 웃지못할 사연으로 인해 벌어지는 한 일화가 소설이다. 강변의 비옥한 땅에 오이, 부추 등 채소와 포도, 무화과를 경작하는 취유전(曲有振)이라는 농부는 라오훈훈의 뻔뻔함에 치를 떨면서도 그 앞에서는 절절매며, 좋은 것이 좋다라며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는 늙은이다. 한편 그의 딸 다전쯔(大貞子)라는 젊은 처자는 부당함과 약탈에 당당히 맞선다. 취유전은 딸의 이러한 행동이 라오훈훈과 갈등을 초래할까 노심초사하고, 원두막 야경을 하겠다는 다전쯔를 막아선다. 결국 취유전은 라오훈훈이 경작을 하지않아 폐허가 된 경작지와 취유전 자신의 알찬 과실이 열린 경작지를 공동경작지로 하자며 밀어붙이자, 그만 병이 나고 만다.

 

여전사가 된 다전쯔는 원두막 야경에 나서며, 그녀의 남자 동지들과 함께 라오훈훈의 사주를 받은 도적떼들과 한 판 승부가 펼쳐진다. 성실한 농민의 노동을 찬양하고, 늙은 세대의 불의에 대한 무기력과 순응을 떨쳐내고, 당당히 맞선 새로운 세대로의 사회역량 전환을 칭송하는 일종의 계몽 소설이라 하겠다. 시대감각이 우리와 꽤나 멀리 떨어진 작품이라는 인상이다. 장웨이의 이 초기작은 익살과 풍자를 버무려 은근한 비판의 목소리를 실어내고는 있지만 구수한 토속적 향취로 그의 자연 친화적 지향의 싹이 아주 조금 올라온 소설 같다. 불과 3년 뒤에 발표된 바닷가 호루라기를 쓴 작가와 동일한 인물이라는 점에 내심 놀랄 뿐이다. 아무튼 흥겨운 한편, 몽상의 평온함, 나름 삶의 선택으로서 자유에 대한 세련된 사유를 읽을 수 있는 작품집이라 하여도 될 것 같다. 근래 출판사들의 편집 경향과 달리 촘촘하게 편집, 구성된 이 소설집의 드러나지 않는 내실성에 고마움을 표한다. 오랜만에 좋은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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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기술 밀란 쿤데라 전집 11
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 민음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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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존재의 부분을 찾아내려 하지 않는 소설은 부도덕한 소설이다. 앎이야말로 소설의 유일한 모럴(morals)인 것이다.” -15

 

 

체코슬로바키아 사람이지만 역사적 뿌리가 천박한 단어라며, ‘보헤미아인으로 자처했던 농담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인 밀란 쿤데라의 소설론(小說論)이다. 6부로 구성되었으나 역자(譯者)의 요구에 의해 쿤데라의 이스라엘 문학상 수상연설7부로 추가되어, 밀란 쿤데라가 숙명처럼 여겼던 ‘7’이라는 숫자를 완성해, 이 위대한 소설가에게 경의를 표하려 했던 듯싶다. 성급한 독자는 책의 끝에 수록된 이 응축된 연설문(예루살렘 연설)에서 쿤데라의 소설문학에 대한 일관된 의지를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히 그의 소설론이 집약된 명문장이기에 역자의 구색 맞추기 편집은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 다소 긴 문장이지만 세계와 인간을 정의하는 데 있어 소설의 입지 혹은 지위에 대한 그의 신념을 읽을 수 있기에 인용해 본다.

 

한 세계의 정신이란 예술, 특히 소설에 대한 고려를 빠뜨린 채로 오로지 사상과 이론 개념들에 의해서만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세기 기차를 발명해냈고, 헤겔은 보편적 역사 정신 자체를 포착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플로베르는 멍청함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감히 이것이야말로 과학적 이성에 그토록 자부심을 지녔던 한 세기의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221

 

데카르트가 문을 연 근대 이후, 잘난 척하며 마치 과학과 철학이 시대정신을 해석하고 확신했다고 우쭐거렸지만, 근대성이라는 이 진보는 오히려 인간의 시선을 축소하고 멍청함만을 진보시켰다는 것이다. 소설은 과학과 이론이 감지하지 못한 인간 정신을 발견하고 그것의 이유에 대해 물음을 제기할 수 있는 유일한 범주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소설의 소명에 대한 이 주장은 밀란 쿤데라의 초지일관한 소설의 세계-()’ 역할이고 소임이며 존재 이유이다. 세계를 단순히 기술적이고 수학적 개발의 대상으로 축소하여 인간의 삶으로부터 구체적 세계를 제거해버려 단편성만을 보게 한 과학의 합리주의적 이성에도 불구하고, 근대는 이것만으로 이해될 수 는 없는 것이며, 소설은 바로 이것이 배제한 인간 삶의 가능성에 눈을 돌려 동굴에 갇힌 인간을 넒은 지평으로 끌어낸 것이 바로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의 시작인 1부는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이다. 신이 선악과 가치질서를 규정하던 이 세계를 떠나자 돈키호테는 집을 떠나 드넓은 광야로 나섰다. 세계를 과학적 이성으로, 유일한 절대 진리를 선언하던 때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세계는 절대진리가 아니라 서로 모순되는 상대적 진실들의 더미와 맞서야 함을 알았으며, 불확실함의 지혜라는 유일한 확실성으로 인간 존재를 망각하기 시작한 근대성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시대의 이성이 인간 존재를 망각했을 때, 소설은 모험하는 인간을 통해 근대적 인간이라 선언된 것과는 다른 상이한 존재를 찾아 나선 것이다. 소설은 심판관이 부재하는 세계에서 상대적이며 애매해지고, 흩어진 진실들을 찾는 모험을 시도한 것이다. 밀란 쿤데라, 자신의 소설은 근대 소설의 시작을 알린 세르반테스, 다시 말해 유럽 소설문학의 적장자임을, 자신이 바로 그 후계자임을 선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는 일종의 소설의 역사, 그 계보를 읊는다. 드넓은 지평(인간의 무수한 실존적 가능성)에로의 모험은 발자크에 이르러 경찰, 법률, 군대, 국가와 같은 사회제도라는 건축물들의 배후로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플로베르의 보바리에 이르면, 집 마당의 울타리만큼 좁아지고, 돈키호테의 모험은 감당할 수 없는 권태 속에 꿈과 몽상에 자리를 넘겨줬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시금 사회라는 역사의 힘에 인간 장악을 넘기면서 그 신통력을 잃었을 때, 돈키호테의 세() 세기에 걸친 여행은 카프카의 측량기사 K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나타나, 모험은 고작 서류상의 하자로 관리와 말다툼하는 모험으로 정말 하찮은 것으로 축소되었음을 주장한다. 밀란 쿤데라는 세르반테스에서 발자크를 지나, 카프카로 이어지고, 유럽소설 문학의 정통 계보의 후예로서 밀란 쿤데라, 바로 자신의 소설이 있다는 간접적 선언일 것이다.

 

근대의 이성이란 것이 과학과 합리주의를 내세우며, 진보를 떠들 때, 소설가들은 바로 그 이성이 계승된 인간의 가치들을 하나씩 좀먹어 들어가는 역설적 세계를 발견하고, 규명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 공인된 가치 체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극단의 세계는 하셰크나 카프카가 발견한 인간과 그리 다르지 않다, 오히려 그네들이 상상한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오늘의 그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영혼하고만 싸워야했던 평화로운 시기는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 시대를 마지막으로 끝났다고 선언한다. 그리곤 하셰크, 카프카, 무질, 브로흐는 영혼을 벗어난 바깥, 외부에서 온 힘과 마주한 완전히 새로운 모험에 나서야 했다고 지적한다.

 

이제 인간은 비인격적이어서 다스릴 수도, 예측 할 수도. 이해할 수 도 없는 외부의 힘에 장악되어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그것을 느끼고 고통에 방황한다. 그래서 이 인간들이 처한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케 한다. 현대사회의 특성은 이처럼 세계 모든 것이 축소되는, 사회적 기능으로 인간의 삶을 축소하고, 민족의 역사는 몇 개의 사건으로 축소되며, 그마저도 편향된 해석으로 축소되는, 축소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방이 깜깜해지고 존재가 망각된 세계이다. 소설은 이 때문에 세르반테스가 근대 이성으로 인한 존재 망각에서 인간을 건져 올리려 했던 시도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필요한 것이 된다. 쿤데라는 그래서 말한다. 나는 세르반테스의 *절하(切下)된 유산 말고는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세르반테스 소설의 작품적 위상 또는 가치를 낮추어 보는시선에 대항한 표현)

 

2소설의 기술에 관한 대담4예술의 구성에 관한 대담은 쿤데라의 소설 작품을 기반으로 한 소설론에 대한 대담이고, 6소설에 관한 내 미학의 열쇠 어()은 그의 각 작품상의 키워드(핵심 주제어 및 주인공의 상징적 약호 등)의 사전(辭典)적 기능으로서 일종의 미학적 진술과 작품의 번역 및 출간에 대한 해명과 소신이라 할 수 있다. 특히 2부에서는 소설이란, 자아의 수수께끼에 대한 관심이라며, 나는 무엇에 의해 포착될 수 있는 가에 대한 물음으로서 소설 역사의 시대구분이란 이 물음에 관한 상이한 대답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초기에는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이 행동과 모험뿐이었으며, 디드로에 이르러 행위와 자아의 간극, 즉 행동으로부터 인간을 포착할 수 없음에 대한 고민으로 내면의 삶을 탐색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인간 내면적 탐구는 그 극점인 프루스트와 조이스에서 정점을 이루고 불충분한 추구로 막을 내리지만, 자아를 생각하는 새로운 방식을 발견한 카프카를 통해 새 지향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판단한다. 소송의 요제프 K, ()의 측량기사 K는 개별적 존재로 규정될 수 없는 인물들로 이름, 외모, 버릇이나 행위, 하물며 자유로운 영역에서조차 제한되어 있는 존재로써 현재의 상황만을 빙빙 도는, 자신들의 내면적 삶은 모조리 자신들을 옭아맨 상황에 휩쓸려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프루스트의 경탄으로서의 내면적 세계와 달리 카프카의 내면세계에는 이렇다 할 내적 동기도 없으며, 그 동기에 관심조차 발견 할 수 없다. 외부적 결정이 압도적인 것이 되어버린 세계이기에 남아있는 가능성이란 어떤 것인지를 찾는 인간이 출현한 것이다. 현대적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아마 밀란 쿤데라 자신이 카프카의 후예, 세르반테스라는 유럽 소설 문학을 잇는 적통자임을 확인하기라도 하는 듯, 이 세계에는 역사 기술을 하는 전문가가 따로 있는데, 소설이 역사에 대해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라는 물음에 자신의 소설은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고, 특정한 시기의 사회를 묘사하는 역사적 실제를 말하는 부류의 소설이 아님을 강론한다. 그러면서 소설은 인물들의 실존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정황으로서 역사를 말하는 것이며,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이 각기 다른 시대를 통해 사라져가는 가치훼손의 역사를 말하는 것과 같이, 인간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발생시키는 실존적 상황으로서 역사를 말한다고 설명한다. 즉 인간 실존의 가능성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변화된 역사의 상황에 따라 발견되지 못했던 새로운 인간을, 낯설지만 현재하는 인간을 찾아내고 세상에 묻는 것이다.

 

5저 뒤쪽 어디에라고 명명된 논설은 현대사회 속에서의 인간 실존 가능성의 한 발견으로서 카프카를 말하고 있는데, 카프카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지녔던 통찰이 인간이 처한 상황에 대한 예견적 발견이었기에 오늘의 독자들에게 가장 친근하고, 매력적인 글이 될 것 같다. 우리는 카프카의 작품은 단 번에 이거 카프카 아니에요? 혹은 카프카적인데. 라고 말하곤 한다. 카프카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보이지 않는 미로의 성격을 가진 권력과 대결이 있으며, 실존 자체가 하나의 착오인 것으로 그려지며, 부조리함을 참을 수 없어 자신이 처한 고통을 합리화하고자 벌이 잘못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아이러니가 있는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측량기사 K를 떠올려보자. 그는 관련된 모든 행정관청들이 시효가 지나 까맣게 잊어버린 명령이 관료적 착오에 의한 사소한 장난으로 보내진 초청장에 의해 성으로 간 것이다. 결국 측량기사 K는 실존 자체가 하나의 착오이고, 착오 상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의 사회활동은 거의 모두 관료화되어 있으며, 제도들 또한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로 바뀌어 있다. 이렇게 관료화된 사회의 권력은 점진적으로 그 자체가 절대적이고 신격화되는 경향이다. K처럼 개인은 원인과 동기를 어디서도 찾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저질러지지도 않은 죄로 벌 앞에 선 요제프 K처럼, 자신의 생애와 과거를 면밀히 검토해보는 것이나, 마침내 스스로 죄인으로 만드는 기계가 작동하게 하고, 죄를 찾아내는 것이 바로 현대라는 역사의 시간 속 인간의 가능성으로서 양태이다. 즉 카프카의 세계는 인간과 세계가 맺는 원초적 가능성, 인간을 영원히 따라다닐 수 있는 가능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카프카 세계의 또 다른 특징은 외로움의 저주라 지적한다. 즉 현대의 인간에게 닥친 가능성은 내면적 침해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제프 K나 그레고르 잠자 모두 침대라는 내적 공간을 침해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혼자라고 느낄 수 없는, 더구나 이들은 모두 명령과 규율에 복종하여야 하는 존재의 세계 속에 있다. 즉 근원적 존재방식이 하나의 관료화된 인간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거대한 일부밖에 보지 못하고, 목적과 전망을 보지 못한다. 복종과 기계와 추상의 세계에서 사는 관료화된 현대적 인간에게 모험이란 고작 관청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이 유일한 존재이다. 이 길고 긴 소설론은 결국 인간의 실존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 소설의 본질적 소명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세계는 그 속도를 더욱 높이며 과학기술의 진보, 합리주의 이성을 부르짖는다. 그리고 모든 정보와 이야기들은 매스미디어의 수중에 장악되어 통합과 획일화로 치닫는다. 이 획일화는 인간의 시선을 극단적으로 협소하게 만들고, 급기야 단순하고 상투적인 똑 같은 내용들만이 맴돌게 된다. 설혹 정치적 상이함을 말할지라도 이러한 표면적 상이함의 이면에는 동일한 정신이 군림하고 있을 뿐이다. 즉 감추어진 이면인 시대정신이라는 것의 똑 같은 어휘와 똑 같은 예술과 취향, 똑 같은 형태, 똑같은 문체, 중요한 것과 시시한 것을 가리는 기준마저도 똑 같은 것만이 떠돈다. 복잡한 인간의 정신을 말하는 소설조차 이에 휩싸이는 양상을 보인다. 때문에 한국 소설 문학에도 성급한 대답들의 시끄러움들로 점점 진실이 들리지 않는 지경이다.

 

쿤데라의 비판처럼 소설 아닌 소설의 무늬를 뒤집어 쓴 것들이 우리들의 지평에서 과거를 몰아내고 시간을 현재의 순간만으로 축소시켜, 현재에 매몰된 동일성의 문학을 쳇바퀴 돌 듯 양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미래와 조화를 이루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미래문학, SF문학이나 전위문학이 유행처럼 쏟아지고 있다. 물론 이들은 용감하고 어렵고 고무적인 창조 작업이라 주장하겠지만, 시대정신이라는 지배적 권력에 토대를 두고 미래가 자신들을 정당화해주리라는 확신을 은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가지고 논다는 것은 강한 자에 대한 비열한 아첨임을 부정할 수 없다. 미래는 언제나 현재보다 강하다는 이들의 숨겨진 기반 논리는 수구적인 나쁜 의지가 아닐 수 없다.

 

요즈음 한국 소설문학에서는 이 엄청난 풍파를 겪는 사회로 인해 돌연히 그 실존적 의미를 달리하게 되는 인간의 가능성들을 생산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 소설에는 이러한 발견의 성찰이 없어 보인다. 이 세계와 복잡해진 인간의 정신은 풀어야 할 대상, 즉 앎의 열정을 요구하는 대상이다. 현실에서 너무 어처구니없는 별난 실존 가능성이 현재적으로 펼쳐져 소설이 말을 잊은 것인가? 엄청난 비극이 발생했는데 웃게 만드는 것, 이 재미도 위안도 없는 웃음을 만들어내는 카프카적인 한국의 소설가를 상상해 본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작품에 들어가기 전, 혹은 다시 읽어보려는 모든 이들에게 이 소설론은 어마어마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 같다. 아니 왜 소설 문학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소설은 무엇을 써야하는 것인지에 대한 거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이 적어도 삶의 낭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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