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위안 -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청미래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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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으로 상처 난 마음을 어르고 달래서 평점심을 되찾게 하는 것을 위로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임시변통의 수완으로서 위무는 그리 달갑게 여겨지지 않는다. 살아가는 데 있어 무수한 고통의 형태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그 순간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에서이다. 그 다양한 형상을 하고 다가오는 고통이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그것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이해하여야 하는 것인지를 깨우치는 것이 진정한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라는 것이다. 그래야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다시 마주하게 될 고통에 대해서 조금은 나은 관점을, 너그러운 포용의 여유를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이 책은 어떤 획기적이고 단순 명쾌한 위로의 방법을 제시하는 따위의 장밋빛 미사여구가 아니다. 다친 마음을 토닥이며 친절한 연민을 보내며 쓰다듬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 인간 존재가 마주하는 고통에 대한 해석을, 인류 사상의 축을 이루는 철학자들의 삶과 글을 통해 근원적 위로로써 건네준다. 그것은 우리를 비난하고 소외시키는 것들이며, 원인을 미처 알지 못해 성취되지 않는 욕망 충동의 실체이고, 현실과 희망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좌절이며, 평범성에 부착된 세상의 부적절함의 낙인이고, 삶의 본질에서 오는 낙심과 슬픔이며, 수없이 다가오는 번민과 절망과 비탄이라는 삶의 곤혹스러운 감정들의 의미이다.

 

소크라테스로부터 에피쿠로스와 몽테뉴를 거쳐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이르기까지 그들 철학자는 인간 존재가 부딪치는 이러한 고통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을까? 그것이 삶에 있어 대체 어떤 무엇일까를 알랭 드 보통은 그 익숙한 사상가들의 친숙한 글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유려하게 엮어내어, 고작 지식의 창고에 축적되어 그 진정한 의미를 삶의 현장에 불러낼 줄 몰랐던 멍청함에서 깨어나게 돕는다. 여섯 명 철인(哲人)의 주저(主著)를 중심으로 인기와 가난과 좌절, 부적절성, 상심, 어려움의 여섯 고통의 실체를 풀어, 애면글면하는 우리네 삶을 한 차원 승화시킬 수 있는 단계로 이끈다. 곰팡내 나는 지식이 아니라 삶의 실천적 지혜로서의 앎의 지대로, 철학이 생의 현장으로 나와 인간 존재의 삶 그 자체를 위로한다.

 


첫 번 재 마주하는 것은 다른 인간의 시선에 붙들려 그들이 나를 어떤 존재로 받아들일지 노심초사함으로써 외면당하거나 무시되거나 부정되었을 때 다가오는 고통이다. 아마 이러한 고통을 가장 극명하게 인식했던 이로서 소크라테스를 호명하는 것은 타당할 것이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사회적 기틀을 깨뜨렸으며, 젊은이들을 아버지에게 대들게 만든 괴상하고 사악한 인간이라고 고발당하여 독배를 들어야 했으니 말이다. 끝까지 이성적으로 남을 수 있는 신념을 지녔던 철학자가 사유없는 직관에 의존하는 어리석은 시민들의 질투와 염세적 비난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았을 때, 나라면 과연 어떤 행동을 보였을까? 아마 극심한 분노와 부정의(不正義)한 인간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고통스러워했을 것 같다.

 

그러나 모두가 더불어 사는 인간 세계에 산다는 것은 자신의 실제와 다른 사람의 평가와의 간극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가혹한 적들은 힘있는 자리에 올라 무고한 철학자에게 불공평한 혐오를 쏟아 붓기 일쑤다. 정의(正義)는 수시로 왜곡되어 그럴듯하게 위장되고 뒤틀려 대중을 편견과 충동에 사로잡히게 한다. 최근 수년 간 벌어진 한국의 정치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의를 실천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인간들의 손아귀에 한 무고한 철학자가 쓰러져야 했다. 다수의 미움을 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중으로부터, 다수로부터 외면받는 것이 오류와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을 이 고대의 사건은 생생하게 보여준다. 폭넓게 믿어지거나 매도당하느냐는 하나의 관념이나 행동의 옳고 그름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편견과 질투가 사라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부당함에서 비롯된 고통은 기다려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죽고 그를 고발한 3(시인 멜레토스, 정치인 아니토스, 웅변가 리콘), 멜레토스는 사형에 나머지 둘은 유형에 처해졌으며,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중심에 동상이 세워졌다. 고차적 정의(定義)를 즉각 구분하는 일은 그리 간단하게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적 인내를 필요로 하는 숙고의 과정을 요하는 일이 너무도 간단하게 처리되었다. 오늘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받는 관행이나 관념을 맹목적으로 따르려는 무기력한 성향이 아니라, 이에 맞서는 이성적 균형을 취할 수 있는 지혜임을 한 위대한 철학자의 죽음으로부터 배운다. 책의 이 첫 장은 지적 회의(懷疑)에 대한 빛나는 초대장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이처럼 비난에 처했을 때 흔히 보이는 병적 흥분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의 확신으로 남을 수 있는 신념이었다. 그로부터 1세기 후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에게 철학의 임무는 인간 존재에게 수시로 침몰하는 우울과 욕망의 충동에 대한 해석이었으며, 행복추구에 대한 돌봄이었다. 고통을 합리적으로 조절함으로써 욕망을 치유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 그는 이를 쾌락이라 보았다. 그는 이 쾌락을 인간의 일생을 행복하게 해주는 지혜로서 우정과 자유와 사색, 세 가지를 꼽았다. 정치적 권력도 아니고, 사회적 명예나 경제적 부()도 아니었다. 소박한 희열, 친구와의 대화, 오후의 햇살, 깨끗한 집, 갓 구운 빵에 치즈를 바르는 행위에 정성을 쏟는 삶이었다. 오늘 우리네 세상에는 사치스러운 생산품과 비용이 많이 드는 생활환경을 선택하도록 유혹하는 이미지가 넘쳐흐르며, 성숙한 자기인식과 소박함에 대한 존중은 사라져버렸다. 불필요한 욕망으로 얼마나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은가? 과연 꼭 필요한 물질적 욕구인지, 그것으로 만족되는 내면의 충동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볼 것이다. 에피쿠로스가 실천했던 소박함을 믿는다면 아마 많은 불행들이 사라질 것이다.

 

책의 세 번째인 좌절한 존재를 위한 위로의 철학자는 스토아 철학자인 세네카다. 나는 세네카의 숙명론을 지지하는 알랭 드 보통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세네카를 비롯한 스토아주의자들의 질서 순응적 도덕관과 타자 외면의 논리에 혐오를 느낀다. 책의 저자는 멍에에 저항할 때보다 순응 할 때 더 다치는 멍에란 없으며, 숙명과 자신의 느슨한 관계를 적절히 확보함으로써 자유를 증대시킬 수 있다고 제한된 자유라도 받아들이는 자의 태도에 따라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며 세네카에 동조한다. 변화 불가능한 현실은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라는 것이다. 인간의 조건은 외부 환경에 굴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세네카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마차와 마차에 쇠줄로 매여 있는 개의 비유를 든다. 마차가 진행하는 방향과 일치하면 개는 쇠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 만일 마차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으면 쇠줄에 목이 당겨 개는 고통을 느껴야 한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 질서가, 권력이 요구하는 대로 따르면 쇠줄만큼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실이라는 주어진 숙명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쇠줄만큼의 자유? 목줄이 매여 있는 자유? 대체 이러한 순응성과 굴종의 자유를 누가 자유라 부른단 말인가? 삶의 단편들을 놓고 흐느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기꺼운 마음으로 숙명에 복종하라는 위로는 내겐 위로가 아니라 가장 잔인한 분노를 야기할 뿐이다. 로마의 거부이자 네로의 최측근 정치인이었던 자의 기회주의적 숙명론은 시대착오적 인용이라 봐야 할 것 같다. 그 무엇으로 수식해도, 설혹 운명의 여신은 절대로 도덕적 재판관이 아니라는 말로도 굴복할 수 없다. 비판으로 지면을 낭비하는 수고는 여기서 멈춰야겠다.

 

출처책 354쪽 부분 발췌


이 책의 견해에서 내 마음에 반향을 준 것은 몽테뉴와 니체를 통한 존재의 위무였다. 반은 지혜롭고 반은 멍청이 같은 삶의 방식으로도 여전히 적절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케 하는 몽테뉴와, 인간의 삶에서 긍정적인 요소들과 부정적인 요소들, 이를테면 완성과 어려움의 상호 의존성을 이끌어낸 니체의 해설은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삶을 완성된 삶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고통에 대한 인식을 조금은 수정해준다. 물론 사랑으로 인한 슬픔의 치유에 있어 철학자들 중에 단연 최고라는 쇼펜하우어의 생에 대한 의지(Wille zum Leben, will-to-life)’, 인간 존재의 내부에 고유한, 살아남고 싶고, 번식하고 싶어 하는 본능적 욕구라는 정의를 기반으로 한, <쇼펜하우어 해설을 곁들인 현대인의 러브 스토리 한 토막>은 이 염세적 철학자의 비통함을 쾌활함의 역설로 안내하기도 한다.

 

내가 몽테뉴에 제대로 빠져든 것은 아마도 인간 참모습의 대부분을 배제해버린 초상화를 대신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데 관심을 집중했던, 소탈한 자기 공개의 내재된 긴장의 해방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정한 지혜는 속된 자아와의 조화를 필요로 한다.”는 말처럼, 자신을 짓누르는 억압적 관념들, 약점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얼마간의 가벼움의 철학에 대한 각성이었다고 하겠다. 더구나 그가 보이는 순수한 지적 겸손은 그 어떤 고매한 사상보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 영혼에 혹여 잔존하고 있을 지적 오만을 쓸어낼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수상록(Esse)을 새로운 판본으로 다시 구입해야겠다고 생각하게 할 정도였으니, 삶에서 간과하고 있는 것들을 천천히 읽어내야 할 것 같다. 새롭게 받아들여야 할 인간 조건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뿌리들을 모조리 잘라버리는 것은 동시에 한 참 뒤 그 뿌리에서 

자라날 식물 줄기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질식 시켜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선악을 넘어서에서

 

니체가 이해한 고통, 즉 삶의 필수적 요소로서, 다시 말해 삶의 완성을 위한 절대 요소로서 고통을 설명하는 알랭 드 보통의 스위스 남동부 엥가딘 지역 작은 마을, 해발 1800미터 질스-마리아에서의 니체의 삶이 의미했던 것과 교통하며 빚어내는 그의 철학 정신의 비범한 옹호는 그야말로 절창이다. 질스-마리아의 집에서 가까운 코바치 봉을 올라 그 엄청난 높이가 호흡을 멎게 하지만, 오히려 의기양양해진 정신과 내부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순진무구한 웃음은 고통이란 부정성이 삶의 긍정적 요소와 어떻게 상호의존을 맺고 있는지 열 문장의 사변보다 깊은 감응과 이해를 가져다준다.

 

완성된 삶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태도에 달려있음을, 범접할 수 없는 정적이 감도는 고산을 오르내리다 보면 그 지고한 정신, 세상의 지붕까지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은 어떤 충만함으로 마음이 가득 채워진 느낌을 갖게 된다. 지식으로서의 철학, 고매하고 오만한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동행 지혜로서 철학을 읽게 된다. 삶의 위안이란 아마 이런 것이어야 할 테다. 순간의 자기연민과 위무가 아니라 마주하게 된 좌절과 번민과 분노의 고통이 삶에서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임을. 모처럼 마음이 평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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