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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기술 ㅣ 밀란 쿤데라 전집 11
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 민음사 / 2013년 1월
평점 :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존재의 부분을 찾아내려 하지 않는 소설은 부도덕한 소설이다. 앎이야말로 소설의 유일한 모럴(morals)인 것이다.” -15쪽
체코슬로바키아 사람이지만 역사적 뿌리가 천박한 단어라며, ‘보헤미아’인으로 자처했던 『농담』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인 밀란 쿤데라의 소설론(小說論)이다. 총 6부로 구성되었으나 역자(譯者)의 요구에 의해 쿤데라의 「이스라엘 문학상 수상연설」이 7부로 추가되어, 밀란 쿤데라가 숙명처럼 여겼던 ‘7’이라는 숫자를 완성해, 이 위대한 소설가에게 경의를 표하려 했던 듯싶다. 성급한 독자는 책의 끝에 수록된 이 응축된 연설문(「예루살렘 연설」)에서 쿤데라의 소설문학에 대한 일관된 의지를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히 그의 소설론이 집약된 명문장이기에 역자의 구색 맞추기 편집은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 다소 긴 문장이지만 세계와 인간을 정의하는 데 있어 소설의 입지 혹은 지위에 대한 그의 신념을 읽을 수 있기에 인용해 본다.
“한 세계의 정신이란 예술, 특히 소설에 대한 고려를 빠뜨린 채로 오로지 사상과 이론 개념들에 의해서만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세기 기차를 발명해냈고, 헤겔은 보편적 역사 정신 자체를 포착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플로베르는 멍청함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감히 이것이야말로 과학적 이성에 그토록 자부심을 지녔던 한 세기의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221쪽
데카르트가 문을 연 근대 이후, 잘난 척하며 마치 과학과 철학이 시대정신을 해석하고 확신했다고 우쭐거렸지만, 근대성이라는 이 진보는 오히려 인간의 시선을 축소하고 멍청함만을 진보시켰다는 것이다. 소설은 과학과 이론이 감지하지 못한 인간 정신을 발견하고 그것의 이유에 대해 물음을 제기할 수 있는 유일한 범주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소설의 소명에 대한 이 주장은 밀란 쿤데라의 초지일관한 소설의 ‘세계-내(內)’ 역할이고 소임이며 존재 이유이다. 세계를 단순히 기술적이고 수학적 개발의 대상으로 축소하여 인간의 삶으로부터 구체적 세계를 제거해버려 단편성만을 보게 한 과학의 합리주의적 이성에도 불구하고, 근대는 이것만으로 이해될 수 는 없는 것이며, 소설은 바로 이것이 배제한 인간 삶의 가능성에 눈을 돌려 동굴에 갇힌 인간을 넒은 지평으로 끌어낸 것이 바로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의 시작인 1부는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이다. 신이 선악과 가치질서를 규정하던 이 세계를 떠나자 돈키호테는 집을 떠나 드넓은 광야로 나섰다. 세계를 과학적 이성으로, 유일한 절대 진리를 선언하던 때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세계는 절대진리가 아니라 서로 모순되는 상대적 진실들의 더미와 맞서야 함을 알았으며, 불확실함의 지혜라는 유일한 확실성으로 인간 존재를 망각하기 시작한 근대성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시대의 이성이 인간 존재를 망각했을 때, 소설은 모험하는 인간을 통해 근대적 인간이라 선언된 것과는 다른 상이한 존재를 찾아 나선 것이다. 소설은 심판관이 부재하는 세계에서 상대적이며 애매해지고, 흩어진 진실들을 찾는 모험을 시도한 것이다. 밀란 쿤데라, 자신의 소설은 근대 소설의 시작을 알린 세르반테스, 다시 말해 유럽 소설문학의 적장자임을, 자신이 바로 그 후계자임을 선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는 일종의 소설의 역사, 그 계보를 읊는다. 이 드넓은 지평(인간의 무수한 실존적 가능성)에로의 모험은 “발자크에 이르러 경찰, 법률, 군대, 국가와 같은 사회제도라는 건축물들의 배후로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플로베르의 보바리에 이르면, 집 마당의 울타리만큼 좁아지고, 돈키호테의 모험은 감당할 수 없는 권태 속에 꿈과 몽상에 자리를 넘겨줬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시금 사회라는 역사의 힘에 인간 장악을 넘기면서 그 신통력을 잃었을 때, 돈키호테의 세(三) 세기에 걸친 여행은 카프카의 측량기사 K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나타나, 모험은 고작 서류상의 하자로 관리와 말다툼하는 모험으로 정말 하찮은 것으로 축소되었음을 주장한다. 밀란 쿤데라는 세르반테스에서 발자크를 지나, 카프카로 이어지고, 유럽소설 문학의 정통 계보의 후예로서 밀란 쿤데라, 바로 자신의 소설이 있다는 간접적 선언일 것이다.
근대의 이성이란 것이 과학과 합리주의를 내세우며, 진보를 떠들 때, 소설가들은 바로 그 이성이 계승된 인간의 가치들을 하나씩 좀먹어 들어가는 역설적 세계를 발견하고, 규명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 공인된 가치 체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극단의 세계는 하셰크나 카프카가 발견한 인간과 그리 다르지 않다, 오히려 그네들이 상상한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오늘의 그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영혼하고만 싸워야했던 평화로운 시기는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 시대를 마지막으로 끝났다고 선언한다. 그리곤 하셰크, 카프카, 무질, 브로흐는 영혼을 벗어난 바깥, 외부에서 온 힘과 마주한 완전히 새로운 모험에 나서야 했다고 지적한다.
이제 인간은 비인격적이어서 다스릴 수도, 예측 할 수도. 이해할 수 도 없는 외부의 힘에 장악되어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그것을 느끼고 고통에 방황한다. 그래서 이 인간들이 처한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케 한다. 현대사회의 특성은 이처럼 세계 모든 것이 축소되는, 사회적 기능으로 인간의 삶을 축소하고, 민족의 역사는 몇 개의 사건으로 축소되며, 그마저도 편향된 해석으로 축소되는, 축소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방이 깜깜해지고 존재가 망각된 세계이다. 소설은 이 때문에 세르반테스가 근대 이성으로 인한 존재 망각에서 인간을 건져 올리려 했던 시도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필요한 것이 된다. 쿤데라는 그래서 말한다. “나는 세르반테스의 *절하(切下)된 유산 말고는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세르반테스 소설의 ‘작품적 위상 또는 가치를 낮추어 보는’ 시선에 대항한 표현)
2부 「소설의 기술에 관한 대담」과 4부 「예술의 구성에 관한 대담」은 쿤데라의 소설 작품을 기반으로 한 소설론에 대한 대담이고, 6부 「소설에 관한 내 미학의 열쇠 어(語)들」은 그의 각 작품상의 키워드(핵심 주제어 및 주인공의 상징적 약호 등)의 사전(辭典)적 기능으로서 일종의 미학적 진술과 작품의 번역 및 출간에 대한 해명과 소신이라 할 수 있다. 특히 2부에서는 소설이란, “자아의 수수께끼에 대한 관심”이라며, “나는 무엇에 의해 포착될 수 있는 가에 대한 물음으로서 소설 역사의 시대구분이란 이 물음에 관한 상이한 대답”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초기에는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이 행동과 모험뿐이었으며, 디드로에 이르러 행위와 자아의 간극, 즉 행동으로부터 인간을 포착할 수 없음에 대한 고민으로 내면의 삶을 탐색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이 인간 내면적 탐구는 그 극점인 프루스트와 조이스에서 정점을 이루고 불충분한 추구로 막을 내리지만, 자아를 생각하는 새로운 방식을 발견한 카프카를 통해 새 지향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판단한다. 『소송』의 요제프 K나, 『성(城)』의 측량기사 K는 개별적 존재로 규정될 수 없는 인물들로 이름, 외모, 버릇이나 행위, 하물며 자유로운 영역에서조차 제한되어 있는 존재로써 현재의 상황만을 빙빙 도는, 자신들의 내면적 삶은 모조리 자신들을 옭아맨 상황에 휩쓸려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프루스트의 경탄으로서의 내면적 세계와 달리 카프카의 내면세계에는 이렇다 할 내적 동기도 없으며, 그 동기에 관심조차 발견 할 수 없다. 즉 외부적 결정이 압도적인 것이 되어버린 세계이기에 남아있는 가능성이란 어떤 것인지를 찾는 인간이 출현한 것이다. 현대적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아마 밀란 쿤데라 자신이 카프카의 후예, 세르반테스라는 유럽 소설 문학을 잇는 적통자임을 확인하기라도 하는 듯, 이 세계에는 역사 기술을 하는 전문가가 따로 있는데, 소설이 역사에 대해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라는 물음에 자신의 소설은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고, 특정한 시기의 사회를 묘사하는 역사적 실제를 말하는 부류의 소설이 아님을 강론한다. 그러면서 소설은 인물들의 실존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정황으로서 역사를 말하는 것이며,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이 각기 다른 시대를 통해 사라져가는 가치훼손의 역사를 말하는 것과 같이, 인간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발생시키는 실존적 상황으로서 역사를 말한다고 설명한다. 즉 인간 실존의 가능성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변화된 역사의 상황에 따라 발견되지 못했던 새로운 인간을, 낯설지만 현재하는 인간을 찾아내고 세상에 묻는 것이다.
5부 「저 뒤쪽 어디에」라고 명명된 논설은 현대사회 속에서의 인간 실존 가능성의 한 발견으로서 카프카를 말하고 있는데, 카프카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지녔던 통찰이 인간이 처한 상황에 대한 예견적 발견이었기에 오늘의 독자들에게 가장 친근하고, 매력적인 글이 될 것 같다. 우리는 카프카의 작품은 단 번에 이거 카프카 아니에요? 혹은 카프카적인데. 라고 말하곤 한다. ‘카프카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보이지 않는 미로의 성격을 가진 권력과 대결이 있”으며, “실존 자체가 하나의 착오인 것”으로 그려지며, “부조리함을 참을 수 없어 자신이 처한 고통을 합리화하고자 벌이 잘못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아이러니가 있는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측량기사 K를 떠올려보자. 그는 관련된 모든 행정관청들이 시효가 지나 까맣게 잊어버린 명령이 관료적 착오에 의한 사소한 장난으로 보내진 초청장에 의해 성으로 간 것이다. 결국 측량기사 K는 실존 자체가 하나의 착오이고, 착오 상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의 사회활동은 거의 모두 관료화되어 있으며, 제도들 또한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로 바뀌어 있다. 이렇게 관료화된 사회의 권력은 점진적으로 그 자체가 절대적이고 신격화되는 경향이다. K처럼 개인은 원인과 동기를 어디서도 찾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저질러지지도 않은 죄로 벌 앞에 선 요제프 K처럼, 자신의 생애와 과거를 면밀히 검토해보는 것이나, 마침내 스스로 죄인으로 만드는 기계가 작동하게 하고, 죄를 찾아내는 것이 바로 현대라는 역사의 시간 속 인간의 가능성으로서 양태이다. 즉 카프카의 세계는 인간과 세계가 맺는 원초적 가능성, 인간을 영원히 따라다닐 수 있는 가능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카프카 세계의 또 다른 특징은 ‘외로움의 저주’라 지적한다. 즉 현대의 인간에게 닥친 가능성은 내면적 침해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제프 K나 그레고르 잠자 모두 침대라는 내적 공간을 침해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혼자라고 느낄 수 없는, 더구나 이들은 모두 명령과 규율에 복종하여야 하는 존재의 세계 속에 있다. 즉 근원적 존재방식이 하나의 관료화된 인간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거대한 일부밖에 보지 못하고, 목적과 전망을 보지 못한다. 복종과 기계와 추상의 세계에서 사는 관료화된 현대적 인간에게 모험이란 고작 관청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이 유일한 존재이다. 이 길고 긴 소설론은 결국 인간의 실존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 소설의 본질적 소명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세계는 그 속도를 더욱 높이며 과학기술의 진보, 합리주의 이성을 부르짖는다. 그리고 모든 정보와 이야기들은 매스미디어의 수중에 장악되어 통합과 획일화로 치닫는다. 이 획일화는 인간의 시선을 극단적으로 협소하게 만들고, 급기야 단순하고 상투적인 똑 같은 내용들만이 맴돌게 된다. 설혹 정치적 상이함을 말할지라도 이러한 표면적 상이함의 이면에는 동일한 정신이 군림하고 있을 뿐이다. 즉 감추어진 이면인 시대정신이라는 것의 똑 같은 어휘와 똑 같은 예술과 취향, 똑 같은 형태, 똑같은 문체, 중요한 것과 시시한 것을 가리는 기준마저도 똑 같은 것만이 떠돈다. 복잡한 인간의 정신을 말하는 소설조차 이에 휩싸이는 양상을 보인다. 때문에 한국 소설 문학에도 성급한 대답들의 시끄러움들로 점점 진실이 들리지 않는 지경이다.
쿤데라의 비판처럼 소설 아닌 소설의 무늬를 뒤집어 쓴 것들이 우리들의 지평에서 과거를 몰아내고 시간을 현재의 순간만으로 축소시켜, 현재에 매몰된 동일성의 문학을 쳇바퀴 돌 듯 양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미래와 조화를 이루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미래문학, SF문학이나 전위문학이 유행처럼 쏟아지고 있다. 물론 이들은 용감하고 어렵고 고무적인 창조 작업이라 주장하겠지만, 시대정신이라는 지배적 권력에 토대를 두고 미래가 자신들을 정당화해주리라는 확신을 은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가지고 논다는 것은 강한 자에 대한 비열한 아첨임을 부정할 수 없다. 미래는 언제나 현재보다 강하다는 이들의 숨겨진 기반 논리는 수구적인 나쁜 의지가 아닐 수 없다.
요즈음 한국 소설문학에서는 이 엄청난 풍파를 겪는 사회로 인해 돌연히 그 실존적 의미를 달리하게 되는 인간의 가능성들을 생산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 소설에는 이러한 발견의 성찰이 없어 보인다. 이 세계와 복잡해진 인간의 정신은 풀어야 할 대상, 즉 앎의 열정을 요구하는 대상이다. 현실에서 너무 어처구니없는 별난 실존 가능성이 현재적으로 펼쳐져 소설이 말을 잊은 것인가? 엄청난 비극이 발생했는데 웃게 만드는 것, 이 재미도 위안도 없는 웃음을 만들어내는 카프카적인 한국의 소설가를 상상해 본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작품에 들어가기 전, 혹은 다시 읽어보려는 모든 이들에게 이 소설론은 어마어마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 같다. 아니 왜 소설 문학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소설은 무엇을 써야하는 것인지에 대한 거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이 적어도 삶의 낭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