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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평점 :
prologue
장마다. 그리고 하늘은 구름때문인지 더더욱 거무스름하다. 무더위 만큼 우리를 괴롭히는 건 바로 습기와 이로 인한 울적한 기분. 우리가 한 여름에 에어컨을 찾는 건 바로 이 무더위와 꿉꿉함을 잊게 해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매일 아침에는 영어와 일본어 수업, 그리고 저녁에는 헬쓰와 독서. 그리고 주말에는 축구와 기타 활동을 병행하다가 금주에 업무 시즌과 겹치면서 몸이 많은 피로감을 느낀 듯 했다. 덕분에 오늘 아침에는 기분좋게 늦잠을 잘 수 있었다. 어두운 하늘은 아침에 눈을 뜨지 않게끔 도와줬으니 이건 날씨에 고마워 해야 할 일.
커피숍에 들어가서는 바람이 적당히 나오는 자리에 앉아 책을 읽었다. 디팩 초프라의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라는 책인데, 여유로운 토요일 오후에 딱 어울리는 책이었다. 신기하게도 읽는 내내,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또 더위와 꿉꿉함마저 인지하질 못했으니 어떤 면에서는 나름대로의 영성 체험을 한 셈. 책에서 말하는 메세지가 내 눈과 귀, 그리고 입에서 웅얼거리고 있는 걸 커피숍을 나오면서 느꼈으니 말이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 까 하다가, 발걸음을 옮겨 교보문고로 향했다. 재작년과 작년에는 주말마다 자주 갔었는데, 최근에는 이것 저것 하는게 많아서 자주 가질 못했었다. 오랜만에 들린 서점에는 새로운 신작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신작 소설과 만화 코너를 한번 훑어보고 나서, 경제·경영 코너의 신작들을 찾아보았다. 모 서점의 신간평가단을 하면서 읽었던 책들이 많이 있어서 반가웠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서점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 나가려는 길에 지난주에 읽었던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루쿠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모습을 보았다.
#1
하루키의 신작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예약을 했다. 신경숙 님의 <달에게>에 이어 올해의 두번째 예약 구매 도서. 나에게 있어서 고민하지 않고 작가의 이름만으로 구매를 선택하고, 또 장바구니에 담아두는 작가중의 한명. 대단하고 어려운 작품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친근하고, 재밌다고 말하기에는 작품의 모든 걸 다 말하지 못할 것 만 같은 소설. 바로 하루키의 소설이다.
친구들로부터 버림받고, 죽음을 생각한 쓰쿠루. 마르고 여윈 몸은 그에게 상처였지만,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조금은 날이선 인상과 매주 꾸준히 하는 수영, 그리고 학교 생활은 상처를 잊고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온 듯 보인다. 새로이 만난 나이어린 친구와 그와 함께 하는 하루의 시간은 단조로웠지만 충실했고, 평범한 이야기들이었지만 삶에 있어서의 특별한 무언가였다. 어느 날, 하이다가 들려준 아버지의 이야기는 그 특별한 무언가중의 하나였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미스테리한 사건이 여기서도 벌어지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주가 아닌 배경으로서 보여준다. 그러나 단순한 배경이 아닌 사라의 조언과 같이 삶의 진실과 마주하라는 묘한 충고를 담고 있었다.
.....자네는 머지 않아 도쿄의 대학 생활로 돌아갈꺼야....그리고 현실적인 삶으로 돌아갈 거야. 견실하게 그 삶을 살아야 해. 아무리 밋밋하고 평범하더라도 삶에는 살 만한 가치가 있지. 그건 내가 보장하지. 아이러니나 역설 같은 건 빼고 하는 말이야. 다만 나에게는 그 가치라는게 좀 부담스러웠을 뿐이야. 그 놈을 제대로 짊어지고 나아갈 수가 없어. 아마 나면서부터 거기에 맞지 않는 것 같아. 그래서 죽어가는 고양이처럼 조용하고 어두운 곳에 숨어들어 그때가 오기만을 묵묵히 기다리는 거야. 그것도 나름대로 나쁘진 않아. 그러나 자네는 달라. 자네는 그놈을 짊어지고 나아갈 수 있어. 논리의 실을 활용하여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자기 몸에 잘 맞게 바느질로 붙여 가는 거야.....
#2
쓰쿠루가 만난 사라는 연상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조언을 한다. 만나라고. 직접 그 절교의 원인을 알아보라고. 주저하는 쓰쿠루는 결국 그녀의 조언대로 만나보기로 한다. 제일 먼저 만난 친구는 자동차 세일즈맨으로 변한 아오. 그에게서 절교의 - 충격적인 - 이유를 듣게 된다. 하지만 쓰쿠루 역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된다. 네명의 멤버들의 어머니가 그를 좋아한 사실. 그리고 네가 꽤 괜찮은 놈이라는 거. 변해버린 쓰쿠루의 모습을 보고 놀란 아오만큼, 쓰쿠루 역시 자신의 색채가 너무나도 선명했었음을, 그리고 그걸 자신이 몰랐음을 깨닫는다.
두번째로 만난 사외교육사업의 사장이 된 아카는 그에게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로가 너를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외지인이 된 너. 마지막으로 시로의 죽음까지. 아카가 비밀을 말하는 그 순간. 그 둘은 그동안 단절되었던 시간의 터널을 지나버린 것만 같았다. 옛날에는 나에게도 멋진 친구가 있었고, 인생의 단계를 지나 그걸 잃어버렸다는 아카의 말.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는 아오의 말은 쓰쿠루에게 어떤 느낌이었을까. 보상받았다는 느낌일수도, 그동안의 시간의 상처를 날려버렸다는 느낌일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가 이제 다시 날아오를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으면 했다.
해외로 나가있는 구로를 만나고, 그녀를 통해 또 다른 진실과 마주한 그는 이제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슬픔과 잊으려 했던 사실들. 그리고 사라와 자신 사이에 불투명한 안개처럼 가로막고 있는 삶의 조각들을 모두 치워버렸다. 아니, 조각들을 맞췄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는 이제 그녀와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감과 용기를 가져. 그리고 기도하는 일.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따져 보면 참 기묘한 이야기야. 그렇게 생각 안 해? 우리는 기본적으로 서로에게 무관심한 시대를 살며서도 이렇게 다른 사람에 대한 대량의 정보에 둘러싸여 있어. 마음만 먹으면 그런 정보를 간단히 살펴볼 수 있는 거야. 그러면서도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사실은 거의 아무것도 몰라.......
#3
그래. 이렇게 마주하고 이야기해보면 될 걸. 그리고 내가 가진 말못할 두려움을 극복하고 털어놓으면 될 걸. 그동안 너무 많은 시간을 돌아와 버렸던게 아닐까.
이번 작품은 하루키의 전작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신비스럽고 미스테리한 사건이 주를 이루지도 않고, 파편화된 일상만을 클로즈 업 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마무리짓지도 않는다. 상처를 딛고, 마주하고, 사랑으로 다가가라고 말한다. 열린 결말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 열린 결말이 있음을 보여주는 스토리조차 생소한 것 같다. 커티삭과 그가 자주 쓰는 문체, 그리고 저자의 이름이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의 소설로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에게 가야할 장소는 없었다. 그러나 향해야 할 장소는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돌아가야 할 장소를 멀리했었다.
냉정하면서도 언제나 쿨하게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는 다자키 쓰쿠루. 이제 그는 사라를 만나러 간다.
..........참 묘한 세상이야. 한편에서는 부지런히 철도역을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거액을 받고 그럴듯해 보이는 말을 만들어 내는 사람도 있으니....그걸 일반적으로 산업의 세련화라고 하지. 시대의 흐름이야.....우리 서로 그 흐름에 뒤지지 말자........
epilogue
가끔 주문하지도 않은 책을 몇번 받은 적이 있다. 자주 블로그에 글을 올려서 그런지 몰라도 한번 읽어보라고 권유하는 책, 신간 도서, 그리고 나도 모르게 당첨된 이벤트 도서들도 있다. 생각해 보니 고마운 일이다. 그동안 그 사실을 잊었던 것 같다. 정말 고마운 일인데...
어제, 민음사에서 책을 받았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또 도착해 있었다.
이게 뭐지..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홈페이지에 응모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책을 펼쳐보니 같은 책이 아닌, 하루키의 싸인본이었다.
같지만 다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