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사장의 지대넓얕 1 : 권력의 탄생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생각을 넓혀 주는 어린이 교양 도서
채사장.마케마케 지음, 정용환 그림 / 돌핀북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XXI / 돌핀북 1번째 리뷰] 지적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정말 축복이다. 보통은 '대학교육'을 이수한 학사 수준 이상의 지식인들이 나눌 수 있는 전문적인 의사소통을 일컫는 말이 '지적 대화'겠지만, 하나의 주제로 1시간 이상 웃고 떠들 수 있을 정도의 교양을 쌓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대화인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이런 '지적 대화'가 나눠지는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열'로 뜨겁고, 전세계에서 카페와 도서관이 가장 많아서 '담론'을 나눌 수 있는 장소가 널리고 널렸는데도 '지적 대화'를 나누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참 힘들다. 그냥 '수다'를 떠는 사람들은 많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지적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말'을 많이 해야 할까? 물론, 어느 정도 수준 높은 '주제'를 강의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뛰어나야 '담론'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을 잘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경청'이다. 경청은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뜻도 있지만, '상대의 의견을 잘 듣고, 정리를 잘 해서, 완벽히 이해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기에 지적 대화를 나눌 때 절실하게 요구되는 능력이다. 다시 말해, 지적 대화는 '목소리가 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목소리만 크면 오히려 '상대의 의견'을 묵살하고, '자기 주장'만 옳다고 얘기할 공산이 크기 때문에 지양해야 할 자세다. 그리고 경청을 잘 하면 '동영상 강의' 내용을 들을 때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고, 심지어 '책 읽기'를 할 때에도 핵심내용을 잘 파악하는 눈썰미도 더불어 챙길 수 있는 유용한 기술이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이렇게 '경청하는 자세'를 갖춘 사람이 별로 없다. 그래서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수다'만 떨며 시간을 죽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뭘 좀 알아야 '지적 대화'를 하든, '경청'을 하든 할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를 할 수도 있다. 그렇기 위해서 이런 책이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은 '채사장'이 쓴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란 책의 '어린이책' 버전이다. 이 책을 통해서 뭐라도 '지적 대화'가 흐르는 '담론의 장소'에서 '경청'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고 익힐 수 있다. 물론, 어린이라도 말이다. 사실 '지식'이라는 것이 별 것 아니다. 초중고 학창시절에 배운 모든 것이 다 '지식'이었다. 그런데 그 소중한 지식을 그저 시험성적을 위해서 벼락치기처럼 짧은 시간 안에 '외울 생각'만 했지, 그 지식을 통해서 뭘 해보려는 '큰 그림'을 세워 보질 않았던 탓에 '지적 대화'를 위해서 뭔가 대단한 교양을 새로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있기에 '지적 대화'를 나누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뭔가 '자랑질'을 하는 것 같은 쑥쓰러움 때문에, 많은 사람들 앞에선 '겸손한 척', 자신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지식을 꺼내질 않아서, 이런 수준 높은 대화가 원활히 통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리고 행여나 자신의 입에서 나온 '지식'이 틀릴 수도 있다는 부담감에 더욱더 '지적 대화'를 즐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왜 벌어지는 것일까? 그건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지 않고, '옳은 것'은 나도 다 아는 평범한 지식일 뿐이고, 몇몇 '틀린 것'만 콕 짚어서 지적하려 드는 나쁜 버릇이 불쑥불쑥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대화법은 '지적 대화'는커녕 수준 떨어지는 수다, 다시 말해, 맞든 틀리든 아무 상관이 없는 덜 떨어진 대화만 즐기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말게 한다. 지적 대화를 나눌 때 '절대금물'이 바로 '지적질'이다. 차라리 "나와는 의견이 다르군요~"라면서, '내 의견'을 정확하게 전달하면, 지적 수준이 높은 상대방이라면 "내 의견보다 당신의 의견이 더 수긍이 가는군요"라면서, 양보하게 된다. 그래야 '다음 주제'에서도 서로 교양 넘치는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지적 대화에 목이 말라서 '서론'이 길어졌지만, 암튼 이 책 <채사장의 지대넓얕>은 앞서 소개한 '채사장'의 또 다른 책의 어린이책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내용적인 면에서는 '똑같은 내용'이지만, 어린이도 한 눈에 이해하기 쉽게 '라이트노블' 형식으로 펴낸 책이라서 아주 유용한 책이다. 그 첫 번째 책으로 핵심 내용은 '권력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누리는 권력은 사실 애초에는 없었다. 권력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비물질'적인 것이라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먼 옛날 '구석기 시대'에도 족장은 있었고,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이 '권력자'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무언가 '독점'할 수 있을 만한 물질적인 것들이 너무도 부족한 시절이었던만큼 조금이라도 '물질'을 얻게 되면 부족구성원의 모두가 똑같이 공평하게 나눠갖는 것이 부족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이를 '원시공산사회'라고 일컫는데 '생산수단'과 '생산물'로 나눌만한 '물질의 풍요로움'이 발생하기 전까지 인간들은 부족원 모두가 공평하게 누리는 무리사회를 이루고 살았다.

그러다 신석기 시대가 펼쳐지면서 '도구'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흔히 '신석기'라고 불리는 도구를 소유하게 되면서 사냥과 채집 따위를 넘어 '농업'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농업을 하게 되면서 부족원들은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고, '목축'도 할 수 있었다. 그럼 '농업'을 할 수 있게 된 신석기인들은 이제 무엇을 할 수 있게 되었을까? 바로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신석기인들도 구석기인들과 마찬가지로 '평등사회'였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농업의 발달'로 인해 점점 '사유재산'이 늘어나게 되었고, 더 많이 생산물을 가진 '유산계급'과 유산계급에 기대어 빌어먹게 되는 '무산계급'으로 나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뉘는 결정적인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바로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권력자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름하여 '왕(군장 또는 군주)'이란 계급이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비옥한 토지'를 소유하고 거기서 나오는 '생산물'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아니, 평등했던 사람들끼리 무슨 수로 '생산수단'과 '생산물'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되었을까? 이 방법의 비결은 바로 '신'이란 존재를 만드는 것이었다. 농업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의 힘'을 얼마나 잘 다스리고(?), 잘 이용하느냐에 달렸기 때문에, 그런 자연의 힘을 좌지우지하는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왕'이라 일컫는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만 있다면, 단박에 '지배계급'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고, '피지배계급'은 왕에게 절대복종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했던 것이다. 급기야 '왕' 스스로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사회를 우리는 '제정일치사회'라고 학교에서 배웠다. 기억이 나실 것이다.

그렇게 청동기, 철기 시대를 거쳐 4세기 이후부터는 전세계적으로 '고등종교'가 정립되면서 왕이 신을 자처하지 않고, 신에게서 왕권을 위임받았다는 '왕권신수설'과 같은 것으로 '제정분리사회'가 이루어진다. 이는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불교 등등 어느 정도 '경전'을 갖춘 고등종교가 자리 잡은 지역에서 벌어진 공통적인 사건이다. 이때에도 '생산수단'은 여전히 토지였으며, 토지에서 만들어진 '생산물'은 모두 지배계급이 독차지하고서 실제로 '노동'을 한 사람들은 그 일부만 가질 수 있는 불공평한 일이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불공평한 일은 흔히 말하는 '중세시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특히 서양에서는 무려 1000년 동안(4세기~14세기)이나 지속되었는데, 이 시기를 '종교'이외의 다른 사상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사상의 암흑기'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다 15세기 이후 '르네상스'가 유럽 곳곳에 전파되면서 '신 중심사회'가 '인간 중심사회'로 점점 바뀌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를 흔히 '인본주의'라고 일컫는데, 다른 말로 '이성의 빛'이 밝게 빛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혁명'을 시작으로 '인본주의'는 신 중심의 사회, 다시 말해, 신이 부여한 신성한 왕권을 철저히 부수는 결과를 낳는다. 이때까지도 권력의 향방은 '생산수단'인 토지를 독점한 '국왕'에게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생산수단(상공업)'이 만들어지자 구시대의 생산수단(농업)은 점점 취약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생산수단을 '독점'한 새로운 세력집단, 다시 말해 '부르주아'가 등장하면서 생산물의 불공평한 분배에 성난 군중들이 혁명을 일으키자, 이들 혁명세력을 이끄는 지도자로 변신한 '부르주아'가 새로운 권력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들이 바로 '초기 자본주의'를 이끌었던 주역들인 셈이다.

1권의 내용은 여기까지다.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향방을 이해하면 '권력'을 누가 소유하게 되는지 파악할 수 있고, 만약 '소유'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이 유리할까? '생산물'을 소유하는 것이 더 유리할까? 고민하지 않게 될 것이다. 정답은 바로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이다. 왜냐면 '생산수단'이나 '생산물'이나 모두 물질적인 것이지만, 비물질적인 '권력'을 갖기 위해선 끊임없는 소비가 가능한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정된 소비밖에 할 수 없는 '생산물'을 소유하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인 셈이다. 이런 지식을 이해하고 있다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금방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생산수단'이 무엇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는 지름길이니 놓칠 수 없는 지식일 것이다. 정답은 한 가지가 아닐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10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10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XX / 넥서스Friends 10번째 리뷰] 석가모니는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말을 남겼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말이다. 즉, 만남에는 헤어짐이 정해져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더 슬퍼했을 것이. 그러자 석가모니는 뒷말을 덧붙인다. '거자필반(去者必返)'. 다시 말해,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고 말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비로소 스승을 떠나보낸다. 죽음 뒤를 기약하고 다시 돌아올 것을 믿는 '윤회사상'이란 불가의 가르침을 석가모니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명강의를 한 셈이다. 히로시마 레이코는 이런 불가의 '윤회사상'을 이 책에 담뿍 담고 싶었던 것일까?

자꾸만 옛 기억을 잃어가는 것 때문에 걱정이 많은 센야는 자신이 사랑으로 키운 야스케와의 추억만 콕 집어서 잊혀져가는 간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앞서 야스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얼음감옥에서 탈주한 고주'와 한 판 대결을 하기 위해 우부메에게 주었던 '바쿠란의 눈'을 되찾았는데, 그것 때문에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되는 저주에 걸리고 말았다. 왜냐면 요괴의 세계에서 '한 번 맹세한 것'을 어기게 되면 그 댓가를 혹독하게 치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아무리 악랄한 요괴라하더라도 '자신이 한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키는 것이 요괴세계의 규칙인 셈이다. 그런데 센야가 '그것'을 어기고 말았다. 물론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럼에도 규칙을 어긴 것은 마찬가지고, 그로 인한 저주는 물론,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모든 힘을 잃어버린 센야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다름 아닌 '인간 아이, 야스케'다. 그렇게 센야는 야스케와 함께 겪었던 기억들을 하나씩하나씩 잊어버리게 된다. 끝내 '야스케'라는 이름마저 말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가장 소중한 것'에 대한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렸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면 '잊어버렸다'는 기억조차 잊어버려야 하는데, '야스케에 관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서는 '무언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기억'만큼은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한 센야는 '영원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부메가 이야기했던 '무서운 저주'의 진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서운 저주에 걸린 센야는 분명 후회할 것이라고도 경고했었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힘을 되찾지 않으면 당장 '야스케의 목숨'을 구할 방법이 없었기에, 센야는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센야는 야스케의 곁을 서둘러 떠난다. 왜냐면 '야스케'라는 이름마저 잊어버리게 되었을 때, 센야는 '요괴의 본능'만 남아서 자신도 모르는 새, 야스케를 공격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야스케를 모르는 요괴처럼 죽여버리고도 스스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아픔만 간직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센야를 더욱 공포로 몰아넣었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없애버리고도 '그 자체'를 잊어버리고, 평생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잊고 살아간다'라는 기억만 간직한 채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저주에 빠질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센야는 야스케를 떠나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떠나버린다.

하지만 센야는 안다. 자신이 가장 소망하는 것이 '야스케와 함께 사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분명한 사실이 센야를 더욱더 괴롭게 만든다. 그래서 스스로 감옥 같은 곳에 자신을 가두고 '야스케'를 헤치지 않게 만들고서는 오직 '유일한 한 사람'만이 그곳을 열 수 있게 만들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라면 너무도 잘 아는 바로 그 느낌이다. 사랑에 실패했음을 직감했을 때,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에 스스로를 '유폐'시켜놓고서, 유일한 탈출구이자 비상구인 '문'을 만들고서, 자기가 사랑했던 이가 다시 찾아와주길 바라는 그 심정 말이다. 센야는 바로 그런 '감옥'을 찾아냈고, 그 감옥에서 '야스케'를 기다렸다. 마치 죽음과도 같은 상태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야스케'는 그곳을 찾을 수 있었을까? 센야와 야스케는 다시 만날 수 있는 걸까?

'회자정리 거자필반'은 참으로 아름다운 인사말이다. 흔히 '종업식'이나 '졸업식' 때 자주 쓰이던 말이었는데, 시대가 변하니 이젠 잘 쓰이지 않는 말이 되었다. 왜 그럴까? 아마도 너무도 발달한 '통신기기' 덕분일 것이다. 옛날에는 '서신왕래'를 하면서 며칠이나 몇 달에 한 번씩 '서로의 소식'을 전할 수 있었던 탓에 편지 한 통 받고 나면 그렇게 반갑고 기뻤다. 그러다 전화기가 대중화 되자 더 빠르고 편하게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었지만, 오히려 연락이 편해지면 편해질수록 더 '연락'을 뜸하게 할 뿐이었다. '삐삐'가 등장했을 땐, 반짝이나마 소통이 활발해졌다. 소식을 전하는 '메시지'가 한정되어 있었던 탓이다. 그때문에 '한정된 메시지'에 어떻게 더 기발한 아이디어를 발휘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더 자주 연락하게 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핸드폰'이 등장하자 연락은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주 연락하는 대상과는 더 자주, 뜸하게 연락하는 대상과는 더욱 뜸하게 연락을 취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젠 SNS로 전세계 불특정다수와도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자 '이별'을 슬퍼하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검색기능'으로 편리하게 찾을 수 있는 세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는 말이 무색해졌다. 헤어짐이 아쉽지 않은데, 굳이 다시 만난다는 것이 무에 기쁠쏜가?

이런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 탓일까? 10권의 '시즌1'을 마감하는 대목에서 야스케와 센야가 다시 '만남'을 갖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옛날이었다면 '시즌1'의 결말은 '헤어지는 대목'에서 멈추고, 독자들의 애간장을 다 녹이고 난 뒤에야 느긋하게 '시즌2'의 서두를 '둘의 재회'로 거창하게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별이 아쉽지 않은 시절'이다보니, 급기야 '만남(재회)'으로 결말을 내려버렸다. 그리고 그 둘의 '새로운 이야기'로 시즌2를 장식할 것을 예고하며 막을 내렸다. 이걸 참신하다고 해야할까? 솔직히 맥이 쭉 빠지는 결말이었지만, 이야기는 재밌었으므로 '시즌2'에서 다시 리뷰를 이어가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벌거벗은 세계사 6 - 조선을 둘러싼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벌거벗은 세계사 6
최호정 그림, 이현희 글, 최태성.서민교 감수, tvN〈벌거벗은 세계사〉제작팀 기획 / 아울북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XIX / 아울북 27번째 리뷰] 한국사에서 다루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의문투성이다. 왜냐면 다른 나라끼리 전쟁을 벌이는데 왜 하필 '우리 땅'에서 전쟁터를 제공했느냔 말이다. 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은 두 전쟁이 벌어진 뒤에 왜 우리 나라의 국권이 침탈되고 끝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는지, 그 진상을 파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저 시험에 나오니 '사건의 흐름'만 파악하고, 임오군란-갑신정변-텐진조약-동학농민운동-청일전쟁-삼국간섭-을미사변-아관파천-대한제국선포-러일전쟁-포츠머스조약-한일의정서-을사늑약-헤이그특사-군대해산-국권강탈(한일병탄)이라는 '순서'만 달달 외울 뿐이다. 하지만 이래서는 역사의 진면목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다시 말해, '한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사의 흐름'과 같이 파악해야 한단 말이다. 왜냐면 역사는 '한 나라'에서만 벌어지는 특정하고 독립적인 사건은 거의 없다. 특히 '근대사 이후' 세계는 동시다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그래서 그 중심에 '한국사'를 놓고 세계를 조망해야 역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을 통해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진면목을 살펴보자.

이 두 전쟁의 공통점은 바로 '일본'이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두 전쟁 모두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며, 그 전쟁의 목적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차지하는데 있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성공한다. 우리에게는 실로 끔찍한 역사의 장면이지만,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이런 잘못된 역사를 우리는 또다시 반복할 것이기에 두 눈 부릅 뜨고 똑똑히 지켜봐야만 한다. 그리고 일본에게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뼈아픈 실책이었다. 비록 일본으로서는 '승리한 전쟁'이긴 하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승리'로 인해 21세기 일본에게 두고두고 화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이웃나라를 두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도 역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만 한다.

먼저 '청일전쟁'이다. 이 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일본은 혹독한 근대화의 시련을 극복해내야 했다. 그런데 그런 극복을 한 뒤의 '일본의 행보'는 전혀 바람직하지 않았다. 서구열강에게 혹독한 '신고식(?)'을 당하고 아시아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했으면, '동료의식(!)'을 발휘해서라도 다른 이웃나라, 같은 아시아국가가 서구열강에게 무방비로 침탈당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이끌어가는 아량을 베풀었다면 오늘날의 '실패국가'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일본은 서구열강에게 당한 그대로 '제국주의화'하여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고 아시아 각국을 '침략'하고 '식민지'로 삼는 대열에 낑기려 했다. 그 시작점이 바로 '청일전쟁'이었던 것이다.

그 시작은 '임오군란'이다. 고종이 친정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식군대(별기군)'와 '구식군대'의 차별로 인한 구식군대의 분노로 벌어진 우발적인 사건이 '일본공사관'을 불태워버리는 만행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구식군대가 왜 일본공사관을 공격했냐면, 그 당시 '별기군'을 훈련하던 교관이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고종과 민왕비는 '개화의 필요성'을 깨닫고 개화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일본인 교관을 통해서 신식군대를 양성하며,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서 '일본의 협조'를 호의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허나 일본은 조선의 요청에 호의적으로 보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종과 민왕비의 '개화 의지'를 빌미로 조선을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 계획을 착착 진행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임오군란이 벌어지자 일본군은 그냥 인천(제물포)을 통해서 내빼버리고 만다. 왜냐면 아직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다. 병력도 소수였고. 허나 '임오군란'으로 인해 되려 반갑지 않은 '손님'이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바로 '청나라의 군대'다. 바로 청의 개입으로 '임오군란'이 진압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서는 전혀 반갑지 않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멈추지 않는다. 이번엔 조선의 개화파를 이용해서 조선에 '급변사태'를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삼아 일본이 조선을 집어 삼키는 작전이었으나, 이 또한 불발로 끝난다. 때마침 일어난 김옥균의 '갑신정변'이 일어나서 일본의 군대와 자금을 받아 조선을 개혁시키겠다는 야심찬 의지는 일본의 비협조로 인해 '삼일천하'로 끝맺게 되고, 고종의 발빠른 청 원병 요청과 청군의 신속한 개입으로 인해 조선의 개혁세력은 깔끔하게 정리가 되고 말았다. 일본은 아직 '조선'에 개입을 할 정도로 완벽히 준비가 되지 않았던 탓이 크다. 일본이 국내문제를 해결하는데 급급해 '갑신정변'을 나몰라라 하는 사이에 고종은 '청나라의 개입'을 공고히 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이 '갑신정변'을 통해서 얻은 것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곧이어 맺어진 '텐진조약'으로 양국의 군대를 '동시철병'하는 이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또한 양국의 군대가 조선에 출병할 때는 서로 통보를 하기로 약조하고,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보낼 수 있는 권리(?)를 따냈기 때문이다.

이제 '동학농민운동'으로 일본은 본색을 드러낸다. 조병갑의 전횡에 분노한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군'은 전라도 전역을 차지하고 관군을 밀어붙이는 저력을 보여준다. 이에 고종은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는데, 제 나라 백성을 진압하는데 '외국군대(청군)'를 요청해 버린 것이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절대 반대를 외쳤는데도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한다'면서 청나라 군대를 요청해버린 것이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정도의 효과를 기대했던 고종의 판단은 '일본군의 출병'으로 깜짝 놀라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한다. 오히려 '동학군'이 외국군대를 물리라면서 자진해산을 해버리는 똑똑한 행보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청군은 자신들이 할 일이 없다며 '철군'을 결정했고, 일본군에게도 똑같이 '철군요청'을 전달했지만, 그 사이에 이미 일본군은 '경복궁 점령'을 시도했고, 고종을 사로잡아 버리고 만다. 그리고 경복궁으로 통하는 '전신선'을 다 끊어버리고, 고종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사이에 일본군은 고종을 협박해서 '청군의 철병'을 요구하고, 일본군의 주둔을 고종의 요청이었다는 사실을 공식화해버린다. 그리고 일본군은 아산 앞바다에서 '풍도해전'을 개시한다. 청에 선전포고도 없이 선제공격을 해버린 것이다.

이렇게 '청일전쟁'은 시작한다. 뒤이어 벌어진 '성환전투'와 '평양성전투'에서 모두 이긴 일본은 내친 김에 청나라의 요동반도를 집중 공격하고, 압록강을 넘어 '뤼순'을 점령한 뒤, 해전에서도 청나라의 북양함대를 박살내고 완벽히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한다. 이는 서구열강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어느 누구도 '일본의 승리'를 점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사적인 면에서 청나라는 일본을 압도했고, 청나라의 승리를 기정사실로 여겼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일본은 청나라의 북경까지 함락시켜 완전한 승리로 청나라 전부를 집어 삼키려 들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서구열강은 일본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왜냐면 당시 서구열강은 '청나라의 이권'을 서로 사이좋게(?) 노나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이 청나라의 수도 북경을 함락한다면, 자신들의 이권을 빼앗길 것 같자 일본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일본은 청나라가 아니라 서구열강들이 무서워서 군대를 돌려 버린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서면 일본의 체면이 서지 않으니, 북경이 아닌 '대만'을 이때 함락해버린다. 이렇게 완전한 승리를 거둔 일본은 요동반도와 대만까지 점령하고, 조선에서도 '청의 간섭'을 물리치고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니 애초에 전쟁에 반대했던 일본국민들도 '개선'을 한 일본군대에 환호하며 스스로 '대일본제국 국민'으로 자랑스러워하기 시작했다. 뜻밖의 대승리로 인해 온나라가 '국뽕'을 맞아버린 셈이 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시모노세기 조약'으로 조선은 (청의 속국이 아니라) 자주 독립국이며, 요동반도·대만 할양하고, 전쟁배상금으로 2억냥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였지만, 너무 많은 이득을 보았다고 생각한 서구열강은 발빠르게 움직이며 일본의 승리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나라는 '러시아'다. 왜냐면 당시 러시아는 '부동항(얼지 않는 항구)'을 얻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었다. 그래서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인 '여순(뤼순)항'과 그곳으로 진입할 수 있는 '요동(랴오허)땅'을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와 짜고서 '삼국간섭'을 벌인다. 그 결과, 일본은 '요동땅'을 포기해야만 했다. 왜냐면 아직은 서구열강과 맞짱을 뜰 정도의 실력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허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국내에서도 '러시아'에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는 러시아의 황태자 '니꼴라이2세'가 일본에 방문했을 때, 상해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벌어지자 일본은 온 나라가 '러시아 황태자'를 향해 사죄를 하며 싹싹 빌고 용서를 구하는 '저자세 외교'를 벌인다. 몇몇 사람들은 미안하다며 '할복자살'까지 시도했다. 하지만 니꼴라이2세는 정신병자의 소행으로 보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일본으로서는 러시아가 강국이라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삼국간섭'을 지켜본 이는 또 있었다. 바로 고종과 민왕비였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이 일본의 손아귀에 놓이는 상황이 벌어지자 고종은 일본을 견제할 세력으로 '러시아'를 주목했던 것이다. 러시아의 힘을 빌릴 수만 있다면 일본이 '경복궁'을 침입해서 자신을 볼모로 삼는 수모를 다시 겪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허나 이는 또다시 '외세의 힘'에 기대어 어찌 해보겠다는 어리석은 판단이었고, '언 발에 오줌누기'라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조선에 불어닥친 한파에 마땅한 대안도 없이 '언 발에 오줌을 누어' 당장의 급한 불을 꺼보려해봤자 러시아라는 또 다른 탐욕자를 불러들이는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허나 고종으로서는 달리 도리가 없다. 동학군이라는 자국의 백성조차 다스릴 능력이 없어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한 무능한 임금인데,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상대로 무슨 대책이 있었겠느냔 말이다. 그나마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 세력을 견제하려는 시도는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허나 일본은 이런 고종의 행보를 좌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을미사변(민왕비 살해사건)'을 일으키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일본은 스스로 '문명국'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고 '근대화'에 성공한 것에 이어 '청일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직후라 더욱 그랬다. 그런데 '문명국'답지 못한 만행을 연이어 저지르고 있으니 스스로 이를 감추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안쓰러울 정도였다. 앞서 청일전쟁 당시 '여순'을 함락한 뒤에 저지른 '여순대학살'이 대표적이다. 당시 일본군은 청나라사람이라면 닥치는대로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로 인해 2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참혹하게 무참하게 살상당했다고 전한다. 서구열강은 일본군이 이런 만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것에 '야만스럽다'며 비난을 했는데, 일본정부는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서구언론의 비판만을 두려워하며 '진실 왜곡, 혹은 부정'을 일삼으며 연일 언론플레이를 했더랬다. 이런 일본이 '을미사변'을 저지른 것은 야만국이 저지르는 당연한 일이었으나, 오직 두려워하는 것은 서구의 비난뿐이었다. 이 사건도 어찌어찌 서구열강의 비난을 받자 민왕비를 살해하고 욕보이고 시신을 불태워버린 범죄자를 일본으로 송황해서 재판을 받게 하였으나, 모두 '무죄'로 풀어줘버린다. 오히려 '정부의 요직'에 앉혀 출세의 길을 열어줘버린다. 이래 놓고도 '문명국'인냥 행세하는 것이 우습기만 하다.

한편, 자신의 거처인 '경복궁'에서 자신의 아내가 무참히 살해되는 일이 벌어지자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일본군의 감시속에서 언제 자신의 목숨도 잃게 될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래 '궁녀의 가마'를 타고서 '아라사(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을 하는데, 무려 1년간 외국 공사관에 머물려 목숨을 부지하는데 급급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아관파천으로 인해 고종의 목숨은 건졌지만 수많은 이권을 '러시아'에 내주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특히 '압록강, 두만강, 울릉도 벌목 사업'을 모조리 러시아에게 몰아주는데, 이를 통해서 러시아는 '만주'를 차지하고 '부동항'을 차지하려는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더구나 '울릉도'에서도 이권을 챙기면서, 동시에 '일본'을 바다에서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었기에 여러 모로 톡톡히 이득을 챙긴다.

이때, 세계적인 정세는 '그레이트 게임'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이 게임의 핵심포인트는 '러시아의 팽창'을 막는 것이었다. 지금도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 '대영제국'은 러시아가 '부동항'을 갖지 못하도록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에 강국이라면 바다를 지배하는 것이고, 바다를 지배하기 위해선 '강력한 해군'을 양성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러시아도 '발트함대'라는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부동항'을 갖고 있지 못해서 이 최강의 함대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러시아가 바다로 나올 만한 지점을 '영국과 미국, 그리고 영연방에 속하는 나라들'이 모조리 막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러시아가 '청나라의 여순항'과 '조선반도의 항구'를 얻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게 '아관파천'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국은 부랴부랴 일본을 향해 '러브콜'을 보냈다. 아직 일본 혼자서는 러시아를 상대할 여력이 없을 테니, '영일동맹'을 맺어 영국과 미국, 그리고 영연방이 러시아와 한판 붙으려는 '일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일본은 그 손을 덥석 잡는다. 그리고 막대한 차관을 빌려서 '대국 러시아'와 한판 승부를 보려 한다. 이게 바로 '러일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의 상황이다. 한편, 조선은 '대한제국 선포'를 단행하고, 러일전쟁의 조짐을 간파하자, '중립선언'을 하지만, 이미 약소국으로 전락한 처지의 조선이 '아무런 힘'도 없는 나약한 중립을 들어줄 일본과 러시아가 아니다. 오히려 '러일전쟁'의 전초전이 조선땅에서 벌어진다. 일본군은 '여순항'에 머물고 있던 러시아군을 공격한 다음날, 인천(제물포)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를 침몰시키고, 경복궁을 점령해버린 뒤에 '러시아공사관'을 철수시킨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필요한 전쟁자원을 한반도에서 충당하며 본격적인 '러일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또다시 강대국들의 전쟁에 힘없는 우리 백성만 피해를 보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암튼, 일본군은 발빠르게 러시아군을 몰아붙였고, '여순'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공방전이 벌어졌다. 초반의 기습으로 승전보를 울려 기세좋게 밀어붙였지만, 러시아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군의 총공격에 러시아는 여순에서 방어에 성공하며 일본군은 엄청난 희생을 치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무모한 전투'를 지시하며 30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이곳에서 전사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러한 대승에도 '보급로'가 막히며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지 않아서 전쟁물자가 제때에 보급되지 못했고, 바이칼 호수의 얼음 위에서 '보급기차'를 말이 끌어서 전달하는 처절한 전쟁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년이나 버텼지만, 러시아는 일본과의 '육지전'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러시아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막강한 해군력 '발트함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발트함대가 일본군이 머물고 있는 태평양 서쪽 연안까지, 다시 말해, 조선의 근해까지 오기에는 너무도 멀고 험난한 길이 남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해군은 '유럽의 북해'에 있었다. 이곳에 있는 해군이 '동해'까지 가장 빠르게 오려면 일단 '대서양 연안'으로 나간 뒤에 '지중해'를 거쳐 '홍해'와 '인도양'을 지나 '말레이해협'을 지나 '동중국해'를 거쳐 '대한해협'으로 곧장 오면 된다. 그런데 러시아 함대는 이 '최단루트'를 갈 수가 없다. 앞서 언급한 '그레이트 게임' 때문이다. 당시에는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고 있던 나라는 영국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발트함대는 지중해를 지나는 길이 아닌 '아프리카 대륙'을 빙빙 돌아서 '인도양'조차 단숨에 가로질러야 했다. 왜냐면 인도도 '영국령'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함대가 기항을 해서 연료와 식량, 식수를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가는 길도 험난한데, 당시 '영국령'인 국가를 피해서 가야만 했기 때문에 먼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발트함대가 동해바다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1년이란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그 사이 일본은 '대한해협'의 길목을 막고, '대마도'에서 일본 함대를 감춰두고, 기진맥진 겨우 도착한 발트함대를 손쉽게 박살을 내버린다. 그렇게 러시아가 자랑하는 발트함대는 제 실력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수적으로도 열세인 일본 함대'에 좌초되고 만다. 허나 러시아가 '영국령'에 기항하지 않고도 먼 바다를 돌고 돌아 '동해바다'까지 도착한 것만으로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실력을 보여준 셈이다. 더구나 1년의 항해 동안, 제대로 된 보급도 없이, 단 한 대의 손실도 없이 도착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저력을 보여준 셈이라, 오히려 일본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러시아는 발트함대를 잃고도 전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시베리아 철도'만 완공되고 나면 일본과의 전쟁은 2년이고, 3년이고 계속 치룰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일본은 '영일동맹'으로 받은 차관이 2년이 지난 시점에 똑 떨어져버리고 더는 전쟁을 벌일 여력이 남지 않았다. 그만큼 일본은 '총력전'을 벌였고, 러시아는 일부만 손실을 본 상황이었던 것이다. 전쟁이 길어지면 당연히 러시아의 승리가 점쳐졌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오랜 전쟁에다 기근이 덮치자 러시아 군중들은 '아버지' 같은 니꼴라이2세 차르(황제)에게 빵을 달라고 시위를 한 것이다. 동방정교회의 주교가 십자가를 들고, 수많은 농민과 노동자로 구성된 군중들은 '차르의 초상화'를 들고서 행진을 했고, 차르가 머물고 있는 성 앞에 모여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모인 굶주린 군중을 향해 병사들은 발포를 명령했고, 수많은 사상자가 하얀 눈밭을 시뻘겋게 물들이자 성난 군중들은 차르를 향해 분노를 표출했던 것이다. 연일 이러지는 시위에 결국 차르도 두손을 들었고, 러시아도 더는 전쟁을 치를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미국이 '자국의 위상'을 높이고자 러일 전쟁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으니, 두 나라는 서로의 사정에 의해 미국의 중재안을 받아들였고, 결국 '일본은 명분(승전)'을 '러시아는 실리(배상금 없는 종전)'를 챙겼다. 청일전쟁과 같은 막대한 배상금을 얻을 것으로 기대했던 일본은 아쉽지만 '배상금' 대신 '조선의 이권'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되었고, 사할린 섬을 러시아로부터 할양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반면에 러시아는 국내에서 진행되는 급한 불 때문에 '조선'에서 영향력을 더는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고, 얻고 싶었던 '부동항'도 끝내 얻지 못하고 만다. 이렇게 '러일전쟁'도 종식이 되었고, 그 결과 '대한제국'은 명실공히 일본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에 고종은 '헤이그 특사'를 보내 일본의 침탈이 부당하다는 것을 만국에 알리려 했으나, 이미 서구열강은 국제사회에 '일본'을 열강으로 받아들인 뒤였기에 '고종의 외침'은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었다.


이처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한반도에서만 벌어진 사건으로 축소해서는 결과, 그 진면목을 알 수가 없다. 마땅히 '세계사의 관점'으로 넓게 보아야만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비단 '근대사 이후의 역사'만 세계사적인 관점으로 볼 일이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 '반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자긍심을 뽐내기 위해선 마땅히 '고대 4대 문명'에 고조선의 역사를 당당히 밝혀야 한다. 현재까지는 '중국(황하)문명'으로 퉁치고 있는 것이 사실은 '상(은)나라 갑골문자'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으니, '상나라'가 한족의 나라가 아니라 동이족의 나라였다는 진실을 밝히고, '갑골문자(한자)'가 한족의 문자가 아니라 동이족의 문자였다는 진실, 또한 낱낱히 밝혀져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가 역사의 진실을 '한국사'라는 좁은 시선으로만 관찰하게 되면, 이러한 진실 또한 그냥 묻혀야만 한다. 그리고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왜곡'의 탓이라고만 푸념을 늘어놓을 텐가?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를 '세계사의 반열'로 올려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의 혜안을 가져야할 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운몽 : 인생사 덧없다 역사로 통하는 고전문학 9
이영민 지음, 김도연 그림, 황인원 정보글 / 휴이넘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XVIII / 휴이넘 1번째 리뷰] 서포 김만중의 한글소설 <구운몽>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필독서로 지정되었고,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소설이라 '수능'에서 다루지 않은 지 오래 되었더라도 '내신'과 '수행'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할 작품으로 다뤄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 시험에서 나올 법한 내용부터 정리해보자. 크게는 세 가지다.

하나는 <구운몽>은 사대부 양반인 김만중이 손수 지은 '순한글문학'이라는 점이다. 조선 숙종 때 여러 차례의 환국과 붕당정치로 인해 수많은 관료들이 유배를 가곤 했는데, 그 무리 중에는 서포 김만중도 포함되어 있다. 무려 6차례나 유배를 갔다고 한다. 그렇게 유배를 가니, 홀로 남겨진 어머님께 위로를 드릴 겸 편지와 글을 써서 보냈는데, <구운몽>도 바로 그런 효심에서 비롯되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운몽>을 '유배문학'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이 소설이 '몽자류 소설'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현실'에서 '꿈속'으로, 다시 '꿈속'에서 '현실'로 되돌아오는 '몽유계 소설'인데, 현실을 묘사한 대목에서도 '주제'가 담겨 있고, 꿈속을 그린 대목에서도 '주제'를 읽을 수 있기에 '몽자류 소설'이라 부른다. 한편, 몽유계 소설에는 '몽유록 소설'도 있는데, 역시 마찬가지로 '현실-꿈속-현실'의 구성을 보여주지만, '현실'을 다룬 부분에서는 주제를 찾을 수 없고, 오직 '꿈속' 이야기에서만 주제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몽자류 소설'과 구분이 된다.

또 하나는 <구운몽>이 불교적 색채가 강한 소설이지만,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유교적인 양상'을 강하게 띠고, 소설 전반적으로는 신선이나 용왕, 도술, 그리고 상서로운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어서 '도교적인 표현'도 아주 잘 드러나 있다. 그런 까닭에 이 작품을 '유불선 사상'이 합일되어 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내용들이 주로 시험에서 다루는 부분이기에 정리해두면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교과서적인 해석'만이 <구운몽>의 전부는 아니다. 현실세계의 '성진'이 얻는 깨달음이 불가에서 말하는 '인생무상(인생사 덧없음)'이고, 꿈속세계에서 '양소유'가 누린 삶의 즐거움이 유가에서 중시하는 '입신양명(출세하여 명성을 널리 알림)'이며, 작품 전반적으로 흐르는 도가적인 분위기에서 '신비함과 신묘함'으로 재미를 증폭시키는 것으로 <구운몽>을 모두 읽었다고 말한다면, 이 소설을 '필독서'라고 지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미 '모범답안'이 나와 있는데, 뭘 더 읽으라는 말인가. 그저 '요점정리'한 내용을 달달 외워서 '시험성적'만 높이면 그뿐일텐데 말이다.

모름지기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들은 아주 우수한 작품이란 증거다. 우수한 작품으로 실린 까닭은 '딱 한 번만 읽으면 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두고 두고 읽어도 좋고, 읽으면 읽을수록 읽는 맛이 우러나는 훌륭한 작품'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운몽>도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맛을 어디서 찾으면 좋을까? 나는 '양소유의 삶'에서 그 재미를 찾으려 한다. 왜냐면 양소유의 이름부터 '양기가 철철 넘치도록 이 세상 한껏 즐기며 노닐다'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양소유의 곁에는 '팔선녀'가 함께 한다. 성진스님과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친 위부인을 모시는 아름다운 시녀들이 바로 '팔선녀'의 정체인데, 이들이 모두 꿈속에서 '인간세상'으로 다시 태어나니 진채봉, 계섬월, 정경채, 가춘운, 난양공주(이소화), 적경홍, 심요연, 백능파가 그녀들이다.

그런데 <구운몽>을 색다른 재미로 읽는 방법으로 '팔선녀'를 현생의 아이돌로 대체해도 좋단 말이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핑클'과 '베이비복스' 멤버로 팔선녀를 구성했다. 30대에는 '소녀시대' 멤버로 꾸미기도 했다. 지금이라면 '4세대 아이돌' 멤버들을 골라서 장원영, 안유진, 카리나, 윈터, 엔믹스 설윤, 해원, 뉴진스 민지, 하니 등등으로 꾸며서 읽어도 색다른 맛이 아니겠느냔 말이다. 아 참..이번에도 '카라'는 빼먹었네. 어차피 일장춘몽에 불과한 인생사이고, 덧없는 하룻밤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무슨 상상인들 하지 못하겠느냔 말이다. 할 수 있다면 '돈 잘 버는 여성', '요리 잘 하는 여성', '노래 잘 부르는 여성', '권력을 쥐고 있는 여성', '천재적 지능을 가진 여성', '애교가 철철 넘치는 여성', '외모가 아름다운 여성', 그리고 '가정적인 여성'이 남편을 한결 같이 존경하고, 부인들끼리 서로 우애가 넘치도록 한 집에서 시부모님께 효도하며 살아가는 상상을 하면서 읽어도 좋단 말이다.

그렇다면 남성독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으니, 그럼 여성독자들은 어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좋을까? 남성독자들에게 '팔선녀'라면, 여성독자들에겐 '팔선남', 아니 '팔꽃남'으로 각색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함께 논술수업을 진행한 여학생은 국적불문하고 '휴 잭맨'을 으뜸으로 꼽고서는 '아스트로 차은우', '공유', '현빈', '강동원', 'BTS 진', '이동욱', 그리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선택했다. 뭐, 여성독자라면 차고 넘치는 '잘난 남자들'을 다 선택해서 읽어도 즐겁지 않겠는가? 돈도 많고, 잘 생기고, 몸매 좋고, 성격 좋고, 사회적 지위까지 누릴 거 다 누리며 사는 남자들을 자신은 '공주'가 되어 곁을 지키는 호위무사로 삼아도 좋고 말이다.

나는 이렇게 <구운몽>을 읽을 때마다 수없이 많은 버전으로 읽으며 '인생의 낙'을 즐기고 또 즐긴다. 그러나 그러한 꿈 같은 일이 결국엔 '다 부질 없다'는 주제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성진의 깨달음을 일깨워주기 위한 '육관 대사'의 의도가 바로 이것이니 말이다. 누릴 수 있을만큼 원 없이 다 누려본 뒤에 비로소 그런 것들이 모두 다 '부질 없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보라는 것이다. 호사도 누려보아야 '별것 아니다'라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 어설프게 누려보거나 아예 누려보지 못하면 '평생의 한'으로 남아, '부자가 되게 해주세요', '초능력을 갖고 싶어요', '초절정 미남/미녀가 되게 해주세요' 따위의 소원을 가없이 빌기 마련이다. 그런데 <구운몽>을 완독하고 나면 비록 '꿈속일망정' 원 없이 다 누린 '양소유의 삶'이 사실은 인생의 진정한 바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이 죽을 때가 되니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저 세상'으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거꾸로 생각을 해도 마찬가지다. 불로장생약이 있어서 '천수(千壽)'를 누린다해도 인생의 낙을 그리 오래 누리지 못하고, 금세 질려버린다는 사실을 깨닫기 마련이다. 안 그럴 것 같지만, 재밌는 게임도 100년동안 하라면 못할 것이며, 즐거운 파티도 100년을 계속하면 지루해질 것이다. 그럼 10년동안은 재밌고 즐거울까? 우리네 인간의 청춘(젊음)이 20살부터 39살까지 대략 20년 가량이라는 것이 참 신묘할 지경이다. 40대, 50대가 되면 늙어서 체력이 떨어져서 못 노는 것이 아니라 '노는 것'이 슬슬 지겨워져서 더는 놀고 싶어지지 않게 된다. 내 나이가 50대로 접어들어서 <구운몽>을 다시 읽으니, 육관 대사가 성진스님에게 깨우치게 하려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또 하나'를 깨우치게 되었다.

흔히들 <어린 왕자>같은 명작 소설을 '10대에 느낀 감동', '20대에 느낀 감동'이 사뭇 다르다고 말한다. 그렇게 30대, 40대, 50대를 지내며 주기적으로 되새기며 읽은 책들의 재미도 사뭇 달라지기 마련이다. <구운몽>도 그렇다. 10대에는 '팔선녀의 외모'에 주목해서 멤버만 바꿔도 희희낙락하며 즐거웠는데, 20대가 되니 '입신양명'이 간절했고, 30대가 되니 '팔선녀의 외모'보다는 '팔선녀의 능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40대가 되니 '입신양명'을 넘어 '안락한 노후마련'을 위해서라도 출세가 간절했으며, 50대가 되니 비로소 '인생무상'이란 말의 참뜻을 깨우치게 되었다. 60대가 되면 <구운몽>을 또 어떻게 이해하게 될지 몹시 궁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9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9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XVII / 넥서스Friends 9번째 리뷰] 4권에서 '사랑'에 빠지고, 5권에서 '결혼'에 골인한 인간 규조와 화사족 요괴 하쓰네가 9권에서 '쌍둥이 자매'를 출산하게 된다. 이렇게 길고도 긴 러브스토리가 이어지는 건가 싶지만, 그 사이 6권부터 8권까지 수많은 이야기가 뒤죽박죽 이어나가며 가히 '방대한 세계관'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중세인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인간들은 모르는 요괴들의 기묘한 이야기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아, 그렇다고 해서 9권이 끝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아직 10권이 남았고, 24년에 발간한 <요괴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라는 '시즌2'에 해당하는 소설이 이미 네 권이나 출간한 상태다. 이미 <이상한 과자가게 전천당>도 '시즌2'에 돌입한 상태이니, 레이코가 그려놓은 '그녀만의 판타지 세계관'은 뚜렷한 족적을 남긴 셈이다. 비록 '일본소설'이 내 취향이 아니고, '전천당'에선 큰 실망을 한 나였지만, 이 모든 것을 극복해보고 '히로시마 레이코의 판타지 세계관'을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일단, '요괴'부터 정리해야 할 것이다. 요괴란 '요사스럽고 괴이한 귀신'의 총칭으로 보인다. 정리하면 '언행이 방정맞고 경솔하고(요망하다), 모습이 정상적이지 않고 별나다(괴이하다)'에 어울리는 모든 귀신을 '요괴'라고 퉁쳐서 부르는 것 같다. 요괴의 정체를 정확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표현하는 까닭은 누구도 그 실체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괴'에 관한 이야기는 전설이나 민담, 신화속에서 상당히 많이 전래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국요괴', '일본요괴', '중국요괴', 그밖의 동양요괴 등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요괴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것은 중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산해경>, <봉신연의> 등 온갖 귀신과 요괴가 등장하는 이러한 책들에서 '원형'을 찾아볼 수 있고, 여기에 각 나라의 '지리적 특성'에 따른 지역문화와 사람들의 정서, 그리고 무속신앙이나 불교, 도교 사상과도 결부되면서 다양한 '요괴'가 등장하고, 새롭게 탄생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히로시마 레이코가 그려낸 '일본 중세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요괴 판타지'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낸 것이 그리 새로운 시도는 아니고, 아주 오래전부터 오래된 소설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져왔던 것이라는 '익숙한 사실'을 접할 수 있다.

그렇다고해서 히로시마 레이코의 '요괴 세계관'이 기존의 세계관을 베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앞선 작품인 <이상한 과자가게 전천당>이나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에서 보여주는 판타지는 '히로시마 레이코'의 새로운 판타지인 것은 분명하다. 단지 그녀가 완전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한 것이 아닌 그 '원형'이 존재했으며, 그녀만의 방식으로 '변형'을 가했다는 것을 설명한 것 뿐이다. 여기서 관건은 그 '변형'이 21세기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느냐는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증거로 <전천당>과 <요괴돌보미> 시리즈가 '시즌2'에 돌입한 것만 봐도 단박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흡입력'이 대단하기 때문에 한 번 그녀의 판타지를 읽기 시작한 독자들은 좀처럼 손에서 놓기 힘들고, 읽었다면 '끝장'을 보아야 속이 시원할 것이라는 점을 장담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내가 '일본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까닭이 히로시마 레이코의 소설에서도 발견되었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대단한 흡입력으로 독자들을 몰입하게 만드는데, 그 몰입에 따른 '감동'이랄까..이런 '여운'이 길게 가지 못하고 뚝 끊어져 버린다는 점이 이 책을 '두 번' 다시 읽히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소설'은 대부분 가볍다. 그 때문에 좋아하는 독자분들도 많겠지만, 나는 그런 점이 별로 매력적이지 않게 작용한다. 그리고 그런 '가벼움'은 초반에 대단한 흥미로운 전개로 기대감을 최고조를 끌어올린 다음에 중반쯤 넘어가면 이미 '결말'이 예상되고, 종반으로 치달으면 '뻔한 결말'이거나 '의문(?)의 반전'으로 대단원을 내려버려서 초반의 흥미가 크면 클수록 실망감도 크게 작용하기에 점점 '일본소설'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었다. 이런 흥미와 대실망의 전형적인 케이스가 바로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결말 부분일 것이다. '거대 로봇'이 등장하고, '종말론'적인 시공간적 배경이 전반적으로 흐르면서 '인류의 구원'이란 막중한 책임을 진 '소년(신지)'이 등장해서 '사도'라 불리는 악마와 싸워나가는 초슈퍼하이퍼울트라특급 서스펜트로 매회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애니메이션이 '최종화'에 접어들어서는 "오메데토(축하해) 신지짱~"이라면서 '순정만화 엔딩'으로 끝내버리는...암튼, 나는 이런 방식의 '일본소설'을 꽤나 싫어하게 되었다.

그래서 레이코의 <전천당>도 싫어하게 된 것이다. 두서 없는 뒤죽박죽 '기묘한 이야기'의 어린이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상한 과자가게 전천당>을 둘러싼 스토리는 매우 흥미롭게 진행되었다. 그렇게 1권, 2권, 3권...까지 읽다보니 매번 반복적이고 '복불복의 과자, 또는 아이템'이 등장해서 독자들에게 '교훈적 이야기'서부터 '이상한 이야기', '끔찍한 이야기' 등등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방식이었는데, 읽다보니 결말이 벌써 예상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똑같은 패턴'으로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네버엔딩 스토리'에 금세 지쳐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는 달랐다. 에도시대 요괴들의 이야기라는 방식이 '오컬트 장르'를 좋아하는 내 취향을 저격함과 동시에 '요괴돌보미'라는 완전 새로운 에피소드 전개가 내 흥미를 폭발시켰기 때문이다. 거기에 나름의 '교훈'을 담고, '재미'에 충실하면서도 각각의 에피소드가 주는 '감동'까지 전해주었다. 그리고 앞에 짜여진 에피소드가 뒤에 나올 에피소드와 착착 결합하면서 탄탄히 정립되어가는 '요괴돌보미 세계관'이 나름 색다른 맛을 전개해주었기에 아주 흡족했다. 이를 테면, '인간의 그릇된 욕망'에 빌붙은 나쁜 요괴들을 퇴치하거나 '정의롭지 못한 본능'에 충실하면 같은 요괴라도 처벌을 면치 못한다는 '요괴 봉행소'의 심판관이 등장하여, 인간 못지 않게...어쩌면 인간보다 더 나은...나름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세계관이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간간히 등장하는 '스펙타클한 대결 장면'이나 '범죄 추리'를 연상케하는 미스테리한 이야기가 전개되기도 하고, 인간과 요괴의 선을 넘는 사랑이야기까지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의 세계관은 정말 매력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은 '사랑스런 어린 아이'를 지극정성으로 돌봐주는 컨셉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무릇 '아기'는 사람 뿐만 아니라 짐승의 아기도 귀엽고, 요괴의 아기는 더 귀엽다(?)는 컨셉이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나 아무리 요괴일지라도 '생명'을 가볍게 다루는 듯한 뉘앙스는 많이 아쉽다. 아무리 '엑스트라'에 불과한 캐릭터일지라도 '개연성'과 무관하게 특정 캐릭터의 힘이나 능력을 대단하다고 느껴지게 만들기 위해서 불필요한 희생을 강조하거나, 잔인하다 못해 끔찍하고 잔혹하게 '학살'을 묘사하는 부분은 이 소설을 '어린이용'으로 보기 힘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 책의 분류를 '어린이책'으로 하고 있는 것에 반해서 '나의 기준'으로는 절대 '어린이책'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리뷰도 '성인버전'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히로시마 레이코의 판타지 세계관은 매우 매력적이며, '감동적'으로 비춰보인다는 점은 인정이다. 가끔씩 등장하는 '잔혹함'만 살짝 수위조절을 한다면 어린이책으로도 훌륭할 것 같고, 아예 '성인버전'으로 더 잔혹하고 끔찍하고 요염하게 그려졌더라도 아주 매력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이 '성인버전'으로 그려졌다면 또다시 '용두사미'격으로 흐지부지되는 뻔한 결말이 걸림돌로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딱 이 정도가 적당하다는 결론이다. 앞으로도 '요괴돌보미'의 시즌이 계속 이어지길 기대하는 독자가 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