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토끼
김지윤 지음 / 반달(킨더랜드)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CMXXXVI / 반달(킨더랜드) 1번째 리뷰] 사실 '유아'와 '어린이', 그리고 '청소년'에 대한 정의는 굉장히 모호하다. 몇 살, 몇 개월부터 정확하게 어린이와 청소년을 구분할 것인지, 그 구분을 '나이'로 할 것인지, '지능수준'으로 할 것인지, '인지발달'이나 '정서발달'로 정할 것인지, 그 어떤 것도 우리 사회는 정한 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미성년에 속하는 아이들을 유아, 어린이, 아동, 소아, 청소년, 미성년 등등 다양하게 부르고 있으며, 여기에 무슨 기준을 따른 것인지 명확하게 밝힌 적도 없다. 그저 '학령'을 기준으로 만6세부터 초등학교 학생으로 부르고, 6년 동안의 초등교육을 2년 단위로 나눠서 '저학년(초등1,2학년)', '중학년(초등3,4학년)', 그리고 '고학년(초등5,6학년)'으로 부르는 것을 가장 선호하는 편이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입학 전을 '유아'로 부르고,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부터 '청소년'이라고 부르길 선호하는 경향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구분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지 학년에 따른 '교과편성'을 달리 했을 뿐, 정작 이를 받아들이고 배우는 '학생들의 수준편차'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6세 아이들인데도 어떤 아이들은 이미 초등3학년 수준의 학업능력을 갖추고 있는 반면에, 어떤 아이들은 '한글'과 '셈'도 제대로 떼지 못하는 이상한 현상이 공존하게 되고, 실제로 1학년 학생들의 수업내용은 '한글'도 떼지 못한 학생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그 내용의 '수준'도 어른이 겨우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고난도 수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학교는 아이가 들어갔는데 공부나 숙제는 학부모가 도맡아서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심지어 담임선생도 학습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에겐 '별도의 학원(공부방) 수업'을 듣고 학교에 보내주길 바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도대체 학교선생들은 뭘 가르치는...쿨럭쿨럭

각설하고, '그림책'은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아이들만 읽는 책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아서 서론이 길어졌다. 하지만 적어도 '초등3학년'까지는 그림책을 부모님과 함께 읽으며 '배경지식'과 더불어서 '감성지능'까지 함께 익히는 것이 바람직할 정도다. 특히 '침대맡에서 부모가 읽어주는 그림책'은 아이들에게 '정서안정'에도 매우 효과적이다. 그러니 '그림책'은 어린 시절에 절대적으로 많이 읽어주는 것이 아주 유용하다. 그렇다고해서 '다양한 그림책'을 읽어주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도 아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책 서너 권을 반복적으로 읽어줘도 무방하다. 오히려 '익숙한 이야기'가 아이들을 안심시켜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늘 새로운 이야기를 읽어주어야할 부담감을 덜게 되어 부모님의 얇아진 지갑 걱정도 날려 버릴 수 있다.

그럼, 아주 어릴 때는 부모가 대신 읽어주는게 맞겠지만, 한글을 떼고, 스스로 책을 읽을 나이가 충분히 되었다면 '그만' 읽어줘도 무방한 것은 아닐까? 정답은 '반반'이다. 물론 아이가 스스로 읽는 것을 좋아한다면 그리해도 좋다. 하지만 부모님께 읽어달라고 조르는 아이라면 계속 읽어주는 것이 더 낫다. 이때 부모가 사정이 있어서 읽어줄 수 없다면, 아이에게 '지금은 읽어줄 수 없는 사정'을 충분히 설명해주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네 나이가 몇 살이데, 아직까지 응석을 부리는 거야", "이젠 너도 컸으니 스스로 읽는 습관을 들여야 해"라는 이유를 들면서, 억지로 떼어내려고 한다면, 아이가 '독서'를 싫어하는 계기로 작동할 수도 있으며, 아이의 정서에 긍정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된다. 그러니 젖을 떼고, 이유식으로 넘어가는 시기처럼 윽박지르며 반강제적인 상황을 연출하기보다는 아이가 스스로 책을 읽으려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부모와 함께 책을 읽으며 즐기는 시간을 오래 끌고 나가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학부모가 '그림책'에서 아이들에게 읽어주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 '그림책'은 글보다 '그림'이 우선인 책이다. 그러니 '글자'만 읽어주는 단순한 독서법이 아닌 '그림'을 읽어주는 고난도의 독서법을 부모가 먼저 선행해서 보여주어야 한다. 이는 '그림'에서 스토리를 찾아내는 방법이다. 흔히 '스토리텔링'이라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학부모는 '독서전문가'가 아니기에 한 권의 그림책으로 원하는 것을 모두 뽑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간단한 비법'만 알아도 웬만한 전문가 뺨 칠 정도로 잘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길 바란다.

먼저, 등장인물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림책속에서 '주인공'을 찾아내는 것인데, 몇 번만 하면 아이들도 '주연'과 '조연'을 구분할 수 있다.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숨은그림찾기'하듯 그림책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것이다. 이 그림책 <복숭아 토끼>는 '제목'에서부터 주인공이 누구인지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주인공 찾기가 굉장히 쉽지만, 다행히 책의 그림속에 주인공인 '토끼'가 제법 잘 숨어 있다. 더구나 우리 '민화' 형식의 그림체가 아주 형형색색 알록달록하게 강렬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색채 감각'을 익히기에도 아주 효과적인 그림책이다. 그렇게 '주인공 찾기'를 하면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기'를 하는 것이다. 그럼 아이들은 그림책을 '읽는 것'이 아닌 '주인공 찾기 놀이'로 이해하게 된다. 즉, 책을 읽는 '부담감'이나 '거부감'을 줄일 수 있다. 독서교육이 힘든 까닭은 아이들이 책을 '놀이'가 아닌 '학습'으로 인식해서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러니 독서는 곧 '놀이'라는 공식으로 아이들을 이끌어주어야 한다.

자,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면, 이제 본격적인 '스토리텔링'을 해줘도 된다. 만약 아이가 아직도 책을 읽을 준비가 덜 되었다면, 아까의 놀이 단계를 계속적으로 반복해도 좋다. 물론 놀이책을 다양하게 바꾸면서 해도 좋고, 같은 책으로 놀이를 계속하게 될 때는 아주 조금씩 '주인공 토끼'가 하는 이야기인 것처럼 대강의 줄거리를 살짝살짝 가미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글자 강박'에 들려서 글자부터 읽으려는 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아직 아이가 '한글떼기 전'이라면 글자부터 읽을 게 아니라 '말'부터 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어차피 '한글'을 떼기 전이라면 '아는 글자', '익숙한 글자'만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전체를 리딩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아이가 '알고 있는 글자', '이해하고 있는 글자'부터 유혹을 하면서 차근차근 천천히 학습하길 바란다. 그리고서 '그림'만으로 대강의 스토리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훨씬 더 즐거운 독서가 될 것이다.

이때, 될 수 있으면 '전문성우'의 흉내를 내면 좋다. 최대한 등장인물에 어울리는 목소리를 연출하면 '몰입도'가 높아진다는 말이다. 또한 '상황'에 맞는 목소리로 리딩을 하면 아이들은 부모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상상'을 하게 되고, 부모가 가리키는 '그림'에 주목을 하면서 이야기에 따라서 '그림'이 생동감 넘치게 움직이는 환상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 이는 '연상법 훈련'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능력을 타고 났으니 특별히 가르치려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저 학부모는 아이와 함께 즐거운 책읽기에만 열중하면 된다. 억지로 읽어주는 건 생각도 하지 말고 말이다. 물론 아이의 상상력에 뒤쳐져서 학부모가 미처 쫓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테지만, 그럴 때에는 아이에게 '스토리텔링'을 맡겨도 좋을 것이다.

그럴 땐 학부모가 적절히 '발문(질문)'을 던지면서 아이가 더욱더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때 주의할 점은 '간단한 질문'이 아닌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대답을 하는 부담을 줄일 수 있다. 그 반대로 '간단한 질문'을 하면서 '구체적인 답변'을 요구하게 되면 아이는 '짧은 표현력'으로 대답할 말을 잊어버리고 답을 하는 부담감에 입을 꼭 다물 수도 있다. 그러니 최대한 질문은 구체적으로 길게 하고, 아이는 답을 말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어 '말문'부터 틔일 수 있도록 해주면 좋다. 여기서 명심하면 좋은 것이 바로 '칭찬'이다. 아이가 무슨 답을 하든 모두 정답처리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과할 정도로 칭찬을 퍼부어주어라. 그래야 아이의 말문을 빨리 틔우고, 독서가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습득하게 된다. 이런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건 당연지사다. 칭찬을 해서 춤을 추는 건 고래만이 아닌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서의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아니면 '즐거운 독서'를 함께 하고서, "또 읽어줘"라는 무한 되돌이표에 빠져들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독서시간을 '타이머'로 맞춰놓고 하는 방법도 있고, '횟수'로 맞춰 놓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또는 '밥이 다 될 때까지', '아빠가 퇴근할 때까지'라면서 '상황'으로 독서 종료를 맞춰 놓을 수도 있고, '특별한 글자'가 책 속에서 나오면 '그 글자'가 나올 때까지만 읽어주겠다고 정하는 방법도 있다. 물론 '특별한 그림'이 나오면, "오늘은 여기까지다"라면서 끝맺기를 해도 좋다. 이때 중요한 것은 '약속정하기'다. 새끼손가락 꼭꼭 걸고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거, 알고 있지?"라면서 생활규칙을 지키는 일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도 알려주어야 한다. 이때 돌발상황으로 아이가 울면서 떼를 쓴다면, 무작정 달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엄마도 규칙 때문에 어쩔 수 없어. 하지만 내일 다시 엄마랑, 또는 아빠랑 함께 다시 읽어줄게. 자, 약속!"이라면서 '새로운 약속'을 지켜야 바람직한 것이라고 가르쳐 주면 좋을 것이다.

끝으로 이 그림책 <복숭아 토끼>는 우리 민화를 그림으로 선보여주고, 등장인물도 '민화'속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동물로 가득 채웠다. 그런데 우리 민화속의 동물들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도 함께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토끼는 '다산'과 '장수'를 상징하고, 복숭아도 '장수', 봉황은 '왕'을 상징하며, 물고기는 '번성'과 '출세'를 의미하고, 호랑이는 '액막이'와 '산신령', 포도는 '다산'과 '풍요', 수탉은 '벼슬', 그리고 흑룡은 '수호신'이자 '비'를 내리는 영험한 동물을 뜻한다고 한다. 그렇게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이나 문양만 보고도 그 그림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으니, '예술적 교양'을 함양하는데에도 아주 탁월한 그림책이다. 더구나 우리 만화는 '강렬한 색채'를 사용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색감'을 훈련시키는데에도 아주 훌륭할 것이다. 그림책이 비싼 이유도 바로 이렇게 '활용도'가 매우 높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왕 책을 구매하셨다면 뽕을 뽑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누나는 연애중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9년 8월
평점 :
절판


[My Review MCMXXXV / 이봄 3번째 리뷰] <내 누나>(2014), <내 누나 속편>(2017)에 이은 세 번째 '단행본'이다. 일본의 패션 잡지 '앙앙(an an)'에 연재한 만화를 모아서 펴낸 책인듯 싶은데, 다 읽으니 그저 그랬다. 처음으로 읽었던 <내 누나>는 너무 좋았다. 누나가 남동생에게 인생선배로서 코칭을 해주는 컨셉이 정말 좋았기 때문이다. 더불어서 남자는 잘 모르는 '여자의 속마음'을 남자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해주는 점에 배울 점이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리 세 편을 다 읽기는 했는데, 굳이 3권이나 읽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같은 레퍼토리'를 무한 반복한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여성패션 잡지 성격상 '여성의 속마음'을 대변해주는 내용이 인기 있을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남성독자'인 나에겐 '그래서, 여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점으로 결말을 내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30대 커리어우먼인 '지하루'가 말하는 내용은 늘 '여성이 바라고 바라는 남자'가 대화의 1순위였다. 그래서 '어제'의 데이트 상대가 어쨌고, '오늘'의 데이트 상대는 어땠으며, '내일'의 데이트 상대는 저랬으면 참 좋겠다는 것이 대화의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지하루가 늘 내뱉는 말은 "살 빼고 싶다"는 말이다. 근데 남동생이 누나에게 "늘 같은 말 뿐이다"라고 핀잔이라도 줄라치면 누나는 "오늘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네. 여자의 말에는 '같은 말'이 없어. 비록 '같은 말'처럼 들리더라도 '상황'이 달라지면 말뜻도 달라지는 거야. 여자의 '본마음'을 캐치하지 않으면 인기남이 되기 힘들어. 여자가 '듣고 싶은 말'을 할 줄 아는 남자가 되어야 해"라고 말할 뿐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왜 상황이 달라졌는데, '같은 말'을 하는 걸까요? 같은 말을 했으면 '뜻'도 같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여자들은 그 말의 본래 뜻을 잘 이해하는데, 왜 남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쓰는 걸까요?

처음엔 이런 '차이점'이 신선했고 '여자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서 더 많은 정보를 얻고자 탐독하려고도 했으나, 그 열기는 금방 시들해지고 말았다. 지하루가 바라는 것이, 다시 말해, 30대 여성이 '사회생활'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그저 그런 '속물근성(?)'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30대 남성이 바라는 '속물근성'가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대의 도시남녀들은 서로가 바라는 '속물'이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그 수준에서 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여자의 속마음'을 굳이 알아챌 필요도 없게 되었다. 그저 저들의 '개인적 취향'에 걸맞는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는 것이 전부인 '만화'가 되고 말았다. 이걸 굳이 3권이나 읽고서 깨달을 필요가 없는 셈이었다.

마스다 미리의 인기비결은 그럼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물론 그 인기가 '현재진행형'은 아니지만, 한시절을 풍미했던 인기작가의 성공비결을 분석하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잘 보이진 않았다. 그저 '유머스러움'이라는 것이 유일한 비결처럼 보였다. 그마저 '철지난 유머'여서 그리 신명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닌 듯 싶었다. 다른 팬들도 <내 누나> 시리즈에서는 크게 실망하고, <수짱> 시리즈에서 받았던 감명을 이어가지 못한 작품이라고 평가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수짱>에서는 그 인기비결을 제대로 발견할 수 있을까? 다음 책은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신론의 시대 - 한국 스켑틱 Skeptic 2018 Vol.15 스켑틱 SKEPTIC 15
스켑틱 협회 편집부 지음 / 바다출판사 / 2018년 9월
평점 :
품절


[My Review MCMXXXIV / 바다출판사 14번째 리뷰] 25년에 7년전 잡지를 읽고 있는 것이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것이 '과학잡지'이고, 또한 '과학적 회의주의'에 입각한 칼럼을 읽는다는 것은 전혀 우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왜냐면 그 시절 '철지난 논쟁'이 7년이나 지난 지금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2018년은 '박근혜 탄핵'이 이루어지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 2년째가 되는 해다. 그 시절에 날선 공방이 오고 가던 것은 바로 '유사역사학'과 '사이비역사'에 대한 날선 비난이었다. 이 잡지의 제목이 '무신론의 시대'라고 달려 있으나, 조금 유심히 살펴보면 살짝 작은 글자로 '누가 역사를 왜곡하는가'라는 제목의 칼럼도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역사왜곡'을 하려던 세력이 있었단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있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철저한 역사왜곡이 진행되어 왔었다. 바로 '일제의 식민사학'이었다. 일제는 '한국지배'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한국의 역사를 일본 역사의 지위 '아래' 두려는 작업을 실시했으나 쉽지 않았다. 왜냐면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의 역사는 늘 일본 역사보다 상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를 뒤집기 위해 억지주장이라도 해야 했으나 확실한 물증도 없이 역사를 왜곡했다가는 서구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일한 아시아국가로서 체면이 손상될 우려가 있기에 매우 치밀하고 철저한 '왜곡'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결과 내놓은 것들이 '임나일본부설'이었고, '광개토대왕 비문조작', 그리고 '칠지도 명문해석 논란' 따위 였다. 하지만 이런 왜곡 시도는 허술했던 탓에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대부분 '왜곡의 실체'까지 파악하여 '반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땅의 역사학자들이 저지른 '식민사학의 뿌리'는 매우 큰 문제를 낳았다. 우리 역사의 실체를 낮잡아보는 '자학사관의 모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못났다'고 공식화 해버리니 도저히 손을 쓸 도리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에 소위 '민족사관'으로 우리 역사의 자긍심을 되살리자는 민족주의 역사관을 가진 학자들이 '식민사관'에 맞불을 놓으니, 이런 역사학이 '비과학적'이라면서 국뽕에 물든 '국수주의'에 불과한 날조된 역사라고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비난을 쏟아내는 학자들이 대학강단에 선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기에 '강단사학자'라고 불리고, 이에 맞서 국수주의 역사관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재야에 묻혀서 '학계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발표한다고 하여 '재야사학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렇게 양단에 서서 서로를 향한 날선 비판과 비난이 마구마구 쏟아지기를 반복하던 와중에 '박근혜 정권'은 역사교과서를 기존 '검정교과서'에서 '국정교과서'로 단일화를 하겠다는 발표를 해버린다. 이유는 학생들이 배우는 '검정교과서'가 좌익사상에 물들고 북한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서 대단히 우려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정교과서'를 편찬해서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가르치겠다고 발표를 했는데, 하필 그런 '국정교과서'를 편찬하는 주최가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인 것이 도마에 올랐다. 여기저기에서 교육정책에까지 '식민사관'과 '보수우익적 정치색'을 심으려는 것이냐면서 엄청난 논란이 되었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국정교과서' 이야기는 잠잠해졌고, 그때 만들어진 '국정교과서'를 채택한 고등학교가 전국에서 딱 1곳뿐이었다는 뉴스가 장식되었었다.

그런데 현재 2025년이 된 지금은 어떤가? 민주주의가 위협당하며 '반국가세력'을 처단하려고 계엄령을 선포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당시에 '뉴라이트'가 주장했던 이야기는 '극우유튜버'들이 계속 이어왔고, 그런 극우적 망상을 신봉한 윤석열은 끝내 '계엄령'을 선포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걸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 당시 '젊은역사학자모임'이라는 강단사학자들이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2017),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2018)이라는 책을 저술하면서 '한국의 고대사'는 재야사학자들(그들은 '사이비역사학자'라고 부른다)에 의해 날조되다시피 했다며 '과학적 연구 검증'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리고 젊은 역사학자들은 한국의 역사에 '과학적 검증'을 들이대서 아주 '객관적인 역사'를 서술할 수 있다는 그럴 듯한 논리를 내세웠다. 겉보기에는 아주 신선했다. 대중들은 '한국 역사'에 자긍심을 키워가고 있으니, 그런 자긍심에 '과학적 검증'으로 사실을 입증할 수만 있다면 더 좋을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대중들의 이런 기대에 쇠말뚝을 박고 말았다. 과학적 검증 결과, 대중들이 즐겨보는 '재야사학자'들의 역사저술은 '사이비'에, '날조'였고, '유사과학'과 마찬가지인 '유사역사학'으로 점철되어 한국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자긍심이고 뭐고 할 것 없이 '객관적'으로 짜친 역사라는 이야기만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과거 '식민사관의 뿌리'가 제거되지 못한 결과, '자학사관의 한국사'가 다시 불거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잡지에 그 '강단사학자'의 이름이 보인다. 기경량, 안정준...이들은 '회의주의 과학잡지'에 자신들의 논리를 '과학적'으로 포장해서 사이비과학을 경계하듯 유사역사학도 경계해야 한다면서, 역시나 '한국의 고대사'를, 나아가 '한국의 역사'를 또다시 폄훼하고 있다. 그들의 주된 공격대상은 <규원사화>, <단기고사>, <환단고기>가 명백한 '위서(가짜 역사책)'이니 이를 바탕으로 한 '위대한 한국의 고대사'도 사실무근이며, '한사군'은 실존했고, '낙랑군'은 현재의 평양에 위치했으며, '임나일본부'까지는 아니어도 과거의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과학으로도 증명할 수 있으므로,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식민시절의 늙은 학자들의 입에서 나온 얘기가 아니다. 젊은 조교수들의 입에서 나온 얘기다. 서울대학교 역사학부를 졸업한 수재들이 이런 소리를 한단다. 일본의 극우논객이 할 법한 이야기를 아주 술술 거침없이 이야기하고 있어서 경악을 했더랬는데, 이 잡지에, 그 시절에, 또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버젓이 살아숨쉬며 '애국시민'을 선동하는 극우세력으로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사이비'라면서 공격했던 재야사학자들이 애써 키운 '한국 역사의 자긍심'은 모두 날조에 가깝고, 잘못된 사실에서 기인한 '욕망'이니 버려야 옳다고 말한다. 도대체 이런 목적으로 '과학적 검증'을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 당시에도 궁금했지만, 지금은 더 궁금하다. 그럼 잠시 '무신론의 시대'를 살펴 보자.

이 잡지가 편찬된 2018년을 기준으로 미국시민들의 '종교관'을 여론조사했는데, 놀랍게도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의견을 밝힌 비율이 2000년 초반보다 늘어났다고 한다. 심지어 '교회를 가지 않는다'는 사람도 늘어났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들의 비율도 확실히 늘어났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무신론'이 대세를 굳혀 가고 있다고 본 것인데, 과연 그런 것인지 의심스러운 부분은 있다. 하긴 유럽에 있는 수많은 성당과 교회에서 더 이상의 '예배(미사)'를 하지 않는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신도들이 찾지 않으니 점점 관광목적으로 방치될 뿐, 실제 원래의 용도로 쓰이지 않고 있는 건축물이 점점 늘어난다고 말이다. 이처럼 서양사람들의 '종교관', '신앙심'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에는 동의하는 바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무신론'이 확신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회의적이다. 여전히 신앙은 굳건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이 꽤나 많기 때문이다. 다만 '과학'이 발달하면서 신에 대한 믿음은 줄긴 했으나 그것이 '종교의 위세'까지 꺾지는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중론인 건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만 봐도 '신'을 믿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열세다. 그러나 '종교'를 가지고 있느냐는 물음에는 대다수가 '있다'고 대답한다. 이 말인즉슨 '과학'이 발달한 나라에서 '신의 존재'를 믿느냐 아니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종교활동'을 통해서 신앙심, 그 이상의 무엇에 대단히 열심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성당이나 교회, 절 등에서 '신앙인'들이 설교나 법회를 열 적에 종교에 관련된 이야기보다 '정치', '경제', '사회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단다. 그리고 종교인들이 '특정정파'를 지지해야 한다거나 '특정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나라가 산다는 따위의 설법을 아주 자연스럽고 공공연하게 한다고 한다. 이게 바람직한 신앙이고, 종교인지는 차치하고서, 수많은 신도들이 신부님의 말씀, 목사님의 설교, 스님의 강독을 들으면서 '믿숩니다'를 외친다는 사실이다.

이런 일련의 현상이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현상의 일부분일 것이다. 전광훈이 나와서 '헌재'를 폭파하라는 설교에, 전한길은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결사항전을 해야 한다고 강의를 한다. 왜 종교와 역사가 맞물려서 쌍으로 메롱을 떠는가 말이다. 식민사학자들이 '유사역사학'이라고 비난을 할 때, 그런 비난을 좋아할 대상이 누군지 주목했다. 전광훈, 전한길의 한목소리에 누가 좋아할지 생각해보면 답은 얼추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국정통 만화 삼국지 6 - 적벽대전
나관중 원작, 천웨이동.량샤오롱 글.그림 / WISDOM(위즈덤)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My Review MCMXXXIII / 위즈덤(Wisdom) 6번째 리뷰] 드디어 '적벽대전'이다. <정사 삼국지>에서는 적벽대전을 그리 자세히 다루진 않는다. 제갈량과 주유의 피말리는 견제도 없었고, 책략도 없이 그저 '황개'의 고육지책과 화공작전이 성공을 이루었다는 대목이 나올 뿐이다. 거기다 '적벽대전'으로 조조군이 대패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화용도에서 구사일생을 살아돌아왔다는 대목도 없다. 그저 퇴로길이 험난했다는 정도로만 서술되어 있다. 실로 밋밋하기 이를 데 없을 정도다. 그런데 <삼국지연의>에서는 그 화려함과 장엄함이 극치에 다다른다. 바야흐로 유비가 제갈량을 얻고서 '화려한 비상'을 하는 대목인 까닭이다. 그렇기에 나관중은 '적벽대전'에 공을 많이 들였다. 황개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화공작전'을 주유의 이간계와 제갈량의 동남풍, 그리고 방통의 연환계까지 끌어들여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대작으로 승화시켰다. 그러니 '적벽대전'을 제대로 즐기려면 실제 역사적 사실에 심취해 '팩트체크'를 하면서 읽으면 겁나 재미가 없다. 사실 '제갈량의 등장'서부터 팩트체크는 오히려 <삼국지>를 읽는 재미를 반감시킬 것이다. 그러니 <삼국지연의>에 충실하게 읽으며 '나관중의 의도'가 무엇인지 곰곰이 사색해보는 것이 훨씬 더 값어치 있는 독서가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연의적 사고'로 서술하려 한다.

실상 '적벽대전'의 승패는 이미 결정난 것이나 진배 없다. 그럴 까닭은 조조군이 100만 대군을 이끌고 강남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대부분 '수전 경험'이 전무한 기마병과 보병 중심의 편대였다. 물론 이 100만 대군이 장강(양쯔강)을 무사히 건너기만 한다면 강 건너 '강동땅'은 조조의 수중에 고스란히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강동의 손권 휘하에는 '수전'에 능한 장수가 차고 넘쳤다. 심지어 '해적질'을 일삼던 무장들도 넘쳐났다. 그러니 조조가 강 위에 배를 띄우기만 하면 손권의 수군은 이들을 차례차례 격파하는 방식으로 강동땅에 상륙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흔들 것이니 어찌 쉬이 승리할 수 있었겠는가. 이를 고심한 조조는 항복한 형주의 무장들을 수군제독으로 삼아 '수군 훈련'을 독려했지만, 그게 어디 하루이틀만에 숙련될 성질의 것일까? 조금만 연상을 떠올려도 쉽게 이해가 된다. 배를 타본 적이 없는 사람은 배가 조금만 흔들려도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갑옷을 입고 완전무장을 한 채 '흔들리는 갑판 위'나 '물속으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죽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단지 조조가 믿을 구석은 10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병력이다. 도강을 하기도 전에 그 가운데 반이 수몰된다 하더라도 50만의 대군이 강동땅으로 밀고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손권군의 전체 병력보다 4~5배나 더 많은 수다.

그럼에도 조조군이 쉽사리 강동을 공략하지 못한 까닭은 조조군에 '풍토병'이 돌았기 때문이다. 낯선 환경에 놓이니 전투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온'과 '습도', 그리고 '음식과 물' 사뭇 달라지니 메마른 화북지역에서 말달리던 병사들이 축축하고 무더운 더위에 쉬이 지쳐버리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으니 하나둘 질병에 걸려 쓰러졌던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전염병'이 창궐하면 삽시간에 전군에 퍼져나갔을테니 조조군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손권군에 비하면 대군이다.

그래서 주유는 계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조조의 수군책임자를 계략으로 죽여버리고, 방통의 도움을 받아 거짓정보를 그럴듯하게 믿게 만들었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화공으로 조조군을 삽시간에 괴멸시킬 전략을 다 짜놨다. 여기에 딱 하나 모자란 것이 바로 '동남풍'이었다. 당시 계절은 겨울로 접어들어 '북서 계절풍'이 계속 불던 때였다. 이런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오면 조조군의 배에 화공 계책을 쓰더라도 몇몇의 배에만 피해를 줄 뿐, 오히려 남동쪽에서 공략을 해가는 손권의 수군이 더 큰 피해를 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화공을 쓰지 않자니 병력수에서 밀리는 처지에서 맞붙어 싸우는 것으로는 희생이 너무 클 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게 한두 번은 막을 수 있다손치더라도 '엄청난 수적 우세'로 밀어붙인다면 아무리 수전에 능한 손권군이라고 하더라도 끝내 중과부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화공은 필수다. 그렇다면 '동남풍'이 불어주어야 하는데, 때마침 제갈량이 기문둔갑술을 배웠다면서 '동남풍'을 사흘간 불게 해주겠다고 약조한다. 주유는 뛸 듯이 기뻐한다.

그런데 기실 주유가 겨울철에 '동남풍'이 잠시나마 분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주유 같은 뛰어난 책략가가 당시 '기상변화'는 필히 숙지하고 있을 터인데, 동남풍이 불 것이 틀림없다고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갈량의 허풍에 주유가 그냥 속아준 것이라고 보아야 할까? 그건 아닌 듯 싶다. 그렇다면 주유가 제갈량을 죽이고 싶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도 아는 지식을 가지고 허세를 부리는 제갈량이라면 그저 그런 책사에 불과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주유의 예상대로 '동남풍'이 불 시기가 되었는데도 불지 않은 기상이변이 있었기에 속이 탔을 것이다. 그래서 초조했고 급기야 병석에 누울 정도로 중압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제갈량은 '그런' 기상이변까지 속속들이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시기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말이다. 그래서 제갈량은 호언장담을 했고, 주유는 자신도 모르는 '날씨의 조화'까지 꿰뚫고 있는 제갈량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주유는 '2인자의 지위'에 만족했어야 한다. 사실 주유가 손책과 의형제라는 것을 감안하면 제갈량과 방통에 비하면 '연배'가 더 많았을 터다. 그럼 인생선배로서 젊은 새물결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재주를 활용하여 공을 세우는 '지휘감독의 자리'에 만족했어야 마땅했다. 그래야 동오의 관점에서 훨씬 더 이득이었을테니까 말이다. 만약 주유가 '현역'에서 일찍 물러났더라면 제갈량과 방통도 자신들의 재능을 유비가 아닌 손권에게 쓰는 것이 더 이득이었을 수도 있을 터였다. 제갈량이야 '삼고초려'가 필요했을 수도 있겠으나, 방통은 강동땅에 제 발로 찾아왔더랬지 않느냔 말이다. 그랬으면 제갈량은 놓쳤더라도 방통은 오나라를 위해 재능을 발휘하며, 위나라의 사마의, 촉나라의 제갈량, 그리고 오나라의 방통이 지략을 펼치는 삼파전이 아주 볼만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주유는 문무의 모든 면에서 부족한 점이 없는 '완벽한 천재'였던 탓에 제갈량과 방통이 불편했던 것이다. 그들의 재능은 뭐랄 것도 없이 최고였지만, 주유는 아직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올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오나라는 '주유의 오만' 덕분에 제갈량과 방통을 얻지 못했다.

이런 오만은 '조조'도 한 몫 단단히 했다. 그에게는 제갈량과 방통과 같은 책사들이 구름처럼 차고 넘쳤기에 굳이 더 얻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지만, 결정적으로 제갈량과 방통에게 호되게 당하고 만다. 일찍 '곽가'를 잃어버리고 난 뒤에 자신의 흉중을 속속들이 알아채 흡족한 계책을 내놓는 인물이 더는 조조의 곁에 없긴 했지만, 그럼에도 제갈량과 방통을 원하지 않았다. 그 까닭도 주유의 경우와 비슷하다. 조조가 바로 '지략의 천재'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자기만족이 대단했던 탓이다. 더구나 천자를 등에 업고 화북지역을 몽땅 석권한 직후이지 않은가. 더구나 형주땅도 아주 손쉽게 얻어냈다. 비록 '박망파 전투'에서 유비의 기지에 눌려 큰 손실을 보긴 했지만, 대세에 크게 벗어나지도 않았다. 조조는 이런 오만을 적벽대전의 패배를 겪기 전까지 지속시켰다. 과거 '관도대전' 때 겸양한 모습을 보이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 당시에 조조는 수많은 책사들의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거기에 조조의 과단한 결단력 덕분에 원소를 크게 이기고 대승을 거뒀는데, 적벽대전에선 전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계책이 가장 훌륭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정욱의 만류와 방통의 계략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 홀랑 말아먹고서는 대패를 하고 만다.

한편, 적벽대전의 진정한 승자는 유비였다. 조조는 단 한 번의 패배로 100만 대군을 잃어버렸고, 손권은 조조의 대군과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고도 얻은 땅이 하나도 없었다. 반면에 유비는 제갈량의 세 치 혀끝으로 조조와 손권이 서로 싸우게 만들었고, 그들의 머리 위에서 노닐다가 유비에게 형주땅을 고스란히 갖다 바쳤기 때문이다. 유비는 비로소 '거점'이라고 할 만한 영지를 얻게 되었고, 이곳 형주땅을 발판으로 삼아 '서촉땅'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더구나 마량, 이적, 황충, 위연 등과 같은 훌륭한 신하와 장수까지 얻게 되었으니 유비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성과였다.

이에 단단히 화가 난 것은 바로 손권과 주유였다. 노숙이 아무리 유비와의 대결은 금물이고, 조조만 이롭게 만들 뿐이라고 중재를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손권은 유비를 죽이고 싶어했고, 주유는 제갈량을 죽이고 싶어했다. 그래서 내놓은 계책이 바로 '미인계'였다. 유표의 장자 유기가 사망하고 유비가 형주땅을 빌리는 형식으로 형주를 차지했을 무렵, 유비는 아내를 잃어버리고 만다. 오랜 고생을 했던 감부인이 그만 일찍 죽고 만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주유는 손권의 여동생 손상향을 내세워 유비를 강동땅으로 불러들인 뒤에 죽여버리는 '미인계'를 쓰자고 한 것이다. 마침 손권도 형주땅을 고스란히 유비에게 빼앗겨서 배가 아프던 차에 솔깃한 제안이라 여겨 흔쾌히 허락한다. 그런데 제갈량이 이런 '미인계'를 역이용하여 유비를 손권의 매제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미인계'로 유비를 곤경에 빠뜨리려 했는데, 도리어 손권이 여동생을 눈 뜨고 빼앗겨 버리는 곤혹스런 상황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과연 유비는 이대로 화촉을 올려 새장가를 들게 될까? 나이 오십에 꽃다운 미모의 십대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는..아니 해도 되는 것일까? 딸이라해도 될 나이인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파업 중이에요 나의 첫소설 5
아멜리 쿠튀르 지음, 마르크 부타방 그림, 심경은 옮김 / 함께자람(교학사)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My Review MCMXXXII / 함께자람(교학사) 4번째 리뷰] 대한민국도 종종 '파업'을 하지만 프랑스는 '파업'을 엄청나게 한다. 심지어 '공무원'도 파업에 동참하는 것이 합법이니 말이다. 그래서 학교 선생님이 파업을 하거나 경찰관이 파업을 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단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9살 소녀'가 파업에 들어갔다. 이유는 어릴 적 함께 지냈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슬픔 때문이다. 이제 그 속사정에 대해서 알아보자. 파업을 하게 되면 폭력으론 결코 해결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오직 대화만이 유일한 해결방법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말이다.

소녀의 엄마는 어릴 적에 돌아가셨다. 원래 병약한 몸이었는데도 무리하게 임신을 하고 힘겨운 출산을 한 탓에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엄마는 아이를 가진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고 한다. 두 부부가 서로 사랑했고 아이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뤼시가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아내가 죽고 난 뒤에 아빠는 많이 슬퍼했다. 그래서 갓 태어난 뤼시를 키울 수가 없어서 할머니에게 맡겨둔 것이다. 그렇게 뤼시는 어릴 적에 시골 농장에서 할머니와 함께 지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신세를 지게되자 뤼시는 다시 아빠와 살게 되었다. 뤼시는 할머니와 함께 지낼 수 없는 것이 몹시 슬펐지만, 방학 때면 할머니와 같이 지낼 수 있었기에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뤼시는 '갈 곳'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엄마를 잃은 슬픔은 너무 어릴 적이라 기억도 나지 않지만 할머니를 잃은 슬픔은 어린 뤼시에게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도 아빠는 할머니와 이별하게 된 뤼시의 슬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뤼시를 '견학'이나 '체험' 프로그램에 보내려 한다. 뤼시는 가기 싫다고 말했는데도 아빠는 직장에 나가고 뤼시를 돌볼 사람도 없이 집에 혼자 냅둘 수는 없다며 '강제'로 보내겠다고 한다. 그러자 뤼시는 '파업'을 선언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 버린다. 아빠가 아무리 화를 내고 달래보아도 요지부동이다. 이런 상황이 되자 '새엄마'가 협상자로 등장한다. 당시 새엄마는 '임신중'이었는데도 뤼시를 달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뤼시는 '파업'을 풀지 않았다. 음식도 먹지 않는 '단식투쟁'도 하고, 방문을 두드리는 아빠에게도 무뚝뚝하고 간단한 대답만 할 뿐이다. 뤼시가 왜 그랬냐면, 자기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는데 그게 말로 표현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뤼시가 이제 막 9살 소녀가 되었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방 안에 틀어박힌 뤼시의 유일한 친구는 '스리즈'라는 이름의 새였다. 뤼시의 방안에 커다란 새장을 마련했고, 그 새와 함께 있는 것이 뤼시의 마음을 풀어주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리고 뤼시는 '스리즈'를 통해서 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릴 수도 있었다. 그게 뤼시의 슬픔을 조금 달래주었기 때문이다.

자, 9살 소녀가 파업을 하게 된 정황이 파악되는가? 어린 나이에 '엄마의 상실'에 이어 '새엄마의 등장', 그리고 '할머니의 죽음'이라는 충격의 연속이 뤼시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또 그것이 '응어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보듬어주고 달래주어야 할 유일한 혈육인 '아빠'는 어린 여자아이의 마음을 살뜰히 챙겨줄 정도로 세심하지 못했다. 왜냐면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무게만으로도 힘겨웠을테니 말이다. 물론 '아내의 상실'은 남편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큰 슬픔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가장'이었고, '어른'이었기에 이 모든 슬픔을 홀로 이겨내야만 했다. 하지만 어린 딸이 있는데 '슬픔'에 갇혀 지낼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뤼시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하겠다는 의지로 '새엄마'도 구했고, 뤼시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우선적으로 해주려 무진 노력을 했다. 그렇지만 그런 노력은 '아빠의 관점'에서만 노력이었을 뿐, 뤼시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뤼시가 원하는 것은 '새엄마'가 아니라 '할머니'였고, '학교행사'가 아니라 '시골농장'이었다. 하지만 아빠는 뤼시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9살 소녀가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바랄 때 아빠가 맞닦뜨리는 난감함을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고 소중한 존재가 바라는 것인데 말이다. 그걸 해줄 수 없는 아빠의 마음도 안쓰럽기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어른이기에 어린 딸이 '상실감' 빠져 무기력해지는 걸 막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그게 과연 무엇일까?

방법은 여러 가지 일테지만, 책속에서는 새로 태어난 '남동생'이 뤼시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보고 싶고, 꽉 막힌 아빠는 말하고 싶지 않고, 새엄마는 꼴보기 싫었지만, 이제 막 태어난 남동생은 '신기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집안을 깜짝 놀래킬 정도로 엉금엉금 기어다니고, 새장 속으로 손을 넣자 '스리즈'가 날아와서 남동생의 손가락 위에 얌전히 앉는 것을 볼 때면 샘이 날만도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한밤중에 엉엉 우는 남동생이 뤼시가 품에 안고 다독여주자 금세 울음을 그치고 방긋방긋 웃는 얼굴이 되는 것을 보며 뤼시도 남동생을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뤼시는 남동생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골농장'을 보여주려고 아무도 몰래 둘이서만 여행을 계획하는데, 파업중이던 딸이 난데없이 어린 아기를 안고 집밖으로 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빠와 새엄마는 도리어 뤼시를 다그치고,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며 뤼시를 '기숙사 학교'로 보내겠다고 선언한다. 그게 뤼시에게 더 좋은 일일 거라면서 말이다. 과연 뤼시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책의 주제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린이의 솔직한 심정'을 다루고 있다. 어린이이기 때문에 '사리분별'도 못할 것이라는 어른들의 편견을 깨고, 어린 뤼시는 꽤나 대견한 생각들을 한다. 하지만 그 생각들은 적절히 말과 글로 표현할 줄 모르기에 그저 입을 꼭 닫고 방문도 틀어잠그고 방안에 쳐박혀 있을 뿐이다. 불안한 눈만 꿈뻑거리며 어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이럴 때 어른들은 답답하다고 속시원히 말을 하라고 화를 내고 언성을 높이고 과격한 행동을 일삼는다. 그렇게 해야만 어린이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솔직담백'하게 진심을 토해낼 거라면서 말이다. 한마디로 '미성숙한 존재'이니 '미개한 원시인'처럼 행동하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하고, 어른들처럼 '문명인'답게 말과 글과 행동으로 '자기 의사'를 조목조목 표현해야만 바람직하고 성숙한 존재로 자라날 수 있다고 믿곤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어린이의 솔직한 마음을 끌어낼 수는 없다. 차라리 갓난아기에게 하듯 '소중히' 대해 줘야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9살 소녀가 '미성숙한 존재'인 것은 맞다. 하지만 미성숙할 뿐, '미개한 존재'는 절대 아니다. 그러니 폭력을 쓰는 난폭한 방법으로는 절대로 '성숙한 존재'로 성장시킬 수 없는 법이다. 한마디로 어른과 똑같은 '완전한 인격체'로 정중하게 대해주어야 한다. 어린이에게도 '인권'은 온전히 있으며 '의무'를 내세우기에 앞서 '권리'를 충분히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미성숙한 존재라는 점만 강조해서 '권리'를 챙겨주기에 앞서 '의무' 사항만 강조하다보면 어린이는 더욱더 마음의 문을 닫아 걸기 마련이다. 그리고 한 번 닫힌 마음의 문은 점점 더 꼭꼭 닫힐 뿐이다. 그러니 부모라면 자식에게 먼저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아이도 부모를 존중하는 방법을 배운다. 왜냐면 아빠, 엄마도 누군가의 부모가 되는 것은 '낯선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족구성원이 서로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행복하고 화목한 가족이 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가족구성원은 '다양한 모습'을 띤다. 그래서 어떤 모습의 가족이어야 '행복하다'는 공식은 편견으로 작용하고, 그로 인해 새로운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 그보다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가족을 대해야 '행복한 가족'이 될 수 있는지 진지한 고민을 할 때다. 그래야 빠르고 다채롭게 변화하는 21세기 현대사회를 슬기롭게 관통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