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역사의 보물창고 백제왕도 공주 - 웅진백제 발굴 이야기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엮음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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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왕도 공주

 : 충청남도역사문화원

 : 북스고

 : 2021/08/16 - 2021/08/19


백제는 책만 좀 읽었지 사실 잘 모른다. 

일본과 중국과 교류가 활발했고, 나름 강성했지만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결국 무너진 비운의 제국이라는 것 정도가 알고 있는 백제역사의 전부다.

공주와 부여가 백제의 수도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서울이 백제의 수도로 제일 오래된 거 아닐까?

공주야 약 60여년 정도 수도로 있다가 부여로 옮겼지만 서울은 500년 이상을 수도로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서울의 백제유적이라고 해봐야 몽촌토성, 풍납토성이 전부고 대부분의 유물과 유적은 공주와 부여에 있다.

그것도 도굴된 상태로...

이 책을 보면 공주의 백제유적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말만 들었던 능산리 고분군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다. 

공산성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다.

공주가 이렇게 대단한 곳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대어를 낚은 기분이다.

재미있다. 


4% 송산리 고분군의 수로 정비 작업을 하다 우연히 발견한 무령왕릉의 발굴은 한국 고고학계의 일대 사건이라 할 만하다

11% 장선리 유적에서는 이렇듯 개미굴 같은 구덩이 유구가 무려 39기나 한꺼번에 발견되었다

15% 고고학계에서는 흔히 수촌리 유적 발굴을 무령왕릉 발견 이후 최대의 성과라고 일컫는다. 그도 그럴 것이 무덤을 하나하나 열 때마다 이전까지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백제 최고 지배층의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화려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28% 웅진은 차령산맥과 금강의 이중 방어선으로 보호받으며, 왕도 외곽을 둘러싼 능선을 따라 적들의 침입에 대응할 수 있는 방어 기능을 갖춘 곳이었다

46% 공산성은 시대를 초월해서 행정, 군사, 지리적으로 중요한 거점지 역할을 해왔다. 그 덕분에 오늘날까지 많은 역사적 기록과 유물, 유적을 공산성에서 만나볼 수 있다. 현재 공산성은 우리나라의 사적 제12호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52% 6호분은 무령왕릉 못지않게 중요한 무덤일 수도 있었다. 6호분은 송산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다른 무덤들과 달리 벽돌로 지은 무덤이었기 때문이다

53% 비록 송산리 고분군의 무덤 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볼 수 없고, 상당수의 유물이 유실되거나 도굴된 것도 사실이지만, 따로 전시관을 마련해서 5-6호분의 내실 모형과 남은 문화재 등을 함께 전시해뒀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나마 무덤을 살펴볼 수 있다

63% 무령왕릉에 들어간 벽돌들은 정확한 설계에 의해서 생산됐고, 정해진 곳에 순서대로 쌓았다는 의미다. 각 글저들은 해당 글자의 틀을 만들어 꾹 누루는 방식인 압출기법으로 문자를 새겨 넣었다

73% 이렇게 잘 만들어진 팔찌를 선물했다는 것은 아마도 520년이 왕비의 기념적인 해였거나 무슨 경사가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선물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렇듯 무령왕릉은 아주 많은 유물과 이야깃거리를 우리에게 안겨줬다

78% 정지산 유적이 웅진백제기의 유적지 중에서 매우 독특한 시설이었으리라는 증거는 발굴 과정에서 드러난 건물터의 특이한 흔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91% 고려시대 명문와의 등 면에는 대통사 혹은 대통지사라는 글자를 세로로 쓴 것도 있다. 이는 대통사가 고려시대까지 분명히 존재했고, 건물의 유지, 보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단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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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한국 근현대사 - 개정 증보판 페이퍼로드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이우형 지음 / 페이퍼로드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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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룻밤에 읽는 한국 근현대사

 : 최용범

 : 페이퍼로드

 : 2021/07/24 - 2021/08/01


하룻밤에 읽는 ~~ 시리즈..

한국 근현대사는 어렵다. 우선 사실보다는 증오와 감정이 앞서는 분야다.

사실을 이야기해도 믿지 않는다. 욕이나 안먹으면 다행이다.

그러나 모르면 안되는 분야다. 

일제 식민지시대와 독재시대, 전쟁을 거치면서 우리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자유와 독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똑똑히 배워야 한다.

민족주의자들이 어떻게 개량주의자가 되고 친일파가 되었는지를 알지 못하면 나 역시 역사와 후손에게 죄를 지을 수 있다. 

우리 아이가 나중에 "아빠는 그 때 뭐했어?"라고 물어볼 때 부끄럽지는 말아야겠다.

근현대사를 읽고 배워야 하는 이유다.

내가 알고 있는 북한의 역사하고는 좀 다르다. 

내가 알기로는 북한은 친일파 처단과 토지배분에 열심을 냈기 때문에 지지율도 높았다. 또한 빠르게 경제개발에 성공해서 60년대에는 세계적으로도 성공연구사례였던 걸로 아는데 이런 내용은 모두 빠져서 북한을 더 안좋게 기술했다. 

근현대사를 주마간산으로 보기에는 괜찮다.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많은 역사책처럼 남한을 좀더 좋게 기술했다는 것만 알고 본다면 말이다. 


p47 군란 때 피살된 일본인에 대한 위문금과 일본 시설에 대한 피해보상금 50만 원을 지불하고, 일본군을 공사관에 주둔시킨다는 내용의 제물포조약이 하나부사의 주도로 체결됐다

p78 시해의 현장에 대원군과 훈련대 병사가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할 우리 역사의 치부다. 비록 대원군이 30년간 며느리와 숙적 관계에 있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p84 청일전쟁 직후 두 나라 사이에 맺어진 시모노세키조약에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 포기 조항이 들어간 것을 기념하는 사업이었다

p93 1899년 제정된 대한국국제 곧 국가의 기본법에는 황제권을 제약할 여지가 있는 국민의 참정권이나 의회 설립 등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p107 대다수 애국계몽운동가들이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여 국권 피탈의 원인을 우리 민족에게서 찾으면서, 독립을 위한 비타협적 투쟁노선을 표방하지 못한 것은 분명한 한계였다

p128 단발령 때문에 생겨났던 이발소에서 상투를 틀어주기도 하고, 머리를 깎아주기도 하는 희한한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다

p133 이들 시설은 모두 일본과 중국 등 열강의 군사력 필요나 경제적 이권 확보의 일환으로 개설된 것이었다. 우리 근대화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p150 최남선과 이인직의 이런 반역사적인 작품이 문학적으로 새롭고 의미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p175 1882년 관계에 진출한 이래 이완용은 친러, 친미, 친일을 두루 거친 변신의 달인이었다. 그런 그가 마지막 순간 택한 이력은 일제가 하사한 직책이었다

p179 문제는 이광수 개인의 변심에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최남선, 최린, 송진우, 김성수 등 3.1운동의 실패 이후 동요하던 민족 인사들 역시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신의 본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이들의 주장은, 독립은 이미 물건너갔으니 조선은 일제의 지배를 인정한 다음 그에 걸맞은 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p196 신용하 교수에 따르면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조선총독부의 소유지가 된 땅은 국토 총면적의 약 50.4퍼센트에 해당했다

p213 1910년대 국내에서 활약했던 대표적인 독립투쟁 단체 대한 독립의군부(독립의군부)는 그렇게 탄생했다

p219 이들은 서간도 일대에 자리를 잡고 한인 자치 사회의 경제적 부흥과 독립운동 거점 마련에 힘을 쏟았다. 경학사와 부민단은 이 과정에서 탄생한 대표적인 단체였다

p232 독립을 위한 유일한 방책이 강대국의 시혜가 아닌 민족 자신의 투쟁뿐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짐으로써 이후 민족운동은 더욱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여나갈 수 있게 되었다

p275 역사학자 장세윤에 따르면 이 시기 만주 지역 무장투쟁은 확산되어 가던 패배주의와 개량주의 움직임에 못을 박고,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살린 민족해방운동의 꽃이었다

p300 신간회 해소 이후 전투성을 잃지 않았던 민족주의 세력은 사분 오열되었고 이것은 오히려 민족주의 우파 인사들이 적극적인 친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

p310 원산노련은 1월 22일 산하의 모든 노동단체와 함께 총파업을 단행하기로 결성했다. 이 방침에 따라 해륙, 운반, 중사, 제면 노동조함 등은 물론, 우너산노련에 소속되지 않은 자유노동자들까지 파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노동운동의 역사상 기념비가 될 노동자들의 대규모 총파업 투쟁이 발발한 것이다

p319 이 같은 농민투쟁의 전통이야말로 1949년 이승만 정부가 농지개혁에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한 요인이었다

p333 장지필, 이학찬과 같은 백정 출신 인사는 물론 양반 출신 천석꾼의 자제이자 동아일보 진주 지국장인 강상호 등 비백정 출신 선각자들이 적극 호응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모인 80여 명의 인사는 1923년 4월 25일 진주 대안 등에서 대회를 열어 형평사를 창립했다

p349 1934년 카프의 중심 인물이던 박영희가 얻은건 이데올로기요 잃은 건 예술이다라고 말했던 건 이들이 직면했던 딜레마를 압축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p360 좌우를 망라한 모든 세력의 통일, 단결을 통한 정부 수립의 실패, 그 후폭풍은 거셌다.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었던 좌우대립이 격화되었고, 이것은 결국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동족상잔의 비극으로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p370 통치의 효율성을 꾀하던 미 군정에게 이들의 친일 경력은 문제 되지 않았다. 이들은 대거 미 군정의 고문직에 취임했고, 그 주위로는 살 길을 찾아 헤매던 수많은 친일파와 기회주의자들이 몰려들었다

p380 메논은 왜 입장을 바꿨던 것일까?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것은 이승만과 모윤숙의 미인계 때문이었다

p398 남과 북 공히 집단 처형과 학살을 무차별적으로 자행함으로써 가장 추하고 더러운 전쟁이었다는 오명도 함께 뒤집어쓰게 되었다. 같은 민족의 소행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잔혹한 인명살상 행위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저질러졌던 것이다

p409 뼛속까지 친일파였던 박정희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로 이를 해결하려 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동북아시아에서 공고한 반공 블록을 구축하려 한 미국의 강력한 요구는 국교 정상화를 압박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p461 전쟁 개시를 결정했으며 전쟁의 총책임자였던 김일성은 숙청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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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하늘 - 세계 최고 과학 국가를 만든 세종의 천문 프로젝트
정성희 지음 / 사우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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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의 하늘

 : 정성희

 : 사우

 : 2021/07/27 - 2021/08/03


세종이란 분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조선이란 나라의 정통성 확보가 중요했다곤 하지만 천문에 대해서 이렇게 방대하고 자세하게 공부하고 지시해서 우리나라의 천문학을 여러 단계 올린다.

이 책을 읽으면 이런 내용을 알게 된다. 

한국사시간에 이름만 외웠던 많은 천문 도구들 혼천의나 양부일구를 왜 만들었으며 어떻게 설치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알려준다. 

천문을 기록하기 위해 전국 팔도에 별을 관찰할 직원들을 보내고 언제 별들이 출현하는지에 대해 알려준다. 

이순지라는 천재 수학자를 통해 칠정산내외편이라는 조선에 맞는 달력을 만든다. 

제대로 된 천문도구를 만들기 위해 장영실을 1년동안 명나라에 유학을 보내 원나라때 만들어진 천문도구를 관찰하게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나라의 천문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심지어 지금은 기술이 부족하고 연구할만한 사람이 없으나 미래세대를 위해 내용을 잘 관찰하고 잘 기록해놓으라고 지시하기까지 한다. 

지도자를 잘 만나니 천재들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고 이는 조선의 과학기술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 이후 꽉 막힌 성리학자들에 의해 조선전기때 개발되고 발전한 과학은 모두 사장된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세종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p8 세종은 명이 아닌 조선에 맞는 역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추진한 것이 간의대 건설과 칠정산내외편으로 대표되는 천문 프로젝트였다

p22 이성계는 천문관서인 서운관의 관원에게 고구려 천문도를 돌에다 새기게 했다. 천상열차분야진도라 불리는 천문도가 탄생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p26 태조 이성계가 고구려 천문도를 입수한 뒤에 가장 먼저 찾은 이가 류방택이다. 천문도가 세월이 오래되어 그 도수가 차이가 나므로 이를 새로 측정하여 수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태조의 삼고초려로 류방택은 천상열차분야지도 제작에 참여하였다

p28 천문도에서 중성은 매우 중요하다. 중성이란 해가 질 때와 뜰 때 하늘 정남에 보이는 별을 말한다. 하늘 정남쪽을 다른 말로 남쪽 하늘 자오선 위에 위치한다고 하는데, 이를 천문학에서 남중이라 한다. 따라서 중성이란 남중하는 별이라는 뜻이다

p30 가로 122.8 센티미터, 세로 200.9 센티미터의 돌에 새겨진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현재 경복궁 내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에 가면 볼 수가 있다

p34 태조 석각본은 1970년대 홍릉에 위치한 세종대왕기념관 과학전시실 진열장에 보존되기까지 약 10년간 창경원 땅바닥에서 벤치 취급을 받았다

p42 과거 그리스 천문학자 히파르코스가 서기전 130년경에 황도상의 별자리를 12등분한 것과 오늘날 천체의 실질적인 위치는 다르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이어져 온 과거의 별자리를 이용하여 여전히 점을 보고있다

p48 조선 태조 4년에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소주천문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석각 천문도이다

p55 태백성 외에도 새벽에 동쪽에서 보인다고 하여 계명성 혹은 샛별이라고도 불렸다. 저녁에 보일 때는 장경성 혹은 우리말로 개밥바라기별이라 했다

p62 에밀레 종처럼 사찰에서 치는 종이 중생을 개우치는 방편이었다면, 국가에서 치는 종은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용도였다

p82 태종은 누구보다 냉철한 인물이었지만, 자신이 저지른 과오 때문에 하늘의 재이현상에 민감했고, 그럴 때마다 두려워하며 근신하였다

p93 신하들이 열심히 일하는지 안하는지 몰래 지켜보는 일은 세종의 전대특허였다. 세종은 몰래 첨성대에 행차하여 천문관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p99 노인성은 백두산과 설한점에서는 관측되지 않는 별이었지만, 제주도에서는 특정 시기에 볼 수 있는 별이었다. 윤사응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종은 뛸 듯이 기뻤다

p114 세조 쿠빌라이는 곽수경의 말대로 14명의 천문가를 전국에 파견하였다. 당시 세조 쿠빌라이가 파견한 천문가 중 한 사람은 고려까지 왔다. 원나라 천문가는 당시 고려의 북극출지(북극고도)를 관측하여 38도 소라는 관측치를 얻었다.

p114 곽수경이 이룩한 찬란한 업적 중의 최고봉은 수시력이라는 역법을 만든 것이었다.

p120 책력과 천문의 법은 쉽사리 자세히 알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다시 계산법을 연구하여 초안을 작성해서 장래에 이를 잘 아는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리라

p133 장영실 일행이 보고 온 것은 1279년 원나라 천문학자 곽수경이 제작한 천문기기였다. 곽수경의 천문대인 사천대는 13세기 원나라 수도 북경에 세워진 세계 최대의 천문대였다. 당시 사천대는 현재 북경 건국문 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p154 이천은 학문이 깊지는 않았으나 사물을 깊이 헤아리고 궁리하여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p169 조선시대 천문은 음양학, 수학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천문관서인 서운관이나 관상감은 천문은 기본이고 음양학과 풍수도 다루는 곳이었다.

p189 현재 만 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자격루는 세종 대에 만든 장영실의 자격루가 아니라 중종 대에 다시 만든 자격루이다.

p224 국립중앙박물관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해시계 잔편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해시계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졌으면, 현재는 일부분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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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 문명과 문명의 대화, 개정판 살아있는 휴머니스트 교과서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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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1

 : 전국역사교사모임

 : 휴머니스트

 : 2021/07/20 - 2021/07/31


부럽다.

내가 학교다닐 때는 이런 종류의 책이 없었다. 오직 교과서만 세계사를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였다. 

요즘엔 정말 다양하게 세계사를 공부할 수 있는 책들이 많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쓴 책이라서 그런지 깊이가 있지는 않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중간중간 여성의 지위와 처한 환경등에 대한 짧은 토막상식등이 있어 세계사에서 많이 나타나지 않은 여성들에 대한 내용도 배울 수 있다. 

나름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세계사는 분량이 적을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아는 내용이 적다보니 당연한 결과다.

새로운 유적이 발굴되고 이론이 소개되면서 세계사는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다.

역사를 알아간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p32 라에톨리 발자국 1978년 인류학자인 리키 부부가 남아프리카의 올두바이 계곡, 라에톨리라는 곳에서 두 발로 걸어다닌 원시 인류의 발자국을 발견하였다

p59 이 넓은 제국을 다스리기 위하여 다리우스 1세는 여러 제도를 시행하였다. 우선 전국을 20여 개의 속주로 나누어 총독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왕의 귀, 왕의 눈으로 불린 감찰관을 보내 총독들의 정치를 감시하였다

p61 페르시아는 여러 민족의 종교를 인정해 주었지만, 자신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다

p81 기원전 221년, 여러 국가로 나뉘어 치열하게 경쟁하던 중국은 법가 사상을 바탕으로 국가 체제를 정비한 진에 의하여 통일되었다

p83 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가 사상을 국가 통치의 원리로 삼았다

p95 사산 왕조는 페르시아 제국의 부흥을 외치며 서쪽으로는 로마 제국, 동쪽으로는 쿠샨 왕조와 대립하였다. 샤푸르 1세는 인더스강까지 쳐들어가 북인도의 쿠샨 왕조를 눌렀고, 로마와도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p102 마지막 정통 칼리프 알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시아파를 만들고 우마이야 왕종의 정통성을 부정하였다

p104 아바스 왕조가 이슬람 세계를 모두 다스린 시기는 거의 없었다. 이베리아반도에는 살아남은 우마이야의 왕자 라흐만 1세가 후우마이야 왕조를 세웠고, 시아파는 북아프리카에 파티마 왕조를 세워 독립하였다

p107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가 바로 바그다드였다. 바그다드의 시장에서는 중국의 자기와 비단, 종이, 먹, 인도에서 온 향신료와 염료도 구할 수 있었다. 또 중앙아시아에서 온 루비와 유리,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온 모피와 사냥용 매, 아프리카에서 온 상아와 황금도 구할 수 있었다

p109 이슬람 의학은 17세기까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달하였다. 특이 이븐 시나는 이슬람 의학을 상징하는 인물로 근대 유럽에서까지 의상의 왕으로 불렸다

p133 1095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 클레르몽,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새로이 이슬람 세계의 주인이 된 셀주크 튀르크족을 성지 예루살렘에서 몰아내자고 호소하였다. 그의 연설은 이내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라는 사람들의 환호에 파묻혔다

p238 오스만 제국은 세 대륙, 20개 민족, 6,000만 명의 인구를 거느리며, 이슬람의 정신으로 페르시아의 전통과 튀르크의 기질, 아라비아의 솜씨를 버무려 거대한 문화를 발달시켰다

p260 유카탄반도에서 엘살바도르에 이르는 남쪽 지역에서는 정연한 문자 체계를 만들고 종교적인 관심에서 고도의 천문학과 수학을 발전시켰던 마야 문명이, 북쪽에 위치한 멕시코 중부 고원에서는 대도시 테오티우아칸등이 있었다.

p276 눈부신 산업 혁명의 종자돈은 바로 대서양을 수놓은 아프리카 흑인들의 희생 위에서 쌓인 것이었다

p298 신과 교회의 권위, 절대 왕권의 억압이라는 답답한 사회 현실에 분노한 유럽의 지식인들은 중국의 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프랑스의 유명한 사상가 볼테르 같은 지식인들의 눈에는 공자와 유교의 도덕 정치가 목마르게 찾던 이상적인 정치 철학으로 보였다

p313 우리는 이보다 훨씬 전부터 다른 세계와 만나왔다. 8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유행한 귀족의 장식품이 이슬람의 바그다드와 당의 장안을 거쳐 신라의 금성으로 전해지는 데에는 6개월이면 충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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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도시, 두번째 예술 - 국적과 국경을 뛰어넘은 어느 사회학자의 예술편력기, 2020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노명우 지음 / 북인더갭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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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번째 도시 두번째 예술

 : 노명우

 : 북인더갭

 : 2021/07/21 - 2021/07/27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유럽을 이렇게 느낄 수도 있구나 하는 책..

관광지로 느끼는 도시가 아니라 그 도시의 맨살을 보기 위해서 깊숙히 들어가버린 느낌..

그래서 이미 가본 도시들이지만 낯설게 느껴진다.

저자의 사는 모습을 보면 약간 주변인 같은 느낌이 든다. (나만 그렇게 느끼나?)

책을 읽다보면 주변인이 화려한 도시를 보며 느끼는 낯섦과 소외를 기록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런 느낌 좋다..

나도 이렇게 살아봤으면... 


p19 한때 유학생이었던 사람은 귀국하여 학자라는 지위를 얻고 난 후에 자신의 유학시절을 낭만적 색채로 채색하고 자신을 영웅화하는 경향이 있다.

p41 별도의 방에 특별 전시되고 있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자랑거리 '반가사유상'처럼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자연사박물관의 전시동선에서 살짝 어긋난 방에 모셔져 있다.

p46 마리아는 아버지가 동굴 발굴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동굴의 이곳저곳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마리아가 소리쳤다. "아빠! 여기봐! 소가 있어" 1879년의 호모 사피엔스는 인류의 조상이 남긴 흔적과 드디어 조우했다.

p61 새로운 것이 발견되었다. '그들'이 여기에 있었음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핸드 프린팅, 이렇게 기원전 3만 7천년의 호모 사피엔스는 1994년의 호모 사피엔스에게 인사했다.

p73 쇼베는 먹을 것을 저장하는 저장고가 아니다. 주술적 목적이든 장식적 목적이든 상관없이, 쇼베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생존이라는 틀을 벗어난 행동이다.

p78 사실 인간의 역사가 그렇다. 인간은 인간을 그리기 전에,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전에, 인간성을 형상화하기 전에 집요하고 끈질기게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신 그리고 신성을 그렸다.

p96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상식과 충돌했다. 황제를 신이라고 생각했던 로마제국의 관점에서, 황제가 아닌 신을 하느님이라고 떠받드는 로마제국의 관점에서, 황제가 아닌 신을 하느님이라고 떠받드는 기독교는 이단과 다름없었다

p104 그의 권력은 앱스 근처에 자신의 모자이크를 남기고 자신의 무덤을 앱스 밑에 두면 혹시라도 구원의 가능성이 좀더 커지지 않을까라는 기대에 국한된다. 인간이 제 아무리 권력을 가져봐야 그 권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딱 거기까지다

p108 마우솔레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방문객은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다. 마우솔레움의 모자이크를 구성하는 주요 색을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

p110 권력이 있다고 죽음이 인간을 비껴가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유한성 앞에서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 단지 권력이 있음과 없음에 따라 죽음에 대응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권력자는 권력을 이용하여 죽음이라는 유한성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p131 피렌체에 오는 사람은 피렌체가 가장 화려했던 순간을 보기 위해 여기에 온다. 현재의 관광도시 피렌체는 15세기의 피렌체를 판매한다

p150 피렌체의 21개 길드가 오르산미켈레의 파사드를 각 길드 수호성인의 조각으로 장식하기 시작했다

p160 슈퍼마켓에서 산 맛없는 빵에 잼을 발라서 끼니를 때웠고, 피곤해도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젊은이는 그래도 추해 보이지 않는다. 때로 길바닥에 주저앉아 빵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젊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p172 할아버지 코지모는 예술을 위해 돈을 제공하는 사람이었다면 손자 로렌초는 예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다

p189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브람스는 자신의 고향이 아니라 빈을 선택했다. 빈은 그래서 특별하다.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브람스가 선택한 도시이기 때문에.

p193 우리는 모차르트를 위대한 음악가, 위대한 천재 혹은 마에스트로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모차르트의 사후 명성일 뿐이다. 모차르트가 살던 당대에 음악가는 궁정에 소속된 수많은 하인의 한 종류로 받아들여졌다.

p214 그의 심층으로 들어가면 물건을 손에 넣고 싶은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순진하고 철이 들지 않은 모차르트가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 귀족과 동등해지고 싶었던 모차르트의 충동을 발견할 수 있다

p220 2시간 이상을 미동도 없이 선 채로 음악을 들어본 적 있는가? 입석 관객들은 그렇게 한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행동이다.

p226 충분히 넉넉한 과거를 만끽했고 현재에서도 어떤 부족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굳이 미래에 기대를 걸 필요가 없다

p236 빈은 그를 지휘자로서만 인정했다. 말러는 작곡가로서는 인정받지 못했다

p243 탐미는 탐욕보다는 교양적 행동으로 보이나, 모든 탐미가 탐욕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다. 차라리 탐욕은 때로 생존을 위한 인간 본성이라고 정당화될 수도 있지만, 이유없는 탐미는 탐욕보다 때로는 더 위선적이고 속물적이다

p246 이 건물은 빈에 충격을 주었다. 호프부르크 앞에 이렇게 장식이 완전히 결여된, 오로지 비율에 의한 조화만을 미적 요소로 간직한 건물이 들어선 것 자체가 스캔들이었다.

p249 크라우스는 작가였고 쇤베르크는 음악가였지만 그들은 전통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충동을 공유했다. 장식을 거부했던 아돌프 로스 역시 크라우스의 영향을 받았기에 그 세 명의 인물은 각자 활동 분야는 달랐지만 분리를 지향하는 빈의 예술가 정신을 상징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p254 모차르트를 발견하기 위해 빈에 왔지만, 빈을 떠날 때는 쇤베르크와 함께 떠난다

p264 유럽의 모든 궁정이 부러워하며 닮고 싶어하는 베르사유 궁전, 불안과 근심을 피해 지은 베르사유 궁전, 그 궁전을 이제 루이 14세는 허수아비 왕으로 살아왔던 어린 시절, 마자랭과 어머니의 관계를 수군댔던 궁정귀족에게 왕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왕의 위엄을 전신하는 쇼케이스로 삼고자 했다

p267 쥐소코르(정장 외투) 칙허장은 루이 14세의 발명품 중 하나였다. 그는 1661년 12월 23일, 그 다음해에 이 옷을 선물 받을 사람의 명단을 발표했다. 고작 40명뿐이었다. 리미티드 에디션은 예나 지금이나 탐심을 불러일으킨다. 귀족은 서로 이 옷을 손에 넣고 싶어했다

p273 파리는 물질적 도시가 아니라, 환각이 공간화된 도시이다. "황제와 장관들은 파리를 프랑스의 수도만이 아니라 세계의 수도로 만들기를 원했다"

p275 모두가 눈요기라는 보들레르의 탄식은 짧지만 가장 정확한 제2제정기 파리에 대한 묘사이다. 파리는 제2제정기 동안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워졌다

p280 파사주가 몰락할 즈음 파리 곳곳에 백화점이 솟아올랐다. 1852년에 르 봉 마르쉐가 문을 연 이후, 루브르 백화점이 1855년에 문을 열었다.

p295 카페에는 제2제정기의 경제적 번영에서 밀려난 고단한 사람들이 모인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카페에 들러 초록빛 요정이라 불렸던 압생트를 한잔 마시는 것이 그들 삶의 최대의 위안이다.

p298 속물 부르주아는 시간을 아끼지만 댄디는 시간을 탕진한다. 댄디의 최대 적은 부르주아다. 댄디는 자신을 부르주아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p300 그때는 몰랐다. 라탱지구가 보헤미안의 거리인 줄. 어찌보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제격의 장소를 정했던 것이다. 그때는 막연하게 보헤미안적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젠 닮고 싶은 작가들의 흔적에서 뭔가 자극을 얻고자 라탱지구를 찾는다

p318 파리는 제2제정기를 관광객에게 판매한다. 관광객이 기대하는 파리는 그렇다. 제2제정기 때의 그 소란함은 사라졌다.

p326 사람들은 말했다. 베를린은 독일의 도시가 아니라, 베를린일 뿐이라고

p330 베를린에선 가장 번성했던 순간과 가장 야만적이었던 순간이 일치한다. 그것이 베를린만의 유일함이다. 그래서 베를린은 파리처럼 자신의 유일함을 대놓고 자랑하지 못한다

p338 그는 시민들이 정치 지도자에게 열광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자신의 예술체험으로부터 터득하고 있었다.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 의해, 논리의 힘이 아니라 열광이라는 경험에 의해 정치에 몰입할 수 있음을 알아챈 것이다

p346 아름다운 대상을 아름답게 묘사하면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것을 아름답게 포장하면 사실을 미화한 것이다

p353 어느 나라에서도 없었던 가히 기이한 광경이다. 정당의 전당대회에, 그것도 나치당의 전당대회 전야제에 바그너의 오페라 공연이란!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의 한스 작스처럼 나치당은 진정한 독일 정신은 예술혼에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일까?

p363 베를린이 완성되는 날 파리는 그림자로 변할 거야. 그러니 우리가 파리를 부술 필요가 있겠나?

p370 베를린에서 히틀러가 정치를 미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사용했다면, 모스크바의 스탈린은 소비에트의 괴벨스 격인 안드레이 즈다노프를 내세워 자본주의적 서방에 직접적으로 맞대항하는 사회주의적 예술을 요구했다.

p378 1942년 8월 9일 레닌그라드 오케스트라는 유흥이나 교양의 표식으로의 교향곡이 아니라 히틀러가 야만적인 전쟁을 벌일 때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았던 레닌그라드를 소리로 표현했다. 교향곡 7번 연주는 인간임을 증명하는 행위였다

p390 군터 템니히는 유대인 희생자들이 살았던 집 앞의 보도에 발부리 아래의 돌을 설치한다. 그 명패에는 여기에 살앗다라는 단순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텍스트가 새겨져있다. 그는 나치 희생자의 이름을 그가 살았던 집 앞에 새김으로써 구체적인 얼굴을 부여한다. 베를린에만 2020년 현재 8,689개의 발부리 아래의 돌이 있다.

p400 이 투구는 1875년 그리스 올리피아 제우스 신전 발굴 도중 발견되었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우승자에게 수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정작 마라톤 우승자는 이런 선물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당시 우승자에게 전달되지 않은 이 투구는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가 1986년 베를린 올림픽 개최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손기정에게 전달되었다.

p403 주변 산은 높고 농지는 보이지 않고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외진 곳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곧 생각을 정정했다. 현대 도시인의 관점으로 평가하자면 가치 없는 오지로 보이겠지만, 반구대에 암각화를 만든 그들이 살던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이곳은 오지가 아니라 풍요로운 땅이었을 것이다

p408 서소문 역사공원의 자히에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 있고 이곳에도 각종 예술작품이 있지만 공원 한가운데 벤치에 설치되어 있는 티모시 슈말츠의 청동 주조 작품 노숙자 예수야말로 칠패로에 가장 적합한 예술작품이 아닐까 싶다

p415 국경은 예술-인간에게는 무의미한 경계다. 예술가는 가장 선구적인 코스모폴리탄이다

p419 어느 도시든 그 도시가 가장 화려했던 순간과 개방적이었던 순간은 일치한다. 백탑 주변에 조선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견문한 사람들이 모여 수표교와 광교에서 이국의 바람을 남몰래 느낄 수 있었던 18세기 서울의 어느 달밤은 랑슈트라세로부터 분리를 주장했던 분리파의 공간이기도 했다

p423 한양의 풍속화가가 연달아 등장했을 때 파리의 댄디에 해당되는 예술가의 친구는 없었지만, 천만다행으로 조금 늦게나마 예술가의 친구 전형필이 등장했다

p425 수많은 이들이 남산 1호터널을 오갔지만, 바로 터널 부근에 고문이 이뤄지던 곳이 있었음은 아무도 몰랐다. 도시는 그렇다. 바로 옆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나도 감쪽같이 감출 수 있는게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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