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의 신 - 평화로운 부활동 시작 방법
키자키 나나에 지음, 미즈노 미나미 그림, 김동주 옮김 / ㈜소미미디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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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농구부원들의 순수한 청춘 드라마! 농구의 신

 

키자키 나나에의 <농구의 신-평화로운 부활동 시작방법>은 고등학교 농구부 이야기이다.

중학교 시절 너무 열심히 농구를 한 탓에 외톨이가 되었던 이쿠.

그는 고등학교에서는 더이상 부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아는 사람이 없는 안죠 고등학교로 진학한다.

그러나 그를 발견한 농구부 부장 쥰야의 끊임없는 권유에 "농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깨닫고 농구부에 들어간다.

부원들에게 각자의 사정이 있었던, 약소 농구부지만 그들의 목표는 전국대회 출전.

약소 고등학교 농구부의 청춘드라마가 이 소설의 내용이다.

 

"농구를 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더라도 나는 지금 있는 멤버가 베스트라고 생각해. 올해야말로 분명 현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어." (p.179)

 

학원물을 좋아한다. 학창시절 동아리 활동하는 내용을 계속 읽는 건, 아쉬움을 흩어내기 위해서일까?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대리만족하면서.

스포츠 만화를 나름 읽어왔다. 그 영향인지 <농구의 신>의 소재나 캐릭터 설정에서 익숙하게 느껴진 부분이 있었다.

주인공 이쿠와 관련해서 떠오른 캐릭터로 배구 만화 <하이큐!!>에서의 카게야마가 있었다.

그 역시 배구밖에 모르는 바보였고, 끝없는 향상심을 자신 뿐 아니라 동료들에게도 요구하다 외톨이가 되어버렸다.

중학교 시절 다닌 학교가 강호교의 부속 중학교여서 그대로 진학할 수 있는 형태였으나 동료들과의 불화로 다른 학교에 진학한 것도 비슷한 점이다.

다만 카게야마는 배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쿠와 다른 점이다.

이후 새로운 동료를 만나고, 새 팀에서 자신의 옛 동료와 연습경기를 하는 내용도 둘이 모두 겪은 일이다.

이런 내용을 보면 스포츠에서는 정말 '맞는 팀'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소설이나 만화 속 인물 뿐 아니라 실제로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으니까.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단체로 하는 스포츠는 자신의 능력만큼이나 팀원들과의 합이 중요하다는 걸 생각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사람들과의 '관계'와 정신적인 성장에 대해서도 담아내고 있었다. 타인을 돌아보지 않았던 면이 있었던 이쿠의 성장. 특히 이쿠와 중학교 시절 동료였던 코마이와의 대화가 그런 부분들을 떠오르게 했다.

 

"너는 언제나 이래…!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겨도 상관없다는 듯이 놔버리고…, 그런데 주변에서 금방 똑같은 것을 갖다줘. 진심으로 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 그러니까 그렇게 간단히 코토가노를 버렸던 거야!" (p.161)

 

정면으로 부딪쳐오는 적의가 오히려 시원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중학생 때는 이런 식이 아니었다.

코마이는 항상 이쿠를 무시했고, 한숨을 내쉬었고, 눈을 마주치지 ㅇ낳고 고개를 돌렸다.

(같은 포지션을 두고 경쟁했으니까….)

그냥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도 다른 유니폼을 입고 서로 맞서야만 가능했던 걸까.

질려버릴 정도로 서툴다. 자신도. 코마이도. (p.258)

 

스포츠물을 읽을 때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농구의 신>에서도 고교 농구부원들의 풋풋하고 순수한 열정이 느껴진다.

오로지 목표를 위해 곧게 나아가는 모습이 마음을 진하게 두드린다.

'농구'에 그정도까지 푹 빠져들어 다른 건 돌아보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이 멋지다.

그건 주인공 학교 농구부원만이 아니다. 주요 라이벌로 나온 코토가노 고등학교 측도 그랬다.

나쁜 수단을 쓰는 사악한 악역이 아니라, 라이벌이다. 결국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펼치려는 것.

<농구의 신>의 결말은 열린 결말이다. 현 대회를 하나하나 돌파하고, 우승후보 코토가노 고등학교와의 마지막 승부만을 남겨놓은 시점에서 끝난다.

한 권이라는 책의 분량에 다소 아쉬움이 있었다.

하나하나 깊게 다루기엔 부족한 양이니까. 부원들의 개인사를 좀더 파고들수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기 장면도 좀더 많이 보고 싶었다. 농구 만화라도 찾아 봐야겠다.

여담으로 책표지의 일러스트도 마음에 들었다. 주인공 이쿠인 듯한 남학생이 농구 공을 잡고 있는 모습이 멋지다.

일러스트 작가인 미즈노 미나미의 <무지개빛 데이즈>도 알고 있던 작품이라 반가운 마음이다.

 

-소미북스 라이트 서포터즈 1기 자격으로 쓴 서평이지만 개인적인 생각만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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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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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는 한 가지 모습만 있는 게 아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

어느 역사책에서 이런 내용을 본 기억이 난다. 나라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통치자들은 외부에 전쟁을 일으키곤 했다고. 그건 특정 한 나라만의 일이 아니라, 많은 나라가 그러했다. '우리' 안에 없는 존재들에 대한 철저한 배척.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제국은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졸 대령'으로 대표되는 세력이, 변경 도시 밖에 사는 토착민들을 '야만인'으로 규정하며 그들을 잡아와 고문한다.

화자인 변경도시의 치안판사 '나'는 이 상황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잡혀온 죄수들은 제국이 묘사하는 '잔인한 야만인'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만 나서서 상황을 바꾸려 하진 않는다. 졸 대령 일행이 떠난 뒤에야 그들을 나름대로 도우려 한다. 그들이 돌아가고 남겨진 야만인 여인을 발견하게 되어 치료하고 관계를 맺는다.

이렇게 보면 치안판사는 나름 도덕적인 인물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도 제국주의자에 속하는 건 마찬가지다. 나서서 불의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고문하는 이들과 자신은 '다르다'고 끊임없이 환기시키려 한다. 상처 입은 야만인 여인을 치료하며 어떻게 다쳤는지를 이야기해보라니. 그걸 떠올리는 것 자체가 고통일텐데. 그건 그가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녀는 그가 처음 잡혀온 야만인들을 방관하던 걸 기억하고 있다. 폭력을 방관하는 것 역시 폭력이 아닌가.

그가 여인을 부족에게 데려가기로 한 것도 아마 자신은 폭력적인 이들과 다르다고 증명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인이 자신을 떠나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여인은 거절한다. 자유를 택한다. 그는 애써 부정하려 하겠지만, 여인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역시 제국의 입장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는 걸.

치안판사가 야만인 여인을 대하는 방식은 제국주의의 또다른 방식이기도 하다. 야만인들을 자신들의 문명 안에 끌어들이려 하는 것. 그들을 교육시켜 더 낫게 변화시키고 있다고 믿는 것. 자신들만의 방식이 옳다고 믿는 것.

뒤의 내용이 더 있다. 돌아온 치안 판사는 야만인과 내통했다는 취급을 받아 고문을 받아 몸이 상한다. 졸 대령 일행은 야만인 정벌을 위해 떠나지만, 그들의 정벌은 실패한다. 변경도시는 황폐해지고, 많은 이들이 떠나가고 몇몇만 남아 살아간다.

거짓된 적, 위협을 야만인에게 씌워 체제를 유지하려 했던 제국. 그것은 결국 야만인의 반격을 받고 산산이 부서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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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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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가 서술한 여인의 삶

언제부턴가 장편보다 단편 읽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앨리스 먼로의 책이 좋았다. 주로 단편을 쓰는 작가니까. 거기에 노벨 문학상 수상이라는 후광까지 드리워졌으니.

<거지 소녀>는 다른 작품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단편 '연작'이라는 점. 책에 실린 10편의 단편의 주인공은 모두 '로즈'라는 여성으로 동일하다.

단편들은 로즈의 삶을 차근차근 따라가게 한다. 연결성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새로운 단편을 읽으면서 이전 단편 속 로즈를 생각했다.

단편집을 장편처럼 읽었던 것 같다. 띄엄띄엄 나누어 단편으로 읽으면 또 다른 느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에야 들었다.

<거지 소녀>의 단편들은 가난한 환경이었던 고향 핸래티에서 자란 로즈가 그곳을 떠나 이곳 저곳을 떠돌며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로즈가 경험하는 다양한 관계들이 있었다.

책 소개에 있었던 '거지 소녀' 단편 이야기 때문인지, 처음에는 로즈가 만난 남자들과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읽었었다.

그녀의 아버지, 그녀를 '거지 소녀'라고 부르며 그녀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패트릭. 친구의 남편이었던 클리퍼드, 방송 일을 하면서 알게 되었던 톰, 갑작스레 소식이 끊겨버렸던 사이먼. 하지만 그들 모두 로즈가 품은 희망을 배신하고 만다. 그나마 그런 관계가 아니었던 건 어릴적 동창이었던 랠프 정도다.

단편을 읽다보면 이들만큼이나 로즈가 만난 각양각색의 '여성'들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그녀들과 로즈의 관계에 집중하게 되었다.

로즈의 새어머니 플로. 그녀는 로즈에게 자신이 겪었다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로즈는 자라면서 점점 그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플로는 그런 그녀가 겪을 수 있을 위험들을 경고한다.

 

과거, 즉 플로의 이야기에 나오는 수상쩍고 멜로드라마 같은 과거는 현재와 크게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적어도 로즈에게는 그랬다. 현재의 사람들을 과거에 끼워맞출 수가 없었다. (책속에서)

 

플로는 로즈에게 있어서 벗어나고 싶은 공간을 의미하는 존재이면서도, 일종의 애증 섞인 관계였다. 부모와 자녀들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로즈가 사춘기에 동경하던 상급생 소녀 코라. 우연히 로즈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로즈는 그 사건을 통해 그녀를 동경하게 된다. 코라를 통해 로즈는 '애정'의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그 감정은 결국 시간이 흘러 바래졌지만.

시간이 흘러 대학에 들어간 로즈는 헨쇼 박사를 만난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 장래가 기대되는 여성을 머물게 하고 지원해주는 나이 든 독신 여성이다. 헨쇼 박사는 그런 여학생들을 지원해 독립할 수 있을 직업을 갖게 하려고 하는 것 같다. 어쩌면 로즈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로즈가 자란 환경이, 헨쇼 박사가 겪어온 세상과 거리감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결혼하면서 중산층의 삶을 누리게 된 로즈는 조산원에서 조슬린을 만나 친분을 나누게 된다. 이 친분은 로즈가 또다른 계층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계기가 된다. 

로즈가 방송 일을 시작하면서 친해진 도러시는 그녀가 만나는 남자에 대해 경고하며 그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이 시기에 로즈는 딸 애나와 잠시 함께 지내는 시간도 가지지만, 결국 애나는 전남편 패트릭에게 돌아가게 된다.

로즈가 살던 집 근처의 상점 여자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았지만, 로즈와 나름의 유대감 비슷한 것이 있었다. 로즈가 산 물건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그녀의 생활에 대한 부러움 같은 것들에서 비롯되는 것.

로즈가 어릴 적 선생님이었던 미스 해티도 있었다. 그녀는 어린 로즈가 시를 베껴 써오라는 숙제를 해오지 않자 그날 남아서 시를 베껴 쓰라고 한다. 그녀는 이야기한다. "네가 시를 잘 외울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해선 안 돼.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책속에서)

 

결국 그 말대로 되어버렸다. 로즈는 똑똑했지만 객관적으로 특별히 뛰어난 삶을 살았다고 보기엔 애매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대부분의 삶이다. 살아가다 보면 나만 겪는 감정, 나만 겪는 일 같은 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특별함이라는 건 신기루 같은 것이다. 로즈의 삶을 차근차근 따라가는 <거지 소녀>의 마지막 단편에 이 대사가 있어서 더 강렬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처럼 <거지 소녀>는 주인공인 로즈 뿐 아니라 다양한 여성 인물들의 삶도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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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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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뒤에 숨은 소설, 창백한 불꽃

 

그러니까 이 작품을 뭐라고 봐야할까.

일단 형태는 '시집'이다. 작품 자체가 온전한 책 한 권이다.

머리말에, 본문인 4편으로 된 시 '창백한 불꽃', 이어지는 주석, 마지막으로 색인까지.

책을 읽기 전 훑어보며 눈에 들어온 주석과 색인, 작품에 더한 것이라 생각해서 단테의 <신곡>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더니...

아니었다. 그 모든 게 저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창작이었다.

이 독특한 형태만으로도 '새로운 독서 경험'을 줄 수 있는 책이지만, <창백한 불꽃>은 파고들수록 새롭다.

작품 뒤에 실린 해설을 보면, <창백한 불꽃>에 대한 비평은 크게 세 분파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이 소설을 서사구조의 실험으로 보는 경우, 둘째는 캐릭터 설정 배경이나 소재 선택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의 단서를 찾는 경우, 세번째는 죽음에 대한 작가의 태도나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을 중요한 해석 코드로 삼는 경우다. 세 가지 모두 흥미로운 관점이라고 생각했다. 첫번째 관점의 경우는 이 소설을 추리소설로 보는 견해와도 연결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일반적인 탐정 서사가 아니라 살인자가 희생자를 찾아가는 설정으로 도치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창백한 불꽃>은 두 명의 저자가 있다. 동명의 시를 지은 존 셰이드. 나머지 머리말, 주석, 색인을 작성한 찰스 킨보트.

찰스 킨보트가 존 셰이드의 시를 편집해 책으로 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그는 시 '창백한 불꽃'의 첫번째 독자다.

이 점에 주목해서, '독자의 해석'이라는 관점을 생각하며 읽었다.

킨보트는 주석을 통해 존 셰이드의 시 '창백한 불꽃'이 자신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머나먼 북쪽의 나라 '젬블라'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킨보트가 쓴 주석에는 이 이야기와 함께 도망친 젬블라의 왕을 쫓는 암살자의 이야기, 킨보트가 셰이드와 교류하며 겪은 이야기, 셰이드의 죽은 딸에 관한 이야기, 원고의 처분에 대한 주변의 반응 등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다.

책을 읽는 독자는 주석을 차례대로 읽을 수도 있고, 주제별로 읽을 수도 있으며, 때로는 주석에서 참조하라는 대로 따라가며 읽을 수도 있다.

<창백한 불꽃>은 이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읽을 수 있으며, 그만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텍스트이다.

이것은 작중의 시도 마찬가지다. 시를 정해진 해석대로 읽으라는 법은 없다. 텍스트는 같아도 독자의 경험에 따라, 성향에 따라 해석하는 것은 무수히 많아진다.

킨보트는 편집자로서, 첫번째 독자로서 '자신의 의도'에 따라 존 셰이드의 시를 해석하고, 주석을 달았다.

그가 주석에서 언급하는 다른 인물들의 반응을 보면, 그리 신뢰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킨보트의 주석을 믿지 않는다. 그의 해석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그가 쏟아낸 이야기 뒤편의 진실을 찾아내려 한다.

그런데 그게 정말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나? 거기에는 지금 이 작품을 읽고 있는 나의 의도가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는게 아닌가? 글의 일부만으로 해석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아, 그렇다. 그 시의 최종 텍스트는 온전히 그의 것이 맞다. (p.105)

 

킨보트가 말하는 것처럼, 최종 텍스트는 온전히 저자의 것이지만, 독자들이 그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게 되면 온전히 저자만의 것이 되기 어렵다. 저자조차 몰랐던 의미를 발견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킨보트가 시 '창백한 불꽃'에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킨보트의 글에 대해 취하던 태도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창백한 불꽃>을 읽으며 계속 머리가 뒤죽박죽되는 것 같았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층이 차곡차곡 쌓여 있어서, 하나하나 초점을 두고 반복해 읽어야 할 책이다.

주석 하나에 담긴 대사 하나에서도 의미를 찾는다면 찾을 수 있을 그런 책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이란 난해한 미완성 시에 붙인 주석 같은 것.
- P89

"친애하는 존." 나는 다정하게 그리고 황급히 대답했다. "사소한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일단 당신이 시로 변형하면, 사료는 정말 진실이 될 것이고, 그 사람들도 정말 살아 있는 게 될테니까요. 시인에 의해 정화된 진실은 아무런 고통도,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않아요. 진정한 예술은 거짓된 명예를 넘어서지요."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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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코나
아키타 요시노부 지음, 마타요시 그림, 김동주 옮김 / ㈜소미미디어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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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특별한 체질을 가진 소녀와 세계, 하루코나

 

책을 두른 띠지를 보면, <하루코나>는 1000만 부 판매 기록을 세운 <마술사 오펜>의 저자 아키타 요시노부가 쓴 책이라고 한다.

<마술사 오펜>이 어떤 책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 사실이 독서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표지 그림은 약간 수채화 느낌이 있는 청순한 소녀의 이미지이다.

SF소설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생각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서 어떤 내용일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루코나>의 여주인공은 '하루코'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였다.

하루코는 특별한 체질을 갖고 있는데, 그건 '대항 꽃가루 체질'이라는 것이다.

그녀에게 바깥 공기는 유독물질이기 때문에, 외출 할 때는 항상 조금의 틈새도 허용하지 않는 방호수트를 입어야 한다.

당연히 불편하다.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아 따로 통신을 해야 할 정도로 두꺼우니까.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 외출을 하는 것은, 그녀와 같은 '대항 꽃가루 체질자'는 주변의 공기를 정화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거리에 나오면 꽃가루 알러지는 겪을 일이 없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의 외출 여부에 주목하며 바깥 활동을 한다.

꽃가루 알러지를 겪어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맑은 공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일테니 환영할 법 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항 꽃가루 체질자'는 혼자 외출하기 힘들기 때문에 안내인이 붙는데, 자연히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어릴 적 하루코가 옆집으로 이사오면서 그녀의 안내자가 되었다.

 

처음 봤던 그 순간부터 하루코는 아름다웠다. 하루코도 나도 아직 어렸지만, 처음 보자마자 자신들만 이 세계에 없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하루코였다. 이 거리를, 그리고 언젠가 세계를 지배하고 나의 것이 될 하루코였다. (p.13)

 

첫만남을 묘사한 부분. 하루코의 모습은 표지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되지 않을까.

순수한 애정이 느껴지는 묘사였다. 맑고 투명한 감정.

하지만 평범하게 흐르던 일상의 행복을 어지럽히는 일이 발생한다.

공공 개선 기구, 일명 '개선'이라 불리는 단체의 꽃가루 대책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하루코를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소 지나가는 길에 장애물을 놓아 사고가 일어날 뻔 하거나, 하루코와 나를 향해 화살을 쏘는 일이 생겼다.

두 사람이 다니는 학교 근처에서 비난의 말을 쏟아내는 시위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대응이 이뤄지는 것 같지 않다.

급기야 학교 친구들이 나서서 직접적인 대응을 시도하는 사태에 이른다.

 

연애 요소는 잘 모르겠다.

남녀 주인공 사이에 교류의 느낌이 적다고 생각했다.

그건 여주인공이 입은 방호 수트 때문일까?

이 소설이 1인칭 시점이어서인지, 일련의 사태에 대한 하루코의 반응이 무덤덤하게 그려진다고 느꼈다.

감정도 방호 수트 안에 봉인해 버린 것처럼.

그녀의 세계는 오직 방호 수트 안에서만 기능하는 것 같기도 하다. 결말 부분을 보면 이 생각이 더욱 굳건해진다.

이렇게 감정적인 요소가 연약해서, 다른 강렬한 소재에 쉽게 시선을 빼앗기게 된 것 같다.

 

"글쎄다. 알레르기 같은 거야. 분노라는 것은 알레르기야. 화를 내는 놈은 본질을 생각하지 않아. 단순한 병인 거지. 하지만 위독하고 발병하면 벗어날 수 없어." (p.230~231)


하루코를 두고 대립이 커지며 두 세력간에 충돌하는 내용이 나온다.

"없애버려! 없애버려!"라는 대사가 한가득 쏟아진다.

화자는 그 분노 섞인 외침들이 마치 '꽃가루 알레르기'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생각은 온라인을 통해 알게 된 '귀족'이라는 별명을 지닌 인물도 이야기한다.

'알레르기'라는 요소가 '분노'라는 감정과 연결되는 지점이 흥미로웠다.

SF소설이라고 해서 과학적인 요소가 가득 담긴 책을 생각했는데, '인간의 감정'이 가장 중요한 소재가 되는 점이 좋았다.

 

<하루코나>는 하루코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지만, 하루코에 대해 공감하면서 읽기는 어려웠다.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하루코의 감정을 잘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코에게 공감을 하기 어렵다는 점은 그녀와 거리를 두게 만들었고, 책 속에 등장하는 남녀주인공의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보며 약간의 씁쓸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대항 꽃가루 체질자'를 비난하는 인물들이나, 하루코에 대한 위협을 차단하려는 인물들이나 결국 자신들의 관점에서 그녀를 도구적으로 판단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녀가 있기 때문에 자연스런 자연 환경에 피해가 간다는 주장, 그녀가 있어야 꽃가루 알레르기 걱정 없이 쾌적한 바깥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속내. 그들은 하루코의 감정이나 의견을 고려하겠다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을 비판하게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하루코를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씁쓸함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하루코의 방호수트 안 그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건 안내자인 '나' 뿐일 수밖에 없는게 아닐까. 독자를 포함해서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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