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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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가 서술한 여인의 삶

언제부턴가 장편보다 단편 읽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앨리스 먼로의 책이 좋았다. 주로 단편을 쓰는 작가니까. 거기에 노벨 문학상 수상이라는 후광까지 드리워졌으니.

<거지 소녀>는 다른 작품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단편 '연작'이라는 점. 책에 실린 10편의 단편의 주인공은 모두 '로즈'라는 여성으로 동일하다.

단편들은 로즈의 삶을 차근차근 따라가게 한다. 연결성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새로운 단편을 읽으면서 이전 단편 속 로즈를 생각했다.

단편집을 장편처럼 읽었던 것 같다. 띄엄띄엄 나누어 단편으로 읽으면 또 다른 느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에야 들었다.

<거지 소녀>의 단편들은 가난한 환경이었던 고향 핸래티에서 자란 로즈가 그곳을 떠나 이곳 저곳을 떠돌며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로즈가 경험하는 다양한 관계들이 있었다.

책 소개에 있었던 '거지 소녀' 단편 이야기 때문인지, 처음에는 로즈가 만난 남자들과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읽었었다.

그녀의 아버지, 그녀를 '거지 소녀'라고 부르며 그녀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패트릭. 친구의 남편이었던 클리퍼드, 방송 일을 하면서 알게 되었던 톰, 갑작스레 소식이 끊겨버렸던 사이먼. 하지만 그들 모두 로즈가 품은 희망을 배신하고 만다. 그나마 그런 관계가 아니었던 건 어릴적 동창이었던 랠프 정도다.

단편을 읽다보면 이들만큼이나 로즈가 만난 각양각색의 '여성'들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그녀들과 로즈의 관계에 집중하게 되었다.

로즈의 새어머니 플로. 그녀는 로즈에게 자신이 겪었다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로즈는 자라면서 점점 그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플로는 그런 그녀가 겪을 수 있을 위험들을 경고한다.

 

과거, 즉 플로의 이야기에 나오는 수상쩍고 멜로드라마 같은 과거는 현재와 크게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적어도 로즈에게는 그랬다. 현재의 사람들을 과거에 끼워맞출 수가 없었다. (책속에서)

 

플로는 로즈에게 있어서 벗어나고 싶은 공간을 의미하는 존재이면서도, 일종의 애증 섞인 관계였다. 부모와 자녀들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로즈가 사춘기에 동경하던 상급생 소녀 코라. 우연히 로즈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로즈는 그 사건을 통해 그녀를 동경하게 된다. 코라를 통해 로즈는 '애정'의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그 감정은 결국 시간이 흘러 바래졌지만.

시간이 흘러 대학에 들어간 로즈는 헨쇼 박사를 만난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 장래가 기대되는 여성을 머물게 하고 지원해주는 나이 든 독신 여성이다. 헨쇼 박사는 그런 여학생들을 지원해 독립할 수 있을 직업을 갖게 하려고 하는 것 같다. 어쩌면 로즈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로즈가 자란 환경이, 헨쇼 박사가 겪어온 세상과 거리감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결혼하면서 중산층의 삶을 누리게 된 로즈는 조산원에서 조슬린을 만나 친분을 나누게 된다. 이 친분은 로즈가 또다른 계층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계기가 된다. 

로즈가 방송 일을 시작하면서 친해진 도러시는 그녀가 만나는 남자에 대해 경고하며 그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이 시기에 로즈는 딸 애나와 잠시 함께 지내는 시간도 가지지만, 결국 애나는 전남편 패트릭에게 돌아가게 된다.

로즈가 살던 집 근처의 상점 여자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았지만, 로즈와 나름의 유대감 비슷한 것이 있었다. 로즈가 산 물건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그녀의 생활에 대한 부러움 같은 것들에서 비롯되는 것.

로즈가 어릴 적 선생님이었던 미스 해티도 있었다. 그녀는 어린 로즈가 시를 베껴 써오라는 숙제를 해오지 않자 그날 남아서 시를 베껴 쓰라고 한다. 그녀는 이야기한다. "네가 시를 잘 외울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해선 안 돼.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책속에서)

 

결국 그 말대로 되어버렸다. 로즈는 똑똑했지만 객관적으로 특별히 뛰어난 삶을 살았다고 보기엔 애매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대부분의 삶이다. 살아가다 보면 나만 겪는 감정, 나만 겪는 일 같은 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특별함이라는 건 신기루 같은 것이다. 로즈의 삶을 차근차근 따라가는 <거지 소녀>의 마지막 단편에 이 대사가 있어서 더 강렬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처럼 <거지 소녀>는 주인공인 로즈 뿐 아니라 다양한 여성 인물들의 삶도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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